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계서원은 선조3년(1570) 간재 이덕홍이 세운 오계정사의 후신으로 정사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지자 선조33년(1600)에 큰아들인 이시가 쌍계마을로 이건하고 한호의 글씨로 관성재,관서헌의 편액을 걸었다. 현종6년(1665)에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道存祠를 건립하였다. 1691년 오계서원으로 승격하고 1699년과 1707년의 대홍수로 물길이 바뀌어 서우너의 침수 피해가 있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고종때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19년에 복향하였고 1978년에 道存祠를 재건하였다.
| 이 건물은 오계서원에 부속된 정자이다. 오계서원은 간재 이덕홍 (艮齋 李德弘) (1541~1596)이 세운 오계정사의 후신으로, 1663년(현종(顯宗) 에 건립되어 간재 선생을 배향하였으며, 1691년(숙종(肅宗) 17)에 오계서원이 되었다.
간재는 퇴계의 대표적인 문인의 한 사람으로 『간재집(艮齋集)』 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임란때는 왕을 의주까지 호종한 공로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원래 오계서원은 오계의 상류에 있었으나 임란때 소실된 후, 쌍계언덕으로 옮겼다가 1711년(숙종(肅宗) 37)에 현위치인 '부곡(釜谷)'으로 이건하였다. 군자정은 서원의 경역에서 동쪽으로 20 m가량 떨어진 산허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전면에는 '군자당(君子塘)'이란 연못이 있다.
건립시기는 서원의 이건년대와 같은 1711년경으로 보여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막돌허튼층쌓기한 기단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마루 전면과 좌측면의 4본만 원주를 사용하였다.
좌측의 정면 2칸 측면 2칸을 통칸으로 하여 우물마루를 꾸몄으며 우측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대청의 3면에는 모두 판벽을 둘렀는데 전면에는 세살문을, 측면과 배면에는 널문을 달았다. 방과 마루사이에는 온연귀한 문틀을 세운 후 전면쪽에는 가운데에 세살문을 둔 외짝의 들어열개문을, 후면쪽에는 2짝 들어열개문을 각각 설치하였다.
온돌방의 전면에는 2짝 세살문을 설치하였는데 문지방에는 가운데설주를 세웠던 홈이 남아 있으며, 좌측면의 뒤쪽 칸의 상방에도 가운데설주를 세웠던 홈이 남아있다. 5량가인데 충량상부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하였으며 귀에는 선자연을 걸었다. 내부에는 단청을 한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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