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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우 목사/늘푸른 교회/십자가 마을
스가랴서 연구
스가랴 1:1-6 돌아오라 2006. 11. 15
1 다리오왕 이년 팔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5 너희 열조가 어디 있느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6 내가 종 선지자들에게 명한 내 말과 내 전례들이 어찌 네 열조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다 하셨느니라 하라
스가랴는 학개 선지자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려고 성전의 지대를 놓았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이 함께 성전재건 하는 일에 참여하려고 하자 거부합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총독이 바사 제국에 편지도 보내고 뇌물도 보내어서 성전재건을 못하게 방해합니다.
이런 과정을 에스라서에서 보겠습니다. 에스라 4:1절에서 방해가 시작되고 그 결과로 다리오 왕 이년까지 중지가 됩니다. 5:1절부터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예언하고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돕습니다. 성전재건이 시작되자 강 서편의 총독들이 왜 그러느냐고 항의하고 그들이 다리오 왕에게 조서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다리오 왕이 서고에서 옛 문서를 확인하고 성전재건을 다시 허락하였습니다.
1:1-3절을 봅니다. 다리오 왕 이년 팔월에 스가랴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그 임한 말씀은
여호와께서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돌아오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 번이나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이나 동일한 호칭으로 반복하는 것은 얼마나 강력한 권면의 말씀입니까!
그러면 왜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만군의 여호와란 언약궤와 결부되어 전쟁을 행하시는 것과 관련되어 사용됩니다. 즉 자기 언약을 신실히 이루어 내실 때에 사용하는 명칭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신실히 이루어내시는 일에 그 어떤 방해세력도 다 물리치시는 용사이신 여호와이신 것입니다. 그런 여호와 하나님께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돌아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스가랴 시대의 상황은 이미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이 재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학개서에서 보니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은 황무한데 자기들의 집에 빨랐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학개 선지자의 말을 들은 백성들의 마음이 흥분이 되었다고 합니다. 즉 각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학개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성선재건을 하고 있는 중인데 다시 돌아오라는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나오다가 나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말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잘 오지도 않는 이런 수요일 밤에 오신 여러분들을 향하여 여러분들이여 주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이 듭니까? 아니 내가 지금 주께로 돌아와 있는데 왜 또 돌아오라고 하는가? 그 이야기는 열심을 내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지 나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왜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들의 열조의 행위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성전도 짓고 제사도 지냈습니다. 그러면 늘 그들이 하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우리나라는 안전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율법지킴과 성전에 대한 제사는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심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안식일 날 성전에 나아오는 무리들을 가로막고 이곳이 여호와의 전이라고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들이 와서 제사를 지내면서 하는 말이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는 확신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 놓고서 돌아서서는 온갖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사라지고 가나안 사람들의 풍습을 따라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할 자들이 오늘날의 자본주의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돌아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4-6절을 봅니다. 너희 열조를 본 받지 말라고 합니다. 옛적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친 것입니다.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듣지 않고 귀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 열조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한 선지자들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을 증거 한 선지자는 죽었지만 그 여호와의 말씀은 살아서 성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6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한 대로 갚으셨다는 것입니다.
열왕기 하 17:13-14, 절을 봅니다. “13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경계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하고 또 나의 종 선지자들로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14 저희가 듣지 아니하고 그 목을 굳게 하기를 그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저희 열조의 목 같이 하여, 1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히 노하사 그 앞에서 제하시니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게 되는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거역하고 목을 굳게 하기를 저희 열조와 같이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호와께서 심히 진노하심으로 겨우 유다만 남았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는 것을 보았다면 남 유다는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유다마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입니다.
역대하 36:11-21절입니다. “11 ○시드기야가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의 앞에서 겸비치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14 제사장의 어른들과 백성도 크게 범죄 하여 이방 모든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 사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16 그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며 그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로 그 백성에게 미쳐서 만회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매 .......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이 모습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망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 가나안땅은 안식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거룩하지 못한 백성을 토하여 냄으로 땅이 안식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위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에서 인간을 쫓아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 한 아담과 하와를 생명나무에 이르지 못하도록 쫓아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70년이 되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간동안 얼마나 시온을 그리워하였습니까? 그 내용이 시편 137편입니다. 1-6절만 봅니다.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찐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찌로다”
이 정도로 사모하고 그리워하였지만 막상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다가 조금 어려움이 있으니 자기들의 집짓는 일과 자기들의 안전이 우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바벨론에서 돌아왔지만 제대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 마음이 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3절을 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죄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 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몸이 돌아왔지만 마음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이렇게 교회로 모였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로 모여서 형제자매라고 하고 있지만 과연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온 것입니까?
수입중의 일부를 헌금하고, 시간 중의 얼마는 내어서 예배드리고 봉사한다고 과연 이것이 주님께로 돌아온 것입니까? 그렇게 함으로 은근히 다른 사람보다 복을 받으리라는 기대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언가 손해가 올 것이라는 불안감은 없습니까?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아직 주께로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나 중심이지 예수님중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 선지자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돌아오라고 하신 이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요엘서 2:12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옷은 우리가 찢을 수가 있지만 마음은 어떻게 찢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요엘서 2:28절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신을 자기의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대로 오순절 성령이 임하게 되자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로 돌아오라는 이 명령의 말씀은 사람이 순종하여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말씀은 명령하시고 그 말씀은 주께서 이루신 결과로 주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주께로 돌아온 자들에게 주님은 또다시 주께로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주께로 돌아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18-19절입니다. “18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19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진고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스스로 돌이킬 능력도 없는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니 주께서 돌이켜 주신 이후에 뉘우치고 자신의 치욕을 아는 것입니다.
스가랴1:16절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예루살렘에 돌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로 오늘도 돌아오라고 하는 자들은 주께도 돌이켜 주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돌아오라는 말씀이 지금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주님께로 돌아왔는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마음에 주로 계시게 하여달라는 기도를 바울사도가 합니다.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 예수님이 그 안에서 주님으로 거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도 라오디에게 교회에게 차지도 덥지도 아니한 라오디게아 교회에 문을 두드린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이 음성이 우리에게 들려지기를 소원합니다.
스가랴 1:7-17 내가 돌아 왔은즉 2006. 11. 22
7 ○다리오왕 이년 십일월 곧 스밧월 이십 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니라 8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9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10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11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하더이다 12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지 칠십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13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14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15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17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아니라 나의 나라와 나의 의를 챙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혹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고 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학개서와 스가랴서에 보는 대로 성전을 재건하면 그것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요18:36).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나라이기에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믿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소망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겠느냐고 바울사도가 증거 하였습니다(롬8:24).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양 살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보이는 것이 전부다가 아니라는 것을 잠시잠간씩 듣지만 그러나 여전히 돌아서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하여 분노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또 성경은 증거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18절입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세상의 모든 보이는 것들이 잠간입니다. 동물의 왕국 같은 것을 보면 밀림의 왕이라는 사자도 죽게 되는데 그 주검을 카메라로 고정시켜 놓고서 하루에 한 장씩 사진을 찍게 하는 방법으로 몇 달 동안 찍으면 썩어져서 분해 되는 과정을 일 분 안에 다 볼 수가 있습니다. 결국 단단한 뼈 조각 몇 개만 남고 바람이 휭 하게 부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오늘도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살았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 삶이 결국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엇이 영원히 남는 것입니까? 인생이 풀과 같고 인생의 영광이 풀의 꽃과 같은데 그 풀이 시들면 하루아침에 꽃도 시들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하는데 이 한 평생을 동물의 왕국 카메라처럼 우리를 찍으면 일 분 만에 태어나서 자라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늙어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는 인간의 천년이 밤의 한 경점 같은 것입니다. 천년이 일분도 아닌 일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나타난 것에 의하여 세상의 결국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3절을 봅니다.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눈에 보이도록 나타난 모든 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원인에 의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 그것을 묵시세계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묵시라고 하는데 이런 표현이 예언서에 많이 나타납니다. 다니엘서, 에스겔서에서 묵시가 많이 나타납니다. 묵시를 본 것을 다른 말로 환상, 이상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스가랴서도 이런 환상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런 묵시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는가 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이란 보이지 아니하는 묵시세계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역사 세계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독안에 든 쥐 마냥 스스로를 구원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이라는 유대 랍비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진흙속의 황새가 발이 너무 깊이 박혀서 빼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다 머리를 진흙에 박고 다리를 빼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어찌합니까? 이제는 머리를 빼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현실인 것입니다.
인간의 이런 사실과 역사 밖의 묵시세계가 있음을 아는 길은 역사를 연구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서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계시가 어떻게 전달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자기의 선지자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으로 말씀하신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에서 오직 아들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히1:1-2). 왜냐하면 구약의 그 모든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높이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1절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어떻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셔서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기위하여 천사를 그 종들에게 보내는 방식으로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패턴이 구약에서도 여전히 나오는 것입니다.
스가랴서 1:7-17절을 보면 스가랴 선지자가 하루 밤에 8가지의 환상을 보게 되는데 그 첫 번째가 오늘 본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홍마를 타고 화석류 골짜기에 섰고 그 뒤로 홍마와 자마와 백마를 탄자가 보입니다. 스가랴가 이것을 보고서 내 주여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면서 물을 때에 스가랴에게 말하는 천사가 무엇인지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우리도 꿈에 말 꿈을 꿀 수가 있을 것입니다. 경마하는 사람은 더 많이 꾸겠지요! 그런 꿈이 아니라 분명한 의식이 있는 가운데 환상을 보았지만 그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알려 주십니다.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자가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낸 자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에게 세 천사가 온 땅에 두루 다녀보니 정온하더라고 보고를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라고 표현된 자는 분명 사람의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다니엘도 인자 같은 이를 보았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구약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묵시세계 속에서 활동하시는 분으로 봅니다.
