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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정을병(鄭乙炳) 1934년 경남 남해 출생. 한국 신학 대학과 미국 하와이 대학 동서문화센터에서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수학했다. 국도신문 등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대한가족계획 홍보부장, 지도부장 등을 역임.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한국소설가협회 사무국장,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위원장 등을 지냈다. 1961년 「현대문학」에 <부도>가 최초 추천되고, 1963년 <반모랄>이 추천 완료되어 문단에 데뷔. 개새끼들(1966), 말세론(1968), 유의촌(有醫村, 1968), 아테나이의 碑銘(1968), 받아들인다는 문제(1970), 도피여행(1971), 피임사회(1973), 병든 지구(1974), 城(1976), 한탄강(1976), 환상을 만드는 여인(1977), 일과 미소(1977), 흔들리는 신전(1977), 검은 천사의 미소(1977), 내 영혼의 외로운 목소리(1977), 주인 좀 빌립시다(1978), 명장 정기룡 火ㆍ畵ㆍ花(1978), 분단기(1979), 솟아오르는 하얀새(1979), 인생을 팝니다(1979), 이브의 건넌방(1979), 종가에서 난 절름발이(1979), 고무신 거꾸로 신다(1979), 거짓말하는 당나귀(1979), 자살파티(1979), 옆으로 걷는 광대(1980), 인생을 살찌우는 강물(1980), 北我(1980), 오월놀이(1980), 인동덩굴(1980), 감언지의 기적(1980), 나비춤(1981) 등 창작집, 장편소설집, 수필집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한국 소설문학상, 한국창작문학상 등을 수상 |
그는 함께 불그레해오는 그니의 얼굴을 지긋이 건너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에서 무엇인가가 강하게 불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는 그니를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옷을 벗겼다.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을 송두리째 맘대로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가장 본능적이고, 가장 강렬하게 바라는 행복인 것이다. 기걸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가진 사람들을 간단없이 비판하고 비난한다. 그들은 도덕자여서가 아니라 가지지 못했다는 열등감 때문에 열심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비난을 받는 쪽에 있다는 것은 확실히 행복한 일이다. 상대가 얼굴이 잘 생기고, 천하면 천할수록 그런 행복감은 더 높아지기 마련이다.
그는 옷을 벗었다. 여자의 옷을 벗기고 난 다음에 그 몸을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만, 자기의 건강한 몸을 여자에게 보이는 것도 신나는 일이다. 그는 머리는 썩었지만, 육체만은 싱싱하고 잘 균형이 잡혀, 아폴로의 조각품 같았다. 여자가 느끼는 감동보다도 스스로 느끼는 즐거움이 더욱 컸다. 마치 나르시즘처럼.
그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쇼파에 비스듬히 드러누워 있었다. 아무도 들여다보는 사람도 없고 들어올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즐거웠다. 아무런 자책도, 후회도, 걱정도 없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받겠어.”
그는 자기 위에 누어있는 생선을 밀어내고 전화 있는 쪽으로 갔다. 연구실에서 여자가 전화를 받아서는 말이 아니다. 아직 조수를 두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오군인가?”
김창우 교수였다.
“선생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바쁜 모양이구만.”
“그저 그렇죠. 시간 나는 대로 좀 해보려고 합니다마는…직장 때문에…잘 안됩니다. 시간을 얻을 수가 있어야죠.”
“수고하네. 헌데 신문 보았나?”
“뭔데요? 뭘 말씀하시는 건데요?”
“이 사람이 태평이군. 장정보 선생님이 돌아가시잖았나. 심장마비로.”
“네?”
“올해 여든 다섯이니까 살만큼 사셨지만…. 그러니 자네가 빨리 초상집으로 가줘야겠네. 나도 곧 뒤따라 갈 테니까. 이것저것 할 일이 많겠지. 알겠는가?”
그 말을 듣고 나니 오재필은 맥이 빠졌다. 창숙이년을 이제사 달구어 놓았는데….
“바쁜 일이 있는가?”
몹시 관료적인 말투다. 언제나 그는 그렇다. 학자라기보다도 봉건군주시대의 고관처럼 뻣뻣하고 고압적이다.
“아, 아닙니다.”
“자네가 인사를 해둬야 할 사람들이 많이 온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네. 그리고 장정보 선생과 개인적으로 그렇게 가깝다는 것을 남들에게 보인다는 것도 출세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자네는 혹시 모르지는 않겠지?”
“모르다니요. 영광입니다. 제가 그런 수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러니 빨리 가보란 말이야. 빈소를 채려 놓았을 것이고, 벌써부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할거야. 인물이 인물이니 만큼 굉장할 거야. 아마 단군 개조 이후로는 가장 위대한 학자의 죽음이 아닌가. 명심하게. 학계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어.”
그렇게 말하는 김창우 교수의 말을 손실이라는 말 대신에 그 반대의 단어를 끼워 넣었으면 좋을 정도의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곧 가도록 하겠습니다.”
오재필은 간신히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수화기를 귀에서 떼어놓고 나니, 몸이 싸늘하게 식어드는 것 같았다.
그는 소파로 돌아왔다.
“뭐래요? 곧 나가셔야 돼요?”
“음.”
“난 싫어. 이렇게 해놓고, 난 싫어. 선생님 가지 마세요. 무슨 일인데요?”
여지는 몸을 딩딩 굴리고 있었다.
“누구에게서 온 전화예요?”
“장정보 선생님이라고 알어?”
“저, 역사책 쓴 사람 말이죠? 그이가 어쨌는데요?”
“그 노각다리가 죽었다. 팔십 다섯이래.”
“여태 살아 있었다는 게 기적 같군요. 아마 살아 있다고 해도 귀신이나 마찬가지였겠지요?”
“그야.”
“ 귀신이야 죽은 거나 살은 거나 마찬가진데 왜 선생님이 나가셔야 돼요?”
“미치겠어. 허지만 가봐야 돼.”
