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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코끼리의 슬픈 연가- 신중선|소설가
폭염이 가라앉은 지난 8월말, 아이를 데리고 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을 찾았다. 동물 공연장에서 물개 침팬지 앵무새의 쇼를 관람했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프로그램 덕분에 동물 공연은 만족스러웠다. 즐거워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동물원으로 향했다. 그동안 몇 차례 어린이대공원을 찾은 적이 있지만 동물원을 제대로 본 기억은 없었다. 아이에게 코끼리 호랑이 등의 야생동물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이보다 나의 발걸음이 더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사자 표범 호랑이 불곰 반달가슴곰 타조….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이 정도면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곤 바로 옆의 코끼리 우리로 발길을 옮겼다. 순간, 나는 코끼리 우리 안을 보고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숨이 탁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우리 안의 바닥이 모두 시멘트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철책 바로 뒤는 해자 형식으로 10m 깊이의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 안쪽 10여평 남짓한 공간은 온통 콘크리트로 깔려 있었다. 흙 한 덩이, 풀 한 포기도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콘크리트로 깔아야 하는, 내가 모르는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도, 그건 코끼리에 대한 인간의 폭력일 뿐이었다. 장비목 코끼리과에 속한다는 그 아시아 코끼리에게 어린이대공원은 얼마나 잔인한 곳이란 말인가. 풍성하지는 못하더라도 코끼리 우리에 최소한의 흙과 풀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가슴이 너무나 아려왔다. 그 끔찍한 풍경 앞에서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코끼리를 쳐다볼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서둘러 아이의 손을 잡고 코끼리 우리 앞을 떠났다. 그 후 나는 바쁜 일상을 핑계로 그 코끼리를 잊고 지냈다. 그러던 중, 최근 우연히 알게 된 한 권의 책을 통해 그 코끼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동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 저버린 일 미국의 역사학자 니겔 로스페스가 지은 『동물원의 탄생』. 현대 동물원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그러나 단순한 역사의 나열이 아니다. 저자의 시선은 비판적이다. 동물원의 기원과 변천 속에 인간의 폭력이 어떻게 개입되어왔는지를 예리하게 들여다 보았다. 이 책엔 현대 동물원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의 칼 하겐베크(1844∼1913)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희귀한 동물들을 포획하는데 열을 올렸다. 동물에 그치지 않고 그린란드와 태평양군도의 원주민들까지 붙잡아 전시한 사람이다. 하겐베크는 함부르크 근처의 슈텔링겐에 자신의 이름을 따 하겐베크 동물원을 열었다. 기존의 철책 동물원과 달리 해자를 만들어 여러 동물이 공존하는 파노라마식의 야외 동물원을 만든 것이다. 이전까지의 동물원과는 다른 개념이었고, 그 덕분에 최초의 현대 동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또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원으로 꼽히기도 한다. 하겐베크 동물원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그저 인간의 시각일 뿐이다. 저자는 동물원을 만드는 인간의 행위 자체에 폭력이 숨어 있음을 발견한다. 어떤 이유와 명분으로도 동물에게 동물원은 폭력의 공간일 따름이다. 이 책을 읽으며 어린이대공원의 그 코끼리가 더욱 생각난 것은 코끼리 포획에 관한 대목에서다. 맹수를 포획하는 경우, 예외 없이 어미를 먼저 죽인 다음 새끼들을 잡아 들인다. 포획 과정에서 어미 코끼리의 죽음을 목격한 아기 코끼리들이 공포와 충격, 슬픔 속에서 자살하듯 죽어간다고 한다. 슈텔링겐 하겐베크 동물원으로 데려온 바다코끼리 새끼 5마리를 잡기 위해 86마리의 코끼리를 죽였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어린이대공원의 그 코끼리도 그렇게 해서 서울까지 오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 코끼리에게 그토록 삭막한 콘크리트 공간이라니…. 그건 동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 저버린 일. 그리고 서울의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 ‘혹성 탈출’
오래 전에 나온 <혹성 탈출>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미래에 인류와 유인원의 처지가 뒤바뀌어 원숭이들이 인간을 노예로 삼아 부린다는 설정에 근거한 영화였다. 중학생 땐가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는 점에 대해 무척이나 안도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부터 나에게 항상 그 영화 제목을 기억나게 하는 곳이 생겼다. 다름 아닌 철창 속에 갇힌 동물원의 원숭이들이다.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원숭이가 아닌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다시 한번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철창 안과 바깥세상의 차이는 참으로 엄청나지 않은가. 아무도 철창 안 구경거리 원숭이의 신세가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원숭이 우리 앞에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무도 철창 안 구경거리 신세가 되고 싶지 않다면 우리가 동물들을 가두어 놓고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 입장을 바꾸어 원숭이가 만일 생각할 수 있다면 그들도 그 안의 구경거리 신세를 즐기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일을 강제로 시키는 것을 폭력이라 한다. 