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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북-최일남
(전략)
"아버님, 어저께 성규 학교에 가셨어요?"
예사로운 말씨와는 달리, 굳어 있는 표정 위로는 낭패의 그늘이 좍 깔려 있었다. 금방 대답을 못하고 엉거주춤한 형세로 며느리를 올려다보는 민 노인의 면전에서, 송 여사의 한숨 섞인 물음이 또 떨어졌다.
"북을 치셨다면서요."
"그랬다. 잘못했니?"
우선은 죄인 다루듯 하는 며느리의 힐문(詰問)에 부아가 꾸역꾸역 치솟고, 소문이 빠르기도 하다는 놀라움이 그 뒤에 일었다.
"아이들 노는 데 구경 가시는 것까지는 몰라도, 걔들과 같이 어울려서 북 치고 장구 치는 게 나이 자신 어른이 할 일인가요?"
"하면 어때서. 성규가 지성으로 청하길래 응한 것뿐이고, 나는 원래 그런 사람 아니니. 이번에도 내가 늬들 체면 깎았냐?"
"아시니 다행이네요."
송 여사는 후닥닥 문을 닫고 나갔다.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며느리는 퇴근한 남편을 붙들고, 밖에 나갔다가 성규와 같은 과 학생인 진숙이 어머니한테서 들었다는 얘기를 전했다. 진숙이 어머니는, 민 노인이 가면극에 나왔다는 귀띔에 잇대어, 성규 어머니는 그렇게 멋있는 시아버지를 두셔서 참 좋겠다며, 빈정거리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아들은 민 노인에겐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냥 덤덤한 낯빛이다가 식구들이 저녁을 마친 후에야 돌아온 성규를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너더러 누가 그런 짓 하랬어?"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한 발자국 내어딛는 순간, 노기를 한꺼번에 모은 호령이 그를 사로잡았다. 영문을 몰라 아버지와 어머니 쪽으로 눈알을 번갈아 돌리는 성규를 향해, 이번에는 어머니가 차디차게 말했다.
"잘하는 일이다. 할아버지를 끌어내지 않으면 늬네들 춤판은 성사가 안 되니?"
나는 또 뭐라고, 하는 식의 가벼운 대응이 성규의 안면에 퍼지면서 입으로는 씩 웃음을 흘렸다.
"너 날 놀리는 거니?"
첫마디와 달리 착 가라앉은 아버지의 음성에는, 분에 떠는 사람에게 일쑤 있음직한, 삭지 않은 가래가 조금 끓었다. 정색을 하고 쳐드는 성규의 눈빛에도 서리가 내린 인상이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웃었잖아."
"웃은 게 잘못이라면 사과할게요. 할아버지를 그런 자리에 모신 건 그러나 사과할 것이 못 됩니다."
"할아버지까지 동원한 게 잘한 짓이니?"
"동원이란 말이 싫습니다. 누가 누구를 동원한단 말입니까. 또 그 일이 어째서 잘하고 잘못하고로 구별 돼야 하는지, 저는 통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잘하고 잘못하고의 인식에서는 벗어나는 일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일에 합당한 재능을 갖고 있을 때, 한쪽은 그걸 표현할 기회를 주어야 마땅하며, 한쪽은 기꺼이 그 기회에 편승해서, 일이 잘 되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너 이제 보니 참 똑똑하구나. 그래서, 일은 잘 됐니?"
"대성공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기꺼이 응하지 않았을 게다. 네가 유혹했어."
"결과는 마찬가지예요. 저는 그 날 할아버지에게서 그걸 확인했습니다."
"너는 할아버지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 특히 내가 취하고 있는 입장에 대해 대단히 불만이지?"
"그럴 것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할아버지에 대한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그 논리를 그대로 저와 연결시키고 싶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기특하구나. 그러니까 너만이라도 할아버지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겠다는 거냐 뭐냐. 지금까지의 네 행동을 보면 그런 추측을 가능케 하더라만."
"그것도 맞지 않는 말이에요. 도대체 할아버지와 저와는 갈등이 있었어야 말이죠. 처음부터 갈등이 없었는데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할아버지와 갈등이 있었다면, 그건 아버지의 몫이지 저와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오히려 전 세대끼리의 갈등이 다음 세대에서 쾌적한 만남으로 이어진다면, 그건 환영할 만한 일이고, 그게 또 역사의 의미 아니겠습니까?"