“아무 쓸모도 없는 영감쟁이 하나가 죽었는데 선생님이 왜 가요?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선생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아니에요? 그게 선생님의 철학이 아닌가?”
“나야 그렇지만 사람들이 못살게 구니…. 섭섭하지만 도리가 없다….”
그는 저쪽으로 가서 바지를 주워 입었다. 여자는 그게 몹시 못마땅한 것 같았다.
“일주일이나 기다렸는데…귀신 딱지 같은 영감쟁이 때문에….”
여자는 얼른 옷을 주워 입을 염도 하지 못하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리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영감쟁이지만, 그는 단군할아버지 이래로 가장 위대한 학자라는 거야. 아직 그만한 학자가 한 사람도 나지 않았다는 거지.”
“정말 그래요?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누군지 모르지만….”
“흥, 나야 뭘 알아야지. 영감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그런 줄로만 알고 있지. 김창우 교수가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그런 줄로만 알고 있을 뿐이야.”
“김창우 교수라는 분은…죽은 위인하고 어떤 관곈데요? 친척이라도 되어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지만…죽은 영감의 수제자쯤은 되는 모양이야. 해방 이후에 그 영감에게서 배웠고, 그 영감 밑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그 영감이 교수도 시켜 준 모양이야.”
“그렇다면야 강도라도 그 은혜는 잊을 수가 없겠군요. 허지만 선생님은?”
“나는 그저 먼발치에서 영감을 가끔 보았을 뿐이야. 우리야 그분에게로 갈 수 있는 기회도, 그럴 일도 생기지 않았으니까. 고작해야 김창우 교수 정도지.”
“그러니까 선생님은 오늘 밤에 그 집으로 가실 필요가 없는 거예요.”
“없지만 김창우 교수가 가라고 하니까.”
오재필은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옷가지를 하나씩 주워 입고 있었다.
“김창우 그분도 남의 사정은 전연 모르는 사람인가보죠? 이런 무드에 초상집엘 가라고 하니…. 담당 교수라면 빨랑빨랑 학위나 줄 일이지, 그런 심부름까지 시키고 있어요?”
창숙은 아직도 불만이 다 가시지 않았다.
“학위 달라고 그 양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백 명도 넘는다구. 그러니 얼른 될 것 같애? 질질 끌면서 할 것 다하고 난 다음이라야…지칠 대로 지치게 되고….”
“그까짓 것 안 받으면 안 돼요?”
“답답한 쪽은 이쪽인데? 그거라도 해야 시간이라도 한 시간 얻어걸릴지 말지….”
“우리만 후진 게 아니라 그들도 후지군요. 학문을 해서 학위를 주는 것이 아니라…실컷 부려먹은 댓가로 학위를 준다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그런 인상도…. 대개 그들의 선조들은 이완용과 깊은 관계가 있어. 이완용과 함께 재상을 지내다가 한일합방이 되어 왜놈들에게 붙어먹고 살던 사람들…그런 사람들의 자손들이 많아. 장정보라고…지금 죽었다는 사람도 그렇고 김창우 교수의 할아버지도 그렇다든가…해방이 되어 모조리 골로 가야 할 사람들인데 용케도 살아났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겠느냐가 문제겠는데… 정말 알고도 모를 일이야.”
“그야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그렇죠.”
“물론. 그렇지만…이건 다른 학문이 아니라…철학이란 말이야, 민족철학이라는 것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어. 정신사를 전공하면서 어떻게 민족주의를 전연 거부할 수가 있었을까? 불교학을 하면서 전연 불교신자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법이 있나… 그와 같은 걸 텐데…. 말하자면 민족을 팔아먹는 일에 협력한 사람들의 자손들이 어떻게 역사학을 전공할 수 있겠느냐 이거야.”
“그것과 그것은 다른가보죠.”
“학문과 도덕은 다르다. 학문과 이데올르기는 달라도 성립될 수 있다…친일파는 친일파고, 민족사는 민족사다. 비록 내가 친일파는 했지만, 역사연구를 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역사공부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학문적으로 나를 덮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렇게 된 거지.”
“같이 연구한 학자가 반드시 그분뿐이지는 않았을 텐데요? 안 그래요?”
