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연인과 나
아버지의 연인과 나/송영욱
- “야 내려!”
이것은 내 정체성에 대한 문제였다. 제삼의 인물로 나는 거의 빈사상태에서 숨통을 트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듯 눈에서 뿜어 나오는 파란 냉기가 그녀를 얼려버렸다.
조잘대던 살덩어리가 일시적 공항에 빠져 새매가 채간 참새마냥 오돌오돌 떤다. -
나는 눈 속에 반항기만 가득한 중학교 2학년이다.
오늘도 종례시간에 수업료 이천팔백 원을 안 냈다고 독촉을 받았다.
아버지가 은행원이라는 것을 아는 담임선생님은
수업료를 써버린 것으로 오해했는지 나를 쳐다보시는 눈이 가늘고 깊어졌다.
더군다나 이번 가을로 예정된 수학여행은 내게는 사치였다.
그는 언제 봤는지 기억도 없다.
K 은행 광교 지점 감정과에 근무한다는 말만 들린다.
모자를 눌러쓰고 방과 후 여기저기 쏘다니다가 답십리 종점 가는 신흥교통 버스를 탔다.
버스는 전농동을 돌아 답십리 극장 쪽으로 가고 있다.
양쪽으로 길게 붙어 있는 의자에 포개 앉듯 승객들이 가득 찼지만
굼떠 자리를 못 잡은 승객들은 손잡이에 매달리듯 군데군데 서 있었다.
안내양이 악착같이 질러대는
“오라이~”
소리를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우연하게 들려오는 키 큰 여인과 뚱뚱한 여인의 소곤거리는 이야기 속에서
그의 이름과 K은행이 튀어나왔다.
더 기막힌 말은 제이의 여인이 제삼의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자체에 나는 돌아버렸다.
다짜고짜 그 여인의 손목을 비틀어 낚아채며 서슴없이 내뱉었다.
“야 내려!”
이것은 내 정체성에 대한 문제였다.
제삼의 인물로 나는 거의 빈사상태에서 숨통을 트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듯 눈에서 뿜어 나오는 파란 냉기가 그녀를 얼려버렸다.
조잘대던 살덩어리가 일시적 공항에 빠져 새매가 채간 참새마냥 오돌오돌 떤다.
“야~! XX아!~ ”
“남의 남자 후려냈으면 잘 모시고 살아야지.”
“어딜 돌아다니며 이름을 팔고 지랄이야!”
“너도 같은 주제에”
“더럽게.”
검정교복 속에 감춰진 나는 작은 악마 그 자체였다.
처음으로 두꺼비 두 살짜리를 병째 들이키며
당진에서 유학 온 이정X의 자취방에서 저녁 늦게까지 유행가를 불러댔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눈물 속에 봄비가 흘~러 내~~리 듯”
“임자 잃은 수~울 잔에 어리는 그 얼굴”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 버렸네~”
그 후로 나는 ‘박건’이라는 가수의 속 쓰린 그 노래를 다시 부르지 않았다.
통금이 가까워 집에 들어갔다.
엄마의 얼굴이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되어 말이 아니다.
그녀의 엄마가 오늘 사망했다는 전보가 와 있었다.
그녀는 통금이 풀리자마자 택시를 대절해서 친정으로 갔고
나는 다음 날 학교에서 겨울 방학식을 마친 다음 외가에 갔다.
외가 안채 큰방에 외할머니의 시신이 안치되었다.
이 밤이 지나면 영원한 이별이었다.
어려서 올라가 놀던 늙은 호두나무도
흰불나방이 먹어치워 더는 열매를 맺지 못하자 일군들의 손에
토막 나 상가喪家 앞마당 서늘한 기운을 없애는 모닥불이 되었다.
벌겋게 타드는 호두나무 불꽃 속에서 외할머니 모습을 찾아냈다.
외할머니 치맛자락만 잡아당기면
호두, 곶감, 다식, 식혜, 수정과, 지나가는 엿장수 엿판까지
뭐든 다 나오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본다.
나는 제풀에 꺾여 불꽃만 바라보고 있다.
“오늘 밤이 니 외할미와 같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밤이로구나!”
외할아버지 비통한 말이 한숨처럼 터져 나왔다.
오랜 병고로 시신 부패 속도가 빠른가보다.
나무 관 밑으로 흘러내린 핏물이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날만큼은 외할머니 옆에서 절대로 떨어질 수 없다고…….
병풍 앞에서 하룻밤을 지새웠다.
매서운 겨울 아침 장지로 향하는 행렬은 길었다.
만장과 *요여가 *영정 앞에 서고 뒤이어 상여가 그리고 상제들과 문상객들이 길게 따라나섰다.
*발인제를 지내고 집에서 출발해서 장지까지 가는 길은 이십 여리가 넘는 것 같았다.
가면서 나오는 다리마다 노제를 지냈다.
나는 외할머니의 영정을 들고 요여 뒤를 따랐다.
요령잡의 구슬픈 가락이 가슴을 저며 왔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자식 눈에 눈물 내며”
“간다~간다~ 나는 간다.”
“북망~산이 여~기로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허~ 어하~”
“북망산이~”
“여기로다”
“어허~”
“ 어하~”
강바람이 귀를 잘라 가는 것 같았다.
*요여 : 장사 지낸 뒤에 혼백과 신주를 모시고 돌아오는 작은 가마.
*영정 : 화상을 그린 족자
*발인제 : 상여가 집에서 떠날 때 상여 앞에서 지내는 제사.
*송영욱의 미니픽션 << 사랑은 끈적한 눈물 더먹는 밥 숟갈>>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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