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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초창기 미국 침례교 선교 역사(Work of The Baptist Board)
1833 - 1893
태국은 미국 침례교 선교회가 해외선교지로 선택한 두번째 선교지였다.(첫번째 선교지는 중국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개척선교사로서 사역을 잘 감당하였으며 사랑을 받는 선교사로서 주님을 위하여 수년동안 신실하게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였다. 당시 버마에서는 적은 수의 침례교 선교사들이 마음에 깊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1832년 당시 버마에는 6가정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칼 구즐라프와 그의 동료 제이콥 탐린 선교사는 버마에 있던 침례교 선교사들에게 새로운 선교지인 태국선교를 위해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간절한 요청을 하였다. 위대한 믿음과 깊은 헌신으로 그들 가운데 2명을 새로운 선교지인 태국에서의 사역을 위해 죤 테일러 죤스(Rev. John Taylor Jones) 목사 부부를 따로 세웠다. 그들은 신임 선교사가 아니라 버마에서 이미 2년을 보낸 선교사였다. 그들은 버마에서 입양한 열두살 소년인 사무엘 죤스 스미스(Samuel Jones Smith)를 데리고 태국에 왔다. 버마에 있던 선교사들의 신앙과 실제적인 희생으로 태국에서의 침례교 선교회의 사역은 시작되었다. 아도니람 저드슨의 부인인 앤 하젤틴 저드슨은 몰메인에서 그녀가 보았던 태국인 전쟁 포로들중에서 그녀가 사역하였기 때문에 그녀가 오랫동안 느껴왔던 단지 흥미의 발로가 아니었다. 그는 그들을 위해 마태복음, 교리문답과 그녀 남편의 전도용 소책자를 번역하였다. 그녀가 뿌렸던 복음의 씨앗은 많은 열매를 맺었는데 신약성경의 번역자로서 기억되는 한 사람에 의해 태국에서의 침례교 선교회의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죤 테일러 죤스(Rev. John Taylor Jones) 목사 부부가 태국에 도착한 것은 1833년 3월 25일이었다. 그들이 태국에 도착할 당시에는 미국 공사인 혼 E. 로버트(Hon E. Roberts)는 태국과 미국과의 최초의 협약을 맺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새로운 선교지인 태국 안에 있는 자국선교사들을 온전히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태국은 미국에서 너무도 멀었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오는 우편은 1년에 한차례 정도만 가능했다. 당시에는 우편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배의 선장이 외국인에게 줄 우편물을 모아가지고 가서 항구에 도착하게 되면 그들의 이름을 불러서 전해주곤 했다.
태국으로의 입국은 종종 중국으로 가는 전단계 정도로 여겼다. 비록 죤스 박사는 확정적으로 태국을 위한 사역으로 임명되었고 또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태국 사람들을 위한 사역에 드렸을지라도 종종 “죽의 장막”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 즉 태국과 버마의 후방으로부터 혹은 동부해안을 따라 접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에 대하여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방콕 인구의 많은 부분이 중국인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중국어 예배가 죤 박사 자신의 집에서 초기부터 드려지고 있었다. 1833년 8월 22일에 침례를 받은 최초의 세 명의 회심자도 모두 중국계였다. 이것은 짜오프라야강에서 받은 최초의 기독교 침례였다. 세 사람중의 한 명은 분티라는 사람으로 그는 회심을 공고백하였고 자신은 유아세례론자라고 하였던 구즐라프에게 침례를 받았다. 한동안 분티는 믿음이 어린 소수의 중국인들 가운데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1,836년 후반부터는 그는 그의 그룹으로부터 완전히 떠났다. 함께 침례를 받은 다른 두 사람은 첵 팽과 첵 쌩쌔였다. 한 선교사가 중국을 섬기기로 결정한 것은 1,934년의 일이었다. 이는 윌리암 딘(Rev. William Dean)으로 1835년 7월에 방콕에 도착하였으나 오는 도중 싱가폴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죤 박사가 모아놓았던 중국계의 연약한 회중들에게 테치우 방언(Teh Chiew dialect)으로 설교하기 위한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렇듯 선교사역의 두 부분이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죤스 박사는 태국 선교부를 계속해서 책임지고 이끌었으며 가능하면 빨리 전도지 팜프렡과 쪽복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가 태국에 도착한 다음해 초에 다소의 문헌을 인쇄하기 위해 그는 싱가폴로 여행을 했는데 그곳에는 태국어를 인쇄할 수 있는 인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그의 태국어 신약성경 번역과 개역 등에서 잘 엿볼 수 있는데 1851년 그가 죽기 전까지 두번을 교정하였다. 죤스 부인은 그책의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구즐라프에 의해서 준비되었고 후에 죤스 박사에게 전승된 태국어 사전을 준비하였다. 전도지와 쪽복음의 배포 사역은 선교사들의 중요한 선교사역중의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팜프렡은 설교를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이 강력하게 원했기 때문이고 인쇄물은 어느 곳이나 자유롭게 갈 수 있었으며 수로나 중국 정크선을 이용하여 내륙 깊숙이까지도 들어가곤 했다. 그 당시 태국에는 인쇄기가 없었기 때문에 문학작품은 매우 귀했고 또 드물었다. 초기의 수상가옥은 문서를 배포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침례교 선교부 인쇄소는 1836년에 선교회 지부들을 섬기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 인쇄소는 선교사역에 가치있는 기관으로 빠르게 발전하여 갔다. 그리고 많은 사역을 감당하였다. 장로교도 1,861년에 그들의 인쇄소를 설립하기 전까지는 침례교 출판사나 ABCFM 선교회 출판사를 이용하여 인쇄하였다.