“물론 있었겠지. 허지만 장정보 선생이 한참 공부하고 연구하던 때는 왜정시대라… 조금 방향이 다른 학자들은 모조리 숙청되었어. 조금 민족주의 냄새가 나거나, 일본 역사에 대해서 비판적이거나 한 사람들은 모조리 잡아다가 불온분자라는 누명을 씌워 죽여 버렸어. 그러니까 당시는 역사를 해도 왜놈들의 군국주의 사관에 맞는 사람들이 아니면 도저히 연구도 맘대로 할 수 없었거니와, 학자로서 대접을 받지도 못했어.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분 나쁘지만 왜놈들이 하자는 대로 우선은 하지 않을 수 없었지. 장정보 선생과 그의 친구들 몇 사람이 학자로서 살아남은 것은 바로 그런 뜻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자기네들도 몸으로 친일파를 했고, 왜놈들이 내세운 사관에다 맞추어 역사를 재창조하는 일에 열을 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어. 그게 자신을 합리화하는 데 필요한 일이니까. 그들은 그렇게 성장한 거야. 그러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은 모조리 죽고, 그 중에서도 장정보 선생만 홀로 만년송처럼 청청히 살아 있었어. 학계를 완전히 혼자 장악을 한 거지. 연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학설을 세우는 것, 제자들을 양성하는 것, 학위를 주는 것, 대학에 자리를 주는 것, 학회를 운영하는 것까지 모조리 혼자서 하게 되었어. 누구 한 사람 반론을 제기할 만한 실력꾼도 없었고, 그런 방계 인사가 있을 수도 없었어. 오직 학자라고는 그 사람 하나뿐이었으니까. 반론을 제기하기만 하면 대학을 졸업하지도 못하고, 학위는커녕 시간강사 자리 하나도 따낼 수가 없는데 어떻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단 말인가? 제자들은 그 영감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 형세를 했지. 영감은 해방 삼십 오 년 동안 피라밋의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었어. 김창우 교수도 그런 제자 중의 하나야. 아주 충실하지. 그 양감 앞에서 기침 한 번, 술 한 잔, 담배 한 가치를 피워 보지 못하고 살아왔어. 그런데다가…재미있는 것은…해방이 되었는데도, 이 나라를 정신적으로 이끌어 온 사람들이 장정보 선생의 친구들이었단 말이야. 다 같이 그들의 조상들이 친일을 해서, 그 덕에 편안히 살 수 있었고, 또 편안히 공부할 수 있어서 출세한 사람들이야. 그러니 친일이니 뭐니 하는 것을 따질 수가 없었어. 그저 뒤죽박죽을 일부러 만들어 놓은 거지. 말하자면 민족적인 도덕관념을 흐리게 해 놓은 거지. 정의도 뭐도 없다. 그저 똑똑하면 한자리 한다. 진리가 문제가 아니라 강한 놈이 제일이다. 얼렁뚱땅, 적당히 사는 거지, 무슨 잔소리야. 못나고 머리 나쁜 놈들이 민족 어쩌고 지랄이지… 그런 놈들은 벌서 만주 벌판에서 귀신이 되었어. 죽는다니, 무슨 소리야…어떻게 해서라도 살아서 잘 먹고 잘 살다가 가야지…단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인데…정의고, 민족주의고, 자존심이고 하는 것이 그 사람들로 인해서 엉망으로 돼 버린 거지. 그저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철학밖에 우리에게 물려진 민족적인 철학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어. 내가 지금 그대로 하고 있는 거야. 장정보 선생이 김창우 선생에게 가르쳤고, 김창우 선생은 내게, 그것을 나는 또 네게 가르치고 있어. 어떤 재주를 부리더라도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야. 도덕 내세우고 어쩌구 저쩌구 해봐야 당자만 손해 볼 뿐이니까 나는 그런 엉터리없는 것은 아예 내세우지를 않어. 너도 그렇지? 우리는 발가벗고 춤추고, 마시며 떠들고, 그것을 즐겨. 너는 일주일에 한 번씩 이 아파트로 찾아들지만, 나는 너 말고도 수삼 명의 아가씨가 있고, 그것은 필요에 따라 자꾸 바꿔져. 내가 원해서 그러는 것만도 아니고, 반대해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야. 그런 분위기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으니까 그런 사람들이 쉽게 만나게 되고, 쉽게 일을 치룰 수가 있어. 소위 말하는 장정보 분위기야. 장정보 찰학이라고 해도 좋겠지. 이만하면…나는 은사에게서 잘 배운 셈이지? 어때?”
그는 술잔을 저쪽으로 가져다 놓고, 아가씨를 껴안았다. 그야말로 이런 아가씨를 버려놓고, 초상집 따위의 따분한 곳으로는 정말 가기 싫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장정보는 죽었으니까 장정보로 하여금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장정보 철학을 열심히 따라가라…장정보 철학, 장정보 주의…누가 만들어 낸 말인지는 모르지만 멋진 말이란 말이야…. 그는 창숙이의 몸에다 키쓰를 하면서야 자신이 술에 상당히 뜨겁게 닳아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맘 잘 먹었어요. 이제사 선생님다운 데가 발산하기 시작했군요. 작은 장정보 선생님…안 그래요?”
“그래, 그렇다니까!”
그는 울분을 토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장례식은 가회동의 장정보 선생 자택에서 행해졌다. 그의 사회적, 국가적인 명성으로 말한다면 국장이나 사회장을 해도 될 것이고, 학회나, 대학의 이름을 가지고서도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어쩐 일인지 그의 자택에서 가족장으로 행해졌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기는 했다. 나이는 많았지만, 그의 노익장한 건강이 그렇게 쉽게 세상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아니, 아예 그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미리 준비된 계획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서로가 조금씩 사양을 했고, 또 반대로 서로가 자기네 이름으로 하겠다고 나서는 곳이 많아서, 얼른 종잡을 수가 없었다. 또 자기네가 맡아서 하겠다는 사람들도, 장정보 선생 정도의 사람이라면 자기네들에게 그런 영광이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하는 바람에 강력하게 주장을 펼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우물우물하는 사이에 시간은 흐르고, 태도는 확고히 정해지지 않았다. 신문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자꾸 상가로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에 마냥 오래 끌 수도 없었고, 우선 빈소라도 마련한다는 것이 그만 가족장으로 낙착이 된 것이다.
어찌 됐건 그의 장례식은 정말 성대한 것이었다. 흥망성쇄가 심한 정치가들의 쓸쓸한 장례식에 비하면 삼십 오 년 이상이나 학문의 권좌에 앉아 있던 사람의 장례식이라, 그야말로 호화찬란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음식을 많이 차렸다든가, 조화가 많았다든가 하는 것보다는, 상가집을 찾아드는 사람의 수가 정말 호화찬란했다. 과거나 현재의 학문적인 지도자라고 할만한 사람들은 거의 한 사람도 빼지 않고 다 모였고, 비단 학문이 아니라도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 언론계와 예술계, 그리고 종교계의 거물들까지, 이름만 말하면 다 알 수 있는 인물들이 모조리 자발적으로 꾸역꾸역 찾아들었다. 마치 자기 친족이 죽은 것 같은 슬픈 표정을 짓고서.
말년에는 거의 돌부처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도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 하고 교제를 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사람이 위대하게 되면 반드시 직접 대면을 하는 교제만이 교제인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학문으로, 글로, 사진으로, 그 영향력으로 교제를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같은 세대도 아닌 다음 세대, 그리고 그 다음 세대의 젊은 소장 학자들까지 다 교제의 범위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역시 사람은 위대해 놓고 볼 일이다.
