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나의 사랑 아르벤 -135-

[샤이라]

나의 사랑 아르벤

Chapter.8
[rivals for the same girl]


"알렉시리언…."

진짜 열나게 혼나고 뒤를 노려보았다. 원흉은 바로 저놈! 금발에 미소짓는 얼굴이 정말 아찔한 미남. 나로 하여금 한시간 수업까지 빼먹게 해 실컷 두드려 맞게한 놈! 마지막 건 좀 아니지만 하여튼 원인을 따져보면 저 놈이다!

"저런 쳐죽일…."
"호오 무슨 일이지? 네가 전의를 불태우다니 말야. 더구나 저 녀석을 상대로…사랑이 위협받기라도 해?"

박정대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나는 단지 옆의 여학생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저 재수 없는 녀석을 보고 한 말이었는데 이 친구는 벌써 내 심리와 상황까지 꿰뚫어보고 있었다. 정말 독심술이라도 하나?

"저 자식 진짜 위험한 놈이다. 조심하는 게 좋아. 사람한테 무조건 총부터 들이댄다."
"총?"

정대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역시 너도 돈만 많을 뿐 범인이구나. 그 이야기에 놀라다니.

"그래. 총. 그렇게 위협한다니까. 쏜다고. 저게 고등학생이냐? 마피아지."
"흐음. 아까보니 학교 앞에 페라리가 서 있어서 웬 건가 하고 봤더니 안에 중기관총이 있었어. 상당한 수준의 신변보호가 필요한 모양이지?"
"주, 중기관총? 무슨 군대냐?"

수업을 한번 빼먹고 혼났을 때보다 충격이 컸다. 나중엔 로켓포, 미사일까지 나오는 거 아냐? 다국적 기업의 총수란 건 저런 거였군. 다른 차원에 사는 자였어.

"높은 만큼 거기서 떨어트리려는 적도 많겠지. 너 같은 범인이야 모르겠지만 기재가 될수록 친구보단 적 밖에 없거든. 그 와중에 전적으로 신뢰하며 의지할 만한 대상은 더욱 값어치가 높아지는 법이야."

정대의 말을 들으니 그 녀석이 그렇게 이성을 잃었던 이유가 수긍이 간다. 요컨대 전적으로 믿을만한 사람인데다 그 사람이 사랑하는 여자이기도 했으니 목숨과도 못 바꿀 만한 엄청난 것이었을 것이다.
하여튼, 그 녀석이 그렇게 사랑하는 그녀는 제느의 안에 봉해져있고 제느도 나한테는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소중한 사람이라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제느 더러 몸을 둘로 나눠 연기해보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건 그것대로 싫은데다 제느도 싫어할 거다.
거기다 세를레나는 허상일 뿐이라고 제느는 분명히 말했다.

"뭐 어찌됐든 상관없어. 제느를 빼앗기진 않을테니까. 절대로."
"오호. 그건 영웅심리?"

영웅심리? 이 자식이!

"네 놈은 꿈하고 해몽이 어찌 그리 하늘과 땅 차이냐? 내 여자를 내가 지켜주고 싶은 게 영웅적 발상이냐?"
"영웅심리라 할 수 있어. 인류가 나왔을 때부터 이어진 오래된 거지."

이놈하곤 상종을 말아야지. 내 손해다. 공부나 하자.

학교가 파할 때까지 녀석은 말도 걸어오지 않고 눈도 돌리지 않았다.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그 모습에 오히려 신경 쓰는 내가 더 불안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저 녀석이 우리를 어쩔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내가 아무리 어리숙하고 제느가 극도로 쇠약해져 있더라도 신이란 것은 허구도 아니고 호구도 아니니까.

"나 이거 먹고 싶어."
"바벨라 쉬폰 스폰지 초콜릿 케이크? 10만 9천원? 이게 먹을 거란 말이야?"

학교가 파하고 반에서 모시고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제과점 앞에서 우리 허약하신 마눌님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가격표를 달고 있는 케잌을 사달라고 칭얼대신다.

"아잉! 사줘! 사줘!"

아무리 제느라도 이건 아니다. 아니 그 전에 내 지출한도를 초과했어.