"뭐야, 이놈의 자식, 네가 나를 훈계하는 거얏!"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버지의 손바닥이 성규의 볼때기를 후려쳤다. 옆에 있던 어머니의 쇳소리가 그의 뺨에 달라붙었다.
"또박또박 말대답하는 것 좀 봐."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그렇다고 아버지의 생각 속으로만 저를 챙겨 넣으려고 하지 마세요."
성규는 얻어맞은 자리를 어루만지지도 않고, 되레 풀죽은 목소리가 되었다.
"네가 알긴 뭘 알아. 네가 내 속을 어떻게 알아."
"그런 말씀은 이제 그만 좀 하셨으면 해요. 안팎에서 듣는 그 말에 물릴 지경이거든요. '너는 아직 모른다. 너도 내 나이가 되어 봐라…….' 고깝게 듣지 마세요. 그 때 가서 그 뜻을 알지언정, 지금부터 제 사고와 행동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뜻에서 제가 할아버지를 우리 모임에 초청한 사실을 후회하지 않을 뿐더러,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심리적으로 격리시키려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해하려는 모순을 저도 이해합니다. 노상 이기적인 현실에의 집착이 그걸 누르는 데 대한, 어쩔 수 없는 생활인의 감각까지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고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제 나이는 또 할아버지의 생애를 이해합니다. 북으로 상징되는 할아버지의 삶을 놓고, 아버지와 제가 감정적으로 갈라서는 걸 비극의 차원에서 파악할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할아버지가 자신의 광대 기질에 철저하여 가족을 버린 건 비난받아야 할 일이나, 예술의 이름으로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나름대로의 예술을 완성했니?"
아버지의 입가에 냉소가 머물렀다.
"그건 인식하기 나름입니다. 다만 할아버지에게서 북을 뺏는 건, 할아버지의 한(恨)을 배가시키고, 생의 마지막 의지를 짓밟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만은 갖고 있습니다."
방 안의 민 노인이, 천천히 응접실로 나온 건 그 때였다. 자기 때문에 성규가 궁지에 몰려 있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였는데, 아들은 집안의 분란을 더 키우고 싶지 않았던지, 민 노인 쪽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성규에게만 소리를 꽥 질렀다.
"건방 그만 떨고 어서 가서 잠이나 자. 다시 그런 짓을 했다간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줄 알아."
제 방으로 돌아가던 성규는, 민 노인과 눈이 마주치자 재빠른 웃음을 보냈다. 음모꾼끼리의 신호 같았다.
정작 일이 크게 터진 건 그런 일이 있은 지 일 주일쯤 후였다. 저녁 준비를 하다 말고, 성규의 친구로 짐작되는 학생의 전화를 받은 송 여사는, 대뜸 신음으로 착각할 만한 의미 불명의 소리를 지르더니 이내 펄쩍펄쩍 뛰었다.
"뭐라고? 우리 성규가 데모하다가 잡혀갔다구. 언제 어디서. 지금 어딨어? 이 일을 어쩌지. 이 일을 어떡한다지."
송 여사는 곧바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고, 만날 장소를 약속하고는 허둥지둥 밖으로 뛰쳐나갔다. 황급히 서두르다 지갑을 안 가지고 갔기 때문에 다시 되돌아왔을 때, 민 노인과 수경이가 자세히 말 좀 해 보라고 매달리는데도, 누구 신경질만 돋우느냐는 투의 외마디 말을 남기고 사납게 문을 닫았다.
"난들 아니. 가 봐야지."
며느리의 자기를 쳐다보던 눈이 사뭇 비뚤어져 있었다고 느낀 민 노인의 가슴에도, 갑자기 구멍이 뚫리는 걸 의식했다.
아들 내외는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다. 민 노인은 수경이를 시켜, 아들이 먹다 남은 양주를 찾아 안주도 없이 조금씩 조금씩 홀짝거렸다. 얼마를 지났을까. 취기가 야금야금 전신으로 번지자, 민 노인은 극히 자연스럽게 북을 껴안고 북채를 잡았다. 뚝딱 둥 둥, 둥둥둥, 뚝딱. 북소리를 듣고 온 수경이는, 북 한 번, 할아버지의 눈 한 번씩을 교대로 쳐다보고는, 그전 모양으로 궁상맞다는 타박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이 북으로 팝송 반주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수경아, 늬 오래비가 붙들려 간 게, 나나 이 북과도 관계가 있겠지."