이 분에게 다른 말 탄 자들이 보고합니다. 왜 말을 탄 것입니까? 그 시대에 가장 빠른 기동력이 말입니다. 그리고 말은 전쟁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무기가 됩니다. 결국 온 세상을 주의 사자들이 두루 다 살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살펴보고 보고를 하는데 그 내용이 정온하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조용하다는 것입니다. 이 스가랴 선지자의 계시는 학개 선지자가 성전 재건을 시작한 5개월 후가 됩니다. 그런데 온 세상이 조용하다는 것은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학개서 2:6-7절입니다. “ 6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전 재건이 다 되어 가는데 하늘과 땅이 진동되면서 만국의 보배가 예루살렘으로 올 징조가 없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은 강대국이 지배하고 다스리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볼 때에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며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신다고 믿고 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세상은 여전히 변함없이 든든히 서 있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병원에 가서 오랫동안 줄서서 기다려야 할 때에 초라한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까? 오늘 어떤 전화가 와서 교회의 안전설비 담당하는 사무장을 바꾸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니 두 말없이 전화를 끊었습니다. 여러분이 받으셨다면 초라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12절을 봅니다. 천사들의 보고를 받고서 화석류 사이에 서신 분이 만군의 여호와께 말씀합니다. 언제까지 예루살렘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겠습니까? 노하신지 칠십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칠십년 포로생활에서 돌아왔고 이제 성전도 재건이 되었는데 언제 하늘과 땅이 진동하면 만국의 사모하는 것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오는가 하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요한계시록에서 순교당한 자들이 언제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시기를 언제까지 하시겠습니까? 하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계시록에서는 흰옷을 주시면서 잠시 쉬라고 합니다. 언제까지인가 하면 네 동무들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스가랴서는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13-15절입니다.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는데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향하여 크게 질투하신다는 것입니다. 질투란 사랑의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하여 조금 진노하셨는데 열국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나 바벨론을 하나님의 채찍과 몽둥이로 사용하셨는데 그들이 교만하여 져서 자기들이 잘나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처럼 교만하여 졌기에 그 몽둥이를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어느 나라가 부럽습니까? 그러나 이 온 세상의 나라들은 다 불살라질 나라들입니다. 없어질 나라들입니다. 그런데도 천년만년 유지될 나라처럼 안일하게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여 버린 이 땅에서 안전하게 살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범죄 한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하여 강대국을 몽둥이로 잠간 사용하셨는데 그들이 교만하여지지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임 당한 곳이 바로 이 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비록 범죄 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면서 좀 과하게 하였다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우리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받을 형벌이 얼마나 엄청나겠는지를 생각하라고 히브리서 10장 2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온 세상이 어떻습니까? 하늘과 땅이 진동될 조짐이 있습니까? 폭풍전야처럼 조용할 뿐입니다.
16-17절입니다. 1-6절에 하나님께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돌아갈 능력이 없음을 우리가 이미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위하여 긍휼과 사랑을 인하여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돌아왔기에 이제 성전에 다기 먹줄이 놓여지고 재건이 되고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풍부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시온을 안위하고 예루살렘을 택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때가 언제라고 학개서에서 보았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안위하시는 때입니다. 열방에서 주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올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왔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 편에서 화목제물을 마련하셔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의 풍성함을 드러내시고자 이방인인 우리에게까지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안정되게 사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심을
가장 큰 기쁨과 감사와 기적으로 여기고 사시기 바랍니다.
스가랴 1:18-2:5 척량과 불 성곽 2006. 11. 29
1:18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19 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니라 20 때에 여호와께서 공장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 21 내가 가로되 그들이 무엇하러 왔나이까 하매 대답하여 가라사대 그 뿔들이 유다를 헤쳐서 사람으로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매 이 공장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에 뿔들을 들어 유다 땅을 헤친 열국의 뿔을 떨어치려 하느니라 하시더라
2:1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 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2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할 때에 3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4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5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세상 사람들의 소망을 이루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고 그 뜻을 이루어내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관심사에 대하여 호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에 하나의 재료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참 기분 좋지 않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봅시다. 예레미야 18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집에 가보라고 하십니다. 토기장이 마음대로 진흙을 가지고 만들고 부수고 하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삭과 야곱을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대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탄생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줄 하나님이라는 토기장이에 들린 한 덩이의 진흙입니다. 이사야에서 보면 이렇게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29:15-16절에 보시면,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하며 누가 우리를 보고 알겠느냐고 하는 자들에게 화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토기장이를 진흙같이 여기겠느냐고 합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를 향하여 총명이 없다고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로마서 9:21 절에서는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인용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왜 천지만물을 만드셨는지를 보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체의 구원이나 영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보다도 고생을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렸기에 그 말씀의 성취를 보이시기 위하여 없는데서 만들어져야 하는 나라가 되고, 종살이도 해야 되고, 율법도 받고, 어겨서 포로로 잡혀가기도 하고, 약속한 기한이 되면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스가랴서의 말씀의 배경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와서 성전이 재건축되는 때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학개 선지서가 성전재건이 중심이라면 스가랴서는 예루살렘 성의 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 성 안에 있지만 성은 그 예루살렘 성전과 성안에 백성들이 사는 곳까지 다 포함하는 성이 되는 것입니다. 성전이 세워지고 성벽이 세워지고 그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고 친히 자기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성전의 재건과 성의 재건인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차 나타날 온전한 성전과 온전한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볼 때에 미래에 대한 예언들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면, 현재 그들이 당하는 시대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산위에 올라가서 멀리 보면 멀리 보이는 산이 중첩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멀리 보이는 산과 산 사이가 아주 가깝게 보이지만 막상 가 보면 그 산과 산은 또 엄청난 간격이 있는 것처럼 선지자들이 멀리서 보았을 때에 현재 그들이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재건하게 되면 바로 메시아가 임하고 완벽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제일 먼저 돌아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버리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돌아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 열조에게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돌아올 능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돌아오신 것입니다.
1:16-17절입니다. 내가 긍휼히 여김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도구로 사용하시는데 율법을 주시고 어김으로 진노하셔서 포로가 되게 하셨는데 그들이 이방에서 당하는 고난을 보시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데 그 근거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긍휼히 여기심으로 돌아오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성전에 재건되고 예루살렘에 먹줄이 쳐짐으로 성이 재건됩니다. 그러면 그 성읍이 다시 넘치도록 풍부할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시온을 택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환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와 세 번째 환상입니다. 18-21절은 두 번째 환상인데 스가랴가 눈을 들어보니 네 뿔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 네 뿔에 대하여 스가랴에서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보니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뿔이란 힘과 권세 그리고 교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또 보이신 것은 공장 네 명입니다. 공장이라는 말은 장인입니다. 망치나 다른 도구를 들고서 물건을 부수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이 네 공장은 유다를 헤친 열국의 뿔들을 떨어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헤치는 자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는 언약의 원칙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방의 뿔이란 이스라엘을 괴롭힌 모든 사방의 나라들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범죄 하여 그들을 몽둥이로 사용하였지만 그들이 스스로 강해서 그렇게 된 것처럼 교만하였을 때에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환상입니다. 2:1-5절입니다. 한 사람이 척량 줄을 잡고 있습니다. 에스겔서에서도 척량 줄을 잡은 사람이 나옵니다. 에스겔 40:2-3절입니다. 에스겔이 포로 된지 이십 오년 째에 하나님께서 이상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고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이 손에 삼 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서 있는 것입니다. 그 척량하는 사람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척량하는 것입니다. 장차 예루살렘의 성전의 재건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까지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에 보시면 척량 줄을 잡은 자가 어디로 갑니다. 스가랴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길이와 넓이를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사람이 육축이 많이 거하게 될 것이며 성과 곽이 없는 촌락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성과 곽이 없는 촌락과 같이 된다고 하셨는데 5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 사면에 불성곽이 되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됨으로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에 하나님께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되셨습니다. 사막에서 불기둥이 되심으로 보온만이 아니라 사나운 짐승들이 접근을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목자들은 밤에 불을 피움으로 사나운 짐승들을 접근하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곽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친히 불성곽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외부에서는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어느 누가 불의 성곽을 넘어 올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에서는 영광이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척량 줄과 불 성곽을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뜻에 달린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마음대로 확장하거나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척량하는 줄이 주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이미 하늘에서 계획된 대로 척량하는 것이지 사람이 요구한다고 넓히거나 좁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획하신 대로만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척량은 척량하는 기사의 의도대로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에 척량하는 기사가 땅을 조사할 때에 뇌물을 주면 지주에게 유리하게 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억울하게 척량으로 땅을 빼앗기는 경우도 허다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계획대로 척량하시는 분은 결코 뇌물이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획대로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이 척량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봅니다.
요한복음 6:37-40절입니다.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무슨 척량입니까? 단지 길이와 넓이만 척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1:1절에 보시면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시며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경배 하는 사람을 어떻게 척량하는 것입니까? 키를 재라는 말이 아니지요! 그 사람들의 숫자를 헤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번역에서는 성전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을 헤아리라고 합니다. 숫자를 세는 것입니다.
