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들은 우울하다. 우울함을 넘어서 불행한 것 같다. 밤 늦게 현관문을 들어서는 녀석의 얼굴은 창백하고 굳어있다. 지난 겨울 방학동안 녀석은 싫컷 늦잠도 자고, 좋아하는 클래식 기타도 치고, 그 지겨운 공부는 때려친 채 친구들과 놀며 느긋하고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개학을 하고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으니 꼼짝없이 학교에서 시키는 자율학습을 밤 10시까지 해야 한다. 집에 오는 시각은 10시 반, 소질도 없고 취미도 없는 공부를 책상 앞에 붙어 앉아 하루종일 해야 하니 어찌 아니 불행할까.
하도 딱해서, 네가 원한다면 엄마가 학교에 찾아가 자율학습을 면제해 달라는 요구를 하겠다고 말했더니 자기만 빠져나올 수 없다며 견뎌보겠다고 한다. 1학년은 9시, 2학년은 10시, 3학년은 11시까지 학교에 남아 수험공부를 하는 것이 아들이 다니는 학교의 방침이라고 한다. 말이 자율학습이지 실은 강제학습이다. 자율학습이라는 뜻은 수업을 하지 않고 자신이 필요한 공부를 알아서 한다는 의미일뿐이다. 아들 말로는 선생님들도 자율학습을 싫어한다고 한다. 집엔 잠만 자러 갈 정도로 거의 사생활을 포기해야 하니 어느 선생님인들 좋아하겠는가.
지난 겨울, 아들이 1학년이었을 때, 겨울방학을 일주일 정도 앞둔 어느 아침 녀석은 학교에 정말 가기 싫다며 울상을 지었다. 요즘은 수업도 안 하고 그냥 애들끼리 수다 떨다 온다며 안 가도 전혀 지장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디 아픈 것도 아니고 단지 학교에 가기 싫다고 결석을 하면 어떡하냐고, 이제 조금 있으면 방학인데 참고 갔다 오라고 설득하는 순간, 너무나 애절한 녀석의 눈빛이 가슴을 찔렀다. 하긴... 나도 정말 학교 가기 싫은 날이 많았다. 사실 학교가 재미있고 행복해서 간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어쩌다 몸살이 나거나 아파서 하루 결석하게 된 날은 그 얼마나 금지된 선물을 받은 것처럼 달콤하고 행복했던가.
그래서, 그럼 그러라고 말해버렸다. 엄한 아빠가 알게 되면 크게 경을 칠테니, 그날의 결석은 불량엄마와 불량아들의 공모로 이루어진 완전범죄가 될 것이다. 녀석은 엄마의 허락을 받자 너무 좋아하며 다시 자리에 눕더니 10시까지 늘어지게 잠을 잤다. 싫컷 자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옷을 주워입는다. 어딜 가느냐는 질문에 아들은 대야미에 가서 소도 보고 저수지에서 놀다 오겠다 한다. 친구들은 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시각에, 혼자 학교를 빼먹고 놀러 가는 기분이 어떨지 물어보지 않아도 잘 알 것 같다. 발칙한 해방감, 그리고 규칙을 어겼다는 꺼림칙함, 혼자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고독감이 동시에 공존하는 기분아니겠는가.
저녁에 집에 들어온 아들에게 무얼 하고 지냈냐고, 재밌었냐고 물었다.
“엄마, 대야미 역이 어떤지 잘 모르지. 그 역은 말야, 언제나 쓸쓸해. 사람도 거의 없고, 표 파는 사람밖에 없어. 난 그 역의 그 느낌이 너무 좋아. 초라하고 시골 같고 조금 황폐한 듯하고... 마치 버림받은 것 같아. 그 역에 내릴 때의 그 느낌은 뭐라 할 수가 없어. 그리구 저수지로 걸어갔어. 소도 보고, 논도 보면서. 저수지가 완전 꽝꽝 얼었는데, 엄청 두껍게 얼어서 그 위로 걸어다녀도 돼. 얼음낚시 하는 사람도 있어. 조약돌을 던지면 돌이 얼음 위로 통통 튀면서 날아가는 소리가 얼마나 예쁜지 말두 못해. 아... 엄마가 그 소리를 들었어야 되는데...”
그러니까, 녀석은 ‘대야미’에 가서 나름대로 고독을 즐기다 온 모양이다. 집에서 전철로 세 정거장 떨어진 곳에 대야미역이 있다. 그곳은 아파트 숲에서 갑자기 시골에 온 듯, 논과 밭, 소와 염소, 거기다 아담한 저수지까지 있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날마다 콘크리트 감옥에 갇혀 원치않는 공부를 강요당하느라 자연이 그리웠나보다. 인생에서 가장 민감하고 감수성 풍부한 시기인 초, 중, 고 12년을 모든 경험으로부터 차단된 채 오로지 수험공부만을 해야하다니, 이 무슨 참담하고 어이없는 상황이란 말일까.