둥 둥 둥 딱 뚝.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아니에요. 그보다도 궁금한 게 있어요. 오빠와 저와는 네 살 터울이거든요. 그런데 오빠는 할아버지의 북소리에 푹 빠져 있고, 솔직히 저는 잡음으로만 들려요.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그 녀석이 내 역마살을 닮은 것 같아. 역마살과 데모는 어떻게 다를까."
딱 둥둥 딱.
"할아버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세요. 제 말은 들은 둥 만 둥 하구요."
손녀의 새살거림을 한옆으로 제쳐놓으며, 민 노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더 크게 북을 두드렸다.
● 줄거리
선천적인 예술적 기질과 역마살로 인하여 처자와 가정을 외면한 채 살아온 주인공 민 노인은 유배자(流配者)와 별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민 노인의 아들은 자신의 사회적 체면도 있고, 아버지 민 노인이 북[鼓] 때문에 가정을 버리고 허랑 방탕한 한 평생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북[鼓]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 왔다. 그러나 아들 성규의 친구들이 놀러온 날 저녁에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은 북[鼓]에 대한 향수가 점점 멀어져 갈 무렵, 손자 성규의 친구들이 권유를 하자, 민 노인은 그동안 놓았던 북채를 다시 잡았던 것이다. 민 노인은 손자 친구들이 돌아간 다음 아들로부터 핀잔을 듣는다. 그러나 가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민 노인의 예술적 기질과 삶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손자 성규뿐이었다. 어느 날, 성규는 할아버지 민 노인에게 자기 학교의 봉산 탈춤 공연에 참여해 달라는 제의를 한다. 수많은 고민 끝에 민 노인은 이를 승낙한다. 그리고 아들 내외의 눈을 피해 북을 꺼내 와서 젊은 패들과 연습에 돌입했다. 비록 연배가 한참 차이나는 젊은이들과의 연습이었으나 민 노인에게는 큰 즐거움과 행복이 아닐 수 없었다. 공연 당일, 민 노인은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잃었던 예술혼을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러나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진숙 어머니의 고자질로 아들 내외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민 노인을 탓함과 동시에 아들 성규를 호되게 꾸짖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성규는 데모를 하다가 붙잡혀 들어갔다. 손녀 수경이와 함께 집에 남게 된 민 노인은 '아무래도 그 녀석이 내 역마살을 닮은 것 같아. 역마살과 데모는 어떻게 다를까.'하고 생각하면서 손녀의 물음에도 아랑곳없이 둥둥둥 더 크게 북을 두드렸다.
● 핵심정리
▶갈래 : 중편 소설, 가족사소설
▶배경 : 1980년대 서울.
▶성격 : 사실적, 현실 비판적
▶시점 :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제재 : 한 가정 안의 세대 간의 갈등
▶주제 : 예술혼과 인간의 본원적인 삶.
▶출전 : [문학사상](1986)
● 등장인물
▶민 노인 : 평생을 북을 치며 살아온 예인(藝人)으로서 가족을 버리고 방랑하다가 아들 집에 얹혀사는 노인.
▶아들 : 홀로 고학해야 했던 불행한 과거에 집착하여 아버지 민 노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중년 사내.
▶성규 : 민 노인의 손자. 할아버지의 광대적 삶을 이해하려는 대학생.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갈등을 화해시키려 노력하는 인물.
● 이해와 감상
최일남의 작품 세계에는 소시민적 삶의 풍경들이 주로 담겨 있다. 그의 소설 속에는 우리의 50년대 이후의 사회적 풍속이 풍자적으로 제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당대의 궁핍한 삶의 참담한 모습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참담한 소시민적 삶의 세태 속에서도 따뜻한 인간애를 비롯한 인간성 회복이란 주제 의식이 밀도 있게 형상화되어 있다.
‘흐르는 북’은 1986년 <문학사상>에 발표된 작품으로서 제10회 이상 문학상(李箱文學賞) 수상작이다. 이 작품에는 80년대 우리 사회의 현실적 단면과 중산층의 이기적 삶의 세태를 배경으로 하면서 속물적 삶과 본원적 삶과의 심한 갈등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아들 대(代)를 지나 손자 대(代)에서 그들의 본원적 삶이 다시 빛을 얻게 된다는 감동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결국 ‘흐르는 북’은 현대 사회 속에서 상처받은 윤리가 비명을 울리는 것에 대한 정감의 기록인 것이다.
