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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제16구간 산행기(이화령에서 하늘재까지)
1. 산행전
6월 26일 오후 3시경 박기양, 박상호, 안상경, 유선만, 조규연, 조제방 회원(6명)은 川獵을 하기 위해 박사장의 시골 집(연풍)으로 먼저 가고 김명자, 김재윤, 박봉하, 이용준, 이태인(5명) 회원은 이태인 총무님의 승합차를 이용하여 9시 20분 경 경기대 후문에서 출발하여 박사장의 고향집으로 향했다. 고단했던 탓인지 차를 타자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밤 11시, 박사장 고향집. 먼저 온 팀이 우리를 반기며 매운탕에 막걸리 잔을 내민다. 출출하던 참이라 단숨에 두 공기를 비웠다. 매운탕 맛이 일품이다.
6월 27일
5시 밖에서 떠드는 소리, 박사장, 유교감, 박기양교감 언제 일어났는지 김치 볶음밥으로 김말이를 하여 오늘의 점심을 준비하고 있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된장 우거지 국으로 아침 식사. 식사 후 곧 바로 오늘 山行의 出發地 梨花嶺으로 향했다.
2. 사람과 마을·文化를 이어 준 고갯길
높고 험한 산맥이 가로막고 있음은 서로의 往來가 없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山脈으로 막혀있다 하더라도 길은 열리고 文化는 서로 往來하기 마련. 아무리 거대한 산이 땅을 가른다 하더라도 그 산을 넘으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있는 법이다. 양쪽의 문화가 서로 왕래하기 쉬운 곳을 골라 또는 능선이 낮아져 넘어 다니기 편한 곳을 택해 길을 낸다. 이 길이 산맥을 넘을 때 ‘재’라 한다. 재는 분수령일 때 영(嶺)이라 하며 작은 재를 치(峙)또는 현(峴)이라 한다. 남한 쪽의 백두대간에는 모두 72개의 고갯길이 있다. 이중 47개는 포장도로이고 25개는 비포장길이다.
속리산을 거쳐 소백산에 이른 대간의 혈맥은 문경권 내에 대미산과 포암산을 비롯해 부봉, 조령산, 백화산, 희양산, 대야산 등 수많은 산자락을 빚어 山國을 이룬다. 그 산자락에 자리한 세 개의 고개는 백두대간을 관통하며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다. 그 중 하나는 고구려의 불교문화가 신라로 처음 전해지던 길목인 계립령(하늘재)이며, 다른 하나는 조선시대 영남과 그 북쪽을 잇는 영남대로의 길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고간 조령이며, 또다른 하나는 신국도 3호선이 뚫려 새로운 교통로로 부각된 이화령이다.
< 현대불교 제177호, 1996. 6. 10 중에서 >
3. 嶺南의 關門 梨花嶺
梨花嶺에 도착한 것이 아침 5시 40분 경, 날이 훤하게 밝아 이화령 頂上의 休憩所 모습과 嶺아래로 길게 뻗은 터널 길이 보인다. 길 건너 문경 쪽에는 嶺南의 關門 慶尙北道라 새겨진 거대한 碑石과 鳥嶺山 山行圖가 그려진 게시판이 있다.
오늘은 이화령을 시작으로 나는 새도 쉬어 간다는 조령과 하늘재 까지 큰 嶺을 세 개나 接하는 山行을 하게 된다.
4. 새들도 쉬어 넘는 조령산
鳥嶺山 頂上이 1017m고 梨花嶺이 548m니 469m만 오르면 오늘 山行 중 가장 높은 峯을 점령하게 된다.
등산화 끈을 단단히 졸라매고 대간 길을 따라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여 크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날씨가 섭하고(흐림) 그동안 충분한 연습을 하지 않은 탓인지 금새 온 몸이 땀으로 젖고 숨도 가빠지며 가슴이 저려온다. 아마도 오늘 산행을 고생 좀 할 것 같다.
열심히 땀을 훔치고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곳이 『鳥嶺샘』 백두대간 길에 이런 샘을 만나기는 좀처럼 드문 일이다. 준비된 쪽박으로 물을 받아 마시니 열기가 금방 가시는 것 같다. 後尾 팀을 기다리며 담아 온 물을 버리고 조령샘물로 물통을 다시 채웠다.
10여분 뒤에 박기양, 박상호 대원 도착.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고 잠시 쉬었다 오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다시 선두 팀 출발. 구름이 잔뜩 끼고 안개로 덮여 주변 景觀을 살필 수 없어 아쉽기는 했지만 직사광선을 피할 수 있는 것은 다행 이었다.
7시 25분 경 鳥嶺山(1017m) 정상 도착. 잠시 휴식. 박기양, 박상호 대원도 이어 도착했다. 鳥嶺山 標識石 글씨가 희미하여 매직펜으로 진하게 칠하고 단체 사진 촬영. 이 사진이 단체로 찍는 것으로는 마지막일지 모른다. 산 정상부터 3관문(문경새재)까지는 매우 위험한 구간으로 주위를 촉구하는 안내판이 있고 방향 표지판 기둥에는 모 대학 산악인을 추모하는 글귀가 선명했다.
산행 길이 바빠 단체 사진 촬영으로 休息을 끝내고 다시 출발. 땀 먹은 모자 창끝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덜어진다. 점점 山勢가 險해지고 巖盤으로 이루어진 산들이 눈앞에 전개된다.
바위 틈새로 자란 소나무가 모진 風霜에도 그 푸르름을 잃지 않고 버티고 서 있는 것은 千軍萬馬를 호령하는 장군의 氣象이요 忠臣의 節槪를 表象 하는 것 같다. 거대한 암반과 바위, 그리고 바위 틈 사이로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나무와 줄 하나를 의지하고 오르기를 내리며 엎드리고 기기를 거듭하면서 도착한 곳이 神仙岩峰을 지나 923봉에 도착. 잠시 휴식하며 眺望.
우리가 앉아 있는 맞은 쪽에는 7∼80도 경사를 이룬 巖壁이 있고 절리 사이로 뿌리를 내리고 선 나무들이 암벽과 조화를 이룬 것이 한 폭의 동양화다.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며 경관을 구경하는 사이 후미 팀 도착. 줄을 잡고 岩峰을 오르는 대원들의 사진 한 장 찰칵. 잠시 숨을 가다듬는 동안 김명자선생님 누렇게 잘 익은 참외를 내 놓는다. 출출한 참이라 한입 베어 물고 삼키니 입안에 감도는 단맛은 꿀맛 그대로다.
먼저 출발한 조규연 부장, 危險 地域을 알리는 소리. 조망과 휴식을 끝내고 출발. 조금 가니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
두 개의 큰 바위 사이는 사람이 겨우 드나들 만한데 한 바위는 높은 벽을 이루고 있고 건너 쪽 바위는 두 개가 포개져 있는데 그 사이로 한 사람이 겨우 기어나갈 만큼의 틈을 이루고 있다. 바위 중간으로 난 틈에 한 발을 버티고 포개진 바위 난간을 잡고 몸을 돌려 나가거나 아니면 포개진 바위 사이로 기어나가는 수밖에 없다. 마땅히 잡을 곳이 없어 더 난감했다. 안상경교감선생님이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하였다. 먼저 건너간 김재윤과장님이 몇 번이고 건너가는 요령을 일러주었으나 자신이 서지 않는 모양이다. 뒤따르던 내가 먼저 건너고 안교감선생님은 준비해 온 밧줄을 이용하여 겨우 위험 구간을 벗어날 수가 있었다.
間間이 피어 있는 진주홍 산나리 꽃은 산행길 동무 해 주고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불어오는 바람 따라 흔들리는 이름 모를 하얀 꽃은 우리의 안전 산행을 빌어주는 것 같아 정겹기만 하다.
