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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IF 웹진>
나 = 내 안에 있는 신, 을 찾아 떠난 1년 동안의 여정, 책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한 달 전, 나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한 회에 7-8명 남짓, 소규모 요가 수업을 할 수 있는 ‘요가 + 하우스’에 내부 공사를 마치고 입주했다. 인테리어라야 단순했다. ‘화이트(white) & 우디(woody)’, 그리고 저렴!이면 무사통과였다. 심신은 고단했지만 신명나게 이사를 진행했고, 인생의 큰 프로젝트 하나를 수행한 기분에 요즘 나는 자면서도 웃는다.‘먹고 잠자며 요가하고 공부하는 집'에 종일 고요히 머무는 것,이 최근 2-3년 내 나의 가장 커다란 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엔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고, 움직이지 않을 땐 아예 꼼짝 않는 내 본성 탓도 크다. 팔자에 대형 역마살이 한 비야씨 못지않게 꼈다던 내가 이렇게 변했다. 물론 단순히 늙고 지쳐서만은 아닌 것 같다.
이사 뒷정리와 후유증으로 증폭된 과민성 알러지가 잦아들면서 요즘은 점점 눈이 일찍 떠진다.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고 바로 무릎으로 매트까지 기어가 베란다의 주황빛 토분들, 그 안에 풍성한 초록잎들과 갈색 가지로 성장한 식물들을 눈 가늘게 뜨고 바라본다. 그렇게 5층 꼭대기 마루 위로 하얗게 난 커다란 창, 그리로 무한히 쏟아지는 황금빛 햇살 아래 가만 앉아 있으면, 왠지 더 명상도 잘 되고 아사나(요가 동작)도 잘 되는 것 같아 나의 존재는 한껏 고양된다. 그러면서 혹시 나도 ‘너 그동안 왜 그렇게 살았니?’ 누가 물으면 이젠 영화 속 줄리아 로버츠처럼 충만함으로 활짝 웃으며 중얼거릴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지금 이렇게 살려고...!’
책과 사람 사이 질긴 ‘인연의 끈’
어젯밤(10월 7일 밤) 집 부근 홍대 앞 심야 영화관에 혼자 달려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보았다. 책을 덮은지 사흘만이었다. 기다림이 지루했다. 책이 그만큼 내겐 감동이었다. 오랜만에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기쁨에 조금씩 아껴가며 가급적 천천히, 마치 맛난 사탕 빨아먹듯 야금야금 읽었다. 그리고 객석에 앉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책 못지 않은 감동의 쓰나미를, 그러나...!
사실 내가 처음에 이 책을 알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지만 만남의 밀도만은 강렬했던 막강 여행쟁이 친구가 하나 있다. 편의상 그녀의 이름을 수단, 이라고 하자. 수단은 늘 가고 싶은 여행지를 골라 닉네임을 바꿔가며 사용하는 습성이 있다. 아마 그녀의 이름을 그렇게 때마다 부른다면 올해 초에는 한동안 알라스카, 였겠지, 그리고 그녀는 정말 올 여름, 그 곳을 한 달 간 불현듯 다녀왔다. 그것도 아직 어린 아이 둘까지 데리고. 활기와 열정이 가득한 아름다운 그녀, 수단의 이야기는 혹 다음에 할 기회가 있을 테고 아무튼 그녀는 지금까지 내게 아주 좋은 ‘여자와 여행’ 관련서 두 권을 강력 추천해 주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오늘 소개할 책,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이다. 나머지 한 권의 제목도 혹 궁금하실 분을 위해 귀띔해 드리자면 ‘나는 유목민, 바람처럼 떠나고 햇살처럼 머문다’, 리타 골든겔만이란 미국 여인의 책인데 그 역시 멋지고 대단하다. 그녀 역시 마지막이자 주요 여정은 주로 인도네시아였던 것도 인상적이고. 다시 본론으로.
무아, Eat, Play, Love라고 혹시 봤어요?