감수성 예민하고, 시 쓰기를 좋아하고, 클래식 기타를 프로 연주자 못지 않게 잘 치고, 교과공부하기 싫어한다는 한가지만 빼고는 나무랄 것이 없는 멋진 놈이, 학교라는 수용소에 갇혀 사는 게 가슴아프다.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쯤이었을까. 어느날 녀석은 “엄마, 학교는 누가 만들었어?” 하고 물었다. 느닷없는 질문에 황당해서 잘 모르겠다고 어물어물 대답했더니, 아이답지 않게 한숨을 푹 내쉬며 “참... 학교란 걸 왜 만들었는지...” 한탄하듯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이미 초등학교 때에 아들은 학교라는 제도가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대학을 가지 않아도 좋다고, 정말로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기를 바란다고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아들의 고민은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게 무언지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하기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들을 해봤어야 자기가 무얼 하고 싶은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될 것인데, 그러지를 못했으니 말이다. 아직은 구체적인 진로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위로해주지만,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은 늘 마음 한 구석을 짓누를 것이다.
솔직히 난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어느 대학이든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막노동도 해보고 여기저기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러다가 돈이 좀 모이면 인도든 어디로든 여행도 다니면서 사람사는 모습의 다양함을 접했으면 한다. 그러면서 참으로 자신이 원하는 행복한 삶을 일구어 나갔으면 좋겠다. 돈과 권력, 헛된 욕망이 판치는 주류세계에 편입되지 않고 그저 자신이 만족하는 작은 삶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다양한 재능과 창의성과 독창성을 말살하는 교육, 천재가 사장되는 교육, 권위에 복종하는 노예를 만드는 교육에 대한 절망은 차라리 새삼스럽다.
그렇지만 불행해 하는 아이들을 보면 새삼스런 이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해마다 수능 기간이 되면 자살하는 학생들이 속출하는 이 사회, 성적 때문에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뉴스가 이젠 놀랍지도 않게 된 엽기적인 나라, 허용한 머리길이에서 1cm 길다고 처벌받는 학교, 학문 연구는 고사하고 신입생 때부터 치열한 취업 준비에 들어간다는 대학생활, 비판적 지성은커녕 소비문화의 대표 주자인 대학, 학벌과 학력의 꼬리표가 평생을 따라다니며 좌우하는 현대판 신분제도... 과연 어디에 교육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이 시대, 이 나라에 태어났다는 죄밖에 없는 아이들을 집단 처벌하는 가혹함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뒤틀린 교육제도 속에서는 학생도, 선생도, 학부모도 아무도 진정으로 행복하지 못하고 모두 고통 받으며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른들과 동생들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같은 나이의 또래들하고만 어울리도록 만든 학교라는 제도 자체가 순 어거지고 폭력인 것이다. 시민을 통제하고 순치하는 가장 확실한 국가 장치가 군대와 감옥, 교도소, 공장, 그리고 학교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젠 우리가 자명한 것으로 여기게 된 학교라는 집단 수용제도가 실은 최근 100여년 사이에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놀랍다. 학교가 따로 없었던 오랜 세월동안 배움은 수도원이나 사원, 서당 같은 작은 단위로, 인간적인 규모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아동기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던 근대 이전 사회에서는 어른들의 노동에 참여하고 동생들을 돌보는 과정을 통해 생활 속에서 저절로 배움이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게 노인들을 공경하고 어린 것들을 배려하는 문화 속에서 ‘왕따’ 같은 괴이한 현상은 생길 수 없었다. 왕따 현상은 배움이 사라진, 배움이 이루어질 수 없는 또래들을 격리 수용하는 폭력적인 구조 속에서 생겨나는 독버섯인지 모른다.
진정한 배움이 교육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란 건 확실하다. 아무리 교육을 퍼부어도, 오히려 교육을 퍼부을 수록 참된 배움으로부터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쉴 새없이 온갖 학원으로 내몰림을 당하는 아이들이 정말로 배우고 싶다는 욕구를 가질 수 있을까. 유아기에서부터 시작된, 대학을 향한 머나먼 여정을 거치며 진이 다 빠진 아이들이 무슨 독창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것이며 창의적인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창의적인 공부는 고사하고 그같은 불구적인 교육에 의해 몸과 마음이 불구가 안 된다면 그것이 오히려 신기한 노릇일 것이다. 통조림 인간을 양산하는 인간 공장 시스템인 학교만이 아니라, 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알고 싶다는 내부로부터의 자발적인 욕구를 점진적으로 말살하는 파괴적 과정인 건 분명한 것 같다.
