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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외대 합격자 수기
이은숙 (경상대 영어교육 졸업-영어영문학 복수 전공)
자격 없는 사람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판을 두드립니다.
저는 2011학년도 서울 외대 합격자 이은숙이라고 합니다. 이 합격이 가능하게 해 주신 것은 하나님과 그 분이 저에게 붙여주신 김수연 선생님입니다. 그리고 김수연 동시통역학원에서 만난 반 친구들 한 분 한 분이 저에겐 너무나 소중한 친구이자 위로자, 선생님입니다. 아마도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를 드립니다.
‘별로 공부 안 했는데, 내가 왜 되었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멋지게 한 마디로 끝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저는 그런 편에 속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서울 외대에 합격할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하나씩 알려드리겠습니다. 일견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을 나열하게 될 것 같은데, 결국 모두 연결되게 보여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영어공부의 기초
초등학교 고학년 때 걸프전이 발발했습니다. 국제회의통역사들이 뉴스 프로그램에서 활약하는 것이 어린 제 눈에도 들어와서 막연히 통역사를 동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처음 영어 학원을 다녔습니다. 몇 개월 다녔는데, 발음기호를 읽을 수 있는 법을 알게 되었고, 영어노래 몇 개와 짧은 대화 몇 토막을 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인 어머니께서 제가 흥미를 보이는 것을 보시고, 주위 분들에게 좋은 영어 교재를 빌려 녹음하고 복사해서 제 손에 들려주실 때가 많았고, 저는 제게 들어오는 모든 교재들을 외우고 사랑했습니다. 저는 위로 오빠와 언니가 있어서 중학교 1학년 영어교과서 이전까지 새 책을 만져 본 적이 없어 오히려 중학교 들어 더욱 영어 수업시간을 소중히 여기게 된 것 같습니다.
말하기와 듣기의 기초
중1~3까지 아침 6시부터 1시간 동안 진행되는 KBS FM 라디오 ‘오성식의 굿모닝 팝스’를 매일 들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은 저의 중학교 영어회화 CLUB ACTIVITY담당 김형곤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방법이었는데, 선생님을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던 저는 선생님이 지나가다 하신 말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따르던 편이었습니다. 멋진 선생님은 정말 중요하죠.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은 그분의 작은 습관, 손동작, 표정 하나까지 따라하게 되니까요. 통대 준비하면서 중학교 이후로 다시 한번 멋진 선생님을 만난 것 같은데 그래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김수연 선생님 수업을 듣고 집중하지 않는 게 쉽지 않았으니까요. 방송을 들을 때는 반드시 녹음을 하고, 학교에서 복습을 하고, 저녁때 다시 한번 듣는 습관을 들였습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일주일 치를 반복 연습했습니다. 처음에는 교재가 없고, 영어실력이 전혀 없어서 들은 것을 무작정 들리는 대로 받아 적었습니다. 몇 달이 안 되어서 알아들을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서 몰입이 되었습니다.
마침 어머니의 권유로 중1 겨울방학부터 약 1년간 원어민 영어강사가 있는 외국어학원에 다녔는데, 아침에 방송에서 배운 영어를 영미인에게 활용할 수 있는 것에 재미를 느껴 굉장한 열의로 학원을 다녔습니다. 그래서 거의 매월 자진 월반을 했고 마지막 몇 달간은 그 학원에서 가장 높은 수준인 FREE TALKING반에서 어른들 틈에 끼여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제가 영어를 할 줄 아는 줄 알았습니다. 불과 얼마 후 턱없는 망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요. 겨울 방학엔 학원 가는 길은 굳이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남강 다리를 건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군요. 그 당시엔 저의 작은 세계에서 영어는 저를 새로운 세계로 잇는 다리였고, 저는 그 다리를 건너는 일이 무척이나 행복했었습니다. ‘영어 듣기’의 초석을 이때 깔아 둔 것이었고 이것이 빠른 합격의 요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입니다. 현재 나의 수준에 맞는 교재를 선택해 적어도 1~2년간 그 공부를 몸에 베게 하는 일은 실력의 기본기를 다지는 데 정말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독해와 어휘
