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의 역사
1) 단군조선의 건국
(1) 단군임검의 탄생과 성장
국조 단군임검은 거불단 환웅과 천모(天母)님 사이에서 신묘년(B.C.
2,370) 5월 2일 인시(寅時), 박달나무 밑에서 태어나셨다. 즉 천손족(天孫族)의 족장이며 배달국의 수장이신 환웅천황과 지손족(地孫族)인
웅족(熊族)의 여인이었으나, 깨달음을 얻어 천손(天孫)이 되신 웅녀 공주 사이에서 세상에 나오신 분이다.
단군임검은 어려서부터 신인(神人)의 덕이 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14세 되던 갑진년(B.C. 2357)에 외할아버지인 웅족의 왕은 그의 신성함을 알아보고 비왕(裨王 : 왕을 보좌하는 부왕)으로 삼았다.
(2) 단군조선의 건국
개천(開天) 1565년(무진(戊辰)년, B.C. 2333) 상월(上月 : 음력 10월) 3일에 이르러, 신인(神人) 임검이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에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잡고,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님께 제사를 올려 단군조선이 시작되었다.
단군임검께서는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으며,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나라와 백성을 다스렸다. 구환(九桓)의 백성들은 모두 그를 마음으로부터 따랐고, 단군임검을 천제(天帝)의 화신이라 여겼다.
단군임검은 신시(神市)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 이름했으며, 비왕의 자리에 24년,
제위에 93년 있고 130세까지 사셨다.
(3) 단군임검의 가르침-단군칙어(檀君勅語)
단군께서 개국하실 때 모든 백성들에게 내린 가르침의 말씀이 있었는데, 이를 단군칙어(檀君勅語)라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너희는 지극히 거룩한 한얼님의 자녀 됨을 알아라.
② 너희는 영원토록 자손이 계승할 때에 터럭 만한 것이라도 다침이
없고 이즈러짐 없어라.
③ 너희는 한겨레로 일체가 되어 의좋고 정답게 서로 손을 잡고 같이
살아라.
④ 너희는 조심하라, 조심하라. 내 땀방울이 적시우고, 내 피가 물들인
강토에 혹여나 더러운 때 묻힐세라.
⑤ 너희는 네가 해야할 일은 너희 손으로만 하게 하라. 그리하여 각기
너희 할 직분을 지켜라. 너희 할 책임을 견뎌라.
⑥ 네가 가질 것은 남에게 주지 말고, 네가 할 일을 남이 하지 말게 하라.
⑦ 너희는 이 나라 기슭, 한군데도 빠짐없이 하늘 은혜와 땅의 이익 두루 받았음을 알라. 너희 것 삼아 쓸데로 써서 너희 생활이 항상 풍족하거라. 넉넉하거라.
⑧ 너희는 내가 오늘 훈칙한 이 알림이 할 일로써, 천하만민에게 고루
알리어 주거라.
또 단군임검의 가르침은 민족의 3대 경전중의 하나인 <참전계경(參佺戒經)>이라는 경전으로 전해진다.
2) 단군조선의 발전
(1) 신선도의 제천의식 - 천제(天祭)
첫 민족국가로써 신선의 나라를 세운 임검께서는 정신적 상징으로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참성단(塹城壇)이라는 제천단을 쌓게 했다. 그리고 나라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나 5월 단호제와 10월 상달제 때, 하늘에 제사를 지내 민족의 근본에 보답하였다. 이때는 제천권을 가진
천자(天子)였던 역대 단군들이 천제를 주관했다.
(2) 단군시대의 제천행사
① 2대 부루단제 26년(B.C. 2215년)
하늘신 공경에 대한 석자장(石子丈)의 건의를 받아들여 천하에 조서를
내리고, 삼신전(三神殿)과 삼성사(三聖祠)를 세워 환인, 환웅, 단군의
삼신위를 봉안하여 백성들에게 경배하게 하였다.
② 11대 도해단군 원년(B.C. 1891년)
단제께서는 열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택하여 국선(國仙)의 소도(蘇塗)를 설치하도록 하셨다. 많은 박달나무를 둘러 심은 후에 그 중에서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환웅의 상(像)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 지내며 웅상(雄常)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환웅천황을 모시는 대시전(大始殿)을 세워 환웅천황을 모시게 하였다.(이 전각은 그 뒤 환웅전, 대웅전으로 바뀌었으며, 불교가 우리 나라에 전래하여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석가 세존을 모시는 법당도 선불습합(仙佛習合)의 영향 속에 대웅전이란 이름으로 남았다) 한편, 천부인(天符印)이 표시된 커다란 원
하나로 된 그림을 누각(樓閣)에 걸어 두었으며, 이를 거발한(居發桓)이라 하였다.