빈소에는 장정보 선생이 한창 날릴 때의 육십 대 초반의 두꺼비 같은 사진을 커다랗게 확대해 놓은 것을 양쪽 모서리에다 검은 리본을 걸치고 비스듬히 기대어 놓았고, 그 앞에는 커다란 놋쇠향로를 서너 개 갖다 놓았다. 절간에나 가면 맡게 되는 기분 나쁜 향냄새가 온 마당 안을 진동하고 있었다.
상주 옷을 입은 사람들이 십여 명, 뒤로 둘러친 병풍 모서리에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인 채 굳은 표정으로 도열해 있었다. 모두가 유들유들 살이 잘 찐 귀족풍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누구 한 사람도 슬프게 울은 흔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선생의 위대한 공로로 분명히 그들은 귀족처럼 살았을 것이고, 그래서 매우 슬퍼해도 당연하건만 그렇지 않으니, 그들이 귀족이라기보다는 관습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보였다. 부모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부모를 생각하는 것이 희박하다는 일반적인 조건 때문에 그런지 아니면, 그들도 일부 사람들처럼 죽은 자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벌떼처럼 모여 들어서, 굉장히 넓은 마당이기는 하지만 입추의 여지도 없이 꼭 차 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담 밑의 정원석 위에 서 있었고, 매화의 늙은 가지 위에 올라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빈소 앞쪽에는 유들유들하게 생긴 속물이 왕왕대고 있는 마이크에다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선생님은 천 팔백 구십 칠 년 서울에서, 당시 대한제국의 탁지대신 장문경씨의 차남으로 태어나, 경성제대 문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시고, 학문에 뜻한 바 있어, 조선연구소에 들어가 일인 역사학자의 조수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생님은…”
김창우는 두툼한 종이뭉치를 뒤적이며 열심히 죽은 자의 약력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서류뭉치가 하도 두꺼워서, 기다랗게 심호흡을 하고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끝나려도 한참 동안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뒤에 선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담배를 끄집어내어 살금살금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고는 그 화려했던 고인의 약력을 다 듣기에는 너무 지칠 것이다.
오재필은 피곤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오일장이나 하는 초상집에서 계속 일을 해왔기 때문에 견딜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었다. 이제 장례식만 끝나면 그만 사라져 버릴 생각이었다. 김창우 선생이 지랄을 한다고 하더라도 죽은 영감이 다시 살아나서 아우성을 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그는 김창우 교수의 약력 소개를 하나도 들으려 하지 않고 혼자서 엉뚱한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빨랑빨랑 식이 끝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정보 선생이 탁지대신의 아들이었다는 점이나,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조선연구소에 들어갔다는 이야기 같은 것은, 그럴싸하긴 하지만 자기 귀로 듣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게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 바가 없었지만….
김창우의 장황한 약력 소개가 끝나고 나자, 이번에는 학회 회장이라는 영감이 나가서 조사를 외우고 있었다. 김창우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사람이어서 이미 대학에서는 정년퇴직을 하고 있었고, 가끔 명예교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강의를 하러 가는 때가 있을 정도였다. 그는 김창우 교수의 직속 상사였고, 죽은 사람의 직속 부하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장정보 사단의 직계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선생은 우리나라에 학문이라곤 없는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시고, 몸소 전국과 만주, 그리고 중국 등지를 돌아다니며 학술 조사를 단행하여, 이 나라의 민족학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역사로서는 삼국유사와 사기, 그리고 고려사, 이조실록 등이 있지만, 그 진부가 확실하지 않는 점이 많은데다가, 과장된 부분도 많았던 것을 선생님께서는 처음으로 대담한 과학적인 재정리를 하신 것입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다 알게 된 역사라는 것이 모조리 선생님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고, 역사를 전공하는 후학으로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해동학회(海東學會)도 그분이 직접 만들어 회장을 지내셨으며, 불초 소생이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오늘까지 그 뒷자리를 더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은 살아계실 적에, 대학의 학장, 한림원의 원장을 역임했으며, 잠시는 신문의 사장직도 가진 적이 있으시며, 한국에 있는 학술상이라는 권위 있는 것을 모조리 타셨고, 또 훈장이라는 훈장은 모조리 타 도리를 하시는 영광을 가지셨습니다. 그런 점만으로 볼 적에도 우리 후학이 얼마나 무능력하고, 게으르며, 재주가 없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학회장은 엄숙한 얼굴이 되어 조사를 읽고 있었으나, 어쩐지 코미디 같은 냄새가 풍겨져, 무거운 분위기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게 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노골적으로 킥킥거리지는 않았다. 그들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 사람의 능력이 얼마만큼 발휘될 수 있는가, 그것은 얼마만한 업적을 낼 수 있으며, 그 댓가를 얼마만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바로 선생님을 표본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선생님은, 우리나라가 생긴 이래로 가장 위대한 학자가 되었으며, 그분이 쌓고 만들어낸 학문적인 업적은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길러낸 후학들이 그 얼마며, 또 그분이 받은 포상이 그 얼마겠습니까? 아마 과거에도 일찍이 그런 예가 없었을 것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선생님을 덮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선생님은 하늘이 낸 행운아이기도 합니다. 대한제국의 탁지대신, - 어떤 분은 그를 가리켜 친일파라고 합니다마는, 당시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은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마는 - 그 당시는 그분이 친일파가 됨으로써 나라를 그런대로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 탁지대신이라는 지체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귀족으로서 경제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이 공부를 한 시기는 왜정시대라고는 하지만, 그 당시는 또 그런 덕분으로 해서 만주와 중국을 맘대로 드나들며 현지답사와 자료 수집을 할 수 있었으며, 오늘날과 같은 방대한 민족학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의 전공은 한국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인문, 철학, 사회, 교육, 민족, 종교, 예술, 문학, 음악 등 소위 학문이랄 수 있는 모든 분야, 또 그것을 종합한 민족철학이랄 수 있는 모든 분야를 섭렵하시고 재창조하셨습니다. 바로 해동학회라는 것이 한국학의 본산이 된 것은 그런 그분의 학문적인 종합성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아시다시피, 한국학이라는 것은 남한이나 한반도만으로, 혹은 만주나 중국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행하게 우리는 남북이 갈라져서, 북한이나 만주, 그리고 중국 대륙을 드나들 수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찾아내거나 옛날 것을 재확인하는 것도 남한에 있는 것 외에는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벌써 해방되기 전에 우리가 지금 하고자 하는 그런 것을 다 하신 겁니다. 하늘이 그분을 대학자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탄생시킨 것입니다. 만일 그분이 우리와 같이 해방 이후에 공부할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그분은 우리와 마찬가지의 미미한 학자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한국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말입니다. 그분은 비단 한국뿐이 아니고, 일본과 자유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하버드 대학에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발행하고 있는 연경이라는 동양학 연구지에는 선생의 글이 여러 번 실려서 그들을 감탄케 한 바도 있습니다. 그런 점을 볼 적에…선생님은 세계적인 대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감은 입담도 좋게 술술 지껄이고 있었다. 원고를 가지고 읽는 것이 아니라, 그저 즉흥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리가 없는 부분도 더러 있었지만, 써가지고 와서 읽는다고 해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워낙 위대한 대학자의 밑에는 그런 위대한 학자가 다시는 나타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몽땅 다 합쳐놓아도 그 반에도 따라갈 수 없는 어리벙벙한 사람들로 보였다. 아마 장정보 선생을 그렇게나 위대하게 만든 것도 사실은 본인의 능력보다는 그 제자들이 시원찮았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정말 위대한 인물임이 틀림이 없다.
