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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나온 말
㰡일말의 가책을 느끼느냐?㰡 㰡가책받을 일로 고심 중이다. 㰡
꾸짖으며 책망한다는 뜻을 지닌 '가책' 은 범어 'avasadana'를
번역한 말이다. 출가대중이 지켜야 할 생활규범으로 율(律)이
있다. 이는 수행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정해 놓은 규율이며 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을 경우는 엄격한 처벌 규정이 뒤따른다.
<사분율>에는 <건도품(健度品)>이 나온다. 이는 수행자의
계조목에 관해 상세히 기술한 뒤에 수계.포살.안거 등 교단의
의식과 작법.생활예의를 규정해 놓은 내용이다. 모두 20품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건도품> 가운데 '가책건도'가 있다.
가책건도란 악행을 일삼는 수행자들을 가책하는 법을 설한
내용이다. 본래 지혜라는 이름을 가진 수행자와 노자나라는
수행자가 싸움을 좋아해 수시로 싸움을 벌일 뿐 아니라, 주위의
수행인들을 부추겨 싸움을 걸자 부처님께서 이 두 사람을 꾸짖어
'가책갈마(呵責磨)'를 제정했다고 한다. 따라서 승단에서
싸움이 일어났을 경우 중재하는 법과 처벌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
수행 중의 잘못을 여러 대중 앞에서 꾸짖고, 서른 다섯 가지의
권리를 박탈했다고 하니, 교단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엄격한
꾸짖음이 뒤따랐던 것 같다. 만약 불법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문 따위는 따지지 말아야 한다. 비록 고귀한 가문에
태어났다 해도 극악한 행위를 한다면 사람들이 다 가책할 것이니
이는 하천하다고 해야 할 것이며…. (大莊嚴經論) 이처럼
율장에서만이 아니라 경장 곳곳에서도 '가책'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비난하다, 꾸짖다, 비난해서 물리치고 배격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오던 불교용어 가책이 이제는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가 돌아보고 책망한다는 뜻으로 쓰여지고 있다.
남에게 음식을 구걸하는 일, 음식을 얻어먹는 일, 그것이
걸식이다. 우리나라에도 가난하던 시절, 깡통을 들고 걸식을 하던
거지들이 무리지어 모여 살던 때가 있었다. 이 걸식하는 모습을
보기가 흔한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각설이타령은
남아 있어 흥을 돋우기엔 그만이다. 걸식이란 범어 'painda-pata'
에서 나온 말이다. '음식을 주는 것'이란 뜻인데 '음식을 구하는
것'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인도에서는 불교 이전의 시기부터 자랄
때는 스승 밑에서 공부를 배우며 걸식 수행을 하고, 혼인 뒤에는
직업을 갖고 가정생활을 하며 걸식하는 이들에게 음식을 베풀
의무가 있었다. 그 시기를 마치면 숲에 머무르며 수행을 하고,
4단계 유행기 에는 모든 집착을 떠나 각지로 배움을 찾아 다니게
된다. 이 시기 역시 걸식으로 먹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것을 불교에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남방불교에서는 지금까지도
스님들께 음식을 베푸는 것이 사회적인 관례이다. 걸식에는 열
가지 이익이 있다고 한다. 생명을 유지하며, 삼보에 머물게 하며,
자비심을 내게 하고, 부처님의 교행(敎行)을 따르게 한다. 또
교만한 마음을 깨뜨리고, 베푸는 선근(善根)에 감동하며, 걸식의
모습을 보고 선근심을 내고, 남녀.대소의 모든 연이 소멸되며,
차례로 걸식하므로 평등심을 내게 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걸식하는 데 꼭 지켜야 할 네 가지를 당부하였다. ① 심신을
바르게 하여 바른 계에 머무를 것(住正戒). ② 용모를 바르게
하여 위의를 지켜서 보는 이가 공경하고 신심을 일으키게 것
(住正威儀). ③ 부처님이 가르쳐 준 법도에 맞게 할 것이며 다섯
가지 부정을 여읠 것 (住正命). ④ 육신은 고(苦)의 근원이며
음식을 먹는 것은 몸을 유지하며 수행하기 위한 것으로 알
것(乞食四事). 우리나라에서도 걸식수행을 한 바 있으나 지금은
사회적 현실을 고려해 종단 차원에서 금하고 있다.
지방에 가보면 마을 어귀에 이끼낀 비석들이 나란히 자리한
모습을볼 수가 있다. 오랜 옛날 그 마을에 덕을 많이 베푼 이들의
공을 기려서 세운 비들이다. 공덕비 중에는 탐관오리들이 스스로
세운 경우도 없지 않으나 대부분 공덕을 진심으로 기리며 주민들이
세운 비석들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도록 공덕을 쌓은 이나 그
공덕을 잊지 않고 기리는 이들이나 한결같이 그 뜻이 아름답기만
하다. 공덕은 범어로 'guna'이다. 예로부터 불교에서는 공덕을
많이 닦고 쌓을 것을 강조해 왔다. <법화경>의 제17품부터
19품은 <분별공덕품> <수희공덕품> <법사공덕품>으로 공덕을
찬탄하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남자. 선여인이 이
<법화경>을 수지하여 읽고 외우며 설하고 베껴 쓰면 이 사람은
마땅히 800 눈의 공덕, 1,200 귀의 공덕… 모두 청정하게
되느니라. (法華經 法師功德品) 부처님께서는 탑을 세우고, 절을
세우고, 사경을 하는 것이 큰 공덕이라 하셨다. 우리 민족도
입춘이나 대보름 전날, '공덕'을 쌓아야 액을 면한다는 적선공덕의
풍속을 이어오고 있다. 남몰래 냇물에 징검다리를 놓거나 험한
길을 다져 놓거나, 걸인들을 위해 음식을 짓거나, 행려병자에게
약을 주는 등의 공덕 쌓기를 서로 질세라 행하였다. 상여가 나갈
때 요령을 흔들며 부르는 향도가에도 공덕에 대한 대목이 나온다.
헐벗은 이, 옷을 주어 구난(救難) 공덕 하였는가. 굶주린 이,
알곡을 주어 걸립(乞粒) 공덕 하였는가. 깊은 물에 다리 놓아
월천(越川)공덕 하였는가. 병든 사람 약을 주어 활인(活人)공덕
하였는가. 부처님께 공양 올려 염불공덕 하였는가… 공덕은
결과에 악서 쌓아 가고 닦아 가는 과정에 보다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겸손함이 없이 건방지고 방자함을 일러 교만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교만'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보시제일인 급고독장자의 며느리 옥야(玉耶)이다. 그녀는 자신의
친가가 부호라는 점과 스스로의 미모로 자신감이 넘쳐
'교만방자'하여 며느리로서의 예를 지키지 않았다. 이런 옥야에게
참된 아내의 도리에 관해 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내용이 바로
<옥야경>의 이야기다. 이와 정반대로 겸손과 하심의 으뜸가는
'상불경보살'이 있다. 욕하고 돌을 던지는 이들에게까지 공손히
합장 배례하며 '불성을 지닌 그대들을 공경한다. '고 이야기 했던
보살이다. 교만할 만(慢)자는 범어 'mana'의 번역이다. 자신과
남을 '비교'해서 남을 깔보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지나쳐 쉽게
우쭐거리는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교만이다. 중생은 갖가지
번뇌에 의해 업을 일으키고 그에 따른 괴로움의 과보를 받아
미혹의 생사에 매달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는 것을 최상의 목적으로 삼는다. 구사종에서는
탐(貪).진(瞋).만(慢)의 셋을 불교의 진리를 미혹하게 하는
번뇌로 꼽고 있다. 오상분결(五上分結)이란 중생에게 있는 다섯
가지 번뇌로서 속계. 무색계에 결박돼 해탈할 수 없게 하는
요인이다. 색탐결.무색탐결.도거결(掉擧結).교만결.
무명결이 그것이다. 대승보살이 지녀야 하는 마흔여덟 가지의
계율인 48경계 가운데 교만에 관련된 계가 두 개 있다. 자신의
지혜와 힘만 믿고 경률의 깊은 이치를 물으면 가벼운 마음으로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잘못 설명하는 교만벽설계(敎慢僻說戒)와
아는 것이 없으면서 교만무례하여 자신의 지혜와 힘과 지위.
권세.재력 등을 믿고 지혜 밝은 승려를 도리어 가볍게 여기고
법을 묻지 않는 교만불청법계(橋慢不請法戒)가 그 두 가지다.
"국토개발계획은 진행 중이다. " "국토의 보존을 위해 우리 모두
애쓰자. " 나라의 땅 영토, 한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영역을
국토라고 한다. 범어 'ksetra'의 번역으로, 경전 곳곳에서 자주
대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국토다. 'ksetra'는 찰(刹)이라고
음역되는데 음역한 '찰'과 번역한 '토'가 반복되어
'찰토(刹土)'라고도 한다. 국토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유마경>의 서품에 해당하는 부분이 <불국품(佛國品)>이다. 이
품에서는 비야리성에 사는 장자의 아들 보적이 칠보로 꾸민 일산을
부처님께 받들어 올리는 인연으로 부처님께서 여러 부처님의
청정한 국토를 나타내 보이고 보살의 청정한 국토의 행에 관해
설하고 있다. 보살이 그의 정직한 마음을 따라서 곧 행(行)을
발하게 되고… 그의 중생을 성취함에 따라서 곧 부처님의 국토가
청정하게 되고, 부처님의 국토가 청정함을 따라서 법을 말씀함이
청정하게 되고 곧 지혜가 청정하게 되며 그 지혜의 청정함을
따라서 그의 마음이 청정해지고 그의 마음을 다라서 온갖 공덕이
청정해지느니라. < 마경>에 관한 무아(無我)의 소(疏)에서는
부처님의 국토를 가로 세로의 2가지 뜻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
안을 또 4가지의 국토로 나누는데 범부와 성인이 함께 사는 국토,
미혹됨을 끊고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인(因)을 닦은
사람이 사는 국토, 무명혹(無明惑)을 끊은 사람이 사는 국토,
법신이 머무는 국토가 그것이다. '마음이 청정함에 따라 국토가
청정하여진다.' 고 했다. 끝없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구도심으로,
이웃과 더불어 고통을 나누고 기쁨을 더하는 보살행으로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을 실천할 때 이 땅이 곧 보살의 국토,
청정 불국토가 될 것이다.
내복과 같은 뜻의 속옷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에 비구는
승가리(僧伽犁).울다라승(鬱多羅僧).안타회(安陀會)의
삼의(三衣)를 입도록, 그리고 비구니는 삼의 외에 승지지(僧祗支).
궐소락가(厥蘇洛迦)를 더하여 오의를 입도록 정해져 있었다.
승가리(sangihati)는 마을이나 궁중에 들어갈 때 덧입는 옷으로
중의(重衣) 혹은 대의(大衣)라고 부르는데 9조 이상 25조까지의
가사를 말한다. 울다라승 (uttaras angha)은 예불이나 독경.
