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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진보평론 13(2002년 가을호) 변방의 아이들 박수정·극작가/ <연극 전태일> 공동창작 등
구주택
내가 사는 서울 구로구 구로3동 한쪽은 1960년대에 만들어진 단층 구주택 구역으로 빠르면 올 겨울이지만 늦으면 언제가 될지 모르는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혼자 걷기에도 비좁은 그 골목을 거닐다 보면 싸한 비누 냄새, 생선 조리는 냄새, 바로 귀에 꽂히는 말소리가 몸에 달라붙는다.
이 구주택 골목을 벗어나는 길은 수십 가지, 아니 최소한 백 가지가 넘는 '경우의 수'가 만들어진다. 어떤 골목으로 들어가도 길은 이어진다. 처음 오는 사람은 마치 미로에 빠진 것처럼 당황할지 모르겠지만 몇 차례 그 길에 익숙해지면 대여섯 개의 골목 입구에서 오늘은 이쪽, 다음엔 저쪽을 선택해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다. 구주택은 방 하나에 좁은 부엌 하나가 기본구조인데, 세월이 흐르며 두 채를 터서 방을 넓히거나 입식부엌을 들인 집들도 있어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다른 집들도 많다. 대개의 방은 아무리 커야 어른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찬다. 워낙 다닥다닥 붙어있어 부엌으로만 창문이 있고, 방에는 창문이 없는 경우가 많다. 벽에 창문이 없는 대신 사람들은 천장에 창문을 만들었다. 굴뚝처럼 만들어 그 위에 선 라이트를 씌우고 기다란 나무 막대로 밀고 당겨 창문을 연다. 방에서 하늘을 보고, 빗방울이 듣는 소리를 볼 수 있다. 어떤 건축가가 그런 집을 설계할 수 있을까. 어둠침침하고 습기 차 냄새날 집이건만 사람들은 머리를 써서 빛을 얻어냈다. 여긴 낮에 집에 있는 사람이 많다. 가까운 공단에서 일하는 남자들은 야간 작업을 마치고 아침에 들어와 오후 늦게 공중화장실에 가 오줌 한번 누고 일 나갈 준비를 할 때까지 잠을 자고, 그렇지 않으면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다. 가끔 아침, 가게에서 잔돈으로 딱 소주 한 병 살 만큼만 돈을 가져와 술과 바꿔 가는 남자들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술은 유흥이 아니라 그 날 그 날 몸에 넣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주사약 같은 것이다. 이곳에 1998년에 저소득 실직가정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부방, '파랑새나눔터'가 있다. IMF가 터지면서 밥을 굶는 아이들이 많이 생겨났고, 어른들이 돌보아주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물론, 어른들의 불안정한 일자리나 불화, 가출은 그 이전에도 있던 일이다. 당장 아이들에게 하루 한 끼라도 따뜻한 밥을 먹이는 문제가 시급해 주변에 있는 사회단체들이 힘을 모아 공부방을 만들었다. 지금은 조금 나아져 밥을 못 먹는 아이는 많이 줄었지만 보호받지 못하고 방치된 아이들은 여전히 남아있고 부모들의 생활수준에 상관없이 늘어가고 있다. 공부방에 오는 아이들 중에는 부모 한 쪽이 가출하거나 이혼한 가정이 많다. 재혼을 해도 아이를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 맡겨두고 따로 산다. 부모가 다 있어도 싸움이 잦거나 알코올에 중독되기도 했다. 한쪽 부모가 없는 아이에 비하면 싸우는 엄마 아빠라도 다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가도 부모 싸움에 우는 아이들을 보면 차라리 없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어른이 만들어 놓은 아이들 삶이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 아이들에게 충분히 이해시키고 이야기 나눌 만큼 여유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분노에 에워싸인 이혼과정을 지켜보며 아이들은 힘들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항상 풀죽어있는 것은 아니다. 저희들끼리 웃고 장난하고 뛰고 싸우고 하여튼 조금이라도 지루해지기 전에 움직인다. 세상이 지루해진 어른들에 비하면 아이들은 건강하다. 가슴 한 켠에 대대로 물려받은 버림받은 외로움과 서러움, 분노가 자리잡고 있어도.
공부방 아이들과 놀다 난 이곳에서 얼마 전부터 자원교사를 하게 되었다. 어느덧 제2의 고향이 되어 버린 구로공단 주변마을. 여느 청년들처럼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와서 또 그런 남편을 만나고 아이 낳고 산 지 어느덧 10여 년이 흘러버렸다. 자연스레 이젠 운동이니 하는 논리나 과학의 열정들보다 생활이라는 평범하고도 질긴 시간들이 내 앞에 과제로 놓여져 있다. 아이들에게서 난 나의 어린 시절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 아이들에게도 삶이 있으리라. 아이들은 공부방에 들어서면 먼저 숙제를 한다. 6학년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전과를 베낀다. 제과점에 가서 조사해서 쓰는 숙제가 있었는데 그것도 전과를 베낀다고 해서 빵 살 돈을 쥐어주고 제과점에 보낸 적도 있다. 숙제가 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예 생각을 않는다. 사회 요약이나 국어 숙제를 할 때면 나보다 아이들 자신이 속이 터져 죽으려고 한다. 아무리 읽어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거다. 오히려 나는 참을성 있게 얘기해주고 반복해서 읽게 하고 어떻게든 하나라도 알고 넘어가게 하려고 하는데 당사자가 자신에게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 상에 고개를 처박는다. 