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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법성종 창종 원효 조사. 화엄종 창종 의상 조사. 천태종 창종 대각국사 의천. 9산선문을 조계종으로 통합 한 태고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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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불교 역사를 알 수 있는 문헌은 대부분 중국 유학파들의 귀국 후 활동에 집중되면서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단체를 중심으로 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고, 종단(宗團) 또한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떠한 종단을 설립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스님들의 중국 유학시절 및 귀국 후의 활동상을 통해 그의 사상이 어떠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고, 종단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에서 종단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문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 직접적으로 종단의 이름이 거론된 최초의 문헌은 「흥왕사 대각국사묘지(興王寺 大覺國師墓誌)」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도 몇몇의 종단 이름과 종단의 성립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 나타나고 있다.
학자들은 이에 따라 후대의 기록을 토대로 한국불교의 종단사를 유추하고 있으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 현재 정립된 한국불교 종단사는 5교9산(五敎九山)에서 연원을 찾고 있다. 5교9산에서 5교는 교학을 바탕으로 한 교종의 다섯 종파를 이르는 말로 계율종(戒律宗), 법상종(法相宗), 열반종(涅槃宗), 법성종(法性宗), 화엄종(華嚴宗)이다. 그리고 9산은 선종(禪宗)에 속하는 9개의 사찰로 실상산문, 가지산문, 동리산문, 사자산문, 사굴산문, 희양산문, 봉림산문, 성주산문, 수미산문을 말한다.
이들 5교9산이 언제부터 종(宗)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이들 종단은 신라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선종 관련 9산은 그 시기가 신라 후대이기 때문에 5교에 비해 성립시기가 늦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재까지 알려진 5교의 성립시기를 통해 가장 먼저 생겨난 종단을 유추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5교의 성립시기를 보면 계율종은 신라 제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기간 632∼647)때 자장(慈藏)이 통도사를 중심으로 창종했고, 열반종은 신라 제29대 왕인 무열왕(재위기간 654∼661)때 고승 보덕(普德)이 경복사를 중심으로 창종했다. 그리고 법성종은 신라 제30대 왕인 문무왕(재위기간 661∼681)때 원효(元曉)가 분황사를 중심으로 창종했으며, 화엄종은 문무왕 때 당나라에 가서 화엄교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의상(義湘)이 부석사를 중심으로 창종했다. 이어 법상종은 신라 제35대 왕인 경덕왕(재위기간 742∼765)때 진표(眞表)가 금산사를 중심으로 창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계율종을 최초의 종단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다. 계율종과 관련해서는 자장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선덕여왕으로부터 승려에 대한 일체의 규율관리를 위임받아 만든 것이고, 선덕여왕이 자장을 분황사에 머물게 하면서 대국통으로 임명한 것 역시 같은 이유로 보고 있다. 하지만 자장이 직접 계율종을 세웠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5교9산에서 종단 연원 찾아
5교 가운데 특히 법상종은 중국 현장의 제자였던 원측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그 제자들에 의해 유식학 연구가 시작되었다가 순경(順憬), 태현(太賢) 등에 의해 종파로 성립됐을 것이라는 설이 최근 들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법상종의 조사로 알려진 진표의 점찰법은 법상종의 한 계통일 뿐 법상종의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법상종은 유가업, 유가교문, 유가종, 자은종으로도 불렸으며 훗날 자은종으로 통칭되었다가 조선초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불교 13종파 중 『대반열반경』을 근본경전으로 삼았던 열반종은 신라 무열왕 때 보덕 화상이 개종했다는 것 이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또 법성종은 일명 분황종(芬皇宗)이라고 해서 분황사를 근본도량으로 삼아 전파에 나섰으며 『중론』, 『백론』, 『십이문론』을 소의경전으로 삼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화엄종은 해동화엄종조로 받들어지고 있는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해 화엄의 종지를 널리 펴면서 융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불교 종단과 관련해서는 『삼국유사』를 통한 종파의 존재 유무를 확인하는데 있어서도 보는 이에 따라 조금씩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조수동(경산대) 교수는 「삼국유사에 나타난 불교사상에 관한 연구」에서 “최병헌은 삼국유사를 통해 신라시대 학파나 종파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화엄종, 법상종, 열반종, 밀교, 선종 등 5개 종파라고 했고, 김영수는 신라시대 계율종, 화엄종, 열반종, 법상종, 법성종 등의 5교가 있었다고 주장했으며, 안계현은 이들 종파가 신라 대에 독립된 종파로서 개종을 선언했다는 문증은 찾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명랑의 신인종과 유가종이 언급되고 있다. 특히 신인종(神印宗)의 경우 「명랑신인조」에서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하려 할 때 명랑법사로 하여금 비법으로 예방하게 했다”는 대목과 함께 “그(명랑)가 신인종조가 되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광학, 대연 등 용수에서 시작되는 9조가 있다”고 계보까지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5교9산과 신인종 등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을 신라시대에서 찾을 수는 없다. 