죤스 박사 부부는 방콕으로 오는 길에 싱가폴에서 데이빗 아빌 목사를 만났는데 포르투갈 영사인 세느뇰 칼로스 데 실베이라로부터 자연스럽게 초기 선교사들에 대하여 친절하고도 소상하게 배울 수 있었다. 아마도 그의 이런 도움을 통하여 죤스 박사는 포르투갈 영사관 배후의 조그만 땅을 렌트할 수 있었다. 그곳에 그는 자기 집을 건축하였는데 매우 단순하였다. 기둥은 나무였으나 곁은 대나무로 가로질렀다. 한면은 티크 나무로 판을 만들어 단단히 묶어서 문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한데에는 적합한 일꾼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초기 선교사들은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시던 주님께 대한 충성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결국 이 재산은 후에 침례교 선교부에 팔렸다.
태국은 독특하게 동양에서는 최초로 조직된 개신교 교회를 갖고 있었다. 이 교회는 1,837년 딘(Dr. Dean)선교사에 의해서 방콕에서 11명의 설립 신자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교회는 느렸지만 성장하였고 1,843년 침례교 센터로서 홍콩과 함께 침례교 선교회로부터 중국에 가는 독특한 선교회로 인정받았다. 태국의 제일 침례교회는 사역을 책임지는 선교사로 딘 목사(Rev.W. Dean)를 선교사로 파송하였을 뿐만아니라 1843년 5월 28일에 조직된 교회로서 창립 멤버들이 교회 규정에 싸인하였고 그중 두명(탕 뚜이와 꼬에 박)이 방콕에서 침례를 받았다. 태국은 또한 중국이 기독교 사역을 위해 개방하였을 때 개척자가 되려는 다른 많은 선교사들을 훈련하였으며 다른 나라(중국)를 위한 기독교 훈련학교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감당하였다. 딘이 1842년 홍콩으로 옮겨간 이후에는 1,865년까지 태국에서 다시 사역은 시작되지 않았다. 이후 피엘데(Miss. A.M. Fielde), 죠쉬아 고다드(Rev.Josiah Goddard), 슠(Mr. J.I.Shuck), 에쉬모어(Rev. W.Ashmore), 페트리지(Rev. Petrige) 부부 등은 그들의 선교사역의 첫해를 태국에서 보내기는 했지만 그후 그들은 모두 중국으로 옮겨갔다.
태국인들 가운데서의 사역은 느렸지만 진전이 있었다. 1,838년에는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태국인들이 30명에서 50명 가량되었다. 태국에서 신약성경은 이미 완성되었고 전도처도 센터에서 떨어진 곳에 만들어졌다. 몇 명 안되는 어린이들을 위한 조그만 기숙사가 있는 학교가 각처에 만들어졌다. 딘 박사는 초기에 특별한 성경연구와 사역의 훈련을 위하여 조그만 조력자 과정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많은 소그룹 사역자들에 의해서 많은 난관들을 용감하게 대처하였다. 무엇보다도 무더운 기후 가운데 많은 선교사들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선교사들의 어린 자녀들이 너무 많이 죽어 경종을 울렸고 성인 선교사들 가운데서도 갑작스런 죽음이 찾아왔다. 그들의 다른 의무를 시행할 능력을 가지지 못했던 여성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되던 학교 사역은 잠시 동안 포기해야만 했다. 선교지에서 필요한 인원만큼 선교사들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태국 선교부내에 있던 중국 부서가 문을 닫고 죤스 박사가 떠났을 때 태국을 위한 사역은 전적으로 연기될 수 밖에 없었다.