답답한 속에 눈물 한 움큼 쏟아내며 학교 수업 시간에 잠을 자거나 놀았던 일을 실토한다. 그러면 나는 연필을 들고 밑줄을 그어준다. 차라리 그게 도와주는 길이다. 한 반에 40명 안짝으로 아이들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학교는 '따라오는 놈만 따라와라'다. 전문 선생한테 택견이나 미술을 배우기도 하고, 공부방 선생들이 나름대로 글쓰기, 전래동요, 무용을 가르치기도 한다. 수요일처럼 학교에서 일찍 돌아오는 날에는 주말농장에 가기도 하고 고궁나들이도 간다. 2주에 한 번씩은 사회복지관 목욕탕에 가서 무료로 목욕을 한다. 이런 날이면 약국에서 머릿니 약을 한 스무 통씩은 사와서 머리에 친다. 선생들이 두 손에 비닐 장갑을 끼고 머리 구석구석을 뒤져가며 물비누로 만들어진 약을 발라준다. 가끔씩 애들은 공부방에서 서로 뉘여 놓고 이를 잡아주고, 서캐를 찾아내기도 한다. 정윤이의 파랑새 마지막 날 내일이면 정윤이는 구주택 골목을 떠난다. 아마 여기로 다시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을 것이다. 올해 아니면 내년 안으로 구주택들이 모두 헐리고 새 아파트를 짓기 시작하니, 정윤이네 뿐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차츰 하나씩 둘씩 사라질 것이다. 아파트가 다 지어진다 쳐도 그 아파트는 그들이 꿈꿀 수 없는 액수일 것이며, 건너편 동에 두산 아파트를 지을 때처럼 영구임대아파트 동이 따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지금 살고 있는 세입자들은 여기와는 영영 이별일지 모른다. 없는 사람이 살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는데 이제 사람들은 철새처럼 다시 마땅치 않을 정착지를 찾아 떠나야 한다. 서울 시내권은 거의 재개발이 이루어져 이제 어딜 가던 이곳에서의 생활비 몇 배는 될 월세를 내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 입에서 심심찮게 '이사' 얘기가 자주 나온다. 가을 무렵 다른 구에 있는 영구 임대아파트로 간다는 애들도 있다. 도시 변두리로, 시골로 밀려났던 빈민들의 이야기가 '아, 이런 것이었구나' 실감이 간다. 자기들끼리 어울려 살던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설혹 영구임대아파트로 간다하더라도 이제 '영구'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일반 아파트 사는 애들한테 따돌림당하겠지. 우리 동 건너편 두산아파트만 보더라도 영구임대아파트와 일반 분양 아파트는 관리 사무소도 다르고, 노인정도 따로 있고, 모든 게 분리되어 운영된다. 정윤이네는 주거기간이 짧아 영구임대아파트도 들어가지 못한다. 어차피 몇 달 후면 떠나야 되는 거 남들보다 먼저 떠난다. 골목 곳곳에는 빈집이 하나 둘씩 늘어나 을씨년스럽다. 지난주에 이사 간다고 말하려고 찾아온 정윤이 엄마는 날마다 혼자 사는 옆집 남자가 프로판 가스통을 들고 터뜨린다고 난리 치고(구주택 골목에는 연탄을 쓰는 집과 LPG 가스를 쓰는 집들이 있는데, 가스통은 바로 집 문 앞에 덩그마니 놓여져 있다), 유리창을 깨고 별의별 욕을 다 한다며 아주 저질이라고 못 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새로 얻은 방은 넓으냐는 물음에 세 식구 사는데 못살겠냐고 한다. 왜 셋일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얼굴을 읽었을까, 애 아빠는 지난 겨울부터 오지 않았다고 하더니 목소리가 거칠어지면서 눈자위도 붉어지기 시작했다. 애 아빠가 집에 있으면 이사가 늦춰졌을까. 엄마와 아빠가 싸움이 잦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지만 아빠가 없어졌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정윤이도 워낙 내색 않는 애라 전혀 눈치 챌 수가 없었다. 엄마가 평일에는 일곱 살 남동생을 돌보고 주말에만 일을 나가 정윤이가 동생을 돌본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주말의 노동이, 한 달에 여덟 번 정도 하는 출근으로 얻어지는 돈이 이 집 살림의 전부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남편 얘기를 스스로 입에 올린 뒤, 정윤이 엄마는 점점 더 목소리가 커지고 눈물도 흘렸다. "딴 여자랑 살림 차렸나봐요. 법원에 이혼수속 밟고 있어요. 안 나오면 나한테 유리하대요. 이혼하면 공공근로도 안 되고, 둘째는 겉보기와 달리 잔병치레를 많이 해서 어디 맡길 데도 마땅찮고 그래서 주말에만 일해요. 경마장 청소해요. 도박하는 데 있잖아요. 이제 이사해서는 밤에라도 어디 일자리를 알아 봐야죠. 살아야죠." 어쩌면 정윤이가 동생을 돌보는 시간은 몇 배로 더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주말에 동생을 돌보던 의무에 이제 평일 저녁 시간까지 덧붙여질 것이다. 그렇다면 정윤 엄마가 밤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어떤 걸까. 방정맞게 술집이 떠올랐다. 구종점 언덕에서 행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고만고만한 술집들이 죽 늘어서 있다. 누가 여기 와서 술을 마실까 싶은, 간판도 노란색, 분홍색에 '아홍이네'와 같은 이름을 달고 있는 술집들, 그래도 사라지지 않고 몇 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술집 앞에 아줌마들이 한 명씩 나와 서 있는 걸 종종 볼 수 있다. 예쁘지도 늘씬하지도 않은, 한눈에도 초등학생 애가 둘 셋은 딸려있을 듯 보이는 여자들. 더 방정맞게 언젠가 들은 여인숙 아르바이트 이야기가 떠올랐다. 동네 골목에 웬 여인숙이 이리 여럿 있나 싶은데, 아줌마들이 애들 저녁 해 먹여 재워놓고 아르바이트로 여인숙에서 부르면 밤일을 뛴다고 하는 그 얘기. 