우리는 동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인가. 어떤 이들은 동물원의 동물들은 자신이 갇혀서 구경거리가 되어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므로 폭력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동물원 동물들은 행동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똑같은 동작을 반복적으로 계속하는 정형행동을 보인다. 정형행동은 사람도 정신이상 상태에서 보이는 이상행동이다. 사람뿐 아니라 동물도 자유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들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강제로 철창 안에 가두어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폭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은 정당화 될 수 있는가? 동물들이 오로지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한 흥밋거리로서만 취급받는 동물원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는 인식이 국제사회에는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 많은 국제 수준의 동물원들이 이러한 인식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 동물원들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동물들을 멸종이라는 위협으로부터 보전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이들을 일시적으로 동물원에서 보호하며 번식을 시키자는 것이다. 이 지구에는 인간의 욕심으로 인하여 수많은 동물 종들이 이미 멸종되었고 또 멸종되어 가고 있다. 우리가 동물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불상이나 몽골야생말 같은 동물들은 이미 야생에서는 멸종하였으나 동물원에서 보호, 번식시켰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이제 동물원에서 번식된 개체들을 그들이 본래 살았던 야생으로 복귀시키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동물원수족관협회(WAZA)는 동물원의 유일한 존재이유가 바로 동물들의 보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1993년 세계의 동물원들이 따라야 할 보전활동의 지침인 세계동물원보전전략(World Zoo Conservation Strategy)을 작성, 발표하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동물원인 서울대공원도 이 협회에 가입하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공원이 이 지침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최근 서울대공원은 에버랜드 식의 상업성을 더욱 강조하는 경향이다. 이제 서울대공원 자리에 세계적 명성을 가진 위락공원 디즈니랜드가 들어선다고 한다. 이를 위하여 서울시는 서울대공원 동물원의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들었다. 서울대공원 동물원이 옮기든 그 자리에 계속 있든, 과천에 자리 잡은 지 이제 20년이 되는 서울대공원은 한국사회에서 그 존재가치를 심각하게 다시 검토할 때가 되었다. 사람들에게 단순히 즐거움을 주기 위한 동물원으로 계속 남을 것인가, 아니면 세계적 조류에 동참하여 멸종위기 야생동물을 위한 보전센터로서 거듭날 것인가. 서울대공원의 운영자인 서울시가 예산 상의 이유로 서울대공원을 보전기관으로 변신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서울시는 서울대공원 동물원의 운영을 국립으로 전환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동물을 사람의 호기심의 대상으로만 대접하는 동물원은 21세기에는 그 존재가치가 없다는 것이 세계적 조류이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839.html
아래의 홈피를 가보세요. http://www.kaap.or.kr/ 정상적 행동을 표현할 자유 동물원의 관리실태 1. 관리 및 운영실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물원을 막연히 나들이 공간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동물원은 야생동물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여 마음의 정화와 휴양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을 하며, 동물의 생태, 습성, 자연환경의 소중함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교육의 장이기도 하고, 동물들의 생태연구와 관련된 학문들의 발전의 장으로서 기능한다. 또한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동물을 번식시키고 이를 자연환경에 방사하여 생태계를 보전하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동물원은 인간과 자연이 만날 수 있는 직접적인 통로인 셈이다. 따라서 동물원의 시설 및 관리는 이런 기능들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동물원 시설은 동물들의 자연적 습성과 생태적 환경이 무시된 채, 주로 관리의 편리만을 쫓고 있다. 예를 들어, 창공을 마음껏 휘젓고 다녀도 부족할 조류들은 보기에도 답답한 낮은 천장을 가진 사방이 촘촘히 막힌 우리 속에 갇혀서 마치 박제처럼 그저 나뭇가지들에 앉아 있으며, 깊은 산 속을 거침없이 누비고 다녀야 할 맹수들이나, 넓은 들판을 질주하며 살아가는 초원지대 동물들이 모두 좁은 공간에서 무기력하게 어슬렁거리고 있다. 더구나 이들이 살고 있는 수용시설은 대부분이 풀 한포기 구경하기 힘든 시멘트 구조물들인데, 시멘트의 독성과 그 척박함 속에서 수용된 동물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해나갈 수 없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또 세계 각국의 다양한 기후권에서 살던 동물들이 무차별적으로 한 기후대에서 살도록 강요되고 있는 것도 문제다. 