저녁 먹고 밤에 산책을 하다보면 아들이 다니는 학교를 지나는데, 어쩌다 시간대가 맞아 자율학습에서 풀려난 아이들이 왁자하게 귀가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교실에 붙잡혀 강제 수인생활을 하는 애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발랄하다. 종일 억눌려 있던 에너지를 발산하는 순간이기도 하겠지만, 친구랑 신나게 수다떠는 아이, 장난치며 달려가는 아이, 열심히 뭔가 먹으며 걸어가는 아이... 어깨가 축 쳐질만도 하련만 아이들은 참으로 싱싱하고 눈부시게 발랄하다. 청춘의 힘일까. 그렇게 자율학습에서 풀려난 아이들이 씩씩하게 집으로 귀가하는 모습에서 눌러도 눌러도 눌려지지 않는 인간 정신의 탄력성을, 외부에서 끌 수 없는 인간의 내적 생명력을 믿어 보고 싶은 것은 희망인가 절망인가.
생 떽쥐베리는 어느 글에서, 비좁은 삼등기차 안에서 보게 된 어느 아이의 얼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프랑스에서 해고되어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는 폴란드 노동자들 틈에서 보게 된 어느 아이의 얼굴을. 수백명을 수용한 기찻간의 그 비참과 불결, 추악함 속에서도 하나의 금빛 과일처럼 빛나는 잠든 아이를 보며 그는 생각한다. 여기 한 음악가의 얼굴이 있다. 여기 어린 모짜르트가 있다. 보호받고, 시중받고, 교양받는다면 그 무엇인들 못되랴! 그러나 어린 모짜르트는 다른 애들처럼 눌림틀에 찍힐 것이다. 모짜르트는 죽어가고 있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어쩌면 하나하나의 인간들 속에 암살당한 모짜르트다라고.
첨부터 자유롭게 키우다 갑자기 잡히려니 저도 힘든 점도 잇는 것이다 이제 주 오일제로 가고 잇고 토요일은 사실 수업이 없고 바깥활동으로 보내기도 한다. 마니 변화되어가는 추세이고 교사,학생들,학부모들이나 관련된 사람들이 다 같이 가장 안 좋은 것부터 하나씩 함께 풀어감으로써 나아지길 기대해본다
공교욱에 많은 변화가 찾아와서 아이들이 편하게 생활 했으면 하네요. 교육 프로그램이 아이들 자율적인 시스템으로만 된다면 더할 수 없이 좋을 것이니 빨리 그리되었으면 좋겠네요. 그전이라도 5일제 수업만이라도 언능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듭니다. 조카도 아침에 나가면 밤 10시나 되야 집에 온다니..힘들다고 난리니.
첫댓글 중학교에 들어가서 사니는 3월부터 엄마, 안 가면 안 돼? 왜 꼭 학교를 가야돼?...초딩때는 하지않던 질문을 해대며 엄마는 좋겟다~ 집에서 쉴 수 잇어서...이럴 때 다독거리며 재밋게 지내다 와~ 마치 내가 아이등을 떠밀어내는 것 같은 기분에 맘이 착잡햇엇다
이제는 적응된 건지 포기를 한 건지 그런 말은 안하지만 아~ 왜 꼭 학교를 가야만하나? 가끔식 그런다, 그리고 토욜이나 주말,휴일이면 그 해방감에 그리 좋아한다. 사니도 내성적이면서 예민한 성격이고 강제적인 것이나 강요성을 이해하지못하고 받질 못한다.
첨부터 자유롭게 키우다 갑자기 잡히려니 저도 힘든 점도 잇는 것이다 이제 주 오일제로 가고 잇고 토요일은 사실 수업이 없고 바깥활동으로 보내기도 한다. 마니 변화되어가는 추세이고 교사,학생들,학부모들이나 관련된 사람들이 다 같이 가장 안 좋은 것부터 하나씩 함께 풀어감으로써 나아지길 기대해본다
공교욱에 많은 변화가 찾아와서 아이들이 편하게 생활 했으면 하네요. 교육 프로그램이 아이들 자율적인 시스템으로만 된다면 더할 수 없이 좋을 것이니 빨리 그리되었으면 좋겠네요. 그전이라도 5일제 수업만이라도 언능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듭니다. 조카도 아침에 나가면 밤 10시나 되야 집에 온다니..힘들다고 난리니.
안타까운 마음에 학원이라도 안보냈으면 하지만 목표를 향해 쏘아 올린 활을 멈추게 할수는 없으니...현실의 어려움을 잘 극복해 나가기를 바랄뿐...그이상 해줄 수 있는건 암것두 없다는게 애가 탑니다.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