어떤 이들에게 삶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한바탕 쏟아내고 맘 한 구석이 조금은 풀린 듯 정윤 엄마는 아이에게 줄 작은 우유가 하나 들어있는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돌아갔다. 정윤 엄마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와 억양에는 이미 마음이 잔뜩 할퀴어진 자국이 엿보였다.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여러 감정들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사람살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있지만 그 마음먹기란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마음을 싹 도려내어 버릴 수 있다면, 깨끗이 씻어서 햇빛에 바짝 말릴 수 있다면, 아니 마음이 없어도 살 수 있다면 … 정윤이가 이사 간다. 아이들은 정윤이를 보낼 준비를 했다. 자기들끼리 풍선도 사고, 천원짜리 선물도 준비하고, 우정장이라고 공책에 이 말 저 말도 써 놓고 예쁘게 꾸몄다. 애들이 준비한 거에 내가 준비한 책, 그 동안 공부방에서 찍은 사진이 담긴 사진첩을 싸고, 방을 꾸미고 스스로 알아서 준비한다. 물론 말 트집잡고 삐지고 하는 일은 멈추지 않고. 뭐 더 줄 게 없을까 생각하다 아이들 목소리를 녹음하면 어떨까 싶어 급히 테이프를 사고 녹음을 시작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는 노래를 다 같이 부르고,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말을 남기고, 소영이와 난희가 컴퓨터로 써서 뽑은 편지를 읽었다. 맞춤법도 다 틀리고, 붙여 쓸 말은 띄어 쓰고, 띄어 쓸 말은 붙여 쓴 편지. '엄마'가 나오는 시 몇 편과 '까마귀 소년'이라는 그림책도 녹음하고, 정윤이가 들어오면 실황녹음도 하자고 하고 준비를 마쳤다. 누군가 '온다' 외치자 아이들은 문 양쪽으로 서서 폭죽을 터뜨렸는데 하늬가 먼저 들어왔다. 순식간에 '짜증나' 소리가 나고 영문을 모른 채 정윤이가 들어와도 아무도 뭘 진행할 생각을 않는다. 야, 이럴 때도 싸우는구나 싶어 웃었다. "박박 뜯어. 그렇게 조심스럽게 뜯으면 안 돼. 빡빡 뜯어야 돈 많이 벌어."하고 혜지가 말하자 다들 옆에서 맞아, 맞아하며 거든다. 녹음기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아무 말 없이 듣던 정윤이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라니까 말은 못하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다. 낯선 곳에서, 이제 아빠도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 상황에서, 새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그나마 학교 끝나고 공부방에 나와 친구들과 언니, 오빠들과 어울리고, 함께 밥도 먹고, 책도 읽고, 하여간 그래도 정들었던 사람들, 수백 번 넘어 다닌 문지방이 있는 이곳, 머리카락에 살에 눈에 손에 발에 스며들었을 그리운 시간들을 뒤로하고 간다. 점점 더 나이를 먹고, 몇 차례 이사에 이력이 붙을 즈음이면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생을 가도 잊혀지지 않고 또렷이 기억나는 이사가 있다. 내일 아침 정윤이는 자신의 기억 속에 어떤 걸 가둘까? 몇 년 후면 높고 깨끗한 아파트가 돼버려 흔적도 없을 그 집은 정윤이 머리 속에 살아 가끔 꿈에 나타나겠지. 어느 날 갑자기 그 집에서 있었던 모든 움직임과 소리, 냄새가 영화처럼 살아나기도 하고. 불쑥 어떤 기억이 튀어나오겠지, 어떤 때는 애써 떠올려도 보겠지. 아침에 얻어맞다 "저 오늘 혼났어요." 선영이가 오자마자 살짝 말을 건넨다. 4학년 선영이는 한 살 위 오빠랑 공부방에 나온 지 이제 넉 달쯤 된다. 오빠가 일주일 동안 집을 나간 뒤 학교 선생님 소개로 이곳에 오게 되었고, 선영이도 따라왔다. 공부방은 전세 2,000만원 이하에 살면서 부모가 도저히 돌볼 수 없는 형편인 아이들이 우선이다. 선영이네는 구주택이 아닌 일명 '빌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가출 경력이 있는 오빠만 받으려고 했는데 혼자 있어야 하는 선영이를 어쩔 수 없어서 받았다. 선영이네 집은 아무도 모른다. 넉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한 번도 부모들이 찾아온 적이 없고, 집이 어디인지도 모른다. 같이 근무하는 선생이 길에서 만나 집이 어딘가 알아두려고 가보자고 했더니 둘이서 엉엉 울면서 알려주면 안 된다고 했단다. 엄마 아빠가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물어도 꽉 입을 다물었고, 부모님 핸드폰 번호를 알려달라고 해도 고개만 가로젓는다. 연극놀이로 가족 모습을 조각한 적이 있다. 선영이는 6학년 언니 하나를 등돌려 세우더니 엄마로 만들어 요리를 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 엄마는 계속 입으로 아이들을 혼낸다. 아빠를 가운데에 세우고는 치켜든 손에 몽둥이를 쥐어줬다. 그리고 그 몽둥이 아래 자기와 오빠를 세우고 고개 숙이고 운다고 했다. 그때 처음 선영이는 집안을 보여주었다. "어디를 때리지?" "머리도 때리고요, 아무 데나 막 때려요." 겉으로 보기에는 뭔 문제가 있을까 싶은 아이가 만들어 놓은 가족 모습은 그 날 아이들이 만든 것 중에 가장 선명했다. 아마 그때부터 조금씩 자기 이야기를 꺼낸 것 같다. 어느 날인가 체했는지 애가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6학년 언니를 딸려 병원에 갔다오게 했다. 약을 먹고 좀 나은 것 같더니 여전히 얼굴이 굳어 있다. 전날 밤 3시까지 잠이 안 와 눈뜨고 있다가 자려고 누웠는데 엄마 오는 소리에 바로 잠이 깨서 한잠도 못 잤다고 한다. 낮에 논 것만으로도 달게 잘 수 있을 텐데, 선영이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 오빠랑 단 둘이 있으면서 잠이 안 오면 오빠한테 재워달라고 한다. 