이렇게 척량 된 자를,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정된 자를 어떻게 보호하시는 것입니까? 불 성곽으로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30절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들을 얼마나 완벽하게 보호하시는데 이어서 나오는 말씀에서 이 세상의 그 어떤 세력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보다 더한 성벽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즉 척량하고 불 성곽으로 보호하시는 것은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예정된 자를 헤아려 내셔서 완벽하게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영광의 자리에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 양이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다 이루었고 이제 장차 나타날 영광이란 그리스도의 이러한 공로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만 척량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는데 여호와가 불 성곽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성소란 지상의 장소나 건물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21:22절입니다.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스가랴서 2:5절입니다. 사면에 불 성곽이 되심으로 주님이 영광이 되십니다. 예루살렘에 불 성곽으로 둘러쳐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이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생이 두루 도는 화염검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듯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하나님이 불 성곽이 되어 있으니 그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 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계21:27).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요한계시록에서 보면 일찍 죽임당한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구원의 능력임을 믿는 사람이 척량된 자며, 하나님의 불 성곽으로 보호받는 자들입니다.
스가랴 2:6-13 노래하고 기뻐하라 2006. 12. 6
6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하늘의 사방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이제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찌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7 바벨론 1)성에 거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찌니라 8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9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 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12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13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10절 말씀에 보시면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고 합니다. 시온의 딸은 오늘날 성도로 봅니다. 그러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노래하고 기뻐합니까? 이 말씀은 보통 기쁜 것이 아니라 환호성을 지를 만큼 기쁜 일인 것입니다. 기쁘고 노래하기는커녕 슬프고 괴롭고 울고 싶다고 하실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정치를 보아도 우울하고, 경제는 3천억 달러 수출 달성하였다고 여러 가지 행사들도 하는데 내 호주머니는 여전히 찬바람이 불고, 가족들을 보아도 다들 자기 밖에 모르고, 교회에 나와도 별 재미도 없고, 어느 집사님이 게시판에 올린 글처럼 인간의 적이 누구인가? 바로 곁에 오래함께 지낸 사람이라고 하던데 겉으로는 웃지만 속은 다르게 한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많이 성경으로 증거를 하였습니까? 그런데 이제야 실감이 나는 가 봅니다. 그러니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어제 저녁에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프로 농구하는 경기장에 가보았습니다. 공짜 표가 생겨서 도대체 어떤 곳인지 알아보려고 갔습니다. 사람들이 환호하고 노래하고 기뻐하며 치어리더를 따라 춤도 추고 창원 엘지가 일등을 한다고 파도타기 응원도 하는데 그렇게 재미가 있을까? 저는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성경의 본문의 상황으로 들어가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 된지 70년 만에 돌아왔지만 아직 성전은 완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초가 놓였지만 그 모양이 예전의 솔로몬 성전과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방의 대적들은 여전히 기세가 등등합니다. 아직 바벨론에서 돌아오지 않는 백성들도 많습니다. 이런 어려운 형편인데 무엇이 노래하고 기뻐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까?
6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현실이 어떠할지라도 여호와의 말씀이 약속으로 주어지기에 노래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반드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는 그 능력의 말씀이 계속하여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고 하면 빛이 없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5:10-11절입니다. “10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이 말씀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오라고 하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의 능력으로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기에 노래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2-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2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 것이며 13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명예가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지금 이스라엘의 현실이 비록 미약하고 비참하게 보여도 이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기에 노래하고 기뻐할 이유가 충분한 것입니다. 이미 스가랴 1장에서도 보았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지만(3,4) 그들은 스스로 돌아올 능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그것을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로 돌아오시는 것입니다(16,17).
다시 6-7절을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사방에 바람처럼 흩으셨지만 이제 다시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망하라고 합니다. 그곳은 바벨론인데 바벨론 성에 거하는 시온아 이제 너희는 피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으면 이제 남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북방에서 돌아오고 피하고 도망쳐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은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로 하여금 예언된 대로 70년이 되어 돌아오게 되는 것이며 고레스 왕의 마음의 하나님께서 움직여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살펴보아야 할 놀라운 표현은 바벨론에 있는 시온이라고 합니다. 시온이라면 예루살렘을 시온이라고 부는데 어떻게 바벨론에 있는 시온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시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대항하거나 애굽으로 도망가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순순히 포로로 잡혀간 그들이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시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온이라고 하여서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 시온입니다. 이 시온 백성에게 바벨론에서 피하여 나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8-9절입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략한 자들을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되며, 또 하나님의 백성을 범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동자를 건드리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손을 한번 흔들어버리시면 전에 자기들을 섬기는 자들,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히려 노략거리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은 아주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과 그들 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의 궁극적인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으로 인하여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일이 구약에서 계속하여 언약으로 주어진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그 언약을 이루신 사건입니다. 이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성취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10-11절의 말씀을 봅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날에는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미 경계가 이스라엘을 넘어섰습니다. 많은 나라, 많은 족속이 여호와께 속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의 말씀으로 인하여 노래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 낮에 누가복음 1-2장까지 보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찬양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인하여 찬양하는데 이 찬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들이 찬양하는 것입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엘리사벳이 찬양하고 마리아가 찬양하고 스가랴가 찬양합니다. 태어났을 때에는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이 찬양하고 목자들이 찬양합니다. 시므온이 찬양합니다. 안나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에 대하여 노래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대로 주의 구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다시 택하신다는 것은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의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이미 지난주에서도 보았습니다만 다시 택하시는 예루살렘이니 새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은 이제 새 백성들도 채워지는 것입니다. 유다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이방인중에 택함을 입은 자들이 차별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누가 분노하겠습니까? 혈통적인 주장을 하는 유대인들이 분노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증거 되는 일에 가장 심한 핍박을 한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의 복음 전하는 것을 가장 반대하는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다 달려들어 반대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은 자기의 일을 완전하게 이루어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자기 공로가 많다는 자들이 잠잠하지 않습니다.
13절입니다.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이 재건되고 그 성전에 여호와께서 임하시고 일어나실 것이라는 것보다 더 궁극적인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는 예언인 것입니다. 이미 스가랴 선지자가 바벨론에 있는 시온이라고 하였듯이 오늘날은 세계 각처에서 주께 속한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잠잠 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송사하고 훤화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사셔서 자신의 거처를 삼으시는 일에 대하여 누가 입을 열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건드리는 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8절의 말씀처럼 여호와의 눈을 건드리는 것이 됩니다. 사울이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고 핍박할 때에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성도를 핍박한 것은 곧 예수님을 핍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노래하고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세상의 영광을 바라본다면 결코 노래하고 기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세상에 재미있다는 것들을 다 경험해보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즐거울까? 저것이 재미있을까? 하면서 기웃거려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까? 세상에서 재미있다는 것 치고 죄짓지 아니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이생의 자랑거리를 노래하고 기뻐하는 것은 정말로 허탈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런 세상을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구약 시대의 바벨론이 세상의 경제와 힘과 세상 영광의 중심이라면 오늘날은 그 중심이 따로 없습니다. 온 세상이 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기에 이 세상 자체가 다 바벨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악한세대에서 즉 바벨론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벧전 5:13절 바벨론에 있는 교회)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아니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믿게 된 자들에게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아 바벨론에서 피하여 나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이제 주의 자리에 등극하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자기 백성을 지금도 관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입니까?
스가랴 2:6-7절 방식입니다. 이 말씀의 신약적인 모습이 요한계시록 18:1-4절입니다. “봉독”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이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나타날 영광입니다. 이 심판을 보고서 바벨론이라는 세상에 전부를 걸고 산 사람들은 슬피 울며 통곡합니다. 그러나 20절에서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대로 반드시 될 것임을 믿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 약속의 말씀으로 인하여 지금의 상황이 노래할 것도 기쁠 것도 없지만 이 약속만으로 노래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내 백성아 그곳에서 나오너라. 이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오늘도 주님은 일하십니다.
스가랴 3:1-5 아름다운 옷 2006. 12. 13
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옷이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옷의 색깔로 관직의 등급을 결정하였습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영화제목도 있던데 프라다를 입었다는 것은 명품 옷을 입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이 언제부터 옷을 입었습니까? 에덴동산에서 범죄하고부터 입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최초의 옷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린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면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스가랴 선지자가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에게 이런 천상회의를 보이신 것입니다. 하늘에서 회의 일어나는 장면은 욥기에서도 나오고 열왕기서와 이사야 예레미야서에도 나옵니다.
