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도성 북문 숙정문(肅靖門)이다. 이 북문의 첫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다.
숙정은 '북방의 경계를 엄하게 하여 도성 안을 편안하게 하고 정숙하게 한다'는 뜻이다.
'도성 북쪽의 경계를 엄하게 하여 도성 사람들이 정숙하고 맑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한다'
숙청문이 담고 있는 의미라고 한다.
한양도성을 축성할 때 성문의 이름은 유교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가운데 오행(五行)에 따라
방향을 잡아 동쪽은 인(仁) 서쪽은 의(義) 남쪽은 예(禮)를 취하였다. 북쪽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북쪽 방향인 지(智)는 숙종 때 한북문(漢北門)으로 불리던 것을 홍지문(弘智門)으로 보강된다.

숙청문은 태조 5년(1396) 9월 도성의 제2차 공역이 끝나고 도성 8문이 존공되었을 때 함께 이루어져
이름이 붙여졌다. 숙칭 북문(北門)으로 불리기도 했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의 상소로 숙정문[觀光坊東嶺路]을 폐쇄하였으며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숙정문을 없애고 오른쪽에 새로이
문을 세우라고 명하였으나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숙청문이 폐쇄된 이후 북문으로 불리웠다.
중종 때 북정문(北靖門)으로 그 이름이 바뀐다.선조 때는 숙정문(肅靖門)으로 변경된다.
당시 도성의 북문은 기우(祈雨)를 위하여 열리면서 소음을 피하기 위해서 시장을 옮기고
북 치는 것을 금지히였다. 이같이 정숙한 기운을 진작시키는 의미에서 발음이 조용한
숙정문으로 바뀌어진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한양도성은 북악산(342m), 낙산(126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길이 약18.2Km,
높이는 약12m의 성곽으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계획 되었다.
한양도성은 태조4년(1395)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곧바로 정도전이 수립한
도성 축조 계획에 따라1396년 농한기인 1,2월의 49일동안 전국에서 11만8천명을 동원 성곽의 대부분을 완공하였고
가을 농한기인 8,9월의 49일 동안에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는 동시에
4대문(동쪽 흥인지문, 서쪽 돈의문, 남쪽 숭례문, 북쪽 숙청문(뒤에 숙정문으로 개칭)과
4소문(동북 홍화문(뒤에 혜화문으로 개칭), 동남 광희문, 서북 창의문, 서남 소덕문(뒤에 소의문으로 개칭)을 준공 하였다.
그후 27년이 지나 세종4년(1442)1월 겨울 농한기에 전국에서 약 32만명의(당시 한양인구 약10만명) 인부와
2,200명의 기술 자를 동원 하여 한양도성을 전면 석성으로 수축 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 사업 시행 하였는데
(공사로 인한 사망자수 872명) 이것이 지금 한양도성의 골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