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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7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예레 7,23-28
복 음 : 루카 11,14-23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15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16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18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19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1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22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상을 해 보십시오.
아인슈타인이 지금 이 자리에 강의하러 온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 강의를 듣겠습니까?
또 이 강의를 듣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올까요?
지금이야 워낙 유명한 분이라서 많은 사람이 강의를 듣기 위해 올 것이라고 예상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살아 있을 때는 교수로서 그렇게 인기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너무 아는 것이 없어서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물리학계의 주목받는 샛별이었지만, 수강 신청자는 겨우 세 명이었고
다음 학기에는 신청자가 아예 없어서 그 강좌가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통해 프린스턴 대학 총장은 아인슈타인의 교수 기량이 부족하다면서
정교수 직위를 주지 않으려고도 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더 잘 가르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자기 역량을 드러내는 분야가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실력 없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처럼 실력은 뛰어나지만, 단지 가르치는 것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늘 이런 식입니다.
하나의 모습으로 전체를 평가하는, 그래서 더 중요하고 큰 것을 보지 못합니다.
하느님 일 역시도 전체를 보지 못하기에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에 바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마귀가 나가고 이제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군중 중의 몇 사람이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이 말을 듣고서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런 표징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으로 알겠다는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도 하느님의 커다란 표징입니다.
당시에 벙어리 마귀는 하느님만이 쫓아낼 수 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못 하게 하는 벙어리 마귀이기에
하느님만이 쫓아내서 당신 말씀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편을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마귀를 쫓아내는 어리석은 행동들을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단순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에 관한 부정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주님의 반대편에 서서 반대하고 흩어 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완고한 마음에 경종을 울립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목을 뻣뻣이 세우고 고약하게 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전해주며,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에 오히려 적대하며 악담을 퍼붓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두 개의 중심이 되는 동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말을 들어라.”라고 할 때 “들어라”라는 동사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을 온전히 걸어라.”라고 할 때 “걸어라”라는 동사입니다.
이 두 동사의 표본, 곧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걷는 것의 표본은
오늘 화답송에 나오는 '양 떼'입니다.
곧 양은 목자의 말을 알아듣고 그의 말을 따라 걷는 이의 표상입니다.
한편, 그 반대의 표상에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벙어리 마귀'가 있습니다.
벙어리 마귀는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말씀을 따라 걷지 못하게 하고, 말씀의 실현을 훼방하는 방해꾼입니다.
이 방해꾼은 제1독서에서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런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 그리고 화답송에서의 '무딘 마음'의 표상입니다.
곧 이들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말,
곧 자신의 생각이라는 우상을 따라 걷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쫒아내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말씀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놀라워하면서도,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예수님께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악담으로 대적하면서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순을 반박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이는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낸 사실이 단지 하나의 기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가락, 곧 하느님 권능의 임재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 뜻이 이루어지는 하늘나라의 실현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말씀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 안에서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아직 '하느님 나라'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말씀을 듣고도 따라 걷지 못하게 하는
완고한 무딘 마음이 있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런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이 있어 주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따라 걷고 있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는 자기 자신의 말이 아니라
이미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는 '양 떼'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에서 시편 작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이 이끄시는 양 떼로세”(시편 95,7)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주님!
제 안에는 당신 형상의 빈자리가 있습니다.
오로지 임자이신 당신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당신께서 제 안에 계시오니,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성전이오니,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소서! 아멘.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구들을 쫓아낸다.”(15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주님께서 하신 일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벗겨내고,
그리스도의 힘의 원천이 베엘제불이라고 우긴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이라고 그분께 요구하였다.
나라가 서로 갈라지면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베엘제불도 자기와 반대되는 것을 모두 끊으면 제 나라를 세울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내쫓는가?
사탄이 저 자신과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자기 시종들을 해치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탄을 짓부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20절).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의 두 손이라고 하였다.
하느님의 손가락은 바로 아들과 함께 일하시는 성령이시다.
주님께서는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영 안에서 마귀를 쫓아내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인간 본성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도달한 것이다.
