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事故교회에 대처하는 법) 빌2: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20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2:21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 니라 2: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24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람보>라는 영화를 보면 근육질의 남자가 나와 월남전에서 포로된 미군을 구하기 위해 종황무진 활약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전쟁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본부의 지시를 받지 않고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 부대가 있다면 당장 군법회의에 넘겨질 것입니다. 또 도저히 적을 격퇴시킬 수 없을 때는 빨리 본부에 보고하고 도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경우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안에 문제가 있는데도 자존심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혼자서 해결하려다 어려움을 키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영 컨설팅 회사가 왜 있겠습니까? 어려운 문제를 전문가에게 맡겨 도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자기들끼리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시간이나 돈이 훨씬 절약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생겼을때는 성경적으로 해결해야하는데, 교인들 스스로 성경을 잘 모를뿐 아니라 감정적인 앙금이 있어서 시야가 좁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보다 성숙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로지 신앙 때문에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런데 복잡한 이유들로 신뢰 관계가 깨지면 그때부터는 관계를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유리 병처럼 한번 금이 생기면 좀처럼 원래 상태로 회복되기 힘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사랑한다는 것이 왜 이렇게 힘이 들까요? 그 이유는 믿는 사람들이 서로를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서로에 대해 천사처럼 완전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인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위에는 갈등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수습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깨지고 여러 사람들이 상처입은 채로 교회를 떠납니다. 잊지 마십시오 교회는 천사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성장하다 보면 반드시 아픔이나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바람에 문제가 됩니다. 공동체 안에 얼마든지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 사는 동네는 어디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여기에 따라서 공동체가 깨어질 수도 있고 치유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피고 있는 본문의 빌립보 교회는 분쟁 중에 있는 교회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이런 사랑 넘치는 편지를 쓰고 있는 것도 이런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아픔을 큰 상처없이 해결하려면 바른 權威가 있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바른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각자 자기 소견대로 해 버리면 그 때는 사사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사시대의 특징이 뭐죠?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무식한 사람이 자기 주관을 뚜렷히 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문제를 가장 지혜롭게 해결하는 길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감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은혜에 반대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바른 복음의 선포야말로 상처를 최소화하면서 교회 문제를 수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분쟁중에 있는 교회는 가장 복음적인 사람을 초청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미움이 없어지고 분노대신 눈물이 흐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연례행사로 부흥회를 하는 것같습니다. 우리는 아직 한 번도 못했는데 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흥회를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기 대신 디모데를 보내겠다고 말합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가 분쟁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派가 나뉘어 갈등을 겪고있는 빌립보 교회는 사고교회였습니다.
교회는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는데 한마음으로 일치한다는 것은 현실상 매우어려습니다. 같이 한 기준을 놓고 거기에 맞춰갈 뿐이지 아마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맞춰가며 사는거지 완전히 하나가 된다는 것은 죄된 속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계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사탄이 그것을 막으려 하는데 문제가 생기기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사탄은 보통 교활한 것이 아닙니다. 항상 교회의 치명적인 문제를 파고들어 분열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려합니다. 그래서 늘 문제가 생기는 교회가 어쩌면 건강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사탄도 아무 일도 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갈등이나 어려움을 어떻게 지헤롭게 해결해 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최초로 등장한 자주 장사 루디아는 돈많은 부자였고 열심이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귀신들린 여자 노예가 나오는데. 그가 예수를 믿었다는 말은 없지만 바울이 귀신을 쫒아내 주었으니 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 바울이 갇혔던 감옥의 간수장이 있습니다. 감옥문이 열리자 죄수가 도망친 줄 알고 자살하려는 그를 바울이 말렸고 그의 온 가족이 에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간수는 일종의 관리 출신입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빌립보 교회의 구성원은 옷장수 부자 여인, 점치던 여자 노예, 간수 출신 관리로 이루어졌습니다.
외국에 있는 한인교회는 주로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여행사나 음식점을 하는 교민들로 형편이 어려운 편입니다. 둘째는 상사 주재원들인데 그야말로 귀족들입니다. 사는 집도 좋고 골프가 취미입니다. 셋째는 유학생인데 비록 가난하지만 지적인 자부심만은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자 이런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한 몸처럼 만든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 일것입니다. 사건이라도 하나 터지면 불씨가 되어 온 교회를 삼키려 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끼리 신뢰가 깨지면 서로 얼굴도 보기 싫어집니다. 물론 교리적으로 큰 문제가 아니어도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원망이 생길 때 당사들끼리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한 때 빌립보 교회에는 에바브로디도 같은 훌륭한 사역자가 있었지만 지금 그는 로마에 와 있고 바울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달리 적합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에 대해 가장 크게 오해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믿는 사람은 거의 聖者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신앙없는 사람보다 더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보면 크게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못하기 때문에, 아니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도저히 제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목사를 세우신 것도 다 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오히려 더 죄인인 자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나타내십니다. 우리 모두는 만들어지고 또 변화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적인 기준의 잣대를 들이밀게 됩니다. 자신은 언제나 잘못하면서 다른 사람은 절대 실수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오늘날 교회는 오히려 문제가 적은 편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기 때문에 부딪힐 기회가 적기 때문입니다. 가장 어려운 경우가 신앙있는 직장이나 선교단체에서 일하는 경우입니다. 매일 보는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얼마나 그를 불신하고 정죄하게 되는 지 모릅니다. 예배 때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찬송하는 사람이 자기를 노예처럼 부려먹을 때 속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건강한 교회는 문제가 없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크고 작은 갈등이나 불만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것을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물론 그런 갈등은 찻잔 속의 태풍이어야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되어 온 교회를 삼켜서는 안됩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모이기는 모여도 상당히 불편한 관계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불편함이 밖으로 불거져 나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 입장이라 직접 갈 수도 없고 대신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보내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9절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즉 디모데를 보내는 것은 사사로운 목적이 아니라 교회를 바로 세우는 주님의 일을 위해 공적으로 보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덪붙이기를 20절에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뜻을 같이한다’는 것은 바울과 생각이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갈등가운데서 누가 옳고 그르냐를 떠나 교회가 은혜롭게 다시 연합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즉 디모데가 가장 공정하게 그들의 문제를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며, 디모데가 바울 자신의 뜻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디모데를 천거하는 이유를 22절에서 말하고 있는데 22절 다같이 2: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디모데가 지금까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마치 자식이 아비에게 함과같이 바울을 위해 수고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디모데는 바울이 복음을 전한 지역에 어떤 어려움이 생기면 마치 바울의 친자식이나 되는 것처럼 그곳에 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붙들어 주는 일을 전문적으로 해왔습니다. 바울에게는 영적이 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디모데인데요.. 바울이 여러 곳에 복음을 전하고 난 후 모든 교회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못할 때 그 때마다 바울은 디모데를 해결사로 보냈습니다.
