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Scene 5. The Escape /탈출/
카르나스는 눈을 찌푸렸다. 그는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렌을 쏘아보았 지만, 렌은 카르나스의 시선을 그저 담담히 넘기고 있었다.
"지호… 그가?"
"지크힐트는 의무관에게 보냈습니다. 정신을 잃은 것 말고는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좋지 않군."
렌이 고개를 들어 카르나스를 바라보았다. 카르나스는 미간에 주름을 풀지 않은채 무언가 생각하고 있었다.
"엘마이러가 없어졌다. 엘마이러를 지키던 기사는 정신을 잃은채 발견 되었지. 외상은 없는데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어. 아마도…"
"지호… 입니까?"
카르나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다른 기사를 불렀다.
"수도경비를 강화하고 출입을 통제하라. 황궁 궁내부 소속의 행정관 지호와 앙피시아 공국의 엘마이러를 수배한다. 만일 그들이 반항할 경 우, 그들을 무력화 하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인정한다."
"넷!"
카르나스의 명령을 받은 기사가 달려나갔다. 카르나스는 고개를 돌려 렌을 바라보았다.
"황궁 봉쇄를 강화하고 수색대를 조직한다. 황궁을 빠져나가기 전에 찾아. 수도의 인파 속으로 숨어버리면 곤란해진다."
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호가 만일 엘마이러와 접촉했다면, 황후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 가 지호는 엘윈의 죽음에 대한 것도 알고 있다.
오늘 밤에 일어난 참극은 어디까지나 황후와 태후간에 일어난 세력다 툼으로 빚어진 것이다. 황후가 일부 귀족들을 끌어들여 무모하게도 태 후를 몰아내려 했고, 이에 태후가 자신의 세력을 동원하여 피의 앙갚 음을 하였다. 그리고 두 세력의 충돌 와중에 황제의 명을 받은 제국 제3기사단이 황궁으로 들어와 황제를 구해낸 것이다. 진실은 이것이 되어야 했다.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고있다. 무엇보다 황후는 그런 세력 같은 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황후의 친동생 엘마이러는 많은 귀족들과 활발하게 접촉했고, 회임이후 실제로 황후의 정치적 입 지가 상당히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황후가 헛된 야욕을 꿈꾸 게 되었다 할 지라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국은 분노할 것이다. 태후와 황후, 두명의 이방인 이 감히 제국을 좌지우지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결과로 아 직 태어나지도 않은 고귀한 황제의 핏줄이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에.
렌은 그나마 카르나스가 지호와 엘마이러를 보는 즉시 죽이라는 명령 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희망을 걸었다. 그들이 잡히더라도 목숨은 잃지 않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진실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과는 먼 곳 에 있었다.
첨벙- 첨벙-
어둠속에서 두쌍의 눈이 하수도 안을 조심스레 걷고 있었다. 지호는 엘마이러의 손을 잡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사람 키 정도의 높이를 가진 하수도 안은 지독한 냄새로 꽉 차서 어지러울 정도였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지호의 눈이 꽤나 밝아졌다 고 해도, 이런 어둠속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지호는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며 앞으로 전진했다. 황궁의 하수도는 수 도전체의 하수도와 연결된다. 황궁에서 하수도로 통하는 것은 오직 배 수로 뿐이지만, 수도의 거리에는 하수도로 직접 통하는 덮개들이 꽤 있었다.
지호는 황궁 도서관 근처의 배수로중 하나에서 이곳 하수도로 통하는 길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지금 엘마이러와 함께 더러운 하수도 속을 더듬더듬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엘마이러가 아무말 없이 따라와 주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 말이 없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걱정 스러운 일이기는 했지만.
지호는 쉬지않고 걸었다. 쉴만한 곳도 없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수도 의 하수도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수도의 하수도 덮개는 물이 빠지 도록 격자형태로 되어있다. 해가 뜬다면 빛이 새어 들어올 것이니, 덮 개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호는 이를 악물고 한걸음, 한걸음을 재촉했다.
그날 아침, 제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수도에서 벌어진 엄청난 살육극 은 그 규모와 피해도 문제려니와, 주동자들이 제국의 황후와 태후라는 점에 있어서도 엄청난 충격을 불러왔다. 수도에 있던 귀족들의 저택 몇채가 완전히 불에 탔고, 저택안에 있던 사람들은 시체도 제대로 건 지지 못했다. 고귀한 귀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더욱 충격적 인 것은 황궁 내에서조차 이 살육극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엄청났다. 제국의 황제가 볼모가 되다시피하여 목숨의 위협 을 받았고, 황후는 태후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제국의 황자, 혹 은 황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고귀한 생명 또한 빛을 보지 못하고 꺼 졌다. 다행히 카르나스 폰 트라헤른 자작, 아니 이젠 트라헤른 후작이 된 제 3기사단장의 충성과 용맹으로 황제의 목숨은 구할 수 있었지만, 제국 의 황실을 쥐고 흔든 사람들이 다름아닌 타국의 여인들이었다는 사실 은 제국 전역에 분노를 가져왔다. 더군다나 그녀들의 살육극에 목숨을 잃은 사람중에 존귀한 제국의 혈통이 끼어 있음에야.