욥기서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욥의 신앙을 자랑하자 사단이 참소하기를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의 소유를 빼앗아 보면 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실패하자 그의 몸을 치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단이 무엇으로 대적하는지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사단이 최초로 나타나는 장면은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 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게 되고 눈이 밝아지자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알고 두렵고 부끄러워서 무화과 나무 아래에 숨고 그 잎으로 자신을 가린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죽 옷을 지어서 입히신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가 되게 하셨고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리라는 전쟁의 개시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끊임없이 사단의 역사는 여인의 후손들을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게서 끊어내려고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의 이름이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는데 참소하는 자, 파괴자, 속이는 자, 악한 자, 원수, 거짓의 아비, 이 세상의 임금, 이 세상의 신, 시험하는 자, 공중 권세 잡은 자 등의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도 사단이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합니다. 사단이 무엇으로 대적하였을까요?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옷이 더럽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옷이 더럽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성전을 재건하지 못하고 미루게 된 것은 학개서를 보니 하나님의 성전보다 자기들의 집을 짓는 일에 더 빨랐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무관심과 게으름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더러운 옷을 입은 모습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옷은 어떻습니까? 더럽습니까? 깨끗합니까? 세탁소에 맡길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더러움은 속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더러우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다 더러운 것입니다. 우리 속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속에 쌓여있는 것이 겉으로 나와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점잖고 깨끗해 보이고 신앙이 좋아 보이는 사람도 어떤 환경에 처하게 되면 그 사람의 본색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에 대하여 사단이 고발하고 참소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8-10절입니다.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1)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2)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11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요한계시록 12:7-12절입니다.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찐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 갔음이라하더라”
마귀가 두루 다니면 삼킬 자를 찾는 것은 이미 사단에 하늘에서 번개처럼 땅에 떨어졌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눅10:18). 그러므로 계시록의 말씀은 하늘에 전쟁이 일어나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는 꾀는 자가 쫓겨난 것입니다. 그 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밤낮 성도들을 참소하던 자입니다. 그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어린 양의 피와 그 증거로 인하여 이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는 즐거워하지만 땅과 바다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직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단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늘에서 밤낮 참소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로 인하여 하늘에서 쫓겨나서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되어서 지금도 이 땅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던 그 일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은 오늘 본문의 내용대로 여호수아의 옷이 더럽다는 것입니다. 항상 진리를 대적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그 백성에게서 빼앗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단의 대적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 책망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거민이나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자신들의 행위로서 더렵혀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거룩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와 허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허물과 죄를 보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도 그들의 수가 많거나 의로워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7:7-8절입니다.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이어지는 말씀은 그러므로 너희는 내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대로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사단의 고소를 당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더러워졌으니 벌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언약을 무효화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는 후회가 없으시기기에 주의 사랑을 베풀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는 누가 감히 송사하리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 사랑에서 끊어낼 자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랑을 베푸시기 위하여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말씀하신 바를 친히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여호와의 사자란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로 봅니다. 그러니 그 여호와의 사자가 사단을 책망할 뿐만 아니라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놀라운 조치를 취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2절 하 반절을 봅니다. 이는 불에 거슬린 나무가 아니냐고 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참소대로 불에 거슬려서 더럽게 된 여호수아라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며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둘째 사망의 해는 영원히 꺼지지 아니하는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할 자들을 하나님의 언약과 사랑을 인하여 끄집어내셨지만 그러나 더러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심판의 장소인 바벨론 포로에서 끄집어 내셨지만 여전히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단의 참소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셔도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 4:11절입니다.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불붙는 가운데 그냥 두시면 멸망이며 심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스가랴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것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조각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다하여 주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살아야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일보다 자기들의 집 짓는 일에 바빴던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단의 송사만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도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입니다. 그러면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3절입니다. 2절에서 여호와의 음성을 듣는 순간에 여호수아를 보니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입혀져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힘으로는 벗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입은 것이라면 자신이 벗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시편 65:3절입니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시편 130:3-4절입니다.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찐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여호수아가 대제사장이라고 자신의 죄를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러운 옷이 입혀진 것입니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구하여 낼 수가 있습니까? 죄를 이길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용서하심이 구속하심이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지 못하는 모습을 이사야 59:1-8절을 봅니다.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4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5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7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사야 64:6-7절입니다. “ 6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우리는 다 부정한 자가 되고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주님을 부르는 자도 없고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의 말씀이 복음이 됩니다. 이사야 61:10절입니다. “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스가랴 3: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자들에게 명하시기를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하십니다. 자기가 더러운 옷을 벗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께서 벗겨주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그 옷을 벗기시는 것은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더러운 죄를 하나님께서 제거하여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과를 제하여 버린 것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신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옷이란 잔치에 나갈 옷입니다. 더 확대하면 의의 옷이며 영광의 옷인 것입니다.
5절에서 스가랴 선지자가 거기에다가 정한 관을 씌워달라고 간구하기 그것도 허락하신 것입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정한 관을 썼습니다. 완벽하게 흠도 티도 없는 깨끗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으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그대로 성취가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여호와의 사자, 즉 구약의 그리스도가 그 곁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5절 끝에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고 합니다. 그 곁에서 계속 서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하심의 궁극적인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자기 백성을 의롭다고 하여 주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14절에 보시면 수많은 무리들이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찬송하며 나오는 무리들은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16;15절에서는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고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벌거벗음과 부끄러움을 가려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스스로 벌거벗으셨고 부끄러움을 다 당하신 것입니다.
계시록 19장에서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는데 이들은 빛나고 깨끗한 흰 세마포 옷을 입었습니다. 이 말씀 또한 수동태로 입혀진 것입니다. 마지막 복이 22:14절에서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신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살과 피만이 우리의 의가 됩니다. 우리의 거룩함과 영광이 됩니다.
오늘날 사단은 어떻게 성도를 대적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다시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의가 있다고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입혀주신 의의 옷을 간직하고 지키고 그 옷에 자기 의라는 더러움이 묻지 않도록 빠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자기 피로 주신 옷만이 우리의 의의 옷이며 구원의 옷이며 아름다운 옷입니다. 이 옷을 입고서 이 옷을 주신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이 그의 몸 된 교회요 신부입니다.
스가랴 3:6-10 순과 돌 2006. 12. 20
6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증거 하여 가로되 7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지난주에 본 말씀은 여호수아가 대 제사장인데 그 옷이 더렵혀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적이 송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더러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을 책망하시면서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제 아름다운 옷을 입고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제사장의 직분을 제대로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6-8절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말합니다. 네가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라고 합니다. 내 집이란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도와 율례를 지키면 성전을 다스릴 것이며 성전의 뜰을 지킬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너로 여기 서 있는 자들 중에 왕래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서 있는 자들은 두 부류입니다. 하늘의 천사들과 여호수아와 함께 있는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니 천상과 지상을 왕래한다는 것입니다. 즉 중보자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해야 할 일이 이런 일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가지고 대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피 뿌림을 인하여 속함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온전한 중보자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제사장들 자신조차 죄와 허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받고 있는 여호수아나 그 앞에 있는 자들은 다 예표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을 왕래하면서 중보하실 대제사장은 여호수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심과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을 우리가 다 믿는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일을 하고 계심 또한 믿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8:34절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9:24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 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여호수아는 그림자인 구약의 성소의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하늘에 들어가셔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서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이미 세상의 끝이요 종말인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땅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기다리며 사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예수님이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셔서 죄를 없이 하신 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히브리서 10:10절을 봅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 말씀에서도 단번에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전후의 말씀을 보면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나 그리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신 것입니다.
스가랴서 3:9절의 끝 부분을 봅니다.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하루에나 단번에나 같은 의미로 봅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표의 사람이 나와야 하고 예표의 말씀들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예표의 말들이 오늘말씀에서 순과 돌입니다. 이 둘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취가 되어지는지를 성경을 통하여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8절입니다. 여호수아와 그 앞에 서있는 자들은 다 예표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예표하기 위한 사람들입니까? 장차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 순을 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순이라는 이름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순이란 이름은 이사야나 예레미야 선지자도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말하였습니다. 스가랴 6:12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고 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재건하고 그 성전을 다스려야할 여호수아 대제사장의 일이 장차 나타날 성전의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학개서에서 이미 보았습니다만 그때 짓던 성전의 초라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장차 나타날 영광스러운 성전을 예언한 것처럼 예수님은 장차 나타날 성전이 되셔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시는 것이며 그것은 이미 건물이 아닌 것입니다.
히브리서 9:22-26절입니다. “봉독” 이 모든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집을 다스릴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의 참 성전에서 영원히 다스릴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집에 사환이었지만 예수님은 그 집의 아들이라고 히브리서 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하신 일을 보고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영생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부지런히 성경을 보았습니다. 성경에 영생이 있는 줄을 알고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성경을 보았지만 성경이 증거 하고자 한 예수님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경이 나에 대하여 증거 한다고 요한복음 5:3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 때는 신약이 없고 구약만 있는 때입니다. 그러니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에서 예수님을 증거 한 것입니다.
이사야 53:1-2절입니다. “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순과 싹 이런 표현들이 다 연약함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마른 땅에서 나온 순과 줄기가 얼마나 형편이 없는 모습입니까? 그래서 이사야 53장을 고난 받는 종의 노래라고 합니다. 여기서 종과 순이 결합이 되는 말씀이 스가랴 3:8절에서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연약함만이 아니라 심판도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11:1-5절입니다. “봉독” 그러므로 순이란 이름 하는 분이 어떤 모습으로 오셔서 일하셨는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하여 이미 알고 있기에 구약의 이러한 예언들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인 줄 알게 된 것입니다.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으니 주의 신이 임한 분으로서 여호와를 경외함을 즐거움으로 사셨던 예수님입니다. 그 분이 또한 심판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기능으로서는 돌이 또한 그 역할을 감당합니다.
9절을 봅니다. 여호수아 앞에 돌을 세우는데 이 돌에 일곱 눈이 있고 새길 것을 새긴다고 합니다. 그 일곱 눈과 무엇이 새겨진 돌이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고 합니다. 이미 히브리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속죄하시고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 돌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
우선 구약에서 그리스도와 돌에 대한 관련된 말씀들을 봅니다. 이사야 28:16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시험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 석으로 삼을 것이라고 합니다. 시편 118편23절 에서는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서 2:34-35절입니다. “34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35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이 세 곳의 말씀을 보시면 돌이란 시험한 돌이며 버린 돌이지만 하나님 집의 모퉁이 돌이 되며 또한 세상을 심판하는 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이 돌에 대하여 예수님도 자신을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을 마태복음 21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도 베드로전서 2장에서 이사야서와 시편을 동시에 언급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도록 이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20-22절을 봅니다. “봉독” 지금도 성전이 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 되시고 그로 인하여 구원받는 자들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전이 완성이 되면 이 세상은 불살라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쓰레기로 지어진 아파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만들어진 그 아들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돌에 대하여 몇 곳을 더 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17절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감추인 만나를 주고 흰 돌을 주시는데 그 돌에 기록된 새 이름이 있습니다. 돌에 이름을 기록하려면 새기는 것이 분명하겠지요! 그 돌을 받은 사람이 아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무엇이겠습니다. 아시아 일곱 교회에 이긴 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생명나무를 주신다는 것, 서머나 교회에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것, 버가모 교회에 만나와 흰 돌을 주시는 것, 두아디라 교회에 새벽별을 주신다는 것, 사데교회에 생명책에서 이름을 흐리지 않게 하신다는 것, 빌라델비아 교회에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신다는 것, 라오디게아 교회에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며 보좌에 함께 앉게 하는 것이 다 그리스도가 상급이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 이름을 성령으로 인하여 부르고 믿게 되는 것이 이미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 돌이 모든 것을 다 압니다. 스가랴 3:8절에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5:6절에 보시면 봉인한 책을 다윗의 뿌리에서 이긴 자가 나오셔서 봉인을 떼시는 데 그 분이 죽임당한 어린 양이며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돌이 바로 고난 받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눈이 일곱이란 온 세상을 다 두루 보시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의 눈앞에서 피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일곱 교회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안다고 하신 것입니다. 수고도 알고 죄악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성령이 임하게 되면 이 주님의 눈을 의식하기에 어떤 봉사를 하고 수고를 하여도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게 되었기에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은혜를 증거 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의 심령 골수까지 다 보시기에 자기 죄를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죄를 하루에, 단번에 사하신 일곱 눈이 새겨진 돌의 능력을 알게 됩니다. 단번에 속죄하신 능력을 압니다. 그것은 일찍 죽임 당한 어린 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찬양하는 것입니까?
