2010.10.06.水. 맑음
슴가가 부풀어 올라 터지는 줄 알았어, 45년 전前의 운동회.
가을 운동회 날에는 실에 꿴 밤을 먹어야 제 맛이 났다. 엿장수와 솜사탕 장수가 아침 일찍부터 교문 주위를 서성대다가 점심시간 무렵이면 슬그머니 운동장 안으로 들어와 아이들의 입맛을 돋우고 다녔다. 우리 반 춘배 아부지는 막걸리를 너무 많이 드시고 오후쯤이면 꼭 누구랑 시비가 붙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저 양반이 또 시작이네.’ 선생님들이 혀를 끌끌 차며 몰려가 싸움을 말려야 했다. 머리에 띠를 매고 푸른 하늘을 향해 쌀이나 콩을 넣은 오자미를 힘차게 던지면 어느 쪽인가에서 함성이 터지며 장대 끝에 걸어놓은 하얀 박이 벌어져 색종이와 테이프가 축복처럼 쏟아져 나왔다. 어른들의 인기 종목은 선생님과 학부형들의 혼성 릴레이와 학부형 대 선생님들의 씨름시합이었다. 우리 엄마는 음식솜씨도 좋으시지만 학교 다니실 때 달리기 선수였기 때문에 항상 릴레이 마지막 주자를 맡으셨다. 머리에 띠를 묶은 엄마가 바통을 손에 쥐고 코너를 돌아 나와 하얀 결승 테이프를 향해 직선주로를 달려가는 모습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자랑스러운 장면 중 하나였다. 아빠는 학부형 대 선생님 씨름 시합에 항상 참가를 하셨다.
뭐니 뭐니 해도 아이들의 인기 종목은 장애물 달리기와 기마전이었다. 특히 사내아이들은 기마전에서 뜨거운 승부욕을 보여주었다. 나는 체격이 큰 편이라 위에 올라타는 싸움꾼은 못하고 대개 대장 말 노릇을 했다. 그해 가을 운동회 때에도 나는 대장 말이었다. 그런데 상대편 대장 말은 나보다 훨씬 더 큰 아이였다. 어깨 위에 싸움꾼을 태우고 시작을 알리는 휘파람소리를 기다리며 전의戰意를 불태우고 있는데 담임선생님께서 옆으로 오시더니 소곤소곤 귓속말을 해주셨다.
“울림아, 상대편 대장 말이 너보다 키가 크니 우리가 좀 불리하구나. 그래도 이기는 방법이 다 있단다. 처음 말끼리 부딪힐 때 고개를 숙이고 머리로 상대편 말 가슴을 힘껏 받아버려라. 말이 힘을 못 쓰면 위에 탄 싸움꾼은 쉽게 무너지거든.”
“예!”
휘파람 소리가 울리자 마주보고 나란히 정렬해 있던 기마대들이 거의 동시에 앞으로 밀려나갔다. 그 복잡한 와중에도 대장 말은 다른 말은 안중에 없고 상대편 대장 말을 찾아가 한판 승부를 벌렸다. 양측 기마대가 달리듯 서로에게 거의 접근했을 때 나는 눈을 꽉 감고 머리를 숙이며 앞을 향해 힘껏 들이받았다. 내 귓가에 퍽~ 하는 소리가 분명 들렸는데 어찌된 셈인지 내 코에 불이 붙은 듯이 아프더니 다리에 힘이 풀리며 휘청거려졌다. 코에서 뭔가 뜨뜻한 것이 흘러내리며 입가를 적시자 찝찝한 맛이 혀끝에 돌았다. 아마 먼저 고개를 숙이며 들어오던 상대방 말의 가슴이 아닌 머리가 내 얼굴에 부딪쳤던 모양이었다. 아래쪽으로 눌려 불리한 채로 어찌어찌 버티는데 코피가 계속 흐르자 화가 치밀었다. 말끼리 목이 서로 교차된 상태에서 몸이 밀착되어 있으니 어찌해볼 뾰족한 방법이 없었지만 궁窮하면 통通한다고 상대방 말 어깨가 내 입에 딱 닿아 있었다. 한 번 더 눈을 딱 감고 그 어깨를 물어 뜯어버렸다. 내 얼굴은 피가 범벅이고 상대방 말은 어깨를 잡고 땅에 뒹굴고 해서 약간 소란스러웠지만 결국 반칙패를 당했다. 그렇지만 돌아서서 담임선생님께는 칭찬을 받았다.
“잘했다, 울림아. 사내 녀석이 성깔이 있어야지.”
제자의 성깔과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용기를 북돋아 주셨던 담임선생님께서는 지금 어느 세상에 계실까? 나는 국민학교 1학년 11반 첫 담임선생님이셨던 심*례 선생님과 6학년 1반 마지막 담임선생님이셨던 강*남선생님을 이름뿐만 아니라 그때 나이와 모습까지 또렸히 기억하고 있다. 내 기억속의 선생님께서는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하나도 변함이 없지만 시간이 기세등등한 기억밖에서의 선생님 모습은 어떻게 달라지셨을까?
운동회라 쓰고 행복의 우편배달부라 읽는다, 45년 후後의 운동회.
국민의례도 하고, 대표선수 선서도 하고, 대장님 훈화까지 들었으니 이제부터 운동회에서 열심히 뛰기만 하면 된다. 오늘 운동회에 6학년 담임선생님을 모셨더라면 돋보기를 쓰고 지팡이를 짚으며 내 옆으로 다가오셔서 아마 이렇게 말씀을 해주셨겠지.
“울림아, 회원 간의 화합을 다지는 친선경기니까 상대 선수를 물어뜯지는 마라. 그렇지만 어떻게든 이기면 백군이 모두 좋아할 것이다.”
“예!”