어떻게 재워주느냐고 물으니 그냥 잠들 때까지 가만히 옆에 있어주라는 거다. 그러다 잠이 들면 상영이는 슬그머니 자기 방으로 가서 잔다. 반대로 상영이가 동생 선영이한테 재워달라고 하기도 하고. 어둠 속에 덩그마니 놓여 있는 둘은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준다. 공부방 아이들 모두 노래를 배우는 시간이 되었지만 선영이는 자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자라고 하고 문을 닫고 나와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다 언뜻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방으로 들어갔더니 애가 보이지 않는다. 제 몸 만한 앉은뱅이 상 밑에 방석 두 장을 깔고 누웠는데 눈은 말똥말똥하다. 가끔 큰애들도 상 밑으로 들어가 눕길 좋아한다. 뭘까. 꽉 들어찬 느낌, 숨고 싶어서일까. 나도 누웠다. "너 힘든 일 있니? 무슨 고민 있어?" 물어보는 내 말에 그냥 저 스스로 참아낼 수 있다는 양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젓는다. "연극놀이할 때 아빠한테 매맞는 모습 만들었잖아. 그런 일 자주 있니?" "2001년 겨울에 맞았어요. 오빠랑 몇 시간 동안 맞았어요." 이번 달에 맞은 일 있니, 지난달은, 그 전에는 물었을 때 없다고 고개를 젓더니 작년 일을 꺼낸다. "어디를 맞았는데?" "여기저기 아무데나요." 가느다란 나뭇가지 같은 이 아이, 몇 시간을 줄곧 맞았다는데 할 말이 없었다. 선영이 눈에 눈물이 조금씩 고였다. 상 밑에 누워 있는 선영이는 마치 심장병에 걸려 간신히 숨을 쉬는 아이 같았다. 아픔에 너무나도 초연한. "선영아, 여기는 학교하고 다르잖아. 여기서는 공부 잘 하는 것보다 너희들 마음이 아프지 않은 게 더 중요해. 힘든 일 있으면 가슴속에 꼭꼭 쟁여 두지 말고 선생님한테 얘기해. 예를 들어 엄마 아빠한테 맞으면 그냥 넘어가지 말고 얘기해 줘. 선생님들이 알아야 너를 위로해주고 도와줄 수 있잖니. 그리고 밤에 잠 안 오고 무서우면 선생님한테 전화해. 내가 당장 달려가지는 못 해도 전화로 얘기하면 되잖아. 그치?" 선영이와 나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킨 걸까. 선영이는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 맞았다는 얘기를 꺼냈다. "엄마가 가방을 열어보더니 싸인펜, 색연필, 가위, 풀, 이런 거 다 갖고 다닌다고 머리를 때렸어요. 필요할 때만 가져가래요." 엄마가 필요할 때만 가져가라고 한 말은 어쩌면 맞는 말이다. 가방도 무겁고 괜히 갖고 다니다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하지만 그 또래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요즘 초등학생, 중학생 아이들은 갖가지 색볼펜이나 색연필이 들어있는 필통, 가위나 풀, 자 따위가 들어 있는 필통, 연필과 샤프, 지우개가 들어있는 필통 등 가방에 필통만 최소 두 세 개는 가지고 다닌다. 아이들은 필요하다고 했다. 그 필요는 어른들이 모르고 느끼지 못하는 필요일 거다. 허영이라도 아이들에게는 좋다. 그 물건들을 챙기고 열어보면서 확인하고 그러면서 자기들만이 느끼는 그 무엇이 있나 보다. 선영이는 그 아이들과 똑같을 수도 있고, 어쩌면 날마다 신경 써서 챙기느니 한 번에 싹 넣고 다니며 따로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한 건지도 모른다. 엄마는 물어보지 않았다. 왜 그러는지. 그리고 선영이는 그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엄마한테 대들었냐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저 절대 안 대들어요" 한다. 무서운 엄마 아빠 밑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절대 저항하지 않기다. 그까짓 일로 얼마나 때렸으랴 싶어 살짝 맞은 거냐고, 몇 대 맞았냐고 물었다. "몰라요. 계속 때렸어요. 머리가 너무 아팠어요." 그 조그만 머리를 엄마는 몇 댄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웠을 뿐이었을까. 상영이도 언젠가 그랬다. 엄마가 잘 때리는데 이유는 너무나 사소한 거라고. 엄마가 새로 사준 옷을 학교에 입고 가지 말라고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마땅히 입을 옷이 없어 그 옷을 입고 갔다가 말을 안 들었다는 이유로 매질을 당했다는 거다. 조금 의아함이 풀리는 말을 선영이가 꺼냈다. 엄마가 거의 날마다 술을 마시는데 그때마다 혼낸 걸 또 혼내고 한단다. 혼자 마실 때도 있고 아빠랑 마실 때도 있고, 집에서 안 마시면 밖에서 친구들과 늦게까지 마시고 들어오고. 비약을 하자면 선영이 엄마, 아빠는 알코올과 폭력이 쌍으로 이어져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쩜 자기 분을 아이들에게 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아이들은 너무나 위험한 곳에 있다. 정신상담 사회복지사에게 선영이 집 이야기를 했더니 단번에 가정폭력이라며 이런 집 아이는 밖에서 절대로 집안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철저히 입을 다물 것을 강요받고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 큰 폭력이 가해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공포 속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배워 어디서든 대들거나 싸우거나 하지 않는다며 그들을 '생존자'라고 부른다고 했다. 상영이는 또래 아이들이 시비를 걸고 때려도 한사코 맞기만 한다. 덤비지 않는 상영이에게 애들은 또다시 바보 같다고 때린다. 