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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거울님의 플래닛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거울
영화 제목 : Das Experiment
제작 : 독일 2001년
원작 소설 : Black Box
감독 : 올리버 히르비겔
출연 : 모리츠 브렙트로
"이제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드디어 나는 오랜 시간의 망설임을 꺽기로 결심했다. 그 망설임의 근거는 인간의 본성이 결코 선한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했기 때문인데, 단순히 영화는 가상의 사건을 소재로 전개되지 않고 실제로 스탠포드 대학에서 행한 [환경 조작에 따른 심리 변화의 실험]에 근거하고 있기에 더욱 섬뜩한 느낌이다.
성악설 vs 성선설 어느 쪽을 손들어 줄 것인가?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배운 '성악설'과 '성선설' 나는 인간이란 선하게 태어나는 존재이지도 그렇다고 악하게 태어나는 존재이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선하게만 바라볼 수도, 악하게만 바라볼 수도 없는 것이 복잡미료한 인간 유전자의 조건이고, 인간은 사회심리학적 견지에서 보면 환경에 따라 정적으로도 부적으로도 적응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인간이 본래부터 선하게 혹은 악하게 태어나는가라는 고전적인 논쟁은 역시 시대에 뒤떨어진 이분법이라 업신여겨왔다.
삼년전에 독일에서 살고 있는 여동생이 잠시 귀국을 했다. 내가 독일영화를 추천해 달라고 하자, 단 일 초의 주저함도 없이 거명한 것이 바로 이 "익스페이먼트(Das Experiment)"이다. 그녀의 추천 사유인즉,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을 연상시켰고,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하여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노골적인 실랄함이 담겨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는 것이였다. 그녀는 내가 자못 심각한 소재에 대해 끈덕지게 매달린다는 것도 잘 아는지라, 당연히 내가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담론에 흥미를 갖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충고를 덧붙였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비열함을 느끼거나 분노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각오해." 라고....
'도대체 어떤 영화이기에 내 강심장에 대고 서슴없이 충고까지 곁들였을까?' 그렇게 그녀는 나의 호기심에 불을 당겼다. 독일 영화를 생각해보니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 '도리스 되리 소설을 바탕으로 한 '파니 핑크' 빔 뱀더스의 '패널트 킥을 맞은 골키퍼의 불안' 등이 떠올랐다. 대체로 건조하지만 담담하게 관객에게 사유의 몫을 던지고 홀현히 사라지는 회색이 짙은 그네들의 영화는 보고 있을 떄 보다 확실히 보고 나서 더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되는 감이 없쟎아 있다.
자, 성악설, 혹은 성성설의 이분법적 분류가 이제 더 의미없다고 생각했던 내 과거의 오류가 정정되어질 순간이 드디어 다가온 것이다.
모의 감옥, 아니, 그것은 실제 상황이였다.
영화를 보다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건 실제 상황이야. 실험이 아니라구, 아직도 모의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크나큰 오류야." 적어도 서른 후반으로 보이는 현직 장교 출신의 죄수역의 감방 동료가 상황의 심각성을 크게 인식하고 있지 않은 젊은 주인공 타렉을 향해 충고한다.
실제이다. 모의가 아니다. '실험자들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란 있는가, 인간은 극한의 환경에서 양심에 따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인가' 의 답을 얻기 위해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는 젊은 남자들을 모집했다.
직업도 천차만별이고 학식도 다양한, 즉 사회경제적 다양성이 확보된 20명의 피실험자들은 약속된 날 대학 실험실에 집결한다. 그 중에는 저널리스트이자 부업으로(보다 정확하게는 생계형이라기 보다는 인간 탐구의 한 방편으로) 택시 기사를 하고 있는 20대 후반의 타렉도 포함되어 있다. 이야기는 타렉을 프로타고니스트로 전개해나간다.
모두들 착한 사람으로 보인다. 화면은 다큐멘타리 방식을 차용해 그들의 환경과 인간됨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스스로 표현하고 있는 '자기'란 현실 세계에서 그럭저럭 적응하는 순응주의자들이다. 그리고 실험자들은 8명을 간수로, 나머지 12명을 죄수 집단으로 구분한다.
