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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의 희망이고 싶다.
다른 이들의 소망을 꿈꾸다
1. 0~5세.
난 1994년 6월 2일에 2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첫째로 태어난 탓에 가족과 친척들한테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동생들이 태어나면서 첫째라는 책임감을 짊어지게 되었다. 맏이로서의 책임감, 사회를 위해 일하시는 부모님과 집안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 6~7세.
서울에서 안양으로 이사를 갔다. 안양에서 동생을 데리고 어린이 집을 다니는 등 첫째로서의 역할 수행의 어려움과 친구와의 다툼으로 인한 시련을 겪었다.
3. 8~13세.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공부방을 다녔는데, 친구로 인해 초등학교 2학년 때 공부방을 끊으면서 혼자 공부하는 습관을 기르게 됐다. 초등학교 생활 대부분의 기간 동안 나의 꿈은 의사였으나, 고학년이 되면서 의사가 아닌 다른 꿈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4. 14세.
우연히 반 1등을 하면서 성적에 관심이 생겼고, 반 1등을 한 사건은 그 이후 꾸준히 성적이 상승하는 계기가 되었다.
5. 15세.
옳지 못하게 행동하는 반 아이들과 똑똑하지 못하게 행동하는 담임선생님 사이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6. 16세.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라는 책을 접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하게 되고 그와 관련하여 내가 무엇을 꿈으로 가질지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7. 17세.
한비야와 관련되어 꿈을 고민하는 와중에 확실하게 인권 변호사라는 직업을 장래희망으로 갖게 되었다. 변호사가 되기 위하여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하고, 변호사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을 갖기 위해 서울대학교를 목표로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친구와의 다툼으로 상처를 받지만 더 성숙한 나를 만들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8. 18세.
꿈과 관련해서 지역아동센터에서 봉사하기, 청소년 참여 법정 참여 등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일들을 했다.
나는 1994년 6월 2일에 태어났다. 그리고 2남 1녀 중 첫째이다. 친가쪽과 외가쪽에서 모두 첫째로 태어난 나는 동생들이 생겨나기 전까지 많은 사랑을 받았다. 동생들이 생겨나면서 혼자 있을 때만큼의 예쁨은 받지 못했지만 첫째로 태어난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남동생 둘이 태어나면서 나는 첫째라는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첫째로서의 책임감 말이다. 맏이라는 나의 지위는 나를 저절로 애늙은이로 만들었다. 이것저것 신경 쓰고 고민도 많고, 생각도 많았다.
우리 집은 6·10 민주항쟁과 상당히 연관이 있는 집이다. 부모님 모두 대학생 때 그 민주항쟁에 참여하셨고, 감옥에 가시는 시련을 겪기도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에 관한 의식도 많이 있으셔서 오래도록 정치에 관련된 일을 하셨고 지금도 본업은 아니지만 계속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힘쓰고 계신다. 이러한 부모님의 성향은 나를 정치와 사회 같은 일들에 관심을 두게 만들었다. 어쩌면 부모님 때문에 나의 꿈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집은 별로 부유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가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난 어렸을 때 우리집이 엄청 가난한 줄 알았다. 아마 할머니, 할아버지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는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는 경향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본의 아니게 약간 구두쇠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또 ‘가난’이라는 것에 대한 피해의식과 더불어 약한 사람들, 가난하고 소외 된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공감,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갖게 되었다.
6살 때 서울에서 살던 나는 안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6살 이전 나의 삶이 평온했던 것에 반해 이사 오고 나서부터 약간의 시련이 시작되었다. 그 시련은 어린이 집을 다니게 되면서 비롯된 시련이다. 나는 3살짜리 동생을 끌고 한무리 어린이집이라는 곳을 다녔다. 어머니께서 데려다 주신 적도 많았지만 나와 동생이 둘이 간 적도 많았는데 난 동생을 혼자 데리고 갈 때면 무척 힘이 들었다. 그런 내 모습이 대견스러우셨던지 내가 이렇게 동생을 데리고 어린이 집에 다닌 일은 두고두고 어린이 집 선생님들과 어른들 사이에서 칭찬 거리가 되었다. 역시 난 맏이였다. 어린이 집에서의 고난은 동생 때문만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 그 어린이 집에 가자마자 싸운 친구 때문이기도 했다. 그 친구하고는 어린이 집 때뿐만 아니라 중학생이 되어서도 두고두고 싸우는 악연이 되었다.