고1부터 고3까지 영어의 침체기였습니다. 당시 저급한 수준의 수능시험 영어문제와 정보의 사각지대에 거주했던 점이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 단계에서 무엇을 공부해야 할 지 몰라 영어공부의 수준을 높이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가슴 아픕니다. 그때는 그저 단문독해와 단어암기에만 몰입했습니다. 쓰다만 공책을 6분의 1로 잘라서 스테플러로 여러 조각을 묶은 뒤 모르는 단어를 화장실에 갈 때도 외우고 또 외웠습니다. 예문과 함께 외우지 않은 것이 매우 아쉽습니다. 이런 공부방식은 뒷날 문맥에 맞지 않는 어휘 선택으로 이어져 저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천편일률적인 수준의 수능 영어 독해 문제를 읽고 또 읽었고, 모르는 단어는 반드시 영한사전을 찾아 외웠습니다. 지금 드는 아쉬움은 영영사전을 사용하는 법을 이때 익히고, 다양한 과목들로 영문독해의 내용을 넓히면서, 읽는 글의 길이도 늘려나갔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영어의 배경지식, 영작의 시작
대학교는 영어영문학과를 선택했습니다. 저에게 다른 전공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 가고 보니 그곳에서의 영어는 제가 알던 영어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배우는 내용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우리 과 동기생들 다수가 영어에 딱히 흥미가 있어서 전공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기에, 수업이 전체 수준을 고려해 진행되다 보니, 제겐 긴장감이 떨어졌고 도전의식을 심어주기에 부족했습니다. 지성적 갈급함에 주리고, 여학생들의 몰려다니는 행태에 진절머리를 치고 있던 저는, 전공 수업을 최대한 빨리, 많이 듣고 싶어서 서서히 시간표를 혼자 짜고 혼자 움직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저학년때 3학년 전공선택 과목을 듣기도 했습니다. 모든 전공 수업이 재미있었던 건 아니었고, 영국문학사, 미국문학사, 현대영미시가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모두 T.S. Eliot를 전공하시고 Fulbright 장학생이자, 하버드 대 교환교수 출신이신 황소부 교수님의 수업이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때로는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세계인명사전에도 오른 그분의 말씀 하나 하나를 마음에 새겨놓았습니다.
하버드 출신의 Edward Nee 교수님과의 인연도 이때 시작되었습니다. 선뜻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가지신 선생님은 대학원에서 현대시를 가르치셨는데, 학부에서는 회화와 영작을 맡으셨고, 상담을 빌미로 자주 연구실에 들르는 저를 어여삐 여기셨습니다. 소심한 저의 재미없는 수다에도 일일이 화답해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인연을 이어 저는 꾸준히 교수님께 전자메일을 보냈고, 간간이 음악회나 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좌절과 고민, 방황에도 선생님은 끊임없이 저를 격려해 주셨고, 제 영작에 평가를 달아주신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이 선생님 덕분에 저는 간단한 실용영작문 실력을 갈고 닦을 수 있었습니다. 무려 10년의 세월 동안 이메일을 주고받은 결과로, 영어 서신 교환의 효과는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영어교육, 영어학에 입문
대학 새학기가 시작되던 어느 해, 부모님은 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습니다. 영어교육과로 과를 옮기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제 전공을 사랑했지만, 그 전공으로 미래에 대한 뚜렷한 청사진을 그릴 역량을 갖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휴학을 하고 중국어 공부에 전념하기도 하고, 7급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었습니다. 별다른 성과없이 끝난 휴학 끝에 부모님의 제안은 언뜻 편하고 안락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소중한 제 전공을 접고 시험과 학점 제출을 통해 영어교육과로 전과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간 그 고민없이 내린 결정을 얼마나 후회했던지...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모임에서든 중심에 있는 것이 익숙했던 제게 전과의 경험은 충격이었습니다. 한 순간에 완전히 관심 밖으로 내몰린 채, 무언의 소외를 당하는 자리에 와 있는 저 자신을 보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영어영문과에서는 여유롭게 때로는 즐기며 공부했었는데, 영어교육과에서는 두꺼운 전공서적부터 저의 기를 질리게 만들었습니다. 애초에 교사가 되려는 의지가 없었던 제게 외국어 교육에 관한 이론 중 어떤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야무지고 차분하며 예쁜 여학생들의 말없는 분위기는 제게 마치 추운 겨울날 문이 닫히지 않는 창가에 억지로 앉아있는 기분이 들게 했었습니다.