학회장의 연설이 중언부언,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실없이 계속되더니 다음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듣는 사람들을 화끈하게 하는 그런 새로운 말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평소에 너무나도 많이 들어온 장정보 선생에 대한 일반적인 칭찬뿐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천편일률적으로 한 사람을 칭찬할 수 있으며, 또 그런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었을까…그는 분명히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었던 모양이다.
조사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전에 대법원장을 지냈던 사람, 국회의장을 했던 사람, 대학총장을 했던 사람, 한림원 원장을 했던 사람들, 그야말로 이 나라의 정신적이 최고지도자들이 수두룩했다. 모두가 장정보 선생의 친구이거나 아니면 직접 간접의 제자들이었다. 그러니 장정보 선생의 영향력이 이 사회에 얼마나 컸을 것인가.
해방이 되어 반민특위가 만들어지고, 친일파의 비판이 있을 적에 그도 당연히 문제가 되었다. 왜정말기에 그도 일본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으며, 한국의 젊은 학도들에게 학병에 나갈 것을 권유하기 위해서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만주로 돌아다니기까지 했다. 심지어는 황국신민임을 맹세하고 자랑하는 시까지 써서 당시의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그러니 당연히 문제가 될 수밖에….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그렇게나 머리가 좋고, 총명하고, 판단력이 빠른 사람이, 더구나 한국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어떻게 해서 한국이 해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내다보지 못했을까 하는 점이다. 비록 그렇게 될 것을 내다보았다고 하더라도 왜놈들의 압력 때문에 그렇게 밖에 행동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아닌 게 아니라 그와 같은 입장에 있던 어떤 친일파 모양으로…민족 전체를 구하기 위해서 자기가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만일 해방이 될 수도 있다고 조금만이라도 생각할 수 있었다면 왜놈들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전연 없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미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되어 있었으니까 왜놈들을 피해서 시골로 도망을 가 땅이라도 파먹고 살 수 있는 그런 입장도 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아무리 십자가, 십자가 하지만…민족을 팔아먹는 십자가가 어디 있는가 말이다. 그건 말도 안 된다. 적어도 그는…그렇게 함으로써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이왕 이완용과 비슷하게 친일파가 된 조상을 모시고 있는 바에야 어떻게 친일파가 된다는 사실을 기피할 수 있을 것인가, 하라는 대로 하자꾸나…그것과 내 학문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행동을 어떻게 했느냐가 학자에게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연구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졸렬하다는 것을 - 많은 세월이 흐르게 되면 사람들이 알게 되겠지. 숙주나물, 숙주나물 하면서 신숙주의 변절을 후세 사람들이 욕하고 있지만, 신숙주에게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입장과 대의명분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그 당시의 생활을 잘 몰라서 그렇지…. 또 그런 분위기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신숙주는 그렇게 존재함으로써 자기의 학자적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게 결과적으로 국가에 공헌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가리켜, 정보나물, 정보나물 하게 될지 모르지만…누구 한 사람 장정보가 되어 보기 전에는 장정보의 괴로운 입장, 그리고 장정보의 깊은 생각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만일 자기가 정보나물이 되기 싫어서 자살이라도 해버린다면, 자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학문적인 업적을 누가 쌓을 것인가. 반드시 죽는다고 하지는 않아도…학문을 버리고 시골에 가서 초부로 엎드려 산다고 해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해놓은 것은 없지만 지조만을 가지고 가치가 인정되는 사람도 있고, 비록 지조는 없지만 그 해놓은 업적으로 빛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어떤 사람은 일자무식이지만 좋은 목청 하나로 유명해진 사람도 있고, 사람 잘 죽이는 기술 때문에 영웅호걸이 된 경우도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경치가 너무 좋아서 물에 뛰어 들기도 하고 끝까지 임금님의 이혼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목을 잘린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조그마한 문제 하나만을 가지고 인간의 전부를 파악하려하거나 속단, 혹은 단죄하려는 그런 사람들의 행동이란 지극히 가치 없는 것이다. 그런 것에는 조금도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아마 다른 사람도 똑 같이 자기 입장이 된다면 자기가 취한 행동대로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행동은 최소한의 양보일 뿐이다 - 장정보 선생은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은 얼마 가지 않아서 곧 입증되었다. 이승만씨가 귀국을 해서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그 속에 있던 많은 천재들을 요소요소에 중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새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인재들이 절실히 필요한 때에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들이냐고 이승만씨는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정치가는 정계로, 실업가는 재계로, 학자는 학교로, 종교가는 교단으로, 친일문인은 다시 애국문인으로 되돌아가서 그들의 역량을 맘껏 발휘하게 되었다. 