법문을 할 때의 의는 일상의 작업이나 잠자리에 입는 평상복으로
이것을 내의(內衣)라고 하며 5조 가사이다. 승지지(samkasika)는
삼의 속에 입고 왼쪽 어깨와 겨드랑이를 덮는 가사로 비구니가
입는 옷이지만 비구도 입을 수가 있었다. 궐소락가(kusulaka)는
장방형의 천 양쪽 끝을 꿰매어 겹쳐서 허리에 치마 모양으로 입어
허리띠를 묶는 옷으로 비구니만의 옷이다. 이 밖에도 부처님께서
삼의나 오의에 속옷과 같은 친의를 입도록 허락하셨으며 비구들이
입는 속바지로 사륵(sataka)등이 있다. 이들 옷은 넝마 같은
천들을 모아 엮어 만드는데, 죽은 사람을 싸서 버린 천, 시신이
입은 천, 소유자가 없어 버려진 천, 버려져 더러운 천들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의복에 대한 옥심을 버리게 되며 또
도난을 방지할 수 있었다. 수행자들은 기워 입은 삼의와 바리때
하나로 만족하며 수행에 힘써 지금까지도 '삼의일발(三衣一鉢)'은
청정한 수행자의 무소유정신과 청빈사상의 상징이다. 중국에서는
당나라의 측천무후가 선승들에게 내의를 하사했다고 전하며 그것이
지금과 같은 모양의 가사가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불려지는 노래를 '대중가요'라고 하고 그
노래를 부르는 이를 '대중가수'라고 부른다. 사람들 사이에서
두루 읽혀지는 소설을 '대중소설' 이라 하며 일반 서민들 누구나가
이용하는 목욕탕을 '대중탕'이라고 한다. 많은 수의 사람들을
일컫는 개념이 바로 '대중'이다. 생산과 인구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산업사회속의 각 개인은 거대한 공장의 톱니바퀴가 되어
개인의 개성을 말살당한다는 의미도 대중 속에 포함된다. 그러나
대중의 본뜻은 많은 수의 스님들, 불교교단을 구성하고 있는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혹은 비구.비구니.사미.
사미니) 등 사부대중을 가리키는 것으로 '법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총칭하기도 한다. 범어 'mahasamgha'의 번역으로
경전마다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이르셨다. '는 구절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백여 년이 흐르고
불교교단은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뉘는 근본분열을 갖기에 이른다.
전통과 형식적 계율을 중시하고 수행 위주의 생활을 하는
상좌부와는 달리 대중부는 진보적인 수행자를 중심으로, 모든
중생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점과 중생은 평등하다는 가르침에
충실한 입장이었다. 이러한 분열은 부파불교의 시대로 접어 들고,
그 이후 5백여 년 뒤에 일어나는 대승불교의 근원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역사를 기반으로 1980년대 중반부터 우리 불교계에서는
'불교의 대중화운동' '대중불교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그것은
은둔적이고 폐쇄적이었던 과거 불교의 양상을 벗어나 오늘을
살아가는 오늘의 세대들이, 함께 뜻을 모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고자 하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새로운 신앙운동'이라
하겠다.
'집을 고칠 목공도구를 갖고 오라.' 할 때의 '도구'는 일할 때
쓰는 연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물에 잠긴 가재도구를 말린다. '고
할 때의 '도구'는 생활 속의 '용품'을 의미한다. '그 일을 선전의
도구로 삼지 말라.'고 할 때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과 방법을 일컫는 단어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여러 이유
중에 하나도 '도구를 만들어 썼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도구의 본뜻은 수행자가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의발이다. 수행자가 반드시 소지해야 할 여섯 종류의 생활도구로
'육물(六物)'이 있다. 삼의(三衣)와 발우, 좌구(坐具 ; 앉고 누울
적에 바닥에 까는 장방형으로 된 방석과 요의 겸용), 녹수낭(물을
길어서 물 속의 벌레들을 걸러내는 주머니)이 그것이다. 이를 더
줄여서 삼의일발 (三衣一鉢 ; 세 벌의 옷가지와 발우 하나)이라고
한다. 청빈과 무소 를 상징하는 도구이다 이 밖에 <범망경>
에서는 수행에 필요한 도구로 열여덟 가지 물건을 꼽고 있다.
양지(楊枝 ; 이쑤시개).조두(操豆 ; 손을 씻을 때 비누로
사용했던 팥분말).석장 (錫杖 ; 벌레를 쫓는 지팡이).향로.
물병.도자(刀子 ; 머리를 깎고 손톱을 깎는 손칼).수건.
부싯돌.섭자(콧수염을 빼는 쪽집개).승상(繩床 ; 의자).
경전과 계본.불보살상에 앞의 육물이 더해진 것이 십팔물이다.
이들 도구는 '선지식이 일체의 도에 이르는 데 도움이 되는
용구'라고 하여 하여 수행자가 탁발 걸식을 하거나 유행(遊行)을
할 때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들이다. 우리가 지니고 사는
도구가 이에 비해 너무 쓸데없이 많은 것은 아닌지 곱십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도장에 다닌 지 일 년 만에 검은 띠를 땄다. " 검도나 유도.
태권도.택견 등의 무예를 가르치는 곳을 '도장'이라고 한다.
범어 'bodhi-manda'를 번역한 것으로 불교에서는 '도량'이라고
발음한다. 도량의 본뜻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장소라는
의미다. 즉,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 금강좌를 가리키는 말로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장소의 총칭으로도 쓰인다.
만약 꿈속에서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했다면 사실은 깨달음도
없고 중생도 없는 것이 되거니와 불법의 본성도 이러하여 도량에서
얻으신 아무것도 없느니라.(諸法無行經) 이 밖에도 너댓 가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곳에 당우(堂宇)가 마련되어 있건
그렇지 않든 간에 수행의 장소라면 어디라도 '도량'이라 한다.
정직한 마음이 도량이니 헛되고 거짓됨이 없기 때문이요, 행을
실천하는 것이 도량이니 능히 일을 이루기 때문이요, 깊은 마음이
도량이니 공덕을 더하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이 도량이니
그릇되고 잘못이 없기 때문이요….(維摩經 菩薩品) 광엄동자가
유마거사에게 도량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마거사는 이처럼
중생세계 속에서도 항상 정직한 마음 등을 지니는 것이 참다운
도량이라고 답한다. 대승불교의 수행관이 잘 드러나고 있다.
수행을 위한 사원의 또 다른 이름으로 '도량'이 쓰이기도 한다.
현명한 왕이 있어 닭이 울 때에 일어나 먼저 도량에 들어가
불보살님께 경례하며… 한다면 안팎이 한마음이 될 것이다.
(華嚴經) 수나라의 양제(煬帝)가 천하의 사찰을 도량이라고 개칭한
바 있고 우리의 경우 궁중의 불당을 일컬어
'내도량(內道場)'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은 절 전체를 도량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무예를 닦는 곳은 원음대로 '도장'이라 부른다.
국어대사전에 보면 '1) 수도하는 승려가 곡식을 얻으려고 이집
저집 돌아다니는 일 2) 거지나 동냥아치가 돈이나 물건을 구걸하는
일, 또는 그렇게 얻은 물건' 이라고 나와 있다. 즉, 걸식이나
탁발과 같은 의미다. 종단협의회 차원에서 현재 탁발과 걸식은
금지돼 있으나, 부처님 당시부터 집집마다 음식을 구하러 다니는
일은 생활규율이었다. 당시 수행하는 사람들이 지키던 열두 가지
생활조문(十二頭陀) 중에 두번째, 세번째 항목이 바로 걸식에 관한
부분이다. 식사는 언제나 걸식을 해야 하며, 걸식을 할 때는
가난한 집과 부잣집을 가리지 말고 차례로 빌어야 하며…(梵網經)
이렇게 고생스런 탁발을 자처했던 것은 먹는 문제를 초월해
수행자로서 마음 밝히기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며, 평소 사람들에게
보시공덕을 쌓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처럼 부처님 당시에는
'음식'을 얻었던 것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 오면서
'곡식'이나 '재물'을 시주로 얻는 것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시대 때 왕륜사(王輪寺)의 '비로자나장륙금'
불사를 위해 스님들이 동냥을 다녔던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본래
동냥은 동령에서 나온 말이다. 동령이란, 요령을 흔든다는
의미다. 탁발하러 다니면서 스님들이 요령을 흔들었던 것이, 아예
걸식의 대명사가 되었고, 그것이 발음마저 바뀌어 동냥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제는 발음과 더불어 의미도 바뀌어 수행과 보시를 위한
일이 아닌, 거지들의 '구걸행위'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거지들이 밥이나 찬거리를 얻으러 다니는 것을, 스님들의 탁발에
비유해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이제는 깡통 들고 각설이 타령을
부르며 동냥다니는 거지를 '연극무대' 위에서나 만날 수 있는
시대가 되어 버렸으니…….
신문이나 방송 등 보도매체를 통해 차마 인간으로서는 저지를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범죄 소식을 접할 때면 '말세다, 말세야.'하며
혀를 찰 때가 있다. 지하철 역이나 광장 주변에서 '말세'를
외치는 사이비 종교인들도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말세란 '지구의
종말'이다. 또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재림할 때까지를 말세라고
한다. 말세가 끝날 때에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본디 불교용어인
말세는 불교의 '삼시(三時)'에서 나온 말이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뒤에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그 가르침이 여법하게
실행되지 않는다는 역사관에 입각해서 시대를 정법(正法).
상법(像法).말법(末法)으로 나누고 있다. 교설과 그 실천(行)과
결과(證)가 모두 갖추어진 시기를 정법시라하며 교설과 실천만의
시기를 상법시 그리고 교설만 있는 시기를 말법의 시기라고 한다.
이 삼시의 기한에 대해서 여러 학설이 있는데 대개 부처님 입멸 후
천 년 혹은 5백 년을 정법시, 그 다음 천 년을 상법의 시기, 그
다음 만 년을 말법의 시기라고 이름한다. 어느 설을 취하든
오늘날이 '말세'의 범주에 들어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다.
말세가 되면 세상이 혼탁해져 도덕과 풍속이 쇠퇴하며 악법이
성행하고 정의가 사라진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북제시대부터
말세사상이 성행해 신행선사(信行禪師)의 삼계교(三階敎),
선도(善導)의 정토교(淨土敎) 등에서는 스스로의 종지가 말세에
적합한 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말법의 시기가 끝나면 가르침
까지도 들을 수 없는 법멸(法滅)의 시대가 있다고 한다.
제자들아, 말세가 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기 어렵고 만나기
어려우니라.이제 너희들은 친히 보고 친히 들으니 일찍이 여러
겁에 걸쳐 배우고 수행한 사람들임을 알겠다. 한 번 들은
다음에는 다시 물러섬이 없거라.
남들이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생각에 빠져든 것을
'피해망상'이라 한다. 피해망상이 심각해져 식사조차 제대로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음식 속에 남들이 독약을 넣었다고까지
여기기 때문이다. 턱없이 부풀려서 엉뚱한 생각에 깊숙이
빠져드는 것을 '과대망상'이라 한다. 예컨대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미모가 뛰어나다고 여기거나 머리가 남다르게 좋다고 혼자
생각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망상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본다면
정신이상에서 오는 망령된 생각으로 잘못된 생각을 옳다고
주장하는 증세라고 한다. 이치에 맞지 않는 그릇된 생각,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잘못된 견해, 그것이 바로 망상이다.