그 과에서는 중간, 기말시험에서 실수가 없어도 아침 8시 수업에 조금이라도 지각을 하면 A+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둠 별로 주어지는 과제가 많아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협력을 해야 했습니다. 착한 학생들의 정돈된 사고는 천방지축이던 저를 불안하게 했고, 그로부터 2년간, 졸업할 때까지 시험철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습니다. 졸업하며 성적을 확인해 보니 적어도 저를 대놓고 멸시한 친구들보다는 나은 성적이라 약간은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입학할 때의 전공이었던 영어영문학과에서 제가 이수한 학점은 일반 전공 학생들보다도 오히려 많았기에 바쁜 와중에도 따로 졸업시험을 치고 기타 서류를 제출하는 것으로 그 과의 복수전공으로 졸업하는 것도 확실히 해두었습니다.
이 시기를 통해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는 정신과 함께 약속시간을 지키는 것, 함께 공부하는 법을 처음 배우게 되었습니다.
영문법 다지기, 체계적인 사고 시작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제게는 영어 자체에 대한 집착은 강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영어를 해서 무슨 직업을 갖고 살 수 있는지 거의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절대로 졸업과 함께 실업자가 되는 것만큼은 싫었기에 모 방송사의 방송기자 자리에 시험을 치고 3차 면접에서 떨어진 후 막연히 전공을 살리자는 마음으로 중등교원 임용고시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2년간 공부한 것은, 졸업하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했기에 영어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는 전무한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소학점만을 이수했던 교육학부터, 영어학, 영어교육론, 영어교수법까지 준비해야 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이 공부는 무려 5년에 걸쳐서 계속되었고 저는 무려 6번 낙방했습니다.
그런데 여섯번째 불합격 통보를 받고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더 이상은 부모님이 다시 도전해 보라고 안 하시겠지’ 하는 비겁한 안도와, ‘기왕 낙방 많이 한 거, 하고 싶은 일에나 도전해보자’는 뒤늦은 용기가 생긴 것이었지요. 그리고, 20대를 고스란히 골방에서 보낸 아픔에 대한 보답인지, 손에 닿지 않을 것만 같던 영어학과 영어교육, 영어교수법, 교육학에 대한 개념들이 제 머리에 어느새 박혀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상상하시기 힘들겠지만 저는 대학 졸업까지 영문법을 몰랐습니다. 부정사, 한정사… 이런 것들을 전혀 모르고 사용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양으로 승부해 결국 이 내용들을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문제집부터 영어원서 문제집, 영어원서 대학 영문법 이론서까지 닥치는 대로 교재들을 보았습니다. 초시계를 놓고 정해둔 시간 내에 풀고, 또 영어원서 문제집은 문제를 보고 바로 말로 대답하고 그것을 또 시간을 재었습니다. 그래서 회화실력도 늘고, 문법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가 오랫동안 모르던 내용이니, 더욱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게 되더군요.
혹시 늦게 공부를 시작하는 분이 있다면, 충분히 성인이 되고 나서도 새로운 공부를 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자유분방하고 천하태평이던 제 기질에 보다 꼼꼼하고 체계적인 사고를 더할 수 있던 것도 이 시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트 정리를 체계적으로 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입니다. 혹시 지금 최선을 다하는데도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어 좌절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용기 내시기 바랍니다. 실력은 지금 차곡차곡 쌓이고 있고 이 힘든 시간이 지나면 곧 노력에 보답할 것입니다. 그렇게 꼬박 5년간 연거푸 불면과 우울증, 비참함에 몸서리치던 겨울들을 생각하면 올해 겨울은 더욱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말하기
제게 말하기를 훈련할 좋은 기회는 2009년 진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계약직 교사를 하던 2개월과, 그 이후 이웃의 초등학교 원어민 교사를 사귄 나머지 3개월, 그리고 김수연 동시통역학원을 다니던 기간에 찾아왔습니다. 모두 돈 한푼 들지 않은 경험이었지요.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공교롭게 원어민 교사와 마주보는 자리에 배정받게 되면서, 그분의 거의 모든 공식적인 활동에 통역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건강검진, 월요일 아침 회의 등등 세세한 것에 저에게 의지하는 그 친구가 있었기에 저의 일상회화 실력이 많이 는 것 같습니다. 한편 외국인이라고 무턱대고 친구 삼지 않게 된 습관도 그때부터 생긴 것입니다. 그 학교를 떠난 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소외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진주에 가면 술 한잔 하자고 해 술 못마시는 저를 당황하게 하는 친구입니다.