神仙岩峰을 지나 칼능선 돌길을 앉고 기며 매달리고 당기면서 겨우 도착한 곳이 깃대봉 쯤 되나보다. 산 아래고 문경새재 길이 훤히 보이고 배도 고파온다. 3관문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으나 金剛山도 食後景이라 했으니 우선 먹고 볼일이다. 아침에 싸온 김치볶음 말이 김밥의 맛이 一品이다. 밤잠 못 자고 만들어준 박사장, 박교감, 유교감 감사, 감사---- .
고단한 다리를 움직여 조령재 3관문 휴게소에 도착. 12시를 좀 넘긴 시간이다. 먼저 온 대원(유선만, 이용준, 이태인, 조재방) 점심을 먹은 후 느긋하게 平床에 앉아 도착하는 우리를 반긴다.
우선 조령샘물 한 쪽박으로 목을 축이고 찬물에 얼굴을 씻으니 정신이 번쩍 든다. 점심. 후미 3사람이 도착하지 않음. 3관문 배경으로 단체 산진 촬영. 후미 팀은 이곳에서 下山 할 것이므로 빨리 오후 산행을 하자고 서둔다. 오후 산행 5시간. 무리가 아닐까. 下山 해야하나. 그래도 지금까지 빠지지 않고 잘 버텨 왔는데. 葛藤이 생긴다.
후미 팀(김명자, 박기양, 박상호)이 도착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예정보다 1시간 이상 지체되어 하산 할 김재윤회장님과 안상경교감선생님 남겨 두고 6명은 (박봉하, 유선만, 이용준, 이태인, 조규연, 조재방) 서둘러 산행 채비를 하고 마패봉(927m)을 오르기 시작했다.
5. 아물지 못한 落落長松의 傷痕
오전 산행의 피로가 덜 풀린 탓도 있지만 급경사로 오르기가 너무 힘이 들어 몇 번이고 되돌아 가고싶은 생각이 든다. 땀을 닦고 훔치며 마폐봉(마역봉, 927m) 정상에 올라 주저앉고 말았다.
조령은 삼국시대 때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산 능선을 따라 성이 계속 이어져 있다. 저 많은 돌들을 어디서 날라 왔으며 또 어떻게 운반을 했는가. 지난해 太祖 王建이 KBS에서 방영되어 전 국민의 눈과 귀와 시간을 집중시켰는데 地勢로 보아 조령관문의 死守가 國運을 左右할 만큼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임을 오늘 산행을 통해서 확인을 할 수 있었고 힘들여 성을 쌓은 연유를 알 것 같다.
마폐봉(마역봉) 급경사 길을 내려와 북암문 갈림길, 동암문 갈림길을 지나 부봉(916m)에 이르는 길은 다소 높낮이는 심하더라도 흙을 밟을 수 있는 평탄한 길이다. 계속 城을 따라 길이 나 있고 아름드리 소나무와 참나무가 줄줄이 이어져 있다. 그런데 소나무마다 동네 장승이 큰 입을 벌리고 시꺼먼 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은 상처가 나 있다. 소나무 껍질을 반쯤 벗기고 V자 형으로 톱질을 하여 송진을 採取를 한 흔적이다. 아마도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소행이라 짐작된다. 그로 보면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그 상처가 아물지 못한 것은 억압받은 민족의 아픔이 응어리로 남은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부봉 직전 갈림길을 지나 959봉으로 향했다. 險路는 아니었으나 줄을 잡고 지나는 곳이 한군데 있었고 오전 산행과는 달리 평탄한 길이였지만 氣力이 消盡하고 배도 고파왔다. 959봉에서 잠시 휴식. 조재방사장이 꺼내놓은 가래떡과 물 한 모금으로 허기를 면했다.
부봉 직전 갈림길을 지나면서 유선만 교감과 연락 두절, 지나가는 몇 사람에게 물어봐도 본 사람이 없고 깊은 산중이라 휴대전화도 통화권 이탈이라 길을 잃었는지 아니면 대간 길을 벗어나 부봉으로 향했는지 아니면 우리를 앞질러 계속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걱정이 되었다.
평천재(월항재)를 지나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비 炭項山(856.7m, 월항3봉)에 도착한 것이 5시 쯤. 중도 포기를 몇 번이고 생각했든 산행이라 뿌듯한 마음도 생겼지만 脈도 풀렸다. 유교감의 行先地를 걱정하며 조사장과 먼저 탄항산 출발. 왼 종일 흐린 하늘이 끝내 굵은 빗방울을 토해내고 말았다.
5. 하늘재
우의도 차에 둔 터라. 오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하늘재(525m, 계립령) 도착(5시 20분 경).
우리를 기다리던 안상경, 박기양, 박상호 회원, 두어 평 이동식 가건물로 끌어당긴다. 비가 오는 탓도 있었지만 우리를 위해 마련한 막걸리 한 잔을 먹이고 싶어서였다. 따끈따끈한 삶은 계란에 배추김치를 안주로 마련해 놓았다. 젖은 옷을 가라 입을 겨를도 없이 막걸리 한 잔 쭉 ------. 막걸리의 도수보다 더 뜨거운 情感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유교감은 부봉을 거쳐 제3관문에 가 있단다. 이용준, 이태인, 조규연 대원이 도착하여 막걸리 한 잔을 권하고 박사장은 곧바로 김명자, 박기양, 안상경 교감과 함께 3관문으로 떠나고 우리도 젖은 옷을 갈아입고 彌勒里로 떠났다. 길이 협소하고 비포장이며 돌 자갈 길. 20여분을 조심조심 차를 몰아 미륵리 도착. 차창 밖으로 미륵사지의 3층 석탑과 彌勒像을 확인만하고 명산가든으로 향했다.
♣♣♣ 읽으면 지루하고 안 읽으면 궁금한 것 ♣♣♣
[1] 梨花嶺
경상북도 문경시(聞慶市)와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의 경계에 있는 고개고개. 높이 548m. 소백산맥의 조령산과 갈미봉과의 사이에 있다. 동쪽 사면은 조령천(鳥嶺川), 서쪽 사면은 연풍천(延豊川)의 하곡으로 이어진다. 그 이전에는 국도가 새재[鳥嶺]로 통하는 험난한 산로(山路)뿐이었으나, 신국도 3호선이 이화령을 통과함으로써 주변지역에서 생산되는 양잠·엽연초 등 특용작물의 수송도로로 이용된다. 충청북도의 충주권(忠州圈)과 경상북도 북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탈바꿈하여 옛 조령에 이어 새로운 교통요충지가 되었다. 이 고개 밑으로 이화령터널이 개통되었다.
[2] 문경새재[鳥嶺]
[2/1] 조령(鳥嶺 : 새재)
문경새재는 옛날 영동의 추풍령, 단양의 죽령과 더불어 백두대간을 넘나드는 3개의 고개 중 으뜸으로 칠 만큼 중요한 교통로이다.
과거를 보러 한양길에 오르던 선비들의 한양 과거 길이었고 조선초기에는 관료들과 양반들만이 넘나들 수 있던 고급 길이었기에 지체 낮은 서민들이 꼭 한번 걸어 보고 싶은 동경의 길이었으며 신립장군이 이곳에서 왜군을 막지 못해 한을 남긴 곳이기도 하며, 근세에 들어서 반봉건 반 외세의 민중항쟁이 치열했던 격전의 장이며, 더불어 천주교 박해로 수많은 신도들이 넘어야 했던 한 많은 길이다.