"내 눈에는 그게 금 덩어리로 보이는데 왜일까?"
"히잉. 내 소원이란 말이야. 그동안 지나다니면서 얼마나 군침 삼켰는지 알아?"

어린애처럼 칭얼대는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잡고 한자 한자 또박또박 말했다.

"이봐요 아가씨. 세상에 있는 소원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이루어지는 소원과 절대 안 이루어지는 허무맹랑한 소원이 있답니다. 아가씨가 말한 건 뭘까요?"
"절대로, 반드시! 이루어지는 소원!"

제느가 내 샐쭉한 표정을 보고도 아주 기세 등등이 외친다. 확고하기 그지없는 대답인걸? 난 느껴지는 어지러움에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가 다시 말했다.

"땡! 아주 단단히 틀렸음! 이건 절대로 이뤄지지 않을, 이뤄져선 안될 소원이랍니다. 아가씨. 세계평화에 지대한 위협이 돼요. 부시 아저씨도 반전론자 시위에 참가할 거예요."
"세계평화? 무슨 엉뚱한 소리야? 아르벤. 나 저거 사줘. 먹고 싶단 말이야! 응?"

아무리 이쁘고 귀여운 여자라도 이렇게 붙잡고 늘어지면서 파산하라고 종용하는데 곱게 보일리가 없다. 내 수중에는 만원짜리 한장 뿐인데 10만원짜리를 사달라니, 너무한 거 아냐? 혹시 정체가 생명의 여신이 아니라 파산의 여신 아닐까? 지름은 부업으로 하고….
말도 돌릴 겸 왜 먹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왜? 왜 먹고 싶은데?"

억울한 느낌 때문에 내 말투가 억양이 높아져서인지 제느가 눈동자에 불만을 내비쳤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정도가 있지 저런 건 너무….

"먹고 싶은데 이유가 있어? 나 너무 먹고 싶단 말이야."
"다음에 사줄게. 지금은 돈 없어. 사주고 싶어도 돈이 없단 말이야. 내가 무슨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땅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것도 아니란 말이야."
"히잉…."

제느가 손가락을 빨며 온몸으로 불만을 내비친다.
나도 정말 사주고 싶다고. 사달라는 거 다 사주고 싶지만 내가 대학생도 아니고 고등학생인 이상 어디서 야간알바라도 하지 않고는 돈줄이란 용돈 밖에 없다. 그것도 제느가 이거 사달라, 저거 갖고 싶다 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붕괴됐는데 이젠 장말 어쩔 수 없이 마지노선이다.

"정 먹고 싶어?"
"응! 응!"

휘유.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격렬한 반응에 고개를 휘휘 내젓고 최후의 카드를 냈다. 쓰면 좀 결과가 안 좋겠지만 어쩔 수 없으니.

"그런데 제느야."
"응?"
"돈…있지 않아? 그것도 많이."

그래. 아직 나 컴퓨터도 핸드폰도 안 사줬잖아. 역시나 조심스레 꺼낸 내 말에 제느의 표정이 샐쭉해진다. 역시 제느에게는 내가 사주는 것하고 자기가 사는 것하고 느낌이 하늘과 땅만큼 틀린 모양이다.
제느가 검은 머릿결을 뒤로 쓸어 내리며 중얼거렸다.

"정말.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줄랬더니 구워서 먹여달라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날 빤히 바라보며 제느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더니 길가로 끌고 가서는 나에게 다른 손을 내밀었다. 펴니 만 원짜리 한 장이 접힌 채 쥐어져 있었다. 응? 뭔데?

"자아."

제느가 푸른 지폐를 나에게 주고 다시 손을 쥐었다 펴니 또 지폐 한 장이 거기에 접혀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9번을 반복하니 내 손에는 11만원이 쥐어져 있었다.
완전히 정신이 아스트랄로 날아가 벙찐 얼굴로 내가 바라보니 제느는 흥하고 콧소리를 내며 눈을 흘겼다.

"이게 바로 고기 잡는 법. 자. 고기 잡아줬으니 구워서 먹여줘. 나 당신이 사주는 거 먹고 싶단 말이야! 아이잉!"