초기 시대의 침례교 선교회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중의 하나는 1,851년에 일어난 대화재로 말미암아 침례교 선교부의 전 재산, 즉 숙소, 예배당, 인쇄기, 활자, 제본소, 도서관, 학교, 개인 재산 등을 포함하여 다 타버린 것이었다. 1,850년에 인쇄된 침례교 신약성경의 새로운 개정판도 완전히 전소되었다. 장로교 선교회와 미국선교회(AMA) 대표들과 외국 대사들을 물론이고 태국의 귀족들도 이 당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아직은 미약한 침례교 선교회를 돌봐주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다. 이 위기가 끝난 후에도 다른 선교단체들은 계속해서 쪽복음이나 다른 기독교 문학작품을 배포하는데 있어서 침례교 선교회의 인쇄소가 다시 설립될 때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다른 부분의 격려가 있었다; 전도지가 읽혀지고 있었고 기독교의 진가를 인정하는 표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포기되었던 학교 사역이 다시 시작되었다. 번역 작업은 계속되어서 죤스 박사가 죽기 전에 구약성경의 태국어 번역이 시작되었다.
1,851년에 침례교 선교회나 태국인을 위한 기독교 사역에 있어서 일어난 또 하나의 커다란 손실은 태국에서 18년간 사역하였고 전체로는 20년간을 선교사로 사역하였던 죤스 박사가 그해 9월에 이질로 말미암아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이것은 매우 특별한 것으로 죤스 박사의 영향력을 대체할 만한 사람이 당시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인을 위한 사역은 점점 더 확대되었다. 1858년 경에는 중요한 지점에 예배 처소가 두 곳이 있었고 1859년에는 선교회 전체로는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여 복음을 듣는 인원이 적어도 150명에서 200며 가량은 되었다. 1860년에는 선교사회가 조직되어 현지인 성서보급원을 두었으며, 또한 재봉협회도 잘 운영되고 있었다. 인쇄소가 다시 설립되어 급증하는 기독교 서적에 대한 요구를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태국 정부는 모든 지역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으며 선교사들은 존경할만한 사람들로 인식이 되었다. 몽쿳왕(H.M. King Mongkut)의 요청에 따라 침례교 여성 선교사들도 그의 왕궁에서 가르치도록 다른 두 선교단체의 여성선교사들과 합세하였다. 그들은 왕궁에 사는 부인들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왕궁이 좋아한다는 것은 백성들도 좋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기회는 잠시후에 상실되었는데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은 싱가폴 신문을 침례교 선교부 대문 앞에 잘못 둔 것 때문이었다. 이 당시 모든 선교사들이 정부에서 부과한 칙령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곧 오해는 풀렸고 이전처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비록 왕궁의 부인들과의 접촉은 끊겼지만 왕가에서는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을 경제적 으로 지원하는 등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1860년에는 태국인들을 위한 독립된 교회의 조직과 선교회를 분리할 수 있을 만큼 무르익었고 사역에 따른 기관들도 자연스레 분리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방콕의 태국침례교회는 1861년 4월에 14명의 창립멤버를 중심으로 설립되었고 후에 태국 교회는 몇 년간 다소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865년에는 딘 박사(Dr. Dean)가 그의 아내와 딸들을 데리고 다시 태국으로 돌아와서 많은 열매를 맺었던 중국인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첫해말의 사역에 대해 이렇게 썼다. “올해보다 더 행복한 것을 이 세상에서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왕궁에서의 특권과 사람들이 그에게 갖는 존경심과 그의 경험되어진 리더쉽 하에서 거대한 약속의 세기가 시작되었다. 1867년에는 40명이 침례를 받았다. 이 숫자는 이전 해에 침례받은 5명을 포함하여 초기 30년 동안 여러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통하여 침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의 숫자와 같다. 예배당 두 곳이 머지 않아 세워졌다. 선교 역사상 처음으로 현지인 목회자가 세워졌다. 딘 박사는 번역되었던 신약성경을 다시 개정하기 시작하였다. 교회 식구들도 1867년 53명에서 1882년에는 500명으로 늘어났다. 당시에는 6개 교회가 있었으며 7번의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다.