③ 16대 위나단제 28년(B.C. 1583년)
구환의 여러 한(汗)들이 영고탑에 모여 삼신 상제께 제사를 지냈으며, 환인, 환웅, 치우로부터 단군임검까지 모셨다.
④ 24대 연나단제 2년(B.C. 1160년)
여러 한(汗 : 제후국의 왕)들은 단제의 지시를 받들어 소도를 증설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나라에 큰일이나 이변 또는 재해가 있을
때마다 소도에서 기도하여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모았다.
⑤ 33대 감물단제 7년(B.C. 813년)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甘勿山) 아래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사당인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지냈다.
⑥ 44대 구물단제 2년(B.C. 424년)
예관이 청해 3월 16일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행했다. 단제가 친히
행차해 삼육대례(三六大禮)로 경배했다.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 : 부여의 영고제도로서 삼신을 섬기는 제천행사이며, 행사를 지낸 후 연일
마시고 먹으며 노래하고 춤추며 북을 쳤다)는 북을 두드리면서 삼신을
맞는 제례이다.
⑦ 47대 고열가단제 14년(B.C. 282년)
단군임검의 묘(廟 : 사당)를 백악산에 세우고, 유사에게 명을 내려 한
해에 네 번씩 여기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단제께서도 1년에 한 번씩 친히 제사를 지냈다.
(3) 체제
단군은 정치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요, 종교적으로는 최고 지도자요, 교육적으로는 신하들과 백성들의 큰 스승이었다. 그러므로 단군은 신정(神政)을 베풀어 선계(仙界)를 지향하였으며, 동시에 지상에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그 목적에 적합한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단군조선의 통치체제는 1단군(檀君), 3한(韓), 5가(加),
64족(族), 3사(1伯, 2師), 6사(事) 체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3한(韓)은 진한(辰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이며, 광대한 땅을 셋으로 나누어 진한은 단군의 직할통치 지역이었고, 나머지 마한,
번한은 비왕들을 두어 간접 통치했다. 22대 색불루단제 이후에 막조선, 진조선, 번조선의 삼조선(三朝鮮)으로 개편되었다.
5가(加)는 우가(牛加), 마가(馬加), 저가( 加), 구가(狗加), 양가(羊加)이며, 64족은 단군조선을 이루고 있는 부족이다.
3사6사(三師六事) 제도는 배달국 이래로 이어져온 중앙행정체제로
3사(師)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말하고, 6사(事)는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형(主刑), 주병(主病), 주선악(主善惡), 주병(主兵)을 말한다.
또한, 제위의 계승과 같은 중대한 국사(國事)에 대한 의결기관으로는
3한(韓) 5가(加)로 구성되는 만장일치의 화백회의(和白會議)가 있었는데, 환국 배달국 이래의 전통이었다(화백회의에 대한 글은 아래의
게시판 글목록을 참고하세요).
최고 통치자인 단군의 제위(帝位)는 대체적으로 단군의 장자(長子)를
통하여 계승되어 왔으며, 장자에게 문제가 있거나 특별히 뛰어난 인물이 있을 때는 화백회의에서 그를 추대하여 단군의 제위를 계승하였다.
(4) 경제 및 산업
단군조선의 경제적 기초는 농업이었으며 그밖에 유목, 사냥, 고기잡이, 채집이 병행되었다. 토지제도는 균전제(均田制)를 채택하였으며,
세율은 매우 낮아 8대 우서한단제 원년(B.C. 1993년)에는 1/20 세법(二十稅一之法)을 채택하였으며, 15대 대음단제 원년(B.C. 1661년)에는 1/80 세제(八十稅一之制)를 채택하였다.
단군조선에는 교환경제가 발달하였으며, 교환의 기준을 위한 도량형
즉 쌀되와 저울 등을 이미 통일하였고, 패전. 패엽전. 자모전. 공방전
등 화폐의 개발이 이루어졌다.
또 이 시대에는 이미 산업이 발달하여 11대 도해단제 때는 공창(工廠)을 건설하여 종이, 베, 선박 등을 생산하였다.