어떤 기준에 의해 구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각 그룹의 개별자들을 살펴보았을 때, 그 그들을 묶어주는 공통점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간수들이라고 특히 더 공격성이 있다거나, 오히려 그 반대이라든가,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높지도 않은 모든 변수가 혼합되어있는 이질성의 확보된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간수집단과 죄수집단으로 임의로 분류된 그룹간의 대표적 특성은 각각의 이렇다할 대표 성향을 추출해 낼 수 없다. 그런데 이들이 유니폼을 입는 순간, 그들에게 기대된 역할에 따라 그룹을 대표할 수 있는 그룹내 구성원들간의 공통의 성향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변질된 인간성이라기 보다는 상황에 의해 자극된 내재된 인간성의 한 단편, 즉 윤리에 의해 업악되어 있던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표출되기 시작된 순간부터 모의 감옥에서의 모든 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에게 권력이 주어진다면....
1. 꼬박꼬박 간수님이라고 부른다.
2. 죄수들은 간수의 명에 절대 복종하고, 번호로 불리워진다.
3. 모든 음식은 남김 없이 다 먹을 것잉며 소등 시간을 지킨다.
4. 개별 행동은 철저히 통제되어진다.
간수는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할 수 없다.
5. 자의적으로 실험을 포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타의에 의해서는 불가하다.
6. 2주간 실험을 마칠 때, 개인당 4천 마르크가 지급된다.
피
실험자들에게는 위에서 언급한 규칙이 있다. 원칙대로라면 위 규칙을 위배하는 자는 실험에서 제외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제안된 규칙일 뿐, 실험자들이 원하는 것은 이런 규칙들을 두 피실험 집단이 어떻게 이용하고, 교묘히 피해갈 것인지에 더욱 많은 흥미를 느끼는 것이다.
만약, 당신에게 곤봉과 실탄을 장전한 권총과 호루라기가 주어진다면, 그리고 당신이 상대할 대상은 밑이 뚫린 가마니같은 옷을 입고, 이름으로 불리워지지 않는 부자유한 존재라면, 당신은 "때는 이 때이다."라고 생각하며 마음껏 당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활용하겠는가?
이 질문에 선뜻 "물론이다." 라고 답할 사람은 없다. 이 질문을 한 내 눈치를 살피고, 주변 사람들의 눈초리에 신경을 쓸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멋드러진 유니품이 입혀진 순간부터 상징적 권력이 내재화되고 결국 권력을 행사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억누를 수는 없게 된다.
실험 '교도소의 생활이 인간의 시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
이 즈음해서 1971년 스탠포드 대학의 Zimbardo 교수가 행한 실험을 언급하고자 한다. Zimbardo 교수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최악의 상황을 극복해낼 수 있는가"에 관심을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나치의 권력 앞에 독일인의 절반 정도가 복종했다고 한다. Zimbardo 교수는 어떻게 수 많은 사람들의 나치의 권력에 부응하여 1,200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 했다. 당시에는 어린 시절 엄격한 게르만식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은 훗날 지시에 따랄 누구에게 어떤 짓이든 가할 수 있다는 가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것이 당시 유행한 '권위주의적 성격'과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스키너의 심리 상자] 50쪽에서 인용, 로렌 슐레이터 지음) 그는 실험을 통해 극한의 상황 속에서 권력과 복종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에 호기심을 갖고 이를 실험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신문 광고를 통해 24명의 건장한 청년들을 모집했다. 성격, 직업, 병력, 수입 등등 모든 개인적 특성에 대한 엄중한 면담과 검사를 통해 추려진 24명을 간수와 죄수로 양분하는데는 또렷한 기준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는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쪽 집단에 속해야하는 이유가 없이 그야말로 임의적으로 분류한 것에 불과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험이 진행될수록 이 두 집단은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해간다.
실험을 목적으로 Zimbardo 교수는 교도소 환경과 유사한 세트를 만들기 위해 스탠포드 심리학과가 위치한 건물의 한 층을 개조했다. 빛을 차단하고, 3개의 공용 감옥과 매우 작은 독방을 반대쪽에 만들고 그 사이에 함께 사용하는 화장실을 설치했다. 이제 누구 보더라도 그 곳은 영락없이 감옥인 것이다. 그리고 Zimbardo 교수는 죄수 집단의 눈을 가린 채 당국의 협조로 그들을 감옥까지 이송했다.