스가랴 3:10절에서는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아서 가장 평안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구원을 맛 본 자는, 즉 순과 돌의 희생과 승리로 인하여 구원이 임한 자는 서로 초대하며 성도의 교통이 이루어지는 데 그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이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양께 있기에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리는 것입니다.
스가랴 4:1-14 하나님의 신으로 2006. 12. 27
1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깨우임 같더라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3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4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리라 하셨고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9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11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12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13 그가 내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14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연말이 되면 각 언론매체에서 올해의 십대뉴스를 발표합니다. 그 결정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관심을 가졌는가 하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 스가랴 선지자가 계시를 받았는데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를 보았다는 것은 몇 번째 뉴스에 들어가겠습니까? 백대, 천대에도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일에만 중요관심사를 나타내고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쁘고 좋은 소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여기에 모이신 여러분은 그렇게 믿고 사시지요? 우리가 믿든지 아니 믿든지 간에 주님은 주님의 약속하신 말씀대로만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4:1절입니다. 천사가 스가랴를 깨웁니다. 마치 잠자는 사람을 깨우는 것처럼 깨웁니다만 이것은 정말 잠을 자는데 깨우는 것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계시를 받도록 하는 깨움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일상적으로 열심히 부지런히 살아가는 것은 잠자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노아홍수 때에 열심히 살아간 사람들은 잠자는 사람들이고 노아 방주를 예비한 사람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깨어나라고 합니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합니다. 주님의 날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4:2-5절입니다. 깨워놓고서는 네가 무엇을 보느냐고 합니다. 그래서 보니 순금등대가 있고 그 꼭대기에 일곱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스가랴 선지자가 천사에게 묻자 천사가 이것을 모르겠느냐고 합니다. 모르겠다고 하자 천사가 설명합니다.
4:6-10절까지 이 등대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3장은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4장은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대제사장은 여호수아이고 총독은 스룹바벨입니다. 스룹바벨 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환상을 보고 그 일을 스룹바벨에게 말씀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지금 스룹바벨은 성전을 완공해야하는 시점에 있습니다. 처음 기초 돌을 놓았지만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산과 같은 문제들이 있습니다만 그 산들이 스룹바벨 앞에서는 평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머릿돌을 내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머릿돌이 내어놓는다는 것은 성전이 완성이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지만 스룹바벨을 통하여 완성이 될 것인데 그때에 은총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 머릿돌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전의 완성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 됨을 보이는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룹바벨의 성전의 머릿돌이 놓여지는 것이 은총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스룹바벨인 이 전의 지대를 놓았기에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됨을 통하여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알 것이라고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이렇게 증거 함으로 이 일이 이루어질 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신 것을 알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날의 일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성전 재건은 너무나 초라하고 작은 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에 작은 일로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세상이 알아줄만한 내용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며 다 보시는 것입니다. 3장에서는 돌에 일곱 눈을 새겼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 말씀은 일곱 등대가 일곱 눈이라고 합니다. 그 일곱 눈이 스룹바벨의 손에 들려진 다림줄을 보고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이 다림줄을 들고 있다는 것은 성전을 계속하여 재건하고 있는 중인데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을 기뻐합니다.
11-14절입니다. 이제 그 순금등대 곁에 선 두 감람나무에 대하여 질문을 합니다. 이는 기름 발리운 두 사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선 자들이라고 합니다. 지금 성전을 완성하는 일에 두 사람의 기름 발리운 두 사람이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입니다. 구약에서 제사장과 왕이 기름부음을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제사장과 왕으로서의 기름부음을 받은 것을 예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 제사장도 되시며 왕도 되시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제물이 되시기도 하시는 대 제사장이시며 자기 백성의 왕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멜기세덱이 제사장이며 왕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금등대가 보이고 그 순금등대에 일곱 주발이 있고 그 주발에 일곱 관이 연결되어서 살아있는 두 감람나무에서 계속적인 기름을 공급받아서 빛을 발하게 될 것을 본 것입니다. 이러한 환상이 무엇입니까?
스룹바벨이 성전을 재건함을 통하여 장차 나타날 완전한 성전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성전이란 사람의 손으로 세운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건물로 된 성전을 헐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성전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자가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예수 믿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의 몸이 성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몸의 머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보여준 것은 성전의 재건과 건물 그 자체가 아닌 것입니다. 그 건물은 또 무너지는 것입니다. 헤롯 왕 때에 46년 동안이나 증축과 개축을 통하여 지어진 성전의 건물조차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서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 우리가 중심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4:6절을 봅니다. 성전의 재건이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된다고 합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스룹바벨과 학개 선지자가 동원이 되고 백성들이 어려움을 물리치고 힘을 합하여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재건한 것이 분명히 사람의 힘인데 오늘 말씀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말미암아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 된다는 것은 인간의 그 어떤 힘과 능력과 재주로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이루어 내시는 일에 사람들이 쓰임을 받는다고 하여도 그 사람들은 부정되어지면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자 보아라! 우리가 이 일을 이루어 내었다고 하는 그런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인되지 않는 일들은 바벨탑과 같은 일들입니다.
자 우리가 우리 이름을 내자고 하는 것이 바벨탑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이 일하시면 자기를 부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신이 감동하셔서 일하게 되면 반드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기드온이 300명의 군사로 대군을 물리치고 왔을 때에 백성들은 당신과 당신의 아들들이 우리의 왕이 되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자기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기에 백성들의 왕이 될 수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어나게 하였을 때에 사람들이 주목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일어나게 한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 한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일어나게 된 것이 우리 개인의 경건과 권능으로 일어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합니까? 이 사람이 일어난 것은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셨고 그 분에게서 나온 믿음이 이 사람을 일어나게 하였다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룹바벨을 통하여 성전의 지대를 놓고 그 머릿돌을 드러내는 일이 스룹바벨의 지도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 지대로 놓고 약 15년이나 재건하지 못하고 방치하여 두었습니다. 높은 산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룹바벨 앞에서 그 산도 평지가 된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신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일하시는 일은 어떤 방해도 물리치시고 그 일을 이루어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란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의 역할을 십자가로 완성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왕의 자리에 등극하신 것입니다. 두 감람나무의 역할을 예수님이 완성하셔서 그 감람나무에서 등대를 향하여 기름이 공급되듯이 오늘도 주님께서 성령을 계속하여 보내심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만들고 유지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연말이라서 새해에 봉사할 사람들의 명단을 정리하면서 이 사람이라면 이 일을 할만 하겠다는 사람이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 무엇을 맡기면 불평 없이 감사함으로 충성스럽게 할 만한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때 생각나는 것이 좀 힘과 능이 있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어느 집사님이 서울서 왔는데 창원의 어느 회사에 일년간 컨설턴트로 왔기에 연봉인 엄청 많고 또 그기에 걸맞게 연보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 사람이 오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힘과 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목사인들 그런 사람이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왜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이런 말씀을 통하여 그런 생각이 우리의 욕망이며 죄임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수시고 새롭게 세우시기 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 사람의 힘과 능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신이 일하시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신, 즉 성령께서 일하심을 단 마음으로 받아들이시기를 원합니다.