총 길이 10km인 새재는 외침에 대비하여 세 개의 관문을 두었으며 그 중 제 2관문인 조곡관이 제일 먼저 세워졌다. 옛날의 하늘재 길을 대신하여 조선 태종 때부터 본격적인 관로로 이용되기 시작하여 후에 보부상을 비롯한 서민들이 다녔고 도적들이 기승을 부렸다한다.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폭 1m내의 소로에 불과하였던 것을 잦은 외침의 영향으로 이 곳을 군사적 교통 요충지로 인식하여 총 길이 10km의 새재 내에 선조 27년 제 2관문인 조곡관을 시작으로 세 개의 관문을 두어 남북 통행인 모두를 이를 이용하겠금 하여 관방(關防)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신라 통일기에는 조령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나나 이곳을 지칭하는 지는 알 수 없으며 고려 말 공민왕 때에 육운으로 개통되어 초점(草岾)으로 불리우다가 조선 성종 ~ 중종기에는 이 곳을 조령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본디 명칭인 "새재"를 한자로 표기함에 각기 달리 초점, 조령으로 명시한 것으로 본다.
"새재"란 새롭다는 의미로 옛길에 대하여 새로난 길이라는 뜻에서, 또 새가 날다가 쉬어 갈만큼 험준한 고개라 하여 새재라 칭하였다는 설이 있다.
새재 주변으로 삼관문 위 봉우리인 마폐봉과 멀리 월악산을 잇는 대간능선상에는 문경새재 외에 하늘재, 한훤령, 지릅재, 계립령과 같이 오래 전부터 대간을 넘는 고갯길이 발달되어 왔다. 이들의 명칭과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 아직도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만큼 명확하게 정리되지 못한 상태이나 하늘재는 충주시 미륵리와 문경시 관음리를 연결하는 포암산과 월항삼봉 사이의 고개로 삼국시대 신라가 최초로 개척한 길이다. 한훤령이라고도 부르는 하늘재는 조령의 개통과 더불어 쇠퇴하였으며 계립령은 그 위치가 모연하나 대개 하늘재를 일컫는 다른 말로 인식되고는 있으나 항간의 속설에 의하면 충주시 사문리와 미륵리를 잇는 오늘날의 마패봉 아래 지릅재를 일컫는다고도 한다.
[2/2] 鳥嶺關門의 築造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上草里) 소백산맥 조령(鳥嶺)에 있는 조선시대의 관문. 사적 제 147호. 제1·제2·제3관문 및 부속성벽이다. 옛날에 영남에서 서울로 가려면 문경에서 주흘 산(主屹山:1,106 m)을 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신라 때는 주흘산의 한 갈래인 대촉산(黛蜀山) 을 넘어 계립령(鷄立嶺)으로 다녔고 조선 전기부터는 조령이 개척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남 으로써 이곳에 중국의 산해관(山海關)과 같은 방위시설을 축조해야 한다는 논의를 낳았다. 현지 실측(實測)이 시행되고, 1594년(선조 27)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구체적 방안을 제시 하였다. 충주 사람으로 수문장(守門將) 출신인 신충원(辛忠元)이 조정의 결정에 앞서 조령에 머물면서 단독으로 설관(設關)에 착수하였다. 그가 이루어놓은 첫번째 시설이 지금의 중성 (中城)이다. 중성은 1708년(숙종 34) 크게 중창(重創)되었는데, 이것이 곧 제2관문이다. 숙종 때 제2관문에서 3 km 떨어진 곳의 남적(南賊)을 방비할 제1관문을 세우고 초곡성(草谷城:主屹關)이라 하였다. 이들은 1890년대에 다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육축(陸築)에는 홍예문(紅霓門)을 열고, 성벽에는 총구멍이 있는 성가퀴를 돌리고, 한쪽에 큼직한 수구문(水口門) 을 뚫었다. 숙종 때 조령재 위에 북적(北賊)을 막기 위하여 조령산성(鳥嶺山城)을 쌓았다. 이것이 곧 제3관문으로 현재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위치한다. 제3관문은 육축만 남겨 놓은 채 불타버려 1977년 복원하였다. 제1·제2·제3관문은 양쪽 산의 골짜기에 위치하며 관문 좌우의 성벽은 능선을 따라 우회한다. 높은 봉우리 6분선(分線)에서 끝났다가 다음 골짜기에 서 다시 이어져 초곡·중성·조령산성의 성벽을 이룬다. 동화원(桐華院)을 비롯하여 진(鎭) 과 군창(軍倉)의 터가 있고, 경상감사(慶尙監司) 신임·후임자가 서로 교인(交印)했다는 교구정(交龜亭)의 터도 남아 있다.
[2/3] 문경새재 민요비
문경새재 2관문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전되던 문경새재민요를 새겨 놓은 비석이다. 우리 나라 어느 지방을 가더라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듯이 한(恨) 을 주제로 한 이 새재 고개에서 전해 내려오는 민요이다.
-.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께 방망이로 다나간다.
후렴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홍두께 방망이 팔자 좋아 큰애기 손질에 놀아나다.
-. 문경새재 넘어갈 제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2/4] 신립장군의 배수진과 김여물 장군
사적 제 147호인 이 관문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순행차 고사갈이 성을 지날 때 성주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관문은 영남지방 과 서울간의 관문이며 또한 군사적 요새지이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이 중요한 곳이었는데, 고려 초부터는 이곳 초참을 혹은 새재라 하므로, 『조령』이라 이름하여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다.
조선 선조 25년(1592)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유끼나가 가 경주에서 북상해 오는 카토오키요마사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 장군은 이미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하였다. 그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이 오늘날의 제 2관문에 상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여 왜병을 기습하였다.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중의 관문을 완성하였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 1관문을 완성하였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 1관문은 주흘관, 제 2관문을 조동문 혹은 조곡관, 제 2관문을 조령관 이라고 이름 한다.
▣ 조령 방어를 주장한 김여물
① 김여물은 누구인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만 했어도
탄금대 전투와 같은 대패는 없었을 것......
김여물은 순천 사람으로 찰방 김훈의 아들이다. 자는 사수요,호는 파구라 했다. 명종 3년(1548)에 태어났으며 나이 20세에 진사가 되고 선조 10년(157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조낭관으로부터 출발하여 충주도사(都事)가 되었다.
풍채가 준수하여 여럿 가운데 뛰어나서 당시의 호걸로서 그를 앞설 사람이 없었다 했다. 상국 박순기가 나라에 큰 일을 할 인물임을 알고 마음으로 그를 중하게 여기고 알맞는 길로 인도했으며 그를 맞이할 때는 반드시 손님으로 예를 다했다 한다. 추천을 받아 의주목사가 되었다가 이듬해인 임진년 봄에 역인(譯人)의 죄에 연루되어 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는 김여물의 재주와 용맹이 아깝다고 생각하여 옥에 갇혔던 것을 풀어주고 방어가 긴요한 곳에 귀양보내어 공을 세우도록 하였다. 김여물이 출옥하자 유성룡이 불러서 나라의 위급함을 서로 이야기하여 보고는 크게 기특히 여겨 왕에게,
"신이 처음 김여물을 보고 병사를 의논해 보니 무용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났으니 청컨대 막하에 두고 그 계획의 도움을 받게 하소서.."
하고 아뢰니 왕도 그를 허락하였다. 이 때 신임이 도순변사에 임명되고 용약 싸움터로 나아갈 때에 왕에게 또한 아뢰기를 ,
"신이 일찍 서도에 병사로 가 있을 때 여물을 알았는데 단지 재주와 용맹뿐만 아니라 충성과 의리가 있는 선비이니 신의 부하로 임명해 주소서"
하자, 왕이 또한 허락하니 김여물은 유성룡의 막하에서 신립의 부장으로 발탁되었으며 왕은 조정관원에게 명하여 각각 말 한필씩을 내주도록 하였다.
② 김여물은 천험의 요새인 조령에서 매복 작전을 주장.
