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도 목회 장로 지요 ,
장로의 자격은 [한 아내의 남편]이 장로 가 될수 있잖오
[한 남편의 아내] 이렇다면 당연히 여성을 장로로 세워야 할것 이오
말씀대로 사세요 억지로 성경 풀다가 망할수 있음을 주의 하시고,,,,
이상한 논리 세우는 목사들은 바울서신을 무시하는 경향이 많아요
그게 이단 의 시발 점 입니다
아래는 소재열 (리폼뉴스 발행인) 님이 쓰신 글입니다.
================================================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 3:1~7).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이 추구한 목회적 기능으로서의 당회가 이제는 정치적인 이익집단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리 문제로 분쟁하듯(마 20:20~28) 자리다툼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목사는 목사로서 기득권을 장로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장로 역시 목사 못지 않게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정치적인 몸부림을 계속한다. 목회자들이 모이면 자기가 시무하는 교회의 장로를 성토하고, 장로들이 모이면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의 목사를 성토한다.
칼빈의 제자인 베자(Theodore Beza 1519~1605)는 “사탄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교의를 뒤엎기보다는 그보다 쉬운 교회정치를 뒤엎기를 희망한다“라고 했다. 목사와 장로는 교회 정치 문제로 사탄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당회의 중요한 직무는 목사를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이 얼마만큼 현장 상황에 잘 접목시키고 있는지를 확인하며 위로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 권면하고 그 권면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성도의 무질서한 삶을 보일 때 권징을 통해서 돌아오게 하는 일이다. 이런 당회의 직무를 오해하여 마치 당회가 성도들을 통제하는 기능을 하고 혹은 권력의 핵심 기관이나 되는 것인양 생각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당회의 구성원 가운데 장로는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가? 헌법은 딤전 3:1~7에 해당된 자여야 한다고 말한다.
디모데전서 3:1~7 말씀은 “감독의 직분“에 관한 말씀이다.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이다. 여기 “감독“이란 어떤 자를 가리키는가? 칼빈의 견해를 보자(칼빈, 딤전주석, 454).
“바울은 ‘감독‘이라는 명칭에 모든 목사들을 포함시키고 있으며, 그 의미는 각 장로단에서 자기 형제들을 주관하도록 선발된 자를 뜻한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목사나, 사역자 또는 장로와 동일하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이 감독이라는 말은 목사뿐만 아니라 교인들 중에서 선택된 장로를 뜻한다. “장로들 모두가 감독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칼빈, 딤전주석, 461)고 한다. 장로가 목사를 감독한다는 의미에서 장로를 감독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딤전 3:1~7을 장로의 자격으로 언급한 것은 타당하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장로의 자격에 관해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선한 일을 사모해야 한다(1절).
교회 안에서 감독의 직분은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이 직분은 모든 사람이 다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직분이 힘들고 어려운 것인 만큼 감독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직분을 열망하는 자들은 자신에게 그런 중대한 짐을 감당할 능력이 있나 없나를 세밀하게 생각해야 한다.
칼빈은 “능력도 지혜도 없는 사람들이 종종 자신만만하게 통치의 끈을 쥐려 하는 것은 그들이 눈을 감고 거기에 달려들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직분을 감당하려 하는 자들은 무지에서 올바른 지식으로 자신을 온전케 해야 한다고 말한다(칼빈, 딤전주석, 453).
장로의 직분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이다. 이 일이야말로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실제로는 힘들고 어려움으로 가득한 직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어려움과 고난을 감당할 만한 능력, 장로로서 감당해야 할 모범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장로라는 환상에 빠져 그 직분을 취하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잘못이다.
정말로 바울을 통해서 주신 말씀대로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해야 한다. 선한 일이란 존귀한 일이다.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선한 일, 존귀한 일을 사모하며 실천하는 자여야 한다.
믿음과 선행은 술어적으로 서로 아주 밀접하게 묶여 있지는 않지만 이들 술어들이 목회서신에서 중심적 의의를 지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목회서신에서는 믿음(pistis)과 그 파생어들은 57회 등장하며 ‘일, 행위(ergon)‘는 20회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는 선행이란 술어가 14회나 포함되어 있다.
기독교 윤리의 독특한 성격은 ‘믿음‘이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라는 맥락 속에 위치한다는 점이며 이 때문에 믿음이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상태에서 귀결되는 결과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순종 행위로서 믿음은 그 수용적 또는 수동적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기독교 윤리에 중요하다 할지라도 믿음의 능동적 동기는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만일 믿음이 선행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새 생명의 선물을 얻었다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능동적으로 선행을 실천해야 할 믿음의 책임성이 여기에서 부각된다(이한수, 1997, 149-150).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런 선행의 모습이 보여야 한다면 장로에게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2절).
1절에서 선한 일을 사모한다는 것과 2절에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서로 관련시켜 설명할 수 있겠다. 디도서 1:7에서도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라고 한다.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다음과 같다.
“감독의 권위를 훼손할 아무런 치욕거리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잘못이 전혀 없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지만, 그의 평판에 해를 미치지 않는 일반적인 실수(이것은 제아무리 탁월한 사람에게도 있기 마련이다)의 짐을 지고 있는 것과 창피스러운 치욕으로 먹칠하는 것은 별개 문제이다.
