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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0일 사순 제4주일
제1독서 : 2역대 36,14-16.19-23
제2독서 : 에페 2,4-10
복 음 : 요한 3,14-21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부모는 자녀에게 늘 최고의 선물을 주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녀가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쏟아붓지만,
자녀가 사랑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서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은 무조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왜 자녀는 그 사랑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느 정신과 의사가 쓴 책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경제적 안정, 신체적 건강, 좋은 관계를 가진 부모’라고 이야기합니다.
자녀에게 주는 선물이 부모 자신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 충분히 공감 갑니다.
부모가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면 자녀가 부모의 노후를 걱정하느라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부모가 혼자 병원 다니고 자기 관리를 할 수 있는 신체적으로 건강한 상태이면
그만큼 부모 간호하는 데 드는 힘을 줄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부모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자녀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지요.
실제로 부모에게 자녀가 유일한 ‘베스트 프렌드’가 된다면,
자녀에게 부모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을 멈추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지요.
진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니코데모는 바리사이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 늘 거룩한 모습으로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의 규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려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을 찾아가 마침내 밤을 몰아내는 빛을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진짜 사랑을 알 수 있었고
이로써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찾았던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입으로만 말씀하시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그러나 먼저 주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우리 역시 실천해 나갈 때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으며, 참 기쁨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사순 4주일로, '기쁨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입당송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예루살렘아. 즐거워하여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으로 기뻐 뛰며 흡족해 하리라.”
그리고 제1독서에서 역대기 저자는 주님을 배신한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잃고 성전은 파괴되고 이방인의 땅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하느님께서 그 유배를 끝내주시는 기쁨을 말해줍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실현한 구원과
그리스도께서 실현한 부활을 함께 노래하며, 우리를 기쁨에로 초대합니다.
복음은 ‘복음’에 관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을 말해줍니다.
흔히 말하는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 혹은 '작은 복음서'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이 한마디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여기에는 하느님의 외아들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그 사명의 기원과 본질이 '하느님의 사랑'임을 천명합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단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이나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해줍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사랑한 나머지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동시에 우리가 그토록 차고 넘치는 사랑을 ‘이미’ 받아먹은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을 심판 하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박이나 번개, 천재지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구원하시고 나를 구원하시려고 다름 아닌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기에 세상과 모든 사람들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더구나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존중하고 수락해야 할 선물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축복의 자리요 대상입니다.
그런데도 혹 우리는 세상을 마치 마귀처럼 미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미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세속정신'과 ‘어둠’입니다.
그것은 맘몬을 앞세우고 굴러가는 물신주의나 자신의 이익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자기중심적 이기주의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복음 정신입니다.
타인을 위하여 사는 이타적인 '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킬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하시건만,
‘이미’ 심판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까닭입니다’(요한 3,19 참조).
곧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이미’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그렇습니다.
세상에 빛은 이미 왔고,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구원의 삶과 사랑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장님이 빛이 비추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눈이 감겨있어 빛을 보지 못한 따름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피앗’의 응답이 구원을 불러옵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요한 3,21)
그러니 시편(36,11)의 말씀처럼, 빛으로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빛이 오면 어둠은 물려갈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어둠을 볼 수 있음은 이미 빛이 비추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어둠인 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둠을 바라보기보다 어둠을 비추어 주는 빛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사실 어둠은 어둠을 보며 어둠으로 이끌지만, 빛은 빛을 보며 빛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렇습니다.
빛은 이미 세상에 왔고,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빛으로 나아가며 기뻐합니다.
오늘도 하느님 사랑의 빛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며,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려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기쁨의 장미주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독서와 복음을 보면 어렵고 힘든 결실을 촉구하고 있다.
오늘의 주제는 심판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빛으로써 세상에 보내 주셨다.
이 빛을 피해 숨는 것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역대기 하권에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이유를
백성들이 예언자들의 권고를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 하느님의 비탄에 찬 간절한 호소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약속의 하느님께서는 키루스의 해방칙령을 통해 한 가닥 희망을 보여주신다.
이것으로 바빌론 유배가 끝난다.
이 마지막 키루스의 해방칙령이 오늘을 기쁨의 주일이라고 하는 것 같다.
복음에서는 모든 인간의 삶에 대한 심판의 주제가 전개되고 있다.
그 심판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심으로써 드러난다.