김여물은 신립과 더불어 길을 재촉하여 4월26일 충주에 도착하였다. 김여물은 조령으로 달려가서 그 형세를 깊이 살펴보고는 신립에게,
"적의 세력은 우리의 몇 배가되니 이들의 銳鋒을 꺾기 힘듭니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군을 막기 위해서는 天險의 要塞인 鳥嶺을 막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군사를 고개 양편에 매복시켰다가 이를 치면 가히 적을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설사 적을 막지 못하더라도 서울까지 퇴각하여 방어할 수 있는 여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 의견을 폈다. 막료들은 대부분 김여물의 의견에 찬성을 하였으나 신립은 고집을 세우고 듣지 아니하였다. 적이 벌써 재를 넘어 28일에는 길을 나누어 크게 밀어 닥쳤다. 김여물은 또한번
"먼저 고지를 점령해서 역습을 합시다"
하고 신립에게 의견을 제시하니 끝내 신립은 듣지 않고 탄금대를 뒤로하고 충주 분지를 향해서 배수의 진을 치기에 이르렀다.
전투가 벌어졌다. 적은 세 방향으로 밀고 들어와 아군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싸움이 처음 어울리면서 아군은 모두 흩어져 장수와 졸병이 겁결에 모두 달래강물에 뛰어들자 적은 칼로 마구 찍어 물에 뜬 아군의 시체가 강을 메웠다.
③ 김여물 그대를 살려 볼까 하오..
...... 어찌 내가 죽음을 아낄 것이라 하시오 ?..
신립은 죽음을 각오한지 오래지만 그의 뜻을 펴보지 못함이 한스러웠다. 그는 김여물을 돌아보며
"그대를 살려 볼까하오.."
하니 김여물은 웃으면서
"어찌 내가 죽음을 아낄 것이라 하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이미 김여물은 패할 것을 알고 아들에게 보낼 편지를 다음과 같이 썼다.
"3도에 근왕하는 군사가 한 삶도 없어 우리가 아무리 불러도 돕는 이가 없구나. 남아가 나라 일에 죽는 것은 직분이거니와 단지 나라의 수치스러움을 씻지 못하고 장한 뜻을 이루지 못함이 한이 된다."
왜군은 미친 물결처럼 한꺼번에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신립은 창황한 가운데 급히 조정에 사세를 알리는 장계를 김여물에게 지으라고 하였다. 김여물은 갑옷과 투구를 쓰고 팔에는 활을 메고 허리에는 전통(箭筒)을 찬 채 붓을 놀리니 싹싹 소리가 났다고 한다.
다 쓰고 붓을 던졌는데 한 자도 틀림이 없으니 군중에서 보는 사람마다 놀라워하였다. 危急과 경황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침착하고 담대하며 마음의 여유가 충만한 인물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김여물은 신립과 더불어 적진으로 돌진하여 좌충우돌 왜병 수십 명을 쳐서 거꾸러뜨리고 돌아와 북쪽을 향해 크게 절을 하고는 탄금대를 끼고 흐르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 때 김여물의 나이 43세였다. 뒤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정조 12년(1788)에 장의(壯毅)라 시호했다.
[3] 탄항산(炭項山)
[3-1] 탄항산이란 옛 고개를 지킨다는 의미의 '수(수)고개', 발음상 '숫고개', '숯고개'로 불리다가 한자로 표시할 때 '숯(炭)'으로 되고, '항(項)' 또한 지키기에 가장 알맞은 곳인 '목'의 한자 표현이다. '목을 지키는 곳에 있는 봉수' 라는 뜻에서 '탄항 봉수' 라고 불리고 '탄항봉수가 있는 산' 이라고 하여 '탄항산' 이라 불린다.
[3-2] 삼국시대부터 조선초까지 가장 큰 길이었던 계립령로를 끼고 봉수대가 있었던 문경시 문경읍 평천리의 탄항산에 새 이정표. 문경 『산들 모임 산악회』는 2002년 11월 3일 탄항산(856.7m) 정상에 아홉 번째로 80㎏짜리 자연석 頂上 標識石을 올렸다.
이 표지석은 문경에서 나는 자연석으로서 탄항산이 소재한 문경읍에 거주하는 김대경씨의 글을 받아 새긴 것으로 산악회 회원 40여명이 힘을 모아 목도로 비탈진 경사를 힘들게 올라 세우게 된 것. 이 산악회는 지금까지 지난 94년부터 백두대간상에 자리한 백화산, 대미산, 문수봉, 장성봉, 주흘영봉, 조항산, 대야산(합동), 문복대 정상에 표지석을 세워 산행객들의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다.
2002년 11월 3일 일요일탄항산은 조선시대 통신수단의 하나였던 봉화를 올리던 ‘탄항봉수’가 있던 산으로 남해에서 올라온 봉화를 역내 호계면 ‘선암봉수’에서 받에 이곳으로 전해오면 여기서는 다시 연풍의 ‘마골점봉수’로 전해 남산까지 가게된다. 또 탄항산 아래에는 삼국시대의 대로였던 계립령(최근 하늘재로 호칭)이 있고, 고갯마루에는 계립령유허비를 세워 놓았으며, 탄항산과 마주보는 포암산 바위산이 있다.
[4] 하늘재
[4/1] 하늘재의 위치와 명칭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연풍면(延豊面) 주진리(周榛里)에서 경상북도 문경시(聞慶市) 가은읍(加恩邑) 원북리(院北里)로 넘어가는 고개의 옛이름. 마골참(麻骨站)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지릅재·지름재·기름재·경태 등으로 불린다. 고구려 온달(溫達)의 말에 <계립령 죽령(竹嶺) 서쪽이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중의 계립령은 이 고개를 가리킨 것으로, 이 고개의 중요성을 짐작하게 한다.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의 재위 중에 이 고개를 통해 충주(忠州)에 이르는 도로를 만들었다.
계립령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지만 현재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와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를 연결하는 하늘재로 보는 곳이 통설이다. 계립령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라 아달라왕 2년(156)이지만, 그 이전부터 한반도의 남북을 연결하는 경제·문화의 교류지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계립령 또는 이곳을 통과하는 계립령로가 역사의 중심무대로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시대에 계립령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대요, 군사적인 요충지였고 불교문화의 유입로가 되었다.
신라는 553년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계립령로를 정비하여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말하는 계립령로는 경주에서 계립령을 통해서 한산주(서울) 북쪽까지 이어지는 교통로를 말한다. 신라시대 백두대간을 통과하는 교통로는 지나가는 고개에 따라서 경유지, 방향, 기능 등이 분화되고 있다. 따라서 고개의 이름을 붙여서 교통로를 부르는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1) 『삼국사기』에도 계립령로, 죽령로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문경의 고대사를 역사·지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하여 신라시대 계립령로와 계립령의 역사적 의미와 그 기능을 몇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註 1)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육상 교통로에 대하여 북해통(北海通), 염지통(鹽池通), 북요통(北요通), 해남통(海南通), 동해통(東海通) 등의 명칭이 보이고 있다. 이것을 통칭하여 `오통(五通)'이라고 하는데, 통일신라시대 경주에서 사방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부르는 용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오통의 노선과 방향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공식적인 명칭으로 부르기 어렵다.
[4/2]‘계립령’, 그 이름의 변화
계립령은 시대와 국가에 따라서 계립현, 마목현, 마골산, 마골점, 대원령, 한훤령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도 불려왔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중 <아달라왕 2년조>에는 계립령(鷄立嶺)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온달전>에는 계립현(鷄立峴)으로 기록되어 고구려와 신라에서 각각 다르게 표기하였던 것 같다. 계(鷄)자나 계(계)자가 음과 뜻이 같고, 영(嶺)과 현(峴)이 모두 고개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둘은 글자만 다를 뿐 같은 의미이다. 고구려나 신라 모두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읽는 이두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같은 의미지만 다르게 표시될 수 있다.