제느가 다시 칭얼대는 소리가 좀 아련하게 들린다. 뭐, 뭐가 대체 돈을 이렇게 순식간에 만들어내냐? 반칙이잖아. 이럼 뼈빠지게 일해서 돈 버는 사람들은 다 바보? 아니, 아니지. 나 참.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사줘! 사줘어!"
"아, 알았어. 사줄게."

돈까지 생기고 보니 더욱 보채며 매달리는 제느를 따라 제과점에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대학생쯤 되었을까 한 아르바이트생의 인사를 받고 케이크를 쳐다보았다. 바벨라 쉬폰 스폰지 초콜렛 케이크. 진짜로 그건 초콜렛에 의한, 초콜렛을 위한, 초콜렛으로 만들어진 가공할 케이크였다. 크기도 손바닥을 7개쯤 붙여놓은 듯한 하트모양인데다가 보통 생크림으로 되어있는 부분은 전부 화이트 초콜렛이고 위에 얹어진 풍성한 데코레이션은 온갖 초콜렛으로 이뤄져있는, 한번 먹었다간 초콜렛에 질려버릴 만한 케이크였다.

"저거 주세요."
"네? 아 네."

싱글벙글대는 제느의 얼굴에 홀딱 넘어간 점원에게 말해 케잌을 꺼내 포장했다. 곧 큼직한 상자 하나가 완성됐는데 그 크기가 들고 가기에 심히 버거울 정도였다.

"시, 십만구천원입니다."

옆에서 방긋방긋 미소짓고 있는 아가씨에게 점원은 넋이 나간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으. 이런. 또 희생양이 나왔네. 한동안 자리에서 못 일어나겠군.

"와아! 케잌이다 케잌!"
"그렇게 좋아 죽겠어?"

방방 뛰는 제느에게 물으니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지은 제느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진짜로 엄청 좋은가보네?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거의 처음 보는 건데. 이게 그렇게 맛있나?

"전에 이거 먹어본 적 있어? 나는 처음인데…."
"웅. 나도 처음인데? 그런데 말이지, 지나가다 보니까 너무 맛있어 보여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거야."
"그, 그래서 조른 거였어?"
"응."

정말로 먹고 싶어서 산 거였단 말이야? 아니, 하긴 먹을 걸 먹고 싶어서 사지 뭐 하려고 사나? 으음. 이거 나만 바보 되는 느낌인데.

"자기. 이번에 내가 가르쳐줬는데도 불구하고 시험 평균이 어떻게 96점밖에 안될 수가 있어? 공부 열심히 하고 있는 것 맞아? 나 아프다고 맨날 나만 쫓아다니지 말고 공부도 좀 해둬. 지식이란 건 많을 수록 좋단 말이야. 힘을 얻었다고 괜히 우쭐대면 내가 때릴 거야."

작은 주먹을 꼬옥 쥐며 하는 제느의 협박에 웃음이 나왔지만 웃으면 또 기분 나빠할까봐 꾹 참고 정색했다.

"누가 우쭐한다 그래? 나 아직 내 힘이 뭔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러니까 더 불안해. 진짜 자신의 힘이 뭔지 알았을 때 당신 성격이 180도 확 돌아버리면 어떡해? 내 말도 안듣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 그때는 정말 가버릴거야."

케잌을 왼손에 옮겨들고 제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제느는 늘 하던데로 팔을 내 허리에 감고 어깨에 기대며 날 올려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엇비슷했던 키였는데 어느 사이에 그녀의 시선이 한참이나 높아졌다.
그리고 그 눈빛에 담긴 불안을 읽지 못할 만큼 내가 아둔한 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다는 힘의 상실. 상처받은 야수가 자기의 힘을 믿지 못할 때 느끼는 불안이랄까? 단지 헤아리는 것만 아니고 그녀의 마음을 그대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건 확실했다. 지금의 제느에게는 보호자가 절실히 필요했다.

"다 잘될 거야. 내가 널 잃을 일도 없고 네가 날 잃을 일도 없을 거야."