무아가 꼭 읽어봐야 할 것 같은데...?
라는 메시지를 올해 3월쯤 그녀, 수단으로부터 받았다.(요가할 때 내가 주로 쓰는 닉네임이 무아, 다) 당시 한참 돌아다니며 요가 수업을 하던 중이라 나는 못 봤다 무심하게 답했으며 그러자 그녀는 ‘정말 강추!’, 라고, 꼭 읽어보라고, 무아 생각이 많이 났다고 했다. 책 제목을 그리 알려주니 아직 원서로만 구할 수 있는 책인 줄 알았다. 영어 공부도 할 겸 한번 볼까, 하지만 난 당분간 여행 계획도 여행에 대한 매력도 크게 느끼지 못하던 터라 이내 그 책 제목을 뇌리에서 지웠다. 그래봐야 지난 번 리타의 유목민 책처럼 이혼, 여행, 자기 위안을 키워드로 한 여정일 테니 비슷비슷한 수준과 구조의 ‘백인 여성 (유복한) 자아 발견기’ 아닐까 했던 것 같다. 솔직히 유목민,은 정말 멋진 책이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그것도 영어를 잘 구사하는 백인 여자니까 가능한 거였어, 어디서든 무사통과던 걸?이라는 꼬인 심사가 아주 없던 게 아니었으니까. 아울러 거기엔 얼마간 선망과 질투도 섞여 있었겠지? 그렇게 ‘먹기사(이하 이렇게 표현함)’와 나의 첫 인연은 서서히 멀어져갔다.
그로부터 꼭 한 달 쯤 후, K대에서 몇몇 교수들을 대상으로 내 스타일의 소규모 방문 요가를 진행하던 무렵이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내게 학회 다녀온 기념이라며 표지에 ‘Eat,Play,Love' 라 씌여진 페이퍼 백을 선물해 주었다. 평소 정말 진지하게 요가를 수련하던 역사학 전공의 젊고 말 그대로 ‘쿨-’한 여교수였다.
- 이 책 한번 보세요. 출발할 때 공항에서 우연히 사서 집에 돌아올 때까지 짬짬이 단숨에 읽었어요, 진짜 너무 재미있어요, 그리고 무아 생각이 계속 나서요, 드리려고 오늘 가져왔어요.
이건 또 왠 인연인가 싶었다. 기쁜 마음으로 책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역시 나의 흥미는 3부 전체 주제 가운데 2부, 기도하라, 에 국한되었다. 두 번 째 ‘먹기사’는 그래서 영어 원서로, 2부만을 우선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2부의 3분의 1쯤 읽었을까, 요가하우스를 위해 찾던 집이 갑자기 나타났고, 이어 살던 집도 계약되었고, 나 역시 갑자기 이사 준비를 해야 했다. 이는 더 이상 돌아다니는 요가강사 노릇에 지쳐서가 아니다, 요가에 관한 것이라면 늘 감사하며 일했지만 가는 곳마다 장소 문제로 애를 먹어서였다. 그 후 두 달 동안 ‘먹기사’ 독서의 진전은 없었다. 다만 잠 들기 전이나 이동할 때 간편한 페이퍼 백이라 늘 손에 쥐고 다니며 2부만을 줄곧 읽어나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책 전반에 관해 강하게 흥미가 일기 시작했다. 그래, 이사하자마자 어서 다 읽어야지, 2부 뒷부분이 너무 궁금했다. 그 까닭은 이러했다.