해마다 여름이면 북극곰이 커다란 얼음덩이를 껴안고 물 속에서 첨벙거리는 모습이 TV를 통해 방영되곤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북극곰의 고통을 절실히 느낀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협소한 비생태적 공간과 부적절한 기후 때문에 동물원의 동물들은 늘 크고 작은 부상과 질병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데, 이들의 자연치유력은 부적절한 환경으로 인해 크게 약화된 상태인데다가, 이들에게 적시에 적절한 치료를 해줄 수 있는 전문 인력 또한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지방의 동물원 중에는 아예 수의사가 한 명도 없는 곳도 있다. 이런 시설에서의 동물들의 생활은 말 그대로 폭력적인 감금상태라고 할 지경이며, 이로 인해 질병, 사고, 이상행동 유발이 빈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동물들의 생활 환경을 조금이라도 주의깊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동물원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물들의 그런 환경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며, 이것은 동물들에 대한 몰이해와 차별화를 부추기는 한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런 비생태적 환경, 수용시설들 간의 배치 및 간격의 비생태성, 관리미비로 인한 수질오염과 불결한 환경은 동물원 운영이 동물원을 레저공간화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관점은 동물원을 단순히 동물들의 전시장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으며,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로 하여금 동물들을 하루 동안의 색다른 눈요기감 정도로만 생각하게 만든다. 동물들에 대한 이런 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동물원을 단순히 하루 동안의 색다른 경험의 공간 정도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한다. 이런 인식하에서는 자연과의 직접적인 소통의 장으로서의 동물원이 갖는 중요성은 전혀 부각되지 못하며, 동물원에 대한 이런 몰가치적인 가벼운 인식은 동물원의 적자 운영의 한 원인이 된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입장료를 인상할 수도 정부의 보조를 이끌어낼 수도 없다. 실제로 전국의 동물원들은 유명한 놀이공원들보다도 훨씬 싼 입장료를 받는 곳이 대부분이다. 살아있는 생명이 놀이기구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적자를 메꾸기 위한 방안으로 동물원들은 동물쇼(돌고래쇼, 침팬지 쇼, 새끼동물 개방 등)를 프로그램에 넣거나 오락시설을 증설하고 있는데, 이는 오히려 동물원의 기능에 역행하는 것으로 동물들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강화시킬 뿐이다. 동물원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이런 동물공연을 통해서 동물과 좀더 가까워지는 계기를 마련하며, 동물들에 대해서 보다 잘 이해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공연은 동물들을 인간의 한때의 즐거움을 위한 놀이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에 불과하며, 오히려 인간이 동물, 자연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하는 것이다. 특히 이런 공연이 주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다. 2. 관람 동물원 동물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은 적절하고 충분한 관리의 부족에서 기인할 뿐만 아니라, 관람객들의 동물원과 동물들에 대한 몰이해에서도 기인한다. 우리나라의 동물원은 단순한 휴식과 레저를 공간이라는 인식이 가장 지배적이어서 동물원을 찾는 사람들이 실제로 동물을 보기 위해서나 자연체험의 기회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동물들은 단지 놀이동산의 놀이 기구 정도로밖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동물들의 종을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먹을 것을 던져주는 것은 동물들의 건강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거주 공간의 위생상태를 엉망으로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동물원의 부대시설들도 동물원의 일부로서 동물들의 거주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고 관람자의 편리와 학습을 도울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 동물원의 식당이나 매점 등의 편의시설들은 그런 점에서 미흡하다.
1. 생태동물원 동물원의 부실한 운영은 동물원에 대한 인식과 관련이 있다. 현재처럼 단순히 레저의 공간으로서만 인식한다면, 앞으로도 동물원은 더 아나질 것이 없다. 따라서 동물원의 앞으로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은 동물원의 다양한 기능 중 어디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에 의해서 결정된다. 동물원의 향방에 대해서 주로 거론되는 것이 ‘생태동물원'이다. 그러나 사실, 가장 이상적인 동물원은 동물원을 없애는 것이다. 동물원은 동물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서식지와 생태적 환경, 습성 등을 강제로 박탈당한 현장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동물원도 비자연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멸종동물 보존과 학문적 연구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역시 동물원은 적절치 않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동물보호는 서식지에서의 보호와 연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선책으로 어쩔 수 없이 동물원을 택할 수밖에 없다면 역시 ‘생태동물원'이 현재로서는 가장 적절한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생태동물원은 동물에 대한 연구와 멸종 동물 보존과 동물과 인간이 어우러지는 삶에 대한 교육의 장으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조성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서식지와 유사한 환경이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자연조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개체수의 보장 같은 특정 동물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만약 그런 환경을 보장해줄 수 없을 때는 그 동물을 수용해서는 안된다. 2. 