초등학생이 되면서 한무리 어린이 집을 졸업하고 한무리 어린이집과 연관된 한무리 공부방을 다니게 되었다. 그 공부방에서 나랑 같은 또래는 한 5명 정도였던 것 같다. 그 중에는 위에서 언급했던 악연인 친구도 있었고, 좀 정신이 이상한 남자애 한 명도 있었다. 그 남자애 이름이 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남자애는 정신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점을 가지고 다른 아이들은 무시하고 놀리곤 했다. 난 그게 정말 싫었다. 왜 애들은 이해를 안 해주고 놀리기만 할까? 내가 오히려 화가 났었다. 그래서 난 그 아이 편에 많이 섰던 것 같다. 어느 날 그 아이는 이사를 갔다. 헤어질 때 그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잘 지낸 것 같지도 않고 해서 그저 안타깝고 아쉬운 쓸쓸함이 들었다. 난 학교에서도 간혹 일반 아이들이 기피하는 애들 편에 서려고 한 적이 있다. 난 오히려 그렇게 따돌림을 시키려하는 애들, 약점을 가지고 놀리는 대부분의 애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어렸을 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착하고 강했던 것 같다.
공부방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린이 집 때 악연이었던 그 친구와의 다툼이 계속 되었고,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결국 그 친구 때문에 초등학교 2학년 끝나갈 무렵 공부방을 끊었다. 악연이었지만 공부방을 끊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에 대해 나는 감사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공부방을 끊음으로써 난 자기주도 학습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초등학생 때는 공부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어서 공부를 별로 하지 않았다. 그냥 시험이 닥치면 시중에 파는 전 교과 내용이 다 담겨 있는 총정리 문제집을 한 번 훑어보는 정도? 그 조차도 안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렇지만 그 정도만이라도 혼자 해나갔던 것이 앞으로의 나의 학습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중학교 시절은 참 고민이 많았다. 친구관계, 가족관계, 성적……. 뭐 하나 고민거리가 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 고민이 풍부한 시기 중에서도 가장 괴로웠던 시절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아이들은 쓸데없는 반항과 자만심으로 가득 찬 아이들이였다. 게다가 담임선생님은 그런 험한 아이들을 전혀 다룰 줄 모르는 분이셨다. 똑똑하지 못하셨고, 다른 선생님의 힘을 빌리는 더 만만해보이고 치사해보일 행동까지 하셨다. 난 아이들에 편에 설 수도 선생님의 편에 설 수도 없었다. 내가 판단하기에 두 쪽 다 옳지 못했다. 난 결국 중간에 끼여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너무 힘이 들었다. 난 현명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의 행동이 우리 반에서 제일 낫다는 생각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난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무척 감명을 받았고 한비야라는 분이 하는 일을 따라 하고 싶었다. 한비야의 직업은 그 당시 국제구호개발기구인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장이었다.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장으로서 한비야가 하는 일은 전 세계의 재난이 닥친 혹은 가난한 나라에 가서 그 나라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하려면 어떡해야 하는지 난 계속 인터넷을 뒤적였다. 그런데 딱히 방법이 없었다. 한비야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의사, 간호사 같은 직업이 적당할 것 같았다. 이미 어릴 적에 의사라는 꿈을 접은 나로서는 탐탁지 않은 길이었다.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내내 나의 꿈은 ‘한비야와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떤 직업인지 딱 집어내지 못해서 항상 꿈을 설명하려면 길게 해야 했고, 설명을 하고 나면 개운치 않고 애매모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10월에 난 안양에서 서울로 다시 이사를 갔고, 당연히 전학도 하게 됐다. 전학 후에도 여전히 나의 꿈은 ‘한비야와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이었다. 뭔가 그런 일을 하게 될 방법이 조금이라도 나올까하는 생각에 인터넷을 뒤적이고 나면 항상 발견한 것 없이 한숨만 얻게 되었다.
중학생으로서 마지막 겨울방학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난 확실한 꿈을 잡게 되었다. ‘한비야는 월드비전에서 일한다. 그리고 세계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힘쓰는 일을 한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것도 좋지만 꼭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고 먼 나라로 나갈 필요가 있을까? 우리나라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 우리나라의 약한 사람들을 돕자. 최저생계비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 부당한 처우에도 자신의 권리를 보상받을 수 없는 노동자들, 밖으로 나오고 싶을 때 나오지 조차 못하는 장애인들을 돕자.’ 하는 생각이 샘솟았다. 그리하여 나는 인권 변호사를 꿈으로 정하고 변호사가 되어 시민단체에 들어가 희망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뛰는 일을 하고자 했다.