세상의 모든 신들, 그리고 갈색 개
한 마디로 리즈(저자, 엘리자베스 길버트, 이하 리즈로 표기)가 절박하게 신을 찾는 과정과 거기서 일어나는 체험이 정말 ‘아니 이거, 진짜 장난 아니잖아!’의 수준이었달까.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런저런 마음공부, 수행, 명상서, 신지학 등에서 언급하던 집중에서 명상, 명상에서 또 에너지 각성, 거기서 쿤달리니 체험과 나아가 삼매까지, 오랜 경전 속, 회색빛 틀에 잘 정돈된, 그러나 이구동성으로 모든 앞선 이들이 유사하게 서술하던 대부분 신과의 합일 시리즈에 나온 깨달음의 체험(이것이 비록 그녀의 전 존재가 완전히 변화, 성스럽게 ‘구조화’된 게 아니라 일시적인 그녀의 그저 트랜스 상태, 순간적 절정 체험만을 기록한 것일지라도, 즉 완전한 해탈, 색계 무색계 삼매까지 도달하여 마음대로 드나드는 절정의 경지를 그녀가 온전히 성취한 것이 아니더라도)이 피가 뛰고 숨이 들고 나는 생생한 모습으로 눈앞에 차례차례, 리즈라는 영적으로 봐선 다소 예민함만이 남다른 뉴요커에 의해 책 속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신기했다. 어머, 이렇게 쉬운 거였어? 뭐 그리 거창한 고행의 나날을 보낸 것도 아니잖아! 졸리면 눈꺼풀을 자르면서까지, 제 살을 찢으면서까지 해야 하는 게 그런 깨달음의 길 아닐까? 내 요가 선생(네덜란드 남자) 말에 의하면 동양의 방식은 지나치게 준엄하고 딱딱하다는데 나 역시 그런 선입견에 오래도록 묶여 있던 것일까?
어쩌면 우리와 비슷하게 세속적이고, 스스로 굴을 파서 파란만장한 골짜기 깊숙이 스스로를 밀어 넣는 성미에, 사랑과 인정에 헤프고, 남자에 자주 올인하고, 때로 자신의 영혼까지 타인에게 송두리째 먹혀버리는 그런 여자, 지난 날 나처럼 수다스럽고 허풍도 감동도 과장도 심하고 글쓰기를 좋아하고 어떤 성공한 한국의 여성 작가처럼 아름답고, 이혼하고, 스캔들 많은 베스트셀러의 작가에다, 미국 시골 크리스마스 농장 출신의 소탈한 그녀, 리즈. 그러나 당시, 누구보다 작가로서 각광받던 뉴요커 리즈가 인도에 가서 단 넉 달만에 그처럼 놀라운 경험을 사기 친 것 같지 않게 생생하게 해버리다니.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나로선, 그게 늘 꿈이자 소망인...즉, 그녀처럼 블루의 광선 속에서 꿈틀거리는 꼬리뼈 부근 잠재적 에너지를 아주 뜨겁게 생생히 느끼고, 그것이 정수리를 통과한 후, 온몸에 전류처럼 흐르는 경지, 이어 이 책 66장의 제목처럼 ‘어느 목요일 오후, 신과 하나가 되’는 것...!
따라서 그때 그 일이 생겼다는 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느 목요일 오후, 신전 뒤에서 안주인의 역할을 수행하던 도중, 명찰까지 그대로 단 채 난 갑자기 우주의 입구로 빨려 들어갔고, 신의 손바닥 한가운데 떨어졌다.
.......중략............
나는 내 육신을, 사원을, 지구를 떠나 시간의 계단을 밟아 허공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허공 안에 있었지만, 또한 허공이기도 했고, 그와 동시에 허공을 바라보기도 했다. 허공은 끝없는 평화와 지혜의 장소였다. 허공은 의식과 지능을 갖추고 있었다. 허공은 신이었고, 이는 곧 내가 신 안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물리적인, 역겨운 방식은 아니다. 나, 리즈 길버트가 신의 허벅지 근육 속에 끼어 있었다, 이런 식은 아니란 말이다. 나는 신의 일부였고, 또 신이기도 했다. 우주의 조그만 조각인 동시에 우주와 정확히 똑같은 크기였다.
........중략........
