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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자서전(自敍傳)
우리시대의 타서전(他敍傳)
우리는 寶城사람이다.
우리 寶城中 10회는 1930년대 말이나 1940년대 초 일본국적(日本國籍)으로 태어났다
우리들 대부분은 전라남도 보성군 주변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우리들 대부분은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우리는 어려서 광복을 맞았으나 미군정 신탁통치의 주민이 되었다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다. 6.25전쟁 때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인민으로 3개월을 지내다가 다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 등 다섯 번의 국적 변동을 겪는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사람들이다.
그동안 20세기는 21세기가 되었고 농업중심의 1차 산업 시대가 산업화를 거쳐 정보화 시대가 되었다. 10회 대부분은 도시에 살고 있으며 보성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꽃봉오리 같던 소년소녀였던 우리들은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가 되어 소년(少年)과 노년(老年) 사이가 두 눈썹 사이보다 더 가까운 것을 체험하면서 인생무상을 절감한다.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는 지금 보성과의 인연이 점점 엷어지고 있다.
10여년 이상 보성을 가지 않은 사람도 있고, 보성에는 땅도 집도 없으며 친지들도 몇사람 남아있지 않은 사람이 많다. 심지어 선선까지 옮겨온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성사람이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타지에서 살았던 기간이 몇 배나 길어도, 보성이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숙명성을 지녔다.
보성군은 호남에서 전북 남원의 운봉 다음으로 고지대의 분지다. 해안의 4개 읍면도 산비탈에 펼쳐진 농어촌이다. 보성의 산은 바로 들이고, 들이 바로 산이고 강이다.
보성군은 1300여 년 동안 한 번도 폐군되거나 현 등으로 강등된 일이 없는 역사성을 지녔다.
그렇기에 질풍노도의 유목성과 백화난만의 해양성을 겸전한 보성에서 자란 사람은 독특한 개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충무공, 김구, 박유전이 그렇듯이 보배로운 땅, 寶城에 오면 보성에 온 그 사람이 보배가 되었다.
이런 말을 하면 “가진 것 없는 난쟁이 거시기 큰 것만 자랑한다.”고 비웃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나이 열아홉에 총을 들고 혁명의 주역이 되어(갑신정변) 주권자(고종)의 경호대장이 된 열혈청년 서재필의 고향이 어디인가.
철저한 신분사회에서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온갖 차별을 삼키며 머슴살이만 하던 땡무식 일꾼이, 나라가 망했다고 지게를 벗어제끼고 의병대장이 된 안규홍의 고향이 어디인가.(조선 팔도에서 쌍놈 출신 의병대장은 안규홍과 신돌석(경북) 둘뿐이다.)
일제 무단통치시대, 향교에서 제사지내려고 담았던 술을 밀주로 처벌하려고 하자, 70노인들이 “앉아서 죽기보다 궐기하여 싸우자”고 전국 향교에 격문을 돌리며 분연히 일어섰던 곳이 어디인가.
2000년을 맞아 국가기구였던 새천년 준비위원회가 한민족 5000년의 위대한 인물 100인을 선정했을 때, 한 군에서 서재필, 나철(대종교 창시자, 독립운동의 대부) 두 사람이 뽑혔던 기초 자치단체가 남북한 통틀어서 보성군 말고 전국 어디에 있었던가.
400년 전 조선이 망국의 위기에 처했을 때, 선조가 수군을 해산하라는 전교를 내리자 충무공 이순신은 “今臣戰船 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아직도 신에게는 배가 12척이나 남아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는 장계를 써 올려서 민족의 위기를 구했던 곳이 바로 보성 열선루 아니었던가.
이런 곳에서 우리는 태어났고, 자랐고, 공부했다.
비록 산업화 시대에 낙후를 거듭하여 인구 4만 남짓하게 쪼그라들었지만
그래도 우리 정신의 본적지는 보성이다.
달팽이처럼 보성 놈이란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우리는 보성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희망을 절규하는 푸른 사자들
단기 4287년 4월 우리는 보성중학에 입학했다.
그러니까 2014년은 우리가 만난 지 꼭 60년이 되는 해다. 그 때는 단군기원을 썼고 6.25 남북전쟁이 정전된 다음해였다.
당시 우리는 이 나라가 얼마나 가난한지조차 알지 못했는데 국민 소득이 60달러 조금 넘었을 때였다. 지금은 초코파이가 세계적인 명품과자가 되었지만 그때의 주전부리라야 삼촌이나 형님들이 군대에서 휴가 왔을 때 갖고 왔던 건빵이 최고의 별식이었으며, 송진이나 밀을 씹어서 만든 껌을 잠 잘 때는 벽에 붙여놓고 자다가 다시 뜯어서 시커멓게 될 때까지 씹는 약간 쪽 팔리는 시대였다.