1869년에 태국 선교를 연장하기로 한 것은 가장 잘한 일이었다. 1849년 선교회에 가입한 스미쓰(Rev.S.J. Smith) 선교사가 미국에서 돌아오고 난후 1853년 죤스 박사의 미망인과 결혼하였다. 이 당시 그는 침례교 선교회를 떠났으며 강 하구의 방코렘에 독자적으로 인쇄소를 오픈 하였다. 그가 구입하였던 이 재산은 아직까지 선교회 소속으로 남아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영문판 태국 주말신문, 태국 보고, 태국 전화번호부와 태국어로 된 ‘사얌 사마이’, 영태문법서, 태영문법서, 산수책, 기독교 교리문답서, 영태 사전, 태영 사전(그가 죽을때에 출간할 준비가 되었으나 끝내 출판되지 못하였음)과 많은 양의 산문집과 시집을 출판하였으며 인쇄기와 활자를 태국 전역에서 인쇄소를 운영하려는 태국인과 중국인 인쇄업자들에게 팔았다.
중국에서의 적절한 사역이 잘 시작되고 또 사역이 잘 이루어졌을 때 태국에서의 중국선교를 분리하는 것이 지혜로운가에 대한 의문이 침례교 선교사들 사이에서 계속 제기되었다. 딘 박사가 부재시에 사역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를 대체해서 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1882년 딘 박사 부인의 죽음과 딘 박사의 건강 악화로 말미암아 위기를 불러왔다.
1893년에 현직 미국 공사이며 태국에서 유일하게 침례교 선교사로 남아있었던 이튼(Rev.L.A. Eaten)목사는 침례교 본부, 포르투칼 영사관 근처의 선교회들의 오래된 공원묘지를 팔았고 남겨진 묘지들은 1851년에 몽쿳왕이 외국 개신교 공동체에 하사한 개신교 공원묘지에 이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침례교의 모든 사역을 아담센(Dr.H.Adamsen) 박사에게 이양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장로교 선교회의 척 박사(Dr.M.A.Cheek)의 누이인 그의 부인은 1891년에 소천하였기에 그의 자녀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실제적으로 태국에서의 침례교 선교회의 사역은 이때 끝났다.
아담센(Dr.H. Adamsen) 박사는 태국에서 태어났고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했었던 스미스 박사 (Rev.S.J.Smith)에 의해 미국으로 보내졌다. 태국에 돌아온 후 그 자신이 성공적으로 제약회사를 설립하였다. 잠시 동안 그의 관대한 헌신과 복음주의적인 실천가들로부터 많은 격려가 있었다. 한가지 특이한 일은 Peguans(탈라인들)을 위한 사역이 활발하게 진행된 것이었다. 1896년에는 침례받은 70명 중에 24명이 버마의 탈라인들이었으며 43명이 중국인이었고 3명이 태국인이었다. 두개의 새로운 예배당이 1897년에 만들어졌다. 주, 야간 학교에는 학생들로 가득 찼다. 새로운 형태의 도시선교가 시작되었다. 아담센 선교사 시대가 개막되었고 마침내 그의 전생애를 올인하였다. 아담센 박사는 남부 중국 침례교 선교회 대표로서 사역의 책임을 떠맡게 되었는데 이는 그 지역에 거주하는 침례교 선교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동안 포스터(Rev.J.M.Foster) 목사가 스와토로부터 방콕을 정기적으로 방문할 수 있었다. 그는 학생들이 중국 남부에 가서 공부한 후에 자신의 적응된 나라인 본국에 돌아와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기를 희망하였다. 페구안의 사역은 버마이 몰레인 지역에 있는 침례교 선교회의 중요한 사역이 되었다. 다른 선교단체들은 태국 사역을 위해 열심히 사역을 하고 있었다. 버마의 몰레인 지역의 탈라인들은 번역 사역을 통해 그들과 계속적인 접촉을 가졌다.
침례교 선교회 재산은 마지막으로 팔렸고 침례교 선교회는 1927년에 태국에서의 사역을 포기하기로 하였다. 예배당이 있었던 조그만 부지는 1837년에 딘 박사에 의해서 조직된 방콕의 중국 침례교회의 예배당으로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60년 동안 미국의 침례교회는 태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다. 이들의 직접적인 노력의 결과로써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왔다. 침례교 선교사들과 다른 선교단체의 선교사들과의 밀접한 교제 덕분에 태국에서의 모든 기독교 사역을 위한 토대를 구축하는데 그들의 삶을 바친 초기 선교사들의 전도, 교육, 인쇄와 문서 사역의 확장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침례교회가 태국 주재 선교사들을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들이 내려놓았던 짐을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그 짐을 옮기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