또 농업국가의 기본인 치산치수(治山治水)에 성공하여 단군임검의 장자인 2대 부루단제 3년(B.C. 2238년)에는 치산치수 사업의 지식을 그
무렵에 9년 동안의 홍수로 고생하고 있는 하(夏)나라의 우(禹)에게
팽오로 하여금 치수하는 방법을 전해 주었다. 단군조선은 고도의 정신문화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아주 풍요로웠던 나라였다.
▶ 단군조선 경제발전의 기록
① 2대 부루단제 3년(B.C. 2238년)
쌀되와 저울 등 도량형을 통일하였으며, 베와 모시의 가격이 다른 곳이 없고 백성들이 서로 속이지 않았다.
② 4대 오사구단제 5년(B.C. 2133년)
패전(貝錢)을, 14대 고불단제 42년(B.C. 1680년)에는 자모전(子母錢)을, 19대 구모소단제 10년(B.C. 1426년)에는 패엽전(貝葉錢)을,
37대 마물단제 5년(B.C. 642년)에는 방공전(方孔錢) 등 화폐를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 단군조선의 발명품과 만국박람회
11대 도해단제 56년(B.C. 1836년)에는 송화강 연안에 기계공창을
설치하여 각종 기계를 제조하였고, 새로운 기계발명상을 받은 발명품이 나왔다. 황룡선(黃龍船), 양수기(揚水機), 자행륜거(自行輪車),
경기구(輕氣球), 자발뢰차(自發雷車), 조담경(照膽鏡), 천문경(天文鏡), 자명종(自鳴鐘), 양우계(量雨計), 측풍계(測風計)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물건들이 발명되었다고 한다.
또 도해단제 38년에는 수도인 평양에서 만국박람회를 크게 개최하여, 여러 나라의 진기한 물품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와서 산더미같이 진열되었다.(재미있는 것은 상제님께서 문명을 개벽하는 공사를 평양의 대동강에서 거의 보셨다는 것이다. 위의 이유에 의해 그런 것은 아닐까?).
단군조선은 신선도를 수련하는 도인들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당연히 하늘의 메시지를 받고 우주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선인들이 많았으며, 그로부터 수많은 발명품 등 각종 이기들이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이때 당시만해도 마테오리치 신부님처럼 천상의 선술묘법한
문명을 많이 받아 내렸을 것이다. 이제 원시반본의 시대가 다시 온다. 상제님께서 여신 천,지,인합일의 후천 仙문화로... 바로 이 지상에 말이다.)
또 환국시대의 12환국을 통해서 세계각지로 이동한 9환족(九桓族)들과 수메르국, 아유타국 등 혈연을 같이하고, 문명의 교화를 받아온
수많은 제후국들이 모여 만국박람회를 열었다고 놀랄일은 아니다.
"14대 고불단제 56년(B.C. 1666년)에는 호구(戶口)를 조사하였는데
단군조선의 인구는 총 1억 8천만 명이었다."는 기록도 모든 제후국들을 총 합한 숫자일 것이다. |
(5) 단군조선의 문화
① 가림토 문자
단군조선시대에는 선대인 배달국으로부터 계속 사용해온 진서(眞書),
즉 녹도문자가 있었다. 그러나 텔레파시와 같은 고도의 의사전달 방법을 깨우치지 못했으며, 배움이 부족한 일반 백성들이 녹도문을 사용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또 음문자이며 만물을 형상화한 뜻글자인 녹도문만으로는 완전한 문자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이렇게 해서 제3대 가륵단군 경자2년(기원전 2181년)에 단군조선의 문자인 가림토(加臨多) 문자가 탄생하게 되며, 가림토 문자(38자)를 토대로 더 쉽게 정리하여 4177년 뒤 재창조된 것이 바로 훈민정음(28자)이다.
② 가림토 문자는 훈민정음의 원형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가림토 문자는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원형이다. 그리고 근세조선 시대 세종 때에 이르러 훈민정음(訓民正音) 28자로 재창제 되었으며, 최근에는 주시경 등에 의해 24자로 재정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림토는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일본에도 전해져 신대문자(神代文字)인 아히루(阿比留)문자가 되었다. 또 가림토 문자는 단군조선의 분국이었던 몽고로 건너가 "파스파"란 고대문자가 되었으며, 배달국의
분국이 있었으며 그 후예들이 살고있는 인도로 건너가 산스크리스토
알파벳과 구라자트 문자의 원형이 되었다.
▶ 가림토 문자 창제동기
단군조선 제3대 가륵단군 경자2년(B.C, 2181년)에 가륵 단제께서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다.
