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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반반창회-괴산방문기
일시:
장소: 충민사(김시민 장군 묘소)-훈제오리 점심-문경 새재(제1관문-제2관문)-화양계곡송시열 유적지(화양서원과 만동묘)-명신펜션에서 바비큐만찬과 함께 앗사!노래방
참석:
4반-
손님들-
모두 25명
특기사항
1 괴산경찰서 직원들이 시종(始終) 함께 동행하면서 노래방 도우미까지도 수고를 아끼지 않고 도와주었습니다.
2 후배 동문이 버섯을 선물로 준비해주었습니다.
3 초청한 괴산경찰서장
괴산경찰서앞에서 늠름하게--
조령제1관문을 배경으로
화양계곡 운영담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하여!
陽川閑談
아직도 무지개는 내 마음을 뛰게 한다네
이번 괴산 방문은 괴산경찰서장(槐山警察署長)인
괴산에는 몇 번 와보았지만 항상 평온한 느낌이 든다. 늦여름 오후 따가운 햇빛 아래에서 나른하게 늘어져 마음을 안온(安穩)하게 덮어주는 듯한 그런 평화로운 한때와 같다고나 할까?
관광코스로 잡은 첫 방문지는 각연사(覺淵寺)였으나 출발시간이 조금 지연되어 생략하고 바로 김시민(金時敏)장군 묘소(墓所)인 충민사(忠愍祠)를 방문하였다. 묘소의 풍수에 대하여
문화재해설사 아가씨에게 김시민 장군과 논개의 관계에 대하여 묻는 친구들이 꽤 있었는데 내 느낌으로는 그녀도 확실히는 모르는 듯싶었다. 김시민은 제1차 진주성전투(1592.10)에서 승리한 직후 전사하였고 논개는 제2차 진주성전투(1593.6)에서 전사한
문경 새재로 이동하여 식사를 하였는데 바깥은 아직 앙상한 나뭇가지들이라 활짝 핀 봄은 아니라 해도 이미 봄 날씨처럼 나긋나긋해진 풍광(風光)에 절로 술잔이 오고 가며 얘기꽃을 피우느라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런 탓인지 조령제1관문(鳥嶺第1關門)을 보고 제2관문으로 올라가는 중에 시간이 부족하여 제2관문까지 가는 것은 취소하자는 메시지가 왔지만 몇 번이나 이곳에 왔어도 제1관문밖에 보지 못했다는
굽이굽이 도는 길모퉁이마다 여기만 돌면 관문이 나오겠지 하며 조바심을 내며 마음을 졸였는데 몇 모퉁이를 돌고 나서 관문이 살짝 고개를 내밀어 보여주는 것이 얼마나 반갑던지 꼭 귀중한 보물을 손에 쥔 듯하였다. 이것이야 말로 주마간산(走馬看山)인데다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에게는 너무 미안스러운 일이기는 했어도 그래도 어쨌든 지나는 길목마다 자태를 뽐내던 초절(超絶)의 경색(景色)을 배경으로 증명사진도 다 찍었으니 우리의 밋션은 성공!
조령관문(鳥嶺關門)은 문경관문(聞慶關門)이라 하며 3개의 관문과 부속성벽이 있다하나 모두 숙종조(肅宗朝)에 완성된 것으로 실제 전쟁에 쓰여진 일이 없다.
지형상으로 매우 중요한 전쟁의 요충이라고는 하나 삼국시대 이후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공방전을 벌인 기록은 그다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조령관문이 거론되는 것은 임진왜란 중에 지형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방어선으로 채택되지 못한 것에 있다.
지금 복원되어 있는 관문도 그다지 위압감을 줄 정도의 성곽으로 느껴지지 않는 만큼 그 이전에는 어느 정도 규모의 책성(柵城)을 갖추고 있었을까 궁금하다. 물론 지금 일부 남겨놓은 새재 옛길로 간신히 당시의 상황을 가늠해 볼 수 있듯이 지금의 널찍한 산책로와는 달리 산길 자체가 매우 험악하여 대규모의 성곽을 축조(築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임진왜란이 발발(勃發)하여 신립(申砬)이 왜군을 막기 위해 급거히 남하하여 충주에 도착한 것이
대체적으로 신립이 조령을 포기한 것은 조령에 군사를 배치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는 것과 급히 끌어 모은 잡병들을 매복시켰을 때 도리어 두려움이 가중되어 적병의 머리만 보여도 산산이 흩어질 염려가 컸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능한 지휘관아래 집단군(集團軍)으로 뭉쳐 있으면 오합지중(烏合之衆)으로서도 꽤 싸울만하지만 복병(伏兵)은 잘 훈련된 병사가 아니면 지켜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또 야전을 선택한 배경에는 여진족과 싸울 때의 경험이 깔려 있을 것이다. 여진족과의 싸움은 대체로 작은 규모의 기병전(騎兵戰)이었고 그런 싸움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에 왜군과도 전투도 그런 정도로 머리 속에서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가 거느린 기병은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거느렸던 병력보다 훨씬 큰 병력이었다. 기록에는 기병 8, 9천을 거느렸다고 하였는데 실제 그러하였다면 기병의 숫자에 현혹(眩惑)되어 15,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북상하던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군과 회전(會戰)하여 기병으로 돌파하면 이길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을 했을 개연성(蓋然性)은 충분하다.
하지만 그것은 좀 불확실한 사실로써 군졸확보도 어려운 때에 그만한 기병단이 존재했다는 것을 상상하기 쉽지 않다. 또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제대로 훈련받은 기병들이었는지, 혹은 일부만 기병이 아니었을까 라는 등 여러 가지가 매우 의문스럽다.