굶어죽는 사람이 실제로 있었고, 초등학교를 못 다닌 사람이 아주 많았을 때였다. 취직자리는 머슴살이와 식모가 되는 것 밖에 없던 시대에, 우리가 공립 보성중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부모의 간절한 기대와 사랑 때문이었다.
사실 보성중학교는 평범한 군 단위 공립중학교가 아니었다.
조국이 해방되자 보성군민들은 광복의 희열과 보성의 희망을 모아 공립중학교 설립에 발 벗고 나섰다. 설립 기성위원들은 메구 치고 장구 치며 보성군 각 마을을 돌면서 돈을 거두어 땅을 사고 터를 닦았다. 아주 가난하여 자기 자식은 학교에 보낼 수 없는 사람들까지 돈을 냈고 노동력을 보탰다.
때문에 보성중은 보성중을 다닌 사람만의 학교가 아닌,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염원이 서린 보성군민의 학교였다.
모든 보성 사람들은 보성중을 다녔건 다니지 않았건, 모두가 정신적 보증인이 되었다.
보성중에는 보성군의 학생 뿐 아니라 장흥군의 장평면 장동면, 화순군의 이양면 청풍면에서 찾아온 학생들도 많았으니 광역학군에 속했으며 학급수도 仁義禮智信組로 5개 학급이어서 다른 시군의 공립중학교보다 학생수가 많았다.
두발로 걸어 다녔던 시대라 보성읍 학생을 제외하면 20리 30리를 걸어서 학교를 오갔다. 고무신을 신고 다녀도 되었고 국민학생처럼 책보를 끼고 다니는 것도 허용되었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교였다.
날마다 여는 조회는 딴 학교보다 빠르게 8시에 시작되었는데 안태시교장은 한겨울에도 4,50분씩 열변을 토했다. 지석구 이금래 임방규 안원태 박기주 선생님들은 신흥종교의 교주처럼 열정을 쏟아 부었다. 유종룡 한문 선생님은 학생들이 쓴 백로지 연습장을 거두어, 뒤집어서 노트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실비로 나누어 주었다.
솔직히 말하면 딴 학교에 더 실력 있는 교사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제자들의 시린 가슴을 스승의 체온으로 녹여주는 보성중 교사보다 제자들을 더 사랑한 스승은 이 나라에 없었을 것이다. 쌍팔년도(단기 4288년)무렵의 보성중 교사들은 더 가르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광야의 선지자들이었다.
보성중 10회가 입학했을 때, 학생들의 나이는 13살부터 20세까지 분포가 다양했다. 보성읍 출신만이 나이가 어렸고 면에서 진학한 학생들은 1,2년 꿇다가 온 사람이 많았다. 초등학교 졸업 후 몇 년 씩 땔나무꾼으로 일하다가, 공부하고픈 간절한 열망 하나로 중학교를 찾아온 산골 학생 중에는 장가를 갔음직한 청년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이 많은 친구들은 유세부리지 않고 동생 같은 어린 학생들과 티 안 내고 어울렸다.
가정형편도 제법 잘 사는 유지의 자식부터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학생까지 있었지만, 대체로 마을에서 밥술이나 먹는 상대적으로 괜찮은 집의 아들딸이었다. 그러나 온 세상이 너무 가난했던 절대빈곤의 시대라 모두가 가난했다. 이처럼 학생들의 구성은 이질적 광폭구조였지만 촌놈들답게 친숙하게 어울리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학교에서는 우열반을 편성하여 경쟁구도를 촉발하고 학습효과의 능률성도 추구했지만 보성중학교의 핵심경쟁력은 급우들을 이겨내는 입시교육이 아니었다. 먼 훗날 꽃피울 소망의 나무에 샘물을 대주는 농부의 정성이었다.
그래서 보성중 학생들은 굶주린 시대에 꿈을 절창(絶唱)하는 어린 소리꾼이 되었다.
우리는 가난의 들판에서 희망을 절규하는 푸른 사자들이었다.
운명공동체가 된 보성중 학생들은 신비한 약초를 캐려고 찾아온 중국 고대의 동남동녀(童男童女)가 환생하여 봉산리 녹차 밭 밑에 다시 모인 것으로 자부했었다.
아니 그보다는, 비바람 구름 거느리고 신시(神市)를 개척했다는 환웅(桓雄)처럼 우리들도 신생 대한민국의 앞날을 보중생들이 개척해 나갈 것을 봉화산 위의 구름을 바라보며 서원(誓願)했었다.
하지만 보성중 10회는 보중과 스승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 것 같다.