"아직 풍속은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진서(眞書)가 있다해도 옆에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多)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다." (환단고기-단군세기편)
▶ 훈민정음 재창제의 증거
①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 언문은
전조선 시대에 있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 (세종실록 103권 ; 세종 23년에 발표한 글)
② 이 달에 상감께서 친히 스물 여덟 자를 지으시니, 그 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한 것이다.(세종실록 25년 ;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첫 발표문)
③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옵서 정음 스물 여덟 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의를 들어서 보이시면서 이름지어 가로되 훈민정음이라
하시니, 상형하되 글자는 옛날의 전자(篆字)를 본따고...(정인지(해례서문) : 현재 고려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음)
④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근본삼은 것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며 곧
자형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했더라도 용음과 합자가 전혀 옛것과 반대되는 까닭에 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바입니다.
(한글 재창제를 반대하는 최만리와 당대 유학자들의 집단 상소문 중에서)
▶ 해외에 남아있는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
그러나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은 환단고기 뿐 아니라 일본, 인도, 몽고 등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나라들에 풍부하게 남아 단군조선 시대와 그 영향력을 지금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 다만, 우리만 가림토 문자의 존재를 공식화하지 않고 있을 따름이다.
▶ 일본의 신대(神代)문자
일본에는 한글을 닮은 고문자가 있다. 대마도의 아히루 가문에서 전해져왔기 때문에 아히루 문자라고 하며 신들의 시대에 신들이 쓰던
문자라 해서 신대문자라고 한다.
일본의 고대 신들이 쓰던 문자가 지금도 남아있는데 그것이 고대한글이라는 실제적 사실과 우리의 조상들이 일본을 건설했고 엄청나게
발전시켰다는 우리측 주장을 연결해 보면 그 일본의 고대 신들은 고도의 문화를 갖고 일본땅에 들어간 환국인들임에 틀림없다. 신대문자는 지금도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대마역사 민속자료관과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신궁 등에 아직 보관되어 있다.
일본 이세신궁에 소장된 신대문자의 기록은 서기 708년의 유물이다.
서기 700년 무렵은 대조영이 고구려 멸망 후 발해를 건국했을 무렵이며, 세종대왕은 1446년에야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단군조선 시대가 신화였고, 가림토 문자도 환단고기에 나왔으니 믿을 수가 없다고 전제한다면, 1446년의 훈민정음에서 708년의 신대문자가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고, 그렇다면 일본의 신대문자에서 훈민정음이 나왔는가?
실제로 일본의 오향청언(吾鄕淸彦 고쿄 기요히코)이란 학자 등도
708년의 신대문자의 유물을 증거로 들면서 "일본의 신대문자가 조선으로 건너가 훈민정음을 낳게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고 그것을 연구환 결과, 자신의 "일본의 아히루 문자가 조선 훈민정음의 뿌리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신대문자의 원형인 원시한글이 환단고기에 수록되어 있다."고 인정했다.
일본의 천황가 자체를 비롯, 일본이 단군조선이래 환국인이 건너가
세운 나라라는 것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일본인들에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것을 인정하기를 기본적으로
꺼릴 뿐 아니라 오히려 기회만 있으면 거꾸로 왜곡하려고 애를 써왔다. 그런데 그런 풍조 속에서 일본의 학자가 그때까지 자신의 주장을
뒤엎고 가림토 문자에서 일본의 아히루 문자가 나왔고 그 뿌리임을
학자적 양심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통 사학계와 국어학계에서는 아직도 "훈민정음이
세종대왕 혼자서 만들었는지 신하들과 함께 만들었는지" 논쟁 중인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수 천년의 세월이 흐른 뒤 가림토의 고향인 우리 나라에서는 단군조선 시대를 신화 속의 시대로 치부하는 후손들이 아직 많은데, 지금의
일본 땅에는 단군조선의 가림토 문자가 신격화되어 신사와 박물관에
보전되어 있고 비석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가림토 문자는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제를 입증해준다. 단군조선이
있었다면 단군할아버지도 실제하셨던 민족의 조상임을 믿을 수 있고, 가림토 문자가 발견되는 곳은 단군조선의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단군조선의 가림토가 일본에 보급되어 아히루 문자가 된
것이다.