스가랴 5:1-4 날아가는 두루마리 2007. 1. 3
1 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니이다 3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 4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것을 발하였나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날짜를 기록하는데 무심코 2006년이 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고쳐서 2007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2006년이 지나고 2007년이 되니 무언가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새해가 되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과연 해아래서 무엇이 새롭다고 할 것이 있습니까! 다만 달력만 새로워진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새로워지기보다는 오히려 낡아지는 것입니다. 주름살이 늘어가고 흰머리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만물이 쇠하여지고 낡아지고 더러워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은 게시판에서 나이를 먹을수록 죄는 더 플러스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죄가 플러스 된다는 말에 (교만)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이 먹을수록 더 교만하고 단 말을 좋아하고 쓴말은 싫어한다는 고백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은혜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두루마리가 날아가는데 그 안과 밖에 저주가 가득 기록된 두루마리가 날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저주가 날아다니는 세상에서 무엇이 과연 복입니까? 새해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소망을 빌고 있습니다. 해를 보고 빈다고 수 만 명이 몰려갑니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몰려가서 새로운 소망을 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주의 두루마리가 날아다니며 이 저주의 두루마리대로 성취되고야 말 이 세상에서 과연 무엇이 새로운 것이며 복이며 은혜입니까? 새벽기도회 때 은혜가 무엇인가 살펴보고 있는데 최초로 나타난 은혜란 노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물론 그 앞에서도 은혜가 나타납니다만 은혜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보면 노아에게 처음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은혜를 입은 노아는 무엇을 준비하게 됩니까?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사고팔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 바쁩니다. 바쁜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는 노아와 그 가족이 미친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0년 동안 방주를 예비한 것이 은혜입니다. 언제 은혜가 은혜답게 드러난 것입니까? 온 세상이 물로 심판받을 때에 은혜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주와 심판이 없이는 은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앞의 3장과 4장과는 달리 심판과 저주가 선포됩니다. 3장에서는 여호수아의 옷이 더럽다는 송사에 대하여 그 더러운 곳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라고 하셨습니다. 4장에서는 순금등대와 두 감람나무를 보여주시면서 장차 나타날 참된 성전과 메시아를 보여주시는 은혜로운 계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5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심판과 저주의 말씀입니다. 5:1-2절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다시 환상을 봅니다. 이 환상은 여섯 번째 환상입니다. 그 보이는 것은 커다란 두루마리가 날아가는 것입니다. 이 두루마리의 크기는 길이가 20규빗이고 넓이가 10규빗입니다. 솔로몬 성전의 현관의 크기와 같습니다. 그곳에서 주로 율법이 낭독되는 곳입니다. 그러니 이 두루마리는 율법에 나타난 저주의 기록이 가득한 것입니다.
3절입니다. 그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는 것입니다. 두루마리가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엔진이 붙은 것도 아닌데 스스로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온 땅에 저주를 퍼붓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 저주의 내용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무릇 도적질 하는 자는 이편의 글대로 끊어질 것이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저편의 글대로 끊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4절에서 도적질과 맹세에 대하여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저주의 말씀이 도적질 하는 집에도 들어가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를 것이라고 합니다. 나무만이 아니라 돌까지 불살라 버릴 무서운 저주의 말씀이 지금 막 날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만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하여 날아다닌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 이렇게 계속하여 날아다니는 것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발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그 자체가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시기에 그 입에서 발하신 말씀은 반드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저주가 들어가는 집은 몽땅 다 불살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의 선포를 들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저주가 임하지 아니할 길이 없는가 하면서 묻게 됩니다.
물론 그 당시의 사람들도 물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포로생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여야 하는데 자기 집짓는 일에 바빴으니 이것이 도적질이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하고서도 15년이나 지체가 되었으니 거짓 맹세한 것이 됩니다. 그러니 그러한 죄에 대한 책망을 하면서 성전재건에 힘쓰라는 말씀도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보다 더 심한 저주와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이 저주와 심판의 말씀은 어떻게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나는 도적질 하지 않았고 망령되게 맹세하지 않았기에 상관없다고 여기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말씀이라도 헛되이 돌아가지 아니합니다. 복을 명하시면 반드시 복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주를 명하시면 반드시 저주를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그 어떤 행위를 하기 전에 결정된 문제입니다.
그러면 오늘 읽은 말씀에서 저주가 선포되는 것은 단지 두 가지의 잘못만으로 저주가 온다는 것이 아니라 왜 이 땅이 저주를 받아야 하는가를 지금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을 모델로 사용하셔서 오늘 우리에게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구나! 이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와 긍휼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생각하기를 내가 무슨 도적질을 하였으며 무슨 망령되이 맹세를 하였는가 하면서 자기는 늘 괜찮은 사람으로 여긴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도적질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사람은 도적질 그러니 십일조만 가지고 도적질이라고 하는데 십일조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피조물답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고 약하게도 하시고 강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높아져야 하고 강하여야 하고 살아야 한다고 여기고 있으니 그와 반대되는 일이 일어나면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피조물의 자세입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사셨습니까? 나를 위하여 먹고 나를 위하여 마시고 나를 위하여 무엇이든지 하였지 언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먹고 마시고 입고 사셨습니까? 오직 나만 위하여 살아놓고서 도적질하지 않았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도적질하지 말라는 제 8계명은 모든 계명과 다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부모를 공경하여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도적질이며, 살인도 남의 생명을 도적질 한 것이며, 간음도 도적질이며,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 하는 것도 도적질하기 위한 거짓 증거이며, 탐내지 말라는 말씀도 결국 도적질 하고 싶은 마음을 겨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감옥 갈만한 도적놈이 아니라고 자기를 정당화시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망령되이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제께 우리 애 둘이서 무슨 약속을 주고받는데 작은 아이가 자기 언니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약속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의 이름을 맹세하면 안 된다고 하자 언니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않는 것은 지키지 않는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것은 지키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약속 받아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헛된 맹세를 하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맹세를 한다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 지킬만한 능력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율법이 선포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 율법에 순종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율법을 지키면 복이 주어지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가 주어진다는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멘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지키지 못합니다. 당연히 언약의 저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맹세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33-37절입니다.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예수님께서 왜 맹세를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맹세하는 자가 맹세를 이룰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로 맹세하지만 우리가 하늘을 좌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인간의 맹세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땅도 하나님의 발등상인데 어느 누가 땅으로 맹세를 합니까? 그 사람의 호흡이 끊어지면 그날에 그 모든 도모가 다 허사로 돌아가는데 무슨 맹세를 합니까? 자기 머리카락 하나 희거나 검게도 못하는 인생이 맹세가 가당치도 않는 말입니다.
그러면 두루마리에서 저주가 쏟아지는 것은 누구에게 쏟아져야 하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날마다 도적질하고 날마다 하늘과 땅을 움직여보고 싶어서 맹세를 수도 없이 하는 우리들입니다. 하나님 이것만 이루어주시면 제가 이것을 하겠습니다. 이런 식의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였습니까? 오늘도 사람들은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맹세를 합니다. 이것만 이루어주시면 제가 이것을 하겠습니다. 도대체 자기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소치입니다.
올해가 황금돼지해라고 하면서 서로 복 받으라고 야단입니다. 그런 인사는 야고보서의 5장의 말씀에 의하면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며 땅의 재물을 쌓아놓은 자들을 향하여 도살의 날에 살 찌웠다고 합니다. 도살의 날을 위하여 돼지에게 살찌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돼지를 보고서 복 받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란 왜 이 땅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몽땅 다 불살라지는지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도 저주의 두루마리는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발하셨기에 이 세상 끝날 까지 그 저주를 반드시 성취시키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이런 저주의 세상에서 피할 곳은 오직 한 곳뿐입니다. 갈라디아서 3:13-14절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6:22절에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주께서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주님이 임하심을 마라나타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 안에서만 만물이 새롭습니다. 그 분의 사랑하고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스가랴 5:5-11 악의 분리 2007. 1. 17
5 ○내게 말하던 천사가 나아와서 내게 이르되 너는 눈을 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하기로 6 내가 묻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그가 가로되 나오는 이것이 에바니라 또 가로되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7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는 동시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8 그가 가로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구리 위에 던져 덮더라 9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왔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그들이 그 에바를 천지 사이에 들었기로 10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하매 11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집을 지으려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가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
아직도 새해의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새해 인사의 대부분은 복을 빌어주는 인사들입니다. 양력이 아니라 음력설이 또 있으니 그때도 사람들은 새해 복 받으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다 복 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런 인사를 하는데 왜 그렇게 소원하는 복이 오지 않는 것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라. 열심히 살아라.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합니다. 요즈음은 그런 말도 먹히지 않고 어떻게 대박을 한번 터뜨리는가를 말합니다.
그러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복 받기를 좋아하는데 교회에서는 왜 복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까? 제가 이 설교를 절반쯤 준비하다가 십자가 마을 수련회를 갔습니다. 갔다 와서 같은 시찰 회에서 아는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다고 해서 한번 가 보았습니다. 오늘날 부흥회는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도 했고 다른 교회의 분위기도 한번 보고 초청하였으니 한번이라도 인사차 갔습니다.
