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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0 16
사라진다, 사라지지 않는다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엊그제 들고 다니는 가방을 정리하다 보니 대체 어디서 들어왔는지 모를 전도지가 한 장 나왔다. 보수적인 교단에 소속된 어느 교회의 전도지였는데 제목이 자극적이었다. “당신은 언제 죽을지 알고 삽니까?” 내용은 우리가 짐작하는 대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데, 죽으면 끝이 아니라 내세가 있고,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자에게는 영원하고도 끔찍한 지옥의 심판이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천국의 영생복락이 기다리니 지금 당장 다른 교회는 말고 우리 교회로 연락하라는 것이다. 참 빈곤한 복음이 길고 긴 세월 지겹게도 이어지고 있다. 물론 다른 점이 있다. 2, 30년 전만 해도 이런 전도지는 지금 당장 가까운 교회로 나가라고 권면했지만, 지금은 아무 교회나 나가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들끼리도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 전도지는 죽음의 공포를 매개로 목적한 바를 실현하려 하고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들 스스로 죽음의 공포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의 본령에 대한 공포. 우리에게 공포를 일으키는 죽음의 근원적인 특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나의 현존이 한순간에 삭제되어 내가 존재했던 자리가 무의 공간 또는 검은 공백, 텅 빈 구멍으로 화할 것이라는 상상이다. 게다가 그 구멍조차 하나의 흔적으로도 남지 못하고 다른 누군가가 그 빈 차리를 채워 내 존재의 흔적조차 영원히 지워버릴 것이라는 생각이다. 즉 내 존재가 누군가에 의해 대체된다는 두려움 말이다. 앞에 말한 전도지는 자신들의 교회 공동체가 다른 교회 공동체에 의해 대체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감추면서 드러내고 있다. 요즘 교회는 자신의 사라짐과 공백에 대한 공포로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허무의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은 죽음 이후의 삶, 곧 내세에 관해서는 좀 무심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자신의 빈자리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죽음 이후의 존재를 걱정하지 않을 것이고, 내세의 삶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부재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유는 다차원적이어서 이 차원이 다른 공포가 한 공간에서 얽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는 자신의 부재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사후의 현존 방식 때문에 전전긍긍할 것이다. 이 경우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따블로 하는 것이니 여기에는 오히려 은밀한 쾌락, 걱정과 공포가 가져다주는 독특한 쾌락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하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살아있는 자의 권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한편으로 생명이 그 자체를 즐기는 은밀한 방식, 이면의 권리선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전도지를 작성한 교회의 쾌락은 자신들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닐까? 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죽음은 살아있는 자의 경험 외부에 있는 것이어서 표상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인간들이 그것에 공포를 느낀다는 사실은 죽음이 단지 삶의 외부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해준다. 죽음은 분명 생 안에서 체험되는 것이다. 죽음의 경험을 매개하는 삶의 체험은 어떤 것일까? 인간에게 죽음에 해당하는 경험, 죽음을 끔찍한 공포로 체험하게 하는 경험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타인의 죽음일까? 우연히 목격하게 되는 사망 사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재난이나 전쟁 기사들.... 또 삶의 경험에서 겪게 되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죽음 혹은 형제자매나 친구 심지어 연인의 죽음까지.... 하지만 그런 것들은 어쨌든 타인의 겪는 죽음이고 나는 그들의 죽음을 단지 상상하거나 추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타인의 경험, 특히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충격적인 것은 사랑의 대상을 상실하는 고통스러운 체험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런 죽음이 나의 죽음 경험을 다시 불러내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죽음이 공포로 체험되는 이유의 근원이 아닐까?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죽어본 경험이 있다는 것, 죽음이라는 거의 절대적인 외상(trauma)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외상을 겪게 되는 것일까? 정신분석 페미니즘 학자 줄리엣 미첼은 형제나 자매가 태어났을 때라고 본다. 그녀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는 남근의 부재, 즉 거세를 둘러싼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과 증오의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거기에는 자기 자신의 부재를 둘러싼 형제들 사이의 사랑과 증오도 깔려있다는 것이다. 다만 부모와 자식이라는 세대 간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가족을 사회의 근본 단위로 보는 경향에서 주목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녀에 따르면 자식들 사이의 문제, 즉 동기간의 문제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일 뿐만 아니라 가족 해체 시대에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의 심층 심리적 구조를 예측할 수 있는 근거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삼부작 중 동기 간의 증오와 사랑을 그리는 <안티고네>가 <오이디푸스 왕>보다 먼저 집필되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게다가 그리스 비극이라는 장르가 그리스 정치의 민주주의의 도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민주주의 정치란 여기에 참여하는 주체들을 형제자매 즉 동기들로 간주하는 정치체제가 아닌가?
줄리엣 미첼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삼부작 중 <안티고네>야말로 그 서사의 중심에 죽음에 대한 관심이 있는데 그 이유는 <안티고네>가 형제들 사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아버지가 포기한 왕위를 두고 싸움을 벌인다. 오이디푸스의 자식들은 사실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오이디푸스의 형제자매이기도 하다. 이 싸움에서 형제는 서로를 죽인다. 왕위를 관리하던 삼촌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의 죽음은 애도를 허용하지만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은 매장하지 못하게 한다. 안티고네는 오빠의 시신을 묻어주기 위해 왕이자 삼촌인 크레온에게 도전하며 결국 죽음에 이르는 형벌을 받는다.