인간이 하느님 사랑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삶 속에 살 때, 구원의 삶을 사는 것이며,
그 반대로 그 사랑의 선물에 대해 문을 닫을 때는 자신 안에만 있게 되기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먼 사람이 되고, 구원에서 멀리 있는 사람이 되고 만다.
주위의 모든 것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빛나는 때, 어둠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다.
어둠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나를 심판으로 이끄는 것이다.
높이 들리심이란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높이 들리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도 그 사랑을 살아감으로써 높이 들릴 수 있다.
우리가 새로 태어나는 것은 오직 사랑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새로 남이란 오로지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조건에서 가능한 것이며,
예수님의 그 사랑을 살아감으로써 우리도 높이 들릴 수 있다.
예수께서 수난이 가까웠을 때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하신 것은
당신 사랑의 힘을 확인시켜 줄 뿐 아니라,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 앞에서
높이 들리신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제 우리의 선택이 중요하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통해 계시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6-18).
어떤 면에서 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느님의 사랑이 심판을 부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이고,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죽음을 담보로 우리 인간의 구원을 택하셨다.
인간에 대한 심판은 바로 이 사랑의 위대함에서 오는 것이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빛을 거절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생명까지도 거부하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분명한 것은 그 심판의 선포는 바로 인간 자신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빛을 외면할 때는 자기 자신이 시각장애인이 된 것에 대해 그 빛을 탓할 수는 없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19-20절).
우리의 행실이 드러날까 봐 빛을 멀리하는 것, 심판을 피하려고 빛을 멀리하는 것
그 자체가 더 무서운 심판이 된다. 빛을 멀리한다는 것은 어둠에 파묻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단죄받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1요한 4,16 참조)을 믿지 않을뿐더러,
그의 아집과 오만불손한 자만으로부터 그를 구원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보다는
해방의 행복한 결과에 주안점을 두고 기쁨으로 초대한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에페 2,4-6).
이처럼 부활의 신비를 미리 보여주는 것은
사순절을 통해 우리가 가야 할 목표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삶의 방향이 하느님의 빛을 더욱 가까이하는 삶이 되어
높이 들리신 주님과 함께 우리도 부활과 더불어 변화될 수 있는 삶을 바치기로 하고,
또한 이 사순시기가 우리가 높이 들리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의 시기로 되어야 한다.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영광, 구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짧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 있습니다.
“Life is not about waiting to pass the storm.
It is about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 참 멋진 말입니다.
인생은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폭풍우에서라도 춤추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는 지점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전환점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전환점입니다.
바오로는 이제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전환점(turning point)'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전환점의 사례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은 아담입니다.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던 아담은 뱀으로 변한 사탄을 만났습니다.
하느님과 같아지고 싶었던 교만한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금지했던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에서 ‘죄’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죄가 있는 곳에는 은총도 함께 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늘 전환점을 마련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땅에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십니다. 양을 치던 모세는 이제 새로운 사명을 얻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탈출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마지막 재앙이 ‘파스카’입니다.
이집트의 모든 맏배가 죽는 재앙을 내리시는데
집 앞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맏배는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파스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파스카란 ‘넘어간다. 건너가다, 지나간다.’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파스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 파스카를 예수님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파스카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른다면
우리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신약의 파스카입니다.
저의 삶에도 몇 번의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1986년 1월 저는 군에 입대했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는데 인사 담당 장교가 저를 불렀습니다.
제가 신학생인 것을 알았고, 인사 담당 장교의 아들도 신학생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성당 군종병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제 앞에는 꽃길만 펼쳐질 것 같았습니다.
성당에서 근무하니 매일 기도할 수 있고, 미사에 빠질 염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동료들은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고 하는 강원도로 갔는데
저는 경기도 용인으로 갔습니다. 꽃길만 같았던 성당 생활은 3개월 만에 끝났습니다.
잔디밭에 영양제를 주라고 했는데 대충 주었습니다.
성당 의자를 닦으라고 했는데 대충 닦았습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신부님께서 용산으로 출장 가면서
제게 부대로 들어가서 지내라고 했는데 제가 그것을 어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성당 군종병 생활을 마치고 인사처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부끄럽고, 속이 상한 일이었지만 돌아보면 제게는 참 잘된 일이었습니다.
저는 정신을 차리고, 남은 군 생활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사순 제4주일은 ‘장미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 선포됩니다.
