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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 동인우리문화답사회 자료집(2007. 8. 18~19)
- 백련꽃과 남도의 명산 월출산을 가다 -
(전남 나주시/무안군/영암군)
-운영진-
단 장: 이민혜 (011-353-1839)
답사팀장: 김동미 (017-421-2112)
강 사: 차 민 (011-354-9538)
1. 답사 일정표 / 답사지 지도
2. 전라도(全羅道) 나주목(羅州牧)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동쪽으로 남평현(南平縣) 경계까지 7리, 광산현(光山縣) 경계까지 20리, 남쪽으로 영암군(靈巖郡) 경계까지 50리, 장흥부(長興府) 경계까지 75리, 서쪽으로 무안현(務安縣) 경계까지 38리, 북쪽으로 함평현(咸平縣) 경계까지 40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7백 4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발라군(發羅郡) 통의(通義)라고도 한다. 이며 신라에서 금산군(錦山郡 금성(錦城)이라고도 함)으로 고쳤다. 신라 말에 견훤(甄萱)이 후백제라 칭하고 이 땅을 모두 차지했었다. 얼마 안 되어 군인(郡人)이 후고구려의 왕 궁예(弓裔)에게 붙자, 궁예는 고려 태조를 정기태감(精騎太監)으로 삼고, 주사(舟師 수군)를 거느리고 가서 쳐 빼앗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 14년에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진해군(鎭海軍)이라 불러 해양도(海陽道)에 예속시켰다. 현종 원년에 거란(契丹)을 피해 남방으로 파천하여 이곳에 와 10여 일을 머물다가, 거란군이 패하여 물러가자 왕이 환도했다. 현종 9년에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가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진관】 군(郡)이 둘이고 영암(靈巖)ㆍ영광(靈光). 현이 여덟이다. 함평ㆍ고창(高敞)ㆍ광산ㆍ장성(長城)ㆍ진원(珍原)ㆍ무장(茂長)ㆍ남평ㆍ무안. 『신증』 광산을 주(州)로 올렸다. 『신증』 주가 하나이다. 광주(光州).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발라(發羅)ㆍ통의(通義)ㆍ금산(錦山)ㆍ금성(錦城)ㆍ진해군(鎭海軍).
【풍속】 사람들이 순박하여 다른 생각이 없으며, 힘써 농사짓는 것을 업(業)으로 한다 -정도전의 기(記)에 있다. 음사(淫祀)를 숭상한다. 가게를 벌여 물건을 팔고 산다. 민속이 순박하다.- 이예(李芮)의 시에 있다.
【형승】 모든 산이 북으로 향하였다.- 허백(許伯)의 시에 있다. 남방의 한 거진(巨鎭)이다. -정도전의 〈유부로서(諭父老書)〉에 있다.
【산천】 금성산(錦城山)- 주의 북쪽 5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 정도전(鄭道傳)의 〈소재동기(消災洞記)〉에, “금성산은 단중(端重)하고 기위(奇偉)하여 동북에 웅거하였으니 나주의 진산이다.” 했다. ○ 김극기(金克己)의 사(詞) 〈강남락(江南樂)〉에, “신령스러운 멧부리 매우 높다. 깊숙한 골짜기에 호랑이가 일찍이 돌을 차고[?] 갔고, 옛 못에는 용이 또한 구슬을 안고 조는데, 달밤에는 뭇 신선이 내려온다. 매우 높아 하늘과의 거리가 겨우 일악(一握)이다. 솔숲절[松寺] 저녁 종소리 깊은 골짜기에 전해지고, 버드나무 마을 쓸쓸한 방앗소리 외로운 연기 너머에서 들리는데, 조도(鳥道)가 위로 꾸불꾸불 이어졌네.” 하였다. ○ 윤소종(尹紹宗)의 시에, “금성산은 바다 남쪽에 있으니, 태사(太?)의 고장으로 5백 년 이어왔네. 한 척의 배로 견왕(甄王)이 귀순한 길이요, 일만 깃발 현묘(顯廟 현종(顯宗))가 출사(出師)했던 곳이라네. 흥룡사(興龍寺) 밖에는 서기(瑞氣)가 떠 있고, 개계원(開界院) 앞에는 흰 연기가 일어나네. 성조(聖祖 태조(太祖))의 누선(樓船)을 여기에서 맞았으니, 동정(東征)하는 오늘날 생각 그지 없어라.” 하였다. 덕룡산(德龍山)- 주의 남쪽 60리에 있다. 재신산(宰臣山)- 주의 남쪽 9리에 있다. 시랑산(侍郞山)- 주의 남쪽 8리에 있다. 주) 사람들이 재신산(宰臣山)을 목사(牧使)의 비보(裨補)라 하고, 시랑산을 판관(判官)의 비보라 한다. 쌍계산(雙溪山)- 주의 남쪽 60리에 있다. 용진산(湧珍山)-주의 북쪽 45리에 있다. 도야산(都野山)- 주의 북쪽 35리에 있다. 월정봉(月井峯)- 주성(州城)의 서쪽에 있다. 장원봉(狀元峯)- 주성의 서북쪽에 있다. 두 봉우리가 모두 금성산의 서쪽 갈래로서 주성을 돌아 안고 있다. 앙암(仰巖)- 금강(錦江) 남안에 있다. 혹 노자암(??巖)이라고도 한다. 그 밑에는 물이 깊어 헤아릴 수 없는데 속설에 용이 있다고 한다. 바위 밑에 구멍이 있는데 조수가 밀려 갔을 때는 보인다. 전설에 명(明) 나라 황엄(黃儼)이 제주(濟州)로 갈 때 압승(壓勝)한 곳이라 한다. 복암(伏巖)- 광탄(廣灘) 서쪽 언덕에 있으며 주 사람들이 놀이하는 곳이다. 바다 주의 서남쪽 70여 리에 있다. 금강진(錦江津)- 일명(一名) 금천(錦川), 목포(木浦)이며, 혹은 남포(南浦)라고도 한다. 곧 광탄의 하류인데 주의 남쪽 11리에 있다. 광탄(廣灘)- 그 근원이 여덟이다. 하나는 창평현 무등산(無等山)의 서봉학(瑞鳳壑)에서 나오고, 하나는 담양부(潭陽府)의 추월산(秋月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장성현 백암산(白巖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노령(蘆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광산(光山) 무등산(無等山) 남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능성현(綾城縣) 여점(呂岾)의 북쪽에서 나온다. 이것들이 모두 주의 북쪽에 이르러 작천(鵲川)ㆍ장성천(長成川)과 합류하여 주의 동쪽 5리에 와서 광탄이 된다. 정자천(亭子川)-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금성산의 서남쪽에서 나와 남포(南浦)로 흘러 들어간다. 송지천(松只川)- 주의 남쪽 15리에 있다. 쌍계산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남포로 들어간다. 장성천(長成川)- 주의 북쪽 10리에 있다. 도야산(都野山)에서 나와 광탄으로 들어간다. 학교천(鶴橋川)- 금성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성안으로 들어 왔다가, 동쪽으로 흘러 광탄으로 들어간다. 작천(鵲川)- 주의 북쪽 35리에 있다. 주의 용진산(湧珍山) 및 영광군 수연산(隨緣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광탄으로 들어간다. 고막포(古幕浦)-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 팔니도(八?島)- 주위가 28리이다.
【토산】 전복[鰒]ㆍ숭어[秀魚]ㆍ은어[銀口魚]ㆍ오징어[鳥賊魚]ㆍ낙지[絡締]ㆍ굴[石花]ㆍ김[海衣]ㆍ황각(黃角)ㆍ비자(榧子)ㆍ표고[香?], 죽전(竹箭) 삼향리(三鄕里)에서 난다. 감태(甘苔)ㆍ감초ㆍ미역ㆍ숫돌[礪石] 주의 남쪽 비음리(非音里)에서 난다. 차[茶]ㆍ석류ㆍ사기그릇[磁器]ㆍ대[竹]ㆍ매산(?山). 『신증』 웅어[葦魚].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다. 주위가 3천 1백 26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안에 우물이 20개, 샘이 12개, 작은 시내가 하나 있다.
【봉수】 군산 봉수(群山烽燧) 주의 서쪽 1백 5리에 있다. 남쪽으로 무안현(務安縣) 유달산(鍮達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같은 현의 고림산(高林山)에 응한다.
【궁실】 벽오헌(碧梧軒)- 객관(客館)의 동헌(東軒)을 말한다. 동쪽에 벽오동 나무가 있는데, 다른 군에서는 없는 것이므로 이행(李行)이 이렇게 이름짓고 시를 지었다. ○ 서거정(徐居正)의 〈중신기(重新記)〉에, “나주는 전라도에서 가장 커서 땅이 넓고 백성과 물자가 번성하다. 땅이 또한 바닷가라 벼가 많이 나고 물산이 풍성하니, 이에 전라도의 조세가 모이는 곳이며 사방의 상인들이 몰려든다. 성화(成化) 기해년에 월성(月城) 김후(金侯)가 선발되어 목사로 왔는데 또 현명한 통판(通判) 오후(吳侯)를 만나, 뜻이 같고 의기가 통하여 정사가 닦이고 폐단이 제거되었다. 개연(慨然)히 관사를 중수할 뜻이 있어 곧 자기의 봉급을 덜고, 공금을 보태어 목수를 부르고 재목을 모아 먼저 이 동헌(東軒)부터 수리했다. 다만 이 동헌의 옛 구조가 넓고 좁은 것이 적당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다시 설계하여 늘이기도 하고 줄이기도 했다. 마루와 방이 질서 있게 정돈되어 서늘하고 따뜻한 것이 알맞게 되니 모두 몇 칸이다. 이렇게 공사를 시작한 것이 경자년 8월인데, 수개월이 걸려 완공했으니, 크고 트이고 시원함이 옛 건물에 비하여 배나 된다.