살을 맞대며 체취를 느끼면 그녀의 마음과 생각이 그대로 내 안으로 들어온다. 밤에는 언제나 하얗게 비어있는 마음 속이었지 아마? 지금도 스며들어오는 그녀의 마음이 조금 따뜻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날 바라보는 제느의 눈썹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하아. 따뜻해. 역시 당신이 최고야."
"최고는 무슨…자기가 괜찮기만 하면 돼. 다른 건 필요 없어. 건강하게 내 옆에만 있어 줘."
"걱정 안 하셔도 돼네요. 지금 이렇게 있으니까. 생명의 여신은 일편단심 민들레라구."

그렇게 말하며 제느가 내 볼에 키스를 하곤 생긋 웃었다. 그래. 지금 이렇게 제느가 옆에 있고 내일도 그녀가 있고 우리 사랑하고 있다는 걸로 족하지 뭘 더 바라냐.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은데.

"아. 더워. 아침에는 추웠는데."

팔짱을 끼고 가다 더위를 참지 못한 제느가 흰 살결에 맺힌 땀을 훔쳐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 낮에는 덥다고 할 수 있을만한 날씨이긴 하지만 힘이 점점 약해지면서 느끼는 감각도 변하는지 제느는 보통 사람보다 예민해졌다. 반대로 나는 외부의 변화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 것 같다.
지금도 상의의 단추를 몇 개 푸는 제느는 무척 더워하고 있었고 나는 기온이 높다는 것은 알겠는데 더운 것은 모른다. 바로 몇 주 전 만해도 그 겨울 눈 밭에서 제느는 멀쩡하고 나는 추워서 벌벌 떨었는데 말이다.

"야, 다 보이잖아. 그만 풀어."

자기가 다른 애들처럼 안에 브래지어를 한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안 입은 위에 위태하게 얇은 여름 교복을 걸친 것뿐인데 덥다고 단추를 무려 세 개나 끄르니 벌어진 옷 사이로 가슴 선이 아니라 가슴이 그대로 보일 정도라 재빨리 옷깃을 여몄다. 집에서 나랑 있을 때야 웃통 벗고 앉아있어도 아무 말 안 했지만 밖에서 얘가 지금 뭐하는 거야? 더위 먹었나?

"여기 집 아니야. 갑자기 왜 그래? 그렇게 더워?"
"응. 더워서 숨이 탁탁 막혀와. 땀 흐르는 것도 끈적끈적해서 싫어. 우리 들어가서 빨리 씻어야겠다. 그지?"
"엉? 어엉."

여며줬던 옷깃을 슬쩍 벌려 가슴을 보인 제느가 목소리를 은근히 까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 그거하자고? 하는 건 좋은데 밤새는 마라톤은 제발 안 했으면 좋겠다.

"요즘 나한테 소홀한거 알아? 정말 사랑하면,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나 요새 밤에 잠 제대로 못 자는거 알지?"
"그거야 아는데…."

원래 제느는 잠을 자지 않아도 하등 지장이 없지만 그나마 힘을 유지하기 위해선 자는 것이 필요하다고 해서 학교만 갔다오면 저녁때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정말 쥐죽은 듯 잤다. 한번 누워 자면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도 몰랐고, 어쩌다가 새벽에 깨면 날 괴롭히기 일쑤였다. 그리고 시험 끝나면서부터는 누워도 뒤척이며 잠에 잘 못 드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

"용케도 알고 있네."
"그런거 모를 만큼 바보 아니다 뭐."
"에구. 자랑이에요. 자랑."
"뭐야?"

서로 티격태격대며 가다보니 집에 도착한 시간이 6시가 한참 넘었다. 걸어서 20분 거리를 1시간동안 천천히 갔으니 입씨름하던 제느는 교복이 땀으로 흥건할 정도로 젖어 욕실로 달려들어갔고 나는 그녀가 내팽개친, 아니 강제로 떠 맞긴 가방을 들고 들어갔다. 어머니가 문을 열어주곤 인사만 하고 쪼르르 달려가는 제느를 바라보다가 내가 손에 든 케잌에 시선이 옮아가더니 대번에 너 미쳤니? 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냥 먹으려고 샀어."
"얼만데?"

억. 이런 아픈 부분을 찌르다니. 좀 작은거면 이해하겠는데 워낙 큰 케잌이라서 작게 뻥을 칠 수도 없다. 나 돈 없는 거 잘 아는데….