페르시아 왕 키루스는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칙령을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페르시아 왕 키루스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키루스를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도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루 내 삶에 있었던 전환점을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순간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셨음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지금 지치고 힘든 이웃에게 삶의 ‘전환점’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고 선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아들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 시간 아드님에 대한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제의 색은 장미색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기도와 희생과 보속, 극기의 삶을 잘 살아오셨습니다. 지칠 만하지요.
그렇지만 한고비를 넘겼으니 좀 더 노력하라는 기쁨의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의지가 약해 실천하지 못하였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기쁨을 희망하며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은혜의 때입니다. 시작이 중요합니다.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미 새와 아기 새가 있었습니다.
어미 새는 아기 새가 귀여워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아기 새가 자라서 어른이 되어도 어미 새는 계속 먹이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미 새는 늙었습니다.
늙은 어미 새는 이제 더 이상 아기 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다 주지 않자, 어른이 된 아기 새는 어미 새의 머리를 콕콕 쪼았습니다.
배고프다고 화를 내면서 콕콕 머리를 쪼았습니다.”
큰 사랑을 받았으면 큰 사랑을 줄 줄 알아야 하는데,
받는 데만 익숙해졌지, 사랑을 줄 줄 몰랐습니다.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다고 했거늘 그 사랑을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아니 깨우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저 누리기만 했습니다. 사랑은 잘 주고 잘 받아야 합니다.
주어진 고기에 묶이지 않도록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하면서도 성경을 잘 읽지 않는다면,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요, 영혼의 호흡,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 말하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손이요, 발이라고 하면서도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기보다
내 이익을 더 챙기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은총을 달라고 매달린다면 아기 새와 다르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하면서도 제 실속을 위해 정신없이 삽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행하기보다 내 뜻을 들어달라고 하소연하고는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내 원의 대로 해주지 않으신다고 투덜댑니다.
영락없이 어미 새의 머리를 쪼는 아기 새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금방 하느님께 불평하고 저항했으며
결국 하느님께서 보낸 뱀에 물렸지만, 하느님의 처방에 따라 믿음을 갖고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아났습니다(민수21,6-9). 믿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쳐다보라’면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순명이라고 합니다.
순명은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것이고,
그러나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그대로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위한 가장 큰 사랑을 보여주신
그 사랑을 살게 되면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쳐다봐서 산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고통의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 숨겨 있는 그분의 사랑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영원히 살게 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5).
성 콘라도는
“십자가는 나의 교과서 입니다. 나는 거기에서 겸손과 양순함을 배웁니다.
또한 언제라도 십자가를 쳐다보면
즉시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줍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도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십자가는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위한 사랑의 십자가를!
자동차에 십자가를 매달고 손가락에 묵주반지를 끼고 위로받으려 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일깨우십시오.
기도해야 한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
미사참례를 하고 그분의 손발이 되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은
아는 차원을 넘어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이는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몸소 씨를 뿌리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확실히 믿고 그분의 말씀을 새기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꼭 행하시길 바랍니다.
믿음에 따르는 행동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심판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3,18).라고 말합니다.
“외아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분을 보내신 이유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심판의 이유이자 내용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영원히 살 방법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결국 죽음에 이릅니다.
구리 뱀을 보지 않은 사람이 죽었고, 소돔이 멸망할 때 구원에 부름을 받은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 했는데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창세19,26).
결국 높이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은총을 주어도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곧 심판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를 만날 때마다 부활의 생기를 찾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가장 위대한 선물이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그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인류에게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놓음으로써 완성되고 드러난 사랑 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실패 안에서 사랑을 봅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그것은 그분이 이 세상의 원리라는 유혹에 빠진 것이 될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이 미사를 통해 사랑의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고달프고 힘들 때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위로를 얻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심판이나 단죄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용서와 자비, 구원과 영생에 맞춰져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는 예수님 말씀이
오늘따라 왜 이리 눈물겹고 은혜롭게 다가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인생길 돌아보면
어찌 그리 굽이굽이 수치스러운 죄와 타락과 방황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이런 나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엄청나게 큰 보속과 무시무시한 처벌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런 제 생각은 사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하느님 상은 피도 눈물도 없는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 우세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우상숭배 앞에 크게 진노하시며
벌주시는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이 그리도 두려웠습니다.