첫날 저녁 설교가 학개서였습니다. 교회 현수막은 신년 축복 성회였습니다. 어떤 설교였는가 하면 ‘오늘부터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는 제목의 설교였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려고 하시는데 왜 복을 못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보다 자기 일에 빨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노력하여도 전대는 구멍이 생기고 소득은 절반이하도 안되고 풍재와 우박과 곰팡이가 쓸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집회를 통하여 여러분이 바뀌지 않으면 영원히 이런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자대로 보면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대로 전한다는 것입니다. 학개서의 성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런 것은 전혀 언급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먼저 드려서 복을 받자는 이야기입니다. 설교 끝나고 기도하기 위해 불 끄고 찬송하는 시간에 나왔습니다. 오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제가 그 부흥회 가기 전에 설교 준비하였던 것을 말씀드립니다. 시작이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신년축복성회’라는 곳을 가보면 왜 지금까지 복을 받지 못하고 살았는지 그 이유를 성경을 가지고 드러냅니다. 이사야 59:1-3절입니다.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이 말씀이 기억이 날 것입니다. 저도 몇 번은 들었던 내용입니다. 이것을 읽어놓고서는 사람들의 죄악을 지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에 나오는 내용으로 지적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 다니면서 죄라고 지적하는 것은 예배 잘 못 드린 것, 헌금 제대로 안 한 것, 교회 봉사 제대로 안 한 이런 것으로 죄를 지적합니다. 안 걸릴 사람이 거의 없기도 하지만 이런 죄를 지적하면 조금만 마음을 먹으면 행할 수도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서 어떤 죄악을 지적하고 있습니까? “4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5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7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인간의 사상 자체가 죄악의 사상이기에 그 행함이 죄를 짓기에 빠르지 의를 행하기에는 무력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인간이 스스로 이런 죄악에서 돌이켜서 구원에 이를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기에 이런 상태에서 내가 죄를 짓지 않고 의롭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이제부터는 내가 복을 받고 살겠다고 결심하고 결단하면서 자기가 지켜서 행할 수 있는 것들을 챙기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악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 죄악을 해결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 죄악의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12-13절입니다. “12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찌어다 심히 떨찌어다 두려워할찌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두 가지 악이 무엇입니까? 생수의 근원되는 여호와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다 해당됩니다. 스스로 살길을 찾아 나서지 않습니까? 아니 그러면 가만히 앉아있으라는 말입니까? 아무리 가만히 있으라고 하여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속에서 불안하여 요동을 치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찾아 나선 길이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2:18-19절입니다. “ 18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 길에 있음은 어찜이며 또 그 하수를 마시려고 앗수르 길에 있음은 어찜이뇨 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자기만 챙기는 것이 본능인데 어떻게 이 악을 제거할 수가 있겠습니까? 날마다 죄악을 먹고 마시며 살고 있는데 무슨 수로 이것은 죄악이고 이것은 선이고 하면서 쓰레기 분리수거 하듯이 악을 분리하여 담아서 내다버릴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것이 안 됩니다. 인간보다 악의 힘이 더 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서는 죄를 다스릴 힘이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 4:7절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분노한 것입니다. 그 분노는 하나님이 받아주신 아벨을 죽이고자하는 것입니다. 이 죄의 소원을 가인에게 다스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죄의 소원을 다스릴 인간이 없다는 것이 아담의 후손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율법이 주어진 것이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죄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어떤 인간도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을 보면서 인간이 죄를 다스리거나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였기에 아직도 구약을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지켜서 복을 받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만 보면 얼마나 많이 조건적으로 되어 있습니까? 이렇게 하라 그러면 이런 복을 주리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인간도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면 왜 율법을 주신 것입니까? 네가 죄인임을 알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를 해결할 길이 율법에서는 없는 것을 하나님의 영이 임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입니다. 이 영을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살펴서 죄악이 분리되는 한 날을 내다본 것입니다. 그 내용이 선지자들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학개서의 성전재건도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안에서 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무슨 복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복이란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며 죄 사함을 받는 것이며 하늘나라를 상속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복이 죄악으로 인하여 오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악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시는지 스가랴는 환상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스가랴 선지자가 본 이상은 에바 속에 한 여인이 있고 그 에바를 납으로 된 뚜껑으로 막아서 시날 땅으로 옮겨버리는 것입니다. 에바란 되나 말처럼 곡식을 계량할 때 사용하는 통입니다. 아주 큰 통이라서 여인이 들어가 앉을만한 크기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을 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악이 통에 가득 차게 되면 그것을 학의 날개 같은 것이 있는 두 여인이 시날 땅으로 옮겨버리는 것입니다.
5-6절을 봅니다. 에바를 보는데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즉 온 땅이 이런 에바에 악이 가득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 홍수 때에 죄악이 관영한 것처럼 악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하는 동안 가나안은 악이 가득하였습니다. 그 죄악이 무르익은 때에 진멸하여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심판을 받는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오고 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언약대로 남은 백성들이 있습니다만 이 남은 백성들을 위하여 죄악을 옮기시는 것인데 그 이전에 먼저 죄악의 관영함과 그 양이 차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악이 가득 차게 되면 따로 분리하여 시날 땅에 옮겨버리는 것입니다.
이 시날 땅은 바벨탑을 쌓은 곳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17장 18장에서 바벨론입니다. 늘 하나님을 거역하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장소가 아닌 하나님을 거역하는 곳이 바벨론입니다. 시날 땅에서 그 악을 위하여 집을 짓습니다. 악을 제거하지 않고 분리하여 모아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꺼번에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 보시면 바벨론이 어떤 곳인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영광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이 어떻게 성취가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29-33절입니다. “29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조상의 양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하고 가득한 모습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모습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의 죄악은 자신이 대신 지시고 옮기신 것입니다. 마치 구약시대 때에 아사셀 염소가 죄악을 짊어지고 무인지경으로 내어버리듯이 자기 백성의 죄악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의 악을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피로 자신의 십자가로 옮기신 것입니다.
우리스스로 악을 분리하여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옮기신 것입니다. 시편 103편을 봅니다. “봉독”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악을 멀리 옮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지금까지 분리 작업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을 골라내시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골라내시겠습니까? 복음으로 골라내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꺼번에 처리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1:3-12절입니다. “봉독”
스가랴 6:1-8 하늘의 네 바람 2007. 1. 24
1 내가 또 눈을 들어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데 그 산은 놋산이더라 2 첫째 병거는 홍마들이, 둘째 병거는 흑마들이, 3 세째 병거는 백마들이, 네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 4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6 흑마는 북편 땅으로 나가매 백마가 그 뒤를 따르고 어룽진 말은 남편 땅으로 나가고 7 건장한 말은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하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라 하매 곧 땅에 두루 다니더라 8 그가 외쳐 내게 일러 가로되 북방으로 나간 자들이 북방에서 내 마음을 시원케 하였느니라 하더라
시골에서 5년 반 동안 복음을 전하였는데 일곱 명의 교인 중에 한명은 기권하고 여섯 명이 공동의회에서 목사에게 부표를 던져서 사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듣기 위하여 광주나 목포에서 온 사람들 일곱 명 정도가 모여 오는 금요일 저녁에 광주 화평교회 설립이 있다는 십자가마을의 광고를 보았습니다. 저도 가보려고 하는데 마침 그날 전국적으로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도 보았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기조차 맞추어 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날 눈이 안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지만 지금 울릉도에서는 눈이 오도록 눈이 빠지게 기다린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울릉도에는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라서 눈 축제를 마련하여 놓았기에 그것으로 인하여 소득을 올려야 하는데 눈이 오지 않으니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현상들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의 삶이 좀더 안정적이고 편안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서 인공위성을 쏘아 올려서 기상을 예측합니다. 지진이나 해일을 대비하고자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라는 말을 우리도 실감하게 될 정도로 겨울이 따뜻합니다. 빙하가 녹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환경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하늘의 바람에 대하여는 무감각합니다. 관심조차 없습니다. 혹 하늘의 표적을 원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들을 위한 표적을 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시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고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날이 궂겠다고 하는 천기는 분별하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더냐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시면서 그들에게서 떠나 가 버리십니다.
하늘의 표적을 구하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여전히 자기들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늘로서 내려온 참된 표적인 예수님, 더구나 요나의 표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그 표적을 어느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아할 표적이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늘의 표적이나 땅의 표적이나 간에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나를 위한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사람들이 소망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움직여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시면 네 병거와 네 말이 나오는데 이것을 하늘의 네 바람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바람이 어디서 나오며 무엇을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상이 스가랴서 여덟 가지 이상의 마지막 이상입니다. 제목이라도 다시 살펴봅니다. 1)말들과 말 탄 자에 대한 이상, 2)뿔과 공장에 대한 이상, 3)측량줄을 잡은 자에 대한 이상, 4)여호수아에 대한 이상, 5)순금등대에 대한 이상, 6)날아가는 두루마리에 대한 이상, 7)에바 속의 여인에 대한 이상, 8)네 병거에 대한 이상입니다.
여기서보면 첫 번째와 여덟 번째에 말이 나타납니다. 고대세계에서 말이란 가장 빠른 기동력을 나타냅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는 아주 강력한 군사력이 됩니다. 이런 이미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1장10-12절을 보면, 말을 탄자가 온 땅에 두루 다니라는 명을 받습니다. 그 명대로 다녀와서 보고하기를 온 땅이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70년이 되었는데도 평안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지 않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까지냐고 묻자 위로하시면서 하나님의 예루살렘을 위하여 질투하시며 긍휼을 베푸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말씀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각 이상들을 통하여 스가랴 선지자게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이상으로 나타난 네 병거가 무엇을 하는지 보려고 합니다. 역시 온 땅을 두루 다니는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하나님의 영은 온 세상을 두루 다 살피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만 전부인줄 알고 보이는 것만 아옹다옹 거리면서 살고 있지만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지 않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임을 히브리서 11: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보이지 아니하지만 활동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일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가 되었고 지금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빈틈없이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6:1절입니다. 네 병거가 보이는데 두 산 사이에서 나옵니다. 그 산이 놋으로 되어 있는 산입니다. 놋이란 성경에서 주로 심판의 이미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놋 산이라는 것은 심판의 산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심판의 산을 말하는 말씀을 봅니다.
요엘서3:14-16절입니다. “14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15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 16 나 여호와가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발하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되리로다 그러나 나 여호와는 내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리로다” 2절과 12절을 보시면 여호사밧 골짜기라고 합니다. 여호사밧이라는 뜻이 여호와는 심판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골짜기를 시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심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피난처와 산성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14:4절에서는 감람산에서 심판을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본문은 나중에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만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는 산의 이름이 시온이며 감람산입니다. 특정한 산의 이름보다 그 산이 놋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할 뿐만 아니라 그 심판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을 네 병거가 하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심판과 구원은 말의 색깔로도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말들이 나타는데 그 색깔들이 나타내는 것은 전쟁과 질병과 죽음을 상징하지만 흰색은 승리를 상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6절에 보시면 흑마가 북편으로 나가고 이어서 백마가 나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이상을 보면서 스라갸 선지자가 이 이상이 무엇인지를 물으니 천사가 대답하기를 하늘의 네 바람이라고 합니다.
5절을 봅니다. 하늘의 네 바람인데 이것은 단지 자연의 바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바람, 숨, 생명력, 영, 정서, 의지력 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연의 바람을 말한다고 해도 공기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떠도는 바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신(바람)이 물위를 불어가는 것입니다. 이 바람이 홍수를 말리고, 이 바람이 홍해바다를 가르고, 이 바람이 메추라기를 몰아오는 것입니다. 반면에 여호와의 도구가 되어 퍼붓는 소나기와 우박을 몰고 옵니다. 이 바람이 예언자들을 예언하게도 합니다.