이 아이의 보호자는 누구인가. 엄마인가, 아빠인가. 이미 그 둘은 보호자가 아니다. 잠을 재워주고 입혀주고 먹을 것을 마련해준다고 보호자는 아니다. 지금으로서는 그 집에서 선영이와 상영이의 보호자는 없다. 스스로가 자신들을 보호해야한다. 그래서 그들은 생존자다. 아빠가 사랑해줘요 푹푹 찌는 날, 학교 재량수업으로 3일을 쉬는 아이들이 첫날 느긋하게 공부방에 나왔다. 듬성듬성 안 나온 자리도 보인다. 까짓 날마다 나오는데 하루쯤 어디 가서 친구하고 논들 어떠랴 싶어 신경 쓰지 않았는데 왜 꼭 밥 때가 되면 신경이 쓰이는지 집으로 애들을 보내니, 그 애들도 밥 때 맞춰 오는 길이었다. 우리는 하루 한 끼 같이 밥을 먹는다. 때로는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 편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혹 먹는 걸로 고문하고 있지는 않나 싶은 생각도 들 때도 있지만 저희들끼리 덜어주고 받아주고 그러면서 밥을 나눈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서로 나누어 먹는 것 먹는 것"이라는 노래처럼 아이들의 살이 되고 피가 되고 정신이 될 밥을 나누는 시간, 밥 한 술에 인간의 역사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담아왔던가. 어린 동생들이 주말농장으로 떠나자 공부방은 좀더 한가로워졌고, 숙제도 없는 아이들 중 몇은 빌려 온 순정만화에 푹 빠지기도 하고, 그냥 빈둥빈둥 거리기도 한다. 뭘 꼭 하지 않아도 좋은 시간. 그렇다고 이대로 남은 시간을 보내기는 좀 그래서 글을 쓰자고 했다. 말을 꺼내는 순간 아이들 입에서 '차라리 주말농장 가요'라든지 '짜증나'라는 말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어쩐 일인지 좋다고 하며 자기 원고지를 찾아 든다. "뭐 써요?" "쓰고 싶은 거 써. 요즘 생활 중에 가슴에 남는 것, 너를 아프게 한 거 뭐 그런 거 쓰면 되지 않을까?" "몇 장 써요?" "니 맘대로 써." "두 장만 써도 돼요?" "너는 세 장 써." 자기가 할 말이 있는 만큼 쓰라고 해도 아이들은 여전히 쓸 때마다 장수를 묻거나, 장수를 대거나 한다. 그냥 물으면 맘대로 쓰라고 하고, 정해서 물으면 그렇게 물었으니 더 쓰라고 해버린다. 학교 선생님한테서 늘 '어떤 주제'를 '몇 장 이내'로 쓰라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들은 혼자 선택하고 결정하지 못한다. 글씨 틀릴까봐 쓰기 싫다는 아이에겐 글씨, 띄어쓰기 다 틀려도 좋고 절대로 안 고칠 테니 맘놓고 쓰라고 했다. 제일 먼저 난희가 왔다. 어제 환한 얼굴로 "선생님 내일 저 못 나와요. 언니 집에 가요" 했는데 밥 먹고 두 시쯤 간다던 언니는 오빠가 아프다며 약속을 지웠다. 언니는 난희 둘째 오빠 여자친구인데 난희 집에서 같이 지내는 날이 많다. 오빠와 여자친구 다 앳된 얼굴이다. 오빠는 스물 두 살이고 언니는 고등학교를 마치지 않은 나이라고 하니 열 여덟 언저리일 것이다. 자랑스럽게 얘기했던 외출이 없어지자 작은 난희 눈이 더 작아졌다. 난희가 쓴 글을 보았다. "나는 예전에는 아빠에게 사랑을 받았는데 지금은 아빠에 사랑을 받았었요. 그래서 저는 아빠를 많이 보고 싶었요. 전 지금 아빠 생신이 돌아옵니다. 아빠께 선물도 주고 싶은데 내 마음이 그렇게 안 돼요. 그래서 별로예요. 아빠가 생신날에 오신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그래서 아빠가 생신날 오셨서 하루밤 자고 가신데요. 그래서 기분이 무지 좋았요. 그래서 전 지금 아빠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요. 그렇니 아빠가 빨리 온데요. 그렇니 절 좋았하신 아버지는 증말 좋으신 부니예요. 우리 엄마도 누구인지 모르는데 알고 싶었요. 그래서 전 엄마를 보고 싶었요. 근데 엄마가 날 낳아주진 것은 감사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많이 안 보고 싶었요. 그렇니 아빠는 저에게 엄마는 나쁜 사람 않이라고 생각하레요. 아빠께서는 엄마를 이해해 주시레요. 그래서 전 지금 엄마가 조금 싫었졌요. 그래서 엄마에게는 달려가기 싫어요." 난 빨간 펜을 들어 맞춤법을 고치지 않았고, 띄어쓰기 표시도 그 원고지에 남기지 않았다. 그저 읽었다. 평소 '짜증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난희 속에 감추어진 외로움과 그리움이, 오늘 저리 힘없어 보이던 쓸쓸함이 다 전해져 왔다. 잡지를 뒤져도, 책을 펼쳐도, 공연을 봐도 노래를 들어도 슬픔이라는 독에 빠져, 외로움이라는 바다에 빠져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그것에 젖은 채로 말하는, 그래서 스스로 감동하고 마는 글과 움직임을 많이 봐서일까, 아이 글이 좋다. 난희가 태어난 지 백일만에 엄마가 가출해 이혼하고 재혼했다는 이야기는 들어서 알지만 난희랑 얘기할 때 혹 상처가 될까 엄마 얘기는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 난희는 묻지도 않았는데 엄마 열 일곱에, 아빠 스물 세 살에 결혼했다는 말을 꺼낸다. 지금 스물 넷, 스물 둘, 열 아홉인 오빠 셋에 난희가 열 세 살이니, 한 살 짜리 핏덩이와, 일곱 살, 열 살, 열 두 살 아이를 두고, 자기 배 아파 가며 죽음의 공포와 싸워 세상으로 넷이나 내보낸 여자가 서른을 눈앞에 두고 자기 집을 나선다. 다시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산다는 난희 엄마. 삶이 어찌 잘했다, 잘못 했다로 설명되겠는가. 하지만 백일에 떼어놓고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엄마에게 난희는 분노한다.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엄마, 그래서 그리울 때 떠올리려해도 떠올려지지 않는 얼굴. 그래도 그리운가 보다. "아빠는 제가 일 학년 때 새엄마랑 이혼했어요. 새엄마 딸이 있었는데 나랑 자꾸 싸우니까 아빠가 날 생각해서 헤어졌어요. 내가 여섯 살 때 오셨으니까 3년 살았어요." 