따라서 5교9산이 신라시대에 형성되었다고는 하나 중국에서처럼 뚜렷한 종지를 갖고 종파를 형성했다고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불교 종파의 기록을 볼 수 있는 자료는 고려 숙종 6년(1101)에 지은 흥왕사 대각국사묘지명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대각국사묘지에는 계율종(戒律宗), 법상종(法相宗), 열반종(涅槃宗), 법성종(法性宗), 원융종(圓融宗), 선적종(禪寂宗) 등 6종(宗)의 이름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대각국사 당시의 학불자종(學佛者宗)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고려 초기에 6종이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는 있으나, 이 문헌에서도 신라시대에 종파가 형성됐다는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여기서 선적종을 선종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따라서 선종을 9산으로 할 경우 이 묘지에 나타난 6종을 5교9산으로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각국사가 천태종(天台宗)을 창종하면서 5교9산이 5교양종으로 바뀌었다. 양종(兩宗)은 대각국사의 천태종이 우리나라에서 선종에 가까운 불교로 성립되면서 선종을 9산과 천태종 둘로 구분함에 따라 성립된 것이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사실상 7종이 성립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학계에서는 양종이 성립되면서 기존의 5교도 계율종은 남산종(南山宗)으로, 법상종은 자은종(慈恩宗)으로, 원융종은 화엄종(華嚴宗)으로, 법성종은 중도종(中道宗), 열반종은 시흥종(始興宗)으로 각각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 종단사의 가장 큰 특징은 선(禪)을 중심으로 한 천태종과 조계종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천태종은 문종의 네 번째 왕자인 의천(義天, 1055∼1101)이 송나라에서 천태학을 전수 받고 귀국한 이후 천태교관을 널리 강설하면서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천태종 성립은 대국국사가 국청사에서 천태교학을 강의한 뒤부터라고 할 수 있으며, 숙종 4년(1099)에 제1회 천태종 승선(僧選)을 시행했으므로 이때부터 천태종이 공인된 한 종파였다고 할 수 있다.
종파 첫 기록은 대각국사 墓誌
조계종은 그 종명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이 화엄, 천태, 선학 등을 정혜겸수로 포괄하고 그 위에 돈오점수를 제창하면서 당시 9산선문이 이 종지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조계종지도 이때 세워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결실은 태고 보우(普愚, 1301∼1382)에 의해 맺어졌다. 보우는 9산선문을 조계종(曹溪宗)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하기 위해 공민왕에게 청했고, 공민왕은 이를 허락해 공민왕 5년(1356)에 통일된 조계종이 성립됐다.
고려시대는 이렇게 해서 선종을 표방한 조계종과 천태종의 양종과 기존의 5교를 포함해 7종의 시대가 이어졌다. 물론 다른 종파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선교(禪敎) 양종으로의 통폐합이 진행된다. 태조 3년(1394)에 천태종의 조구(組丘)를 국사로 삼고 승려 100명을 내전으로 불러 공양한 기록이 있고, 이후 6년(1397)에는 흥천사를 창건해 조계선종(曹溪禪宗)의 본사가 되게 했다.
조선시대 종단에 대한 기록은 태종 6년(1406) 3월에 의정부의 청원에 따라 전국에 남겨둘 사찰의 수를 정하는데서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된다. 이때 조계종(曹溪宗)과 총지종(摠持宗)을 합해서 70사,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과 법사종(法事宗)을 합해서 43사, 화엄종(華嚴宗)과 도문종(道門宗)을 합해서 43사, 자은종(慈恩宗) 36사, 중도종(中道宗)과 신인종(神印宗)을 합해서 30사, 남산종(南山宗) 10사, 시흥종(始興宗) 10사를 정했다. 이외의 사원은 모두 폐지하기로 했다. 여기에 언급된 종단이 11개다.
그러나 그 다음해 의정부 계서(棨書)에는 조계종,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총남종, 시흥종 등의 이름만 보인다. 이는 숭유억불 정책을 펴면서 사찰의 수를 줄이는 과정에서 각 종단이 통폐합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이는 곧 세종 때에 이르러 다시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되고 전국 사찰은 242개에서 36개로 줄어들게 된다. 이때 조계종, 천태종, 총남종을 선종으로 통합하는 한편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을 교종으로 통합했다. 그리고 흥천사(興天寺)를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로, 흥덕사(興德寺)를 교종도회소(敎宗都會所)로 삼았다.
조선은 11 宗을 양종으로 통폐합
이후 이마저도 자취를 감추었다가 조선중기 13대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가 선교양종제도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이때 승과를 거쳐 탄생한 인물이 그 유명한 휴정과 사명이다.
불교 종단은 조선시대 억불정책과 맞물려 쇠락기를 거듭하다가 일본 승려들이 드나들게 되면서 1908년 새롭게 태어난다. 1908년 3월 전국의 승려대표자 52인이 원흥사에 모여 원종(圓宗)이라고 종명을 정한 것. 여기서 대종정으로 이회광을 추대했다. 그러나 이회광이 일본에 가서 일본 조동종과 임의로 연합조약에 합의하자 국내에서는 이를 매교행위로 규탄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에 박한영, 진진홍,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되어 1911년 1월 영남과 호남의 승려들을 모아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고 임제종을 세웠다. 하지만 이 역시 1911년 사찰령 및 시행규칙 발포와 함께 사라졌다.
이후 일제시대 한국불교 교단의 이름은 조선불교선교양종으로 규정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태고사를 창건해 총본산으로 삼고 종명을 조계종으로 결정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불교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단은 이후 시대상황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름대로의 역사적 근거를 동원서 말이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986호 [2009년 02월 16일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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