인간 본성이 더러운 영들을 꾸짖음으로써 빛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있다는 의미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21-22절)
그분은 세상의 지배자를 이기셨다.
그를 무릎 꿇리고 그의 힘을 빼앗은 다음,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내주셨다.
주님께서는 그 주인보다 더 힘센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자가 막강한 힘을 누리며
본래 하느님의 것인 양들을 멋대로 다루고 자기 외양간에 가두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말씀이신 분이 사람이 되시어 맞서시자,
그는 전 재산을 빼앗기고 그의 재산은 전리품으로 분배되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23절).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마귀의 손에서 구해 내고
그에게 속아 넘어간 이들을 그의 거짓에서 건져 내러 오셨기 때문이다.
사탄은 주님께서 구원하고 모으신 이들을 흩어 버리려는 자이다.
그분께 대항하고 사악한 뜻으로 그분의 목적을 훼방하려는 그자가
어떻게 주님을 도와 자신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전에 어르신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들어오는 자리는 표가 나지 않지만, 사람이 나간 자리는 표가 나기 마련이다.”
3명이 여행을 하다가 1명이 본당 미사 때문에, 먼저 돌아갔습니다.
3명이 함께 했을 때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1명이 없으니 그 빈자리가 허전했습니다.
저는 운전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1명이 없으니, 운전도 해야 했습니다.
아침이면 가방도 챙겨야 했습니다. 신부님은 1인 3역을 했습니다.
모든 일정을 계획하였고, 숙소를 예약했습니다. 물이며, 먹을 간식을 챙겼습니다.
신부님은 떠나면서 목요일에 다시 오겠다고 했습니다.
본당 주일 미사를 마치고 비행기를 타고 온다고 했습니다.
저를 댈러스에 내려주고 혼자 뉴욕으로 가야 하는 동창 신부님을 위해서 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둘이 함께 다시 뉴욕으로 간다고 합니다.
동창을 위해서 기꺼이 다시 내려온다는 신부님의 진한 우정이 고마웠습니다.
저를 데려다주고 혼자서 뉴욕으로 가야 했던 신부님이 안쓰러웠는데,
친한 동창과 함께 돌아가게 되어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렇게 10일간의 여행은 마무리되었고, 저는 댈러스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좋은 뜻으로 떠난 여행이
뜻하지 않은 갈등과 다툼으로 엉망이 되는 때도 있습니다.
심할 때는 같이 떠났지만, 따로 돌아오는 일도 있습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헤아림이 없이 자신의 주장만을 이기적으로 내세울 때 그렇습니다.
자신의 큰 허물은 보지 못하고 상대방의 작은 허물을 들추어낼 때 그렇습니다.
지나친 음주로 몸과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때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신앙을 키우기 위해서 가는 성지순례에서도 간혹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예전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입니다. 복도를 지나는데 누군가를 험담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모임 시간에 늦게 나온다거나, 침묵해야 할 장소에서 떠든다거나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제들끼리 떠나는 순례에서도 간혹 갈등과 마찰이 생기기도 합니다.
순례를 여행처럼 생각할 때가 그렇습니다.
저는 순례를 떠날 때면 늘 들려 드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들레헴 성당 문 앞에 있는 글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행객으로 이곳에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가시길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순례자로 이곳에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가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왜곡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베엘제불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선동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만일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믿고 따랐다면
그들 또한 하느님 나라로 가는 여행에 함께 했을 것입니다.
왜곡과 날조는 하느님한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곡과 날조는 악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권력의 편에 서서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했던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사순시기는 거짓과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시간입니다.
사순시기는 왜곡과 날조를 밝혀내고 진실과 자유를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신앙의 어중간은 없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두개의 깃발’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깃발이고, 하나는 마귀두목 베엘제불의 깃발입니다.
둘 중에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선택하면 부귀영화나 명예, 매혹적이고 달콤한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가난, 업신여김과 모욕, 때로는 박해와 순교까지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선택의 삶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어중간은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세상에서 안전한 처세술이 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세는 아닙니다.