내가 느끼는 감정, 그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그저 기본적인 감정, 물론 그곳은 천국이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사랑도 능가했지만, 황홀경은 아니었다. 흥분되지도 않았다.....그저 극명할 따름이었다. ......‘나는 여자고,미국인이며, 수다스럽고, 작가다’ 이런 생각들이 참 귀여우면서도 쓸모없게 느껴졌다. 이렇게 내 무한함을 느낄 수 있는데 그런 자아라는 시시한 상자 속에 날 쑤셔 박는다고 상상해보라. ‘이렇게 완벽한 행복이 내 안에 있는데 왜 난 평생 행복을 찾아다닌 걸까?’
-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2부 중에서 인용
아, 이렇게 생생한 표현이라니! 언젠가 그처럼 신의 손바닥 안에 돌연 끝없이 굴러 떨어져 완전한 ‘공(空)’의 상태에 한번이라도 생생히 머물기를 늘 열망하는 나로선 그녀가 참으로 부러웠고 신기했고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래, 그래서야, 명상까진 지금, 여기서 가능해도 삼매는 뭔가 달라야 해, 역시 앞선 스승들의 권유대로, 고립, 집중 명상, 기도에 완벽하게 몰입하는 시기가 필요해.
사실 전부터 이런 마음이 들 때면 나는 항상 내 아버지를 떠올리곤 했다.
- 인도, 뭐 하러 가고 싶다고?
- 명상 좀 하려구요...!
- 명상, 별 거 없다, 니 엄마랑 일 년만 같이 살아 봐, 엄마가 옆에서 뭐라 하든 대꾸도 화도 내지 않고...묵묵히...그렇게 할 수 있음 해 봐라, 그게 아마 크게 깨닫는 일일 거다.
빙긋, 웃으며 말하시던 나의 생불 같은, 천사 아버지...히스테리 환자인 마누라(엄마) 수발에 오늘도 발에 땀띠가 나도록 집안 살림에 매진하시는, 나의...심장 깊숙한 고요의 근원지, 내 아버지...
그래서일까. 나 역시 요가,하면 꼭 인도에 가야 하나, 이름 난 아쉬람을 찾아 다녀야 하나, 인도 사람 흉내 내고, 사리 같은 옷도 따라 입고, 미간 사이 붉은 빈디 찍고 그러는 거 참, 상징이 아닌 그저 물질 수준의 추수라니, 그런 거 넘 별로다, 아버지처럼 은근 그랬었는데. 깨달음의 길이란 어디까지나 밖으로 티 내지 않고 조용히 걷는 길이라 여겼었는데...처음으로 인도나 미얀마 쪽으로 내 무거운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그만큼 리즈의 책 2부, 기도하라,는 요가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가볍게 읽고 치울 수준이 아니었다. 강렬하고도 진실한 체험이자 깨어나는 영성의 놀라운 기록이었다. 끝으로,
지구 상의 어떤 종교적 전통이든 거기에는 언제나 정확히 이런 경험을 세상에 전해주는 신비로운 성자들과 초월자들이 존재한다. 불행히도 그들 중 대다수는 체포되거나 살해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의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 결국 내가 신에 대해 믿게 된 진리는 매우 간단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예전에 임시 보호소에서 데려온 정말로 근사한 개를 키운 적이 있었다.
열 개 정도의 종이 섞인 잡종이었는데 각 종의 장점만 물려받은 것 같은 갈색 개였다. 사람들이 내게 "이 개는 무슨 종이에요?" 라고 물으면 ,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그냥 갈색 개예요."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당신은 어떤 신을 믿죠?"라고 물으면 나는 그냥 편하게 대답한다. "나는 위대한 신을 믿어요."