아마도 신라에서는 주로 계립령(계立嶺)으로, 고구려에서는 계립현(鷄立峴)으로 불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마목현(麻木峴)이라고도 불렀던 것 같다. 『삼국사기』의 <김유신전>에 실린 연개소문의 말 중에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은 본시 우리의 땅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는 마목현은 계립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온달(590년대)은 계립현과 죽령을 고구려의 영토라 하였고, 연개소문(642년)은 마목현과 죽령을 고구려의 땅이라 하였으므로 두 사람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계립령을 가리켜 온달은 계립현이라 하였고, 연개소문은 마목현이라 하였다.
왜 국가와 시대에 따라 계립령, 계립현, 마목현 등 각각 다르게 표기되었을까? 이 문제를 살펴보려면 조선시대 기록이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참고가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충청도 연풍조>에는 계립현(계立峴)은 속칭 마골점(麻骨岾)이라고도 한다고 하였고, <경상도 문경조>에는 “계립령은 속칭 마골산(麻骨山)으로, 방언으로 서로 같은 의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계립현과 마골점이 같은 것이고 계립령과 마골산이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모두 방언으로 저름재, 지릅재, 겨릅재 등으로 불렸다. 계립(계立), 계립(鷄立), 마목(麻木), 마골(麻骨) 등은 모두 이름이 저름, 지릅, 겨릅 등의 방언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고, 영(嶺), 현(峴), 점(岾·山) 등은 재라는 방언을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즉 모두 우리말을 이두식으로 표현하는 데에서 다양한 명칭이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저름재라는 우리말에서 음을 딴 것이 ‘계립령’이고, 뜻을 딴 것이 마목(麻木,麻骨)현이라고 하겠다. 신라에서는 주로 음을 따서 계립령이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처음에는 계립현이라고 음을 따서 부르다가 이 지역을 상실한 후 뜻을 딴 새로운 표현인 마목현이 등장하였고, 이것이 후대까지 남아서 마골산, 마골점 등으로 불렀던 것이다.
충청도에서 계립령으로 오르는 입구가 되는 충주시 상모면 미륵사지에서 `대원사주지(大院寺住持)'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 되었다. 이 기와는 고려 명종 22년(1192)에 만들어졌다. 1192년경에는 현재의 미륵리사지를 대원사라고 불렀던 것이다.
미륵리사지를 대원사라고 불렀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고려 초에 개창된 사찰 가운데에는 끝에 사(寺)자가 아니라 원(院)자로 끝나는 이름을 가졌던 절이 많이 있다. 원래 원은 숙박시설로 역로 등 요충지에 설치되어 여행자나 상인에게 숙박, 휴식, 식사 등을 제공하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에 등장하여 고려시대 이후 크게 성행하였다. 주로 명칭에 불교와 관련된 이름이 많아서 모두 절에서 운영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절에서 원을 설치한 목적은 불교의 자비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병자의 치료와 빈민구제사업을 실시하기 위한 것이다. 나중에는 이익사업에도 나서서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원이 언제부터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왕권이 약화되고 사방에서 호족이 일어난 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추정된다. 국가의 공식적인 역제가 붕괴됨에 따라서 절에서 시설한 원이 그 기능을 대체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 초기 일부 원은 국가에서 설립한 후 이를 사찰에 위탁하여 경영한 경우도 있다. 미륵리사지를 발굴 조사한 결과, 말그림이 새겨진 기와(이 기와는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와 함께 고려시대 대규모 원터가 발굴되었다. 이곳도 교통의 요지였던 만큼, 국가에서 원을 세운 후 이를 사찰에 위탁하여 경영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륵리 원터는 절 입구에서 하늘재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대원사란 절 이름은 원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대원사는 절과 원이 복합되어 있는 사원(寺院)인 것이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대원(大院)이 있는 고개’란 의미로 계립령이 ‘대원령’으로 불렸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조령(새재)이 개척되자 대원령은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게 되었다. 조령이 언제부터 개척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강원도 영월에 있는 ‘흥녕사징효대사보인탑비(興寧寺澄曉大師寶印塔碑)’에 의하면 진성여왕 5년(891) 징효대사가 상주 남쪽으로 피난을 가다가 조령에 잠시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 계립령이란 이름이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조령은 지금의 조령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옛 조령원 터에 발굴 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토기편과 고려시대의 온돌구조가 출토되었다. 그 터가 통일신라시대부터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 조령보다는 계립령이 주로 이용되었고 계립령로에 원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려시대 불교 유적도 계립령로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다.(고려시대 계립령 변에는 관음리사지, 미륵리사지, 덕주사, 월광사, 사자빈신사지 등의 사찰이 있었다.) 여러 가지 사실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계립령이 조령에 비하여 활발하게 이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계립령보다 조령이 주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였다. 태종대에 영남지방의 조운(漕運)을 육로로 대체하면서였다.(태종실록 권5, 태종 3년 6월 신해조) 이때 조령은 초점(草岾)이란 명칭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새재’란 우리말을 한자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새재는 ‘새로운 고개’란 우리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새재는 대원령에 비하면 `새로운 고개'가 되는 셈이다.
이것이 한자로 기록할 때 `새'는 조(鳥)나 초(草)로 표기하고, 고개는 영(嶺)이나 점(岾) 등으로 표기하여 조령 또는 초점 등이 되었던 것이다. 조령이 개발되면서 상대적으로 대원령은 점차 사용되지 못하고 쇠퇴되어 갔다.(『동국지리지』신라형승 관방조, “계립령은 아달라왕 3년에 개통되었는데 지금 문경에 있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고 조령이 열리었다”) 이후 대원령이란 명칭도 사라지고 “하늘에 닿을세라 높은 재”라고 하여 `한단령' 또는 `하늘재'라 불렀다.
결국 계립령은 국가와 시대에 따라서 이름이 변화되었다. 신라시대에는 계립령으로 불렸고, 고구려 때에는 계립현, 마목현 등으로 불렸다. 주로 우리말을 한자로 어떻게 표기하는가에 따라서 이름이 달라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대원이 있어서 대원령이라 불리다가 조선시대에는 대원이 폐쇄되고 통행도 뜸해지면서 한단령, 하늘재 등으로 이름이 변화되었다.
[4/3] 계립령·계립령로의 개척시기
계립령이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아달라왕 3년(156)이다.(계립령은 신라가 진출하기 이전부터 한강유역과 낙동강유역을 연결하는 육상 교통로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진한에 속하였던 여러 소국이 계립령을 통하여 한강유역이나 낙랑·대방 등 군현세력과 교류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진한이나 변한지역 여러 소국들과 낙랑과의 교류는 주로 해로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육상 교통로도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삼국지』의「동이전」한조에 인용된`위략(魏略)'의 기록 가운데 염사치(廉斯치) 설화이다. 염사치는 1세기경 진한의 우거수(右渠帥)로 낙랑에 항복했다는 인물인데, 그가 진한에서 낙랑으로 간 길은 해로가 아니라 육상 교통로를 이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한에서 낙랑으로 가는 길은 대간길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염사치가 지나갔던 고갯길로 계립령이나 죽령이 주목된다. 『삼국사기』의「신라본기」에도 신라 초기에 낙랑이 침입했던 사실이 여러 군데 보이고 있다. 진한의 소국은 해로뿐만 아니라 육로를 통하여 낙랑과 교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1세기경에 죽령이나 계립령을 통하여 육로로 낙랑에 이르는 길이 열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진한 소국들이 계립령을 통하여 낙랑과 교역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실증해 줄 수 있는 자료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실제 계립령이 사료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156년이다.) 즉 “4월에 계립령로를 열었다”란 기록이다. 또한 아달라왕 5년(158)에는 “죽령을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들은 백두대간 서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개척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되어 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라는 2세기 중엽에 계립령과 죽령 일대까지 세력을 확대한 것이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계립령을 어디를 볼 것인가는 사람에 따라 약간의 다른 견해도 있지만 대부분 문경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백두대간 고개를 말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계립령을 현재의 하늘재가 아니라 조령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기록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신라의 국가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이때 신라가 문경이나 풍기지역에 진출하였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삼국지』의「동이전」에 의하면 3세기 후반까지 한반도 중·남부 지역은 마한,진한,변한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신라는 진한에 속해 있는 12개 소국 중 하나였다. 진한의 범위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오늘날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중 울산과 양산 일대가 속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는 이때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한 작은 나라였다. 나라이름도 ‘사로’‘사라’‘서라벌’ 등 여러 가진로 불렸다.(`신라'라는 국호가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지증왕 때이다. 그 이전에는 여러 가지로 불렀으므로 6세기 이전에는 신라라고 하기 어렵지만 여기에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모두 신라라고 표기한다.)