정해진 율법 조항에 의거 해서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나 악행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시는
징벌의 하느님 얼굴을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딴 판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공생활 기간 내내 입에 달고 다니신 말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
뜻밖에도 이 땅에 강림하신 메시아는 심판자나 처벌자의 모습이 아니라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때로 더없이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여행길의 절친한 동반자로, 끝도 없이 기다리고 용서하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심판하실 권한을 주신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심판의 권한은 전혀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오로지 용서와 자비, 희생과 사랑의 실천을 통한
인류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결코 심판하러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앞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그분을 향해 기쁜 얼굴로 다가서는 이들에게는
모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
끝끝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며 그분의 가르침을 멀리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빛을 등진 사람들은 스스로를 단죄와 심판의 도마 위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단죄가 아니라 구원’ 때문이라는 사실,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요.
오늘도 제 삶 안에 길게 드리워진 짙은 죄의 뿌리를 슬픈 얼굴로 바라봅니다.
밥 먹듯이 지어온 숱한 죄와 과오 속에 살아온 제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금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빛 같을지라도 죄질이나 죄 값은 뒷전이신 예수님,
오직 우리들의 해방, 구원, 영원한 생명에만 관심이 지극하신 자비의 예수님 때문에
오늘 다시 한번 힘차게 일어서야겠습니다.
아무리 우리 죄가 크다 할지라도 결국 우리는 모두 구원될 것입니다.
우리 죄가 크지만, 하느님 자비는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단죄하고 속박하지 않는 한
결국 우리는 무상으로 베푸시는 하느님 은총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구원과 심판
김찬선 레오나르도신부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오늘 사순 제4주일은 죄지은 인간이 어떻게 될까?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인간을 구원하실까? 단죄하실까?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죄지은 인간을 구하러 오신 걸까?
단죄하러 오신 걸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들은 하느님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인가?
단죄하시는 하느님인가?
하느님이 사랑이시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하느님 사전에 단죄란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사랑의 하느님 안에서 지옥이란 없지 않겠는가? 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질문에 대한 사순 제4주일의 답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구원을 바라시고,
그래서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사순 제4주일은 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판과 단죄와 지옥은 실제로 없는 것입니까?
우리 교회는 이런 것들이 없다고 가르칩니까? 아니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는 분명 심판과 단죄와 지옥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아무리 바라셔도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바로 단죄받는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우리 교회도 가르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구원자라는 믿음과 심판자라는 믿음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심판자라고 믿는 사람은 그 믿음대로 심판받습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마지막 사람은 하느님을 모진 심판자로 믿었고,
그는 자기의 믿음 대로 심판받았다고 주님은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우리가 믿기만 하면 됩니까?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믿기만 하면 됩니까?
믿기만 하고 정말 아무것 안 해도 되는 겁니까?
진정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진정 믿는다면,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완전히 맡깁니다.
그래서 빛이신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굴이랄까 굴다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굴은 어둡고 위험합니다.
문제는 그 굴을 통과해야 신세계가 열린다는 겁니다.
희망은 굴 저편에 그 굴을 먼저 통과한 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 굴을 통과해 당신에게 오라고 손짓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이 나를 사랑하는 분이고 그래서 믿을만한 분이라면 통과하겠지요?
나를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는 어머니가 바로 그분이라면 통과하겠지요?
오늘 복음의 주님은 당신이 바로 그분이라고 가르치시고
오늘 독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주님 사랑을 믿지 못하고 그 가르침도 믿지 못한다면
주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빛이신 그분보다 어둠인 세상을 더 사랑한다면
그 경우 주님은 더더욱 어쩔 수 없습니다.
주님 사랑에 대한 불신과
주님 사랑을 사랑하지 않음이 우리의 비 구원이고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단죄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니코데모와 대화하면서 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파에 속하는 인물이며,
유대 최고회의 의원으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저명인사였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가 유대의 지도급 인사로서는 드물게
예수님에 대해 호감을 가졌었다고 말합니다.
어느 날 밤, 그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대화합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그 대화의 내용은 속기록이나 녹취록을 옮겨 적은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수십 년이 흐른 다음,
요한 복음서를 집필한 신앙공동체가 제자들로부터 전해 들은 바를 상기하면서,
그들이 믿던 바를 그들 방식으로 기록하여 남긴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이 우리에게 역사적 사실인 양 알리는 것은
초기 신앙인들이 믿고 있던 내용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오늘 복음은 이 말씀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요한 복음서 공동체는 십자가를 모세의 구리 뱀에 비유하였습니다.
구리 뱀의 이야기는 구약성서 민수기(21,4-9)가 전해주는 故事입니다.
옛날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헤매고 있을 때,
불뱀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물었고, 물린 사람들은 죽어갔습니다.