묵시록을 보면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3,15-16).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마귀를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님을 선택해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한 답이지만 삶의 모습은 여전히 이해타산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는, 그리고 모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루카11,17).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가정도, 공동체도 어떤 모임도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야 합니다.
나쁜 습관이 있다면 고쳐야 하고 내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열린 마음의 눈을 떠야 하고,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다면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과 포용할 수 있는 큰 품을 키워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위로가 되고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실천이 없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주님의 편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고집 때문에 사실을 바꾸고,
때로는 거짓된 소문을 퍼뜨리고, 진실에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마귀의 패거리로 몰아붙이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완고함이 쌓이면 마음속에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거짓 속에 묻힌 마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가끔 세상의 정치적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말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여당이십니까? 야당이십니까?”
그러면 말합니다. 저는 ‘천주당’입니다.
하느님 앞에 서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김 찬미 수녀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루카11,14)
내 귀에 마귀
내 귀에 캔디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남녀가 바짝 붙어서 춤을 추며 노래합니다.
그러다 마귀가 내가 아무 소리도 못 듣도록(예레7,24-28)
나에게 속삭이겠구나 싶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 해 주겠다는 가사처럼...
과연 마귀가...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줄까요?
마귀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주지 않습니다.
캔디처럼 달콤함으로만 유혹해서는
내 선택과 자유의지를 점점 없애가면서
마귀가 원하는 대로 조종하려 할 뿐입니다.
(유경험 ㄷㄷㄷ)
조현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환청이 굉장히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아닌 줄 알면서 끊이지 않는 그 소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환청 가운데 악의가 가득하거나
극단적인 표현이 많을 경우 그 환청이 들리는 동안은
제대로 말을 할 수도, 바라는 것을 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저는 조현병을 진단받진 않았지만
왜 말을 이렇게 할까 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고야 말까
하는 순간은 많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죄를 반복해서 고해성사를 보면
신부님은 나도 어쩌지 못하는 나는 환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낫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사이신 예수님이 꼭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도와 달라고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자유롭지 못하지만 기도합니다.
예수님... 제 귀에 캔디 같은 마귀도
오늘 복음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마귀보다 더 힘세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 마귀는 어제도 오늘도 저를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다니고
제 자유의지를 묶어버립니다.
예수님 손가락을 귀에 넣었다 빼 주셔서
제대로 듣고 보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처럼
말 같지 않은 말을 멈추고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 모두를 낫게 해 주소서.
제 사랑이 참 부족하지만
사랑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복음묵상
우리 역시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할 것인지 고민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웬만해서는 병원 신세를 지지 않는 성격이라 가끔 가뭄에 콩나듯 병원에 가면
과거와는 완전 딴판인 첨단 의료 시스템에 화들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진단과 치료를 위한 별의별 의료 기계들에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최첨단 의료 기술에 입을 다물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안 계신 제 어머니를 진료해 주시던 주치의 의사 선생님이 기억납니다.
명의로 소문이 자자해 몰려드는 환자로 늘 바쁘셨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환자의 고통에 깊이 공감해 주시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한번 해 보자며 희망과 용기를 주시던 분이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의사 선생님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병마를 쫓아내던 또 다른 예수님이셨습니다.
공생활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가장 역점을 두셨던 사목활동이라면
단연코 치유와 구마 활동이었습니다.
의료 체계나 수준이 열악하던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별것 아닌 병 앞에서도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방에 득실대던 마귀의 횡포에 죽을 고생 하고 있던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당신 두 눈으로 확인한 예수님께서는
발길 닿는 곳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환자와 마귀 들린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바 하느님 아버지의 손가락이 되어 썩어 문드러진 환부를 재생시키고,
길길이 날뛰며 횡포를 부리던 마귀들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당신의 손가락 역할을 수행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소중한 손가락으로 어떻게 하느님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과
한없는 자비를 드러낼 것인가, 고민해 봐야 하겠습니다.
