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이 천년 전 쯤 우리 역사에 있어 후삼국의 그 혼란했던 시대적 격동기에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도읍지였었음을 모르는 철원사람은 없을 것이다.
궁예왕이 송악(지금의 개성)에서 901년(신라 효공왕 5년)에 후고구려를 세우고, 곧이어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꾼 후 靑州사람 一千戶를 철원으로 옮기면서 우리 역사의 몇 되지않는 도읍지가 된 것이다. 그 뒤 국호를 다시 태봉으로 고치고 관제를 정비하는 등 미륵신앙에 의거한 개혁을 통해 새세상을 건설하려 했으며, 옛 고구려의 유민들을 규합해 철원을 근거로한 대동방국을 펼쳐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원대한 야망이 918년 왕건세력의 모반에 의해 한낱 꿈으로 화해 버리고 만다. 우리의 역사 속에는 이런 밖으로의 세력확장을 꾀하고 민족의 역사를 웅대하게 펼쳐보려 했던 몇번의 시도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내부적 다툼에 의해 그런 시도가 좌절되는 내부지향적이고 반역사적인 정권의 출현으로 무산되는 일들이 있어 온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역사적 해석이 있지만 평범한 필부의 입장으로도 역사서에 기록된 표면적 행간만으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언젠가 이 란을 통해 얘기했던 勝者의 입장에서 기록된 역사서만으로 역사를 이해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한 역사현장이 철원이었고 그 유적이 철원에 남아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현재 비무장지대 안의 풍천원 벌판에 궁예의 도성址가 남아있다. 우리에게는 전쟁으로인해 역사적 자료가 될만한 건축물이라고는 근대유적에 속하는 옛 철원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던 부서진 건축물 몇점이 고작이다. 그나마 천년 전 궁예도성이 비무장지대 안에 놓인 탓에 타의에 의해 보존 되었던 것이다. 이것도 이번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를 통해 알려진 조사논문에 의해 많은 부분 자세히 밝혀졌지만, 차제에 더 정밀하고 새로운 史實을 갖추자면 남과 북측의 철원군 당국자의 공동조사를 위한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잠깐동안의 도읍지이기는 했어도 이것은 철원이 신라 천년의 역사를 거쳐 우리 역사의 적통을 잇는 고려의 태동이 좀더 대륙에 가까운 곳 철원에서 발현됐다는 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것이라 하겠다. 어쨌든 그 이후 궁예의 북벌 정신은 이어져 고려왕조 내내 영토확장은 이어졌고, 더우기 그 고려왕조의 말기의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최영으로 이어지는 `북벌정책`은 결국 북진의 임무가 맡겨진 한 장수의 반란으로 무산되어져, 그로인해 조선 왕조의 개국으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이번 고석정 철의 삼각전적관에서 태봉제의 일환으로 [학술제]로서 행해진 [태봉의 역사와 문화]라는 주제의 세미나는 다른 행사에 비해 성황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분명 의미있는 일이였다. 이는 철원의 군정을 책임진 분들 뿐만이 아니라 철원주민들 모두가 노력해서 진작에 정리됐어야 될 일이였고, 앞으로도 계속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바르게 풀어나가야할 부분이다. 이번 세미나에서 발표된 연구논문들의 내용을 살펴보자면 우리나라의 저명한 사학자들이 참으로 다양한 시각으로 태봉국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 특히 두번 째 주제발표였던 [궁예의 미륵사상과 그 의미, 국민대 김두진]는 궁예의 사상은 벌써 천년 전에 신분적 계급을 없애려는 사회개혁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로 읽혀진다. 이는 당시로서 철원지역에 팽배했던 미륵정토사상이 토대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으로 좀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하겠다. 그와 관련하여 조성된 도피안사의 [비로자나불상]은 그래서 더욱 귀중한 사료라 할 것이다.
이외에도 `태봉국에 관한 주제발표`로 이어진 [궁예 세력의 형성과 호족, 정청주 여수대], [태봉의 정부조직, 조인성 경희대], [궁예 정권의 성격, 이재범 경기대] 등의 논문들은 그 나름대로 태봉국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아주 유익했으며, 오후에 이어진 `궁예도성지 조사 및 발굴 주제발표`는 [궁예도성의 구조와 현실태, 이재 육사], [궁예도성의 조사방법, 장호수 문화재청], [궁예·태봉의 불교조각 시고, 최성은 덕성여대]는 유적에 대한 깊이있는 궁구였으며, 3부에 이어진 `종합토론`은 철원사회가 앞으로 `태봉국의 도읍지`인 철원을 어떻게 문화적으로 잘 정립하고 포장해 나가야할지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이번 세미나에 관한 의미를 필자가 얘기하지 않아도 철원주민 모두가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긴하나, 이번처럼 학자들에 의해 학술적인 차원에서의 발표만이 아니라, 지역의 향토사학자에 의해 수집되는 태봉국과 궁예왕에 관련하여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民話나 전설, 역사적 지명, 풍속 등을 정리한 자료가 같이 발표되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모든 노력은 철원사회가 모색해야할 앞날의 경제유발 요소의 다변화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이해가 앞서야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따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