범어 'vikalpa'의 번역으로 분별(分別) 이라고도 번역한다.
비슷한 용어로 망상분별.허망분별.망상전도 등이 있다. 마음의
집착으로 인하여 사물의 본디 모습을 분간하지 못하고 함부로 잘못
생각하는 것을 망상이라 한다. 온갖 존재가 다 산란하고 미혹한
마음일 뿐 꿈 같고, 불길 같고, 물속의 달, 거울에 비친 그림자
같아 망상에서 생겨난다.(維摩經) 올바르지 못함을 '망(妄)'이라
하고 그 올바르지 못한 망으로 분별하고 집착하는 것을
'상(想)'이라 한다. <능가경> 권2에서는 열두 가지 종류의
망상을 열거하고 있다. 언설(言說).소설사(所說事).상(相) .
이(利).자성(自性).인(因).견(見).성(成).생(生) .
불생(不生).상속(相續).박부박(縛不縛) 등이 그것이다.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에는 여덟 가지 망상을 들고 있는바,
자성(自性).차별(差別).섭수적취(攝受積娶).아(我) .
아소(我所).염(念).불념(不念).구상위(俱相違) 등이다.
범부들의 미혹한 마음은 제법의 상(相)을 일으키되 그 상에
집착하고 그 상에 이름을 붙여 그 이름에 따라 상을 취하니 얻는
바가 부실하다. 고로 이를 망상이라 한다.(大乘義章)
부끄러운 일로 남을 대할 낯이 없을 때 '면목 없다. '는 표현을
하게 된다. 면목은 얼굴 생김새를 이르는 말인 동시에 '체면'과도
상통하는 단어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모를 경우 면목부지
(面目不知)'라고 한다. 불교에서 나온 이 '면목이란 단어는
'수행자의 일곱 가지 복이란 몸에 병이 없어서 용감하고
튼튼함이요, 면목이 청정하고 단정함이요.…' 라고 <범망경>
에서 보여지듯이 '용모'라는 의미로도 쓰여진다. 그렇지만 얼굴
가운데에 눈이 제일 중요하듯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마음의
본성(면목)이 가장 중요함을 이르는 단어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즉 깨달음의 경지에서 나타내는 그대로를 조금도 가감하지 아니한
채로의 만인이 지니고 있는 심성 곧 그것이 본래 면목인 것이다.
한편 이 단어는 선종의 용어로서 6조 혜능(慧能)대사가 맨 처음
사용했다고 전한다. 5조 홍인(弘忍)대사로부터 의발을 전수받은
6조 혜능은 강을 건너 남쪽 으로 떠나고, 그의 의발을 빼앗기 위해
신수(神秀)를 따르는 대중들이 혜능을 뒤쫓는다. 그 가운데
혜명이란 수좌를 만나게 되었을 때 혜능은 이렇게 묻는다. " 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 것이오.그렇다면 이러한 때에
그대의 본래 면목은 어떤 것이오?" 이 한마디에 확연히 한 소식을
얻은 혜명이 그를 향해 삼배를 올리자, 혜능은 '스스로 자신의
본래 면목을 되비추어 보라.'고 권한다. 자주 '본래 면목을
잃어가고 있다. '는 표현처럼 면목 앞에 '본래'를 붙여서 흔히
사용하고 있다. 본래 면목은 본체(本體) 그대로의 상태, 참모습을
일컫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면목 즉 불성이라 하겠다. 본래
면목을 찾는 일이 우리의 과제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인생이란 꿈과 같고 물거품 같아 무상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봄꽃도 한때라고, 이 세상의 온갖 존재들은 변화하고 멈추지를
않아 우리는 삶의 덧없음 악에서 문득문득 '무상함'에 젖곤 한다.
무상은 범어 'anityata'의 번역이다. 물심(物心)의 모든 현상은
한 순간에도 나고 변화하고 멸하므로 상주(常住)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생(生)한 것은 마침내 사멸하기
마련이며(生者必滅), 융성한 것은 반드시 쇠퇴하고 (盛者必衰),
서로 만나면 반드시 이별한다(會者定離)고 말한다. 살아 있는
자는 다 죽음으로 돌아간다. 젊었던 용모는 누구나 늙어
쭈그러지고…일찍이 어느 사물도 무상에 의해 삼켜지지 않은 것은
없었던 터이다.(無常經) 무상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찰나 동안에도 생겨나고 머무르고 변화하고 소멸된다는 찰나무상과
한평생 동안에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다는 상속무상이 그것이다.
한편 무상은 죽음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가령 목숨이 백 살을
채우며 칠보가 갖춰져 온갖 쾌락을 누린다 해도 염라왕의 사자가
찾아 오면 무상을 면치 못한다.(心地觀經)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제석천은 이렇게 무상을 읊는다. 모든 것은 덧없고 이는
나서 없어지는 법, 나고 없어지고 없어지면 그만이니 없어져
고요함은 즐거움이다.(大般涅槃經) '인생무상' '삶의 회의'하는
식의 허무론이 아니라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무상의 가르침은
덧없음을 바르게 파악하는 진리의 눈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이렇다 할 생각 없이 '무심'하게 길을 지나쳐 버리는가
하면, '무심결'에 한동안 않던 버릇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저
'무심코' 꺼낸 이야기가 큰 희망이 되기도 하고, 아내의 생일을
기억조차 못하는 남편을 더러는 '무심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감정도 의식도 없는, 아무 생각 없는 마음상태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단어 '무심'은 불교에서 나온
말이다. 불교에서는 허망하게 분별하는 삿된 마음, 미혹한 마음을
여읜 것을 가리켜 무심이라 한다. 부처님을 믿고 향하여 그
마음에 더러움이 없고 무심의 가르침을 또한 믿으면 이것이 굳은
믿음이다.(廣博嚴淨經) 온갖 그릇된 생각을 떠난 마음상태, 망념을
떠난 진심(眞心) 그것이 무심이다.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이
마치 그림자 같아서 자성(自性)을 얻을 수 없기에 무심이라 하며
잠시 동안 심식(心識)이 쉬어서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하여 무심
이라 한다. 만약 망심(妄心)이 일어나지 않으면 깨달음에 이른다.
이를 무심이라 한다.(宗鏡錄) 무념무상의 상태로 수행에
정진하는 사람을 '무심도인'이라 한다. 이 경우에는 범상한
마음도 부처님의 마음도 없고 그저 무심한 상태다. 범심이 없어
일체 범부 안에 있고, 불심이 없어 일체제불도 그 안에 있는
마음을 지닌 도인이라는 것이다. 보조 지눌(普照知訥)은 무심에
관해 '무심이란 마음 자체가 없다고 무심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고 일에 걸리는 마음이 없으면, 저절로
비었으면서도 신령하고 고요하면서도 묘한 것이다. 그것은 망심이
없다는 것이지 진심의 묘용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석탄이 무진장으로 매장돼 있다. " "차가 무진장 밀리더라."
엄청나게 혹은 하염없이 많다는 의미로 자주 쓰이는 말이
무진장이다. 한자를 그대로 풀어 보면 '다함이 없는 창고'라는
뜻이다.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는 재물과 보화가 있는 곳을
무진장이라고 한다. 보살은 여러 가난하고 궁한 자에게는
무진장을 나타내 그로 인하여 권하고 인도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보리심을 발하게 하여 준다.(維摩經 佛道品) 불교용어 무진은 끝이
없음, 잘 융화돼 서로 방해함이 없음을 뜻해 원융무애와 같은
의미로도 쓰인다. 이와 같이 무진한 덕이 많아 한량없는 상태,
다함이 없는 덕을 지니고 있는 것을 비유해 불교에서는
무진장이라고 한다. 넓은 덕이 궁함이 없음을 가리켜 무진이라
하며 무진한 덕을 포함하는 것을 장(藏)이라 한다.(大乘義章)
<80화엄>에 보면 보살이 여러 부처님을 볼 수 있는 열 가지
무진장을 얻는 것에 관해 설하고 있다. <화엄경> 권21에는
믿음의 곳간(信藏) 등 열 가지 무진장을, <화엄경> 권25에서는
부처님을 친견(見佛)하는 등의 열 가지 무진장을 얻는다고 했다.
청정한 공덕을 지닌 사람이 있다 하자.이 사람이 부처님 계신
곳이나 성문이 있는 곳에 이르러 예배하며 우러러 뵈어 수승한
가르침을 듣고 큰 환희심을 느끼고 크게 좋은 마음을 지녀
보리심을 일으킨다면 이는 무진장의 공덕이어서 큰 과보가
있으리라.(尊那經) 예로부터 절에서는 보시금을 저렴한 이자로
빌려 주는 서민금고와 같은 성격의 구민기관을 운영하였다. 이를
무진재(無盡財)라 한다. 한 사람이 정법을 만나 많은 이를
교화하는 것은 마치 하나의 등불이 차례로 옮겨져 수많은 등불이
되는 것 같다고 하여 무진등(無盡燈)이라 부른다.
보통사람이란 의미로 쓰이고 있다. '나 같은 범부가 알 턱이
있나.'하는 식의 남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이 평범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필부필부(匹夫匹婦). 장삼이사(張三李四)와
함께 '범부중생' 모두 즉 평범한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나 본래
불교에서 말하는 '범부'의 의미는 다소 다르다. 범어
'pathag-jana'의 번역으로 '이생(異生)'이라 직역하기도 한다.
이생이란 여러 가지 번뇌나 견해에 의해서 갖가지 업을 일으킨
뒤에 갖가지 과보를 받아 여러 세계에 태어나는 존재라는 뜻이다.
즉 어리석어 아직 번뇌에 얽매여 생사윤회 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지옥은 범부의 허망한 분별에 의해
생기는 것이고 축생.아귀에 이르러서도 역시
같습니다.(大法陀羅尼經) 수행의 단계로 보자면 견도(見道)에
이르기 전을 범부라고 한다. 처음으로 무루(無漏)의 지혜가
열려서 사제(四諦)를 보는 지위를 견도라고 부른다. 소승 에서는
공부가 완성되어 존경과 공양을 받을 수 있는 성인의 지위로
성문사과(聲聞四果)를 꼽는데 그 이하의 단계를 범부라고 한다.