평생을 북을 치며 방랑하다가 아들 집에 얹혀사는 민 노인(민익태)과 그에게 상처받고 고학으로 입신한 아들 사이에는 오랜 단절로 인해 회복하기 힘든 갈등이 자리한다. 이 갈등 구조에 대학생인 손자(성규)가 등장해 할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화해시키려 노력한다.
민익태 영감의 생애가 요약되어 있는 북을 둘러싼 가족 간의 갈등, 특히 민대찬과 민성규 부자간의 갈등이 단순히 세대 간의 대립 차원을 넘어서 역사적인 의미로 재생산되는 것은 소설의 결말 부분이다. 마치 ‘태평천하’의 마지막 대목을 연상시키듯 갑작스럽게 소설적 세계를 뒤흔들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성규가 데모하다 잡혀갔다는 사실이 친구를 전화를 통해서 알려진 것이다. 이처럼 할아버지에 대한 손자의 애정은 탈춤이라는 형태로 일치되거나 수렴되는 차원을 넘어서 당대의 사회적 모순에 대한 개혁과 비판의 행동으로 구체화된다. 민성규의 행동은 아버지 만대찬의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가치에 대한 맹목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즉 민대찬의 출세지향적이고 가족우선적인 현실적인 합리성이 정착민의 삶을 대표한다면, 민익태 영감의 역마살과 민성규의 데모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상을 향해 현실의 굴레를 박차버리는 유랑민의 삶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민익태 영감과 민성규는 동일하면서 다르고, 구별되면서도 일치한다.
이처럼 최일남의 ‘흐르는 북’은 '할아버지-아버지-손자'로 이어지는 세대교체를 통해서 한국 현대사의 한 흐름과 함께 인간이 근원적으로 안고 있는 존재론적 고민을 담아내고 있다. 누구나 삶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현실과 이상, 안정과 변혁의 갈등을 세대 간의 대립과 화해를 통해서 그려 내고 있는 것이다.
▶ 제목의 의미 :
이 작품에서 민 노인의 삶의 궤적(軌跡)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소재가 '북'이라면, '흐르다'라는 용어는 세대 간의 갈등이 극복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할아버지 세대를 부정하는 아버지 세대에 의해 '북'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손자에 의해 보존되며 되살아나고 있는데, 이는 표면적으로 단절된 것처럼 보이는 세대라 할지라도 내면적으로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과 고통을 함께 하고 이를 같이 극복해 나가야 하는 공동의 과제를 안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흔히 강이나 역사를 '흐른다'고 표현하듯이 세대 간의 갈등 속에서도 할아버지의 북소리가 이어지고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세대 간의 이해와 화합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2008학년도 수능 언어영역 기출문제
[1~4]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연습이 끝나고 막걸리 집으로 옮겨 갔을 때도, 아이들은 민 노인을 에워싸고 역시 성규 할아버지의 북소리는, 우리 같은 졸개들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명인의 경지라고 추어올렸다. 그것이 입에 발린 칭찬일지라도, 민 노인으로서는 듣기 싫지 않았다. 잊어버렸던 세월을 되일으켜 주는 말이기도 했다.
“얘들아, 꺼져 가는 떠돌이 북쟁이 어지럽다.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말아라.”
민 노인의 겸사(謙辭)에도 아이들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닙니다. 벌써 폼이 다른걸요.”
“맞아요. ㉠우리가 칠 때는 죽어 있던 북소리가, 꽹과리보다 더 크게 들리더라니까요.”
“성규, 이번에 참 욕보았다.”
난데없이 성규의 노력을 평가하는 녀석도 있었다. 민 노인은 뜻밖의 장소에서 의외의 술친구들과 어울린 자신의 마음이, 외견과는 달리 퍽 편안하다는 느낌도 곱씹었다. 옛날에는 없었던 노인과 젊은이들의 이런 식 담합이, 어디에 연유하고 있는가를 딱히 짚어 볼 수는 없었으되.