그가 탄금대에서의 기병전을 택하게 된 그럴만한 연유가 있다고는 하나 무엇보다도 가장 부족했던 것은 정보력이 취약했다는 것이다. 불확실하게 수집한 적정(敵情)의 결과만으로 작전을 결정한 것은 전략이라는 면에서는 기본이 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왜군이 가진 조총의 위력 때문에 기마전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간과(看過)한 것을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조령에 소수의 정병(精兵)만이라도 매복해놓고 있었으면 왜군의 진격을 잠시라도 늦출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실제로 유키나가는 조령이 매우 험준하여 조심스럽게 수차에 걸쳐 경계심을 가지고 정찰을 했으나 아무도 없이 텅 비어있다는 것을 알고는 조선군의 전략 부재를 경멸하며 춤을 추듯 신바람을 내며 조령을 넘었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선발대인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병법에 전혀 무식하였음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역시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수차 공을 세운 대단한 용력(勇力)을 지닌 무장으로만 폄하(貶下)한다 해도 그리 무리가 아닐 듯싶다.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병법을 알고 대처했었다면 상주에서 농민들을 급조하여 만든 8백여 병력으로 호호탕탕(浩浩蕩蕩) 진격해오는 유키나가 군과 맞서 싸우기 보다는 북으로 이동하면서 군사를 모아 조령에서 진을 치고 적을 기다렸다면 그 자신 뿐 아니라 신립에게도 인근 군현(郡縣)에서 더 많은 병력을 증원하고 훈련시킬 시간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신립이 탄금대에 진을 치자 자신도 조령을 버리고 신립에게로 간 것이다.
신립이 이일에게 조령을 지키라고 했으면 이일이 조령에 진을 치고 있었을지, 혹은 거꾸로 이일이 조령을 지키고 있었으면 신립이 달리 전략을 바꾸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찌어찌 하여 이일이 조령을 지키고 있었으면 왜군의 진격을 막아내어 전쟁이 조선 전토로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생각건대 전쟁의 향방을 떠나 이일이 그대로 조령에 남아 지키고 있었다면 어쨌을까 하는 아쉬움이 매우 크다.
조금 망상(妄想)이 되겠지만 조령방어에 성공하여 왜군이 경상도에서 주저앉았다면 오히려 전황이 훨씬 복잡해져 조선백성의 고통이 더욱 커졌을지도?
신립과 이일은 한마디로 용장(勇將)일 수는 있어도 지장(智將)의 면모(面貌)는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가 한다. 그럼에도 우암(尤庵)
세 번째 방문지인 화양계곡으로 왔으나 역시 시간관계로
송시열도 시빗거리가 많은 인물이다. 대체로 그의 존명사대(尊明事大) 사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조선의 학문과 정치 풍토에서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니 관점에 따라서는 그 사상 자체만으로는 비난을 덮어쓸 수는 없다고 본다.
효종이 청나라의 인질이 되었던 치욕을 갚고자 북벌을 계획하였고
효종은 북벌 즉 청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실질적으로 모든 역량을 군사력 강화에 두었고 그 추진을 위하여 왕권의 강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국가전략을 수립하고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제적(專制的)인 리더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므로 효종과
효종의 급사(急死)는
지나간 역사에 이리저리 가정(假定)을 붙여 생각해본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우스꽝스런 일일 수도 있으나 그러한 사례들을 가정해본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같은 일의 반복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인지도 모른다.
화양계곡을 떠나 펜션에 도착하여 바비큐 만찬을 즐기면서 주흥(酒興)이 오르더니 함께 준비되어있던 노래방 무대에서
그도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할 많은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나 오직 한길로 묵묵히 우보(牛步)로 걸어와 그 힘들고 어려운 포도대장직(捕盜大將職)을 무사히 마치게 되는 것에는 아마도 그런 면모가 한몫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늘에 무지개를 보았을 때 내 가슴은 뛰었지
내 어릴 때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네
아마 더 나이 들어서도 그러기를 바란다네
아니면 죽은 것이나 다름 없겠지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 때처럼
매일매일을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며 살고 싶다네”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William Wordsworth—My heart leaps up)
(陽川書窓에서
첫댓글 멀리 친구들의 방문을 주선해 준 이복동문의 배려에 감사드리네. 못 가본 친구들이 궁금해 할까봐 사진과 함께 자세한 방문기와 사진을 올려 준 장갑문, 문상두 동문에게도 감사하고... 현장에 가보지 않고서도 함께 동행하고 있는 느낌이네.
관폐를 이리 자주 끼쳐도 되는가 몰라. 화양동 구곡은 꼭 30년전에(우리 딸들 세상에 나오기 전에) 가본적이 있지. 한국적인 풍경과 Wordsworth의 시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네. 상두의 필력은 정말 대단해. 노란 잠바(미국에서는 재킷=jacket)입은 병훈이 정말 오랫만에 보네.
너무나 감사하고 기억에남을 하루였읍니다, 잊지않고 오랜시간마음속에 간직하렵니다.
언재 봐도 경찰 같지 않은 종복이, 동문들을 위해 수고 많았네. 옛날 역사를 지금 보드시 꾀둘고 있는 상두의 해박한 지식, 마음의 좋은 양식이 되였네.
친구 종복이, 함께한 모든 친구 들 즐거운 하루였슴니다. 모두 건강하고 다음에 만날때까지 행복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