죄수들에게는 밑이 뚫린 옷이 주어졌고, 그들은 발가벗은 채 DDT 등의 살충제로 소독되어졌다. 만약 여러분이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벌거벗긴 채 살충제 청소를 당한다고 가정해보자.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갖게 될 것인가? 분명 우리는 자신이 마치 해충이라도 된 듯 심한 굴욕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갑자기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미천하게 전락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한편 간수역을 맡게된 집단에게는 유니폼과 함께 선글라스가 주어졌다. 과연 어두운 감옥에서 선글라스가 왜 필요하기에? 잠시 생각해보자. 푸코가 말한 '원형 감시탑'은 실제로 간수가 감시탑에 있든 없든 그 존재 여부에 상관없이 죄수들로 하여금 24시간 내내 감시를 받는다는 두려움을 갖게 한다. 선글라스란 바로 간수들의 자신감 없는 시선을 감춰줄 수 있는 도구인 것이다. 또한 그들의 눈을 들여다볼 수 없는 죄수들로서는 자신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늘상 감시당하고 있다고 불안해 할 수 있다. 즉, 선글라스는 원형 감시탑의 기능을 하는 장치로 사용되는 셈인 것이다.
실험이 시작된 지 만 하루만에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죄수들의 반란이 발생했다. 죄수들은 죄수복에 달려 있던 숫자를 잡아 뜯는가 하면 감방 문을 침대로 바리케이드를 친 채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고 한다. 또한 금지된 내규를 깨고 교도관들에게 욕설과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들의 행동은 임의적으로 얻어진 신분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고 그들로서도 납득할 수 없는 반대 집단에 속하게 된 피실험자들에 대한 선망이 섞인 야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간수들의 태도도 상식을 뛰어넘기는 마찬가지였다. 교도관들은 놀랄만한 정확성과 민첩성을 발휘하여 소화기를 가지고 와서 죄수들을 향해 뿌리기 시작했고, 높은 압력에 뒤로 밀려나간 죄수들은 힘이 빠져 뒤로 넘어졌다고 한다. 그리고는 죄수들의 옷을 벗긴채 간방 안의 모든 집기를 복도로 빼내 다시 알몸 사앹에서 죄수를 감금했다고 한다.
실험자들이 기대했던 권력에 대한 복종 거부가 시작된 것이고, 실험자들의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간수들은 자신의 권력에 해가 되는 요소들을 일사불란하게 제거해나갔다. 간수들은 한 사람씩 불러서 푸쉬업을 시키고, 감시를 더욱 철저히 조직화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간수들은 일일 3조로 교대근무를 서면서 한시도 죄수들을 편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이다.
또 다시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싶다. "과연 여러분은 어느 때 극도로 긴장하게 되는가? 놀이 공원에 있는 공포의 집 등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 때를 떠올려보자. 공포의 집에는 불쏙불쑥 사람을 놀래키는 장치들이 숨어있다. 언제 갑자기 괴기스런 장치물들이 튕겨져 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 어느 지점에서 어떤 장치가 등장하게 되는지를 알고 있는 시설 안내원들이 겁 없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그들이 그 모든 상황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눈치 빠른 분들은 무슨 이야기를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과연 사람의 긴장도를 높이는 것은 불가능한 예측에 있는 것이다. 어디서 배웠는지 간수들은 바로 이 고도의 긴장 전략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비교적 안락한 시설인 독방에 시위가담도가 낮은 죄수를 집어 넣었다. 다른 죄수들은 특혜를 받은 죄수를 비난하게 된다. 그런데 다음 순번은 가담도가 높은 죄수가 되었다. 교란 작전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누가나 좌불안석이 된다. 심리적 공포심이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간수들의 계략에 이제 누구도 어떤 행동을 취해야할지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사고 정지의 상태 즉 아노미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아노미 상태에 빠진 죄수들사이에서 불신이 팽배해지는 반면, 간수들은 몰라볼 정도의 결속력을 갖고 권력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권력의 표현 강도는 더욱 거세져서 화장실가는 것 조차 통제한다. 어떤 죄수들은 자신의 간방 안에서 같은 방을 쓰는 동료들 앞에서 대변까지 보게 된 것이다. 드디어 36시간만에 죄수역 참가자 중에서 상황적 정신 분열을 일으키고 정서 장애 증세를 표출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이들을 어떻게 대우해야하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그들을 모의 감옥에서 풀어주었다.
그런데,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연구에서 중간에 빠져나간 사람들이 자신들이 탈옥을 했다고 소문을 내고 다닌 것이다. 그에 자극을 받은 간수들은 분노하게 되고 결국 죄수들의 머리에 자루를 씌우기도 하고, 어떻게든 철저히 그들을 감시해나가려고 노력을 시작한 것이다. Zimbardo의 도덕적 양심을 비판하는 동료 심리학자들이 그에게 실험을 중단하기를 요구하기 시작햇다. 실험을 위한 또 다른 인간의 희생이라며, 그의 잔임함을 꼬집어서 힐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연구자들도 더 이상 객관적 관찰자의 위치를 견지할 수 없었고, 자신들의 실험의 목표를 흔들리게 하는 여러 현상들에 대해 주간적 감정이 개입되기 시작했다.