그만큼 아빠는 저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아빠는 지방으로 돌아다니는 건설노동자다. 한 달에 한두 번 집에 와서 밀린 빨래도 하고, 부엌에 반찬도 채워놓고, 난희의 그리움도 채워놓고 간다. 그러면 그 남은 날을 난희는 자주 들어오지 않는 오빠들과 메꿔 나간다. 아침은 거의 못 먹고 지각은 당연한 것이고 자주 아프지만 난희는 애교덩어리다. 언제는 아빠 생일 선물 산다고 공부방에 말도 없이 빠지면서 동네 중국집 전단지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한 삼 일 했다. 고작 2,000원 받아 허기를 채우려 빵과 우유 사먹는데 다 써버려 결국 선물은 못 샀다. 저녁에 공부방 앞 골목을 지나는데 환하게 웃는 난희가 아빠와 팔짱을 끼고 간다. 내일 모레 오신다던 아빠가 미리 오셨다. 짧게 자른 스포츠형 머리, 양복바지에 반팔 와이셔츠, 넥타이를 맨 작고 통통한 난희 아빠. 지랄 맞은 개 같든 24년이라는 시간을 아들 셋, 딸 하나와 꾸려오고 있는 한 사람. 집에는 난희 새엄마가 될 여자도 데려다 놓고. 그에게 삶이란 어떤 것일까.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다 점심을 먹고 나자 아래 학년 애들이 무거운 가방을 들고 문을 민다. 6학년 용이가 뒤이어 들어오는데 안대를 하고 나타났다. 녀석이 최대한 얼굴을 돌리고 재빨리 다른 방으로 들어서는 게 수상쩍어 불러서 안대를 벗겨 보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눈과 볼이 보랏빛으로 멍들고 퉁퉁 부어 있는 게 되게 맞은 흔적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혹시 아빠한테 맞았나 싶었다. 용이는 여덟 살 무렵 부모가 이혼하고 줄곧 할아버지와 산다. 대구에서 버스를 운전하던 아빠가 최근 가까이 이사왔지만 함께 살지는 않고 따로 방을 얻어 산다. 그 아빠가 용이 어렸을 때 하도 때려서 몇 년 전만 해도 밤이면 잠자다 말고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오기도 하고 발작증세도 보여 일 년 넘게 약을 꾸준히 먹고 있다. 그렇게 자기를 때린 아빠여도 아빠랑 자는 게 소원이던 용이는 이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아빠한테 가서 잠을 자기도 한다. 그렇게 기대하던 아빠와의 잠자리지만 갔다와서 좋았냐는 물음에는 "그저 그래요"가 전부다. 언젠가 "우리 아빠는 바람둥이예요. 어떤 아줌마랑 살았는데 또 헤어졌대요." 하는 말에 "사람들은 사랑하다가 헤어지기도 하고 그래, 처음 마음이 끝까지 가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은가 봐." 그랬더니 "그럼 백 명 사랑했다가 백 명하고 헤어지고 그런 것도 말이 돼요? 그게 바람둥이지 뭐예요?"하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아빠는 운전으로 돈을 벌어 생활비는 꼭꼭 준다. 동네 언덕배기, 버려진 쇼파에 우두커니 앉아 한나절을 보내는 늙은 할아버지가 그 하나밖에 없는 손주를 챙겨 주신다. "너 맞았지? 누가 때린 거야?" "넘어졌어요." 큰 눈에 약간의 웃음기까지 띈 채 참 쉽게도 말을 한다. 누가 믿을까. 이젠 선생들이 아픈 애를 혼내기까지 하면서 채근했다. 결국 누구에겐가 맞았다는 대답을 얻어내긴 했는데 때린 애 얼굴은 알아도 이름은 모르고, 됐다고 괜찮다고만 하는 것이다. 전날, 그러니까 일요일 급식 먹고 수박 한쪽을 들고 놀이터에 있었는데 또래 아이가 발로 수박을 떨어뜨려 욕을 했다가 그 애 친구한테 맞았단다. 혹시나 해서 웃옷을 들춰보니 옆구리도 퍼렇게 멍이 들고 부었는데 축구화로 여러 차례 맞았다고 한다. 저는 한 대도 때리지 않고 욕만 했다고 하는데 속으로 '태권도까지 배우는 녀석이 그렇게 맞고만 있냐' 했다가 '그래 차라리 맞는 게 낫다, 남을 때릴 줄 모르는 게 낫지' 했다. 때린 아이는 이리저리 수소문하면 찾을 수 있을 것 같고 급한 건 하루가 지나도록 아무 치료도 받지 못한 상처였다. 자원 나온 대학생 선생한테 부탁해 병원으로 보냈다. 그리곤 중학교 언니들이 '한번 밟으러' 학교로 찾아온다고 했다고 전화한 혜지를 데리러 수업시간 끝날 무렵에 맞춰 애들이 다니는 학교로 갔다. 간 김에 6학년 여자 애들을 모두 다 데리고 왔다. 오면서 용이 얘기를 꺼냈더니 마침 난희가 그 자리에 있어서 때린 아이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애 집은 아무도 몰랐다. 몇 시간만에 돌아온 용이는 옆구리는 아무 이상 없고, 눈 아래에는 선지덩어리처럼 피가 고여 있어서 당분간 약을 먹고 시간이 좀 지난 뒤 피를 뽑아내야 한다고 했다. 시간이 좀 흘렀나. 집에 간다고 한 애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때린 애와 중2 언니가 성당 마당에 있다고 말하며 "우리가 말했다고 하면 안돼요." 한다. 성당으로 갔다. 뭐 별다른 게 있을까. 저가 한 방 날린 주먹에 용이 얼굴이 어떻게 됐나 보여 주고, 또 용이 마음에 얼룩져 있을 상처를 한 번 생각해보자는 거지. 아프면서도 태권도장에 간 용이를 아이들 시켜 데려오게 해서 때린 애에게 보여주었다. 저도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겠지. 애 주먹을 보니 한방으로 너끈히 그 모습을 만들만 했다. 덩치가 아주 큰 건 아니지만 어깨까지 걷어올린 반 팔 옷에 드러난 팔이 운동을 좀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나보다 까마득하게 어린애를 앞에 두고도 뭐라고 혼내야 할지 아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 지 막막했다. 아이 손과 팔에 난 붉은 반점이 눈에 띄었다. "피부병이에요. 병원에 갔다왔어요." "용이가 너한테 맞고 어디가 아팠겠냐?" "얼굴이요." "에이, 얼굴이야 며칠 지나면 나을 거고, 쟤 마음이 아프지 않겠냐?" 아이는 알 듯 모를 듯 하는 얼굴이다. 어쨌든 부모와 연락해서 이 사실을 알리고, 치료비와 더불어 용이 할아버지께 사과인사라도 하게 하려고 집을 물으니 현대아파트라고 한다. 