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덕령에서 본 학장동과 감전동 그리고 낙동강 모습 1956년 4월
이번에는 구덕령을 넘어 구덕수원지와 구덕운동장쪽으로 구경 다녔던 옛 시절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초등시절 구덕령 꽃마을까지 걸어서 소풍도 갔었지요.
그리고 우리 할머님,어머님들이 재첩동이,단술동이를 머리에 이고 대신동,부민동
쪽으로 장사 다니시던 삶의 애환이 서린 구덕령고개, 구덕재만디 라고도 했지요.
'60년대 초등시절 학장에서 구덕고개를 넘어 구덕령 꽃마을을 지나 광성공고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구덕수원지 두곳이 다 보였었죠..대신동쪽 그 길을 좀더 내려가다 보면
경남상고와 구덕운동장 사이 길이 나오는데 그 길 끝자락에서 구덕운동장 정문쪽으로
좌회전하는 모서리 곡각지 지점에 공중화장실이 있었고 그 화장실안 위쪽에 운동장쪽
으로 좁은 창문(애들만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개구멍)이 있었는데 거기를 통해 구덕야외
수영장쪽으로 기어 들어가서 축구장(육상장)이나 야구장으로 운동시합 구경하러 몇번
다녔는데 어떤때는 경비원 아저씨에게 잡혀 혼나고 쫒겨나기도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 구덕수영장 자리에 1971년3월에 구덕실내체육관이 완공되어 들어서게 됩니다.
1928년 개장시의 구덕운동장 모습
구덕운동장 1930년대, 뒤편에 경남상고(현 부경고)가 보인다.
유엔의 날 행사중인 구덕운동장 모습 1952.10.24 (뒤편에 구덕령길과 구덕수원지 둑이 보인다)
구덕운동장 부산직할시 승격 기념식 1962.12.1 (승격일은 1963.1.1)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참석
'60년대 중,후반 개성중학교 다닐때에 우리 학교에 야구부가 있어서 구덕운동장에서
다른 중학교와 야구시합을 하면 서면에서 전차를 타고 구덕야구장 앞쪽 전차종점에
내려 야구장에 무료 단체 입장하여 시합보며 응원하곤 했었지요, 야구경기 끝나고는
구덕령을 걸어 넘어서 집에 왔고요. 1967년도에 개성중학교 야구부는 전국중학야구
선수권대회우승과 전국체육대회중학부 야구우승을 차지 할 정도로 야구를 잘했는데
그러다보니 구덕야구장에서 야구를 자주해서 응원하러도 자주 다녔었죠.
'68년도에 전차운행이 끝나면서 운동장앞 전차종점 자리에는 1971.12월에 문화아파트가
완공되어 들어서게 되고 같은 해에 야외수영장 자리에는 실내체육관이 들어서게 됩니다.
문화아파트는 현재까지도 그 자리에 있으며 구덕 실내체육관과 구덕야구장은 철거되고
그 자리에 주차장과 생활체육공원이 들어서게 됩니다.
구덕운동장 1970년대
구덕 실내체육관과 야구장 철거전의 구덕운동장 모습
구덕야구장과 실내체육관 철거된 모습 2018년7월
2019년3월, 실내체육관자리에는 주차장이 야구장자리에는 생활체육공원이 조성된 구덕운동장 모습
프로야구가 생기기전 고교야구가 한참 인기있던 '70년대에도 구덕야구장에 고교야구
시합 구경하러 자주 다녔지요.. 물론 그때도 구덕고개를 넘어 다녔지요.
홍깨마을 사상공단 공해 때문에 1978년 가을에 우리집은 학장에서 수영으로 이사를
하게 되고 1982년도에 프로야구가 생겼는데 구덕야구장을 홈경기장을 사용하고 있던
롯데가 1984년도에 최동원,유두열,김용희 등의 활약으로 첫우승을 하던 그 당시에
수영에서 버스타고 구덕야구장에 야구 구경하러 제법 다녔습니다.'85년도 말에 사직
야구장이 완공되고 '86년도 부터 롯데가 사직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면서 부터는
구덕운동장에 갈 일이 거의 없어지고 말았지요.
젊은 시절 구덕령을 제법 걸어 넘어 다녔으면서도 나는 구덕수원지는 구덕쪽 두군데 만
있는 줄 알고 있었고 엄광산(고원견산)쪽 구덕수원지 두 곳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 연유로 구덕수원지 역사를 인터넷에서 수집하여 아래와 같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구덕수원지와 대신동 주변 항공사진 (1950.8.8)
구덕수원지 주변 항공사진 (1950.12.3)
일곱번째 사진 6번 구덕수원지(고원견곡수원지,엄광산수원지) 1908년
고원견곡수원지는 일제강점기시 일본인들이 엄광산을 고원견산으로 고쳐 불렀기 때문에 생긴 이름입니다.
"부산광역시을 가꾸는 모임"이 '95년4월에 엄광산(嚴光山)이라는 이름을 찾아주고 정상표지석을
세웠습니다.
구덕산 계곡에는 오래 전 기억 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수원지가 있다. 구덕산과 엄광산에서
발원한 구덕천은 지금의 구덕운동장 부근에서 보수천에 합류하여 서구와 중구의 경계를 지으면서 충무동
바다로 빠져 나간다. 지금은 복개가 되어 간선도로로 이용되고 있는 터라 그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당시에는 서구와 중구지역의 주민에게는 생명수와도 같은 귀한 하천이었다.