대승에서는 보살이 성불 하기까지 수행하며 오르는 52지위 가운데
제41위(位)를 초지(初地)라 하는데 그 이상을 성인이라 하며 그
이하를 범부라고 부른다. 즉 사제의 도리를 완전히 알지 못하는
지혜 얕은 사람이란 의미이다. 범부들은 신심(身心)의 고뇌를
만나면 갖가지의 악행을 일으키기 마련이니 몸에 병이 걸리거나
평등한 도리를 몰라 차별을 일으키고 고뇌하게 되는 경우,
신.구.의 상업으로 갖가지 악을 짓게 된다.(華嚴經)
㰡내 자녀들은 나의 분신과 다름이 없다. 㰡 㰡이 작품은 온 생애에
걸쳐 완성한 나의 분신이다. 㰡 마치 한 나무에서 갈려 나간
가지처럼 자신이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말할 때
'분신'이란 표현을 쓴다. 한 핏줄로 이어진 자녀들이거나 혼신을
쏟아 완성한 작품이라면 분명 자기 자신과 다름이 없는 또 다른
'자신'일 것이다. 불교에서 나온 말인 '분신(atmabhava-nirmita)'
의 본래 의미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불보살들이 중생구제를 위한
방편으로 모습을 나누어 나투는 것을 분신이라 한다. 불보살들이
중생교화를 위한 자비의 방편으로서 시방세계에 몸을 나누어
나타내시는 모습은 <법화경>을 중심으로 여러 경전 속에서 자주
엿보인다. 다보불의 깊고 중한 서원이 '저 부처님의 분신인 모든
부처님들을 남김없이 한곳에 모아 놓아야 내 몸을 나타내
보이리라.' 하셨느니라.그러하기에 나의 분신인 시방세계에서
법을 설하는 여러 부처님들을 이제 마땅히 모으리라.(法華經
見寶塔品) 그때 석가모니의 분신인 여러 부처님으로서 무량 천만억
다른 곳 국토에서 오신 그분….(法華經 從地踊出品) 천태종에서는
<법화경>에 의거해 80평생을 사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은 화신
이시며 그 실체인 보신은 오랜 옛적에 실제로 성불하고 미래
영겁에 걸쳐서 항상 영축산의 정토에 머무신다고 한다. 이를
구원실성(久遠實成)이라고 한다. <법화경>의 실상(實相)
사상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구원실성의 본불, 즉 우주
근원의 생명이신 법신불의 분신이라고 보고 있다.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당치 않은 일 그것이 '불가사의'한
일이다. 기울고 있지만 무너지지 않는 피사의 사탑, 사람이
가만히 누워 있어도 물에 뜨는 사해, 인도의 타지마할 궁전…,
이를 일컬어 세계의 7대 '불가사의'라고 한다. 불가사의는 범어
'acintya'의 번역인데 마음속으로 헤아려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란
뜻을 지녔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월한 매우
놀라운 상태를 이르기도 한다. 만약 가르침을 듣기 좋아하여
싫증을 내지 않으면 불가사의한 법을 깨닫게 되리라.(華嚴經)
증일아함 권18에서는 세계와 중생과 용(籠)과 국토경계를
불가사의라 했다. <지도론(智度論)> 권30에서는 중생에게 늘고
줄어듦이 없는 것(衆生多少), 온갖 차별은 업력에 의해 생기는 것
(業果報), 선정의 힘에 의해 신통력 등을 나타내는 것(坐禪人力),
용이 한 방울의 물로 큰비를 내리는 것(諸龍力), 불법에 의해 큰
깨달음을 얻는 것(諸佛力)의 다섯 가지 불가사의가 있다고 한다.
이 중에서 불법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 가장 수승한
불가사의라 한다. 그래서 '깨달음음'의 경지를 불가사의한
경지라고 이름한다. 수보리여, 이 경은 불가사의하며 가히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공덕을 지니고 있으니 부처님께서 대승을 발한
자를 위해 설한 것이요, 최상승을 발한 자를 위해 설한
것이다. (金剛經) <화엄경>의 <불가사의품>에서는 여러
부처님에게 열 가지 불가사의가 있다 한다. 국토(刹土).청정한
원력(淨願).종성(種姓).출세(出世).법신(法身).음성(音聲).
지혜(智慧).신력자재(神力自在).무애주(無碍住).해탈(解脫)
등이 그것이다. 불가사의 해탈을 밝힌 <화엄경>이나
<<유마경>>을 가리켜 '부사의 해탈경'이라 부른다. 또 아미타불은
불가사의광여래라하며 보살 가운데에 부사의혜(不思議慧) 보살도
있다.
㰡그 사람은 사리가 밝다.㰡 㰡그렇게도 사리 판단을 못하느냐?㰡
세상에서 자주 쓰이는 말 가운데 하나다. 사리에 어긋난다느니,
사리에 닿는 얘길 해보라느니, 이럴 때 쓰이는 '사리'란 사물의
이치, 일의 도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바르게 행해야 할
기본적인 원칙에 기준을 두고 사용하는 용어이다. 그런데 이 말
역시 불교용어다. '사'와 '이'가 합친 단어이다. 사(事)란 사상
(事象) 혹은 사법(事法)이라 해서 차별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고, 이(理)는 진리.이성(理性) 즉 보편적인 진리.평등의
본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미혹한 중생의 차별적인 사상을
사(事)라고 하는데 대해서 그 본체인 보편적 진리를 이(理)라고
한다. 인연에 따라 나고 멸하고 변화하는 현상을 '사'라고
한다면, 그 실체를 '이'라 하는 것이다. 화엄종의 우주관은
사법계(四法界)로 설명이 된다. 우주를 현상과 본체로 보면 네
가지가 있는데, 사법계(事法界).이법계
(理法界).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사사무애법계
(事事無碍法界)가 그것이다. 사법계는 우주의 사물은 각기 구별을
갖고 한계가 있다는 것이며 이 법계는 우주의 사물 보두 본체가
진여라는 뜻이다. 이사무애법계란 이와 사가 서로 융합한다는
것이고 사사무애법계란 각각 연기하는 것으로 서로가 자성을
지키지만 사와 사를 서로 상대시켜 보면 서로 상응하여 교섭함을
말한다. 사리에 대한 교리적인 설명은 여러 군데에서 보여지고
있는데 종파 간의 입장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사의 교리를
쉽게 이해하자면 금으로 만든 시계.반지.목걸이 등의 물건은
사의 세계이며, 근본이 되는 금은 이의 세계라 비유할 수 있겠다.
큰스님이 주시는 법문을 사자후라고 하지만, 국회에서 시종일관
열변을 토하는 연설이나 거침없는 웅변의 경우에도 '사자후'라는
표현이 자연스레 활용되고 있다. 국어사전에는 ① 바른 도를
설하는 것, 부처님의 한 번 설법에 뭇 악마가 굴복해 귀의함을
비유 ② 크게 부르짖음 ③ 질투심이 강한 여인이 남편에게
암팡스레 떠드는 일의 비유라고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 것도
본디 '사자후'의 의미와 부합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후(吼)자는
'사자 우는 소리 후'자다. 사자후는 범어 'simhanada' 의
번역으로 사자가 포효하는 소리라는 뜻이다. 법을 연설하여
두려움이 없기가 마치 사자가 울부짖듯 하여 (猶獅子吼) 보살이
강설함이 우레가 떨치듯 하며….(維摩經 佛國品) 천둥이 치는
듯한 음성으로 설법하는 것이 마치 백수(百獸)의 왕인 사자가 한
번 포효하면 숱한 짐승들이 굴복에 따르는 것과 같음을 비유하는
용어가 사자후이다. 본래 불교에서는 거룩하신 부처님의 두려움
없는 위대한 모습을 동물의 왕 '사자'에 비유하곤 한다. 존귀하신
부처님께서 앉으시는 자리를 '사자좌'라 하고, 부처님의
걸음걸이를 '사자보(獅子步)'라 한다. 사자가 모든 동물 가운데
가장 강하고 겁이 없는 것과 같이 부처님의 마음도 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뛰어남을 비유해 '사자심'이라 하며, 오른쪽 옆구리를
아래로 하고 누워서 발을 포개고 가시로 몸을 덮고 바른 일을
생각함을 일컬어 '사자와법(獅子臥法)'이라고 한다. 이 보살들은
법의 성(城)을 잘 보호.수호키 위해 바른 법을 받아 지니고
사자후를 잘 해서 그 이름이 시방세계에 들린다. (維摩 佛國品)
<대방광사자후경>을 줄여서 <사자후경>이라고도 부른다.
꽃이 지는 모습을 '산화'라고 한다. 떨어진 꽃도 '산화'라고
한다. 그러나 가장 흔하게 쓰이는 것은, '백마 고지에서 산화한
넋을 기린다. '와 같은 경우이다. 마치 꽃잎이 떨어지듯 그렇게
전장에서 죽어간 젊은이를 가리킬 때 산화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불교에서 나온 말인 산화는 본래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마명(馬鳴)의 <불소행찬(佛所行讚)>
<탄생편>에서도 그런 장면과 쉽게 만날 수 있다. 대용왕들은
기뻐하며….아기 부처님 탄생을 맞아서 만다라꽃 흩날리며
오롯한 마음으로 찬탄하셨네.경전의 곳곳에서도 천상의 꽃들이
무수히 뿌려지는 감동적인 장면들이 종종 등장한다. 신라 경덕왕
때에 갑자기 해가 둘씩 떠서 열흘 동안 비춘 일이 있었다. 이때
해를 하나 없애기 위해 왕의 부탁으로 월명(月明)이 지은 향가가
'도솔가'다. 이 노래를 부르며 산화공양을 올렸더니 기이한 해가
사라졌다고 한다. 도솔가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오늘 이에 꽃을
부리며 노래부르니 뿌린 꽃이여 너는, 곧은 마음의 명을 받아
미륵부처님 뫼셔라.(三國遺史) 이처럼 불전에 꽃을 뿌려서 공양을
올리는 의식은 인도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꽃으로 장식하거나 꽃을 뿌리는 의식이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붓다가야의 부처님 족상이 새겨져 있는 장소에서 순례자들이
간절한 마음 으로 흩뿌린 꽃들을 볼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법회 때 행하는 주요의식 네 가지(범패.산화.
범음.석장) 중에 하나가 산화공양이었다. '원아재도량 등의
게송을 외면서 올리는 의식 이었다고 전한다. 이 의식을 전담하는
스님을 '산화사(散華師)'라 불렀다고도 불렀다고도 한다. 전통
불교식 혼례(華婚式) 때에도 신랑신부를 인도하는 화동(華童)들이
꽃을 뿌리는 의식이 있다. 지금까지 전해 오는 대표적인 산화공덕
의식이다.
월남전 직후에 유행하던 대중가요 가운데 이런 노래가 있었다.
㰡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김상사…….㰡 이처럼 상사라는 단어는
군대의 계급으로 먼저 떠올려지기 마련이다. 하사.중사.상사,
상사가 진급을 하면 준위, 이런 순위로 하사관의 계급이
이루어진다. 불교에서도 '상사.중사.하사'란 단어가 있다.
이때의 상사란 보살을 말한다. 자신을 위해 수행하고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인 두 가지 생각이
없는 이를 일컬어 하사(下士)라고 한다. 자신의 해탈만을
추구하고 타인을 구제할 뜻을 내지 않는 이를 중사(中士)라고
한다. 이에 반해 상사는 자리이타의 정신을 지녀 나와 이웃을
함께 구제하려는 '보살'을 가리키는 용어다. 보살에게는
대사(大士, 마하살타).개사(開士, 보리살타).초사(超士).