결국 실험 5일째 만에 일부 간수들이 성적으로 죄수를 학대하면서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그들의 부모들은 연구자 Zimbardo를 고소하겠다고 위협했고, 그렇게 해서 실험은 6일만에 종료되었던 것이다.
지금 어떤 기분이 드는가?
여러분은 이미 영화를 본 것과 다름없다. 스포일러 식이 되지 않기 위해서 영화의 직접적 스토리 언급은 피했건만, 영화는 실제 1971년 스탠포드의 가상 실험 감방에서 6일간 벌어진 사건과 거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블로거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신의 부인은 밥 조차 몇 일 동안 먹지 못했노라고 한다. 그렇다. 정말 불쾌하기 짝이 없는 영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2002년도에 한 번, 그리고 최근에 또 한 번을 보았다. 이 불쾌한 영화의 효과는 분명 구토증세를 유발하기에 족하고, 음식을 거부할 만큼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그동안의 선한 믿음을 앗아가버린다. 내가 정말 독한 사람이라서일까? 나는 결코 독한 사람이 못된다. 나는 피만 보면 하지가 후들거리기 시작하는 나약한 면도 있다. 그런 사람이 폭력으로 난무한 갇힌 공간의 실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자학 행위와 다름 없기도 하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가? 스스로 잔인한 성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 이외에도 많다. 우리 인간은 각자에게 주어진 최악의 상황 속에서 스스로 어떻게 변화될 지에 대해서는 상상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체로 불쾌의 감정을 유발할 수 있는 상황 속에 자신을 밀어넣어 고통을 즐기는 행위는 사회가 변태적 행위 내지 비정상적 행위로 규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19971년의 모의 실험을 통해서나, 1,2 차 세계대전의 나치의 만행을 통해서, 혹은 일제의 우리 민족 학살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듯이, 상황만 주어진다면 인간은 누구나 악랄하게 변할 수 있다. 그것을 애써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사회화의 간섭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성악설' vs. '성선설'의 이분화된 구조에서 어느 쪽을 손들어줄 것인가를 논해야겠다. 많은 사람을 접했다고 스스로 믿고 계시는 아버지께서는 '성악설' 쪽에 손을 들어주셨다. 인간 속의 악마성을 천사로 길들이는 것이 바로 윤리요 교육이다는 것이 아버지의 주장이다. 길들여 지지 않은 야생의 조건 속에서, 혹은 적자생존의 현장에서 인간은 자신 속에 잠들어 있던 악마를 깨우게 된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나가고 생존을 지켜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에서 소년들을 보자. 과연 왜 그 소년들 중 일부가 그토록 잔인해졌던 것일까? 그들도 학교에서, 가정에서 '착하게 살아라'를 무수히 듣고 지냈을터인데도.....
사람은 상황이 조건화될 때 누구나 선택을 하게 된다. 물론 선택이라고 명명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란 점도 인정한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이란 늘 도덕적 판단을 요구하고 내면의 갈등을 헤쳐나가기를 강제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종교, 도덕, 윤리, 가치관이 그런 상황에서는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갖고 있는 권력에 대한 지향은 특히 상대가 한없이 낮은 존재일 때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것은 그만큼 쉬운 일이다.
잘 생각해보자. 어찌 당신이 '난 예외이다.'라는 혼잣말로 내 말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지하철에서 굽신대면서 구걸을 하는 사람들에게, 거리에 굶주린 여인들에게 여러분은 상사에게 행동할 때처럼 깍듯한가? 누구나 무자비해질 수 있다. 가차없는 폭력성....그것을 타고나는 것은 인간이다.
덧
여담이지만, 개인의 폭력성이 집단화되어 가장 잘 드러나는 가까운 예로는 시위대와 시위대를 진압하는 전경의 모습을 들 수 있겠다. 최근 생존권 문제로 농민들이 다시 봉기했다. 비록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연민을 느낀다고는 하나, 전경들은 무리에서 이탈할 수 없는 것이다.... 이창동씨의 영화 [박하사탕]은 바로 그런 권력으로 인해 무수한 상황에서 강요된 자기 안의 폭력을 마주하게 된 한 인간이 시대의 터널을 지나 다시 한 개인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몸에서 썩은 비린내를 맡아야하는 존재로서, 양심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결국 누더기같은 자신을 버려버리게 된, 지난 시대의 불행한 한 인간에 대한 씻김궂같은 것이 아니였을까?