또한 이웃에 있던 다른 원어민은 저와 함께 단거리 여행도 자주 하고, 종종 산책도 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눈, 처음으로 국적을 초월해 대화가 가장 잘 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미국으로 돌아간 이 친구와는 이따금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학원을 다니면서 김수연 선생님께서 수강생에게 외국인 한국어 지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몇몇 학우들과 시간을 나눠서 캐나다인 고등학교 원어민 교사를 가르쳤는데,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통대에서의 영어말하기는 일상회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지요. 보다 수준 있는, 정련된 화법이 요구됩니다. 뒤에 이 정도 경험을 믿고 통역 연습을 게을리 했다가 낭패를 보았습니다. 일상회화는 기본이고, 그 위에 보다 수준 높은 화법을 구사하기 위해 통역 수업을 듣고 스터디 파트너를 통해 연습하는 것은 무엇보다 통대 합격에서 중요한 것 같습니다.
뒤늦게 저녁 7시에 시작하는 Duo Speaking 수업을 신청했다가 시험이 임박해서 한 달 만에 그만두긴 했는데, 정말 아쉽습니다. 준비한 스피치를 할 기회를 갖고, 그것에 대한 원어민 강사가 그 내용을 요약해 주며, 지도를 즉석에서 받게 됩니다. 또한 스피치 노트를 제출하면 첨삭도 해줍니다. 제가 말할 때 녹화도 떠서 홈페이지에 올라왔던 것이 기억납니다. 지금도 제가 서울에 살지 않는 것이 아쉬운 점은 바로 Duo Speaking입니다. 이상적인 수업이죠. 어쨌든 지금도 말하기는 저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장문독해 시작
통대를 도전해 볼 마음을 먹은 뒤 가장 먼저 Skype를 통해 독서회를 만들고 회원을 모집했습니다. 매주 금요일 밤, 온라인으로 모여서 Catcher in the Rye, Freakonomics, The Great Gatsby, The Outliers 등의 책들을 읽어나갔고 그 모임이 3월 말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회원들은 대학생에서부터 회사원까지 다양했고, 모두 영어를 취미로 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까다로운 저와 함께 책을 읽어주신 Bookclub 회원들께 감사드립니다. 저의 장문 독해가 드디어 시작된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장문 독해로 무장된 사람은, 아무리 긴 지문의 문제가 쏟아져도 지치거나 당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격적인 통대 준비와 김수연 선생님을 만남
재작년에 3개월간 체류했던 California에서 Monterey 통번역 대학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었는데, 그해 겨울, 인터넷으로 그 대학원의 한 합격자 수기에 ‘김수연’이란 이름을 보고 선생님이 계신 학원을 확인했습니다.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국제회의통역사를 처음 보았기 때문에 신기하다는 생각, 그리고 수업에서 느껴지는 수준 높은 강의의 분위기, 그 기분 좋은 긴장감만이 가득했습니다. 고시원에 살면서 한달 간 Step2를 수강했고, 반드시 다시 오겠다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그 후 2009년 12월부터 마음을 정하고 매주 토요일 김수연 선생님의 Speaking Level Up이란 수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PBS Newshour의 뉴스를 갖고 진행되는데, 전치사, 관사의 쓰임과 같이 영문법의 가장 마지막, 감각적인 단계까지 설명해주시는 것을 보고 선생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이 수업은 Step2에서는 더 강화되어 진행되는 것을 뒤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 전에는 그때보다도 실력이 없었기 때문에 막연하게 수업을 들었었는데 이제는 그 수업의 장점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다양한 자습법을 구사하고 있었던 제게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는 강의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의 집이 있는 진주에서 서울까지 약 4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매주 토요일 아침 5시 30분 차를 타고 서울로 이동했고, 외웠던 뉴스 내용을 혹시 이동하다 잊어버릴까 봐 외고 또 외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저의 무식한 정성에 놀라신 김수연 선생님은 ‘학원 근처로 방을 얻어보라’고 권유하셨고, 학원 앞 고시원에 살던 조교선생님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세심한 배려와 도움으로 저도 좋은 가격에 그 고시원으로 옮기게 되었고 1월부터 Step2를 들으며 복습 중심으로 공부를 해나갔습니다. 하루를 다 바쳐도 절대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학원 문 열 때 와서 저녁 수업 전에 집에 가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딱 3개월을 공부에만 집중했습니다.