자제를 나에게 보내어 내 글을 구하여 영구히 전하기를 도모하는 이가 있었다. 내 생각건대, 관사란 것은 관청을 존엄하게 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곳으로 나의 사유물이 아니요, 그것의 흥폐(興廢)는 수령에게 달려 있다. 내가 지금 수령을 보건대, 나약하여 무능하고 우활한 자는 공문서를 처리하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며 어찌할 줄 모르니, 그 밖의 일에 겨를이 있겠는가. 간혹 현명하고 유능하다 하는 이는 핑계하기를, ‘나는 나라의 금령(禁令)이 엄함을 두려워한다. 백성의 비방이 일어날 것을 어찌하랴.’ 하며, 비록 바람에 꺾이고 비에 벗겨져도 일찍이 나무하나 세우고 돌 하나 옮겨서 틈이 생겨 새는 것을 수리하지 않고, 여관에 든 나그네마냥 무관심하게 앉아 허물어지기만 기다리다가, 다 허물어진 뒤에야 고치니, 백성을 괴롭게 함을 이루 형언할 수 있겠는가. 이제 두 후(侯)는 백성을 도리로써 부리어 백성의 재물을 손상하지 않고 농사짓는 때를 어기게 하지 않고 일을 과히 떠벌리지 않았으니, 이미 백성에게 덕되었거니 어찌 법에 방해되었으랴. 아, 물(物)의 흥폐(興廢)는 물의 운수이다. 이 고을에 관사 있은 지 몇 년이나 되었으며, 전후로 수령이 된 자 그 얼마리오마는, 그 중수하기를 옛날에는 하지 못했다가 이제 와서 하게 되니, 어찌 때를 기다림이 아니겠는가. 내 들으니 옛 사람의 말에, ‘대체로 궁실이나 누각을 만듦에 있어서, 이미 그런 것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어 처음으로 만들고, 반드시 그것을 아낄 줄 아는 자가 있어 뒤에 중수하는 것이니, 만약 퇴폐해도 수리하지 않아서 처음만 있고 뒤가 없으면, 이는 물리(物理)의 순환(循環)하는 도(道)가 아니다’ 했으니, 그 말이 참이로다. 이 뒤에 오는 사람들은 이 두 후의 마음을 마음으로 하고, 두 후의 정사를 정사로 하여, 관청을 자기 집같이 여긴다면 거의 두 후가 오늘 중수한 갸륵한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리라. 김후의 휘(諱)는 춘경(春卿)이고, 오후의 휘는 한(漢)이니, 모두 현명하고 유능하기로 한 때에 이름이 있는 이들이다.” 하였다.
【누정】 무이루(撫夷樓)- 객관 동쪽에 있다. 동루(東樓)- 곧 성의 동문루(東門樓)이다. 목사 김계희(金係熙)가 읍 성을 증축할 때 중수(重修)한 것이다. 옛 터는 성 안에 있다. ○ 정도전의 《유부로서(諭父老書)》에, “도전(道傳)이 회진(會津)으로부터 귀양와서 나주를 지나칠 때 동루에 올라 배회하며 바라보니, 산천의 아름다움과 인물의 번성함이 거의 남방의 한 거진(巨鎭)이었다. 나주가 주(州)가 된 것은 국초부터 비롯되었으니, 우리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할 제, 군(郡)ㆍ국(國)들이 차례로 평정될 때에 오직 후백제가 그 험하고 멂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는데, 나주 사람들은 순(順)과 역(逆)을 밝게 알아 솔선해서 붙었으니,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병합하는데 나주인의 힘이 컸다. 태조가 친히 이 고을에 행차하시어 목(牧)으로 승격시켜 남방 여러 고을의 으뜸으로 삼으니, 이 고을을 포상(褒賞)한 것이었다. 혜종(惠宗)이 왕위를 계승하여 백성과 사직을 잘 보존하여 창업(創業)할때의 도움과 수성(守成)한 공이 있어 종묘에서 백세불천(百世不遷)의 제사를 받으셨으며, 옛 고장을 돌보고 보호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하였다. 현종(顯宗)이 남쪽으로 순수할 제, 이 곳에 이르러 드디어 흥복(興復)의 공을 이루었으므로 나주에 팔관례(八關禮)를 하게 하여 서울과 비등하게 했다.
아, 도전이 남쪽으로 떨어져 와서 서울과 멀어졌으나 조종의 공덕의 갸륵함을 듣고 이 누에 올라 바라보니, 산천은 옛날과 같아 당시의 천승만기(千乘萬騎)가 이 안에 주둔했던 것이 상상된다. 또 혜종의 사당이 찬란하게 있는 것을 보니, 외로운 신하의 간절한 회포를 위로해 준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아, 나주 사람은 그들의 밭을 갈고 집에 편히 살며 그들의 생업(生業)을 즐긴 것이 어언 5백 년이니, 모두가 조종이 기르고 휴식시킨 은혜아님이 없는 것을 부로(父老)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고을은 바닷가에 있는 먼 극변(極邊)이어서 왜구(倭寇)가 걱정거리이다. 연해(沿海)의 주군(州郡)이 혹은 사로잡히고 혹은 이사가서 소연(騷然)하여 사람이 없는데, 이 고을은 그 가운데에 끼어 있으면서도 번창하기가 거의 평일과 같아서 뽕나무와 삼이 풍부하고 벼가 들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어 즐거움을 누린다. 지나는 나그네가 누에 올라 산천과 들판을 바라보면, 유람하는 즐거움을 실컷 맛볼 수 있다. 백성이 번성하고 물자가 풍성하여 성덕(聖德)을 우러르며 유풍(遺風)을 노래하니, 어찌 조종의 덕이 사람들에게 감화됨이 깊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다른 고을 사람의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 한결 같은 마음)이 없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어찌 목사가 어진사람이어서 덕의(德意)를 펴서 민심을 단결시켜 흩어지지 않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평소에 부모들의 가르침이 있어 백성들이 의(義)를 알기 때문이다. 참으로 가상하도다.” 하였다. 은행정(銀杏亭)- 무이루 서쪽에 있다. 사청(射廳)- 주의 남쪽 2리쯤에 있다. 망화루(望華樓)- 객관 남쪽에 있으며, 목사 이유인(李有仁)이 세웠다.
【학교】 향교(鄕校) 주성의 서쪽에 있다.
【창고】 영산창(榮山倉) 금강진(錦江津) 언덕에 있으니 곧 영산현(榮山縣)이다. 나주 및 순천(順天)ㆍ강진(康津)ㆍ광산(光山)ㆍ진도(珍島)ㆍ낙안(樂安)ㆍ광양(光陽)ㆍ화순(和順)ㆍ남평(南平)ㆍ동복(同福)ㆍ흥양(興陽)ㆍ무안(務安)ㆍ능성(綾城)ㆍ영암(靈巖)ㆍ보성(寶城)ㆍ장흥(長興)ㆍ해남(海南) 등지의 전세(田稅)를 여기에 거두어 들였다가 배로 서울에 운반한다. 『신증』 금상(今上) 7년에 이 창고에 거두어 들이던 것을 영광(靈光)의 법성창(法聖倉)으로 옮겼으므로 폐지되었다.
【교량】 학교(鶴橋) 성 안에 있다. 영산교(榮山橋) 금강진에 있는데, 1년에 한 번씩 수리한다. 고막교(古幕橋) 고막포(古幕浦)에 있다.