‘쉬는 교우’란 용어가 주는 해악
전삼용 요셉 신부
영화 ‘사랑도 번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은 도쿄의 한 호텔에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두 명의 미국인 밥 해리스(Bob Harris)와 샬럿(Charlotte)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밥은 유명 영화배우지만 인기가 조금씩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20억 원의 돈을 받고 도쿄로 위스키 광고를 찍으러 온 것입니다.
처음 접해보는 동양 문화에,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고 집에 전화해도 아내는 시큰둥합니다.
결혼 24년 차이기 때문입니다.
밥처럼 같은 호텔에 있으면서 잠 못 드는 샬롯은 결혼 2년 차입니다.
남편에게 사랑받고 있지만, 출장이 잦은 남편에 비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샬롯도
여전히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외롭습니다.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나 술을 한잔하고 대화를 나눕니다.
서로 비슷한 점이 많고 둘이 함께 있으니 잠이 옵니다.
둘은 미묘한 감정을 느끼지만, 선을 크게 넘지는 않습니다.
밥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 둘은 헤어지기 아쉬워합니다.
밥은 아쉬워하는 샬롯에게 가벼운 키스를 하며 귀에 대고 뭐라 말합니다.
샬롯은 얼굴이 밝아지며 영화는 끝납니다.
과연 저 둘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와 행복할까요?
어쩌면 더 큰 일탈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잠 못 드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계속 일탈을 꿈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탄의 힘을 빌려 그렇게 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다른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물론 다른 표징을 보여 주어도 그들은 믿지 않고 다른 핑계를 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이유가 당신 편에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나라도 나라고 천국의 나라도 나라라고 하십니다.
나라가 갈라지면 나라는 망합니다.
마귀의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도 악으로 단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를 악한 자가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를 하늘이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편 아니면 사탄의 편, 두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중도는 없습니다. 빛 안에 어둠이 속할 수 없고, 어둠 속에 빛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긍정하지 않는다면 사탄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편에 서지 않는 자는 이미 사탄 편에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입니다.
어떤 이들은 새벽과 저녁은 빛과 어두움이 섞여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새벽은 빛을 선택한 사람의 상태이고 저녁은 어둠을 선택한 사람의 상태입니다.
내가 어느 편에 서기로 했느냐에 따라 내가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는지가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쉬는 교우’는 어떨까요?
예수님의 편일까요, 어둠의 편일까요?
당연히 예수님의 편임을 멈춘 상태입니다.
빛의 편이었다면 조금씩 더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멈춘다는 말은 어둠으로 가고 있기에 어둠의 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냉담자들을 ‘쉬는 교우’라고 칭합니다.
쉰다는 말은 좋은 말입니다. 걷다가 쉬면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가 축적됩니다.
그러나 신앙을 쉰다는 말은 죽어간다는 뜻입니다.
밥 먹기를 쉬면 어떻게 될까요, 물 마시기를 쉬면 어떻게 될까요?
오히려 힘이 빠져서 죽어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냉담 교우의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하려고 쉬는 교우라고 칭합니다.
오히려 그런 칭호가 냉담을 회두시킬 필요가 없게 만들고
그들도 자신들의 상태가 빛으로 나아가는 줄 착각하게 합니다.
영화 ‘삼사라’에서 타쉬는 절에서 나와 결혼합니다.
신앙을 잠시 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내와 자녀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잠시 쉬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쾌락의 기쁨을 알아버렸고 아내와 자녀가 다시 돌아오는 길을 막습니다.
그런데도 쉬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성녀 데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를 쉬면 조금씩 죽어갈 것입니다.”
이것이 영성의 길을 아는 사람의 말입니다.
쉼은 생명을 회복함이지만, 냉담은 죽음을 선택함입니다.
이 절실함이 자녀들이 공부를 위해, 직장과 혼인을 위해 신앙을 잠시 쉰다고 했을 때
우리의 반응을 바로잡아 줄 것입니다. 사랑은 쉴 수 없습니다.