난 공부에 관련된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해본 적이 없다. 가끔, 특히 수학에서 내용이 이해가 안 되서 낑낑될 때면 엄마는 나에게 학원을 권하셨다. 하지만 그 때마다 싫다고 했다. 혼자 해내고 싶었고, 혼자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 어딘가에서 가정형편으로 인해, 다른 사정으로 인해 학원이나 과외는 꿈도 꾸지 못할 아이들이 나중에 잘 된 나를 보고 자신감을 얻었으면 했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잘 되어야 한다.
서울대라는 목표에 집중하다 보니 인권 변호사라는 나의 꿈에 대한 인식이 흐려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1학년 때 책 <전태일 평전>을 접하게 되었다. 노동자로서 열악한 환경의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진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는 나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나의 꿈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지금도 처지는 별로 나아진 것이 없는 어려움에 처한 노동자들을 생각하며 분노했고, 분노하는 것에서만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 난 친구들과의 큰 다툼에 휘말렸다. 난 너무 두려웠고, 괴로웠고, 힘들었다. 그 다툼은 두고두고 나의 큰 상처로 남아있다. 나랑 다퉜던 아이들은 내가 특수반 아이들을 생각하고 도와줬던 일에 대해(별로 도와주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착한 척한다고 나를 짓밟고, 내가 나쁜 뜻으로 얘기하지도 않았던 말들을 뒷담화로 왜곡하며 나를 흔들어댔다. 정말 당황스러운 상황들의 연속이었고, 내 머릿속은 터질 것 같았다. 난 그 다툼으로 인해 가치관의 혼란을 겪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정말 옳은 것이 맞기나 할까, 난 옳게 행동하지 않았던 걸까, 내가 바보 같았구나. 하지만 결국 생각을 바꿨다. 내가 했던 행동들이 옳지 않았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제부터 그르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할 수는 없다. 나의 행동을 반성하되,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자. 자신감을 갖자. 그 다툼이 나를 약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고,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다툼으로 인해 내가 더 단단하게 두드려진 쇳덩이가 되었으면 했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 나는 더 공부를 열심히 하여야 하고, 더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생으로서의 내 공부에 충실하고 있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경험을 하고자 학교 공고는 빠뜨리지 않고 내가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있나 확인하고, 1학년 때는 학생회, 지금은 영자신문반 동아리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변호사라는 직업이 사회에 많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신문을 읽어서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일들을 알려고 노력한다. 신문을 보면 나의 꿈에 자극이 되는 기사들이 가끔 있다. 예를 들자면 2011년 초에 홍익대학교 청소부 아주머니 들이 파업을 했는데, 홍익대학교에서 명예훼손으로 2억 8천만원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는 기사였다. 청소부 아주머니들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고, 그들의 재산이 얼마 있지도 않을 것을 뻔히 알텐데, 정말 분통터지는 일이었다. 이런 사건을 접하면서 더 빨리 변호사가 되어 이런 소송이 일어나는 일을 막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변호사라는 나의 꿈은 굳이 소외계층을 위해서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여러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를 통해 우리나라의 영토와 역사를 수호하는 과정에도 참여하고 싶고, 공부에 얽매인 아이들에게 입시 걱정 없는 세상에서 살게 해주는 사람도 되고 싶다.
좁게 보면 우리 가족의 희망이 되고 싶고, 넓게 보면 약한 모든 사람들의 희망, 더 넓게 보면 우리나라를 위한, 세상을 위한 하나의 희망적인 새싹이 되고 싶다. 모든 사람들을 변호하는 일, 희망이 되는 일, 내가 누군가의 소망을 이룰 통로가 되는 것,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첫댓글 와우 어떻게 이렇게 똑똑한 딸을 나으셨어요? 아니 키우셨어요...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르네요...유전인자가 다른가...
초극도의 이기심을 자랑하는 요즘 아이들 중에도 이렇게 소망이 있고 빛과 소금이 될 인재가 있었네요....담에 뵈면 노하우좀 전수 받아야 겠어요...
자식은 랜덤이래요~^^
우리 차차차기 참학회장님이랍니다. 잘 키우세요.
왠지 마음이 짠하다.
속이 참 깊네요~ 저랑 비슷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성적은 제가 좀 낮은 듯.. ㅋ) 아무쪼록 다른 일로 실망하는 일 없이 맘 먹은 데로 나아가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