두어 번의 연습에 더 참가한 뒤, 본 공연이 열리던 날 새벽에 민 노인은 성규에게 일렀다.
“아무리 단역이라고는 해도, 아무 옷이나 걸치고는 못 나간다. ⓐ모시 두루마기를 입지 않고는 북채를 잡을 수 없어.”
“물론이지요. 할아버지 옷장에서 꺼내 놓으세요. 제가 따로 가지고 갈게요.”
“두 시부터라고 했지?”
“네.”
“이따 만나자.”
“아버님, 어저께 성규 학교에 가셨어요?”
㉣예사로운 말씨와는 달리, 굳어 있는 표정 위로는 낭패의 그늘이 좍 깔려 있었다. 금방 대답을 못하고 엉거주춤한 형세로 며느리를 올려다보는 민 노인의 면전에서, 송 여사의 한숨 섞인 물음이 또 떨어졌다.
“북을 치셨다면서요.”
“그랬다. 잘못했니?”
우선은 죄인 다루듯 하는 며느리의 힐문에 부아가 꾸역꾸역 치솟고, 소문이 빠르기도 하다는 놀라움이 그 뒤에 일었다.
“아이들 노는 데 구경 가시는 것까지는 몰라도, 걔들과 같이 어울려서 북 치고 장구 치는 게 나이 자신 어른이 할 일인가요?”
“하면 어때서. 성규가 지성으로 청하길래 응한 것뿐이고, 나는 원래 그런 사람 아니니. ㉤이번에도 내가 늬들 체면 깎았냐.”
“아시니 다행이네요.”
송 여사는 후닥닥 문을 닫고 나갔다.
-최일남, 「흐르는 북」-
1. 위 글의 서술상의 특징과 그 효과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여 인물의 내적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②특정 인물의 시각에서 서술하여 그의 내면에 공감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③ 성격과 행위의 괴리를 보여 주어 인물이 처한 심리적 상황을 부각시키고 있다.
④ 서술자가 인물과 사건을 권위적으로 논평하여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⑤ 시대적 배경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사회 현실의 문제를 실감나게 드러내고 있다.
2. 위 글의 공간적 배경에 대한 해석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막걸리 집’은 ‘민 노인’이 신세대와 만나 인간적인 소통을 하는 공간이다.
②‘춤판’은 ‘아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유대감을 확인하는 공간이다.
③‘춤판’은 ‘구경꾼들’이 공연 내용에 반응하며 전통 예술을 향유하는 공간이다.
④‘춤판’은 ‘민 노인’이 신명 나게 북을 치며 자신감을 회복하는 공간이다.
⑤‘집’은 ‘며느리’가 사회적 체면을 중시하여 자신의 허영심을 억압하는 공간이다.
3. ㉠~㉤에 대한 이해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②㉡: 부담감을 떨치고 상황에 적응하고 있다.
③㉢: 상황에 몰입하여 무아지경의 상태에 있다.
④㉣: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⑤㉤: 상대방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려고 애쓰고 있다.
4. ⓐ와 ⓑ를 바탕으로 ‘민 노인’의 예술에 대한 태도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은?
①예술은 예술가의 고난과 인내를 통해서 성취되는 아름다움의 결정체이다.
②예술은 대접을 받지 못하더라도 품위 있는 격식을 잃지는 말아야 한다.
③예술은 어려움에 처해 있을지라도 시대의 이상을 꿋꿋이 지켜야 한다.
④예술은 청중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통해서 성취되는 사회적 산물이다.