충분한 전문인력의 확보 생태동물원이 연구와 교육의 장이 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관리를 위한 충분한 인력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현재의 동물원들은 동물들의 종과 개체수에 비해서 그들을 관리할 전문 인력이 너무 부족하다. 어느 동물원에서는 자원봉사자들로 필요한 인력을 대체하고 있기도한데, 자원봉사자들이 적절하게 제 역할을 해내게 하기 위해서도 충분한 전문 인력이 우선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3. 정부의 적극적 관리 동물원에 대한 정부 규제 역시 필요하다. 이는 적절한 시설과 관리부분에 대한 지속적인 감독을 하기 위해서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무책임한 동물원의 난립을 막고, 관람객들 역시 동물들에 대한 한 차원 높은 인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동물원이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니라, 진지한 공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기회. 영국의 동물보호단체인 CAPS(Captive Animals' Protection Society)는 동물원의 멸종동물이나 야생동물들에 대한 보호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CAPS에 의하면, 영국의 동물원들이 인위적인 번식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한 잉여동물(동물원이 수용할 수 없는 동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런 용어 자체가 이미 비자연적)들을 식용이나 실험용으로 판매하고 있으며, 동물원 자체에 동물실험실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동물복지에서 앞서가는 나라라고 하는 영국에서조차 이런 일이 발생하는데, 동물복지라는 개념조차 생소한 우리나라의 경우는 과연 어떠할지 세밀한 조사가 필요하며, 이런 일을 저지시키는 일에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동물들이 멸종하는 것은 주로 무분별한 남획과 생태계 파괴로 인한 서식지 환경의 불안정이 요인이 된다. 따라서 단순히 멸종동물 보존의 문제를 동물원이라는 좁은 공간 내에서 해결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환경보호 프로젝트와 함께 동물보호가 이루어져야 멸종위기로부터 동물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http://www.animals.or.kr/6sec/04/menu_001.htm?PHPSESSID=9ca085a335535f122690bcc8672ef281 (2000년 봄 통권 23호 녹색산문)<녹색산문> 동물의 권리와 존엄성에 대하여 장 미 란 / 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 부소장 끔찍한 동물의 주검들 지난해 가을 나는 영주 부석사를 거쳐 울진으로 해서 동해 바다로 자동차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감이 한창 제 빛깔을 낼 때여서 지나는 곳마다 주홍빛의 둥근 열매가 맺힌 감나무가 시골 가을날의 흥취를 흠뻑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좋은 가을 여행길에 나는 끔찍한 장면과 마주하게 되었다. 길가에 그대로 버려진 동물들의 주검이 차의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나의 눈에 자주 들어왔던 것이다. 그 장면은 아직도 나의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다. 몇 년 전에 비해 더 자주 눈에 띄는 동물들의 주검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떤 것은 죽은 지 얼마 안된 듯 붉은 피가 선명했고 어떤 것은 오래 된 듯 말라붙어 마치 천 조각 같은 모습이었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모습들이었지만 그들 중 다수는 개일 것이고, 인근의 산 속에서 나와 다니다가 여기가 자기 삶의 자리가 아닌 것을 알고 당황하여 허둥대던 작은 짐승들도 있을 것이다. 짐승들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몇 년 전 어느날, 시골길을 자동차로 가는데 저만치에서 낡은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다가오는 시골 할아버지를 본 적이 있다. 어떻게 위험하게도 차의 반대 방향으로 저렇게 자전거를 타고 다닐까. 나의 즉각적인 반응은 차의 속도를 늦추고 할아버지가 안전감을 느낄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차를 몰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내가 방해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상식적인 교통 법규에 맞게 정해진 길로 가고 있었는데 저 사람은 규칙을 어기고 반대 방향으로 다녀서 운전자를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좀더 생각을 해 보니 누가 누구를 방해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 할아버지는 평생 이곳을 마음대로 걸어다니고 때로는 자전거를 타고 이웃에 다녀왔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아스팔트를 덮어씌운 자동차 길이 생기는 바람에 오랫동안 살아 왔던 삶의 습관에 방해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해를 받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 할아버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거리에서 죽음을 맞은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상황은 벌써 오래 전 강원도 고성군에 보이스카웃 세계 대회를 위한 캠프장이 생겨 그곳에 살던 수많은 동물들의 삶이 교란되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음대로 건너다녀야 할 그들의 삶의 근거지가 갑자기 그들이 나타나서는 안될, 차들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변화된 상황에 놀라 정신을 잃고 허둥대다 차에 치어 죽었을 동물들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동물의 주검은 그것이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에 놓여 있어서 마음에 직접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는 한 치워지지도 않는다.