따라서 그는 감독들에게 권위가 결핍되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선발받은 자들은 선하고도 존귀한 평판을 받으며, 두드러진 잘못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 점을 명령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단지 디모데에게 그가 선발할 종류의 사람에 대해서 지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직분을 열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활을 세밀하게 검토할 것을 지적하고 있다.“(칼빈, 딤전주석, 455)
결국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죄가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거리끼는 죄가 없음을 뜻한다(박윤선, 1971, 476). 이는 교회내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이상근, 1976, 196).
바울은 계속해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는 어떤 자인가를 구체적으로 말한다.
㉠ 한 아내의 남편 :
바울은 부부간의 신의를 지키지 않는 부정(不貞)한 사람의 상징인 일부다처제를 감독의 직분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근신 :
근신이란 온전한 마음, 절제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또한 아담한 사람이란 점잖고 정직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 나그네를 대접해야 한다 :
당시에 성도들은 많은 박해로 갑자기 거처를 옮길 필요가 있었다. 이때 감독들의 집이 은신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교회 성도들이 서로 도움을 베푸는 것은 그 시대가 요청하는 것이었으며 나그네를 접대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었다.
만약에 감독의 직분을 받은 자들이 나그네 대접하는 것을 실천하지 못했다면 성도들에게 이 같은 나그네 대접의 친절한 행위에 대한 모범을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이런 모범을 보이지 못했다면 어려움에 처한 나그네, 혹은 복음을 증거하는 나그네들은 어려움에 처했을 것이다.
㉣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 :
장로는 심오한 학문에는 부족할지라도 가르치는 재능은 있어야 한다. 장로의 직분이 사람들을 다스릴 책임을 맡은 자라면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여기서 가르치는 능력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백성에게 유익하게 적용할 줄 아는 지혜를 말하고 있다(칼빈, 딤전주석, 457).
술 마시지 않는 자, 구타하지 않는 자, 탐심이 없는 자여야 한다(3절).
술을 즐기지 않는 자란 언쟁하지 않는 자의 표현이다. 술을 즐기는 자들은 흉한 일, 다툼, 어리석은 태도, 부정(不貞) 등의 결과로 나타난다. 바울은 술을 마시는 자를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과 대조시키고, 구타하는 자를 다투지 않는 자와 대조시킨다.
그리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는 자는 탐심이 없는 자와 대조를 시키면서 장로라는 직분을 어떤 자가 감당해야 할 것인지를 말해준다.
관용하며 다투지 않는 자여야 한다는 말은 해를 당할 때 침착하게 절제하는 마음으로 견딜 줄 알며, 많은 것을 용서해 주는 사람, 모욕을 삼킬 줄 아는 사람, 지나치게 엄격함으로써 타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아야 한다. 다투지 않는 사람이란 분쟁이나 입씨름을 피하는 사람이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딤후 2:24).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4-5절).
장로에게 방탕하고 치욕스러운 생활을 하는 자녀들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수치가 될 것이다. 바울은 보다 작은 것에서부터 보다 큰 것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자기 가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모든 백성을 통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직분자가 자기 가정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여 다스리지 못한 자가 어떻게 많은 백성들을 상대로 무슨 권위를 행사할 수 있겠는가?
새로 입교한 자는 안된다(6절).
당시에 탁월한 능력과 학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게 되었지만,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고백한 직후에는 감독으로 삼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까닭은 그런 개종자들은 대개 허영심이 많아서 오만과 야심에 곧장 휩쓸리기 쉽기 때문이다(칼빈주석, 상게서, 460).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한다(7절).
외적인 행동에 관한 한 불신자들까지도 그가 착한 사람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이유 없이 모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들이 사회에서 영예롭고 정직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악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장로의 직분을 받으려면 이런 인정을 받을 정도의 정직한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이 훼방을 받게 된다. 외인에게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 이유는 바로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32문은 “왜 우리가 선한 일을 해야만 하는가?“라고 묻고 있다. 그 답으로 “그것은 우리를 보혈로 구속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상을 따라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인하여 온 삶을 드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라고 한다.
이 감사란 단지 그리스도라는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기만 하면 저절로 열리는 포도나무의 풍성한 결실인 것이다(J. Douma, 1994, 45). 장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고백을 통해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선한 증거를 얻는 삶의 모습으로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장로의 직분을 받으려고 한다면 적어도 딤전 3:1~7 말씀에서 언급한 자격만큼은 갖추어야 한다. 특히 개인적인 자질도 중요하지만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한 자가 어떻게 교회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심지어 장로의 직분을 받은 이후에라도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로 인하여 덕을 끼치지 못할 것 같으면 언제든지 본인 스스로 장로직을 사임하든지, 아니면 휴직하는 것이 본인과 교회를 위해서 유익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장로에 대한 자격이 있고 그 책임성이 막중하다. 그리고 진실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교회 이름을 팔아서, 교권 싸움이나 하고 금권이나 얻으려 하고 명예나 얻으려 하는 모든 것이 다 거짓 신앙이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게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라고 하셨다(유재원, 1988, 12). 이런 자는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님이 쓰신 글입니다.
장로의 본질에 대해서 성찰하는 책을 만나보기 어려운 것은 그만큼 교회 안에서 다루기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찌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의 모습은 현 시대 장로의 개념과는 많이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가 목양에 비중을 두고 있는 것에 비해, 지금의 장로는 주로 당회를 중심으로 교회의 지도와 행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장로의 본질을 성경적으로 회복한다는 것은 행정에 중심을 두는 장로가 아니라 목양에 목숨을 거는 장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번 명절 기간 “장로,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를 읽으며 장로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