【불우】 흥룡사(興龍寺)- 금강진 북쪽에 있다. 고려 태조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의 조부는 부돈(富?)이요, 아버지는 다련군(多憐君)인데, 대대로 주의 목포(木浦)에 살고 있었다. 다련군은 사간(沙干) 연위(連位)의 딸 덕교(德交)를 아내로 맞아 장화왕후를 낳았다. 장화왕후가 일찍이 꿈을 꾸는데, 바다의 용이 품안으로 들어왔다. 놀라 깨어 부모에게 이야기하니,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얼마 안 되어 태조가 수군장군(水軍將軍)으로 나주에 와 진수(鎭守)할 때, 목포에 배를 정박시키고 물위를 바라보니 오색의 구름이 서려 있어서 태조가 그리로 가보니 장화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태조가 그 여자를 불러 동침하는데 미천한 신분이라고 임신을 시키지 않으려고 정액(精液)을 자리에 쏟았더니, 왕후가 곧 빨아 먹었다. 드디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혜종(惠宗)이다. 얼굴에 자리 무늬가 있으므로 세상에서는 접주(?主 주름살 임금)라 한다. 그 자리에 큰 절을 세워 흥룡사라 하고, 앞에 있는 샘을 완사천(浣絲泉)이라 하니, 속설에 오씨가 빨래하던 샘이라 한다. 법륜사(法輪寺)- 주의 서쪽 1리에 있다. 보광사(普光寺)- 금성산(錦城山)에 있다. 〈사기(寺記)〉에, “신라 선덕왕 때 중 안신(安信)이 금성산 유마굴(維摩窟)에 살면서 22년간 도를 닦다가 몸을 천길이나 되는 갑(岬) 밑에 던지니, 갑자기 오색 구름이 와서 둘러싸고 서쪽으로 가버렸다.” 하였다. ○ 이방직(李邦直)의 시에, “이곳은 참으로 선경(仙境)이니, 누가 이 절을 창립했는고. 문을 두드리니 속세와 단절되고, 방으로 들어가니 도심(道心)이 통하누나. 새벽 이슬에 산은 푸름을 머금었고, 비에 가을 꽃은 붉은 빛이 바랬구나. 천고의 일을 생각하니, 나는 새가 공중을 지난 것 같구나.” 하였다. 금륜사(金輪寺)- 주의 남쪽 평지에 있다. 신왕사(神王寺)- 금성산에 있다. 도홍사(道弘寺)- 금성산 월정봉(月井峯)에 있다. ○ 임유정(林惟正)의 집구시(集句詩)에, “쓸쓸한 절 찾아 일찍이 최상방(最上房)을 지나니, 대와 오동나무에 싸인 전각(殿閣)이 처량하구나. 구름이 파묻고 물이 막아 사람 없는 곳에, 오직 그윽한 꽃이 물 건너 향기를 보내네.” 하였다. 쌍계사(雙溪寺)- 쌍계산에 있다. 신륵사(新勒寺)- 금성산 장원봉(壯元峯)에 있는데, 일명(一名) 울아사(鬱牙寺)라고도 한다. 용진사(湧珍寺)- 용진산에 있다. 절에 극복루(克復樓)가 있는데, 무설산인(無說山人)의 〈기문(記文)〉이 있다. ○ 정도전이 기문 뒤에 쓰기를, “여황(艅?)의 조박(趙璞)이 〈극복루기(克復樓記)〉를 소매 속으로부터 꺼내어 나에게 보이면서, ‘이 기문은 곧 무설산인(無說山人)이 지은 것입니다. 극복루는 용진사에 있는데, 대체로 사람이 누각을 귀히 여기는 이유는, 높이 올라가 멀리 바라보면 마음을 즐기고 눈을 달리어 산천 풍월을 실컷 보아 유람의 즐거움을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니, 학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누각을 극복(克復)이라 이름을 붙였으니, 이 누각에 왜 이런 이름을 붙였습니까.’ 한다. 나는 말하기를, ‘아니다. 사람의 근심과 즐거움은 마음에 달려 있어 대하는 경치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니, 마음에 근심이 있는 이는 비록 산천의 좋음과 풍월의 아름다움을 만나더라도 바로 상심(傷心)의 느낌이 될 뿐이다. 영릉(零陵)의 산은 남방에서 가장 수려한 것이나 쫓겨난 신하는 감옥 같은 산이라 하였고, 악양루(岳陽樓)는 천하의 장관(壯觀)인데 귀양간 사람은 서글퍼했으니, 사람이 진실로 그 본심을 잃는다면 어디를 가나 슬프지 않은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비록 누각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즐거울 수 있겠는가. 대체로 사심(私心)을 이겨 천리(天理)를 회복하면, 마음이 넓어져 천지와 더불어 크기가 같고 만물과 더불어 조화로움을 같이하여 호호탕탕(浩浩蕩蕩) 만나는 곳마다 모두 즐겁다. 그러므로 일단사 일표음(一簞食一瓢飮)으로 누항(陋巷)에 살더라도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은 것이 안자(顔子)의 극복이다. 요컨대 오직 인(仁)한 후에야 그 즐거움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니, 이 누각을 극복루라고 지은 것은 그 근본을 얻은 것이다.’ 했다.” 하였다.
【고적】 영산폐현(榮山廢縣)- 주의 남쪽 10리에 있다. 본래 흑산도(黑山島) 사람들이 육지로 나와 남포(南浦)에 우거하였으므로 영산현이라 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12년에 군으로 승격했다가 후에 주에 예속되었다. 압해폐현(壓海廢縣)- 주의 남쪽 40리에 있다. 압(壓) 자는 압(押)으로 쓰기도 한다. 본래 바다 가운데의 섬인데, 백제 때는 아차산군(阿次山郡)이 되었다가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그대로 군을 삼았다. 고려초에 나주에 예속되었다가 후에 영광군에 예속되고 후에 다시 나주에 예속되었다. 후에 왜적에게 땅을 잃고 이곳에 와서 우거하였으므로 압해현이 되었다. 여황폐현(艅?廢縣)- 주의 북쪽 4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수천현(水川縣)인데 수입이(水入伊)라고도 한다.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나주에 예속시켰고, 고려와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회진폐현(會津廢縣)- 주의 서쪽 15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두힐현(豆?縣)인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나주에 예속시켰고, 고려와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안로폐현(安老廢縣)-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아로곡현(阿老谷縣)인데, 신라 때 야로(野老)로 고쳐 반남군(潘南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나주에 예속시켰고,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복룡폐현(伏龍廢縣)-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복룡현이며, 일명(一名) 배룡(杯龍)이라고도 하다가 신라 때 용산(龍山)으로 고쳐 무주(武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때 옛 이름으로 복구하여 나주에 예속시켰고,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남여(籃輿)가 삐걱거리며 비 개인 내를 건너가는데, 멀리 전구(前驅)가 언덕밭을 지나는 것이 보이네. 읍내의 개는 사람보고 짖는데 울타리에 구멍이 있고, 촌 무당은 귀신을 맞이하느라 종이로 돈을 만들었구나. 끊어진 구름 찬 해는 교묘히 삼켰다 뱉었다 하고, 작은 봉우리와 질펀한 언덕은 멀리 서로 접했구나. 남으로 금성(錦城)까지 30리라니, 남여 멘 하인들의 어깨가 붉어질 것이 걱정이네.” 하였다. 반남폐현(潘南廢縣)- 주의 남쪽 4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반내부리현(半奈夫里縣)인데, 신라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현으로 강등되어 나주에 예속되었다.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장산폐현(長山廢縣)- 주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일명 안릉(安陵)이라고도 한다. 본래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백제 때는 거지산현(居知山縣)이 되고, 거(居) 자를 굴(屈) 자로 쓰기도 한다. 신라 때 안파(安波)로 개칭하여 압해군(壓海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나주에 예속시켰다. 후에 왜적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이곳에 와서 우거하여 장산현이 되었다. 금성산고성(錦城山古城) 돌로 쌓았다. 둘레가 2천 9백 46척이고, 높이가 12척이며, 삼면이 험하게 막혔다. 옛날에 군창(軍倉)이 있었는데, 지금은 퇴락하였다. 종남향(從南鄕)- 옛날에는 종의향(從義鄕)이라 불렀다. 주의 남쪽 50리에 있다. 손리향(孫利鄕)-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옛날에는 소산리(所山里)라 했는데, 지금은 도림리(道林里)라 한다. 평구부곡(平丘部曲)- 주의 북쪽 16리에 있다. 금마부곡(金磨部曲)- 안로현(安老縣)에 있는데, 주에서 40리이다. 거평부곡(居平部曲)- 회진현(會津縣)에 있는데, 주에서 서쪽으로 30리이다. 군산부곡(群山部曲)ㆍ극포부곡(極浦部曲)ㆍ임성부곡(任城部曲)- 이상 세 부곡은 지금은 합하여 삼향리(三鄕里)가 되었다. 무안현(務安縣)의 남쪽을 넘어갔는데, 주에서 서쪽으로 90리이다. 수다소(水多所)- 옛날에는 수타(水墮)라 했는데, 일명 횡산(橫山)이라고도 하며,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인물】 고려 정가신(鄭可臣)- 처음 이름은 흥(興)이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충렬왕 때 세자를 따라 원(元) 나라로 갔다. 거기에서 세조(世祖) 황제가 중히 여기게 되어 융숭한 대우를 받았으며, 벼슬이 중찬(中贊)에 이르렀다. 성품이 정직하고 단엄(端嚴)하며 전고(典故)에 익숙하여, 한때의 사명(辭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옛 집이 주의 북쪽 금안동(金安洞)에 있다. 일찍이 원 나라에 있을 때의 시에, “해동(海東) 남쪽에 금성산이 있고, 산 아래 우리 집은 초가 수간(數間)이라네. 골목의 버들과 동산의 복숭아는 내가 심은 것인데, 봄 바람에 주인 오기를 응당 고대할 것이로다.” 하였다. 나유(羅裕)- 사람됨이 용감하고 출중하여 예의에 밝고 옥사(獄事)를 판결하는 데 밝았다. 난을 당하여 두려워하지 않아 자주 변방에서 공을 세웠다. 진자화(陳子和) 키가 크고 날래며 용맹스러웠다. 