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 족보에 있는 용이천가례봉선사(用伊川家例奉先祀)란?
<뜻>
용用: 사용하다
이천伊川: 사람 이름
가례家例: 집안의 예
봉선사奉先祀: 제사를 받들어 모신다.
용이천가례(用伊川家例奉先祀)란, 직역하면 ‘이천 집안에서 제사를 모신 사례를 차용한다’는 뜻.
<내용>
정태중(1006~1090)에게는 정명도(1032~1085), 정이천(1033~1107)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큰아들인 정명도가 아버지보다 5년 먼저 죽었다. 그 후 아버지인 정태중이 죽자 큰아들 정명도에게 ‘앙’이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종법을 둘째 아들인 정이천이 이어받게 되어 이천이 제사를 모셨고, 세월이 흘러 정이천이 죽자 다시 큰집의 큰아들인 ‘앙’에게 종법을 물려주느냐, 아니면 둘째 아들인 정이천의 아들인 ‘단언’이 이어받느냐 하는 것이었다. 많은 논란 끝에 정이천의 아들인 ‘단언’이 종법을 이어받게 된다. 이천가례봉선사(伊川家例奉先祀)란, 이천의 집안의 경우 ‘장자가 있었지만 동생이 종법을 이어받은 것’을 말한다.
한 설언을 보면 형 명도와 동생 이천의 집에 누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자 저 사람이 왜 왔는지 알아 맞추기 내기를 하기로 하였는데 둘 다 장목단검(長木短劍) 이란 괘가 나왔다. 동생은 낫이라고 하고 형은 이 겨울에 낫이 왜 필요할까? 겨울에는 장작을 패야하니 도끼라고 하여 형이 이겼다고 할 정도로 두 사람 다 글에는 당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집안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형이 먼저 돌아 가시니 제사를 형의 아들이 모셔야 하나 아들은 어려서 발언권도 적어 삼촌인 이천이 제사를 모셔야 한다고 하여 이천집에서 제사를 모시면서 모든 재산도 가진 권세도 누리는 형국이 되어 이때부터 작은 집에서 제사를 모시기 위해 이천의 집안 예도를 차용하여 제사를 모신다는 의미로 ‘용 이천가례 봉선사’라는 말이 나왔다고 하며, 우리나라 양반 세도가의 안동 지방에서 널리 사용되었다고 하며, 우리 중리 문중도 60년대 만든 학성이씨 대동보에는 안동일직손씨의 아들 정헌에게 용 이천가례봉선사(用 伊川家例奉先祀) 라는 글이 실려 있다.
옛 어른들의 전해오는 설에 의하면 중리에서는 인부족. 세부족으로 매헌공 묘사를 모실 때 근방에 가지도 못하였다고 하며, 삼척 심씨 할매도 있었다는 설도 있으나 그 후손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이 없으며, 우리 중리 문중의 웃 어른들은 우리 매헌공 할배 묘사에 참석하는 것이 평생 소원이라고 하시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 중리 어른들이 얼마나 설음을 받았으면 그 말이 적혀 있는 비석을 밤에 가서 도끼 뒷등으로 비석 윗 한쪽을 부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다행히 세월이 흘러 신세대 디지털 스마트시대에 접어 들면서 이 모든 것이 흘러간 옛 이야기일뿐 이제는 모두가 세월 속에 묻혀져 가는 것 같다
현재 젊은 세대 중에 누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매헌공 겸익 할배가 돌아가시기 4년 전에 손씨 할매가 먼저 돌아가셨으며(1641년). 당시 창발 할배의 나이가 46세, 정헌 할배의 나이가 16세로 30살 차이가 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일단 정헌 할배는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 창발 할배가 먼저 종법을 먼저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높게 보인다.
창발 할배가 돌아가셨을 때(1653년), 정헌은 24세이고 필성은 18세로 필성도 결혼을 하지 않았을 상황을 예상해 보면 먼저 결혼한 정헌 할배가 종법을 다시 이어 받았을 것으로 보여 매헌공의 종법은 겸익->창발->정헌으로 이어져 왔다고 보는 것이 필자는 합리적이라고 보나 창발에서 필성-시태-몽상까지도 내려 가면서 어느 순간에 넘어 갔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후 중리에서는 창발-필성-시태-몽상-경도까지 5대로 약 150여년간 독자로 내려오다 보니 중리에서는 인부적 세부적으로 살기 어려운 시대를 거치면서 뚜렷한 벼슬을 한 사람이 없는 상태이었으나 돌래측에서는 12세 반계磻溪)공 양오할배는 뛰어난 한문학자이고, 죽오(竹烏)공 근오(覲吾)할배는 참봉에서 병조정랑(兵曹正郞)까지 오르는 등 똑똑하고 권세가가 있었고 사람도 중리 보다는 훨씬 많다 보니 종법도 돌래측에서 관장하면서 자연적으로 제사가 넘어간 것으로 보이고, 그에 따라 연답 산도 자연적으로 돌래쪽에서 물려 받은 것으로 보이며, 족보도 150년 동안 몇 번 새로 만들면서 용이천가례봉선사(用 伊川家例奉先祀)라는 글이 들어간 것으로 사료된다.
1997년도에 만든 서면파보에는 고 수전님과 동환님 등이 강성문씨와 일직손씨 즉 중리와 돌래 사이에 화합을 위해 족보에서 ‘용이천가례봉선사’라는 글자를 빼기로 합의하고 중리가 큰집으로 하고 묘사도 같이 지내고 서로 왕래하게 되었다. 2003년도에는 매헌정사도 같이 재건하기로 상호 합의가 되어 공동 부담하여 2005년에 완공하였다.
병조정랑(兵曹正郞)은 조선시대 육조(六曹)의 정5품 관직. 이 · 호 · 예 · 병 · 형 · 공조의 중견실무 책임자들이었다. 정원은 고려시대에는 문종대를 기준으로 각 부마다 2인이 표준이었으나 이부만 1인이었다. 그리고 이부 고공사(考功司)와 형부 도관(都官)에 각각 2인이 더 배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405년(태종 5) 1인씩 증원해 각 조 3인이 표준이었다. 현재 군수나 서기관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