이 경주평야의 작은 나라가 문경지역에 있었던 계립령을 차지했다고 믿기 어렵다. 경주에서 문경 사이에는 골벌국(영천), 압독국(경산), 다벌국(대구), 소문국(의성), 감문국(김천,선산), 사벌국(상주) 등 신라와 세력과 규모가 비슷한 여러 나라가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가 계립령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중간에 있는 여러 나라를 정복하여 영토를 넓히거나 굴복시켜서 그 세력권 아래 두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신라가 문경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소국을 굴복시키고 상주지역까지 진출한 것은 3세기 중엽이었다. 즉 신라는 185년 소문국, 231년 감문국, 247~261년 사이에는 사벌국 일대에 진출하였다. 따라서 신라의 국가발전 과정을 고려하면 156년에 계립령로를 개척하였다는 『삼국사기』기록은 믿기 어렵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것을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면서도 이보다 나중에 있었던 일을 시대를 올려서 기록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나중에 신라에 복속되었던 소국이 계립령로를 개척했던 사실을 마치 신라가 한 것처럼 기록하였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밖에 신라가 진한 소국을 대표하여 계립령을 통하여 대외교역을 주도했던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는 시각도 있다. 새로운 자료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그 중 어느 견해가 타당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신라가 2세기 중반에 계립령에 진출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삼국사기』기록을 믿을 때 신라가 계립령에 처음 진출했던 것은 빨라야 3세기 중엽이다. 사벌국을 복속시키고 문경까지 신라의 세력권에 포함시켰을 가능성이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신라가 사벌국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경주 - 경산 - 대구 - 선산 등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는 교통로르 이용했을 것이다. 또한 계립령까지 진출했다면 상주에서 문경을 거쳐서 계립령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가 경주에서 계립령에 이르는 교통로를 군사적인 용도로 개척하였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완전히 통제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소국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남아 있었고, 때로는 반기를 들기도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매우 불완전한 복속상태가 계속되었고, 이 같은 상태는 지역에 따라서 다소 차이는 있지만 5세기까지 지속되었다.(3세기 이후 신라가 군주·성주 등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하였던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4~5세기까지는 소국의 정치세력이 독자성을 유지했다고 보는 것이 대세이다.)
따라서 3세기 중엽, 신라가 상주나 문경지역에 진출하였다 하더라도 계립령로를 군사 진출을 위해서 활용하는 단계일 뿐이다. 이를 신라의 관도(관도는 신라의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도로를 말한다.)에 편입하여 중간중간에 역(驛)을 세우고 관장하게 된 것은 5세기 후반에 가서야 가능하였다.
일반적으로 고대국가의 교통로는 대외진출을 위하여 일부러 개척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선사시대 이래 사람들의 왕래에 의한 자연적으로 발생된 교통로를 군사 진출이나 지방 지배를 위하여 국가의 통제하에 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도로도 확대하고 교통의 편의를 위한 역의 설치나 관리의 파견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진한의 소국들은 소국 내부를 연결하는 지역 교통망을 확보하고 있었고, 교역을 위하여 소국과 소국을 연결하는 광역 교통로도 있었다. 신라가 계립령로를 개척하는 과정도 이전에 없던 길을 새로 만든 것이 아니다. 기존에 있었던 소국 단위의 지역 교통로를 광역 단위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경주에서 계립령을 거쳐서 한강 유역으로 나가는 교통로를 정치·군사·경제·문화적 목적에서 활용하려는 의지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었다. 이 같은 노력이 완성되어 신라가 계립령로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 것은 5세기 후반이다.
[4/4] 5~6세기 신라·고구려의 전쟁과 계립령
신라와 고구려가 계립령을 국방상 요충지로 주목하고 계립령로를 차지하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항쟁하게 된 것은 5세기 고구려의 남하와 관련된다. 고구려는 5세기경 충주에 남진기지로 국원성을 설치하고 계립령과 죽령을 통하여 영남지방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다. 죽령 이남의 경상북도 북부 지역을 일시적으로 고구려 세력권에 포함되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경상북도에 고구려 지명은 순흥, 봉화 등 죽령 이남과 울진, 영덕 등 동해안 일대에 남아 있다.
영주는 백제의내이군(奈已郡)이라 하였으나 인근이 고구려의 군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오기로 추정된다.) 이에 비하여 계립령 이남 지역은 고구려의 세력이 미쳤다고 볼 수 있는 자료가 없다. 충주에서 계립령을 거쳐서 문경 - 상주로 통하는 길이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지름길이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상주 지방으로 나가기 위하여 계립령로를 우회하여 추풍령 방면을 통과하려고 하였다.
고구려는 494년 살수지원(薩水之原, 괴산군 청천)에서 신라군을 폐퇴시키고 견아성(犬牙城)을 포위하였다가 백제의 원군이 도착하자 철수하였다.(『삼국사기』권3, 「신라본기」3, 소지마립간 16년조) 여기에서 견아성은 보은과 상주 사이에 있었던 성으로 비정된다. 또한 신라는 일선군(선산)에서 사람들을 동원하여 삼년산성(충북 보은), 굴산성(충북 청산) 등을 수축하여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즉, 추풍령 방면에 방어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고구려가 계립령로보다 그 이남의 추풍령로를 남진로로 선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당시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을 결성하여 고구려의 남진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라와 백제의 연결통로는 보은 - 청주 - 천안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고구려는 국원성(충주)에서 출격하여 신라와 백제 사이 교통의 요지가 되는 보은과 청주 일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지리적인 면에서 계립령로는 군사활동에 장애가 되었다. 계립령로는 하늘재(해발 530m)를 분수령으로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계곡을 교통로로 개척한 것이다. 계립령 서쪽은 월천이 흘러서 남한강으로 합류하는데, 계립령 서쪽 미륵리에서 북쪽으로 곡류하여 송계계곡을 지나서 제천시 한수면을 거쳐 남한강에 합류한다.
남쪽은 신북천이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갈평리, 당포리, 고요리 등을 거쳐 흘러서 문경 소재지에서 조령천과 합류하고, 다시 유곡을 지나 점촌, 함창을 거쳐서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하천이 흘러 나가는 좌우는 협곡을 이루고 있고, 그 양 끝은 충주와 점촌이 된다. 점촌에서 충주까지의 거리는 약 50㎞ 이상이고 그 중간 거점이 되는 곳이 문경분지이다.
이 협곡지대가 비교적 통행하기가 쉬워서 교통로로 이용된 것이다. 이 협곡지대를 안전하게 통과하기 위해서는 문경분지를 장악해야 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문경을 장악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계립령로를 이용하여 남진하기가 어려웠다. 전투를 위해서는 공격부대뿐만 아니라 보급부대가 통과해야 하는데 약 50㎞에 달하는 긴 협곡은 특히 보급부대에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계립령로는 고구려에 아주 불리한 지형이지만 신라에는 천연적인 방어선이 되었다.
이같은 이유로 고구려는 계립령로를 활용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대로 6세기 중엽에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할 때에도 계립령로를 활용할 수 없었다. 신라가 문경지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계립령에서 충주에 이르기까지에는 역시 긴 협곡을 통과해야 한다.