원종 때 삼별초(三別抄)가 제주를 공격할 때 그의 나이는 19세였는데, 바로 적중으로 뛰어들어 적장을 베어 가지고 나오니, 군사들이 기뻐 날뛰었다. 조금 뒤에 적에게 해를 당했다. 나익희(羅益禧)- 나유(羅裕)의 아들이다. 벼슬은 상의평리(商議評理)에 이르렀다. 성품이 곧고 절의(節義)를 사모하여 사람과 다투는 것을 부끄러워했고, 그의 어머니가 일찍이 재산을 분배하면서 특별히 종을 더 주니, 그는 사양하면서, “한 아들로서 다섯 자매의 사이에 있으니, 어찌 차마 구차스레 재물을 차지하여, 시구(?鳩)의 인(仁)을 손상하게 하겠습니까.”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의롭게 여겨 그대로 좇았다. 시호는 양절(良節)이다. 박상충(朴尙衷)- 반남(潘南) 사람인데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어, 고례(古禮)를 잘 고증하고 차례 있게 정리하여 《사전(祀典)》을 만들었다. 우왕(禑王) 때 이인임(李仁任)이 원 나라를 섬기자고 하자, 다시 상소하여 극론(極論)하다가 이인임의 뜻에 거슬려 장형(杖刑)을 받고 귀양가다가 도중에서 죽었다. 사람됨이 강개하고 큰 뜻이 있었으며, 경사(經史)에 밝고 글을 잘 지었다. 조용히 거처할 때는 책만 보며 말이 생업에 미치지 않았고, 가정에 있어서는 효도와 우애가 깊었으며, 관직에 있어서는 부지런하고 근신했다. 남의 의롭지 못한 부귀를 보면 경멸하였다. 정지(鄭地) 모습[形貌]이 괴걸(魁傑)하고 성품이 관후하며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었다. 독서를 즐겨 대의(大義)에 통하고 출입할 때에는 항상 책을 지니고 다녔다. 공민왕 때 속고적(速古赤)이 되어 왜구를 막을 계책을 올리니, 공민왕은 보고 매우 기뻐하여 전라도 안무사로 삼았다. 신우(辛禑) 때 왜구가 양광(楊廣)ㆍ전라ㆍ경상도를 침범하여 고을마다 도륙하고 불을 지르니, 그를 삼도도지휘사(三道都指揮使)로 삼았는데, 왜구를 쳐서 크게 부수었다. 사람들은 지휘사가 아니었다면 3도의 백성이 거의 다 없어질뻔했다고 하였다. 본조 정종(定宗) 3년에 위화도(威化島) 회군의 공을 기록하여 철권(鐵券)을 내렸다. 벼슬에서 물러나와 광주(光州)에서 살다가 죽었다. 시호는 경렬(景烈)이다. 정침(鄭沈)- 나주의 아전으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생업을 일삼지 않았다. 홍무(洪武) 4년 봄에 전라도 안렴사의 명으로 제주도 산천에 제사지낼 축문과 폐백을 받들고 배를 타고 가다가 왜적을 만났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그만 홀로 안된다고 하며 싸울 것을 결심하고 활로 적을 쏘니, 쏘는 족족 맞아 죽어 적이 감히 덤비지 못했다. 화살이 다 되자, 그는 일이 틀린 줄 알고 도포를 갖추어 입고 단정히 앉았다. 적이 이를 보고 놀라, “이는 관원”이라 하고 경계하여 감히 해치지 못하자, 그는 스스로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적에게 항복했다. 본조 박은(朴?)- 박상충(朴尙衷)의 아들인데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하여 본조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아들 규(葵)는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고, 강(薑)은 좌익공신(佐翼功臣)이 되어 벼슬이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이르렀다. 정식(鄭軾) 가신(可臣)의 6세손이다. 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과 지방에서 벼슬을 두루 지냈으며,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무(景武)이다. 『신증』 최보(崔溥)- 과거에 두 번이나 우등으로 합격하여 벼슬이 예빈시 정(禮賓寺正)에 이르렀다. 학문이 해박하였는데, 이학(理學)에 더욱 정통했다. 일찍이 왕명을 받들고 제주에 사신으로 가다가 표류되어 영파부(寧波府) 정해현(定海縣)에 이르렀는데, 〈표해기(漂海記)〉가 세상에 전한다. 연산군 무오년에 사화(史禍)를 만나 멀리 귀양갔다가 마침내 피살되었다. 금상(今上 중종) 초년에 증직(贈職)되었다. 박숭질(朴崇質)-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경(恭頃)이다. 정수곤(丁壽崑)-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문원 교리가 되었다. 총명하고 기억을 잘하여 문명(文名)이 있었더니, 일찍 죽었다. 정수강(丁壽崗)- 정수곤의 아우이다. 성품이 청렴하고 근신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 참판에 이르렀다.
【유우】 고려 정도전(鄭道傳)- 신우(辛禑) 초에 도전으로 하여금 북원(北元)의 사신을 영접하라고 하니, 도전이 말하기를, “내 마땅이 북원 사신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올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그를 결박하여 명 나라로 보내겠소.” 했다가 드디어 이인임(李仁任)의 뜻에 거슬리어 회진현(會津縣)으로 귀양갔다. 〈소재동기(消災洞記)〉를 지었는데, “도전이 소재동 황연(黃延)의 집에 세들어 있었다. 그 동리는 곧 나주에 속한 부곡(部曲) 거평(居平)의 땅인데, 소재(消災)라는 절이 있어 동리 이름도 소재동이라 한다. 동리를 둘러싼 것은 모두 산인데, 동북쪽에는 중첩한 산봉우리와 고개가 서로 잇달았으며, 서남쪽의 여러 봉우리는 낮고 작아서 멀리 바라볼 수가 있다. 그 남쪽에는 들판이 펀펀한데 숲 속 연기가 일어나는 곳에 초가집 10여 호가 있으니, 바로 회진현이다. 유명한 산수(山水)로는, 금성산(錦城山)은 단중(端重)하고 기위(奇偉)하며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나주의 진산(鎭山)이다. 또 월출산(月出山)은 맑고 빼어나며 우뚝하여 동남쪽을 막아 섰는데, 영암군(靈巖郡)과의 경계이다. 금강(錦江)은 나주 동남쪽을 경유하여 회진현을 지나 남서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소재동은 바다까지 수십 리나 된다. 산의 남기(嵐氣)와 바다의 장기(?氣)는 사람의 살에 닿으면 언제나 병이 나게 한다. 아침저녁 어둠과 밝음에 기상이 천만 가지로 변하는 것 또한 구경할 만하다. 동(洞) 안에는 다른 초목은 없고 오직 누런 띠풀과 긴 대나무가 소나무나 녹나무[枏]에 섞여 있다. 민가에서 문과 울타리는 가끔 대나무로 나무를 대용하니, 그 소쇄(蕭?)하고 청한(淸寒)한 것은 멀리 온 사람도 또한 즐겨 안거(安居)할 만하다.
주민들은 순박하여 다른 생각이 없고, 힘써 농사 짓는 것을 업으로 삼는데, 황연(黃延)은 그중에서도 으뜸이다. 집에서 술을 잘 빚고 또 자신이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술이 익을 때마다 반드시 나에게 대접했다. 손님이 오면 언제나 술을 내어 대접하며 날이 갈수록 더욱 공손했다. 또 김성길(金成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제법 글자를 알았고, 그의 아우 김천(金天)은 이야기하고 웃기를 잘하며 술도 잘하는데, 형제가 한 집에 살았다. 또 서안길(徐安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늙어서 중이 되어 안심(安心)이라 불리었다. 코가 크고 얼굴이 길며 용모와 거동이 괴상하고, 사투리와 속담과 시골 여염집 일들을 모두 기억했다. 또 김천부(金千富)라는 이와 조송(曹松)이라는 이도 있었는데, 술을 잘 마시는 것이 김성길(金成吉)이나 황연(黃延)의 동류(同類)였다. 그들은 날마다 나를 따라 놀며, 철에 나오는 토산물을 얻을 때마다 반드시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마음껏 놀다 가곤 했다. 나는 추울 때는 갖옷 한 벌, 더울 때는 베옷 한 벌로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며, 거처하는데 아무 구속이 없고 음식도 마음대로 먹었다. 두세 학자와 함께 강론한 뒤에 시내를 따라 바위와 골짜기를 오르내리다가 싫으면 쉬고 흥이 나면 걸었으며,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배회하고 구경하며 휘파람도 불고 시도 읊으며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혹 농부나 촌로를 만나면, 싸리 포기를 깔고 앉아 서로 위로하며 묻기를 전에 알던 사람처럼 하였다.
하루는 뒷산에 올라가 바라보다가 서쪽에 좀 편편한 곳이 있는데, 거기에서 아래로 넓은 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을 사랑하여, 종을 시켜 묵은 풀숲을 베어내고 집 두 칸을 짓게 했다. 띠도 자르지 않고 나무도 깎지 않았으며, 흙을 쌓아 계단을 만들고 싸리를 엮어 울타리를 만드니, 일이 간단하고 힘이 적게 들었다. 그것도 동리 사람들이 모두 와서 도우니, 며칠 안 가서 다 되었다. 현판을 ‘초사(草舍)’라 달고 거처했다. 아, 두자미(杜子美)가 성도(成都)에서 초당을 짓고 살았는데 겨우 한 해를 살았을 뿐이지만 그의 초당 이름은 천년이나 전해 온다. 나는 이 초사에 얼마나 살까. 내가 떠나간 후 이 초사는 비바람에 허물어지고 말 것인가. 들불[野火]에 타 없어지거나 썩어 흙이 돼 버릴 것인가. 혹시라도 후에까지 남을 것인가, 아닌가. 모두 알 수가 없다. 다만 내가 미치광이 같고 엉성하고 어리석고 고지식하므로, 이 시대에 버림을 받아 먼 지방으로 귀양왔는데, 동리 사람들이 나를 이와 같이 후대해 주니, 혹시 나의 곤궁한 처지를 애처로이 여겨 거두어 주는 것인가. 아니면 먼 지방에서 생장하여 시대의 여론을 듣지 못하여 나의 죄를 알지 못하는 것인가. 요컨대, 모두 매우 후대하는 것이니, 나는 부끄럽고 감격해서 시말(始末)을 적어 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였다. 본조 조주(趙注) 세종 때 장원하여 청렴하고 근면하게 벼슬을 지냈으므로 명성과 업적이 높았다. 만년에 검호 조참판(檢戶曹參判)으로 물러나와 나주의 세화리(細花里)에 살았다. 그때 나이 80여 세로 매년 동짓날과 정월 원단(元旦)의 성절(聖節)이 되면 반드시 망궐례(望闕禮)에 참석하였는데, 나주 성문을 들어오면 반드시 말에서 내리고 공청(公廳)으로 갈 때에는 반드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사람들이 까닭을 물으니, “수령은 임금의 근심을 나눈 직책을 수행하고 성안은 수령이 있는 곳이므로 그렇게 한다.” 했다.