현대아파트는 좀 떨어진 동네고 그쪽으로는 꽤 값나가는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그쪽 동네에서는 같은 동이라도 우리 아이들이 사는 동네나 학교를 많이 얕잡아보고 있다. 속으로 잘 사는 집 애구나 했더니 할머니, 큰아버지, 큰어머니랑 산다고 한다. '이건 좀 이상한데', 어쨌든 호수와 전화번호를 적고 돌아가라고 했다. 밤에 큰아버지라는 사람과 통화를 했는데 기가 막혔다. 얘는 3월에 가출한 애였다. 애 엄마는 애 어릴 적에 가출했고, 2년 전에 애 아버지가 죽어 불쌍해서 큰집에서 거두고 있었는데 3월에 돈을 훔쳐 나갔다는 것이다. 그전에도 가출한 적이 여러 번 있는데 어디서 봤다는 소리가 들리면 찾아 서 데려다 놓으면 나가고 하더니 돈을 훔쳐 나가 이제는 찾지도 않는단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 선생이고 누구고 다 두 손 두 발 든 애고, 하는 짓이 어른들 상상력을 뛰어넘는 애다, 얘 때문에 걸려오는 전화만도 한 두 통이 아니고 내일 당장 전화번호를 갈아버릴 거다, 경찰에 집어넣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고 우리는 찾아가지 않을 것이니 그런 줄 알라고 하는데 전화선 너머로 부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피를 뽑고 온 날 용이는 하염없이 울었다. 손으로 피고름을 짜낸 게 아파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용이를 때린 그 애는 이 집 저 집 친구 집에서 자기도 하고, 공사장 빈터에서 자기도 하는 것 같다. 구주택 사는 애들 중에는 집에 어른이 없는 일이 많아서 잠자리를 얻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또 집을 나와 지낸 시간이 벌써 넉 달이 넘으니 얘 나름대로 사는 방법을 마련했겠지. 언젠가 놀이터에서 보니 축구화 끈을 풀어 새로 매는데 그 모습이 마치 전장에 나가는 전사 모습이다. 하나하나 팽팽하게 줄을 잡아당겨 탁탁 묶고는 놀이터 철망을 훌쩍 뛰어넘는데 그 모습이 외로워 보였다. 또 어느 비 오는 아침에는 아이들이 학교 가고 없을 시간에 힘없는 우산을 쓰고 친구 하나와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아는 척을 하자 못 들은 척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다. 엊저녁은 어디서 잤을까, 아침은 먹은 걸까, 아이 앞에 놓인 길은 대체 지뢰가 몇 개쯤 숨겨져 있을까. 휘뚤휘뚤한 길이든, 쭉 뻗은 길이든, 앞으로 가든 에돌든 우리는 모두 간다. 영이의 눈물 영이가 기운 없는 얼굴로 왔다. 벌써 며칠 아파서 학교에도 안 갔다. 아이들은 좀만 아파도 조퇴와 결석을 아주 쉽게 한다. 가끔씩은 늦게 일어나 지각할 것 같으면 아예 학교에 가지 않는다. 어쩌다 한 번 까는 땡땡이가 아니다. 때로는 속으로 "그래 그런 배짱도 있어야지 니들 참 멋지다" 하다가도 기를 쓰고 뭘 해보려고 하지 않고 쉽게 포기하는 것 같아 화가 나기도 한다. 영이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니 실컷 울고 싶은 얼굴이다. 공부방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 있냐?" 말을 꺼내자 기다렸다는 듯 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엄마가 너무 힘들어해요." "왜?" "아빠가 바람 펴서요." 밤새 눈물로 잠 못 이루는 엄마를 옆에서 본 영이는 그 엄마가 마음 아파 어쩔 줄을 모른다. 볕 좋은 날, 일없는 엄마 아빠는 좁은 방에 있고, 그 방에 차 있을 한숨과 습기와 뭔지 모를 공기에 영이는 집밖으로 나왔다. 글씨도 잘 안 보이고 머리가 아프다는 영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영이는 6학년이지만 또래보다 두 살 위다. 조선족 아이인 영이는 2년 전 중국에서 건너와 두 학년 아래로 들어갔다. 아직까지도 구구단은 중국말로 해야 셈이 된다. 어릴 적 경찰관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영이 엄마는 중국에 자식들을 놔두고 서울로 와 돈을 벌면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게 6년 전이다. 중국에서 웬만큼 교육을 받은 영이 엄마는 얼굴도 곱고 말할 때도 진지했다. 아파트 전세 얻을 만큼 돈이 있었는데 새 남편이 사업한다고 다 말아먹어 여기 구주택까지 왔다. 엄마가 한국에 와 있는 동안 영이는 고아원에 있었다고 한다. 그게 걸렸을까. 영이 엄마는 영이에게 군것질할 돈을 꼭꼭 챙겨주고, 영이는 그 돈으로 학교 앞 문방구에서 백원 짜리 과자며 사탕이며 하드며 하여튼 백원 짜리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잔뜩 사 온다. 중국에서는 바람 피는 남편 때문에 골머리 썩는 일이 없는지 영이 엄마는 서울 와서 이런 일을 처음 겪으며 마음살을 앓는다. 주변 여자들 말을 들어보면 한국남자들 다 그러니까 그냥 참고 살라는 말뿐. 이 동네는 바람도 쉽게 많이 분다. 하여튼 영이가 아버지 핸드폰에 자주 찍히는 번호를 확인해보니까 어떤 여자가 있었나보다. 그 일로 영이는 새아버지에게 '열나게 뚜드려' 맞고, 이제 아버지가 아니라 아저씨라고 부를 거라 한다. 제발 엄마가 이혼했으면 좋겠다고, 엄마랑 둘이서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영이는 말하지만, 다시 중국으로 가기도 쉽지 않고,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여기가 낯선 엄마는 쉽게 남자를 버리지 못한다. 한국에 올 때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생활을 꿈꿨을 텐데 … 가끔 중국에서 누가 오면 선물로 가져온 사탕과 껍질째 소금과 향신료를 넣어 까맣게 튀긴 호박씨와 해바라기씨를 가져온다. 영이는 제대로 까먹지 못하는 애들한테 순식간에 까서 입에 넣어준다. 중국에서는 집에서 그걸 자주 해먹는다고 한다. 