더욱이 충주의 남쪽은 계명산, 남산 등 험준한 산이 가로막고 있어 자연적인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어, 이곳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충주 동쪽의 `마즈막재'라고 하는 고갯길을 통과해야 한다. (좁은 의미에서 계립령은 현재의 하늘재 일대를 말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계립령은 마즈막재에서 문경에 이르는 지역, 즉 계립령 동서에 있는 협곡과 고개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마즈막재란 이름은 신라에서 볼 때 계립령의 `마지막 고개'란 의미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에도 그 후에도 남한강이나 달천을 도강해야만 국원성에 도달할 수 있다. 신라도 문경에서 충주까지 진군할 때, 지형이 험난하고 보급로가 길어져서 역습을 당하기 쉽다. 따라서 신라도 추풍령로나 죽령로를 군사 진출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결국 5~6세기 중엽 50㎞에 달하는 계립령 고갯길은 신라와 고구려 어느 나라도 장악하지 못한 완충지대로 남아 있었다.
때문에 계립령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7세기까지 이 같은 인식이 남아 있어서, 고구려는 계립령 서쪽을 원래 고구려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7세기에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한 이유는 바로 계립령과 죽령 서쪽 지역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신라에 빼았긴 실지를 회복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삼국사기』「지리지」에도 반영되어 죽령과 계립령 서쪽을 `원래 고구려의 땅'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 지역은 `원래 백제의 땅'이었다고 해야 정확하다.)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한 후 계립령로는 신라의 가장 중요한 교통로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시기는 대체로 충주에 국원소경을 설치하고 경주의 귀족과 부호를 옮겨 살게 하였던 557년경부터이다. 국원소경은 진흥왕이 555년에 한강유역을 돌아보고 나서 새로운 영토를 확인하고 이를 지배하기 위한 구상을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다. 국원소경이 속한 한산주(新州, 남천주, 북한산주)는 군사령부인 정(停)의 이동에 따라 수시로 주(州)의 설치와 폐쇄가 반복되었다. 따라서 한강유역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뒤에서 행정과 보급을 지원하여 줄 수 있는 거점도시가 필요했다.
경주는 한반도의 동북에 치우쳐 있어서 백두대간 서쪽 한강유역을 통솔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이미 지증왕 때에 아시촌소경을 설치하여 백두대간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거점으로 활용했던 경험이 있다. (아시촌소경은 신라의 북진을 지원하기 위하여 지증왕 때에 만들어졌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경북 안강설, 경남 함안설, 경북 의성 안계설 등이 제시되었으나 이 중 의성의 안계설이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안강은 경주와 가까워서 소경 설치의 효과가 의문시되고, 법흥왕 이후에 신라가 진출하였기 때문이다. 안계는 경주에서 계립령과 죽령방면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신라가 백두대간 이서지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국원소경이 설치된 이후 아시촌소경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국원소경의 설치 후 아시촌소경은 폐지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영역이 백두대간 이북으로 확대되자 아시촌소경의 필요성이 희박해졌고, 새로운 소경을 백두대간 서쪽에 설치할 필요가 생겼다.이때 충주지역이 주목되었다. 충주지역은 고구려의 국원성이 있었던 곳으로 도시의 기반시설이 확보되어 있었다. 또한 계립령을 통하여 한강유역과 낙동강유역을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이며, 고대국가의 가장 중요한 경제자원인 철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소경을 설치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국원소경이 한강유역 통치의 거점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경주와 국원소경을 연결하는 도로를 정비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신라의 북진에 이용된 교통로는 죽령로와 추풍령로였지만 이들은 군사도로의 성격이 강했다. 행정·문화적 용도의 새로운 도로가 필요하였다.
이때 계립령로가 주목되었다. 계립령로는 백두대간을 통과하는 고갯길 가운데 가장 평탄하고 경주에서 충주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낙동강 중류의 거점이었던 선산과 한강중류의 거점이었던 충주를 연결하여 두 지역의 자원과 인구를 통합할 수 있는 교통로이기도 하다. 행정적 목적에서 계립령로의 중요성이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신라는 기존에 계립령까지 뻗어 있던 계립령로를 충주까지 연장하게 되었다.
한편 계립령로는 경제적 가치도 컸다. 신라는 한강유역에 진출함으로써 중국으로 통하는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였다. 그렇지만 백제 때문에 서·남해안 해로를 활용할 수 없었다. 신라는 연안 해로를 사용하기 어려웠으므로 국내에서 자원의 이동 및 대외 교역품을 수송하는 데 육상 교통로를 이용해야 했다. 그런데 이 문제점의 상당부분은 계립령로가 해결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계립령 부근 약 50㎞를 육상으로 연결하게 되면 낙동강과 한강의 수로가 서로 연결될 수 있었다. 신라는 해로를 사용할 수 없는 대신 국토를 관통하는 내륙 수로를 가지게 되었다. 계립령로가 추풍령로나 죽령로에 비하여 경제적 가치가 큰 것은 바로 이 점이다.
[4/5] 불교문화 전파와 계립령
계립령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으로 상호 항쟁하던 곳이었지만, 양국을 연결하는 문화의 통로로 이용되었다.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불교를 도입하는데 계립령로가 그 통로로 이용되었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의하면 눌지왕 때 고구려 승려 묵호자가 일선군 모례의 집에 들어와서 포교를 한 것이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시초라고 한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의「선산도호부」<불우조(佛宇條)>에 의한면 묵호자가 선산에 이르러 도개부곡(道開部曲)의 모례의 집에 토굴을 파고 전파를 하였고, 후일 아도(阿道)가 3인을 데리고 다시 모례의 집에 도착하여 시종 3인이 머물면서 경률을 강술하였더니 믿는 자가 있었는데 아도가 냉산(冷山) 아래에 이르러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절을 지어 도리사(桃李寺)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도개부곡의 도개(道開)는 불도(佛道)를 열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곳은 현재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이다. 현재 모례의 집과 우물로 추정되는 유적이 남아 있고 이와 관련된 전설도 있다. 또한 지금도 선산군 해평면 송곡동 냉산 정상에는 도리사가 있고, 아도화상사적비(阿度和尙事蹟碑,1639년) 등 관련 유물이 남아 있다.
이상과 같은 기록, 전설, 유물 등으로 보아서 선산이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파된 곳으로 보인다. 모례의 집이 신라 최초의 불교 전달지가 되고, 냉산의 도리사는 아도에 의해서 창건된 신라 최초의 사찰이 된다. 그렇다면 묵호자나 아도가 일선군에 오게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그 답은 계립령로와 선산지역의 관련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도개부락이 있는 도개면은 현재 선산군 소재지 북동쪽 낙동강 건너편쪽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은 의성군과 접하고 동쪽은 군위군과 접하며 남쪽은 해평면과 접하고 있다. 이곳은 계립령로의 거점지역으로 낙동강을 도강하기 위한 요충지이다. 도개면의 북쪽에는 낙동도(洛東渡)가 있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영남대로가 통과하던 나루터이다. 현재도 상주에서 칠곡을 거쳐서 대구로 통하는 도로가 통과하고 있다.
신라 소지왕대에 선산에서 3천명의 역부를 징발하여 보은의 삼년산성을 수축하였던 사실이 있다. 아마도 5세기 후반에 일선지역은 상당한 인구와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소지왕은 선산지역을 두 차례 순행하여 이 지역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신라가 선산에서 역부를 징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간접적이나마 호구 파악도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선산지역은 자비왕대부터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한 거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신라의 북진 발전에 있어서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소지왕 때에는 신라의 관도와 우역이 정비되었는데 이때 선산을 거쳐서 문경으로 통하는 계립령로 및 선산에서 보은으로 통하는 추풍령로 등도 정비되었다. 따라서 선산은 신라에서 가장 중요한 교통로 두 개가 나누어지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또한 정치·군사적 거점이며 인구가 집중된 곳이었다.
