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53) 시인이 만들어낸 소리 - ② 마음으로 듣는 밝은 귀/ 시인 이형기
시인이 만들어낸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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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마음으로 듣는 밝은 귀
새소리를 듣고 그 새가 어떻게 우는가를 구체적으로 표현해보라고 하면
참새는 짹짹, 비둘기는 구구구, 까마귀는 까악까악 하는 정도의 상투적인 의성어를 내놓기 십상이다.
의성어 역시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청각적 이미지이다.
그리고 앞에 예시한 바와 같은 상투적 의성어는 독창성이 없기 때문에 가치 있는 이미지라고 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봄부터 여름까지 도처에서 뻐꾸기가 운다.
그래서 뻐꾸기 울음소리는 시에서 다른 어떤 새 울음소리보다 자주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한 번도 ‘그것 참 기막힌 뻐꾸기 울음소리로구나’ 싶은
뻐꾸기 소리를 표현한 의성으로 접해본 적이 없다.
초여름의 꾀꼬리 소리나 노고지리 소리에 대해서도
전자는 꾀꼴꾀꼴, 후자는 지지배배 하는 정도의 상투적인 소리일 뿐이어서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북방(北邙)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대 동그란 무덤들 외롭지 않으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髑髏)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살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삐이 배,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박두진, 〈묘지송〉 전문
이것은 박두진의 시 〈묘지송(墓地頌)〉의 전문이다.
어둡고 슬프고 암담하기 마련인 무덤과 주검을 표현 대상으로 하는 이 시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밝고 따뜻한 시선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러나 청각적 이미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만큼,
우리에게는 그런 특이성보다도 마지막 연에 나오는 멧새 소리의 의성어가 더 큰 관심의 대상이다.
‘삐이삐이 배, 뱃종!’이란 그 멧새 소리의 의성어는 내가 아는 한 한국시에서
일찍이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박두진의 독창적 창작이다.
이 의성어는 무덤과 주검에 대한 이 시의 밝고 따뜻한 표현 효과를 한층 드높이는 구실을 하고 있다.
장독 뒤 울밑에
모란꽃 오무는 저녁답
목과목(木果木) 새순밭에
산그늘이 내려왔다.
워어어임아 워어어임
길 잃은 송아지
구름만 보며
초저녁 별만 보며
밟고 갔나베
무질레밭 약초길
워어어임아 워어어임
―박목월, 〈산그늘〉 부분
편의상 1~2연만 인용한 박목월의 〈산그늘〉에도 재미있는 의성의가 등장한다.
이 시의 각 연 마지막 행에 후렴처럼 되풀이되고 있는 ‘워어어임아 워어어임’이라는 소리이다.
시인이 붙인 주석에 의하면 이것은 ‘경상도 지방에서 멀리 송아지를 부르는 소리’라고 한다.
강아지를 부를 때 ‘오요요’ 하고, 모이를 주기 위해 병아리를 부를 때 ‘주주주우’ 하는 것과 같은
이 소리는 일종의 지방 사투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소리는 그 의성어가 사용되는 지방의 향토적 정서를 자아내는 효과음으로 기능하게 된다.
실제로 이 시 〈산그늘〉이 노리고 있는 표현의 주안점은 장독 뒤 울밑에서 모란꽃이 오물고,
무질레밭 약초 길을 송아지가 밟고 가는 어느 산골 마을의 저녁 무렵을 배경으로 하는 향토적 정서이다.
‘워어어임아 워어어임’이라는 귀에 선 의성어는 분명 그러한 정서의 표현 효과를 높이기 위해
박목월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청각적 이미지이다.
시의 표현에 기여하는 이와 같은 청각적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밝은 귀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밝은 귀’란 단순히 소리만을 잘 듣는 귀가 아니라 소리의 내밀한 의미까지 새겨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를 뜻한다.
아래의 시에서 우리는 밝은 마음의 귀가 잘 새겨들은 소리의 좋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한낮의 뒤숲에서 매미가 우네.
그 소리도 가지가지의 매미 울음.
머언이란 말은 구름을 보아 마음대로 꽃이 되기도 하고 잎이 되기도 하고 친한 이웃 아이 얼굴이 되기도 하던 것을
오늘은 귀를 뜨고 마음을 뜨고, 아, 임의 말소리, 미더운 발소리, 또는 대님 푸는 소리로까지 어여삐 그려낼 수 있는
명명(明明)한 명명(明明)한 매미가 우네.
―박재삼, 〈매미 울음에〉 전문
박재삼의 시 〈매미 울음에〉에서 시인은 어떤 종류의 매미 울음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임의 말소리, 미더운 발소리. 대님 푸는 소리까지’ 새겨들을 수 있는,
그것도 ‘어여삐 기뻐(기쁘게)’ 새겨들을 수 있는 소리이다.
마음의 귀가 밝지 않으면 이런 매미 소리의 내밀한 의미까지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매미 소리가 한자의 밝을 명을 겹으로 써서
‘명명(明明)한 명명(明明)한’으로 표기했다는 사실이다.
‘맴맴’ 또는 ‘명명’으로 일반화되어 있는 매미 소리의 의성어를 그대로 살리면서 거기에
다시 밝음의 뜻을 함축시킨 표기법이다.
그러니까 ‘명명(明明)한’이라는 형용사를 통해 문장을 읽기만 해도
매미 소리의 밝은 음향이 드러날 수 있도록 시인이 세심하게 언어를 선택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울러 그 매미 소리는 박재삼이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청각적 이미지이다.
< ‘이형기 시인의 시쓰기 강의(이형기, 문학사상, 2020)’에서 옮겨 적음. (2021. 7. 8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53) 시인이 만들어낸 소리 - ② 마음으로 듣는 밝은 귀/ 시인 이형기|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