체력 저하와 Monterey 유학 포기
4월 초 Monterey 대학원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러 진주로 돌아간 후,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여러 생각들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우선 통대 준비를 시작하면서 제가 부족한 부분들을 더 분명하게 느끼게 되었고, 어쩌면 영원히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가 있었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와 오랜 기간의 실패로 인한 좌절의식은 생각보다 저를 깊숙이, 오랫동안 괴롭혔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기억력과 speech에 대한 공포가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엔 누구 못지않게 자신 있던 부분들이었는데, 무의미 암기학습으로 일관해 온 것이 나이가 들자 더 이상 효과가 없었습니다. 적은 양을 공부하더라도 밀도 있게, 단어 하나를 암기하더라도 함께 쓰이는 말과 문맥을 생각해서 공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혼자 있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공부는 엄청난 정신력을 요하며, 혼자 장기간 있게 되면, 단순한 슬럼프가 두려움과 무기력증, 심하게는 우울증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공부가 안되더라도 학원에 다니면서 수강생들을 많이 만나고 수다도 많이 떨고 함께 밥 먹는 재미라도 느끼면서 공부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두 번째 두려움은 체력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평소에 운동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20대에는 억지로 요가나 수영, 헬스, 댄스 등 월 단위로 돈을 내는 곳에 가서 운동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마음이 급해지면서 그런 것을 하지 않고 무조건 책상 앞에만 오래 앉다 보니, 허리 디스크 증세가 생겼습니다.
이렇다 보니 공부와 일을 병행해야 할 외국생활이 버겁게 느껴졌고 결국 Monterey 유학까지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낙담했었습니다. 그것만이 제 삶의 목표라고 생각했던 기간이 꽤 길었으니까요. 그러나 곧 서울 외대에 대해 알게 되었고, 합격한다면 그 학교의 탄탄한 커리큘럼으로 더 실속 있는 공부를 할 수 있겠다는 계산도 있었습니다. 혹시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김수연 선생님 밑에서 2년 정도 공부하는 것이 유학생활보다 더 큰 실력 향상을 낳을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선생님을 확실히 애먹이기 시작했지요.
복귀와 본격적인 수험생활
5월이 되면서 김수연 선생님이 신논현역 교보타워 파리바게트 옆에 학원을 내셨습니다.
저도 6월 경부터 서울로 돌아와 신논현역 앞 고시원에 거처를 정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두어 달 간의 공백은 생각 외로 컸습니다. 스터디 그룹을 통해 좀 더 긴장감을 갖게 되었고 대학원 별 수험 정보와 각자의 공부 방법을 나누면서 목표를 더욱 분명히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허무감과 공허감이 밀려올 때마다 파트너들은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아 제가 갖고 있는 정신력의 몇 배로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한가지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김수연 선생님 학원은 인성이 훌륭하고, 마음이 따뜻한 학생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급우들 덕분에 대학생활에서 못 느껴본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고, 외로운 객지 생활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9월부터 실전 반에 들었습니다. 통역반과 번역반이 있는데, 처음에는 통역반 청강을 해보고, 번역반만 수강했습니다. 통역반이 어렵게 느껴져서 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잘못된 판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뒤에 시험기간에 통역 연습이 특히 잘 안되어 있어서 굉장히 불안했었습니다.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넉넉하게 7~8월부터 통역, 번역반을 듣기 시작하는 게 좋을 텐데 말이지요. 절대 겁먹지 말고 통역 실전반에 일찍 도전하는 것이 안정적인 합격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처음엔 절대 안 들릴 것 같은 내용도 결국은 들리더라고요. 숙제의 양에 휘둘리지 말고, 스스로 범위를 정해서 작은 양이라도 꼼꼼하고 정확하게 훈련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듯 합니다. 그랬다면 저도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정된 실력을 갖고 있겠지요.