더 실력을 쌓아 쭉쭉 뻗어가지 못한 것도 부끄럽고, 세속적으로 더 출세(?)하지 못한 것도 부끄럽다. 특히나 보성중에서 배웠던 그 지식과 지혜마저도 다 풀어먹지 못한 것이 진짜로 부끄럽구나.
우리의 모교 보성중은 지금 한적한 농촌에 고즈넉이 서 있다.
전체 학생 수도 300명이 못된다. 이농현상 때문이라고 하지만 가슴이 썰렁해진다.
그러나 2만명이나 되는 보중동문들은 어디에 살건 愛衆親仁의 보중정신을 북극성으로 삼고 있다. 캄캄한 밤하늘에 뭇 별을 거느리고 하늘의 질서를 구심(求心)하는 북극성처럼, 혼탁한 세상을 항해하는데 나침판이 되는 인생의 모교(母校)가 되고 있다.
寶城中아, 전남 寶城中아.
너의 품속에서 뛰놀았던 3년 동안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연금술의 시대였다.
일생에서 가장 뜨겁게 심장이 뛰었던 1000일의 보중시대는
우리 마음속에 백제 700년보다 더 오래 살아있을 것이다.
우린 궁핍한 시대의 열사(烈士)들이었다.
단기 4290년 3월 보성중을 졸업한 우리는 또 하나의 시작을, 시작하였다.
보성중 교사들은 보성 몬로이즘(monroism)에 집착하지 않고 광주로, 서울로, 세계로 뻗어나가 봉화산의 기개를 펼치라고 우리를 독려하였다.
우수한 학생들이 교통고 사범학교 등으로 빠져나갔지만 보중 10회의 에이스그룹 20명은 호남의 명문 광주고에 진학하였다. 광주공고, 광주상고 조대부고 등으로도 상당수 진학했지만 광주까지 나가서 농사짓는 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광주농고는 가지 않고 보성농고에 가장 많은 숫자가 진학했다.
그러나 많은 친구들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가정형편 때문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서기를 쓰기 시작한 1960년대 초반 20세 무렵의 우리들은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서울과 광주에서 다시 만났다. 이양 화순 남광주로 연결되는 경전서부선의 기적소리는 우리의 소망을 품어내는 숨결이었고 송정리 대전 서울역으로 이어진 호남선 완행열차는 서울드림을 열망하는 우리의 청춘 실크로드(Silk Road)였다.
하지만 서울에서 보중 10회의 여정은 녹록치 않았다. 똑같은 행동을 해도 딴 지역 사람이 하면 별 문제가 없는데 우리가 하면 ‘전라도 놈이라 저렇다’는 지역차별의 비애와 분노를 숙명으로 감당해야 했다.
그래도 仁組 義組 禮組 智組로 반 편성 되었던 보성중 친구들에게 서울은 새로운 응전의 장소였다. 興仁門, 敦義門, 崇禮門, 昭智門으로 둘러싸인 서울 장안은 또 하나의 보중 교정이었다. 맨손 쥐고 서울역에 내렸거나, 졸자직원으로 출발한 우리들은 돈도 없고 빽도 없이 깡다구 하나로 절망을 타고 넘는 인생 창업자가 되었다.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국립묘지의 무명용사들처럼, 우리들도 살아남기 위해 피땀을 바친 무명전사들이 되어야 했다.
그렇다. 우리는 돈 10원을 벌기 위해 신문을 돌리고 길거리에서 생활을 팔아야 했던 익명(匿名)의 거인(巨人)이었다. 눈물 묻은 빵을 먹으면서도 꿈을 잃지 않았던 궁핍한 시대의 열사(烈士)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중견 사업가가 되고 중견 공직자가 되고 1000만 서울 시민을 제도적으로 대표하는 서울 시의회 의장도 되었다. 허나 대부분의 친구들은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아무것이나 다 될 수 있는 전능(全能)의 국민이 되었다.
분명 그렇다. 우리들이야말로 국민소득 60달러의 황무지를 3만 달러의 황금들판으로 만든
20세기의 성인(聖人)들이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 친구 중엔 재벌도 없고 흔해빠진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한사람도 없어 좀 허전하기는 하다.
그러나 70을 훌쩍 넘고 보니 지나간 일들이 녹차 우려낸 물처럼 쌉스름한 추억으로 가라앉는다.
옷깃만 스쳐도 질긴 인연이라는데 중1때부터 나누어온 60년의 교분은, 설령 유별나게 절친한 관계가 아니라 해도, 두세기를 함께 걸어온 기억들이 노년 생활의 공공재가 되고 여생을 즐길 수 있는 재생자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을 이겨내는 장사가 어디 있으랴.
우리들도 이마는 훌렁 벗겨지고 똥배가 나왔으며 얼굴은 추하게 찌그러졌다.