선산은 고구려 승려들이 계립령을 넘을 때 처음 도달하는, 상당한 인구와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대도시였고, 군사적 요충지이며, 교통의 요지였던 것이다. 사료를 살펴보면 묵호자와 아도뿐만 아니라 더 많은 수의 고구려 승려들이 선산지역에 들어온 것 같다. 『해동고승전』에 인용된 <고기(古記)>에는 묵호자 이전에도 고구려 승 정방(正方)이나 멸구빈(滅垢玭) 등이 등장하고 있다.
<고득상시사(高得相詩史)>에도 아도가 두 번 죽임을 당하고도 신통력으로 살아나 다시 모례의 집에 숨었다고 한다. 묵호자나 아도가 오기 이전은 물론이고 이들이 순교한 이후에도 파상적으로 다른 고구려 승려가 모례의 집으로 왔던 것이다. 그들의 목적지가 경주였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묵호자가 경주까지 갔던 것으로 보아 최종 목적지는 경주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불교를 배척하고 있었고 고구려 승려 대부분이 선산에 머물렀기 때문에 처음부터 선산지역이 그들의 목적지였다고도 볼 수 있다. 모례의 집은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될 무렵 고구려 승려들의 거점, 즉 절터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에서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선산지역에 이르게 되었을까? 이들이 모두 고구려 승려였기 때문에 출발지는 고구려 땅일 것이다.그런데 삼국시대의 불교는 지배층 중심의 불교였기 때문에 수도나 그 주변지역 또는 수도에 버금가는 지방도시에서 유행하였다. 대부분 삼국시대의 불교유적도 수도와 그 주변에서 보이고 있다. 고구려는 5세기에 충주에 국원성을 설치하였다. 국원성은 고구려의 별도(別都)로 군사적 기능뿐 아니라 문화적 기능을 가진 도시로 추정되고 있다.
충주에는 고구려의 불교문화가 유입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봉황리마애불' `건흥 5년명 불상광배' 등 고구려 계통의 불교유적과 유물이 그 영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같은 이유로 고구려 승려들의 출발지로 주목되는 곳은 바로 충주지역이다.
또한 충주에서 선산으로 통하는 교통로는 계립령로였다. 고구려 승려들은 충주에서 출발하거나, 평양에서 충주를 거쳐서 계립령로를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선산에 머무르게 된 것이다. 이들이 신라에서 고구려로 돌아가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신라와 고구려는 계립령을 중심으로 정치·군사적으로 대결하였지만 계립령로를 통한 문화적인 교류는 전쟁기간에도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계립령로는 신라에 불교문화를 도입하는데 공헌한 것뿐만 아니라, 신라의 불교문화를 백두대간 서쪽으로 확산시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신라의 불교는 8세기경까지는 주로 경주와 그 주변지역에서 유행하였으나 9세기에는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우선 영남지역에 몇 개의 거점을 형성하고 팔량치, 육십령, 추풍령, 계립령, 죽령 등 백두대간의 여러 고갯길을 거쳐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 중 계립령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곳이 팔공산, 선산, 상주지역 등이다. 이들 지역이 계립령로를 통하여 충주, 원주일대로 신라의 불교문화를 확산하는 문화적 거점이 되었다.
계립령 일대에는 이와 관련하여 월광사지가 주목된다. 월광사지는 9세기경에 창건되었는데 문경에서 계립령을 넘어서 충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계립령로를 통한 통일신라의 불교문화 전파경로를 살필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인 셈이다. 이후에도 계립령로는 고려시대에도 불교문화의 확산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관음리사지, 미륵리사지, 덕주사지, 사자빈신사지 등 다수의 고려시대 사찰이 계립령 주변에 있다. 이는 고려시대 불교문화의 전파에 있어서 계립령과 계립령로의 역할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자료는 문경시에서 발간한 「문경의 길과 고개, 길위의 역사 고개의 문화」라는 연구서에서 발췌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2002년 문경새재박물관 조사연구총서⑦)]
[5] 미륵사지
딱히 기록이 없으니 미륵사지의 창건에 관한 전설은 장님이 만지는 코끼리의 생김처럼 들쭉날쭉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덕주사(德周寺)는 월악산 아래 있는데 항간에 전하기를 덕주부인이 절을 세워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야기는 살이 붙어 북행 길에 오른 신라의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이 곳에 이르러 각각 미륵리 불상과 덕주사 마애여래불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되었다. 훗날 연구가 거듭되어 미륵사지는 대략 10세기 무렵에, 덕주사 마애여래불은 11세 무렵의 제작으로 추정되자 새롭게 등장한 전설이 왕건의 제작 운운이다. 나라를 통일한 왕건이 장차 백두산과 만주를 염원하는 뜻에서 지금의 미륵사지를 조성했다는 추론이다. 거기에는 으레 풍수를 매우 좋아했던 왕건과 천심십도혈(天心十道穴)의 천하명당 미륵리 절터와의 관계가 부연된다.
http://www.angangi.com/hanul.htm
[6] 포암산 하늘재
문경읍에서 국도를 벗어나 도자기의 향리 관음리로 향하고 가다 보면, 왼편으로 주흘산, 오른 편으로 포암산을 두고 완만한 경사길을 달려 올라 간다.
불과 수년 전에 깨끗이 포장된 도로는 막바지 하늘재에서 포장이 끊긴다. 하늘재 부터는 차량통행이 되지 않는다.
전해져 오는 전설이야 꼭이 믿을 수야 없겠지만, 마의태자의 일행이 지났다는 미륵사로 이어지는 보행길은 욱어진 수풀 한적한 적막에 싸여 그 옛날 슬픈 사연을 속삭여 주는 듯 하다.
이 곳 하늘재에는 역사의 현장답게 현지 답사를 하려는 학생들, 유적 답사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신라의 멸망을 믿을 수 없던 태자는 고려에의 투항을 거역하고 따르는 신하들과 여동생 덕주공주를 대동하고 멀고도 험한 고난의 길을 자초하고 나섰단다.
고달픈 그들의 행로에 여기가 얼마나 높고 힘 들었어야 하늘재로 불렀을까?
여기서 그들은 울분을 삼키고 월악산 품속으로 안겨 들어가 항려(伉儷)의 불씨를 당긴다.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하면서 수년의 세월을 오로지 조국재건의 꿈을 이루려 애 썼건만 그들의 힘은 신생 고려의 거대한 군사력 앞에선 초라할 수밖에 없었겠지.
태자는 월악을 버리고 떠나야 했다. 그러나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태자를 따르지 못하는 덕주공주는 눈물을 삼키며 태자를 떠나 보내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삭발하고 승려가 된다. 그 자리에 덕주사가 세워졌고 슬픈 사연도 함께 묻었다는 것이다. (현재는 아랫쪽에 새로운 덕주사가 세워지고 불사가 진행되고 있다)
대웅전에 들어가 향불 하나 꽂아 놓고 경건한 마음으로 전설의 주인공들에게 명복을 빌어 본다. 뜰 앞에 곱게 깔린 자갈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노을에 아름답게 물들어있다.
▣▣▣ 월악산 노랫말의 한 구절 ▣▣▣
금강산 천리먼길
흘러가는 저구름아~~
마의태자 덕주공주 한많은 사연
너는 아느냐~
하늘도 부끄러워
짚신에 삿갓쓰고 걸어온 하늘재를~
월악산아 월악산아 말좀해다오
그님의 소식을~~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자료 올려주셔서 잘 읽었고요 수고하셨습니다 헌데! 주문이 있습니다 여행을 가기위해선 아니 공부를 잘하기 위해선 예습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산행하기전에 올려주셨으면 더욱더 좋을듯 합니다 더더욱 보람된 7월달 만들어 가시길.... 달리고 싶은아우
아쉽게 저에 고향구간이 다 지나갔군요.대접이 소홀함에도 불구 .....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