▶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인도의 남방 구자라트 주에서 쓰이는 문자는 우리의 한글과 흡사한데 자음은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자가 꼭 같다.(ㄴㄷㅌㅇㅁㅈㅂ
그리고 ㅏㅑㅓㅕㅗㅛㅡㅣ등)
이 지역은 배달국 시대 우리 민족이 인도로 이동해가서 세운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 드라비다족의 후예가 사는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자라트인들이 사용하는 타밀어에 문자뿐 아니라 발음과 뜻이 비슷한 단어들(나-난/너-니/엄마-엄마/아빠-아빠/보다-봐/날-날/오다-와/나라-나르/너 이리와-니 잉게와 등)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편 산스크리스트어 알파벳은 우리가 국민학교 때 배운 한글과 너무나 흡사하고 (찌커거.., 쪄쳐져..., 떠터더..., 뻐퍼버..., 셔허), 우리
한글처럼 "ㄱ"에서 시작해 "g"으로 끝난다.
▶ 영어와의 관계
가림토 문자에는 X O M P H I 등 알파벳의 자모도 여러 개 보인다.
가림토 문자가 4177년 전에 만들어진 반면, 알파벳의 역사는 겨우
3000년을 넘지 못한다.
제후국의 왕 또는 어떤 지역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말인 한(汗)은
하늘을 뜻하는 글자인 환(桓)에서 나온 이름이다. 즉 환(桓)에서 한(韓), 한(漢), 한(汗)이 나온 것이다.
또 한(汗 : HAN)이 몽고로 건너가 칸(KAN : 징기스칸)이 되었으며,
징기스칸의 유럽 정복 때 서구로 건너가 킹(KING)이 되었으며, 그후에 전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하버드대학에서의 연구결과로도 발표된 바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우리말과 우리의 고문자는 환단시대의 영역을 통해 전세계로 전파되면서 각 지역의 독특한 환경과 조건들에 따라 변화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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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문화와 교육
▶ 천문역법
단군조선에도 태음력(太陰曆)과 태양력(太陽曆)에 의한 달력이 있었다. 2대 부루단제 12년(B.C. 2229년)에 신지 귀기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正圖)를 만들어 바쳤다.
5대 구을단제 4년(B.C. 2096년)에는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세수로
세는 육십갑자(六十甲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19대 구모소단제 54년(B.C. 1382년)에는 지리숙이 태양을 중심으로 달과 별이 그 궤도를
한 바퀴 도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태양력인 주천력(周天曆)과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을 저술했다.
▶ 단군조선의 노래
2대 부루단제 때의 어아가(於阿歌), 16대 위나단제 때의 애환가(愛桓歌), 34대 오루문단제 때의 도리가(兜里歌)등이 즐겨 부르던 노래이다.
<어아가(於阿歌)>
신시(神市)이래로 하늘에서 제사지낼 때마다 백성들이 모두 모여 함께
노래부르고 큰 덕을 찬양하며 서로 덕목을 다졌다. "어아"는 사람이 기뻐서 내는 소리라고, 2대 부루단군 제위 기간중의 기록에 나온다.
"어아어아, 우리들 조상님네 크시 은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잊지마세
어아어아, 착한 마음 큰 활이고 나쁜 마음 과녁이라,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니 활줄처럼 똑같으며,
착한 마음 곧은 화살 한맘으로 똑같아라.
어아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 되어 과녁마다 뚫고 지고,
착한 마음 끓는 물은 한덩이 눈과 같은
악한 마음 다 녹이네
어아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라.
굳게 뭉친 같은 마음 배달나라 영광일세,
천년만년 크신 은덕, 한배검이시여, 한배검이시여."
<애환가(愛桓歌)>
16대 위나단군(B.C. 1583년)때 노래이다. 무궁화꽃은 환국시대 이래로 나라꽃이었으며. 환화(桓花) 혹은 천지화(天地花)로 기록되었으며,
꽃이라고 불렀다. 곧 무궁화를 지칭하는 꽃이란 말이 오늘날 "꽃"이란
이름의 기원이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해 만그루 심고 올해 또 만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엔 붉은 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 저술
단군조선 때는 인문, 사회, 자연과학에 관계된 저술이 수없이 많았다.
그 서적들의 이름과 저서는 다음과 같다.