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사람이 죽으면 그 경위를 조사하고 뉴스거리가 되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관심을 끈다. 또 사망 신고로 처리되어 살다 간 서류상의 흔적이라도 남는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죽은 동물은 어느 통계 자료에도 포함되지 않고 주검마저 방치된다. 결국 동물은 최하의 인간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작은 동물이라도 그 주검을 보면서 우리는 섬찟하고 끔찍한 느낌이 들어 오랫동안 거기다 눈길을 둘 수 없다. 만약 그것이 플라스틱 조각이라면 손쉽게 치울 것이다. 그러나 동물의 주검을 선뜻 치우기 싫은 것은 그것에서 생명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섬뜩한 첫 느낌을 슬쩍 덮어버리고 잊으려 한다. 나만 해도 동물의 주검에 대한 섬뜩한 첫 느낌은 지나친 것이었다고, 옳지 않았다고, 그저 순간적인 감상이었다고 설명하면서 자신의 첫 느낌에 대한 확신을 쉽게 포기해 버린다. 첫 번째 주검 앞에서 타협이 이루어지고 나면 두 번째 주검을 보았을 때는 자신의 감정과의 타협이 더 빨리 진행된다. 이런 심리적 과정을 거쳐 동물의 생명에 대한 인간의 타고난 교감 능력과 친화력은 딱딱한 껍질 속에 갇혀 더 이상 살아 움직이지 않는다. 누구나 동물과의 크고 작은 이별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생명이 없는 장난감 인형과의 이별도, 늘 곁에 두고 지내며 교감하던 추억 때문에 아픔으로 남는다. 그러나 동물과의 이별 경험이 상처로 느껴지는 것은 함께 했던 시간과 교감했던 경험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동물의 생명성에 대한 인식이 있다. 인간과 다른 생명체와의 교감은 이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옛 사람들은 감나무에서 열매를 딸 때도 늘 맨 윗가지에 몇 개씩은 까치밥으로 남겨 두었다. 새를 위한 인간의 배려였다. 옛 이야기 속에서도 동물과 인간은 늘 공존한다. 인간과 동물의 삶이 서로 얽혀 있는 것이다. 심청전 속의 토끼와 자라, 흥부전 속의 제비와 흥부의 관계를 보면 동물과 인간이 함께 사는 삶을 반영하는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의 삶은 모든 생물체와 상호 연관 속에서 서로 연결된 채 살고 있는 것을 실감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과학기술 문명의 인간 중심적 사고는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해 다른 모든 생물을 수단화하고 희생시키는 것을 정당화해 주었다. 구경거리가 된 동물들 21세기에 꼭 없어져야 할 스포츠로 권투와 레슬링을 꼽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와 똑같은 두 사람의 인간이 코피를 흘리고 눈이 금세 퉁퉁 부어 오르고 얼굴이 퍼렇게 멍들어 비틀비틀하면서도 끝까지 링 위에서 쫓고 쫓기는 운동을 손에 땀을 쥐며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 비명 소리까지도 링 위의 게임을 실감나게 하는 레슬링을 환호의 소리를 지르며 보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 사이의 폭력적인 스포츠는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정작 내가 꼭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스포츠 종목은 투우이다. 투우야말로 인간의 잔인성과 공격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스포츠이다. 사람이 가득 찬 경기장에 풀려 나온 소는 낯섦과 흥분한 관중의 호흡에 금세 혼돈된 상태에 빠진다. 투우사는 먼저 철갑을 두른 말을 타고 그 흥분된 상태의 소를 희롱하다 긴 창으로 등을 찌른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소를 이리저리 조롱하다가 단도로 머리를 찌르고 리본을 꽂는다. 온 몸에 피를 철철 흘리며 정신을 잃어 가는 소를 보며 열광하는 관중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모습에서 인간의 숨겨진 폭력성과 천박함에 놀라게 된다. 소가 네 발을 버둥대며 완전히 쓰러지면 다시 마차가 등장하여 죽은 소를 질질 끌며 퇴장한다. 투우사는 위풍당당하게 죽은 소의 귀를 그 자리에서 잘라 관중석에 던지고 그것을 받아 든 사람은 복권에 당첨되어 운수대통한 사람의 얼굴로 환호한다. 남프랑스의 아를르라는 도시의 원형 경기장에서 벌어진 투우에서 일곱 마리의 소가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그 날 밤 위경련을 일으켰다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것을 투우의 잔인함에 대한 보통 사람의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인간의 당연한 반응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사라지고 그 자리에 동물적 공격성이 자리잡게 되는가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사람들은 투우 경기에서 죽은 소의 고기를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사먹으려 한다는 것이다. 도살장에서 운명에 순응하며 조용히 죽어간 소보다 투우 경기장에서 흥분된 상태에서 자기의 온 근육을 긴장하여 죽을 힘을 다해 저항하다 죽은 소의 고기 맛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투우 말고도 인간이 돈벌이를 목적으로 훈련된 동물을 가지고 공연하는 구경거리는 모두 없어져야 한다. 돌고래나 원숭이가 재주 피우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은 같은 생명체로서 동물과 교감하기보다는 동물을 단지 구경거리와 흥밋거리로만 느끼게 된다. 동물끼리의 싸움을 놀이화한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소나 개는 예로부터 인간들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던 가축들이다. 옛 조상들은 소를 부려 농사일을 하지만 그런 소를 고맙고 귀하게 여겼다. 시골집 마당에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개는, 요즘 도시의 애완용 개처럼 사람들이 애지중지하며 옷을 해 입히고 머리 치장을 해 주고 유난스럽게 안고 다니지는 않아도 가족의 일원이었다. 