"8, 8만원."

내 말이 귀에 들어간 어머니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지는 걸로 봐서는 당장 날벼락이 떨어질 것 같았다.

"이 자식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야!"
"으아악! 빨리 가서 씻어야겠다!"

불벼락이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케잌과 가방을 내던지다시피 내려놓고 욕실로 달려들어갔다. 제느가 있어도 아무런 거리낌없는 나와 달리 어머니는 문 앞 한발자국 앞에서 멈춰섰다. 대신 그 얼굴이 울그락 붉으락 해지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야! 거긴 또 왜 들어가! 썩 나오지 못해?!"
"에진이랑 이상한 짓 안해요."
"뭐야?!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어머니! 저 현신이랑 같이 씻어도 돼죠?"
"으, 음. 아. 그렇게…하렴."
"아아. 정말 최고에요. 엄마. 보일러 좀 틀어줘요. 엄마."

욕실 문을 닫아걸고 제느랄 마주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으흠. 급할 때는 역시 이게 최고지.
팔을 벌려 품안에 제느의 작은 몸을 으스러져라 품고 입술을 포갰다.

"으음. 음."

입술을 대고 손을 놀려 교복을 벗기고 직접 뜨거운 맨 살갗끼리 맞대며 문대니 온몸에 짜릿한 감이 흘렀다.

"자기야."
"아앙."

맞닿은 입술을 한번도 떼지 않고 옷을 모두 벗어버리니 제느가 그제서야 키스를 잠시 멈추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골랐다. 그래서 키스 대신 그녀의 목덜미로 얼굴을 대는데 문득 보니 가슴이 크게 부푸는 것이 보였다. 역시 긴 키스는 무리였나 보다.

"아르벤."

내 머리를 팔로 감싸안는 제느의 목소리는 지친 듯 느긋하면서 급하고 힘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마치 두가지 음악을 동시에 듣는 것 같았다.

"사랑해."

그에 호응하며 귓가에 속삭이고 목덜미에서부터 키스하며 내려와 불룩하게 부푼 가슴을 한 입 베어 물으니 제느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의 하얀 살결에서 나는 진한 향 내음. 평소에는 그건 그저 좋은 향기지만 이럴 때 그 향기는 마치 최음제처럼 정신을 아찔하게 하고 몸 속을 뜨겁게 만든다. 그리고 더 진해진다.

"흐윽. 하아. 제느."
'아, 아르벤. 너무 뜨거…앗!"

막 맞붙으려고 그녀를 껴안는 참인데 제느가 도리어 날 밀어버렸다. 갑자기 왜? 그녀가 힘겹게 한쪽 눈을 뜨더니 벽에 기대서 가슴에 손을 대고 숨을 골랐다. 그녀의 하얗던 살결이 흥분의 열기에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목과 어깨, 가슴에 있는 입술자국은 더 빨갰다.

"하아."
"괜찮아?"

아무래도 오늘은 몸 상태가 나빠 보여 무리인 듯 하다. 한줌도 안 되는 가냘픈 허리를 팔로 감싸안고 부축하니 몸매가 더 가늘어진 듯 했다. 제느는 내 가슴에 머리를 대고 잠깐 기대있더니 세면대로 가서 수도꼭지를 열고 샤워기로 머리 위에 물을 뿌렸고 따뜻한 물이 그녀의 몸을 적시면서 김이 욕실 안에 뽀얗게 가득 차기 시작하자 그대로 물을 맞으며 제느가 내 몸에 다시 기댔다.

"자기야…."
"응?"

한참동안이나 부드럽고 작은 몸을 어루만지다가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뜨니 제느가 검은 눈동자를 반쯤 뜨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는 듯한 그 시선에 물을 닫고 따뜻한 물에 풀어진 그녀를 안아 올렸다.

"방금 전에…내 생명석을 느꼈어."
"생명석? 생명석??"

그거라면...시크사리사? 그걸 느꼈다는 건 그게 여기 있다는 뜻?
머리에서 한순간 몽롱한 기가 싹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물에 젖어 달라붙은 제느의 머리칼을 떼어 뒤로 넘겨주며 말을 재촉했다.