그러므로 네 바람이란 즉 여호와께서 사용하시는 강력한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주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보여주시고 그것을 계시로 남겨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사람들이 이런 이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가랴서를 보면서 무엇을 알 수가 있습니까? 지금도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심판할 자를 심판하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의 바람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바람이 하는 일을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유대인의 선생인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질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니고데모를 행하여 거듭나야 한다고 하니 못 알아듣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봅니다.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니고데모가 육으로 났다는 말씀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나는 것, 즉 거듭나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죄사 함 거듭남의 비밀을 가르쳐 준다는 단체도 있는데 그러나 사람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임의로 분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물론 자연의 바람이 사람의 뜻대로 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임의대로 부는 것을 말씀하시지만 거듭나는 것은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전적이 죄인이었음을 인정하며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원인을 나에게서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난 자는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선택하거나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하늘의 네 바람을 보내셔서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루어내시는 것입니까? 요한복음5:24절을 보시면,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들이 말한 그 심판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심판의 권세가 아들에게 위임이 되어 있다는 것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모든 사람이 그 앞에서 판결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전 우주적인 심판이 집행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부분적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정죄함만이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 7:1-4절에 보시면 네 천사가 때 네 모퉁이에서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땅이나 바다나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합니다. 여기서 바람은 심판을 말합니다. 잠시 심판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기다리게 합니다.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시고 다 찾아내셔서 구원하시기 까지 네 바람을 붙잡고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구원의 때입니다. 은혜 받을 만한 때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네 바람을 보내시고 또는 바람을 붙잡기도 하시면서 심판할 것을 심판하시고 구원할 것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기준은 일찍 죽임당한 어린양에게 있습니다. 그 인봉한 책을 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런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얼마나 큰 은혜인지 좀더 많이 좀더 깊이 알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보다 더 귀한 분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스가랴 6:9-15 순이 돋아나리라 2007. 1. 31
9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0 사로잡힌 자 중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었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취하되 11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12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14 그 면류관은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 하시니라 15 먼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할진대 이같이 되리라
2000년에 강원도 지역에 큰 산불이 났습니다. 산불이 난 것을 잊어버리고 살다가 그 다음해 여름인가 여름휴가를 그 지역으로 가다가 보니 산불이 얼마나 크게 났는지 실감이 났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도 산불이 나서 낙산사가 불에 타는 것을 여러분도 뉴스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이 난 뒤에 그 시커멓게 변한 산에 어느 기자가 찾아가서 촬영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시커먼 잿더미 속에서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새순들이 몇 년을 지나면 다시 숲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다가 순이라는 말씀에서 그 불탄 자리에서 나오는 연약한 새 순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2절에 보면 순이라고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순’이라고 이름 하는 사람이 일어나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오늘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 까지 스가랴 선지자가 본 여덟 가지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내용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와중에서 간간히 하나님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3:8절에서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이란 미약하고 연약한 모습입니다. 이 연약한 ‘순’이 도대체 무엇을 이루어 낼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6:9-10절을 봅니다. 스가랴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바벨론에 사로잡혔던 자들 중에서 몇 사람이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서 금과 은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성전 재건의 소식을 듣고 예물을 가지고 온 사람들로 봅니다. 이러한 일은 이미 여호와 앞에 모셔선 자들이 북방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신 결과입니다. 심판할 것은 심판하시지만 또 주의 구원을 위하여 이루어내시는 일도 이루시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그들에게서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머리에 면류관이 아닌 제사장의 관을 씁니다. 그런데 왕이 쓸 면류관을 씌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가랴서에서 스룹바벨이 총독으로 왕의 역할을 하는 사람인데 이 본문부터 스룹바벨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대제사장에게 왕이 쓰는 면류관을 씌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이며 동시에 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세상의 다른 나라처럼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제사장이 다스리는 나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자기들도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그들의 왕이 하늘에서 그들을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이지 않는 왕보다 눈에 보이는 인간 왕을 원한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사무엘 서에서 잘 나타납니다.
사무엘 상 8:4-9절입니다. “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9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사무엘이 제사장이며 사사의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왕을 요구할 때 하나님의 대답은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라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씀을 합니다. 이때부터 왕이 세워집니다. 사울은 키가 크고 힘이 센 사람입니다. 백성들이 좋아하는 왕의 모습이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버리시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나옵니다. 사무엘이 오기 전에 자신이 제사를 드린 것(삼상13장)과 아말렉을 진멸하는 것을 제사 드리기 위하여 남겼다는 것입니다(삼상 15장).
역대하 26:16-21절에 보시면 웃시야 왕이 강성하여 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 범죄합니다. 그 범죄란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고 한 것입니다. 제사장 아사랴가 왕의 할바가 아니라고 막았지만 웃시야가 분향을 하려고 향로를 잡았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노를 발하셔서 왕의 이마에 문둥병이 발하게 하셨습니다. 죽을 때까지 별궁에 거하면서 그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국민을 치리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이 제사를 드렸던 사울을 폐하시고 분향하고자 한 웃시야는 문둥병이 들었는데 다윗은 제사장들만 먹는 진설병을 먹기도 하도(삼상21장) 언약궤를 모셔올 때에 첫 번째는 수레에 싣고 오다가 베레스 웃사 사건이 일어납니다. 다시 모셔올 때에 레위지파 제사장들이 베옷을 입고 메고 오는데 다윗도 베 에봇을 입고 함께 따릅니다(대상 15:27) 그러함에도 다윗에게는 용납이 됩니다. 좀 복잡한 이야기가 됩니다만 왜 이렇게 왕과 제사장의 역할을 구분하기도 하고 통합하기도 하는가 하면 오늘 말씀에서 제사장이 면류관을 쓰는 것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대 제사장이 쓰는 면류관은 복수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권과 제사장의 역할을 동시에 보이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제사장이 면류관을 쓰지 않지만 여호수아에게서는 제사장과 왕이 통합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멜기세덱이 살렘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제사장임과 마찬가지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며 왕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자가 나타날 것인데 그 사람이 바로 ‘순’이라고 이름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12절을 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은과 금으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고서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 제사장 여호수아는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장차 나타날 ‘순’이라는 자의 모델이며 예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 제사장이며 왕의 역할을 감당할 순이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자기 곳에서 돋아난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 곳이라는 말은 낮은 부분 아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지극히 비천한 낮은 곳에서 돋아나는 ‘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메시아 그러면 하늘에서 영광 중에 나타날 메시아를 기대합니다. 유대인들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 같은 경우는 메시아의 예언으로 보지 않고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53:2절에 어떤 말씀이 있습니까?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2)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순으로 나오는데 마른 땅에서 나온 순입니다. 그래서 영 볼품이 없어서 사람들이 싫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연약한 순이 버림을 받음으로 오히려 자기 백성의 죄악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스가랴 3:8절에서는 순이라는 예표의 사람 여호수아 앞에 한 돌을 세우는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사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으로 오신 분이 연약한 모습으로 오시지만 이 분이 자기 백성의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징벌을 받고 채찍에 맞고 대신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종의 결국은 이사야 52:13절에서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예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 순이 오셔서 하실 일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건축하는 전이 아닌 영원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개서와 스가랴서의 성전 재건이란 장차 ‘순’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지을 여호와의 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장차 나타날 여호와의 전은 사람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기에 연약하고 볼품없는 마른 땅에서 나온 순과 같은 사람에 의하여 지어질 것입니다.
13절을 봅니다. 그 전을 건축할 뿐만 아니라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입니다.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다고 합니다.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리는 것은 왕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왕권에 무엇도 더하여지는 것입니까? 제사장으로서 앉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과 제사장이 함께 자리하는 것이 됩니다. 즉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왕이며 영원한 대 제사장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로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영광을 얻으시고 하늘의 보좌에 등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건물로 된 성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몸이 성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보좌에 등극하신 예수님은 왕과 대 제사장으로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기고 하시지만 대 제사장으로 속죄도 이루신 것입니다. 논리적인 순서로 말하자면 제사장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고 그 속죄 받은 자기 백성을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사이에 화평의 의논이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같은 왕에게서 화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14-15절입니다. 이러한 예언을 확증하기 하기 위하여 그 면류관을 여호와의 전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 예언이 성취가 되면 먼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먼데 사람들이란 이방사람들까지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와서 건축한다는 것은 그들이 성전에 참여되는 것이지 그들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을 건축하는 분은 ‘순’이라고 하는 분의 홀로의 일이면 그 성전의 건축에 먼데 사람들이 그 안에서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만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말씀들이 다 성취가 되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성전이 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이 되셔서 그에게 붙어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3절을 봅니다. “이제는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 먼데 있는 자들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게 되리라는 말씀의 성취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우리가 다 이방인이며 언약 밖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로 성전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4절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인 것입니다. 스가랴서에서 왕과 제사장 사이에 화평이 있으리라는 말씀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다 한 새사람이 되어 화평이 있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에베소서 2:16-22절을 봅니다. 십자가로 한 몸을 이루시고, 평안을 전하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 곧 ‘순’이라고 이름 하는 분에 의하여 성전이 건축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의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이제 마무리 단계라고 봅니다. ‘순’으로 오셔서 여호와의 전을 자기 몸으로 건축하신 주님께서 이 천국 복음이 땅 끝까지 이르면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여호와의 전인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였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이며 은혜입니까? 그러므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너무나 자명한 것입니다.
이장우 목사(늘푸른교회)/십자가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