첫댓글 꿈을 꾸고 일어났습니다. 요즈음 늘 꿈을 꾸는데요, 문제는 이제 가끔 계시몽도 꾼다는 것이지요. 개운하지 못한 꿈인데, 오늘은 제게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네요. 사람들과 어우러져 놀 때는 모르는데, 돌아오고 나면 기운이 하나도 없습니다. 퍼질러져 시체처럼 잠에 빠져있다 깨어났습니다.
저도 성악설에 손을 들어주면서 살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믿을 바가 못되지요^^ 아이들을 유심히 관찰해 봐도 알 수 있지요. 착하다고 보기엔 너무나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입니다^^
성악설에 반드시 손을 들 수는 없지만, 저는 성선설쪽보다는 성악설 쪽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언젠가 '인간 속의 악마'란 책을 읽었는데, 갑자기 저자마져 생각이 안나네요....
^^
성선설에 손을 들어주는 사람도 있다는 걸 꼭 밝히고 싶네요. 제가 그래요. 하지만 사람의 내면이 모조리 선으로만 가득 차 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선과 악이라기 보다는 무형의 어떤 것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형태지워져 간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원래 인간은 악하다라는 전제 자체가 인간을 악하게 만들어갈 소지도 분명히 있는 거니까 말입니다. ^^
맞아요. 분명히 인간 안에는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선한 마음도 있습니다.
예. 인간안에는 두가지 요소(더 다양한 요소)가 공존하고 있지요. 하지만 제가 이 글이 전달하고자 하는 효과를 생각할 때는 두 요소만을 대립항으로 놓고 써야 읽는 사람들도 더 실랄하게 생각하며 받아들이며 '그렇지' 혹은 '그건 아니지'라고 공감 혹은 반론을 갖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지요. 저는 인간의 마음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요즈음같은 세상에 곰곰히 살펴보면 악한 마음이 더욱 도드라지는데, 그게 어린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마찬가지더란 말이죠. 타고나는 요소가 맞구나...싶을 정도로요.
그런가요. 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정말 아이들은 선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왜 그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요? 아이들은 늘 저를 격려하고 저를 꾸짖고 하던걸요. 그래서 늘 아이들에게 전 착한 마음을 배우게 되더라구요. 이번 연수에서도 사람들이 얼마나 착하던지 제 안의 못됨을 더 진하게 느끼고 돌아왔걸랑요. 왜 그렇죠. 그리고 전 사람들을 그렇게 제한된 환경 안에 집어넣고 실험하는 건 별로 믿을만 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지요. 예전에 사회심리학을 배울 때 보니까 사람들은 무지하게 동조성이 강하더라구요.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환경 또는 주변사람들에게 동조하려는 심리 때문에 악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도 같아요.
인간은 단순하지 않으니까요. 어른들은 더욱 그렇지요. 그리고 어른들 마음 속에서는 아이들보다도 더욱 욕망이 크게 자리잡고 있으니까요. 악 쪽으로 기울 확률이 더 높겠지요. 통계라는 것도 사실은 그다지 믿을 만하지 않잖아요. 그리고 실험이라는 것도 객관적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정말 객관적인가 하는 것도 의심스럽죠. 물질조차도 실험자의 의도를 따르려고 한다니 말입니다. 피험자가 실험자의 의도에 맞춰주려고 하는 무의식의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는 거죠.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착한 사람들입니까. 그러니까 성악설이니 성선설이니 하는 잣대로 미리 판단하지 말고 인간의 본성은 정말 어떤 것인지 탐구해나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evil(惡)은 live를 거꾸로 늘어놓은 말이라네요. 즉, 악은 삶을 거스르는 것, 생명력을 역류하는 것이다. 인간 생명의 속성은 지각, 운동, 인식, 성장, 자율, 의지라 할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을 제거하고 통제하며 왜곡시키는 것(힘)이다. 단순히 선은 좋고 착한 것, 악은 나쁘고 잔인한 것으로 도식화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동물세계의 약육강식을 선과 악으로 볼 수 없잖아요. 이런 말도 있어요. 태초에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했다.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를 이루었도다. (악에 대해 좀 구체적으로 다룬 책을 소개할게요.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스캇펙의 '거짓의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