"어떻게 생명석을 찾은 거야? 그게 여기 있는 거야?"

제느가 희미하지만 미소를 짓는 걸로 봐서는 그 짐작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악마가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것이 어떻게 해서 여기 있는 건데?

"내 생명석…못 찾을 것 같았는데…."

내 품안에서 중얼거리며 그렇게 생기 있게 미소를 짓는 것이 얼마 만인지, 더구나 그 말은 하루하루 생명의 힘이 꺼져 가는 제느를 완전히 나을 수 있게 할 수 있는 것이니 그 의미가 더 컸다. 이제 그것만 찾으면 더 이상 아파하지 않아도 되고 내 힘으로 버티지 않아도 된다는 거지?

"어디, 어디 있는데?"
"여기서 반대편."
"반대?"

뒤를 돌아보았다가 꺄르르 웃는 제느의 웃음소리에 뻘쭘해졌다. 이런. 아니었군. 돌아보니 제느가 무안한 표정을 짓고 내 어깨로 손을 가져와 쓰다듬었다.

"거기가 아니라 이곳, 지구 반대편."
"그래? 그럼 한시라도 빨리."

제느가 내 말을 듣다가 삐진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당장 가잔 말은 너무 성급했군. 그렇게 애가 그립고 아파하면서도 지금은 가기 싫다고 했으니까 이러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은 이게 더 급해. 강 건너에서 화재가 났다고 해도 발등 앞의 불을 먼저 꺼야 돼지 않아 자기?"
"으응. 그렇지."

그렇게 수능하고 다시 입술을 포갰다. 제느의 생명석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더 소중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으음. 여기 인 것 같아."
"여기?"

제느가 노트북의 LCD에 대고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진짜로 태평양 건너 반대편에 있는 한 나라였다. 지중해에 장화처럼 솟아있는 반도. 이탈리아였다.

"응. 그곳에서 느껴져. 약하긴 하지만 내 생명석이 틀림없어. 이렇게 갑자기 느껴진 걸 보면 그걸 들고 누가 여기로 넘어왔다거나 뭔가 봉인에 막혀 있었다는 뜻인데 아직 사랑의 여신께서 아무 말 없으신 걸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커."
"봉인이 깨졌다?"
"응."

뜨거운 샤워를 마치자마자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얻은 지도를 보며 제느가 짚어가던 최후의 위치가 이탈리아였는데, 제느도 그 이상으로 정확한 위치는 느껴지지 않는 모양인지 정확히 어느 곳인지는 몰랐다. 아니, 지도니까 이탈리아가 아닐 수도 있는 거고 지금 많이 떨어진 제느의 감각이 맞다고 할 수도 없는 거니까 아직 확실하지도 않다.

"위치를 알았다고 해도 거긴 나라 하나인데 그 넓은 데를 우리 둘이서 다 찾아볼 수 있을까?"
"찾을 필요는 없어. 생명석은 날 부르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약해져 있어서 이 정도의 범위로 밖에 모르겠으니까 더 정확한 수단을 쓸 거야. 기술을 좀 이용해야지."
"기술?"
"응. 생명석이 날 부르는 건 기계로 탐지가 가능해. 당신과 나 사이의 교감 같은 건 아니거든? 적당한 곳에서 탐색을 하면 10Km 내 오차로 위치를 알아낼 수 있을 거야. 그런 다음에는 찾아봐야지."

이런. 비관적이네. 그렇다면 희미한 느낌 한 줄에 모든 걸 내맡기고 찾아야 하는 건데 둘이서 그게 가능할까? 설사 찾는다 하더라도 봉인이 어쩌고 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지키고 있을지,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직 내 힘도 잘 모르는 내가 제느를 지켜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제느의 몸 상태도 장기간 여행을 버틸 만큼은 못될텐데. 이래저래 고민이군.

"그 생명석은 기운이 약한 걸로 봐서 작은 조각일거야. 원래 내 몸에서 떨어졌어도 생명석은 계속 나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게 500년 전부터인가 끊겼거든. 누가 일부러 조각 내지 않는 한 나와 연결이 끊길 이유는 없는데 누가 주술적인 이유로 조각 내서 썼나봐."
"주술? 그걸 어떻게 쓴다고?"
"내 생명석은 생명의 근원. 충분히 쓸만한 가치가 있어."
"그래…."