번역반은 영한, 한영 번역과, 요약, 그리고 에세이 쓰기 숙제와 첨삭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수업시간 정해진 시간 내에 직접 번역해 보는 훈련은 실전에 큰 도움이 되었고, 직후 이어지던 선생님의 주옥 같은 설명은 물론 다른 곳에서는 들을 수 없는 깊이 있는 말씀들이었지요. 번역반을 듣는 내내 행복해서 번역학과로 진학을 해 볼까 하는 고민까지 잠깐 했었습니다.
9월 말 어느 날, 같은 수업을 듣는 급우 한 분이 제게 통역 일자리를 하나 소개해 주셨습니다. 먼 데서 와서 고생한다고 저를 가엾게 여겨 주셨던 것 같습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저는 덥석 하겠다고 했고, 그 덕분에 난생 처음 진짜 통역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삼성 반도체에서 한 시간 이십 분 간 진행되었던 엔지니어 간 통역이었는데 시작 전에 긴장했던 만큼이나, 마칠 때 희열과 보람을 느꼈던 경험이었습니다.
10월이 되었고,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통역반과 번역반을 들으며 수업시간에 집중하고 복습을 반드시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뒤늦게 부랴부랴 이것저것 공부하기도 했습니다만, 별 효과는 없었습니다. 역시 공부는 평소에 꾸준히 습관처럼 하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경제 및 시사가 약해서 아침 식사할 때 mbn뉴스를 인터넷으로 자주 다시보기 했고, 시험에 임박해서는 국어실력을 정리하기 위해 고3 때 남겨두었던 포켓용 언어영역 속담, 사자성어집을 보고, 대학에서 소책자로 나온 한글 표준어법 및 맞춤법도 보았고, 한자3급 시험 문제집에 부록으로 달린 사자성어 모음을 모두 다시 한번 정리했습니다.
김수연 선생님
인성과 예의를 중요시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완벽에 가까운 실력을 갖추고도 거들먹거리지 않는 진솔하신 분입니다. 무심한 듯 지켜보시다가, 중요한 순간에 몇 번 개인적으로 진심 어린 격려와 꾸중을 해 주셨습니다. 칭찬을 들을 때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용기가 불끈불끈 솟았고, 꾸중을 들을 때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저의 장점과 단점을 누구보다 꿰뚫고 계셨고, 진심으로 저를 아껴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공부를 진행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모든 수강생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하고 귀 기울이고 계셨던 선생님, 정말 제겐 이전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완벽한 담임 선생님이셨습니다.
1차 시험
11월이 되고 1차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감정 기복이 있는 편인데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을 칠 수 있었습니다. 국어 듣기 세 문제, 영어 듣기가 20여 문제, 그리고 영어 독해 및 단답형이 20여 개가 있었습니다. 국어 듣기는 원고지에 들은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자동차 수출에 관련된 문제, 한국 시사에 관한 문제 등이 나왔습니다. 영어 문제는 세부사항과 순간 기억력을 요하는 문제들과, 핵심 내용을 파악하는 문제 등이 고루 나왔습니다. 특별히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매우 짧았지만 문제를 풀기에는 적당했습니다.
2차 시험
그리고 더디게 시간이 흐르긴 흘러 1차 합격자 발표일. 고대하던 합격의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며칠 뒤 2차 시험이 다가왔습니다. 합격을 장담할 순 없었지만 파트너와 열심히 통역 연습을 해 왔던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연습 내용은 주로 파트너가 중앙 데일리, 동아일보 영문판을 읽어주고 제가 영어로 요약하는 것을 서로 번갈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험은 번역과 구술 면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교시 번역
지하 층 강당 객석에서 시험을 쳤는데, 책상이 반달 모양으로 좁아 당황스러웠습니다. 수정액 사용이 허용되었습니다. 1교시 번역 시간에는 4개 정도의 지문이 나왔고, 정해진 시간 내에 풀기에는 빠듯했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생물, 사회, 문화 등의 주제의 글들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꿀벌의 생태에 관한 것과 여행 잡지의 글 같은 것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절대 시간이 부족함을 감지했고, 선배로부터 모두 풀지 못해도 합격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어놓았기 때문에 각 문제를 3분의 2정도 까지만 풀자고 생각했고, 대신 명확하게 번역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숨가쁘게 번역을 하다 보니 시간은 훌쩍 흘러 위층으로 올라가 2차 시험을 대기하게 되었습니다.