-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2부 중에서 인용
세 번째, ‘먹기사’와 나의 인연은 영어로 책의 2부를 대충 마치고 전체를 빨리 읽고 싶어 안달이 날 무렵, 우연히 다시 찾아왔다.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오던 공항 서점 안에서였다. 어디서 많이 본 책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먹기사’의 영문판과 똑같은 표지로 단장한 번역본이었다. 세상에, 그것은 이미 2007년 11월에 나온 책이었다. 영화 개봉과 함께 서점에 다시 좍 깔린 것이다. 158주간 아마존 1위 등극을 마치고 한국에서 새로운 붐이 다시 일었달까. 여행, 음식, 내면의 평화..., 요즘 이 땅의 가여운 많은 이들이 절로 매료되고 간절히 바라는 키워드들이 거기 그렇게 다 종합세트처럼 씌여 있었다. 누군들 지금 맛있게 먹고 간절히 기도하고 열렬히 사랑하고 싶지 않으랴?!
집에 돌아와 일 주일, 나는 열 일 제치고 그 책에 몰두했다. 자, 이쯤 되면 내가 책을 산 것이 아니라 책이 내게 걸어왔단 편이 맞지 않을까. 정말 모처럼 쾌락적인 독서에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처음부터 나는 이 책을 다시 아름다운 내 모국어로 정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질긴 인연이라니...마침 시작도 그럴싸하게 1부는 이탈리아 편이었다.
내게 ‘감각의 제국’을 허하라
13년 전, 집을 나옴과 동시, 엄마며 학교 선생이며 뭐며 다 그만 두었을 때 나는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작가가 되거나, 출가하여 득도하는 여승, 혹은 조로아스터교쯤의 여사제가 될 줄 알았다, 하하. 하지만 내가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쾌락,이었다. 그래봤자 하늘이 열리고 땅이 꺼질 만큼의 대단히 모험적 쾌락의 여정도 못 되었지만 아무튼 나는 나를 온전히 방기하고 싶었다. 내 본능과 무의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한 번 다해 주고 죽자! 가 당시 혼자 된 나의 결심이었다. 그 가운데 백미는 역시 남자, 그리고 음식이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남자는 책을 쓴 리즈처럼, 그녀의 ‘촉촉한 갈색 눈의 데이비드’처럼, 깊은 위로는커녕 새로운 종류의 번민만 잔뜩 선물하였고, 나 역시 그녀처럼 다음에 파고 든 것이 각양각색 감각의 세계였다.
천연향에 관한 소설을 쓰겠다고 후각과 조향의 세계며 록 음악의 역사에 취해 살기도 했고 패션에 빠져든 적도 있고 여행에 미친 적도 있었다. 대부분 공허와 슬픔으로 끝난 감각의 마지막 기착지는 미각이었다. 미세한 커피맛과 달콤한 케이크, 세상에서 하나뿐인 프렌치 파이, 차와 조리 기구의 세계에까지 마음껏 탐닉해 봤다, 정말 원 없이, 나중엔 치즈 케이크 굽느라 허리가 다 굽어질 만큼, 녹녹치 않게. 이 모두가 금욕,과 아주 잘 어울린 척 가장하던 나를 어려서부터 잘 알던 사람들에겐 기절초풍할 노릇이었고 나 역시 그런 나의 마음을 스스로도 한동안 잘 납득할 수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그리고 그 답을 나는 바로 이 책, ‘먹기사’에서 마침내 찾았다. 리즈의 통찰력에 다시 한 번 반했음은 물론이다.
이탈리아의 역사는 국민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일견 정확해 보이는 결론을 도출하게 만들었다.
이 세상은 너무도 타락하고, 거짓 약속이 남발하고, 불안정하며, 과장되고, 평등하지 않기에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감각으로 경험한 것만 믿어야 한다.(이건 지금 우리 아이들 세대의 내면이기도 하다) 이런 믿음이 이탈리아를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감각적인 국가로 만들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이탈리아인들은 눈뜨고 봐줄 수 없을 정도로 무능한 장군, 대통령, 독재자, 교수, 공무원, 언론인, 사업가들은 참아주지만, 결코 무능한 성악가, 발레리나, 창부, 배우, 영화감독, 요리사, 재단사는 참지 못한다. 무질서와 악재와 기만의 세상에서 때로는 아름다움만이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덕목이기도 하다. 오직 예술적 탁월함만이 타락하지 않는다. 쾌락은 결코 흥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한 끼의 식사만이 유일한 가치로 통용된다. (이 대목에서 난 무릎을 쳤다, 내가 요리를 잠시 배우고 미식가 행세를 할 시절, 내가 바로 이 심경과 꼭 같았기 때문이다...훗.)