<안티고네>가 동기간에 관한 이야기로 그 중심에 죽음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주장은 동기가 결국 자신이 점유했던 위치를 빼앗는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먼저 태어난 동기는 내 자리를 앞서 점유하고 있는 자이며 나중에 태어난 동기는 내 자리를 빼앗는 존재다. 그들은 서로 대체함으로써 상대방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자이다. 이런 존재의 소멸에 대한 가장 즉각적인 정서는 분노와 증오다.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이 먼저고 공포는 그 다음이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의 싸움은 바로 이 증오가 폭발하는 것이며 결국 둘 다의 소멸로 끝난다. 그러나 동기 간에 증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기 간의 우애 또한 증오 못지않다. 이 동기 간의 사랑은 자기애로 설명된다. 즉 동기는 자기와 같은 자로서 자기를 대체하는 자이다. 그/녀는 나와 같은 자이이기 때문에 내 자리를 대체할 수 있고 나를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 형제자매 사이의 사랑은 거울에 보이는 자기에 경탄하고 사랑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흥미로운 분석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준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노동력으로서, 계량이 가능하며 상호 대체가 가능한 대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주의의 구조적 부분인 산업예비군은 현재 고용되어 노동력을 판매하는 인간을 상시적인 불안에 시달리게 만든다. 나의 노동상품을 대체할 타인의 노동력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위협하는 존재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팔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경쟁이 격화될수록, 그리고 점점 더 자동화 기술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할수록 죽음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며 이는 타인에 대한 분노와 폭력으로 폭발한다. 게다가 생존의 공포에 시달리는 인간보다 다루기 쉬운 존재는 거의 없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자본의 축적방식이 고도화되면 될수록 타인에 대한 분노와 살해 충동은 상승하며 또 그럴수록 우리는 통제하기 쉬운 존재가 된다. 우리는 민주주의적 능력을 상실한다.
우리는 형제자매는 물론 한 자녀 낳기도 힘들어하는 인구절벽의 시대를 살아간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활개 치는 선진국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죽음의 외상을 남기는 동기 간의 문제는 이제 해소되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동기 간의 문제는 단지 형제자매들 사이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또래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고 나아가 인간을 대체가 가능한 존재로 취급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집권 5개월 동안 다른 시급한 문제는 제쳐놓고 오로지 정적 제거에 몰두하는 윤석렬 정권은 결국 죽음 혹은 대체의 트라우마가 근저에서 작동하는 증오와 분노의 파국적인 실상을 보여주지 않는가? 적을 소환하고 적에 대한 분노를 통해 정권의 안정, 즉 정권의 대체 불가능성을 확보하려는 모습은 이 세계에 확산된 증오의 단면이다.
타자에 대한 공포와 증오를 권력의 근원적인 동력으로 활용하는 네오파시즘 체제, 혹은 극우 포퓰리즘은 전 세계적으로 발호하고 있다. 트럼프 정권은 아주 노골적이었으며, 바이든 정부 역시 민주주의를 내세우지만 결국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위협하는 중국 등 타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정책의 근간이다. 유럽은 프랑스의 르펜과 같이 대량으로 유입하는 난민에 대한 혐오 선동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으며, 브라질의 소우보나르와 터키의 에르도얀, 필리핀의 전 대통령 두테르데는 집권에 성공한 대표적인 예이다. 이처럼 증오 선동이 정치적 힘을 얻어가는 사태의 근간에 자기의 사라짐을 두려워하는 주체의 공포가 있다는 정신분석의 통찰은 귀담아 둘 필요가 있다.
기독교 신앙은 이 같은 자기 소멸의 공포에서 비롯하는 증오와 폭력에 정면으로 맞선다. 우리 신앙에서는 죽으면 끝, 곧 공백과 허무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결코 사라질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 훨씬 더 두려운 사실이다. 우리는 결코 함부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는 언제나 주체와 관계 속에 있으며 이 관계 속에서 되돌릴 수 없는 변화 과정에 있다.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무책임하게 살아간 사람이 만든 세계의 고통은 남은 자들이 짊어질 수밖에 없다. 그가 남긴 어둠은 영원히 이 세계에 그늘을 드리울 것이다. 반면 죽음이 삶을 삭제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삶의 의미라는 것이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는 게 아니라는 자각을 가지고 책임 있는 삶을 산다면, 그는 자신의 삶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확장하고 실현할 뿐만 아니라 타자의 삶에도 그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가 창조한 세계 또한 영원히 미래를 규정할 것이다. 그렇다. 나의 삶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세계의 변화에 영원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질 수가 없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밀알이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잠재성을 땅이라는 세계와 대면하며 실현하려는 모험이자 투쟁이다. 밀알은 이 투쟁 속에서 무한히 자신을 확장하며 변모한다. 이 투쟁 속에서 변화하는 밀알은 더 이상 땅에 떨어질 때의 그 밀알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죽음을 감행하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말씀은 죽음을 회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과제로서 제시한다. 죽음을 적극적인 실천으로 제시하는 정신의 근간에는 우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아니 오히려 사라질 수 없다는 믿음이 깔려있다.
그렇다면 타자에 대한 증오와 혐오 그리고 폭력이 힘을 얻어가는 이 암울한 시대에, 인간의 대체 가능성이 아니라 고유성과 단독성에 주목하는 삶을 향한 투쟁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의 길일 것이다. 이 길은 우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 속에서 죽음을 두려운 것 회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감행해야 할 것으로 선택할 때 우리 시야에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첫댓글 말씀을 정리하면서 내용이 많이 달라졌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