3대 가륵단제 6년(B.C. 2177년) 신지고결의 배달유기(配達留記 : 최초의 역사서)
19대 구모소단제 51년(B.C. 1385년) 목아득의 우주원리론
40세 달음단제 때 윤지복의 도덕경
42대 을우지단제 때 백호돈의 지리학(地理學)과 광물학(鑛物學)
43대 물리단제 때 장자학의 설명학(說明學)
44대 구물단제 때 최화덕의 동물학(動物學)과 식물학(植物學), 서백원의 태양-태음-소양-소음의 사상의학(四象醫學), 황운헌의 백과서(百科書), 류종득의 이재학(理財學), 적우순의 심리학(心理學)
45대 여루단제 때 장소부의 의학대방(醫學大方), 홍문선의 태학조문(太學條文), 조대휴의 자본론(資本論)
47대 고열가단제 때 소정국의 건축학(建築學), 구로선의 종수학(種樹學)
▶ 단군조선시대의 교육
단군과 신하들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들이었으며, 백성들은 단제를 깨달으신 성인으로, 환인 할아버지-환웅할아버지-단군 할아버지로 이어지는 얼의 어버이로 믿고 섬겨왔다. 그러므로 역대 단군으로부터 제자들로써 법(法)을 전수받고 100%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랐기에 단군조선과 같은 방대한 신성제국이 2000년이 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신선도인 신교와 군사부일체의 神聖의 도가 합일된 결과이다. 이것도 다시 원시반본되어 회복된다.)
이렇듯 온 나라의 백성들 남녀노소 모두 신선도를 수련하여 몸과 마음을 닦았으며, 단군조선이란 나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학교이자 수련장이었다(후천선문명의 학교 교육이 이러할 것이다. 또한 후천의 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동리동리, 가가호호가 곧 학교요 도장이다).
▶ 단군조선 교육의 특성
단군조선시대에 이루어진 교육의 특성은 신선도를 전국민이 닦음으로써, 신성을 깨닫고 하늘과 통하는 종교교육과 지덕체를 연마하는 사회교육이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데 있다.
그래서 제천행사를 주관하는 성소(聖所)인 소도(蘇塗)옆에는 교육기관인 경당이 함께 설치되어 청년들을 교육시켰다(우리의 도장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상제님께서도 '조화도장'을 여신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 교육제도
나라의 인제를 양성하는 제도로 국자랑(또는 천지화랑)이 있었으며,
화랑의 총사령관이 국선(國仙)이었다. 제천기간 동안에는 화랑들이 하늘에 제를 지내는 소도의 행사를 주관하였으며, 평소에는 소도가 화랑들의 회의장소로 쓰여졌다.
이렇듯 단군조선시대 교육의 역할을 담당했던 기관으로는 소도, 국자랑, 경당 등이 있었으며, 14대 고불단제 때(B.C. 1670년)는 국립대학이 설치되었다.
▶ 소도(蘇塗)
소도에서 지내는 제천(祭天)행사와 의식은 곧 고구려를 교화하는 근원이 되었다. 그로부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힘을 합하고 이웃을 위하여 있는 이와 없는 이가 서로 도와 문명한 나라를 이루고, 개화 평등하여 온 세상에 제사의 예를 숭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소도가 세우지면 그 안에서는 계를 지켜야하는데 바로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오상(五常)이며 천지화랑들의 계명이기도 했다.
소도의 곁에는 반드시 교육기관인 경당이 세워진다.
▶ 천지화랑(국자랑 : 國子郞)
13대 흘달단제 20년(B.C. 1763년)부터 시행된 신라 화랑제도의 기원으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던 미혼의 자제들을 말한다. 국자랑이 출행할 때에는 머리에 천지화(天地花 : 무궁화)를 꽂았기 때문에 천지화랑이라고도 했으며, 화랑들의 총사령관을 국선(國仙)이라 했다. 천지화랑은 후대 고구려의 조의선인이나 신라의 화랑도로 이어졌다.
여자낭도를 원화(源花)라 했고, 남자를 화랑(花郞)이라 했으며,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를 하사받은 이를 천왕랑(天王郞)이라고 했다. 이들은 신선도의 오상(五常)을 지켰는데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오상(五常)으로 신라 때 원광법사가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진 세속오계의 원형이다. 소도는 화랑도가 모여서 회의를
하는 곳으로도 쓰여졌다.
▶ 경당
단군임검 제위시절 2대 부루단군이 아직 태자였을 때 태자의 명으로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고 삼신을 태산에서 제사지냈다. 결혼하지
않는 사내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사물을 익히고 연마하게 하였다. 대체로 글을 읽고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예절을 익히고, 노래를 배우며
격투기, 검술 등의 여섯 가지의 기예를 익히며 심신을 수련했다.
11대 도해단군 시절에도 경당을 설치하여 칠회제신의 의식을 정하고,
삼륜구서의 가르침을 강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하여 환도(桓道)문명의 번성이 먼 나라까지 들려, 하나라 13대왕 근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고 한다. 경당은 고구려 때까지도 평민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교육기관으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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