3. 월출산마애여래좌상(月出山磨崖如來坐像)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 월출산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전체 높이 8.6m. 국보 제144호. 얼굴과 팔, 다리 등이 고부조(高浮彫 : 모양이나 형상을 나타낸 살이 매우 두껍게 드러나게 한 부조)로 되어 있어 환조상(丸彫像 : 한 덩어리의 재료에서 물체 모양 전부를 조각한 상)을 방불하게 한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크고 높은 육계(肉鉅)가 표현되어 있다. 약간 치켜 올라간 듯하면서 지그시 내리뜬 눈과 오뚝한 콧날, 꽉 다문 입 등 얼굴은 박력 있는 표현이다.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길고 큰 편이며 짧은 목에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또한 떡 벌어진 당당한 어깨와 풍만한 가슴은 이 불상의 위용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이러한 신체에 비하여 팔은 가늘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왼쪽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에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는데, 얇아서 몸의 굴곡선이 잘 나타나 있다. 옷주름은 날카로운 음각선으로 가늘게 묘사되었다. 대좌 아래까지 얇은 옷주름이 흘러내려 상현좌(裳懸坐)를 이루고 있다.
광배(光背)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선각으로 따로 새긴 거신광(擧身光)이다. 두광에는 연꽃무늬와 덩굴무늬를, 신광에는 덩굴무늬를 새겼다. 두광·신광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조각하였다. 신체에 비하여 얼굴이 비교적 크지만 전반적으로 안정감 있고 장중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리고 조각 수법이 섬세하고 치밀하여 탄력성과 박진감이 잘 나타나 있다.
오른쪽 무릎 옆에 고부조로 높이 87㎝의 선재동자상(善財童子像)이 부처님을 향하여 예배하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신체는 약간 마멸이 되었으나, 오른손에는 무엇인가 지물(持物)을 들고, 왼손은 배 앞에 댄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약간 아래를 향한 시선이라든지 입가의 부드러운 미소가 조용한 자세와 조화를 이루어 신심(信心)이 잘 나타나 있는 듯하다. 대좌 아래에는 배례석(拜禮石)이 마련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안정되고 장중한 인상을 주며, 조각 수법이 섬세하고 치밀하여 탄력성과 박진감이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신체에 비하여 얼굴이 비교적 크다. 그리고 신체 각 부분의 불균형한 비례와 경직된 표현 등은 고려시대 거불(巨佛)들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이 마애불의 조성 연대는 통일신라 말기 내지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文化財大觀-寶物中-(文化財管理局, 1969), 國寶 2-金銅佛·磨崖佛-(黃壽永 編著, 藝耕産業社, 1986).
4. 도갑사(道岬寺)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월출산(月出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신라말 국사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 원래 이곳에는 문수사(文殊寺)라는 절이 있었으며 도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도선의 어머니 최씨(崔氏)가 빨래를 하다가 물 위에 떠내려오는 참외를 먹고 도선을 잉태하여 낳았으나 숲속에 버렸다. 그런데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그를 날개로 감싸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 길렀으므로 최씨가 문수사 주지에게 맡겨 기르도록 하였으며, 장성한 그가 중국을 다녀와서 문수사터에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뒤 1456년(세조 2) 신미(信眉)와 수미(守眉)가 중건하여 전부 966칸에 달하는 당우가 들어섰으며, 부속암자로 상동암(上東庵)·하동암·남암(南庵)·서부도암(西浮屠庵)동부도암·미륵암(彌勒庵)·비전암(碑殿庵)·봉선암(鳳仙庵)·대적암(大寂癌)·상견암(上見庵)·중견암·하견암 등이 있었다.
최근에는 1977년 명부전과 해탈문을 제외한 전 당우가 소실되었으나, 1981년 대웅보전 복원을 시작으로 점차 옛 전각에 대한 복원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大雄寶殿)·명부전(冥府殿)·미륵전(彌勒殿)·국사전(國師殿)·해탈문(解脫門)·일주문 및 요사인 세진당(洗塵堂)이 있다.
이 중 국보 제50호로 지정된 도갑사해탈문은 1473년(성종 4)에 중건하였으며, 좌우에 금강역사상이 안치되어 있다. 또, 미륵전 안에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물 제89호인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보물 제1134호로 지정된 도갑사소장동자상이 있다.
이밖에도 대웅보전 앞과 뒤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1호인 오층석탑 및 삼층석탑 등 고려시대의 석탑 2기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된 도선·수미의 비가 있다. 이 중 도선·수미비는 비문에 의하면 1636년(인조 14)에 건립을 시작하여 1653년(효종 4)에 완성한 것으로, 조각의 솜씨와 비문의 필치가 섬세하고 우수하여 주목을 끈다.
또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지정된 수미왕사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0호로 지정된 석조(石槽)가 있다. 이 절의 주위에는 국보 제144호로 지정된 월출산마애여래좌상을 비롯하여, 도선이 디딜방아를 찧어 도술조화를 부렸다는 구정봉(九井峰)의 9개 우물, 박사 왕인(王仁)이 일본에 건너간 것을 슬퍼한 제자들이 왕인이 공부하던 동굴입구에 새겼다는 왕인박사상 등이 있다. 절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韓國寺刹全書 上(權相老, 東國大學校出版部, 1979), 전통사찰총서 6-전남의 전통사찰Ⅰ-(사찰문화연구원, 1996).
* 도갑사해탈문(道岬寺解脫門)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도갑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목조건물. 정면 3칸, 측면 2칸. 국보 제50호. 1960년에 있었던 중수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이 건물은 신미(信眉)·수미(守眉) 두 스님의 발원으로 1457년(세조 3)에 중건되어 1473년(성종 4)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좌우의 한 칸씩은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안치하고 있으며 중앙의 한 칸은 통로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의 정면에는 도갑사의 정문임을 알리는 ‘月出山道岬寺(월출산도갑사)’라는 현판이 중앙칸 창방 위에 걸려 있고, 한 칸 안으로 들어오면 다시 두 기둥 사이의 창방 위에 ‘解脫門’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바른 장대석 쌓기를 한 기단(基壇) 위에 약한 배흘림을 준 두리기둥〔圓柱〕을 세우고 그 위에 이출목(二出目)으로 된 공포(慊包)를 올려놓았다. 공포 위에는 대들보를 올려 보 끝은 외목도리를 받고 대들보 양쪽 끝 가까이에서는 마루보 끝을 받는 포대공(包臺工)의 첨차가 그대로 우미량(牛眉樑)이 되어 앞으로 나오는 것을 기둥 위 대들보에서 받아 이것이 주심도리(柱心道里)를 받고 있다.
마루보 중앙에는 포대공으로 된 마루대공을 두고 마루도리를 받으며 마루도리 앞뒤에서는 약한 반곡(反曲)을 가진 소슬합장이 역시 마루도리를 떠받치고 있다.
이 문의 건축양식은 기본적으로는 부석사조사당(浮石寺祖師堂, 국보 제19호)과 동일한 계통이나, 특이한 점은 공포의 출목(出目)이 구조적으로는 이출목이면서 그 형태는 외일출목(外一出目)으로 된 것같이 보이며 대들보 또는 마루보 위에서 마루도리나 대들보를 받치는 포대공의 양식이 기둥머리에 있는 공포와 전혀 달라 마치 다포집 양식의 공포와 같은 형태로 된 점이다.
따라서, 이 건물은 주심포(柱心包) 집 양식을 가장 많이 수용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다포집 양식의 수법을 혼용한 가장 뚜렷한 건물로서 흥미있는 것이며, 우리나라에서 그 예가 많지 않은 산문(山門)건축으로도 매우 귀중한 것이다.
≪참고문헌≫ 韓國建築樣式論(鄭寅國, 一志社, 1980), 文化財大觀 1-國寶 1-(韓國文化財保護協會, 大學堂, 1986), 韓國의 建築(金奉烈, 空間, 1985).
* 도갑사석조여래좌상(道岬寺石造如來坐像)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에 있는 도갑사에 봉안된 고려시대의 석불좌상. 높이 3m. 보물 제89호. 불신(佛身)과 광배(光背)·대좌(臺座)를 모두 갖춘 불상으로, 광배와 불신은 한 돌에 조각하였다.
머리는 나발(螺髮)로 비교적 큼직한 육계(肉鉅)를 얹었다. 타원형의 얼굴에는 두두룩한 눈두덩, 넓적한 코, 작은 입 등을 표현하였다.
이 얼굴에서 특징적인 것은 좁은 이마인데, 백호(白毫 : 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희고 빛나는 가는 터럭)를 새겨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두 귀는 짧은 편이고 군살 진 턱과 목의 삼도(三道)는 도식적인 느낌을 준다.
둥글고 넓은 어깨에 신체의 굴곡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신체적인 특징은 고려시대의 초기 작품인 개태사지석조불입상(開泰寺址石造佛立像, 보물 제219호)이나 장곡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長谷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보물 제174호) 등과 공통된다.
당당한 가슴에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불의(佛衣)를 입고 있으며, 오른쪽 어깨에 형의 옷주름이 굵은 선으로 새겨져 있다. 오른쪽 어깨에서 팔과 가슴으로 흘러내린 옷주름은 배 부분에 이르러서는 거의 표현되지 않는다.
이러한 옷주름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에서부터 표현되어 고려시대 초기의 불상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통일신라 불상의 양식보다는 장식적이고 형식화되어, 이 작품이 그보다 후대의 작품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왼손은 무릎 위에 대고 있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무릎의 너비는 신체에 비하여 좁은 편이다.
광배는 주형 광배(舟形光背)로 머리 부분에는 단엽연화문(單葉蓮華文)을 새기고 그 주위에 화불(化佛) 2구를 조각하였다. 바깥 가장자리에는 화염문이 조각되었는데, 도식적인 수법이 나타나고 있다.