아름다움의 창조와 감상에 스스로를 바친다는 것은 진지한 과업이다. 그것은 꼭 현실 도피의 수단만이 아니라 때로는 현실에 발붙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수사학과 플롯만 남을 때는 말이다. .......중략...........
그럼에도 나는 시칠리아 사람들이 대대로 그들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과 내 존엄성 회복에 도움이 되었던 것이 결국에는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즐거움의 가치를 깨닫는 것이 한 개인의 인간성에 닻이 되어준다는 생각이다. .....중략.....우리는 삶을 부여받았고, 이 생애에서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뭔가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 먹고, 사랑하고, 기도하라 중 1부에서 인용.
이 대목을 읽을 때 나는 마치 오랜 영혼의 동지,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심신이 충분히 건강해진 다음 신을 찾아 떠난 2부, 인도의 여정 역시 내 최근 몇 년 간 심리학이며 불교, 요가, 마음공부를 찾아다닌 행로와 비슷해서 퍽 재미있었다. 나를 좀 아는 사람들이 자꾸 내게 이 책을 권한 까닭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심지어 이프 웹진에서는 책 읽기를 막 마친 다음 날 어떻게 알고 바로,‘먹기사’에 대한 서평을 써달라는 전화까지 해왔다.
자, 이제 드디어 마지막 3부가 남았다. 저자는 일 년 동안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3분지 1씩 나누어 모든 여행지와 책의 구성을 기획했다. 하여 이탈리아 넉 달, 인도 넉 달, 그리고 다음 여행지는 인도네시아 발리였다. 책의 구성 또한 평이한 발상이면서도 참 잘 만들어냈다 여겨진다. 108개의 소주제가 있는 이야기들은 자파 말라, 즉 인도에서 유래한 염주를 뜻하는 것이다. 1년 간의 이야기가 108개의 구슬에 꿰이는 것처럼 하나하나 지나치게 길지 않고 명료하게 그러나 모두 잘 연결되어 있었다. 나머지 1개의 염주의 의미 또한 깊다. 이는 직접 찾아 읽어 보시길 권한다.
네 개의 다리로 서고, 심장으로 살며.
쾌락과 영성 사이 균형을 찾아 리즈가 떠나는 마지막 여행지는 사랑, 이란 키워드의 인도네시아 발리였다. 짐작대로 그녀는 여기서 자신의 몸에 꼭 맞는 옷을 찾아 입게 된다. 바로 정열적인 사랑과 뜨거움을 고스란히 지닌 채 그녀를 그 어떤 새장에도 가두지 않는 다정다감 자유로운 한 남자와 만남과 사랑...물론 어느 독자의 리뷰에서 지적대로 아직 얼마나 살았다고 완벽한 사랑, 운운하겠냐만, 글은 언제나 과거형을 쓸 수 밖에 없고 우린 그저 그녀의 사랑이 완벽하기를, 미래형으로 축복하기만 하면 되는 일 아닐까.
3부를 구성하는 이야기 또한 균형감이 돋보인다. 그저 남자 에피소드로만 도배하지는 않았단 이야기다. 3부가 지루하다, 실망스럽다는 평이 아마 여기서 나왔던 듯 싶은데, 나로선 3부도 무척 흥미로왔다. 발리의 속살을 조금 엿본 기분이랄까...?