1876년 일본의 강압에 의한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었고 그에 따라 개항을 하게 된 부산은 구덕산 계곡
에도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개항으로 인해 날로 늘어나는 중구와 서구지역의 일본거류민은 식수의
확보에 곤란을 겪게 되자 1880년 보수천 상류에 죽관(竹管)을 이용한 도수(導水)시설을 설치하게 되고
1886년에는 나무 관으로 대체되면서 급수 양을 늘리게 된다. 1894년에는 급기야 보수천 상류에서 끌여
들인 물을 모아 대청동에 배수시설을 갖춤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상수도시설을 갖추게되었다.
대청배수지 추정 지도 1903 (지금은 매립되고 건물들이 들어서 흔적을 찾을 수 없음)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일본거류민과 일본선박의 잦은 부산항 입출항으로 인해 앞선 상수도
시설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급수 양이었다. 이에 마침내 1900년부터 구덕산과 엄광산 계곡의보수천
과 구덕천 상류지역의 수원지 축조사업이 시작되었고 1930년대까지 축조와 확장공사가 계속되었다.
엄광산 수원지(고원견곡수원지,1902년 축조)는 현재 동아대학교 주변지역으로 지금은 동아의료원과
주변의 주택가에 해당하는 곳에 높이 약12m, 수심10m, 길이는 약260m이고 저수량은 약75입방미터
(인구 1만 명이 90일간 급수할 수 있는 양)의 규모로 흙 제방 형식으로 축조되었고, 이 후 구덕수원지
(구덕1저수지)는 현재 구덕초등학교 뒤편의 구덕터널 입구쯤에 높이 20m, 둑길이 20m 그리고 수면의
폭은 약 70m의 규모로 축조되었다.
구덕수원지(위 구덕1저수지)의 물은 관로를 통해 엄광산수원지(위 고원견곡수원지,구덕수원지)에 합류
하여 자연정화를 거친 후 대청동의 배수지에 모여 저장되었다가 서구와 중구의 1만 여명의 주민에게 식
수로 공급되었다. 이 수원지와 더불어 각각의 수원지 계곡의 중상류 지역에는 중ㆍ소규모의 저수 시설
을 추가로 갖추었는데 이것은 자연여과장치시설로 계곡물을 거르고 걸러서 취수장인 수원지에는 최대한
깨끗한 물을 저수하겠다는 목적인데, 이 중소규모의 자연여과장치시설이 오늘날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수원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바로 꽃마을 아래 옛 구덕2저수지(현 구덕2수원지)와 대신공원
내 옛 고원견상저수지(현 구덕1수원지)가 그것이다.
구덕수원지(고원견곡수원지,엄광산수원지)'60년대 초반 모습
이후 수원지는 확장과 개ㆍ보수 공사를 거쳐 오다가 해방과 한국전쟁을 치른 후 부산의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해 급수량이 한계에 달하자 1968년에는 마침내 낙동강 물을 이용한 상수도시설이 설치되면
서 수원지로서의 기능은 잃게 된다. 위 구덕수원지(고원견곡수원지,엄광산수원지)는 '60년대 후반에
매립되어 동아대학교 병원과 주택지로 변모되었고
구덕수원지(구덕1저수지 )붕괴된 모습 1972.9.14. 붕괴된 둑 사이로 구덕실내체육관 건물이 보이네요
1972년10월 구덕수원지아래 보수천 주변 복구 공사 모습, 왼쪽 상단 건물은 당시 광성공고(현 부산 신학교)
구덕수원지(구덕1저수지) 복구후 모습 '70년대 중반
구덕터널 공사중인 모습 1984
현재(2018년2월)의 구덕터널 입구 모습
구덕수원지(고원견곡수원지,엄광산수원지)가 매립되어 없어지면서 구덕1저수지가 자연스럽게 구덕수원지
이름을 물려 받아 불리게 되었는데 이 구덕수원지가 1972년 9월 14일 전날부터 내린 폭우로 인해 둑이
붕괴되면서 수원지아래 보수천 상류 주변 주민 60명이 사망하고 15명이 실종, 4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
으며 수재민 165세대가 반여동 무지개마을로 이주해 가는 등 아픈 상처를 가져다 준 후 '70년대 중반에
복구되었으나 1981년에 시작된 구덕터널 공사로 인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일본인들의 필요에 의해 축조된 이들 수원지가 일본거류민의 퇴각과 함께 이후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지게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구덕계곡의 명당수이자 서구와 중구지역 주민의 생명수
로, 때론 일본거류민의 식수 취수원이었던 그곳엔 사상 뿐 아니라 김해 등 서부경남과 부산의 도심을 이
어 주는 교통의 요충지로 그리고 대학교 부속건물과 주거지로 변모되어 이제는 늙은 노모의 아련한 기억
속 한 페이지에 고이 남아있다.
위 까만 글씨의 구덕수원지에 대한 글은 부산 서구 향토자원조사 책만들기 카페의 "easygoingman" 님
의 글을 참조 했으며 사진은 인터넷 여기저기서 수집한 것 입니다.
현 대신공원내 구덕1수원지 (구 고원견상저수지)
현 꽃마을 아래 구덕2수원지 (구 구덕2저수지)
첫댓글 내가 교련의 총검술 16개동작 선수로 뽑히여 학교별 대회를 위해
구덕경기장에 갔었고 우린 교련복이 아닌 실습복으로 일본순사처럼
각반, 요대를 하고 좀 멋도 없이 참석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야구장엔 프로야구 초창기에 주말만 되면 갔던 기억도 나고...
대신동은 좀 멀어서 잘 몰랐는데.. 오늘 많이 알았네요.
용만씨... 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