그들은 역시 천재들이었는데다가, 친일하지 않은 경쟁자들의 많은 몰락으로 금방 사계의 권위자들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런 사태는 생각지 않았던 부작용을 여러 면에서 나타내게 하였다. 그 가장 큰 것이 옥석을 구분한다는 기본적인 사회도덕을 뒤죽박죽이 되게 한 것이다. 옳은 사람도 없고 그른 사람도 없다. 정직한 사람도 별거 아니며, 정직하지 않았다고 해도 별거 아니다. 애국자도 매국노도 같은 것이며, 이긴 자도 없고 진 자도 없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해서 오입질을 하지 말란 법도 없으며, 택시에 놓고 내린 돈지갑을 운전수가 슬쩍 한다고 해서 양심에 가책을 받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일부러 부도수표를 발행하여 뺑소니를 쳤던 사람이 뒷날에는 국회의원이 되어 있는가 하면, 돈 없는 응급환자가 진료를 받을 수 없어 죽어 넘어지기도 했고, 중놈이 절간을 빼앗기 위해서 곤봉싸움을 하는가 하면, 목사들이 교인 뺏기 전쟁을 벌이기도 했고, 공직자들이 뇌물로 승진의 패스포트를 만드는가 하면, 치마 바람이 선생들을 타락시켰고, 선생들은 아이들을 황야의 무법자로 만들기도 했다…옳게 살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사람은 모름지기 돈을 벌고 출세하고, 향락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중요하며, 보다 차원 높게 그렇게 하는 것이 참다운 인생이고, 사는 보람이며, 자신의 위대함을 인정받는 길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사회 일부에 만연되기 시작한 것이다. 순절한 애국지사나, 전몰장병의 아들이기 때문에 교육도 받지 못하고 고생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친일파의 아들이 되어 호의호식하고 공부도 많이 하여 출세하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는 생각이 일반적인 상식으로 자리를 굳혀 갔다. 그런 세월이 삼십여 년 - 무섭고 겁나는 시절이었다.
이 불행한 한 세대 중에 장정보 선생은 최고의 지성인이 되었으며, 최대의 정신적인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되었고, 그와 같은 많은 후계자들을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죽음과 함께 그런 시대는 끝나고 그들의 몰락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런 엄청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장례식 순서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대학의 선생이며, 잡지사의 사장이고, 한림원 회원인 신숙주와 같은 시인이 나타나 정보나물을 찬양하는 조사를 읊조리고 있었으며, 일본의 배화(俳畵)를 그대로 흉내 내고 있는 동양화의 대가가 나와서 고인의 업적을 중언부언 찬양하고 있었다.
장례식이 끝나자, 버스가 대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장지까지 갈 사람들을 태우기 위한 것이었다.
맨 앞차에는 고인의 사진이 모셔졌고, 학계, 예술계와 언론계의 거물들이 자리를 잡았다. 꼭 주최 측이 그렇게 정한 것은 아니지만, 거물 하나가 먼저 차에 오르니 모두 비슷한 수준의 거물들이 그 차에 올랐다. 그러니 자연히 다른 연배에 있는 사람들은 탈 수가 없었다.
그들은 육십을 넘긴 사람들이기 때문에 언제 죽을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자기가 죽지 않고 장정보가 죽었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뿐이었다. 슬프거나, 섭섭하거나 하는 생각은 이상하게도 조금도 들지 않았다. 대체로 성공한 사람들은 성질이 잔인하고 자기중심주의이기 때문에 남에게 대한 동정심이나 우정 같은 것을 크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경쟁자이다. 특히 장정보는 그런 한 표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출세주의를 존경하고 있을지언정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장정보를 떠받듦으로써 여태까지 출세의 길을 달려왔다. 만일 장정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스승으로 모셨다면 필경은 존재도 없이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과거에도 많았고, 현재도 파락호가 되어 아직도 학계의 주변에 남아서 반대세력이 되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사실 유능한 학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머리가 좋은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학문적인 사관이나 철학관도 높이 살만한 그런 것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네들의 사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사상이 국민에게 받아들여져서, 국민의 정신을 살려야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장정보의 악착같은 반대파 공략에 의해서 모두 도태되고 말았다. 그들은 앉아서 공부만 하고 있었고, 장정보 선생은 공부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나서 다른 반대파 학자들을 몰락시키는 데 기어이 성공하고 말았다.
장정보와 어깨를 겨룰 만한 학자들이 이상하게도 하나씩 홧병을 일으켜 꺼꾸러졌다. 그들은 대학에서 쫓겨나고 해동학회에서도 천대를 받았다. 학자라는 것이 반드시 대학에만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우리나라 같이 내용보다도 형식을 중요시하는 나라에서는 대학에 적을 두지 않은 학자는 학자 행세를 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대학에서는 무지무지하게 제자들을 만들어서 자기 근위병으로 키울 수 있는 장점이 있었지만, 그들은 대학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그럴 기회가 없어서 독불장군에 지나지 않았다.
“친일파 해서 잘 먹고 잘 살던 놈들은 학자로서도 성공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마저도 어려우니…빽도 없고, 돈도 없고… 그런 것이 없이 대학교수를 한다는 것, 학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풍토다… 빌어먹을 친일파 학자놈들…장정보 도당들….”