그런 소나 개를 서로 싸움 붙여 놓고 피를 흘릴 때까지 계속하게 하는 개싸움이나 소싸움도 21세기에는 그 흔적을 감춰야 할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동물의 희생 프랑스 사람들 중에는 자식처럼 애완용 개를 키우다가도 여름철 긴 바캉스를 떠날 때가 되면 처치 곤란인 개를 몰래 도심에 풀어 놓던지 국도변 어딘가에 슬쩍 내려 놓고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오죽하면 바캉스 철에는 버려진 개를 모아다 다른 집에 입양시키는 단체가 있을 정도이다. 여기서 우리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자기 중심적 사랑의 단면을 본다. 평소에 주인의 사랑을 받던 애완용 개는, 타인과 정상적인 애정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소외된 현대인의 정서적 대리 만족을 위해 도구로 쓰여졌을 뿐이다. 그리고 주인이 여름 바캉스를 떠날 때는 속절없이 버림을 받는 것이다. 어느날 큰 트럭의 철창에 실려가던 닭들을 고속도로에서 만난 적이 있다. 닭들은 철창에 칸칸이 나뉘어져 등도 못 펴고 쭈그린 채 차에 실려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트럭의 뒤에는 ‘자유농장’이란 이름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요즘 닭들은 하루에 두 번 이상 알을 낳고 때로는 자기가 낳은 알을 그 자리에서 껍질도 안 남긴 채 먹어치우기도 한단다. 얼마나 끔찍한가? 닭들이 자기 자식을 품을 줄도 모르게 된 것이다. 밤새 불을 켜 놓은 채 잠도 못 자게 하고 계속 알만 낳도록 강요된 닭들. 인간이 자신의 편리와 욕망을 위해 다른 생명체들의 정상적인 삶을 변형시켰고 그 결과 어미 닭의 알을 품는 본능마저 교란된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이 닭을 단지 알 낳는 기계로 전락시킨 것이다. 병아리가 닭이 되어도 지붕 위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것도 그들의 삶이 교란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닭의 울음은 더 이상 아침을 여는 소리가 아니다. 아무 때나 들을 수 있는 소음일 뿐이다. 여기서 나는 동물원을 생각해 본다. 동물원은 아이들을 위한 중요한 동물 교육장처럼 인식되어 어린이가 있는 가족의 나들이에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이다. 그러나 근대적 과학 정신에 의해 잘 분류되어 여기저기 갇혀 있는 동물들을 보면서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어린이들이 과연 동물원에서 다른 생물의 생활에 관심을 갖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나로서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힘없이 누워 있는 동물들을 불쌍한 구경거리로밖에는 느낄 수가 없다. 아이들은 여기저기 나뭇가지 위를 옮겨 다니는 원숭이들에게 먹이를 던져 주면서 동물들을 희롱할 뿐이다. 동물원은 결코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교감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교육적 장소가 될 수 없다. 동물원은 인간이 동물을 정복할 수 있다는 능력을 과시하며 그 동물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인간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내가 중학생이 되어 생물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곳은 다른 생물들을 이해하고 애정을 느끼며 교감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나는 그곳에서 박제된 동물들에 둘러 싸여 정복자로서 인간의 우월감을 섬뜩하게 느꼈던 것이다. 생물실 역시 인간 외의 다른 동물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해서 지식을 만들고 결국은 동물의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간 중심적인 근대적 과학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인간이 동물을 대상으로 온갖 과학 실험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최근에 형질 변형한 동물에서 인간의 불치병을 치료하는 약을 만든다는 사실이 텔레비전 9시 뉴스에 보도되었다. 그 뉴스의 제목은 ‘동물들의 유전자 농장’이었다. 돼지 ‘새롬이’, 젖소 ‘보람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유전자 변형된 이 동물들로부터 인간의 질병 치료에 필요한 약을 채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물들에게 행해지는 어떤 일도 인간을 치료하고 노화를 방지하며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과학의 발전이라는 이름 하에 합리화된다. 인간 중심적 과학은 불치병을 치료할 약을 계속 만들어내고 결국 우리 모두가 영원히 죽지 않게 될 그날까지 이런 과학적 발견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과연 인간 이외의 생명들은 인간을 위해 언제까지 희생되고 수단화되어야 하는 것일까? 동물과 인간의 공존은 불가능한가? 낙동강 어귀의 철새 도래지에 댐 건설로 철새들이 갈 곳이 없어졌다는 환경운동 단체의 문제제기에 대해 한 일간 신문은 ‘철새가 밥 먹여 주나’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고 한다. 사람 살기도 힘든데 한가하게 웬 새타령이냐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 뒤에야 동물의 권리를 생각할 수 있다는 단계적인 사고 방식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생명들과 연결고리로 얽혀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정확한 생태적 인식을 해야 한다. 인간 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재단하여 다른 생명체의 삶의 터를 교란시키면 언젠가 그 피해는 부메랑처럼 인간에게 다시 돌아온다. 인간과 다른 생명체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강변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자주 자전거로 반포대교에서 한남대교를 거쳐 때로는 잠실까지 다녀온다. 어느날 자전거를 타고 반포대교에서 갈대밭을 거쳐 자연 학습장 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어디서 나왔는지 송충이들이 시멘트로 된 자전거길 위에 새까맣게 깔려 꿈틀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 많은 송충이가 다 어디서 살다가 길 위로 나온 것일까? 