2교시 면접
제대로 정장하고 오지 못해 걱정이 되었지만, 의외로 주위에 저와 같은 처지의 수험자가 많아 안심했습니다. 4개의 반으로 나누어 진행되었고, 저는 임종령(?) 교수님이 계신 수험장에 4번째로 들어갔습니다. 한국인 교수님 두세 분과 외국인 남자 교수님 한분이 앉아계셨습니다.
1.일반면접 질문
외국인 교수님이 곧 ‘어디서 왔느냐’, ‘이 학교에 지원한 동기는 무엇이냐’, ‘통역과 번역 중 무엇을 더 좋아하느냐’, ‘두 가지를 비교해 보아라’, ‘이전에 일한 경험이 있느냐’, ‘무슨 일을 했느냐 등의 비교적 일반적인 질문을 하셨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아마, 먼 곳에서 왔고, 직업 경험이 있는 저에게 맞춤형으로 질문하신 것 같습니다. ‘둘 다 좋아하지만 통역을 더 좋아한다’, ‘번역은 정확해야 하고 인내심을 요하는 작업이며, 통역은 보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고, 활달하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맞는 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2.시사상식
뒤이어 오른쪽 맨 끝에 앉으신 조금 마르신 여 교수님께서 시사 상식을 물어보셨습니다.
유형 1: 약자 문제
수많은 경제용어의 약자를 대며 풀어보라고 하셨습니다. DMB도 물어보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WTO 뿐이었습니다. 아는 것이 나오자 폭풍같이 쏟아내시던 질문도 멈추시더군요. 몇 번이고 모르겠다고 대답해 죄송했습니다.
유형 2: 개념을 듣고 용어로 정의하는 문제
또한 가운데 앉으신 교수님께서 경제용어의 개념을 설명하시고 무엇에 관한 것인지 답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또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두 문제 정도를 주셨는데 모두 몰랐습니다.
3.영한 통역
이어서 영한 번역이 이어졌습니다. 한국의 높은 자살률을 논하면서, 이런 경향은 이미 기성 선진국들에게 있어왔던 일이며, 나아진 생활환경에도 생에 대한 허무감을 느끼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유명인에서부터 많다, 경제성장이 자살률을 저하시킬 것이라는 전망은 잘못된 것일 것이라는 요지의 내용이었고 저는 듣는 즉시 위와 같은 말을 폭포수같이 쏟아냈습니다. 교수님들의 표정을 보면서 겨우 안심을 조금 할 수 있었습니다.
4.한영 통역
곧이어 한영통역 문제가 나왔습니다. ‘녹색성장’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이 각국 정상들에게 하는 연설이었습니다. 내용 파악은 되었지만, 영어로 옮기는 데 훈련이 부족했던 만큼 더듬거리면서 제대로 통역하지 못했고 간신히 몇 마디의 말만 할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들의 실망 어린 눈빛을 마주하면서 그동안 한영 통역을 제대로 연습하지 못한 제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웠습니다.
합격의 날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저는 또 한번 삼성 반도체에서 통역을 했습니다. 두 시간 동안 빽빽이 진행된 회의시간 동안, 한편으로는 전심을 다해 집중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이 분야에 대해 좀더 공부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학원에 들러, 학원 컴퓨터를 잠시 빌려 뒤늦게 합격을 확인하고, 곧장 선생님께 합격소식을 전해드렸고 선생님은 미소를 지어주셨습니다.
지금 저는…
고향 집에 돌아와 조용히 성경책과 신화를 읽고 있습니다. 서울에 살면 살수록 통역의 매력은 더욱더 저를 잡아 끌지만, 생활하기에는 조용하고 한가로운 시골이 저는 아직도 좋습니다. 집안에서의 할머니 식사 준비와 저 대신 지금도 일하시는 어머니를 거드는 일이 제 일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보냅니다. 곧 제 의사와는 관계없이 번잡한 서울 생활이 시작되겠지요. 저는 정신 없는 서울을 정말 싫어하면서도 통역이 있는 서울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혹시 집안에서 나 말고는 맡길 데가 없는 일상의 허드렛일이 많아서, 돌보아야 할 사람들이 많아서 꿈을 포기하신 분들이 있다면, 한번 절충안을 찾아 보시라고, 명확히 꿈꾸며 하나님께 기도하면 반드시 도울 자가 나타나고 꿈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또한 집이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통역사의 꿈을 쉽게 실현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어교육이나 영문학을 전공하시고 영어교사나 영어강사의 꿈만을 꾸시는 분들께, 더 재미나고 신나는 직업이 여기에 있고, 그것을 준비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곧 Skype로 김수연 선생님의 온라인 강의도 시작된다고 하니 저의 자체 방학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 같네요. 그리고 내 영어에 침체기가 찾아왔다고 느끼는 날에는 언제고 선생님께로 곧장 달려갈 것입니다.