제느가 내 손을 잡더니 가슴에 가져다 대고 꼭 눌렀다.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아서 힘을 일으키니 그녀가 꾹 참았던 듯 한숨을 포옥 내쉬곤 품에 파고들었다.

"요즘에는 움켜잡더라?"
"뭐, 뭘?"
"우훗. 뭐가 부끄러워서 열내고 그래? 당신 꺼니까 맘껏 만지고 주물러. 누가 뭐라 안 해. 근데 솔직히…너무 아프게 이그러트리진 말구. 가끔 터지나 안 터지나 실험하는 거 같더라 자기?"
"아, 그 무슨…그런거 아냐!"
"아니긴 무슨."
"어? 어디로 손이 가는 거야?"

제느가 피식피식 웃어대며 내 엉덩이를 어루만진다. 뭐, 뭐?

"당신도 내 꺼니까 맘대로 만져야지. 이리와! 아유. 우리 큰애기는 엉덩이도 참 튼실해. 푸후훗!"
"야아!"
"우리 귀여운 자기도 괜찮은지 봐야…."

손이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사타구니 사이로 들어가는 손을 급히 제지하곤 제느의 허리를 팔로 감고 바짝 끌어들였다.

"에이이…너무해. 자기는 마음대로 만지면서."
"흠. 흥! 어찌됐든. 그 작은 조각으로 나을 수 있는 거야?"
"응. 적어도 죽을 걱정은 없어. 내가 약해지기 시작한 건 그걸 잃어버리고 난 뒤니까, 작은 조각이라도 되찾으면 그걸 중심 삼아 힘을 모을 수 있어."
"완벽히 낫는 건 아니고?"

내 팔을 가져가 팔베개를 한 제느가 내 옷 아래로 손을 집어넣으며 눈빛을 빛냈다.

"생명석은 자라거나 하지 않아. 힘을 품은 걸 빼곤 길거리에 치이는 돌멩이랑 다를 게 없어. 그래서 짝을 찾아 맞춰줘야 해. 생명석이 완전히 모여 하나가 되면 나는 더 이상 이럴 필요도 없고 예전처럼 힘을 쓸 수가 있을거야."

그런거였구나. 그러면 그 조각조각 하나를 다 찾아야 하는데 좀 힘들겠군. 아주.

"그런데 말야. 그걸 누가 깼을까?"
"필요한 사람이었겠지. 누군가 죽은 것을 되살린다던가 황폐화된 땅을 옥토로 바꿀 수도 있고 남의 생명을 저당 잡을 수도 있고…생명에 관계된 것이면 무엇이든 가능해."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주먹을 쥐어 보였다. 조금만 세 개 잡아도 부서질 듯한 가느다란 뼈와 물처럼 부드러운 살로 이루어진 앙증맞은 작은 주먹. 약지에는 반지가 형광등 불빛을 반사하고 있다. 제느는 거기서 새끼손가락을 펴고 설명했다.

"내 생명석은 딱 이만해. 그렇게 크지 않은 파란색 돌이지. 그리고 지금 느껴지는 건 아무래도 내 새끼손가락 손톱 만한 크기야. 전에 설명했던가? 이게 원래는…."
"응?"

제느가 가슴을 만지던 내 손을 잡더니 아래로 내려 아랫배 쪽에 갔다 대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말하면 자궁, 그 뒤쪽에 붙어있던 거야. 악마들이 내 뱃속을 헤집어 아기랑 같이 가져가 버렸지만. 우리 아이 그대로 컸으면 지금쯤 카렌이 만한 소녀가 되어 있었을 텐데…."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마. 응?"

팔 베게한 팔을 뺄 수는 없어서 다른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려하니 제느가 내 손을 다시 가슴으로 이끌었다. 그리곤 눈을 감으며 하는 말이….

"나 이대로 잘 거니까 잘 때까지 놓지 말아. 알았지? 아참. 그리고 케잌 내일 먹을 거니까 잘 나둬? 상해있으면 나 삐질거야."
"이런 속물…."
"메롱!"