철의 태후는 폐위되어 태후전에 감금되었고, 제국 재상 로드릭 폰 케 네스는 황제를 지키지 못한 책임으로 근신을 명령받았다. 그리고 황제 를 구한 카르나스 폰 트라헤른 후작은 단숨에 영웅이 되었다.
많은 기사들과 평민들은 트라헤른 후작을 그야말로 열광적으로 지지했 다. 거의 몰락한 것이나 다름없는, 그래서 귀족의 특권으로부터 배제 되었던 사람이 스스로의 힘과 용기로 제국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라간 것은 그야말로 현존하는 신화와도 같았다.
귀족들은 로드릭 폰 케네스 제국 재상의 근신과 함께 완전히 기세가 꺾여버리고 말았다. 벌써 몇몇의 귀족들이 황후나 태후와 결탁한 혐의 로 영지를 빼앗기고 관직을 박탈당했다. 지금은 없던 죄라도 덮어 씌 우면 피할 방법이 없는 때였다.
지금은 그저 숨을 죽이고 눈치를 보며 이 혈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 는 수 밖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때, 귀족들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 는 소식이 들려왔다. 제국 최고의 실세로 떠오른 카르나스 폰 트라헤 른 후작이 연회를 연다는 소식이었다.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홀 안을 가득 메웠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 은 삼삼오오 모여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참석한 귀족들의 눈에는 무언가 불안감이 떠돌고 있 었고, 얼굴에는 그늘이 엷게 드리워 있었다.
연회의 주최자인 카르나스 폰 트라헤른 후작, 그가 아직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카르나스 폰 트라헤른 후작은 연 회가 열리는 저택의 한 방에 앉아 렌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아직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네. 이미 수도를 빠져나간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만, 그 후의 행적이 불확실합니다. 아마도…"
"앙피시아겠지."
"네. 그렇습니다. 현재 앙피시아쪽 방면의 제국 공도와 도시들의 경계 를 강화하도록 지시했습니다만, 아직 별다른 보고는 없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곧 모습을 드러낼거다. 경계를 늦추지 말도록."
"저… 그들이 수도를 빠져나갔다면 더 이상 위험요소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렌이 조금 주저하면서 카르나스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황제의 뜻이다. 반드시 생포해야 해."
렌은 침묵했다. 황제의 뜻이라면 더 이상 말이 필요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앙피시아 공국을 공격한다."
"일주일! 너무 촉박합니다. 아무리 앙피시아가 소국이라도 최소한 석 달은..."
렌이 놀란 목소리가 채 이어지기도 전에 카르나스가 말을 끊었다.
"일주일 후에 작전 기안서가 올라와 있지 않다면, 작전 참모들의 목을 치겠다. 작전목표는 앙피시아 공왕과 왕위 계승자를 포함한 왕족 전원 의 처형, 그리고 앙피시아 공국 수도의 완전한 파괴다."
렌의 모습을 바라보며 카르나스가 차갑게 말했다.
"이건 영토확장 전쟁이 아니다, 렌. 점령지 같은 건 필요없어. 그들은 제국의 심장부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었다. 이건 응징이야. 대 제국 황 제의 분노에 대륙이 떨게 될 것이다. 알겠나? 렌."
렌이 아무 말 없이 서있자 카르나스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당분간 지호와 엘마이러의 수색을 지휘하는 일에만 전념하도록. 앙피 시아 정벌은 지크힐트에게 맡기겠다. 나가봐도 좋아, 렌."
렌은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밖으로 나갔 다. 카르나스는 렌이 나간 방문을 쳐다보았다.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는 것을 렌이 싫어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황궁 사건 이후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오랫동안 염원하던 일들은 이제 시작이건만, 벌써부터 렌은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 다. 그녀를 이때까지처럼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
카르나스는 잠시 생각하다간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밖에서는 제 국의 내로라 하는 귀족들이 전부 모여있을 것이다. 다름아닌 바로 자 신, 카르나스 폰 트라헤른을 기다리며.
그래, 이제는 더 이상 너희들에게 쫓기는 것도, 짓밟히는 것도 끝이 다. 이젠 내가 너희를 짓밟아 주겠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나를 피해 쫓겨 다녀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카르나스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이젠 저들에게 미끼를 던져 줄 시간이다. 아주 달콤하고 거부하지 못할 유혹의 미끼를. 아마도 저 들은 덥석 삼켜버릴 것이다. 자신들의 몸을 사리는 데는 누구 못지않 게 탁월하면서도 탐욕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족속들이 바 로 저들이니까. 그러나 그 미끼가 자신들을 파멸로 이끌어 갈 것이라 는 것을 저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
카르나스는 문을 열고 홀로 나섰다.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귓가에 울려 왔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 의 시선이 일시에 카르나스에게로 집중되었다. 부러움, 두려움, 경탄, 혹은 질시의 눈빛들. 카르나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화려한 홀을 향 하여 가볍게 한걸음을 내딛었다. |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즐독 ㄳ
감사^^*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