소중한 인연들과 가르침을 선물로 준 김수연 동시통역학원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어느덧 통역 연습을 할 시간이 되어 저는 이만 물러나야겠군요.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안한 저녁 되십시오.
첫댓글 은숙씨 정말 잘 될 줄 알았어. 정말 축하해요. 이젠 위로 올라갈 일만 남았네. 나야 나 고령 아줌마 소은이 언니. 항상 은숙씨가 쓴글을 보거나 가벼운 대화를 나누더라도 '나보다 한참은 어리지만 이 사람에게는 깊이가 있구나' 라는 느낌을 갖게 되요. 단순한 말하기 능력이나 영어에 관한 지식만이 아닌 깊고 넓은 생각의 폭을 가진 점은 앞으로 은숙씨가 더 커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재산이 될거라 여겨져요. '나는 형편이 여의치 못하니까 이정도가 최선이야'라는 생각을 갖고 취미생활을 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지금까지 학원에 다녔던 나에게 은숙씨가 쓴 글은 도전의식을 주네요. 서울에 오면 학원에 나타나겠죠? 맛난거 먹으러가요.
ㅋ아이구 언니^^ 언니가 제게 얼마나 큰 도전이 되는 분이신데요ㅎㅎ 올라가서 뵙겠습니다^O^
언니.. 합격 수기를 감동적으로 읽기는 처음인 것 같다는..ㅎㅎ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해요. 앞으로 많은 조언 부탁해욧. ^ㅡ^
ㅠㅜ 좀더 모범을 보였어야 됐는데...하는 아쉬움이 정말 많이 남는 한해였어요. 서울가면 연락할테니 함께 얘기나눠요. 파이팅!!!
은숙씨 축하해요. 스크롤의 압박이 있었지만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읽었다는 ㅎㅎ 우린 곧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해요! ^-^
ㅠㅜ네 언니~ 시험도 끝나고 방학하셨겠네요?! 어휴...전 어제까지 지독한 감기몸살이었어요ㅋ 가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천유진입니다. 축하드려요 +_+! 학교에서도 늘 열심히 하시리라 믿어요 :)
어느 누구 못지않은 실력을 가진 유진씨, 곧 비상하리라고 알고있어요. 앞으로도 종종 만나고 스터디 함께 해요^^
축하해요, 은숙씨~~합격 소식은 들었었는데 폰을 잘못 가지고 놀다가 번호가 날아가 버려서 축하문자 하나 못 보냈어요. 정말정말 진심으로 추카해요. 먼저 다가와서 말 건네주고, 그래서...무지무지 고마웠었는데...^^;; 열심히 하는 모습 보구 분명 조은 결과 있을꺼라 확신했었답니다. 앞으로도 더욱 승승장구하세요~~~(용림)
언니 고마워요. 앞자리에 앉으니까 좋잖아요~ 앞자리=축복받은 자리+.+ 언니도 용처럼 하늘로~~~!!!
축하드려요~~ 저는 다음달부터 김수현 선생님 학원 다니려고 하는데요....
은숙양 축하해^^ 잘되서 나도 기뻐^^ / 서울오면 보고~
언니!!! 합격 진심으로 축하해요.ㅋ 글 잘읽었구, 앞으로 훌륭한 통역사되길 바라요~
이제야, 들어와 보네요. 합격 축하합니다. 학원에서 처음 볼 때부터 상당한 내공이 느껴졌었는데, 수기를 읽어보니 그 이유를 알겠네요. 아주 훌륭한 통역사가 되길 바래요.
쓰신 글이 저의 영어 공부에 대한 부족함을 너무 많이 느끼게 합니다. 다시 한번 제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 가를 뒤돌아 보게 합니다. 좋은 글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