성사(聖士) 등 무수한 다른 이름이 있다. 그리고 번뇌를 끊고
끊지 않고, 퇴전과 불퇴전, 생사육신과 법성육신, 돈오와 점오
등의 보살이 있다고 하며 깨달아 아는 깊고 얕음에 의해 무려
52위(位)의 계위를 세운다. 항상 무익한 사람을 피하고 어리석은
자와 가까이 말라. 어진 벗을 생각해 따르고 상사와 가까이
지내라.(法句經) 이처럼 쓰이는 상사는 '뛰어난 존재' '최상의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 여래십호(如來十號)라고
해서 부처님을 부르는 열 가지 이름 가운데 '무상사(無上士)'란
용어도 있다. 'anuttara'의 번역으로 아뇩다라라고 음역되는
무상사는 존재하는 것 가운데 제일 높은 어른, 그 이상 위가 없는
분이란 뜻이다.
㰡나는 네게 남겨줄 재산도 명성도 없다. 내 이름만을 너는
상속할 수밖에 없다. …㰡 어느 시인이 노래한 '내 아들에게'란
시의 한 구절이다. 이처럼 상속이란 단어는 재산이나 권리를
물려받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사전에는 ① 뒤를 이음 ② 일정한
친족적 신분관계가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한쪽이 사망하거나
또는 일정한 법률상의 원인이 발생하였을 때 재산권이나 의무
일체를 이어받는 일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가끔 보도를 통해
재벌가의 후손들이 막대한 재산상속 문제로 아귀다툼을 벌인다는
소식을 접할 때가 있다. 한 푼이라도 챙기려고 혈육끼리 소송을
거는 일은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본디
의미와는 무관하게 세속적인 의미로 굳어져 가고 있는 '상속'이란
단어의 본뜻은 '항상 변화하는 연속적 개체'라는 뜻이며, 범어
'samtana'의 번역으로 개체의 연속을 의미한다. 저 곡식의
씨로부터 싹이 나오고 싹으로부터 줄기와 잎 따위가 상속하고, 이
상속으로부터 열매가 생겨나는 것과 같으니 씨를 떠나서는
상속하여 열매가 생길리 만무하다.(中觀論) 원인은 결과를 낳고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어 또 다른 결과를 낳아, 원인과 결과가
차례로 연속해서 끊어지지 않는 상태 그것이 바로 '상속'인
것이다. 불교용어 가운데에는 사람의 죽음 혹은 등불이 꺼지듯이
한동안 상속하던 법이 결국 없어지고 마는 것을 '상속무상'이라
한다. 연속적으로 일어나 단절함이 없음을
;撰啖灌(相續不斷)'이라 한다. 외부의 객관 대상에 의해
어리석은 망념 으로 언제나 집착이 상속해 끊어지지 않는 식(識)을
'상속실'이라 하며 오로지 아미타불 생각 만을 쉴 새 없이
계속하는 것을 '상속심'이라 한다.
얼굴이 좋아졌다든가, 얼굴 표정이 좋아보일 때 흔히 얼굴에 대한
존칭으로 '상호가 좋아보인다. '고 이야기한다. 온화한 모습이거나
밝은 표정일 때에 주로 쓰이는 말이다. 부처님의 모습을 상호라고
부르던 것이 세월의 흐름 속에 '보통명사화'된 모양이다. 범어
'laksana' 와 'anuvyanjana' 가 합쳐진 용어로 상호는 '32상(相)
80종호(種好)'의 합성어이다. 부처님의 몸은 일반인과 다른
훌륭한 형상을 갖추게 되는데 그 가운데 눈에 뛰게 두드러진 것을
32상으로 구분하고, 미세하여 보기 어려운 것을 80종호로 나눈다.
이 둘을 합쳐 상호라 한다. 32상은 전륜성왕도 갖추고 있고
80종호는 보살에게도 있다. 부처님께서는 과거세 백대겁 사이에
특히 '상호업'을 닦으셨기 때문에 금생에 상호를 성취하셨다고
한다. 32상 가운데 몇 가지를 꼽아 본다면 '발바닥이 땅밑에
밀착하고, 눈동자가 감청색이며, 머리 정상의 살이 상투 모양으로
융기하였으며, 미간에 흰 털이 있는데 평소 오른쪽으로 말려
있지만 펴면 한 길 다섯 자나 되고, 눈썹 끝이 둥글고 원만하며,
치아는 마흔 개, 최상의 미감(味感)을 지니고 있으며...' 등이다.
미세하고 은밀해 알 수 없다는 80종호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손과 발이 원만하고 보드랍고 깨끗하고 광택이 있으며,
걸음걸이가 반듯하고 자늑자늑하여 코끼리 같을 것, 몸과 팔다리가
견고하고 탄탄하여 잘 연결되었으며 목소리가 짙고 웅장하고 위엄
있게 떨치는 것이 사자와 같이 맑을 것, 용모는 보는 이마다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게 하며, 중생을 평등하게 보아 착한
일은 칭찬하고 악한 일은 나무라지만 치우쳐 사랑하거나 미워함이
없으며...' 등이다. 이러한 상호에 근거를 두고 불상을 제작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예배올리는 부처님의 모습은 한결같이
'원만지족'한 상호를 지니고 있다.
지구촌의 축제 올림픽은 저마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사상과 풍습이 다른 전세계의 사람들이 '세계는 하나'임을 느끼는
대회다. 때로는 냉전으로 때로는 화해로, 복잡미묘한 '세계촌'의
기상이변이 일어나긴 하지만 세계는 한집안 이요, 모두 평화를
사랑하고 있음을 실감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 분야에
으뜸가는 재능을 지닌 이를 일컬어 '세계적인 음악가'라든가,
'세계를 재패한 인물'로 소개를 하기도 한다. 세계는 범어
'lokadhatu' 의 번역 으로 본래 부서질 장소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시각적으로는 나고 멸하고 변화함이 있고 공간적으로는
방위 등의 한정된 장소를 세계라고 한다. 세(世)는 변하여 흐르는
것이고, 계(界)는 방위이니 동서남북.동남서북.상하가 계이고
과거.현재.미래가 세이니라.(楞嚴經) 고대 인도에서는 우주의
성립구조를 수미산 설에 의해 설명하고 있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해서 아홉 개의 산과 여덟 바다가 있으며 다시 사해(四海)와
해.달을 합한 단위를 일세계(一世界)라 한다. 일세계를 천 개
합친 것을 소천세계 (小千世界), 이를 천 개 합친 것을
중천세계(中天世界), 이를 천 개 합친 것을 대천(大千)세계라
한다. 대천세계는 소.중.대의 천 세계를 포함하고 있다고
해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도 한다. 서쪽에 이로부터
백만 세계를 지난 곳에 세계가 있으니 이름을 극락이라 하고 그
부처님의 이름은 아미타불이시니라.(大阿彌陀經) 불교의 세계는
유정(有情)세계와 기(器)세계로 나뉜다. 유정세계란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지금은 관용상 주로 산하대지인
기세간만을 세계라고 일컫는 것 같다. 깨끗하지 못한 세상
사람들(世界)을 보아도 증오함이 없어야 한다.(華嚴經)
어린아이답지 않게 똘똘해서 놀라울 때 우리는 '그녀석, 아주
신통하구나.'하는 표현을 한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박학다식하다
하더라도 알지 못한다는 비유를 '제 아무리 신통하다 한들 그건
모를텐데.'라고 한다. 더 말할 나위 없이 아는 것이 깊고 온갖
일에 두루 통달한 상태라는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 '신통'이란 단어
역시 그 어원은 불교에 있다. 'abhijina'의 번역 으로 선정을
통한 수행으로 얻는 작용이며 걸림없이 자재한 초인적인
불가사의한 작용을 일컫는 용어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신통력을 얻은 까닭에 허공에서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숨고
나타나기를 뜻대로 한다.(華嚴經) 신통에는 태어나면서 지니게
되는 것과 수행을 통해 증득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흔히
오신통(五神通)에 누진통(漏盡通)을 합하여 육신통으로 분류한다.
① 신족통(神足通) : 생각하는 곳에 마음대로 가며 마음대로
상(相)을 바꾸는 변화 등의 작용. ② 천안통(天眼通) : 세간의
모든 것을 두루 관찰하는 작용. ③ 천이통(天耳通) : 세간의
모든 소리를 듣는 작용. ④ 타심통(他心通) : 타인의 마음속
의식을 두루 아는 작용. ⑤ 숙명통(宿命通) : 과거세의
생존상태를 두루 아는 작용. ⑥ 누진통(漏盡通) : 번뇌를 끊어
두 번 다시 미혹한 세계에 나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는 작용. 이
가운데 천안통.숙명통.누진통은 부처님과 아라한이 지니는
수승한 삼신통 이라 하여 삼명(三明)이라고도 한다. <구사론>
권27에서는 이 여섯 가지 신통이 모두 지혜(慧)를 본질로 하며
특히 오신통은 선을 닦아 다다른 경지여서 범부들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누진통만큼은 오로지 성자만이 얻을 수 있다
한다. 불법승의 보배는 무량한 신통변화를 갖추어 중생들을
이롭게 하며 잠시도 휴식함이 없노니 이런 뜻으로 하여 온갖
불법승을 보배라고 하느니라.(心地觀經)
㰡또 인연이 있으면 만나겠지요.㰡 㰡인연을 끊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는 할 수 없다.㰡 㰡우리가 만난 것도 다 인연입니다.㰡
누구나가 종교에 관계없이 '인연'의 도리를 믿는 것 같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 마주치는 일, 이 모든 것들을
'인연'으로 돌리며 생활하기 때문이다. 인연은 범어
'hetupratyaya'의 번역이다. 결과를 낳는 내적인 직접 원인이
'인(因, hetu)'이며 주변에서 이를 돕는 간접적인 원인을 바로
'연(緣, pratyaya)' 이라 한다. 중생들이 악도에서 받는 고통이
자못 견디기 어려움을 들으면, 자연 이를 꺼리고 두려워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바, 이런 사람들을 위해 인연을 드러내고자
설법하는 것이다.(四諦論) 원인과 조건, 그럴 만한 이유나 계기
이를 모두 인연이라고 한다. 인연은 연기(緣起)의 다른 표현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요약하여 '연기'와 '중도'라고 할 때 연기는
세계의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고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며
이를 보다 이해하기 쉽게 설한 내용이 십이인연설이다. 인과 연의
화합에 의해 역사가 전개된다고 보기 때문에 불교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니요, 나와 사회가 별개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각자가 사회 발전의 원동력임을 보이고 있다. 경전에
이르기를 '인과 연을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나(佛性)를 보리라.'하였다. 불교가 인연의 법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 이다. 인연의 도리는 불교 이론의
바탕이 되고 있다. 오늘 나의 형편은 과거에 지은 인연으로 인한
것이요, 미래의 모습은 오늘 내가 택하는 인연법에 달렸다.
인연의 법칙을 선하게 엮는 지혜가 좋은 인연을 만나자는 지르길일
것이다.
'아버지로 보려니 너무나 자비롭고 어머니로 보자니 너무나
엄격하다.' 이 말은 석굴암 본존 부처님을 보고 세계적인 고고학자
하마다가 했던 이야기다. 그윽한 미소 가득 자비심을 담고 있는
불상은 한 둘이 아니다. 불교가 곧 자비와 지혜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본디 자비란 불쌍히 여긴다는 의미의 범어
'maitri'에서 나온 자(慈)와 동정.공감.함께 슬퍼한다는 뜻을
지닌 범어 'karuna'에서 나온 비(悲)가 합쳐져 된 말이다.