모세가 구리로 뱀을 만들어 높이 달았더니,
그 뱀을 쳐다본 사람은 모두 치유되었습니다.
복음서는 그 고사를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옛날 광야의 구리 뱀과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징표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구원을 의미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 결과,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헌신의 결과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이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줍니다.
우리도 같은 사랑으로 이웃을 위해 헌신할 때,
구원에 이른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 복음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하느님은 심판하시지 않지만, 사람이 하느님의 빛을 외면하고,
악한 일을 저지르며 어둠 안에 머물면, 심판을 자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그분 안에 있었던 하느님의 진리를 읽어내어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빛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구원이십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서론에서 이미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빛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건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1ㅡ4-5)
같은 말이 오늘의 복음에도 반복됩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분이 보여준 하느님의 생명을 빛으로 받아들이고,
그 빛 안에서 그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이 실천하며 가르친, 하느님의 사랑을 진리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어둠 안에 있으면, 자기 자신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빛 안에 삽니다.
구원은 우리의 자유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어떤 혜택, 즉 요사이 말로 ‘대박’이 아닙니다.
구원은 무조건 믿어서 얻어내는 보상도 아니고, 인간의 信心 행위에 대한 포상도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빛으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더 큰 자유를 누리며 사는 길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머물러 있으면...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이고,
그 빛이 보여주는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비굴한 순종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기 一身의 영달을 위해 하느님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빌붙어,
재물이나 地位 하나를 얻어, 뽐내며 살기 위한 처세술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인도 사랑합니다.
복음서는 그 사랑이 그리스도 신앙인의 正體性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사랑은 하느님 자녀의 당당한 몸짓입니다.
흔히 사랑은 우리의 사고를 초월하는 교리를 믿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삼위일체 교리의 모순된 말을 믿고,
처녀가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합니다.
지킬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禁肉과 禁食을 비롯해서 주일 미사 참례 의무와 고해성사 의무 등
교회가 만든 법규들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은총을 얻는 방법을 강구하고 全大赦와 限大赦를 얻기 위한 행사에 참여하며,
신심 단체에 가입하여 열심히 살아서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자세들은 신앙의 빛을 잃고, 지엽적인 것에 얽매이게 하는 어둠입니다.
신앙은 합리적 사고를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비합리적인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라고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지켜야 할 것을 강요하는 율사들을 비난하였습니다.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렸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루카 11,52)
신앙은 은총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우리 안에 빛으로 살아계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섬겨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섬기고자 하면 나를 따르시오.“(요한 12,26)
예수는 우리가 경배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배워야 할 분입니다.
예수님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으면,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높아지는 곳에 하느님은 사라집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어둠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교회의 제도와 법규들도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그것들이 과연 예수님을 따르고 배우게 하는 것인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몽매하던 유럽 중세에 만들어져,
교회 안에 자리 잡은 制度와 慣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요구하는 服裝과 尊稱들이 있습니다. 유럽 중세적 어둠의 산물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둠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어둠 안에는 인간의 虛勢와 卑屈함은 보여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빛과 예수님이 실천하신 진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의 첫 번째 편지는 말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4,8)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사순 제4주일에 강조되는 주제는 ‘기쁨’입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입당송).
예수님의 수난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이 시점에,
도대체 교회는 무엇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일까요?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기쁜 순간 가운데 하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확인하였을 때가 아닐까 합니다.
하물며 내가 ‘하느님 사랑의 대상’임을 확인한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이 있을까요?
제1독서는 이스라엘의 배신과 외면에도 변함없이 성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유배하던 유다인들을 해방하여 준 페르시아 임금의 칙령이
사실은 하느님의 조처였음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한결같고 성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은 복음에도 잘 드러납니다.
광야에서 생활하며 되풀이하던 이스라엘의 반역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뱀’을 보내시지만,
결국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시려고 구리 뱀을 들어 올리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여기에서 관심을 끄는 내용은 “-해야 한다”라는 표현입니다.
누군가를 대신하여 배상하거나 속죄하는 것은 사랑할 때 나오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니까 그를 대신해서라도 배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어 올려지셔야 한다’라는 표현은
사랑하기 때문에 생겨난 주님의 희생을 의미하고,
그렇게 십자가는 사랑이 완성되는 자리가 됩니다.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3)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분을 ‘올려다보며’ 그 사랑을 기억하고,
그렇게 날마다 ‘위’로부터 그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
그것만이 우리를 살게 하는 참다운 삶의 ‘기쁨’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