⑤예술은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바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정답 및 해설>
[1-4] 현대소설 - 최일남, ‘흐르는 북’
작품해제 : 이 작품은 서울의 한 중산층 가족의 삶의 모습을 통해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로 이어지는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합을 보여 준다. 할아버지(민 노인)와 아버지(민대찬)의 갈등은 가치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북’은 민 노인의 삶의 궤적을 보여 주며, 실리적인 가치보다는 정신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예술 정신과 전통 세계의 가치관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아버지 때문에 불우한 유년 시절을 겪은 민대찬은 아버지의 무책임한 태도를 비판하며, 실리적인 가치와 세속적인 명예를 추구한다. 그리고 아들 성규에게도 자신과 같은 삶의 태도를 강요한다. 그러나 성규는 새로운 세대의 입장에서 할아버지의 삶의 방식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이는 민대찬과 아들 성규의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은 가족 구성원들 간의 갈등을 사실적으로 그린 가운데, 성규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대의 가치관을 통해 세대를 넘어서는 화합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주제] 예술혼과 인간의 본원적인 삶의 추구에 대한 세대 간의 인식 차이 및 화합
1. 비판적 사고(서술상의 특징 파악)
정답해설 :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는 작품으로, 제시된 부분은 주로 민 노인의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손자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편안해 하거나 공연을 앞두고 설레며, 북을 치고 나서 자기 몫을 해냈다는 느긋함을 느끼는 민 노인의 내면에 공감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답] ②
[오답피하기] ① ‘의식의 흐름’ 기법은 이 글에 나타나 있지 않다. ③ 성격과 행위의 괴리를 보여 주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민 노인의 북을 치는 행위를 통해 민 노인의 성격이 잘 드러나고 있다. ④ 서술자가 인물과 사건을 권위적으로 논평하는 대목을 찾을 수 없다. ⑤ 이 부분에서는 시대적 배경에 대한 묘사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2. 추론적 사고(공간적 배경에 대한 이해)
정답해설 : 이 장면에서 ‘집’은 민 노인과 아들 내외(특히 ‘며느리’)와의 갈등이 벌어지는 공간이다. ‘며느리’는 아들 성규의 학교에 가서 북을 친 시아버지(민 노인)의 행위를 마치 죄인 다루듯 하며 힐문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민 노인은 ‘성규가 청하길래 응한 것뿐이며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사회적 체면을 깎았다는 것을 아시니 다행이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며느리’가 사회적 체면을 중시하여 자신의 허영심을 억압하는 내용은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답] ⑤
[오답피하기] ① ‘민 노인’은 ‘막걸리 집’에서 손자 또래의 신세대를 만나 인간적인 소통을 하고 있다. ②~④ ‘민 노인’은 ‘춤판’에서 아이들과 어우러져 신명나게 북을 치며 유대감을 확인하고 있으며,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다. 또한 ‘춤판’에서 ‘구경꾼들’은 공연 내용에 호응하여 공연자들과 함께 전통 예술을 향유하고 있다.
3. 추론적 사고(인물의 심리 파악)
정답해설 : ‘이번에도 내가 늬들 체면 깎았냐’는 말에는, 손자의 학교에 가서 북을 친 자신을 비판하는 ‘며느리’에 맞서서,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밝히고자 하는 ‘민 노인’의 심리가 나타나 있다. 따라서 ㉤에 대해 상대방인 며느리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려고 애쓰고 있다고 이해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
[답] ⑤
[오답피하기] ① ㉠에는 북을 통해 예술혼을 발휘하는 ‘민 노인’에 대한 ‘아이들’의 존경과 애정이 담겨 있다. ② ㉡에는 자기를 주목하는 구경꾼들에 대한 부담감을 떨치고 상황에 적응하려는 ‘민 노인’의 심리가 나타나 있다. ③ ㉢에는 공연 상황에 몰입하여 무아지경에 빠진 ‘민 노인’의 상태가 나타나 있다. ④ ㉣에서 시아버지의 행위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속내를 드러내는 ‘며느리’의 심리를 읽을 수 있다.
4. 추론적 사고(인물의 태도 파악)
정답해설 : ⓐ에는 북을 칠 때 모시 두루마기라도 입어서 나름대로의 격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민 노인’의 생각이 암시되어 있으며, ⓑ에는 자신의 북 가락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데 대한 ‘민 노인’의 안타까움이 나타나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예술은 대접을 받지 못하더라도 품위 있는 격식을 잃지는 말아야 한다’는 ‘민 노인’의 예술에 관한 태도를 미루어 알 수 있다. [답] ②
[오답피하기] ① ‘예술가의 고난과 인내’를 떠올릴 수 있는 단서를 ⓐ, ⓑ에서는 찾을 수 없다. ③ ‘시대의 이상을 꿋꿋이 지켜야 한다’는 태도와 연결시킬 수 있는 단서를 ⓐ, ⓑ에서는 찾을 수 없다. ④ ⓑ를 통해 청중들의 적극적인 호응의 필요성을 연상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는 ⓐ와는 연결되지 않으므로 적절하지 않다. ⑤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예술’에 대한 단서를 ⓐ, ⓑ에서는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