사랑을 쉰다는 말은 사랑이 식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불에 올리면 뜨거워지고 불이 없으면 식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진, 아니면 후퇴입니다.
신앙, 아니면 불신앙입니다. 쉬면 죽는 게 신앙입니다.
적수들의 모함과 예수님의 반격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님의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그분의 발걸음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을 향한 그분의 걸음이 빨라질수록 예수와 그 반대자들의 대립과 긴장은 고조된다.
적수들의 모함도 더 노골적이다.
그 가운데 예수님은 확실한 선택을 요구하신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며,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23절)
오늘 대립의 발단은 예수께서 사람을 언어장애자로 만든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면서부터 시작된다.
예수를 반대하는 자들은 예수가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사주를 받아
마귀를 쫓아낸다고 함으로써 예수의 능력을 격하시킨다.
베엘제불은 직역하면 ‘집주인’이란 뜻이지만, ‘오물의 신’으로 널리 쓰였다.
아마 유대인들이 이교도들의 神名을 경멸하려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대자들의 모함에 대한 예수님의 반격은 3단계로 진행된다.
① 마귀가 마귀를 쫓아낸다면 마귀세력의 內紛과 瓦解를 초래할 것이 뻔한데
아무리 마귀라 할지라도 그런 어리석은 일은 할 리가 없다.
② 예수가 마귀의 사주를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마귀를 쫓아내는 그 누구라도,
즉 바리사이파 사람들 자신들과 그 자식들까지도 마귀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만약 그들이 다른 어떤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낸다면,
예수의 능력 또한 마귀와 별 개의 것으로 인정해야 함을 피할 수 없다.
③ 힘센 자의 무장을 해제하려면 그보다 더 힘센 자가 요구되듯이,
마귀를 추방하는 데는 마귀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능력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며,
원문에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기록되어 있다.
적수들의 모함에 대한 예수님의 3단계 반격은 결국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음”(20절)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하느님 나라의 到來는 메시아의 도래로 실현되는 것으로서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고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며,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를 때”(이사 35,6)이다.
따라서 벙어리 마귀의 구마는 메시아 도래의 상징적 행위에 속한다.
예수께서 벙어리 마귀를 驅魔하심은 곧 사람에게 인간 본연의 품위와 자유,
하느님 말씀의 傾聽과 發說을 들려주시기 위함이다.
이 일을 예수께서 하신다면 그는 하느님이시며,
그로 인해 이 땅에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한 것이다.(20절)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 편에 서는 사람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따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음을 믿고 있다.
이 믿음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그 어떤 힘도
하느님의 손가락을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오늘 독서와 복음은 서로 대조되는 두 존재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듣지 않아서 말이 끊기게 된 이스라엘’(독서)과
‘말을 못 하였지만 이제는 말을 하게 된 벙어리’(복음)가 그들인데,
이들을 연결시키는 주제는 ‘소통’입니다.
복음의 본문은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라는 문장으로
‘말을 못하게’ 된 것, 곧 듣지 못해서 말까지 못하게 된 것이
‘악의 일’이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렇게 악의 일이 듣지 못하게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
결국 소통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일’은 듣게 하고 말하게 하여 소통을 되찾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일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악(베엘제불. ‘즈불룬의 바알’이라는 뜻)의 힘을 빌려 하는 것인지 궁금해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논지로 답을 주십니다.
어떤 나라나 가정도 분열되면 망하는데,
만일 악의 최고 존재인 베엘제불이 또 다른 악을 쫓아낸다면,
그것은 악의 분열을 자처한 것이니 너무도 분명한 모순이 됩니다.
그러니 악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일은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소통이 되지 않는 상태,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소통을 무력화하는 것이 악의 일입니다.
만일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 내 삶을 무너뜨리고 피폐하게 만드는 느낌이 든다면,
분열과 교란으로 우리를 붕괴시키는 악의 속성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선명하게 호소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소통하며 알려 주시는 길을 의연히 걸어갈 때,
우리는 반드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