머리의 육계와 나발의 표현, 얼굴의 세부 모습, 가슴의 표현 등에서 청량사석조석가여래좌상(淸凉寺石造釋迦如來坐像, 보물 제265호)과 친연성을 느낄 수 있으나 더욱 도식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얼굴에서 팽창된 뺨이 없어진 점과 군살 진 턱의 묘사 등 세부 표현에서 전면적으로 투박성이 나타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특징인 육감적이고 풍만하며 탄력 있는 양식이 사라지고 도식적이고 추상적인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이 불상의 제작 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文化財大觀 5-寶物 3-(韓國文化財保護協會, 大學堂, 1986).
* 도갑사도선수미비(道岬寺道詵守眉碑)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도갑사에 있는 비. 전체 높이 513㎝.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8호. 귀부는 방형의 대좌 위에 머리를 약간 오른쪽으로 틀고 있으며, 머리는 용두화되었다.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위에서 송곳니가 날카롭게 뻗어 있고 앞발은 다섯 개의 발가락을 내었다.
귀갑문은 일반적인 6각 문이 아닌 평행 음각선이며, 등부분은 또 한 겹의 귀갑을 입혀 그 끝을 오므라들게 하여 연화문을 조식(꾸밈)하였다. 전체적으로 매우 생동감 있고 힘차게 표현되었다.
비신은 화강암이며 전후 면에 글씨가 음각되어 있고 측면에는 운룡문(雲龍紋)을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꿈틀거리며 서로 반대방향을 보고 있는데 조각이 매우 사실적이다.
비문은 크게 전면의 비문과 후면의 음기로 구분되는데 전면의 비문은 찬자(撰者)와 서자(書者)가 각각 다른 두 개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 전면 상단에는 전서체로 “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銘(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이라 제액을 만들었으며, 당시 형조판서인 김광욱(金光煜)이 썼다.
비의 좌측 비문은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지었으며, 글씨는 예조판서 오준(吳竣)이 썼다. 이 비문은 총 16행 714자(자경 4∼5㎝)이며 비제(碑題)는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병서(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銘幷序)”이다. 전면 우측의 비문은 총 10행 512자(자경 2∼3㎝)로서 비면 상하를 모두 채운 것이 아니고 비면 중간에서 시작하였다.
찬자는 홍문관 부수찬 이수인(李壽仁)이며, 글씨는 성균관진사 김시련(金時賈)이 썼다. 비문의 음기(陰記 : 비의 뒷면에 새긴 글)에 따르면 건립 동기는 옛날의 비가 마모되어 글자를 알 수 없자 승 옥습(玉習)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발원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건립연대는 1636년(인조 14)에 시작하여 1653년(효종 4)에 완성하였다.
이 비에 대한 의문점은 비명이 도선국사와 수미선사 두 사람의 공동명의라는 점이다. 비문의 내용은 주로 도선국사에 관한 것 뿐이며, 수미선사의 비〔王師妙覺和尙碑〕는 20년 전에 이미 별도로 만들어져 대웅전 남쪽에 서 있다.
≪참고문헌≫ 靈巖郡文化遺蹟(국립목포대학박물관·영암군, 1986), 道詵國師와 관련한 遺物·遺蹟(成春慶, 先覺國師 道詵의 新硏究, 영암군, 1988).
* 도갑사삼십이관음응신도(道岬寺三十二觀音應身圖)
조선 중기의 불화.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235㎝, 가로 135㎝. 일본 경도(京都) 지온원(知恩院) 소장. 이 관음탱화는 명문에서 명시한 바와 같이, 1550년(명종 5년) 인종비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가 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양공(良工)을 모집, 이자실(李自實)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여 전라남도 영광군 군서면 도갑리에 있는 도갑사 금당(金堂)에 봉안한 것이다.
명문의 내용이 확실하고, 또한 현존 유일의 32관음응신도인 점이 주목된다. 관음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그 근기(根機 : 중생의 敎法을 받을 만한 성능)에 따라 모습을 변화한다. 이에 대해서는 ≪법화경≫ 보문품(普門品)과 ≪능엄경 楞嚴經≫에서 언급되고 있다.
화면 중앙에는 관음보살이 유희좌(遊戱坐)의 모습으로 바위에 앉아 있다. 보관, 천의(天衣)의 문양, 영락(瓔珞 :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화면 위쪽에는 좌우에 합장한 여래(如來) 10구와 중앙의 2여래가 배치되었다. 이외의 공간에는 산수를 배경으로 한 관음의 응신처(應身處) 및 그들의 변신한 모습과 공덕의 내용을 도해하고 있다. 또한 각 장면마다 금니(金泥)로 도상의 내용을 적어 놓아 이해를 돕고 있다.
여기에서는 32응신이 아닌 22신, 즉 수문신(壽聞身)·임왕신(林王身)·제석신(帝釋身)·자재천신(自在天身)·천대장군신(天大將軍身)·대자재천신(大自在天身)·거사신(居士身)·바라문신(婆羅門身)·용남신(龍男身)·용녀신(龍女身)·용신(龍身)·약차신(藥叉身)·건달바신(乾眷婆身)·아수라신(阿修羅身)·긴나라신(緊那羅身)·마호나가신(摩呼那伽身)·불신(佛身)·장자신(長者身)·집금강신(執金剛身)·소왕신(小王身)·부녀신(婦女身)·벽지불신(陽支佛身) 등의 내용을 도해한 것이다.
관음의 응신들은 각 장면이 산수도로 구획되었다. 암산의 모습이나 나무의 묘법 등은 조선 불화에서는 보기 힘든 수준 높은 기법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이들은 조선 초기 산수화에서 보이는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각 응신의 모습도 활달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보이고 있어 작가의 높은 기량을 짐작하게 한다.
이 작품은 32응신 각각의 모습에 화기를 기입하여 그 도상을 밝히고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불보살도의 양식이나 산수화의 기법이 모두 왕대비의 발원인 만큼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고 있고, 16세기의 불화 양식을 정확히 전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조선시대 불교 회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참고문헌≫ 韓國의 美 16-朝鮮佛怜-(文明大 監修, 中央日報社, 1984), 佛怜와 山水怜가 만나는 鮮初作品(洪潤植, 季刊美術 25, 1983).
* 도갑사수미왕사비(道岬寺守眉王師碑)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사에 있는 비. 전체 높이 334㎝. 비신 높이 200㎝, 너비 108㎝, 두께 21㎝.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2호. 방형의 대좌 위에 귀부(龜趺)·비신(碑身)·이수(賂首)를 안치한 완형의 석비이다. 귀두는 용두화되었으며, 입에는 여의주 없이 위 아래로 이빨을 맞대고 있다.
목은 짧은 편이고 앞발은 약간 벌려서 八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발가락은 5개이다. 뒷발은 앞발과 달리 양 옆을 향하고 있다. 귀갑은 이중의 6각문(六角文)이며, 등에 비좌를 마련하여 비신을 받고 있다. 이수는 조선시대에 흔히 보이는 팔작지붕형이 아니고 장방형이다.
이수의 네 모서리 상단에 밖을 향하여 용두(龍頭)가 조각되어 있고, 몸둥아리는 서로 얽혀 허공을 날아 비약하는 모습이다. 이수의 전면 중앙에 또 한 쌍의 용이 조각되어 있는데 입을 근접시켜 혀를 맞대고 있는 재미있는 기법을 보여 주고 있다.
비 전면 상단에 ‘月出山道岬寺王師妙覺和尙碑銘(월출산도갑사왕사묘각화상비명)’이라 전서(篆書)하였고, 비문은 19행의 해서체이다.
비문의 끝에 ‘崇禎己巳二月日始癸酉六月日立(숭정기사2월일시계유6월일립)’이라 하여 이 비가 1629년(인조 7) 2월에 시작하여 4년 후인 1633년(인조 11) 6월에 세워졌음을 밝히고 있다. 비문은 백암성총(栢庵性聰)이 짓고 썼다. 비신 후면에는 비 건립에 참여하였던 지방인사와 승려 등의 시주자들이 음각되어 있다.
≪참고문헌≫ 靈巖郡文化遺蹟(국립목포대학박물관·영암군, 1986)
* 영암죽정리국장생(靈巖竹亭里國長生)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에 있는 석장생. 1기(基).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18호. 군서면 동구림리 죽정마을에서 도갑사 쪽으로 굽은 길 북쪽 숲속에 있다. 과거에는 이 길이 도갑사의 옛길이었다고 전한다.
이 국장생은 가까운 소전머리 황장생(皇長生)과 마찬가지로 자연석재를 거칠게 다듬어 사용한 사각석비형(四角石碑形)의 입석 장생으로 도갑사 입구에 있는 인면형 장승과는 전혀 형태가 다르다. 이곳 국장생은 현재 보물로 지정된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국장생과 비교되는 유물로서, 조성연대도 통도사 국장생의 고려 선종 2년(1085)과 비교하여 생각할 수 있다.
크기는 높이 120cm, 너비 70cm이다. 장생의 전면 상부에 확인되지 않은 문양이 있고 두 줄의 선을 사각 테두리로 하고 그 안에 해서체로 ‘國長生(국장생)’이라 종서(縱書)하였다. 그리고 우측에는 ‘□□六年(□□6년)’이, 하부 매몰부위에는 ‘石標四坐(석표사좌)’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중앙에 음각된 ‘國長生(국장생)’ 글씨는 자경(子徑)이 가로 26cm, 세로 27cm이며 좌우측 및 하단부의 글씨자경은 가로 5cm, 세로 8cm이다. 풍화가 심하여 글자의 판독이 매우 힘들다. 한편, ≪동국여지승람≫ 권35 영암군편 불우조(佛宇條)에 처음 보이는 국장생 관련 기록내용을 살펴보면 “도갑사는 도선이 일찍이 머물렀던 곳이다. 비가 있으나 글자가 결락(缺落 : 이지러져 떨어짐)되어 해독이 어렵다.
