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체망원경을 난생 처음 접했을 때가 생각난다. 오래 전이었다. 추운 겨울 밤, 거의 두 시간을 오돌오돌 떨면서도 학과 건물 옥상에서 내려올 생각을 못했었다. 단지 입을 헤 벌린 채 넋을 잃고 바라보던 천체망원경에는 엄지 손톱만한 크기의 노란 토성이 둥 떠있었다. 마치 훌라후프인 양 허리춤에는 노란 색의 띠도 걸쳐 있었다. 연속되는 감탄 외에는 뭐라 형언할 수 없던 그 광경은 어느 누구도 이를 수 없는 한 편의 시詩였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생생한 수필 자체였다. 오늘, 비록 천체는 아니지만, 그런 삶을 다시 마주할 기회가 왔다. 그 삶의 주인공은 영장류 학자인 제인 구달(Jane Goodall). 산업혁명의 본산인 영국에서 태어난 그녀의 특이한 이력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우여곡절 16세 나이에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서 야생 침팬지들과의 생활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50년의 세월을 그곳에서 보낸 여류학자이다. 누렁소가 그녀에 대해 처음 접했던 것은 월간지인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에서였다.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총천연색의 동물 사진에 친근한 노란 색의 테두리를 두른 월간지가 눈에 익으리라.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 보급되는 월간지이고, 유명 사진작가라면 자신이 찍은 사진 한 장을 그 월간지에 싣는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여길 정도이다. 사실 그녀를 유명인사라기보다는 단 하나뿐인 의지와 소신을 평생 지키며 살아온 양심이라고 하는 편이 빠를 것이다. 그러던 그녀가 우리나라에서 강연을 한다고 해서 시간을 쪼개 참석했다. 솔직히 그녀의 강연 포스터를 딱 보는 순간 이유 모를 두근거림이 시작되었다. 막상 강연장에서 마주한 그녀. 자연 속의 삶이란 워낙 그런 것인지, 제대로 꾸미지 않고 보낸 오지에서의 세월도 그녀의 얼굴만은 비껴간 듯 여전히 젊은 시절의 순진무구함이 배여 있었다. 어릴 적 한 때는 TV에서 방영되던 타잔과 사랑에 빠졌는데 나중에 제인이라는 자신과 똑같은 이름의 여자가 나와서 타잔과 결혼을 하는 통에 절망했었다는 넉살에서도, 침팬지의 언어로 건네는 거침없는 첫 인사말에서도 그 순수함이 묻어났다. 젊은 그녀가 침팬지와 뽀뽀하는 사진에서는 침팬지의 입이 무척 크다는 것을 새삼 느끼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동물을 비롯한 자연에 애정이 깊었던 그녀가 부유했던 것은 아니다. 그녀가 10대에 겪었을 영국의 사회적 분위기를 아는지라 그녀가 상류층 가정의 고명딸 정도는 될 줄로 짐작했었다. 그러나 정반대였다. 그녀는 가난해서 대학에 가질 못했다. 그러나 꿈에 그리던 아프리카에 가기 위해 모진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런던에서 하던 일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결국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식당에서 음식을 나르며 돈을 모았다고 했다. 우연찮게 아프리카 생활에서 유명한 학자를 만나게 되고, 그의 권유로 캠브리지 대학교(Cambridge University)에서 박사 과정을 밟게 된다. 하지만 곧 걷잡을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학사 학위가 없던 탓도, 여성이라는 탓도 아니었다. 당시의 그곳 교수들이 원숭이들이 감정과 감상뿐 아니라, 조직 생활을 하며 판단하기 위해 이성적 사고를 한다는 점을 철저히 부정하며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무지한 용기가 무엇인지 확연해진 대목이었다.
그녀는 강연에서 침팬지와 인간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역설했다. 침팬지와 인류는 면역체계와 뇌의 구조가 같을 뿐 아니라, DNA의 99%가 동일하고, 혈액형도 같아서 심지어는 침팬지와 인류 사이에 서로 수혈까지 가능하단다. 그런데 가장 큰 유사성은 사회적인 유대 관계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좋은 엄마 나쁜 엄마가 있듯 침팬지에게도 좋은 엄마 나쁜 엄마가 있으며, 다른 구성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결정을 최고 연장자가 한단다. 특히 형제간의 우애가 대단해서 인류와 다름을 느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침팬지들은 개체 수를 조절한다는 점이 다르다고 했다. 인류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하는 따위의 현상이 침팬지 사회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보다 더 큰 차이점은 자신이 판 함정에 스스로 빠지는 어리석음을 보이지 않는 것이라 했다. 인류는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스스로의 생존을 위협하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리라.