발리의 9대 주술사 끄뜻, 우리로 치면 세습 박수무당에 해당하는 파파 할아버지, 나이는 65세에서 120세 사이로 추정, 다음은 중세로 치면 마녀사냥감인 홀로 사는 여성(발리에서 여자 혼자 되었다는 것은 중세의 마녀의 삶과 화형 당할 일 외에 그닥 다르지 않다.) 자연치료사 와얀, 그리고 리즈, 그녀의 운명의 남자, 셋의 비중이 마치 세 발 달린 솥단지처럼 잘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셋은 발리에서 그녀를 피라미드처럼 둘러싸고 나머지 여정을 풍성하고 뜻 깊게 만들어준다.
발리의 9대 주술사 끄뜻은 세속과 영성 사이 균형을 추구하는 그녀에게 그림 하나를 건네준다. ‘지상에 발을 꼭 붙일 수 있도록 네 개의 다리에 머리가 없고(머리로 세상을 보지 말라고) 대신 얼굴이 심장에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달린’ 그림, 끄뜻은 아울러 그녀에게 발리식 명상법을 강조한다.
‘명상을 할 땐 웃어라, 몸 속의 간까지 웃게 웃음을 머금고 앉아 있어라’
기 쓰고 힘 주고 이 악물고 하는 건 뭐든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랑으로 혼돈에 빠진 리즈에게 단지 한 마디를 한다, 즐겨.
치료사 와얀은 리즈에게 새로운 남자를 만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간접적으로 주선하고 나아가 리즈가 참다운 나눔의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 거기 존재하는 여자다. 물질을 운용하는 지혜까지 아울러 역설적으로 깨우쳐주는. 그리고 발리의 자연, 해변, 섬...이어 그녀는 드디어 99장에 표현한대로 ‘내 몸에 완벽하게 맞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와 함께 살거나 그를 자신이 사는 곳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더 이상 사랑이란 이름으로 ‘서로의 영혼을 먹어버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다만 사랑할 뿐이다.
그녀는 그렇게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고 건강해진 심신으로 마침내 세속과 영성의 균형까지 이룬 후 자신이 살던 곳을 향해 힘차게 떠난다. 앞으로 그녀의 새로운 여정은 이렇게 펼쳐질 것이다. 발리, 호주, 브라질, 미국 사이를 오가며. 호주, 미국, 발리, 브라질. A.A.B.B. 그녀는 압운까지 완벽하다며 함박웃음을 터뜨린다. 뱃속의 간까지 크게 웃도록.
지독한 상실과 인생의 거대한 위기 이후 1. 쾌락, 2. 영성, 3. 둘 사이의 균형이란 3개의 주제를 3부, 108개의 에피소드에 꿰여 잘 엮은 화환 모양 염주와도 같이 만든 소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사실 대충 잘 읽히고 그저 가볍게 읽을만한 책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지금 내 인생에 인내심 많은 친구처럼 끈질기게 다가와 끊임없이 속삭인다.
자, 너도 이제 그만 커밍아웃하지 그래? 뭘? 네가 뭘 하든 어디서 잠 자든 넌 계속 집요하게 찾고 있었잖아, 인생의 해답과 신, 그리고 진리에 대한 그 지겨운 질문들...자, 그러니 용감하게 시작해 봐, 그렇게 오래 찾아 헤맸으니 이젠 말할 때도 됐잖아. 그럼 나는 신과 처음 대화를 시작했을 때 상기된 리즈처럼 얼굴을 붉히며 묻는다. 대체 뭘...? 그러면 내면의 신, 곧 내 자아의 일부이자 우주의 전체는 이렇게 답한다.
‘나에 대한 이야기, 내가 분명 네 안에 존재하며 그래서 지금 드디어 네가 이렇게까지 살게 되었단 그 모든 이야기...’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쉰다. 정말 그래야 할까? 꼭 그래야 하나? 그래서, 지난 반 년 이상 교재 형식으로 건조하게 쓰던 내 요가에 관한 책은 지금 갈 길을 잃고 마구 표류 중이다. 리즈 길버트, 라는 똘똘하고 아름다운 어느 작가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라는 책을 결국 치열하게 만난 그 시간 이후.