'자'라는 단어에는 온갖 생명체를 사랑하여 애지중지하며 즐거움을
준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며, '비'는 온갖 생명체를 불쌍히
여겨 괴로움을 뿌리뽑아 준다는 뜻이다. 즉 동정심이 많고
자애로우며 크게 사랑하고 크게 가엾게 여겨 괴로움을 없애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어머니가 그의 외아들을 목숨과 같이
소중히 하듯 살아 있는 모든 것 위에 한량없는 자비의 마음을
내어라… 서 있거나 걸을때나 앉아 있거나 누워서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의 마음을 굳게 지녀라.(小部經典 經集) 부처님의 일생은
'자비행'의 한평생이셨다. 뭇중생이 고통을 여의고 해탈에 들도록
쉼 없는 교화의 길을 떠나셨고 가난한 이웃.병든 이웃.천한
신분의 이웃들의 손을 잡아 이끄시고 북돋아 주신 그 낱낱의
행위와 마음은 자비심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더구나
부처님께서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 까지 자비를 베풀
것을 강조했다. 길을 거닐 때에는 풀도 함부로 밟지 말라 한 것도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음성인 것이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들을 아들과 같이 사랑합니다. 그러나 중생이 병들면 곧
보살도 병이 나게 되고,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의 병도 나을
것입니다. 또 이 병이 무엇으로 생겼느냐고 물으시니, 보살의
병은 큰 자비심 때문에 생겼습니다.(維摩經 文殊師利問疾品)
자기가 저지른 일의 과보를 다시금 자기가 받는 일을 말한다.
㰡그토록 욕심을 내 일을 망쳤으니 자업자득이다.㰡 스스로가 지은
선과 악의 업(業)은 반드시 자기 스스로가 받게 되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이르는 말이 바로 자업자득이다. 비슷하게 사용되는
불교용어로 '자승자박(自繩自縛)'이 있다. 제가 만든 줄로 자기
자신을 옭아매듯이 말과 행동을 잘못함으로써 스스로 옭혀
들어간다는 뜻이다. 즉 제 스스로 번뇌를 일으켜서 괴로워함을
비유하는 용어다. 업이란 말은 '전생의 업 때문'이라든지,
자업자득이란 의미 때문에 다분히 부정적이고 숙명적인 이미지를
주는 듯하지만, 본래 범어 'karman'의 번역이며 '행위'라는
뜻이다. 업은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작용된다고 하는데 이
업으로부터 윤회사상이 발달되었다. .악의 업을 지으면 그것에
의해 즐겁고 고통스러운 과보가 생긴다. 이를 업인에 의해 업과가
생긴다고 한다. 업이 삼세에 걸쳐 실재하므로, 업이 현재에 있을
때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어떠한 미래의 결과가 될 것인가가
결정되고, 과거세에 지은 업의 결과가 현재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누구나 선행을 애써 쌓으려 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업'이란 선을 권하는 적극적인 행위인 것이다. 업의 결과를
이끄는 힘을 업력(業力), 업에 의한 괴로운 갚음을 업고(業苦),
악업으로 인하여 생긴 장애를 업장(業障)이라고 한다. 지옥에서
중생의 선악에 대한 업을 비추는 거울을 업경(業鏡), 과거생에
지은 업을 숙업(宿業), 또 그물 처럼 사람을 잡아 미혹한 세계에
머물게 함을 업망(業網)이라 한다. 자기가 지은 업의 갚음을
자기가 받지 않으면 안되는 이치, 그것이 자업자득이다. 선업을
쌓아 좋은 과보를 얻는 긍정적 이미지 '자업자득'을 이루어 보자.
국가권력의 예속을 받지 않는 것을 뜻한다. 자유하면 평등을
떠올리듯, 자유는 서구의 개념이라는 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그러나 자 역시 불교에서 나온 불교용어이다. 온갖
부처님들께서는 끝 없고 막힘 없는 코가 있으셔서 자유의 피안에
이르신다.(華嚴經)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 독립자존의 상태, 이를 자유라 하겠다. 범어
'avayam svayam-bhuvah'의 번역이다. 자유와 같은 개념으로
'자재(自在)'나 '무애(無碍)'가 있다. 두 용어 모두 자유롭지
않음이 없고 장애될 것이 없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자재인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자 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선지식이여, 마음이 넓고 커서 범세계에 두루 돌아가니 그 작용이
아주 분명한데, 그 쓰임새에 바로 일체를 알아서 일체가 하나요
하나가 곧 일체여서 가고 옴이 자유롭고 마음 바탕에 막힘이 없는
것이 곧 지혜이니라.(六祖壇經) 6조 혜능대사의 자유에 관한
말씀이다. 자유란 말은 선종에서 자주 쓰이고 있다. 만해
한용운의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고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가 없는 사람은 가장
고통스러운 자라.압박을 받는 자의 주위 공기는 묘지로 화하고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의는 지옥이니 우주의 이상적인 최대 실제는
자유와 평화라.
"작업 중에는 사담을 나누지 맙시다." "요즘은 작업장에 틀어박혀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작업이라 한다.
그것은 글쓰는 이가 창작을 하는 일이거나,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는 일이거나, 거리에서 청소를 하는 일, 목공 작업에서부터
컴퓨터 작업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목적과 계획하에서 진행되는
일이라면 모두 작업의 범주에 들어간다. 일할 때 입는 옷을
작업복, 일하는 현장을 작업장, 일의 양을 작업량, 일하는 방을
작업실...현실과 밀접한 단어여서 불교와는 연관이 느껴지지
않는 용어 작업 역시 불교에서 나온 말이다. 내 출가의 제자와
재가의 제자는 작업을 하다가 실패하는 경우?捉 근심하거나
울거나 성내지 않는다.(雜阿含經) 여기에서 작업은 '깨달음을 위한
수행'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정토교의 용어로 보다 많이
활용되고 있는데 왕생을 원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실천하는
방법을 일컫고 있다. 정토교에서는 특히 신행의 단계를
안심(安心).기업(起業).작업(作業)으로 나누고 있다. 안심을
얻은 이후에 신(身).구(口).의(意) 삼업을 통해
오념문(五念門).오정행(五正行) 등을 경책수행하는 것을
작업이라고 한다. 이 작업을 잘 이루어야 좋은 신행의 결과를
이루는 셈이다. 범어 'karman'의 번역으로 몸과 마음에 의한
행위나 활동을 말할 때도 있다. 부처님께서는 온갖 세상의 작업을
나타내시어 중생을 교화하시되 싫증냄이 없으시며 그 마음의
소원을 따라 몸을 나투신다.(華嚴經) 따라서 몸과 마음을 다해
정성껏 일에 몰두한다면 작업 역시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불교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단어다. 오히려
집사.장로.권사하는 식으로 기독교 성직의 한 계급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캘빈의 장로주의로부터 이루어진 교파 가운데
하나가 기독교의 장로교이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래 되면서
번역 과정상 이 단어를 선택해 이젠 마치 기독교 용어인 양 알려져
있지만 장로는 어디까지나 불교에서 나온 말이다. 범어
'ayusmat'의 번역으로 상좌(上坐).상수(上首).수좌(首座)
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는 장로인 난타와 함께 향을 파는 가게에
가셨다가 이르셨다....(佛本行集經) 이처럼 부처님의 상수제자
앞에는 '장로 수보리' '장로 가섭' 등 장로라는 존칭이 뒤따른다.
학덕이 높고 존경을 받는 고승(高僧)의 총칭이다. 또한 나이가
연로한 원로 스님을 일컫는 용어이기도 하다. 장아함부 경전에
이르기를 장로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그 하나는 불문에
귀의한 지 오래돼 법랍(法臘)이 높은 스님을 가리키는
기년(耆年)장로, 교법에 정통하고 덕이 높은 스님을 일컫는
법(法)장로, 그저 이름뿐인 작(作)장로 등이다. 부처님께서
이르시길 만약 나이 어린 비구일 때에는 나이 많은 비구에게
장로라고 부르라 하셨다.(增一 阿含經) 부처님의 제자들이 읊은
시구들을 하나로 엮어 놓은 것으로 <장로게(長老偈)> 와
<장로니게(長老尼偈)>가 있다. 이 게송의 내용 가운데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긴 것이 있는가 하면, <숫타니파타>나
<법구경>과 유사한 시구도 있다. 이들 장로.장로니(비구니)의
시는 모두 초기불교의 사상과 교단의 생활을 보여 주는 문헌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문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도 높게 평가받고
있다. <장로게>에는 모두 1,279송(頌)의 여러 장로의 시들이
수집되어 있으며, <장로니게>에는 총 552송이 실려 있다. 특히
<장로니게>의 경우, 당시 사회가 남녀차별이 극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비구니들의 높고 깊은 깨달음의 경지가 잘 드러나 있다.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이에게 종교를 전해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전도다. 우리는 전도하면 으레 타종교의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떠올리게 된다. 국어사전을 펼쳐 보아도 '주로 교회에서 그
교지(敎旨)를 전해 신앙을 갖도록 인도하는 일' 이라고 정리되어
있을 정도다. 그것과 구별지어서 불교계에서는 전도보다는 전법
이란 용어를 더 많이 쓰고 있지만, 전도는 부처님게서 깨달음을
이루심과 함께 시작된 역사적인 일이다. 홀로 깨달으신 바를 다섯
사람의 동료에게 최초로 펼쳐 보이신 사건을 초전법륜(初轉法輪)
이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의 '전도활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초전법륜을 통해 부처님께서는 전도의 의지를 다지게
되었고 야사라는 청년과 그의 친구들이 부처님께 귀의해 사문이
되었으며 야사의 가족들은 재가제자가 된다. 이들과 함께 첫
안거(安居)를 마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적극적인 '전도의 개시'
를 당부한다. 이것이 그유명한 '전도선언'이다. 그대들은 이미
해탈을 얻었다. 이제 모든 천인과 인간들 속에서 그들을
제도하라.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안락을 위해서
그리고 세상에서 구하는 미래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서 가도록
하라.마을로 들어갈 때는 혼자 갈 것이요, 두 사람이 한곳으로
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그대들은 많은 사람들을 연민하고
섭수하여 이치에 맞게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법하라.나도
우루벨라의 병장촌으로 가서 설법.교화 하겠다. 이와 함께
불교에서 이야기되는 것으로 '설법제일' 부루나존자의 전도의지가
있다. 그가 서방의 유루나국으로 전도를 하러 가겠노라 청했을 때
부처님께서 만약 욕을 듣거나 매를 맞거나 죽임을 당한다면 어찌할
것인가를 묻자 자신의 한몸을 불법에 바친다는 일념으로 순교를
각오한다. 부루나존자의 목숨을 건 전도의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있다. 초전법륜을 통해 부처님께서는 전도의 의지를 다지게
되었고 야사라는 청년과 그의 친구들이 부처님께 귀의해 사문이
되었으며 야사의 가족들은 재가제자가 된다. 이들과 함께 첫
안거(安居)를 마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적극적인 '전도의 개시'
를 당부한다. 이것이 그유명한 '전도선언'이다. 그대들은 이미
해탈을 얻었다. 이제 모든 천인과 인간들 속에서 그들을
제도하라.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안락을 위해서
그리고 세상에서 구하는 미래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서 가도록
하라.마을로 들어갈 때는 혼자 갈 것이요, 두 사람이 한곳으로
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그대들은 많은 사람들을 연민하고
섭수하여 이치에 맞게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법하라.나도
우루벨라의 병장촌으로 가서 설법.교화 하겠다. 이와 함께
불교에서 이야기되는 것으로 '설법제일' 부루나존자의 전도의지가
있다. 그가 서방의 유루나국으로 전도를 하러 가겠노라 청했을 때
부처님께서 만약 욕을 듣거나 매를 맞거나 죽임을 당한다면 어찌할
것인가를 묻자 자신의 한몸을 불법에 바친다는 일념으로 순교를
각오한다. 부루나존자의 목숨을 건 전도의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㰡게으름 피우지 말고 공부에 정진해 보아라.㰡 㰡사업에
일심정진했더니 큰 성과를 얻었다.㰡 오로지 정성을 기울여
노력하고 매진한다는 의미로 자주 쓰이는 말이 정진이다. 범어
'virya'의 번역이다. 자리이타를 궁극적 목표로 해서
실천궁행하려는 보살이 닦아야 할 여섯 가지 수행덕목이 있다. 그
육바라밀의 네번째가 '정진바라밀'이다. 신심을 격려해 선행을
닦고 잡념을 버리며 진실한 진리를 닦는 일에 매진하는 것이 곧
정진바라밀이다. 노력이 없고 게으르고 성문.독각.보살의
가르침 가운데 어느 하나도 돌아보지 않는 중생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중생들이 게으름을 물리치고 미혹에서 떠날 수 있도록 도와
주겠다는 서원을 세우는 것이 정진바라밀을 닦는 마음이다.