바울은 다른 유명한 사람들보다 실제적으로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디모데가 적격이라고 말합니다.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바울은 그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말합니다. 딤후2장3-4절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2: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군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분쟁이 있는 곳에 투입되어 싸움을 끝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인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면 안됩니다. 언제든 어려운 곳에 투입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군인은 자기 것이 없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명령이 떨어지면 투입될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부르신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열어놓고 자기것 없이 주님이 명하시는 곳으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일종의 해병대나 공수부대입니다. 디모데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총사령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라면 그곳이 아골골짜기라도 광야라도 언제든지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예수의 좋은 군사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으든 적합한 鍊匠이 있습니다. 집을 수리하는 데 드라이버를 사용해야 할 때가 있고 펜치를 사용해야 할 때가 있고 망치를 사용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다양한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을 준비시킵니다. 디모데는 어떤 사람이기에 주님이 쓰시는 사람입니까? 그는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수고를 아까지 않을 사람입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일단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양 쪽을 설득해 합의점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많은 변화를 겪습니다. 어릴 때는 너무 약해서 감기에 걸리거나 설사를 하면 몸이 축나게 되어있습니다. 그 때 열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열을 잘못 처리하면 신체마비가 올 수도 있고 눈이나 귀가 먹을수도 있습니다. 아이가 좀 자라면 밖으로 나가서 길을 잃어버리거나 다쳐서 돌아오는 일이 왕왕 있습니다. 좀 더 자라면 고집이 세져 부모 말을 듣지 않고 투정하거나 떼쓰기 시작합니다.
교회도 아이가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온전히 성장하기 까지는 많은 변화를 경헙하게 됩니다. 교회가 세워진지 얼마되지 않을 때는 멤버 쉽이 약해서 교회 자체가 해체되기 쉽습니다.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교인들이 있다해도 워낙 약해서 조금만 불만이 생겨도 뛰쳐나가기 때문에 늘 불안합니다. 잘 양육했다고 생각한 사람이 별것 아닌 일에 시험이 들어 넘어지는데, 그냥 혼자서도 아니고 여러 사람들도 함께 걸려 넘어지는 법입니다.
때로는 은사문제로 교회가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특히 신비주의 바람이 불면 교회는 치명상을 입습니다. 신비주의는 교회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과 직통하려는 경향입니다. 신비주의 병에 걸리면 무식한 것이 용감하다고 목사도 무시하고 교인도 무시하고, 또 자신은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해 상처입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신비의 체험이 없다고 무시당해 상처를 입고 하여간 이 바람이 불면 교회는 상처투성이가 됩니다.
그래서 마태 사도는 교회가 治理權을 인정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결정에 불복하면 개인적으로 찾아가 권면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함께 찾아가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서 결정하고 이방인으로 취급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정말 다양한 성장과정과 기질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만 결코 천사가 아닙니다. 여전히 죄성을 가진 죄인들입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주님을 섬긴다 해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정죄하여 자기만 나타내려는 교만이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기준을 절대시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확신을 가지고 있어도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생각하고 좀 더 시간을 두고 기도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기도해도 안되면 그때는 금식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씀으로 자라고 말씀으로 다스려지게 되어있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결국은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처음에는 생각과 행동이 달라도 결국 배운대로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디모데가 빌립보 교회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아마도 그들의 갈등이 진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교회 성장과정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임을 납득시켰을 것입니다. 또 서로 완전한 것을 요구하는 것도 교만이며 자신이 부족한 만큼 상대방도 부족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설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잠시라도 성령이 고갈되면 다른 사람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편집증적 증세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입에서 원망과 불평이 많아지면 영혼이 고갈되었구나 깨닫고 다른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러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것같은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성장한다는 것은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자기를 죽일 수 있고 얼마나 다른 사람과의 신뢰 관계를 잘 맺느냐 입니다. 얼마나 죄를 이길 수 있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느냐가 성정의 촉도입니다. 따라서 무엇인가 남이 모르는 것을 배웠다고 우쭐대거나 그것으로 남을 판단한다면 그는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것암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을 하나되게 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한번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느새 죽었던 옛 기질이 다시 살아나 나를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주장으로 자신을 복종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혼자서 믿는 것은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부딪치고 그곳에서 자신을 복종시킬 때 믿음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말은 내 인격의 모든 부분을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의 뜻에 철저하게 얽매이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디모데와 같은 믿음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높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