혀를 쏙 내민 제느가 눈을 감더니 내 품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내 잠이 들었는지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주던 힘을 멈추고 그녀의 몸을 끌어안으니 가늘기 그지없는 연약한 몸이 정말로 안타까웠다.

"제이로느…."

그녀의 근원인 힘이 구심점이 없이 점점 약해져만 간다. 방금도 상당히 줄어든 힘이 깜짝 놀랏다. 처음 그녀의 상태를 알았을 때부터 계속 주시하고 있었지만 순식간에 이렇게 줄줄은 정말 몰랐다.
제느도 그렇게 내색은 하지 않지만 분명히 알고 있을 거다. 그래서 더 빨리 찾아야 하건만 적당한 때만 찾고 있으니.
생명에의 위험도 무릅쓰고 제느는 무얼 기다리는 걸까? 그게 도대체 뭐기에 이렇게 아파하면서도 기다리는 건지 지금은 전혀 알 도리가 없다. 상자곽 열듯 제느의 마음을 열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짐작가는 바도 없기 때문이다. 참. 내가 제느에게 이렇게 밖에 취급받지 못하는 거였나? 나는 비밀 없는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이 때문일까?"

불을 끄고 엎치락뒤치락 거리다가 일어나 창으로 가서 달을 올려다보았다. 보통 사람이 아닌 빛의 신으로서 본 달은 평범한 하얀색 반달이 아니라 파란색 반달이다. 가끔 시뻘겋게 보이기도 하지만 푸른색 영기로 가득 찬 신성한 달. 제느가 저기에 모인 힘을 끌어다 써서 색이 많이 옅어졌다. 평범한 행성에 모인 힘은 신의 힘을 채워주기엔 턱없이 모자란 것이다.

"흐읍!"

손에 힘을 주고 정신을 집중해 달빛을 모았다. 어두운 도시의 풍경이 왜곡되면서 손바닥에 하얗게 달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모이자 손으로 꾹꾹 빚어 동그랗게 만들었다. 내가 뭐 갑부도 아니고 말발이 좋은 것도 아니고 부지런히 건강식품이나 만들어 바쳐야지. 다행이 제느는 이걸 굉장히 좋아했다. 아니, 내가 만들어줘서 굉장히 좋아하는 모양이다.
대충 아이스크림으로 부르고 있는 걸 냉장고에 넣고 슬쩍 케이크를 열어보았다. 제느는 이런 걸 어떻게 먹으려고 샀을까?

"우히히히."

몰래 먹는 맛은 이런 거지. 빵 자르는 칼을 꺼내 한 조각을 잘라 조심스레 먹어보니, 크아아! 정말 달다. 설탕을 한 주먹 입에 털어 넣어도 이렇게까지는 달지 않을텐데 이건 농축설탕 같은 것도 아니고 거기에 코코아의 쓴맛까지 약간 느껴지는 것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으에엑. 이런 걸 먹겠다니 정말 대단한 혀를 가졌군."

결국 두 입 정도 먹고 관뒀다. 이거 정말 먹으라고 만든 것 맞는지 심히 의심 간다. 괜히 돈 버린거 아냐? 뭐 제느라면 입맛이 다를지도 모르지.
케잌을 도로 냉장고에 넣어놓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쓰러졌다. 제느는 점점 수면시간이 늘어나서 9시쯤 자지 않으면 아침에 제때 일어나기 힘들어졌다. 설마 나중에 하루종일 자게되는 일은 없겠지만 서도 정말 걱정이다.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 아닐까.

"잘자요. 나의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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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구 허리야 ㅡ.ㅜ

[brack]

제느랄 마주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오타 발견했습니다. ~)_~

[샤이라]

억

[제이로느]

그렇게 수능하고 <- 그렇게 수긍하고 아닌감-_-a 이건 갑자기 무슨 오타발견 놀이? -_-;;;; 어쨌든. 제느가 빨리 힘을 되찾아야 할텐데 말이죠.

[제이로느원츄]

웬지 이누야사 같은..;;;

[미친해골]

갈수록 진해지는군;;;;이왕이면 하는김에 제대로 달리세요 그래야 남자죠

[타이걸]

윗글 올소..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