(大般若波羅蜜多經) 수행자를 피안으로 이끄는 뗏목 같은 실천의
길로 '팔정도(八正道)'가 있다. 팔정도의 여섯번째가
정정진(正精進)이다. 바른 정진이란 아직 나지 않은 나쁜 마음을
나지 못하게 하고, 이미 난 나쁜 마음을 없애 버리며, 아직 나지
않은 착한 마음은 나게 하고, 이미 난 착한 마음은 둥글게 키워
나가기를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阿含經) 60권본 <화엄경>의
<이세간품(離世間品)>에 보면 보살수행의 열 가지 규범이 제시되고
있다. 이 가운데 네번째가 '정진방편' 으로 굳센 의지력으로
난관을 잘 극복하고 용맹하여 게으름이 없는 방편을 가리킨다.
정각을 이루기 위해 실천.노력하는 것을 정진수행이라 하며,
용맹하게 나아가 어렵사리 수행하는 것을 용맹정진이라고 일컫고
있다. 밤을 꼬박 새며 수행함을 철야정진이라고 하고, 팔재계를
지키면서 청정한 마음으로 불자로서의 참된 자세를 되새기고
다짐하는 날로 정진결제일이 있다. 이 날은 목욕재계하고
채식만을 먹으며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하루를 생활한다.
'볍씨 종자가 좋지 않아서 올해 수확량이 줄었다.'라고 한다.
이때 종자는 씨앗을 말한다. 종자는 범어 'bija'의 번역이다.
종자로부터 싹이 나오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믿음의 씨앗' '원인의
씨앗' 등 종종 비유의 대상으로 거론되곤 한다. 부처님 당시에 한
바라문이 탁발을 하시는 부처님께 물었다. 㰡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습니다. 성자여, 당신도 밭을 가십시요.㰡 그때
부처님은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부리며 갈고 뿌린 연후에 먹는다고
이르신다. 㰡바라문이여, 나의 믿음이 종자요, 고행은 비, 지혜는
내 멍에와 호미, 뉘우침은 괭이자루, 의지는 잡아매는 줄, 생각은
호미날과 작대기 입니다.…이런 농사를 지으면 온갖 고뇌에서
풀려나게 됩니다.㰡 마음의 양식을 가꾸는 거룩한 농사에 관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식종에서는 마치 곡류의 싹이 종자에서
나오는 것처럼 모든 존재 현상을 나게 하는 '원인의 씨앗'을
종자라고 한다. 식물의 종자를 외종자(外種子) 라고 하는 데에
반해 아뢰야식에 감추어져 있는 마음의 종자를 내종자(內種子)라고
한다. 이 내종자란 원인을 통한 결과의 작용을 이르는 말로 향을
담았던 상자에 향내가 가득한 것처럼 일종의 관습처럼 아뢰야식
가운데에 훈습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한편 무시 이? 아뢰야식
가운데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본유종자(本有種子)가 있으며
후천적으로 경험하고 축적한 신훈종자(新熏種子)가 있다.
일반적으로 종자 에는 유루의 여러 현상을 일으키는 유루(有漏)
종자, 보리의 원인이 되는 무루 (無漏)종자의 두 가지가 있다. 한
그릇 속에 갖가지 종자가 있어서 그것이 물이나 비를 만나면 각각
스스로 생겨나는 것과 같아 중생의 그릇이 하나이긴 해도 애착으로
갖가지 번뇌가 생겨나느니라.(涅槃經)
㰡미련한 중생 같으니라구.㰡 너나없이 우리 모두 한낱
중생이면서도 악뒤가 꽉 막혀 답답한 이를 일컬을 때 이렇게
말한다. 미혹의 세계에 사는 아주 작은 미물로부터 넓게는
불보살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생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중생은
범어 'sattva'의 번역이다. 유정(有情)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유정이란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 살아 있는 것들을 가리킨다.
반대되는 개념으로 '비정(非情)'이 있다. 산천.초목.대지
등을 포함하는 용어다. <성 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
권1에서는 '중생이란 유정과 비정을 함께 아울러서 이름하는
말'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중생의 개념은 보다
확대되는 셈이다. 십계(十界) 가운데 부처님의 세계를 제외한
아홉 가지 세계를 중생계라 하겠다. 일체 중생의 심성은 본래
청정하다. 본래 청정한 심성은 번뇌로도 더럽히지 못한다.
그러나 중생은 심성이 청정함을 알지 못하여 번뇌에 얽매인다.
중생에는 '중다지생(衆多之生)'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나고
죽음의 윤회를 여러 차례 거듭하는 존재라는 의미다. 보살이 중생
속에서 이 대비심을 닦아 공덕을 쌓아 간다면 큰 복전이 될
것이다.(思益梵天所問經) 이때의 중생은 '여럿이 함께'라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중생은 '중연소생 (衆緣所生)'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여러 존재를 인연하여 태어난다는 것, 무수한
인연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중생'이라는 것이다.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중생'이란 용어이지만 '중생은 모두
다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는 진리는 한 가지일 뿐이다.
요즘 같은 구조에서는 드문 일이겠으나 조선조로 거슬러 올라가면
제자가 스승의 명예에 크나큰 누를 끼치거나 제자답지 못한 행동을
벌였을 때 그 제자는 스승의 문하에서 내쫓김을 당한다. 이를
'파문 당했다.'고 말한다. 오늘날 학교에 비교한다면 퇴학이요,
회사에 비유한다면 파면일 것이다. 타종교에서도 종파의 입장에
위배되면 이단이라 여겨 파문시키기도 한다. 국어사전에서 파문을
찾아 보면 ①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의리를 끊고 문인(門人)
으로부터 제척당함 ② 신도로서의 자격을 박탈하고 종단에서
내쫓는 것이라 정의 하고 있다. 예로부터 불교에서 수행자에게
내리는 제일 큰 벌이 '파문' 이었다. 계를 받은 이가 금지한 죄를
범해 계를 깨뜨리는 것을 파계라 한다. <사분율>에 의하면
바라이(波羅夷).승잔(僧殘) 등의 중죄를 범한 것을 파계라 하고
파계하는 이는 자해하고 질책당하며 악명이 세상에 널리 퍼지고
죽음에 이르러 뉘우치며 한탄하고 죽은 뒤에 악도에 떨어지는 다섯
가지 허물이 생긴다고 한다. 수행승이 지켜야 할 계율 가운데
가장 중대한 네 가지 계율이 사바라이계다. 온갖 음행을 금하는
대음계(大音戒), 소유주가 있는 물건을 훔치는 것을 금한
대도계(大盜戒), 제 손으로나 남을 시켜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한
대살계(大殺戒), 얻지 못한 깨달음을 얻었다며 남을 속이는
대망어계(大妄語戒) 등이다. 이 계를 범하면 마치 머리를 자르는
것과 같아 승려로서의 생명을 잃고 자격을 잃어 승단에서
파문하고, 죽은 뒤에는 아비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비구니의
경우는 사바라이계에 네 가지가 더해진 팔바라이계를 지켜야 한다.
다른 죄가 일정기간 권리를 잃고 근신하며 참회하는 반면, 파문을
당하는 사건은 '죽음' 이상의 큰 벌이라 하겠다.
㰡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과 권위에 있어
평등하다.㰡 세계인권선언문의 첫 구절이다. 국어사전에 이르기를
'권리.의무.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며 한결같음, 인간의
정치.경제.사회적인 모든 종류의 차별대우에 반대하는 그리스의
스토아(stoa)학파에서 시작됨'이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인권의
대명사와 같은 단어 '평등'은 그보다 앞서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
실천되고 설해졌다. 평등은 범어 'samata' 의 번역이다.
무차별의 세계, 온갖 현상을 꿰뚫는 절대적인 진리를 일컬어
평등이라 한다. 온갖 것이 공(空)함을 깨달으면 사물은 본래 나고
멸함이 없음을 알게 되어 마음 자체가 스스로 만족해지므로 몸과
마음을 분별해 보지 않게 되고, 적멸.평등.구경.진실의
경지에 머물러 물러남이 없게 될 것이다.(發菩提心論) 엄격한
카스트제도에 대해 인간의 귀천은 오직 그 행위에 의해서만 결정될
뿐이라며 카스트제도를 부정하고 '평등'을 강조하신 부처님이시다.
그 예는 이발사 우팔리에 관한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부처님의
사촌동생인 일곱 왕자들은 승단에 귀의하고자 이발사 우팔리에게서
머리를 깎는다. 그 모습을 부러움 속에 지켜보던 우팔리는
부지런히 그 뒤를 따랐고 오히려 왕자보다 앞서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 일곱 왕자들이 스님들께 예를 올리다가 우팔리 앞에서 절을
멈추자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신분과 인격은 종성 (種姓)에 의해
결정되지 않음을 강조하며 꾸지람을 내리신다. 㰡여러 강이 있어
각기 불리거니와 그 강들이 한번 바다에 이르고 나면 그 전의
이름은 없어지고 오직 바다라고 일컬어진다. 마찬가지로 네
계급도 법과 율에 따라 발심출가하여 불법에 이르면 이전의 계급
대신 오직 중(衆)이라고 불린다.㰡 오직 이와 같이 평등심으로
섭수하고 절복하신 부처님의 따사로운 음성 앞에 우리는 절로 고개
숙여 예경하게 된다.