사하동(寺下洞) 입구에 두개의 입석이 있는데, 그 하나에는 國長生(국장생) 3자를 새겼고, 하나에는 皇長生(황장생) 3자를 새겼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을 토대로 하단 부 ‘석표사좌’의 의미를 해석하자면 죽정리국장생과 인근의 소전머리황장생이 2좌가 됨은 분명하고, 나머지 2좌 가운데 1좌는 군서면 서구림리 메밀방죽 옆에 있는 ‘□장생’일 것으로 판단된다.
장승이 사찰의 경계를 표시하고 있음은 이 국장생의 예로써 확인 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가운데 사하동은 바로 국장생이나 황장생을 하나의 경계표로 보았다는 증거이다. 이 국장생은 현존하는 장승 가운데 초기형태라는 점과 장승의 출현이 사찰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는 장승연구의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1986도지정문 화재조사보고서 1(전라남도, 1986), 남녘의 벅수(이종철, 김향문화재단, 1990), 문화재도록-도지정문화재편-(전라남도, 1992). 李鍾哲
5. 도선(道詵)
827(흥덕왕 2)∼898(효공왕 2). 신라 말기의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가. 호는 연기(烟起). 자는 옥룡자(玉龍子)·옥룡(玉龍). 성은 김씨(金氏). 영암 출신. 왕가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 뒤, 유명한 사찰을 다니면서 수행하다가, 846년(문성왕 8) 곡성 동리산(桐裏山)의 혜철(惠徹)을 찾아가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850년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운봉산(雲峯山)에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태백산에 움막을 치고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하였다. 전라남도 광양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언제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의 명망을 들은 헌강왕은 궁궐로 초빙하여 법문을 들었다.
72세의 나이로 죽자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들이 옥룡사에 징성혜등탑(澄聖慧燈塔)을 세웠다. 고려의 숙종은 대선사(大禪師)를 추증하고 왕사(王師)를 추가하였으며,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하였다. 또한 의종은 비를 세웠다.
일설에 의하면 도선은 당나라로 유학가서 밀교승려 일행(一行)으로부터 풍수학을 배워왔다고 한다. 그러나 일행은 당나라 초기의 승려이고 도선의 생몰년은 당나라 말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연대에 모순이 있고, 도선이 당나라에 유학하였다는 것도 신빙성이 없다.
도선은 승려로서보다는 음양풍수설의 대가로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 풍수지리학의 역사가 신라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도선의 생존연대가 그때였기 때문이다.
언제나 도선이 풍수지리설 같은 주술적 언어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는 역사적 실재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적 존재로 파악되기까지 하였다. 도선이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고려 태조에 의해서였다.
875년(헌강왕 1) 도선은 “지금부터 2년 뒤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 때문에 태조 이후의 고려왕들은 그를 극진히 존경하였다.
태조는 도선으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은 일은 없으나 사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조는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온 민간신앙도 보호하고 육성하면서, 동시에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도선비기 道詵秘記≫에 관해서도 대단한 관심을 쏟았다.
그는 불교신앙에서 오는 가호의 힘과 함께 참위설에서 얻어지는 힘에 의지함으로써 그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달성하려 하였다. 그래서 『훈요십조』 가운데 제2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順逆)을 점쳐서 정한 자리에 개창한 것이다. 도선은 일찍이 ‘내가 점쳐서 정한 곳 이외 함부로 사원을 세우면 지덕(地德)을 손상하여 국운이 길하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생각컨대, 국왕·공주·왕비·조신들이 서로 원당(願堂)이라 하여 사원을 마음대로 창건한다면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신라 말엽에 사찰을 함부로 이곳저곳에 세웠기 때문에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경계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도선이 산천의 지세를 점쳐서 결정한 자리에 세워진 절이나 탑을 비보사탑(裨補寺塔)이라고 하였다. 도선의 저서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도선비기≫·≪송악명당기 松岳明堂記≫·≪도선답산가 道詵踏山歌≫·≪삼각산명당기 三角山明堂記≫ 등이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東文選, 靑鶴集, 朝鮮金石總覽 上, 道詵(徐景洙, 韓國의 人間像 3, 新丘文化社, 1965), 道詵의 生涯와 羅末麗初의 風水地理說(崔柄憲, 韓國史硏究 11, 1975).
6. 의순(意恂)
1786(정조 10)∼1866(고종 3). 조선 후기의 승려. 대선사(大禪師)이자 다도(茶道)의 정립자이다. 성은 장씨(張氏). 자는 중부(中孚), 호는 초의(草衣), 당호는 일지암(一枝庵), 전라남도 무안 출신이다. 15세 때에 강변에서 놀다 탁류에 떨어져 죽을 고비에 이르렀을 때 부근에 있던 승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 승려가 출가할 것을 권하여 16세 때 남평 운흥사(雲興寺)에서 민성(敏聖)을 은사로 삼아 득도하고, 대흥사(大興寺)에서 민호(玟虎)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행 적〕 22세 때부터 전국의 선지식(善知識)들을 찾아가 삼장(三藏)을 배워서 통달하였을 뿐 아니라, 대오(大悟)하여 유일(有一)의 선지(禪旨)를 이어받았다. 불교학 이외에도 유학·도교 등 여러 교학에 통달하였고, 범서(梵書)에도 능통하였다. 그리고 정약용(丁若鏞)·홍현주(洪顯周)·김정희(金正喜) 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는데, 특히 정약용에게서는 유서(儒書)를 받고 시부(詩賦)를 익히기도 하였다.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대흥사의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 일지암을 짓고 40여 년 동안 홀로 지관(止觀)에 전념하면서 불이선(不二禪)의 오의(奧義)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기도 하였다. 또한, 모든 것을 구비한 인간이 될 것을 주장하면서 ≪동다송 東茶頌≫을 제작하여 다생활의 멋을 설명하였고, 범패와 원예 및 서예에도 능하였으며,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약 등에도 능하였다.
이는 실사구시를 표방한 정약용의 영향과 김정희와의 교유에서 얻은 힘이라고 보고 있다. 1866년 나이 80세, 법랍 65세로 입적하였다. 평범한 일생을 통하여 선(禪)과 교(敎)의 한쪽에 국집함이 없이 수도하고 중생을 제도하였으며, 이상적 불교인으로 존경한 인물은 진묵(震默)이었다. 그는 또한 대흥사 13대종사 중 13번째 대종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둔사지 大芚寺誌≫에는 의순을 생략하고 있다. 이는 ≪대둔사지≫의 편자가 의순이었기 때문이며, 실제로는 마지막으로 그를 쳐서 13대종사라고 부르는 것이 관례이다.
〔사 상〕 그의 사상은 선사상(禪思想)과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으로 집약된다. 선사상은 저서인 ≪선문사변만어 禪門四辨漫語≫에 잘 나타나 있다. ≪선문사변만어≫는 당대의 유명한 대선사 백파(白坡)가 ≪선문수경 禪門手鏡≫이라는 저술을 발표하자 의순이 선배 백파의 잘못을 하나하나 변증하기 위하여 저술한 것이다.
백파는 선을 조사선(祖師禪)·여래선(如來禪)·의리선(義理禪)의 3종으로 나누어 설명하였으나, 의순은 선을 3종으로 판별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보고, 조사선과 여래선, 격외선(格外禪)과 의리선 등의 사변(四辨)을 중심으로 백파와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다. 즉, 그는 조사선·여래선·의리선 등은 근기(根機)에 따른 구별일 수 없고, 인명으로 조사선과 여래선, 법명으로 격외선과 의리선으로 판별되지만, 조사선이 격외선이며 여래선은 의리선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선에 대한 논쟁은 김정희·우담(優曇)·축원(竺源) 등에게까지 파급됨으로써 조선 후기의 한국선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의순이 전선(專禪)으로 기울지 않고 지관을 수행하였다고 하는 데에서 그의 선사상의 큰 특색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다선일미사상은 차와 선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서 시작된다. 의순은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식(法喜禪悅食)’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 잔의 차를 통하여 법희선열을 맛본다고 한 것은 바로 다선일미사상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그는 차의 성품이 사됨이 없어서 어떠한 욕심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고, 때묻지 않은 본래의 원천과도 같은 것이라고 하여 무착바라밀(無着波羅蜜)이라고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차의 진예 없는 정기를 마시거늘 어찌 큰 도를 이룰 날이 멀다고만 하겠는가(塵穢除盡精氣入 大道得成何遠哉)!”라고 하였다. 의순의 다도는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며, 그 잘 끓은 물과 좋은 차를 적절히 조합하여 마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이었다. 그의 생애는 오로지 좌선하는 일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서 멋을 찾고 불법(佛法)을 구하고자 노력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제법불이(諸法不二)’를 강조하였다.
그에게는 차와 선이 별개의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와 선이 둘이 아니었다. 그의 법을 이은 제자로는 각안(覺岸)이 있다.
〔저 술〕 저서로는 ≪선문사변만어≫ 1권, ≪이선래의 二禪來儀≫ 1권, ≪초의시고 草衣詩藁≫ 2권, ≪진묵조사유적고 震默祖師遺蹟考≫ 1권, ≪동다송≫ 1권, ≪다신전 茶神傳≫ 1권 등이 있다.
≪참고문헌≫ 草衣詩藁, 大芚寺誌(草衣編集), 海東佛祖源流(覺岸),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朝鮮金石總覽(朝鮮總督府, 1919), 韓國佛敎撰述文獻總錄(東國大學校 佛敎文化硏究所, 東國大學校 出版部, 1976), 白坡와 草衣時代 禪의 論爭點(韓基斗, 韓國佛敎思想史, 圓光大學校 出版部, 1974), 草衣禪師의 茶道觀(金相鉉, 史學志 10, 1976).