사족: 줄리아 로버츠가 리즈 길버트 역을 맡은 개봉 영화 이야기는 생략하겠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관객이 판단할 몫이므로.
그러나 ‘원작을 넘어선 영화가 있기 힘들다’는 진리를 재삼 확인할 수 있었고,
내면이 풍요롭고 영민한 작가 역을 맡기에 줄리아는 너무 깡말랐고 감정 표현이 부족했으며,
영화의 장면과 음악, 주제는 서로 겉돌았고,
특히 인도에서 깨달음의 과정(내가 그렇게 기대에 차 달려가 보고 싶던)을 그리기에
영화 제작자나 감독의 영성은 영화란 현실의 어려움을 넘어서기에 엄청 역부족이었던 듯싶다.
정말이지 나로선 영화를 보지 말 걸 그랬다 싶다.
영화 보는 내내 그 가격에 책이나 한 권 더 사서 소중한 친구에게 선물할 것을,
하는 마음이었다면 너무 지나친 혹평일까.
아, 줄리아는 이탈리아어를 조금만 더 잘 연습했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적어도 이탈리아 편만은 나름 흥미로왔을 텐데.
첫댓글 저도 그 영화 봤어요 ^^
어땠어요, 여유는...? 참, 쪽지로 주소 주면, 먹기사, 아직 안 샀으면, 보내줄게요, 어때요? 우리끼리 이벵. 난 잡았다, 네가 술래야를 가질 거거든요, ㅎㅎ
우리의 로망이죠. 저는 무아처럼 긴 글을 달 정도는 안되고 그저 부럽다... 아니 근데 제게 영문판 먹기사를 보내시겠다굽쇼. 너무하시네..
한글판 보내면 안 될까요? 쪽지에 주소 적어줍쇼, ㅎㅎ
무아언니~ 혹시 내가아는 언니맞나..저 수진이요
저도 이영화 개봉날만 기다리다 개봉첫날 조조봤는데...이 글 읽으니 책이 더 재밌겠어요
무아언니의 요가하우스,, 궁금하네요^^
쪽지 보냈습니다, 글게, 책이 더 좋아요. 제가 아는 분이어얄 텐데...ㅎㅎ 아님 모 어때요, 그쵸?
무아님, 행복해보이네요. 그대가 행복하니 나도 좋아요 ^^ 난, 실망하지 않게 영화먼저 보고 책 읽을까봐요. ㅎ
치열한 가을 보내시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지난 글쓰기 시간, 내 손 잡아주던 따스한 그대의 손길, 생생합니다. 감사! 그리고 평화 기원!
_()_
_()_...저도 함께...
으아... 울 둘째딸이 그토록 보라고 권하던 그 영화, 그리고 그 원작... 꼭 읽어볼게요. 조만간... 동학도 사놨는데... 읽을 거 많다~
나도 책 읽고 영화 개봉될 날만 기다렸는데, 안 봤어요. 영화평이 전부 안 좋더라구요. 좋은 책 읽고 괜히 영화 봤다 실망하게 될까봐 책 읽은 거로 만족하기로 했죠. 왠지 줄리아 로버츠가 리즈 역으로 안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주변에 이 책 뿌리느라 돈 꽤나 쓰고 있습니다. ㅎㅎ
그쵸, 책이랑 영화랑 차이 많이 나죠, 물론 영화에 약점 많은 것, 인정합니다. 백인뉴요커의 배부른 자아찾기란 말, 맞아요. 하지만, 누구나 내면의 소용돌이는 겪는 거잖아요. 그리고 절실하면 평화를 얻는다, 는 과정 그 자체에만 주목한다면 꽤 진지한 자기탐험서이자 영성을 뭐랄까여, 신장? 발전? 하는 데 퍽 구체적으로 전 다가오는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