그 중에 어떤 것은 이미 밟혀 죽어 있었고 다른 것들은 아직 살아서 꼬불거리며 시멘트 위를 가로질러 어디론가 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도저히 자전거를 타고 갈 수가 없었다. 자전거로 달리면 일시에 많은 송충이를 짓밟게 되는 것이다. 그때 중․고등학교 시절 연중 행사로 송충이 잡기를 나갔던 기억이 내 머리를 스쳤다. 나무젓가락으로 일정한 양 이상의 송충이를 잡아서 선생님께 검사를 받아야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살기 위해 시멘트 바닥 위로 쏟아져 나온 송충이는 예전에 선생님의 감시 아래 징그러워하면서 젓가락으로 집어내던 그 송충이와는 다르게 보였다. 그래서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그것을 끌고 이리저리 송충이를 피하면서 한참을 걸었다. 서울시는 한강변에 있어야 할 습지를 없애고 시민의 교통 편의와 휴식을 위해 88도로와 고수부지를 만들었다. 나는 시멘트로 덮어 만든 자전거길에서 강바람을 쐬며 자전거 타기를 즐기지만 그 때문에 습지에 살던 많은 생명체들의 자연스런 삶의 터전이 심각하게 교란되어 더 이상 생존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나의 머리 속에는 자기 삶의 자리를 느닷없이 인간에게 뺏기고 놀랐을 생명체들이 떠올랐다. 시멘트 속에 갇혀 허둥대다가 그래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을 그 많은 생명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살아있는 것들의 있어야 할 자리 모든 인간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할 때 불행하다. 자기자리를 제대로 찾아가야 활개를 펴고 안정감을 느낄 수가 있다.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다. 제자리에 있지 못하는 모든 동물들의 삶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 살면서 제 자리에 있지 못하는 동물들의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7년 전 집 근처의 백화점 앞을 지나갈 때 일이다. 백화점 지하 주차장의 환기통이 인도 한 편에 자리를 차지하고 불룩 올라와 있어 전부터 눈에 거슬리곤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그 환기통 바로 옆 좁은 공간에 무슨 연유에서인지 닭 한 마리가 다리가 묶인 채 있는 것이었다. 그날 백화점에서 닭과 관련된 행사가 있는 것인지 닭고기를 팔려고 광고를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백화점에서 그렇게 묶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묶인 닭은 그 낯선 풍경과 소리에 얼이 빠진 듯 조그만 움직임도 없이 멍하게 서 있었다. 환기통에서 올라오는 매연과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연에 취하여 닭은 도시의 소음 한가운데에서 거리의 부속품으로 대상화되어 가고 있었다. 며칠을 그렇게 묶여서 거리를 향해 멍하니 서 있는 닭을 바라보면서 나는 인간의 잔인함과 자신이 잔인한 줄도 모르는 그 무감각에 수치심을 느꼈다. 3년 전 고등 법원 뒷길에 자주 갈 일이 있었다. 뒷길이라고는 하나 최소한 5층 이상의 빌딩들이 틈도 없이 서 있어서 그나마 시원스레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유료 주차장 공간뿐이었다. 그런데 그 주차장 옆에는 그 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단층으로 된 주택이 하나 있었다. 일부러 들여다 보려 하지 않아도 그 집의 마당과 입구를 다 볼 수 있었는데, 그 곳은 언제나 빈 집인 듯 아무 기척도 느낄 수가 없었다. 내가 이 집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 집 마당에 늘 혼자 있는 개 때문이었다. 버려진 듯이 보이는 쓸쓸한 눈동자의 그 개는 울타리 옆으로 사람이 지나가도 짖지도 않을 뿐더러 아무런 관심과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개는 자기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여도 그 누구도 자기에게 다가와서 상대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지극히 사무적인 분위기의 골목을 오직 일을 위해서만 분주하게 지나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골목 안에 묶여 있는 그 개 한 마리가 내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나의 눈길을 붙잡았다. 주변의 분위기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나지막한 울타리를 넘어 들여다 보니 밥그릇에 무언가 먹을 것이 있는 것도 같았다. 아마도 주인이 그 집에 가끔씩 들르는 모양이었다. 주인은 개가 빈 집을 지켜 주는 기능이 있다고 생각되어 그렇게 개를 묶어 둔 것이리라. 나는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그 집 울타리 안에 전시된 듯 묶여 소외된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개를 차마 오래 볼 수 없어 얼른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곤 하였다. 내가 만난 새들 한강 고수부지에서 만나는 새들은 그나마 보기에 괜찮다. 오염된 서울이지만 새들이 강 위를 여유 있게 떼지어 날아다니는 모습은 편안해 보인다. 넓은 강폭의 한강은 새들에게 시원하고 널찍한 놀이터가 되어 준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 퇴근길에 반포대교 위에 차가 밀려 서 있는데 눈에 익은 새들이 다리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새들이 반가워 자동차 창문 밖으로 목을 내밀어 날아가는 새들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새들은 동작대교 쪽으로 가려는 듯 반포대교를 힘겹게 건너고 있었다. 신호등이 바뀌기 전에 건너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교통 체증을 피해 급히 빠져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닌데 날아가는 새들의 모습이 너무나 힘들고 안쓰러워 보였다. 자동차로 꽉 차 있고 매연으로 찌든 다리 위를 건너고 있는 그 새들은 강물 위에서 능숙하게 그림을 그리듯 자유로이 움직이는 새들이 아니었다. 몇 주일 전 반포대교 위의 새들과는 다른 행복한 새떼들을 강화도 옆의 작은 섬 석모도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한가한 주말 오후의 들판 위를 물결치듯 떼지어 날아다니는 새들의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날 이후 나는 우연히 강화도에서 온 쌀을 사서 밥을 짓게 되었다. 