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해석의 실마리!
방금 설명해드린 대로, 본문 해석의 가장 큰 걸림돌은 현재시제입니다. 그런데 그날 새벽 2시경, 난생처음으로 현재시제에 대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7장 7-25절을 괜히 두 단락으로 나누고 별 의미가 없는 것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해 온 것은 아닌가?'
이것이 저에게 든 생각입니다. 로마서 7장 1-4절은 율법이 아니라 새 남편인 예수님께로 가서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또, 5-6절은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 아래 있었고 율법으로 말미암는 정욕이 우리로 하여금 사망을 위해서 열매를 맺게 했었으나, 그러나 "이제는" 주님을 통해 율법에서 벗어났으므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럼, 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할까요? 바꾸어 말해서, 왜 우리가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면 안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율법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죄를 이기고 순종함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롬8:1-4). 이 중, 먼저 바울은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면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또, 자기를 예로 들어서 설명했는데, 그것이 단지 7-13절이 아니라 7절부터 25절까지입니다. 그래서 '현대 학자들의 복잡한 설명이 아니라 내가 신학생 때 읽은 찰스 피니의 단순한 설명이 더 옳은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 읽은 『승리의 원리』라는 책에서 찰스 피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을 해석할 때 우리는 항상 그가 말하고 있는 요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논증의 범위와 그가 고려하고 있는 목적과 그가 말하고 있는 요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 여러분이 어떤 사람의 말의 요점을 이해할 때 여러분은 그가 그 요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만 하며 그의 목적과 무관하거나 그것과 일관성이 없는 의미를 그의 말에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이 규칙을 간과하면 모든 말이 뒤죽박죽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항상, 어떤 말이 적용되고 있는 주제의 빛 속에서 그 말을 해석해야 합니다. ...
사도는 온전히 죄의 주관하에 있는 사람의 습관적 특성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제시하는 것은 전혀 그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율법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율법하에 있는 사람의 경우를 취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묘사하고 있었다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반대되는 논증을 하고 있었던 셈이 됩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면 그것은 율법이 정욕을 굴복시키고 사람을 성화시키는 데 효과가 없다는 것뿐 아니라 복음 또한 효과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은혜하에 있으며, 율법의 정당성을 변호하는 데 있어서 율법하에 있지 않고 은혜하에 있는 사람들의 경험을 제시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이처럼 피니는 7-25절을 두 단락으로 나누지 않고 그 전체가 율법의 무능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이 율법하에 있는 사람을 예로 든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단락을 나누지 않고 하나로 보면 거짓 해석이 단번에 분별되어 날아가고 참 해석을 위한 든든한 기초가 놓여집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유난히 단락 나누기를 좋아합니다. 또, 로리드 존즈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강해설교자들이 그러합니다. 단락에 대한 설명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합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현대 학자들은 피니와 달리 7-25절을 두 단락으로 나눴습니다.
하지만, 14절이 "왜냐하면"으로 시작합니다. 저는 그래서 얼마 전부터 '14절에 왜냐하면이 있는데 왜 단락을 나누지? 적어도 문장이 끝난 후 단락을 나눠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의심스러웠습니다. 또, 14절 전후의 내용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소주제의 차이는 있지만 대주제는 같습니다. 먼저, 7-13절의 소주제는 율법의 계명은 정욕을 일으키고 오히려 더 죄를 짓게 만든다. 그런데 어떻게 율법을 통해 말씀대로 살 수 있느냐? 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무능력하고, 율법으로는 죄를 이기고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다음으로, 14-25절의 소주제는 우리가 율법을 알고 계명대로 살기 원해도 육체 때문에 원하는 바 선을 행할 수가 없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노예로 살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7-13절과 14-25절의 소주제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주제가 같습니다. 둘 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죄를 이기고 순종할 수 없다! 따라서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둘 사이에 확실한 구분이 없습니다. 차로로 따지면 실선이 아니라 점선입니다. 그래서 저는 14절부터 반드시 두 단락으로 나눌 필요가 있나? 상당히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제가 아니라 시제에 주목했고, 당연하다는 듯이 두 단락으로 나눴습니다. 그 뒤, 앞 단락은 과거시제, 뒤 단락은 현재시제이므로 큰 차이가 있고 서로 다른 내용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러면서 시선을 현재시제에 고정시켰고, 그 결과 현재시제에 의해서 교란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본문 해석의 길에 놓여있는 함정입니다.
이쯤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큰 그림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제가 보여주고 싶은 큰 그림은, 단지 7장 7-13절이 아니라 7-25절까지가 율법으로는 죄를 이기고 말씀대로 살 수 없단는 것을 바울이 자기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설명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은 지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과거시제를 썼든 현재시제를 썼든 시제와 상관없이 두 단락 모두 무조건 바울의 과거의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토마스 슈라이너가 본문이 구원받기 전의 상태라는 견해의 근거들을 소개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두 번째 구조적 논증은 13절과 14절 사이의 연관성과 관계있다. 13절은 율법이 아니라 죄가 사람의 사망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14절을 소개하는 '가르'는 율법이 아니라 죄가 어떻게 인간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가를 설명하는 이유로서 기능한다(Kummel 1974: 58, Gundry 1980: 236). 이제 만일 14-25절이 13절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또한 13절이 비중생자를 가리킨다면(이 구절이 사망과 율법 경험을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14-25절은 당연히 불신자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13절과 14절 사이에 있는 긴밀한 관계를 해치고 이다. 뿐만 아니라, 그 전에 논의의 주제가 율법이라고 할 때 바울이 비그리스도인의 경험으로부터 중생자의 경험으로 변겼시켰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다."
옳은 지적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본문은 무조건 바울의 과거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고 절대로 구원받은 신자의 상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저는 7-13절이 아니라 25절까지 모두 바울이 율법하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든 것이라는 사실을 7장 1-6절의 문맥고 14절의 "왜냐하면", 그리고 두 단락의 대주제를 통해서 증명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7장의 앞부분과 본문의 첫 구절을 비롯한 자체의 내용뿐 아니라 그 뒤를 보아도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8장 1절의 "이제"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7장 6절에도 "이제는"이 나옵니다. 그 구절에서 "이제는"은 5절의 "육신에 있을 때"와 반대됩니다. "육신에 있을 때"는 예수 믿기 전이고, "이제는"은 예수 믿은 후입니다. 그런데 8장 1절에 다시 "이제"가 나옵니다. 이것은 간접적으로는 7장 6절의 "이제는"을 받고, 직접적으로는 7장 25절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라는 감사를 받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바로 7장 7-25절 전체가 예수 믿기 전이고, 8장은 믿은 후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결정적이지요! 때문에 어거스틴의 계승자들이 아무리 우기고 그럴듯한 궤변을 늘어놓아도 본문은 절대로 바울의 현재 상태가 아니라 구원받기 전 율법 아래 있을 때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연구하면서 절대로 이 큰 틀, 즉 이 경계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한편, 이것은 본문 해석에 있어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 있었던 저에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한 줄기 희망의 빛이었습니다. 또한, 저에게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든든한 토대와 실마리가 되어주었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