허나 몸 자체가 대한민국의 현대사인 우리들이
“꽃보다 아름답지 않는가.”
운명아 비켜라, 우리는 승리자다.
대부분 현직에서 물러난 우리들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시간(時間)은 지루하지만, 1년의 세월(歲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려 캘린더 보기가 겁이 난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예순을 못 살고 죽은 친구들이 많은데 80을 바라보게 되었으니 우리는 제법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1년이면 몇 사람씩 친구들이 운명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생명체의 유한성과 인간사의 덧없음을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와 동년배인 세계적 부호 삼성 이건희씨가 쓰러져서 병상에 누워있다.(2014. 8. 15 현재) 전혀 움직이지 못한 채 말 한마디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는 이건희씨를 보면서 「돈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무식하게 방구 뿡뿡 뀌면서 라면 먹을 수 있을 때 돈이나 권력이 유용한 것이지 생사의 터미널에 다다르면 모두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색즉시공(色卽是空 - 이 세상 모든 물체는 공허한 것이고,)
공즉시색(空卽是色 - 공허한 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실체가 있는 것이다.)
이라고 했던가.
역시 그래서 저세상으로 입고 가는 수의에는 담아갈 주머니가 없고 세계를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이렇게 맨손으로 떠난다고 관 밖으로 손목을 내놓게 하고 장례를 치르게 했던 것인가.
전 세계에 있는 보성중학교 동창여러분, 진부하지만 웅변조로 말한다.
연습이 허용되지 않은 단 한번 뿐인 인생코스에서 팔십이 다 된 우리에게 이제 복습의 기회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승리자다.
42.195km의 마라톤 풀코스를 질주하여 그리스가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했던 아테네의 병사처럼
우리는 80살 인생의 풀코스를 씩씩하게 완주했다.
그래서 승리자다. 보성에서 승리했고, 서울 광주에서 승리했다.
인생 전선에서 승리했고 생명(生命)전선에서도 승리했다.
우리가 하루를 더 살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밥 먹고 똥 싸면서 24시간 생명체를 연장하는 것이 아니다. 70억 전 지구인과 말없이 소통하고 현생인류 25만년의 역사 속에서 유기체적인 맥박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시시한 사람이라도 산 사람이 내뿜는 콧김은 지구 전체의 중량보다 무겁고, 살아있는 사람의 머릿속은 태양계보다 훨씬 넓은 것이다. 이것이 우주의 섭리이고 장엄한 생명의 질서이다.
하루를 더 산다는 것은 하루 더 승리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운명아 비켜라. 보성중 10회는 시덥잖은 암이나 성인병 정도에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렇긴 해도 온양온천에서 소요산까지 전철을 공짜로 타도된다는 반갑잖은 특전을 받고 보니, 후회스러운 일들이 너무 많다.
좀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던 일, 좀 더 통 크게 도전하고 치열하게 응전하지 않았던 일. 좀 더 인내하고 성찰하지 못했던 일, 아쉽고 미흡했던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자신도 대단치 않은 사람이면서 남들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인간적 미성숙, 남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먼저 찾아보지 못했던 관용성의 부족 등은 단순히 어렸다는 말로 변명해 버릴 수가 없다.
생각의 깊이, 사고의 중량, 시야의 넓이 모두가 부족한 것투성이다.
그러나 그렇게 잘났다고 껍적대던, 부러워하기까지 했던 고관대작들의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우리 보중 친구들은 얼마나 싸가지 많은 녀석들인가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중학교처럼 시험 쳐서 노인(老人)으로 합격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팔십 평생을 세월의 城(성)만을 쌓고 있지 않았다. 仁義禮智의 강이 흐르는 집단우애(集團友愛)의 寶城(보배로운 성)을 쌓지 않았는가.
친구여, 보성에서 만났던 친구여
인류역사를 통해 무소불위의 절대반지를 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이 스승이 되었다.
어느 성인(聖人)의 유언처럼
자등명(自燈明) -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에 의지하라
법등명(法燈明) - 순리를 등불로 삼고 순리대로 살아가라
2014. 8. 15
입학 60주년을 맞은
재경보성중학교 10회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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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구구절절 가슴에 와닿은 말씀입니다
늘 건갈하시고 행복하십시요
오늘에야 읽었습니다. 김병기선배님 정말 명문장을 동창생들 모두에게 써주셨군요! 감동적입니다. 더 아름다운 자서전을 써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애중친인의 교훈, 봉화산의 정기,한마음된 동창생들의 공감대를 불러 모아,보배로운 고향으로 만들어 지기를 기원합니다.
김후배의 글을 오늘에야 읽었습니다.역시 선생님다운 추억을 갖게 되도록 일깨어주었네요.향후 삼보,삼경의 고장을 더 빛나게 응원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