그 밥을 먹음으로 그 새들의 수고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자기의 자리에서 삶을 자연스레 누리는 새들을 생각하면서 나와 새와 쌀이 하나가 된다. 새들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나는 우연히 새들과 만나는 기회가 많아졌다. 서울 한복판 종로 거리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새도 기억에 새롭다. 어울리지 않는 복잡한 장소에 있는 새는 안쓰러워 보였지만 그래도 생명이어서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보신각 맞은편 옛 화신백화점 자리에 들어선 주위의 다른 건물들 위에 군림하는 철제 건물의 국세청 빌딩은 언제 보아도 눈에 거슬린다. 그 건물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광화문 쪽으로 가려는데 등뒤에서 맑은 새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의 귀가 번쩍 뜨였다. 나는 처음에는 그 소리가 지하철 속에서 듣던 녹음된 새소리가 아닌가 의심했다. 그런데 돌아서서 주위를 살펴 보니 복잡한 인도 한 곁에 서 있는 나무 위에서 새 한 마리가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가 어디라고, 자기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곳에서 그처럼 맑고 풋풋한 소리로 지나가는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가?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그 새의 철없는 순진함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새가 너무 반가워서 한참 동안 가슴이 설레었다. 도심 속의 인간은 새소리 하나에 이처럼 행복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나에게 이제 그 장소는 새를 만났던 즐거운 장소로 기억될 것이다. 지난 가을에 조선 후기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된 서울 성북동 입구의 간송 미술관을 찾아간 적이 있다. 그곳은 오래된 건물과 마당을 원형대로 잘 보존하고 있었다. 나는 미술관 마당에서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닭과 고양이를 만났다. 오래된 나무와 흙, 얕은 도랑에서 흘러내리는 물, 편안하게 돌아다니는 닭들, 그 옆을 스쳐 지나다니는 고양이가 모두 함께 잘 어울렸다. 어디를 가나 옛것을 휘젓고 뒤엎어 새것을 만드는 서울의 한복판에서 흙과 나무를 편안히 놔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곳 마당의 닭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바싹 옆으로 다가가도 태연했다. 그 닭들은 있어야 할 자리에서 평화롭게 살아서인지 사람들을 자기를 해칠 수도 있는 위험한 존재로 느끼지 않는 듯했다. 관람객들이 오가는 도랑 건너 쪽으로 풀쩍 날아가는 모습은 양계장의 닭이나 철창 속의 닭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자연스런 모습이었다. 나는 그 닭들을 통해 사람과 동물의 화해 가능성을 보는 듯했다. 인간은 항상 동물보다 존엄한가? 인디언들은 사냥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고 잡혀 죽을 동물의 영혼을 위해 정중히 의례를 치른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사냥을 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도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를 부렸다. 인간이 한 인간을 죽였을 경우 죽은 사람이 아무리 악인일지라도 용서받지 못할 살인죄를 지은 것으로 모두가 동의한다. 그러나 반달곰 같은 멸종 위기의 동물을 밀수렵, 밀도살하는 것은 쉽게 용서받을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잘못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돌아올 피해는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을 잡는 것이 더 크다. 그것은 종 자체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흔히 최하의 인간을 비하할 때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한다. 아무리 형편없는 인간도 짐승보다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표현이다. 짐승은 제 배가 차면 먹을 것이 옆에 있어도 고개를 돌린다. 사람은 미래의 허기를 미리 상상해 계속 쌓으려 한다. 그런데 계속 쌓다 보면 본말이 전도된다. 미래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쌓기 시작했지만 점점 쌓는 일 그 자체에 매이고 집착하게 되어 원래의 목적인 행복은 놓쳐 버리게 된다. 생태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축적에 대한 집착보다는 스스로 만족하는 동물의 본능이 더 지혜롭다. 그런데도 인간은 스스로를 항상 동물보다 존엄한 존재로 인식해 왔다. 이기적 인간 중심주의는 생태계의 서열 구조를 분명히 그려 놓고 서열 구조상 하위의 생물종을 희생시키고 수단화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렇다면 동물 자체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삶을 제자리로 돌려 놓을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문제는 인간의 삶이 제자리를 다시 찾는 것과 연결된 문제이다. 인간의 삶이 제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우리 존재의 근원에 대한 생태학적 통찰력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와 그물코처럼 얽히고 설켜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내 존재의 일부이다. 다른 존재의 희생과 불행을 딛고서 인간만 살아 남을 수는 없다. 인간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장미란: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동대학교 교육심리학 석사,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사회심리학 박사과정 수료. 현 대한YWCA연합회 지도력 양성위원, 한국알트루사 부설 여성상담소 부소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