당포초등학교는 내 기억 속의 국민학교만큼 아담하고 예쁜 학교이다. 특히 학교 주변의 하늘 가장자리에 걸쳐 있는 산등성이 풍경들이 몹시 아름답게 가을하늘을 침범하고 있다. 먼지 하나 피지 않게 약간 젖어 있는 운동장과 바람이 거의 없는데다 날이 흐려서 고운 회색 구름이 가을 햇살을 막아주어 운동회를 치루기에 이상적인 날씨이다. 어른이 되어 하는 운동회라 맥주를 마시고나서 공을 차는 종목과 남녀선수들이 옷을 홀랑 벗어가며 승부를 겨루는 종목이 들어 있을 뿐 기본적으로 그 옛날 국민학교 운동회 원형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보인다. 줄을 뛰어넘고, 타이어를 뺏어들고 달리고, 풍선을 밟아 터트리고, 공을 드리볼 하며 목표물을 돌아오고 하다 보니 점심 식사시간이 된다. 재미있는 시간들은 왜 이렇게 빨리 흘러가는지 모를 일이다.
어떤 일이나 행사를 치르다 보면 화려하고 즐거운 일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있게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를 써주시는 분들이 꼭 있다. 장비를 설치하고 운용을 해가며 매끄러운 진행을 위해서 쉼 없이 분주한 분들, 앞장서서 분위기를 돋으려 목청을 높이고 온 몸으로 봉사하는 분들, 때가 되어 모두의 주린 배를 맛난 음식으로 채워주려고 이고지고 날라 와서 따뜻한 밥과 뜨거운 국에 지글지글 구운 고기와 맛깔난 김치, 밑반찬까지 챙겨 턱 앞까지 마련을 해주시는 분들, 마지막 뒷정리까지 빈틈없이 해내시는 분들, 사실 그분들 덕택에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하루를 만끽하게 된다.
화합을 위한 친선 운동회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승부욕이 대단한 운동회다. 벌써 부상자가 몇 명이나 나왔다는 소문이 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전투 시에는 병사들에게 평소 식사량보다 적은 양을 제공한다고 한다. 사람은 약간 배가 고플 때 민첩해지고 더욱 공격적이 된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나도 오후에는 더 잘해 보마하고 그 맛나 보이는 점심을 평소양의 절반만 먹는다. 그 대신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다. 하지만 그 결과는 예상 밖으로 참담하게 나타난다. 줄다리기를 하는데 배가 고파 힘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첫판부터 질질 끌려다닌 것이다. 릴레이를 할 때는 앞에 달린 분들이 워낙 잘 달려주었기 때문에 내가 죽자살자 달릴 필요가 또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나의 어설픈 작전미스로 결국 된장에 박아 맛을 제대로 낸 아까운 상주 바비큐 돼지고기와 혀에 척척 감기는 김삿갓면 얼큰한 김치만 날려버린 셈이 된다.
어제 밤에는 실내에 모여 앉아 아슬아슬한 감성에 뿌리를 둔 몽환 같은 열정을 즐겼다면 오늘은 활기차고 색깔 싱싱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웃음과 기운을 마음껏 발산을 한 셈이다. 이렇게 즐거움과 행복감마저도 음陰과 양陽의 조화를 맞추어가며 즐겼더니 몸과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둥실 떠가는 저 구름에라도 훌쩍 뛰어 오를 듯한 기분이 든다. 행복幸福은 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간다는 말이 이럴 때는 실감이 나는 대목이다.
(- 100차 답사: 운동회라 쓰고 행복의 우편배달부라 읽는다, 45년 후後의 운동회. -)
첫댓글 줄다리기에서 진 이유가 점심을 부실하게 드셔서 그랬구만요..어쩐지 힘이 딸리더라니..ㅎㅎ
마라톤 대회를 앞두고 운동회때 너무 무리하신건 아닌지 은근 걱정이 되옵니다...대회 잘 치루시길...
발은 좀 어떠신가요? 긴울림님의 긴글을 아주 잘 읽었습니다. 동감입니다.
아이구 ~~~~ 긴울림님이 승부욕에 불타서, 음식조절까지 하셨으니 ~~~~ 당근 백군이 이길수밖에요 ㅎㅎㅎ 후회하실겁니다^^ 200차 때는 맛있는거 많이 드시고, 경기는 지세여~~~~ㅎ
긴울림님 정말 애 많이 쓰셨어요. 섹쉬한 춤도ㅎㅎ 다리 다치신건 어떠신지요?
어쩐지 백군이 손 쓸틈도 없이 맥없이 무너지더라니니..... 그래도 우린 승리했음~~~
8살이 스스로 행복을 만들기란 무척 어렸을 것이다. 그래도 손맛 좋은 엄마가 새벽부터 준비한 음식과 씨름과 릴레이 계주를 하는 아빠 엄마 모습에 무척 행복했을 것이다. 45년이 지난 지금, 자녀의 운동회도 수십년 전에 다 땠을 이 나이에 친선이라는 데도 8살 그때의 깡다구와 혼자만의 작전으로 배곯아가며 최선을 다한 긴울림님께 박수를 보낸다. ㅋㅋ
멋진 프라타나스로 둘러 쌓인 시골 초등학교 교정에서 객지에서 모여든 어른들이 왠종일 떠들어댔으니 생각만해도 꿈에서나 있을만한 일입니다.
정말 신나는 하루였어요. 첨언한다면 그대가 있어 백군이 더 빛나고 하루가 더 즐거웠다오 ~~~^^
긴울림님이 운동신경은 가히 국보급이시던데요. 안나오셨으면 했는데 계속 나오시더라구요. 덕분에 청군이 아주아주 힘들게 졌지요.
그래도 엄청 즐거운 운동회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