중국보다 여기가 '당연히' 좋다고 하는데, 그 모든 걸 다 떠나서 엄마와 함께 있어서가 아닐까. 아직 중국에 있는 오빠가 보고 싶다는 영이. 그 오빠 걱정에 밤마다 잠 못 드는 영이 엄마. 모델이 돼 돈 많이 벌어 엄마, 오빠와 함께 살고 싶다는 영이의 꿈. 옛날부터 아이들은 돈 많이 버는 꿈을 꾸었고, 지금도 꾼다. 영종이 엄마 아빠의 외출 햇볕 따가운 6월 아침. 쉰을 얼마 안 남긴 한 노동자가 길을 나선다. 깨끗하게 빤 미색 위아래 옷을 입고 그 뒤로 까만 위아래 나일론 옷을 입은, 남자 몸보다 두 배나 더 살이 부른 여자가 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일까, 육교 좌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무늬 손수건을 폈다 접었다 손가락에 두르르 말았다 하며 따라간다. 몇 년간 반복된 생활이 드디어 접히려나. 서른 다섯 살 나주 노총각, 홀어머니는 우리가 보살필 테니 서울 올라가 처녀 하나 꿰차고 오라던 동네 사람들 말에 떠밀려 고향 떠나 서울 어느 공단 공장 기숙사에 머물며 기계를 잡았다. 건너건너 서른 두 살 여자를 만났는데 이 여자, 스물 일곱이라 속이며 기숙사에도 찾아오는 열성으로 한 짝이 되었다. 술집 나가는 것도 다 이해해 주었고 결혼도 못할 뻔했던 처녀에게 이 정도면 감지덕지. 애 낳고 일 다니며 살면 되겠지 했는데, 십 년 넘는 공장 생활에도 여전히 보증금 백만 원에 월세 십만 원을 내는 집에서 산다. 죄다 모아놓은 월급명세표, 땀 흘린 노동은 사라지고, 오늘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 환시에 시달리는 여자를 데리고 공부방 선생과 정신병원을 찾아간다. 나아지겠지, 나아지겠지 하며 참아온 시간, 오히려 여자의 병을 어쩌지 못하고 방치해 온 시간, 이제 얼마 동안 여자는 남편과 아들딸과 헤어져 자신과 싸우는 시간 속에 파묻혀야 할 것이다. 술 먹은 상태로 돈 빌리고 술 먹은 상태로 돈 갚느라 얼마나 빌렸는지도 모르고 갚아도 안 받았다 하니 사방에 빚을 깔아 남편 야간 날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누군가 자기를 잡으러 올 것 같다는 여자. 순진하고 여려 감당할 수 없으면서도 남 부탁은 다 들어줘 이만 원이 오십만 원 되고 백만 원 되는 사채업자들 속임에 넘어가 이제 아무한테도 솔직하게 얘기할 수 없는 여자. 그 여자, 술만 먹으면 온 집안 살림 부수고, 칼 들고 죽겠다고 하고, 이 세상에 아무 미련 없어요, 눈물 뚝뚝 흘리며, 이제 남편이 이혼한대요, 저 갈 곳이 없어요, 저 초등학교 3학년 때 새엄마가 들어와 구박 많이 받았어요, 중학교도 못 다니고 식모살이 다니면서 나중에 아이 낳으면 먹고 싶은 거 맘껏 사주고 싶었어요, 아이처럼 또박또박 한 음절에 울음 하나씩 끼워 넣더니, 햇볕 따가운 오늘 남편 뒤로 선생 옆으로 고개 숙이고 병원에 간다. 어떤 시간이 그를 만들었을까. 그가 건너온 시간들은 그의 모습을 어떻게 변하게 했을까. 여자를 만나기 전에도 들판에서 일을 했고, 여자를 만날 때도 노동자였고 지금도 노동자인 아마 이후에도 그대로 노동자일 남자는 어떤 시간들을 만났을까. 아직도 글씨를 몰라 혼자 전철도 탈 수 없는 이 노동자에게 파업, 노동자, 연대, 권리, 노동자세상, 노동조합, 동료 … 이런 말들은 어떻게 비쳤을까? 사람이란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의 모습, 그 뒤로 길게 늘여진 그림자처럼 저마다 살아온 길과 모습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 길들이 존중받는 것. 그게 우리의 꿈들 아니었을까. 몇 년 전 놀이터 모래밭에 세 살 배기 하나가 혼자 놀고 있다. 깨진 병 쪼가리도 주워 놀고, 하드 막대를 모래성에 꽂기도 하고, 딴 애한테 시비를 걸기도 한다. 얼굴과 옷에 땟국이 줄줄 흐르고 바지도 엉덩이에 걸쳐져 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애와 함께 나왔을 법한 사람은 없다. 어쩜 혼자 저리 잘 놀까. 쟤 엄마도 대범하다. 혼자 놀게 하고. 그 이후로 한 살씩 한 살씩 더 먹은 아이는 자전거를 끌고 다녔고, 동네에서뿐만 아니라 시장 어귀에서도 마주칠 수 있었다. 혼자 잘 노는 아이구나. 엄마가 편하겠네. 다시 놀이터에서 아이를 본 건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올 해. 또래보다 훨씬 작아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리라는 건 상상도 못했다. 놀이터에서 또 혼자 잘 논다. 놀다가 덩치 큰 아이가 달려와 때린다. 자기 돈을 훔쳐갔다는 거다. 그래도 때리면 안 된다고 하니 아이들이 다 모여들어 그 아이가 한 짓을 죄다 까놓는다. 다시 공부방, 그 아이가 왔다. 워낙 혼자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아이가 공부방에 잘 있을까 싶지만 밥이라도 챙겨 먹이자고 받아들였는데 딱 하루 나오고는 더 이상 오지 않는다. 가끔씩 멀리 떨어진 동네에서 마주친다. 아이 아빠는 동네 조그만 봉제공장 재단사로 밤 10시가 넘어야 들어오고, 엄마는 조선족인데 아파서 몇 년 전 중국에 가고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랬구나, 아이 엄마가 대범해서가 아니었다. 아이는 아무도 돌보아줄 수 없었던 거다. 혼자 씩씩하게 잘 놀고 큰다 했더니, 과일수레에서 눈 깜짝할 새에 방울토마토 한 알 짚을 수 있을 만큼 민첩해졌고, 얻어맞더라도 애들 돈을 슬쩍 할 수 있게 되었고, 밤늦도록 이 길 저 길 다니며 혼자 시간을 보내는 법을 알게도 되었다. 혼자 놀고 혼자 길을 가는 꾀죄죄한 어떤 아이에게, 식당에서 거리에서 땀을 비오듯 쏟고 있을 어떤 사람, 길거리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을 어떤 사람에게, 아니 그 어떤 사람이더라도 눈길 마주치고 옷깃 스칠 때 행여 그 사람, 고통 속에 잠겨 있을지 모르니, 잠시라도 내 것, 내 아이, 내 가족, 내 고통에서 비껴 나올 일이다. 마음이 가난한 아이들에게 희망이 있기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