그들은 자기 분을 참지 못하고 술주정뱅이가 되거나 아편쟁이가 되어서 모조리 요절하고 말았다. 기가 막히는 기분이었다. 해방이 되었는데도 일제의 심부름 노릇을 하던 놈들이 좋은 자리는 차지하고, 그들이 애써 우리 국민에게 심어주려고 하던 엉터리없는 식민지 사관을 그들이 없는데도 국민들에게 열심히 심어주고 있는 것이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런데도 우매한 국민들은 오히려 많은 세력을 가지고 있는 그들의 말을 믿었다. 그들이나 그들의 조상이 과거에 어떻게 했다는 그런 사소한 일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공부를 열심히 한 훌륭한 학자들이라는 것만을 믿었고, 그들 중에서도 단연 장정보 선생은 최고봉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가 하는 학설이나 책은 모조리 숭고한 진리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니 그게 바로 정의가 되었고, 진리가 되어 버렸다. 세상이란 얼마나 포용력이 많은가.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도 항상 남음이 있으니….
그러니 장정보 선생의 이론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장정보 선생의 압력에 의해서 요절했고, 목숨이 뱀처럼 질긴 사람들은 죽지는 않았지만, 보잘 것 없는 폐인들이 되어버렸다. 당시의 대학을 지배하고 있던 사람들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장정보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니, 장정보가 그런 반대파 학자들을 대학에서 몰아낸다는 것은 그리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장정보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한사코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일 그들이 득세하게 되면 자기의 이론은 반드시 비판을 받을 것이고, 장정보 사상은 하나의 식민지 사상으로 낙인을 찍혀 형편없는 쓰레기통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해방 이후에는 학문을 하는 것보다는 반대파를 현실적으로 몰아내는 데 모든 정력을 쏟았다.
그는 풍부한 재산과 자기와 같이 공부한 친일파 친구들의 협력을 받아 그 거창하고 질긴 사업을 줄기차게 해 나갔다. 십 년 이십 년, 혹은 삼십 년씩 해가는 사이에 그의 반대파들은 모조리 없어지고, 그들의 제자도 어디에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야말로 학계는 그를 정점으로 하는 피라밋이 만들어졌다.
그러니 누구 한 사람 그의 철학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영향은 실로 학계뿐이 아니었다. 일반 사회 전반에 걸쳐진 것이었다. 해방 초에 약간 근신하고 있던 교육받은 인물들이 정정보 선생의 철학에 힘입어서,재빠르게 출세의 길을 달렸다. 모두가 잘 된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곤란한 것은 용감한 사람, 정직한 사람, 고집 있는 사람, 자기 일만 하는 사람이 존경을 받는 사회가 아니라, 반대로 바보 취급을 받는 그런 사회가 되어 갔고,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도 모르게 몰락해가기도 했다.
그저 지조 없는 어벙한 사람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아첨 잘 하고, 부지런히 선물공세 잘 하는 사람들, 결혼식이나 생일잔치, 장례식 따위에 잘 쫓아다니는 사람들, - 이런 사람들이 출세하게 되었다. 실력은 없어도 살랑살랑 교제를 잘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그런 무드가 형성되어 갔다.
그래서,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실제로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거나 그가 만들어낸 업적이나 글 같은 것을 보면 한심해서 견딜 수 없는 사람들, 어떻게 해서 저런 엉터리가 그렇게 유면해질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의아심이 나는 그런 사람들이 양산되었다.
그들은 유명해질수록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유명해질수록 교제에 바쁜 사람들이었다. 아침 일찍 나가면 밤중이 되도록 교제술 마시러 돌아다니느라고 책 한 페이지를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입만 뻥긋하면 녹음테이프처럼 어제 하던 이야기를 지루하게 또 되풀이해서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염증을 하게 하거나 경멸감을 일으키게, 아니면 낮잠이나 오게 하였다. 그래도 그들은 자꾸만 유명해졌고,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공부 잘 해야 출세하나? 출세하기는 공부하기보다는 훨씬 쉽단 말이야.”
이런 사고방식이 젊은 사람들에게까지 슬슬 퍼져나갔다. 대학생들도 대학에서는 공부하기보다는 놀기를 좋아했고, 대학 주변은 술집과 다방, 빵집, 식당과 양재점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젊은 사람들도 공부를 열심히 하기보다는 자기를 이끌어주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다하여, 가방을 들어다 주는 것은 고사하고, 가정적인 잔심부름까지 해주면서 십여 년 혹은 이십 년씩 따라 다녀야 하는 악폐를 낳게 하였다. 대학원 입학으로부터 시작하여 박사코스, 시간 강사 자리 하나 얻는 데, 전임 얻는 운동, 학위를 받는 작업, 연구비를 받는 과정, 학회에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지나면서 끊임없이 선배들의 비위를 맞추어 나가야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첫 번째 버스에 탄 원로들은 그런 어려운 중견이나 신인들이 아니고, 그들에게서 그런 대접을 자연스럽게, 혹은 반강제로 받아 왔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해방의 덕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들이었다. 운 좋게 살아나서 자기의 맡은 분야에서 금방 대가가 되어 버렸다. 소위 말하는 신인 대가들이었다. 학계나 문단, 혹은 화단에 데뷔하기가 무섭게 대가들이 되었고, 심지어는 삼십대에 한림원 회원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는 전공분야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분야까지 석권하는 명예를 얻기도 했다.
그들의 집은 항상 문전성시였다. 자기 할아버지나 아버지에게 세배를 한번 가지 않는 사람들도 단단히 준비를 해서 그들에게 세배를 다녔고, 심지어는 아내나 아이들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세배를 했다.
그들의 전성기는 삼십 년이나 계속되었다. 그야말로 유례없는 호경기였다. 이제 그 호경기가 석양에 온 것이다. 그들은 이 버스에 앉아서 친구기도 하고, 선배이기도 한 장정보 선생을 보내면서, 은근히 자기네들이 몰락도 함께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을 하고 있었다.