* 동다송(東茶頌)
조선 후기의 승려 초의(草衣)가 다도, 특히 우리 나라 차에 대하여 송(頌)형식으로 지은 책. 책을 지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1831년 이후에 찬술한 것으로 보고 있다.
모두 31송으로 되어 있고, 송마다 옛사람들의 차에 관한 설이나 시 등을 인용하여 주를 붙였다. 동다송은 우리 나라 차에 대한 송이라는 뜻이지만 우리 나라의 토산차에 대한 것은 겨우 6송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중국 차에 관한 신이(神異)한 전설을 중심으로 하는 차의 효험, 생산지에 따른 차의 이름과 그 품질, 차도의 구체적인 내용인 차를 만드는 일, 물에 대한 품평, 차를 끓이는 법, 차를 마시는 구체적인 법 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초의는 토산차에 대해 색깔·향기·맛 등이 뛰어나 중국차에 뒤지지 않는다고 찬양하였다. 또 지리산 화개동(花開洞)의 차밭은 차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적지라고 하였다. 법도에 맞게 만들어지지 못한 차에 대해서는 “천하에 좋은 차를 속된 솜씨로 망치는 것이 많다.”고 안타까워하였다.
차를 따는 시기로 ≪다경 茶經≫에서 말한 곡우(穀雨) 전후의 시기는 토산차에 적합하지 못하고, 입하 뒤가 적당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자신의 경험에 의한 주장이다.
그리고 “차를 딸 때 그 묘를 다하고, 차를 만들 때 정성을 다하고, 참으로 좋은 물을 얻어서, 중정(中正)을 잃지 않게 차를 달여야 체(體)와 신(神)이 더불어 조화를 이루고, 건(健)과 영(靈)이 서로 화합하면 차도(茶道)가 이루어진다.”고 강조하였다.
체란 물을 지칭하고 신이란 차를 가리키므로 차는 물의 정신이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좋은 물이 아니면 차의 정신을 나타낼 수 없고, 참으로 좋은 차가 아니면 체가 되는 물에서 좋은 차맛을 맛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건과 영은 차의 신이 건실함과 물이 신령스러움을 의미한다. 마지막 송에서는 다인(茶人)의 심회와 자부를 담은 시를 수록하였다.
이 책에 나타난 초의의 다도정신은 그의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과 통한다. 그리고 이 책은 ≪다경≫ 등의 옛 문헌이나 시 등을 많이 인용한 술작(述作)이지만 우리 나라 유일의 다서라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태평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의 茶道(崔凡述, 寶蓮閣, 1975), 艸衣選集(김봉호, 文星堂, 1977), 草衣禪師의 茶道觀(金相鉉, 史學志 10, 1976).
7. 임제(林悌)
1549(명종 4)∼1587(선조20). 조선 중기의 시인.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소치(嘯癡)·벽산(碧山)·겸재(謙齋). 본관은 나주(羅州). 절도사 진(晉)의 맏아들이다.
임제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하여 스승이 따로 없다가 20세가 넘어서야 성운(成運)을 사사하였다. 교속(敎束)에 얽매이기보다는 창루(娼樓)와 주사(酒肆)를 배회하면서 살았다. 23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이에 창루와 주사를 그만두고 한때는 글공부에 뜻을 두어 몇 번 과거에도 응시하였다. 그러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창루와 주사에서 벗어나 현실세계로 뛰어든 그의 눈에는 부조리와 당쟁만이 가득 찼다.
임제가 22세 되던 어느 겨울날 호서(湖西)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우연히 지은 시가 성운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성운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로부터 3년간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 때에 ≪중용≫을 800번이나 읽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임제는 1576년 28세에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 생원·진사에 합격하였다. 이듬해에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서도병마사·북도병마사·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냈다. 그러나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질시하면서 편당을 지어 공명을 탈취하려는 속물들의 비열한 몰골들이 그의 호방한 성격에 용납되지 않았다. 벼슬에 대한 선망과 매력, 흥미와 관심은 차차 멀어져 가고 환멸과 절망과 울분과 실의가 가슴속에 사무쳤다. 그러기에 10년 간의 관직생활은 아무런 의의가 없었다.
임제는 벼슬에 환멸을 느껴 유람하였다. 가는 곳마다 숱한 일화를 남겼다. 사람들은 임제를 기인이라 하고 또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하였다. 그래서 임제의 글은 취하되 사람은 사귀기를 꺼렸다.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지냈다가 임지에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당한 것과 기생 한우(寒雨)와 주고받은 시조의 일화, 평양기생과 평양감사에 얽힌 로맨스도 유명하다.
성운이 세상을 등진 이래로 지기(知己 ; 친구 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가 끊어지고, 이리저리 방황하다 고향인 회진리에서 39세로 죽었다. 운명하기 전에 여러 아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오직 우리 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고 한 뒤에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칼과 피리를 좋아하고 방랑하며 술과 여인과 친구를 사귀었다.
임제는 호협한 성격과 불편부당을 고집하는 사람이다. 〈수성지 愁城誌〉·〈화사 花史〉·〈원생몽유록 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이 있다.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이밖에 시조 3수와 ≪임백호집≫ 4권이 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白湖集, 林悌의 初期詩에 대하여(심호택, 백강서수생박사화갑기념논총 한국시가연구, 형설출판사, 1971), 林悌論(蘇在英, 한국문학작가론, 형설출판사, 1980).
* 나주 영모정 (羅州 永慕亭)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신풍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재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 전라남도 기념물 제112호. 1520년(중종 15) 임붕(林鵬)이 건립한 정자로, 처음에는 임붕의 호를 따서 ‘귀래정(歸來亭)’이라 불렀으나 1555년(명종 10) 후손이 재건하면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이곳은 조선시대의 명문장가로 이름난 임제(林悌)가 시를 지으며 교우하던 곳으로 기념적 의의가 더욱 깊다.
현재의 건물은 1982년 다시 중창한 것인데 건축적으로 고졸한 맛은 약하나, 영산강을 조망하며 주위에 400여년이 된 팽나무와 괴목나무 등 수목이 울창하고 주변 조경이 잘 가꾸어져 있다. 부지 주위에는 ‘歸來亭羅州林公鵬遺墟碑(귀래정나주임공붕유허비)’·‘白湖林悌先生紀念碑(백호임제선생기념비)’가 있으며 백호임제선생기념관이 있다.
정자는 구릉 위 중앙에 남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주위에 넓은 터를 닦고 수목을 둘렀다. 온돌방 1칸과 누마루 2칸으로 주위에 폐쇄적 벽과 문으로 공간을 구성하였다. 구조형식은 낮은 단층의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2m 가량 되는 긴 원형 장대석 주초를 세우고 그 위에 이보다 약간 짧은 원형 나무기둥을 세웠다.
전면과 우측면의 창호는 띠살창을 달았고 뒷면과 우측면 창호는 당판문(唐板門 : 마루청의 널문)을 달았으며, 하부 고맥이를 적벽돌로 치장하였다. 가구방식은 기둥머리에 간결한 들보〔樑〕와 도리를 걸어 결구하였는데, 중앙간에서는 기둥 위에 대들보를 걸치고 동자주(童子柱)와 종량을 세웠으며, 그 위에 판대공(板臺工)과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섞어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참고문헌≫ 湖南文化硏究 15(全南大學校 湖南文化硏究所, 1985), 文化遺蹟總覽(全羅南道, 1986), 羅州郡文化遺蹟地表調査(全羅南道, 1986), 指定文化財調査報告書(全羅南道, 1988), 全國文化遺蹟總覽(國立文化財硏究所, 1996).
* 나주 미천서원(羅州 眉泉書院)
전라남도 나주시 안창동에 있는 서원. 1690년(숙종 16) 지방유림의 공의로 허목(許穆)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허목(許穆)1595(선조 28)∼1682(숙종 8)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馬). 찬성 자(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별제 강(艮)이고, 아버지는 현감 교(喬)이며, 어머니는 정랑 임제(林悌)의 딸이다. 부인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이다.
1693년 ‘眉泉(미천)’이라는 사액되었으며, 이 서원은 1724년(경종 4)에 훼철되었다가, 1771년(영조 47)에 사우를 중수하고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1799년(정조 23) 채제공(蔡濟恭)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892년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영정각, 좌우 각 1칸씩의 장판각(藏板閣), 내삼문(內三門), 4칸의 강당, 동소문(東小門)·서소문(西小門)·외삼문(外三門), 3칸의 고사(庫舍) 등이 있다. 영정각에는 허목과 채제공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장판각에는 문집목판 1,816판이 소장되어 있다.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강당은 여러 행사와 학문의 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매년 3월과 9월 9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頭) 4두(豆)이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재산으로는 전답 6,600여평과 임야 4만평 등이 있다.
≪참고문헌≫ 太學志, 典故大方, 眉泉書院誌(眉泉書院, 1939), 全羅의 書院·祠宇-賜額書院·祠宇篇-(木浦大學校博物館·全羅南道, 1988), 羅州郡誌(羅州郡, 1980).
9. 동인문화원 9월 강좌 안내
월/수/금요일 15시~18시 한자급수자격시험 1급반 송호순
월/금요일 18시30분~21시30분 한자급수자격시험 2급반 송호순
화요일 10시~12시 동인문화대학(서양철학) 전 헌
14시~16시 동인문화대학(동양고전) 이기동
수요일 17시~19시 려한십가문초 허종은
19시~21시 제1기 고전강좌 이기동
목요일 19시~21시 논어(주자주 포함) 전호근
서울시 종로구 익선동 30-6 운현신화타워 402,4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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