한번은, 모처럼 평생을 보냈던 탄자니아의 국립공원에 가 보았더니, 그녀가 돌보던 침팬지들의 서식지 주변이 온통 파괴 되어 있었다고 했다. 부락민들이 밭을 일구기 위해 마구잡이로 벌목한 탓이었다. 부락민들과 대화를 나눈 끝에 그들이 필요한 것이 음식과 자녀 교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런 그들에게 그녀는 오히려 복지라는 혜택을 안겼다고 했다. 무담보로 그들에게 융자를 해준 것이었다. 그런데 남자들에게 융자를 해주면 대부분이 술을 마셔 없앴지만, 여자들은 꼬박 융자를 갚았다고 했다. 그럭저럭 먹고 살게 된 부락의 여자들이 어느 날 몰려와서 그랬다고 했다. 이제는 우리가 당신을 도울 차례라고. 강압과 강제가 없는 화해 이후 숲이 나날이 울창해졌음은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1시간 반의 짧은 강연 끝에 그녀 스스로 이렇게 실토했다, 희망이 보인다고. 전 세계의 새로운 세대는 지난 긴 세월 동안 벌어져 왔고, 지금 현재에도 벌어지고 있는 자연의 황폐화를 인식하고 있다고. 그러면서 그런 말을 이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자연과 자원은 현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라고. 앞으로 태어날 자자손손이 다 함께 공유해야 할 삶의 근간이라고. 그녀의 경력이라면 거들먹거리며 책상 앞에 앉아 점잔을 빼거나 하다못해 정치 감투 하나 꿰차고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도 있으련만, 현재 그녀는 UN의 환경 대사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노구를 이끌고 1년에 300일 이상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에는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다음 세대에 거는 희망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 아닐까. 환경 운동은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된다고 되뇌었다. 그녀가 그토록 강조했던 인종 불문, 문화 불문, 종교 불문의 속뜻은 바로 희망이라는 새싹의 뿌리가 아니었을까.
인간이 품성을 지닌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
합리적 사고와 문제 해결을 할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
기쁨과 슬픔과 절망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육체적으로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고통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덜 오만해질 수 있다.
– 제인 구달의 희망의 이유 中 -
그녀의 삶 자체가 황토 빛 자연 그대로였다는 생각이 든다. 수백의 청중만 아니었다면 다가가 악수를 청하며 손이라도 덥석 잡고 싶었을 정도로 강연 내내 구달 박사가 풀어놓은 희망이 함께 했다. 그러나 막상 강연장을 나서는 누렁소의 걸음은 4대강 살리기(?)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마구 파헤쳐지고 있는 우리 산하의 젖줄로 인해 참담해졌다. 이런저런 여러 국내 상황이 예견이라도 했던 것인지, 그녀가 연단에 딱 들어서는 순간 울컥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음을 시인하고픈 마음을 어디에 하소연해야 할지.
장인이 없는 사회는 현재가 불행하지만, 장인이 존경 받지 못하는 사회는 미래가 안 보이는 불행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 은퇴 없는 그녀의 열정으로 늙은이들은 뒷방 차지라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통념을 깨어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그래서 세월이 빗어 놓은 그들의 연륜과 경륜을 바라는 사회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참으로 다양한 생각을 곰곰이 떠올렸던 강연이었다.
그렇다고 그녀만이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또한 그녀의 바람이기도 하리라. 그녀 못지않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곳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땅에서 고사리를 캐는 아낙들과 배에서 어구를 챙기는 아낙들이 그녀의 모습이고, 여느 길가에서 휴지 한 장을 줍는 이 땅의 어머니들이 그녀의 얼굴이 아닐까. 풀벌레 소리를 연민하는 9월의 마지막 밤에 그녀들의 소망이 부디 빛을 발하기를 기원해 본다.
(김유영 님의 수필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