㰡우리는 싸우되 결코 항복 따위는 하지 않겠다.㰡 전쟁을 치르는
군인들에게 '항복'은 비열하고 부끄러운 것인 양 느껴지기 쉽다.
전쟁에서의 항복은 적군에게 한 수 지고 마는 일이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을 보면 항복이란 적이나 상대편에게 잘못했다고
굴복하거나, 전투행위를 포기하고 장소나 병기를 적에게 내어 주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패배를 시인하는 이 '항복'은 그러나 본래
의미는 지금의 뜻과 정반대이다. 범어로 'stambhana(저해하는
것)' 'pragrahitavya (당연히 억제할)' 등의 의미를 번역한 것으로
'위력으로 다른 이를 눌러 복종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항복받을 대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존재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에 집착하는 마음과의
싸움 그리고 그것을 제어해서 바른 수행을 실천할 것을 이르는
것이다. 항복하지 않는 자는 항복케 하며 항복한 자는 앞을 다시
행하지 않게 하며 반역하려는 자는 감히 그런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尼乾子問無我義經) 부처님의
수인상(手印相)에는 '항마인'이 있다. 이는 마군을 항복시킨다는
뜻의 상징이다. 부처님의 앉음새에도 오른발을 왼쪽 넙적다리에
얹고 왼발을 오른쪽 넙적다리에 얹는 것을 항마좌 혹은 항복좌라고
한다. 보리수 아래에 정좌하시고 선정에 드신 부처님은 일체의
마군을 항복시키고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신다. 이 장면이 부처님의
일생을 묘사한 팔성성도 가운데 '수하항마상 (樹下降魔相) 이다.
우리에게도 내면의 마군을 항복시키는 일이 제일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기행각을 벌이다가 끝내 구속되었다." 한 곳뿐이 아니라 여러
곳을 다니며 일을 벌였을 때 '행각'이란 용어를 쓰는데 대부분이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절도행각'이니 '엽색행각' 등
돌아다니며 저지르는 사회문제를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는 수행자가 수행을 위해 여러
지방을 여행함을 지칭한다. 인도에는 석 달 동안 비가 지속적으로
내리는 '우기(雨期)'가 있다. 부처님 당시에는 이 우기 동안
일정한 장소에 모여 공부하고 수행하는 '안거'를 실시했다.
안거를 마친 수행자들이 자신의 공부와 수도에 적합한 선지식과
장소를 찾아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것 이를 행각이라 한다.
행각과 안거의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하안거와 동안거 해제를 하는 대로 모두 제각기 각처를
돌며 수행에 힘쓰고 있다. 행(遊行) 또는 만행(萬行)이라고도
한다. 수행자가 만행을 떠나는 것을 '운수행각'이라고 한다. 뜬
구름과 흐르는 물처럼 가고 오는 데에 걸림이 없고, 한곳에
머무름이 없으며 조금도 얽매임 없이 천하의 선지식 휘하에 들어가
공부의 향상을 꾀하는 데서 부르는 이름이다. 머무름이나 애착이
없이 곳곳을 찾아다니며 불법을 수행하는 운수행각은 안거기간
동안 전념한 공부를 새롭게 점검하고 확인하는 또 다른 수행의
방편인 것이다. <조정사원(祖庭事苑)>에 이르기를 '행각을 하는
사람은 멀리 고향을 떠나서 천하를 다니며 정(情)을 버리고 스승과
법을 찾아서 법을 구하여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였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오는 선재동자는 53 지식을 찾아
'구도행각'을 떠나기도 한다.
우리의 속담 가운데 근거 없는 사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허공에 뜬
누각(空中樓閣)' 이란 말이 있다. '허공보고 가다가 개천에
빠진다.'는 애기도 있다. 목표를 향해 똑바로 가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허공은 빈 하늘 즉 거지중천
(居之中天)의 의미로 범어 'akasa'의 번역이다. 일체 제법이
존재하는 공간을 일컫는 불교용어이다. 다른 것을 막지 않고 다른
것에 막히지도 않으며 물(物).심(心)의 모든 법을 받아들이는
공간을 허공이라 한다. 이 허공에는 무애.무분별 등의 뜻이
있다. 일체의 여러 법은 스스로 공적하여
무대(無大).무소(無小).무생(無生) … 불퇴(不退)하며 또한
허공과 같아 두 법이 있지 않다.(無量義經) 온갖 물체를 여의고
아무것도 있지 않은 곳(空界)을 허공이라고도 한다. 허와 공은
각기 무(無)와 비슷한 뜻이다. 허하여 상대가 없으며 공하여
장애가 없다는 의미에서 허공이라 부른다. 불교에서는 빛도 없고
모양도 없으면서 일체 만물을 온통 휩싸고 있는 것이 허공과 같다
하여 허공계(虛空界)라 한다. 허공으로 곳집을 삼아 중생의
원하는 바에 따라 갖가지 보배를 베풀어 주는 것이 무량겁을
지나도 다함이 없는 보살을 허공고(虛空庫)보살이라 한다. 허공이
온갖 곳에 두루 가득하여 다른 것을 장애하지 않고 다른 것에
장애되지 않으므로 허공무위(虛空無爲)라 한다. 미혹으로 인한
환상의 하나로 허공화(虛空華)란 단어가 있다. 마치 눈병이 난
사람이 허공에 꽃이 어른거리는 걸 보게 되는 것을 가리키며
사물에는 실체가 없는데도 마치 실체가 있는 듯이 착각하는 것을
비유하는 단어다. <능엄경> 권2에 나온다.
집 안으로 들어서는 입구가 바로 현관이다. 현관 안에 놓인
신발의 가지런한 모양새를 보고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성품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현관은 그 집의 '첫
얼굴'일는지도 모른다. 국어사전에 이르기를 ① 건물의 주된
출입구에 달아서 만들거나 방처럼 만든 문간 ② 큰 도시의 역이나
외국과의 왕래가 빈번한 국경에 위치한 도시의 비유 ③ 학으로
들어서는 어귀 ④ 선종 사찰의 작은문이라 했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양옥집들이 늘기 전까지 우리에게 '현관'의 개념은 달리
없었다. 본디 우리나라의 건축구조에는 없던 것이며 오히려
일본식 건축구조 속에 자리해 온 것이 현관이다. 현관의 본뜻은
'깊고 며한 이치에 통하는 관문'의 의미이다. 선종에서 쓰이던
용어로 깊고 오묘한 도(道)에 들어가는 시작, 이치나 도리가
헤아릴 수 없이 미묘한 뜻에 출입하는 관문이란 것이다. 불교를
일컬어 '현문(玄門)'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깊고 오묘해 (玄),
절대의 피안인 이상경으로 들어가는 문(門)이라는 비유에서 나온
용어이다. 예로부터 '불법은 깊고 묘하여 믿으면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 하였으며 <삼론현의(三論玄義)>에 이르기를 '불법은
둘도 없는 현묘한 문'이라 하였다. 현관도 이와 같은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현묘한 관문을 크게 계발하니 바른 눈이
유통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남에게 날카롭게 질문하거나 남의
질문에 명쾌하게 답을 하려면 쇠사슬과 깊고 묘한 이치로
들어가는 현관을 격파해야 한다. 불법의 세계에 들어서는 문,
선의 세계에 들어서는 시작이란 의미의 불교용어가 선종 사찰의
객전(客殿)에 들어가는 입구를 일컫게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
집안으로 들어서는 입구를 가리키는 용어가 된 셈이다.
영웅적인 인물을 찬탄할 때에 종종 '민족의 화신'이라는 표현을
쓴다. 좋은 인연의 인물을 일컬어 '행복의 화신'이라든가 '사랑의
화신'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화신은 범어 'nirmANAa-kaya'의
번역으로 부처님의 삼신(三身) 가운데 한 가지이다. 불신을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華身)의 세 가지로 나누는데 법신은
진리의 몸이란 뜻으로 진리 그 자체, 부처님께서 설한 설법 등을
말한다. 보신이란 인연 따라 나타나는 부처님께서 설한 설법 등을
말한다. 보신이란 인연 따라 나타나는 부처님의 몸이란 뜻이며
과보와 수행의 결과 이룩한 공덕의 몸이다. 가령 32상 80종호와
같은 모습이다. 이에 반해 화신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갖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는 경우를 말한다. 즉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특정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몸을 나투신 부처님이 곧
화신이다. 2600여 년 전에 인도에 출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과거의 여러 부처님 그리고 미래의 미륵부처님 역시 화신이다.
부처님의 몸은 화신이다. 음식으로써 유지되는 몸이 아니지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보이는 것임을 알아라.
그러므로 이제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열반에 들려 한다.
(大般涅槃經) 화신은 다른 말로 응신(應身)이라고 한다. 중생의
근기에 응하여 나타나는 부처님이란 뜻이다. 때로는 화신과
응신을 다시 구분짓기도 한다. 이때의 응신이란 상대에 따라
상대를 교화하고 이끄는 데 편리한 모습을 나타내 설법하는 부처님
이다. 반면에 화신은 정해진 상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범천이거나
제석.마왕.축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나투어 중생을
구제하는 불신을 말한다. 모든 갖가지의 화신을 나타내 중생으로
하여금 신업을 성숙케 한다.(心地觀經)
한평생 삯바느질해서 번 돈을 시립도서관 건립기금으로 희사하는
이가 있다. 고생고생 끝에 모아 수억이 든 통장을 아낌없이
장학금으로 희사하는 경우도 있다. 삭막한 현대사회를 훈훈한
감동으로 적시는 보살의 실천이라 하겠다. 국어사전에 보면
일정한 목적을 위해 금품을 기쁜 마음으로 기부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지만 본디 희사는 '목적과 대가 없이' 기쁜 마음으로 베푼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재물을 베풀 때 '희사'의 참뜻이 살아난다 하겠다. 믿음은
더럽혀지는 일이 없어 마음이 청정하며 아만의 부리를 제거하고,
믿음은 능히 온갖 것을 희사하고 불법에
들어간다.(大乘集菩薩學論) 불교에서는 한없는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고통의 미혹됨을 없애주기 위해 일으키는 네 가지 마음을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고 한다. 사무량심은 불보살의
자(慈).비(悲).희(喜).사(捨)의 사덕을 말한다. 여기서
희무량심이란 다른 이가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마음이며, 사무량심이란 다른 이에 대해 사랑하고 증오하고
친근하고 멀게 느껴지는 일체의 마음이 없이 평등한 마음상태를
말한다. 유마거사와 문수보살과의 희사에 관한 문답이 유명하다.
㰡무엇을 일러 희(喜)라 합니까?㰡 㰡중생에게 요익함이 있으면
기뻐하여 뉘우침이 없는 것입니다.㰡 㰡거사님, 무엇을 일러서
사(捨)라 합니까?㰡 㰡보살은 지어진 복락에 대해 과보를 바라지
않아야 합니다.㰡 이러한 마음을 잘 닦으면 대범천에 태어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