만일 장정보 선생의 죽음으로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어 간다면 자기네들은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을까. 어떻게 해야 삼십 년이나 움켜쥐고 있던 왕좌를 빼앗기지 않을 수가 있을까. 만에 일이라도 빼앗기게 된다면 -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런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왕좌를 빼앗기다니, 내가 삼십년이나 피땀을 흘리며 쌓아온 왕좐데…그들은 학문의 민주화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체면만 아니라면…비슷한 운명에 놓인 사람들끼리 같은 버스에 함께 탄 김에, 앞으로 대처해야 할 방법에 대해서 속 시원히 이야기해봤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구렁이가 다 돼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의 약점을 남에게 조금도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을 건드리기만 하면 금방 닭똥 같은 눈물이 똑 떨어질 정도의 비통한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그들은 고인을 생각해서 몹시도 애통해 있는 표정이었다.
“팔십이 넘도록 사셨으면…허긴 수를 하신 셈이 아닙니까?”
버스가 서울 시가지를 빠져 나가서도 한참 된 뒤에야 김창우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듯이 학회장을 보고 말을 걸었다.
“…하지만 사람이 백 이십 오 세까지는 살 수 있다는 것이 과학적인 계산이라고 본다면…선생께서는 아직도 더 사실 수 있지요.”
학회장이 대답했다. 그는 이제 장정보 선생이 없어졌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피라밋의 정점에 올라앉은 셈이지만, 그게 하나도 즐겁지가 않았다. 즐겁기보다는 앞으로 학회를 운영해 나갈 일이 꿈만 같았다. 자기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잘 해나갈 수가 없었다. 실력으로서나 정치적인 수완으로서나 장정보 선생의 발끝을 따라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고, 또 사실 그랬기 때문에 장정보 선생이 언제나 자기를 부담 없이 키워준 것이었다.
그러니 그는 개인적으로 내세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업적으로도 그는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철학은 없어도 장정보 선생이 모조리 가지고 있었고, 조직 운영자의 기술로서도 장정보 선생에게 큰 보탬이 될 정도가 아니기 때문에 장정보 선생이 없는 지금 그가 따로이 있어야 할 필요가 하나도 없었다.
만일 이런 생각을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알기만 한다면 -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들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학자로서 조직 운영기술은 없다손 치더라도 특별한 업적만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으로써 충분히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것이 별로 없었다. 만일 후배들이 들고 일어나기만 한다면 자기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선생께서 일찍 돌아가신 것은… 후학들인 우리들에게는 섭섭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분으로서는 그야말로 오순 시절을 잘 사시다 가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학회장은 나지막하고 얌전한 말씨로 김창우를 건너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사실 말이오… 선생에게 대해서는 고거에 별로 비판이랄 게 없었거든요. 비판을 한다면 우린데… 우리야 어디….”
“그렇지요. 우리는 선생을 마치 엄한 부모를 대하듯이 했지 않습니까? 그래도 유교를 배운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니까요. 허지만 우리의 후배들, 그리고 요즘 젊은 것들이야 어디 스승 알기를 자기네 집 강아지만큼도 하지 않으니…우리가 학회를 버티고 있을 적에는…오늘날까지는 말이오…선생께서는 그런 불쾌한 저항 한 번 안 받았어요. 하지도 않았고, 하려고도 안 했지요. 설령 어떤 사람들이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들 때문에 꼼짝도 못했지요.”
“그만한 학문을 누가 쉽게 따를 수 있겠습니까? 비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건데요… 선생님의 학문을 제대로 알려고 하면 십 년 이십 년을 가지고 됩니까? 그러니까 그분을 덮을 사람도 없었고, 따라서 비판할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요. 참 운이 좋은 분이야. 삼십여 년을 계속 왕자로 군림하셨으니… 아마 모르긴 하지만 앞으로는 한 사람이 십 년이 아니라…단 오 년도 정상에 앉아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거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생님?”
김창우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글쎄… 내 혼자서 생각하는 겁니다마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기도 하고…하지만 김 박사, 앞으로 학회 일이 좀 걱정이요. 학회뿐만이 아니고 전체적으로도 그렇습니다마는….”
“아니, 학회 일에는 장정보 선생께서는 직접 관여하시지 않았잖습니까? 회장님께서 학회 일은 혼자서 해오셨고, 잘 해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그래도 그것은 장정보 선생께서 먼발치로라도 계셨으니까 잘 되었던 거지, 그분이 사라진 내일부터는 반드시 잘 되어간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회장의 말에 김창우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머리를 정리해 보자는 속셈이었다.
“허지만 선생님… 학회는 모조리가 장정보 선생의 법통을 이은 사람들로 구성이 돼 있는데…전연 이질적인 요소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선생님에게 반기라도 들까요? 대부분 우리들이 키운 사람들이고, 우리에게 학위를 했거나, 조교를 한 사람들인데요?”
김창우가 말했다.
“그야 그렇지만…개중에는 괴상한 놈들이 있단 말이요. 사실 그들 중에는 우리가 얼른 자리를 밸려주지 않아서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이십 년 삼십 년을 우리 때문에 짓눌려서 햇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전연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아요? 만일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그들은 이제는 장정보 선생, 말하자면 호랭이가 없어졌으니, 여우같은 놈들을 몽땅 몰아내고 토끼들도 한 세상 보자, 얼른 호랭이가 되자,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를 옛날과 같은 고분 고분한 눈으로 보겠어요? 우리가 하라는 대로 순종하겠어요? 아마 우리를 몰아내기 위해서 어떤 수단이라도 다 쓰려고 할 겁니다. 이제 때가 왔다, 더 이상 오징어가 되기는 싫다 등으로 말이오….”
그의 언성이 약간 높아졌다. 김창우는 그런 소리가 버스 안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릴까 저어기 걱정스러웠다. 그렇다고 바로 목소리를 낮추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선생님, 그렇게 간단히는 되지 않을 겁니다.”
김창우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어서 말했다. 학회장은 김창우의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김창우의 설명을 듣고 싶어서 귀를 그의 입 쪽으로 가져갔다.
“회장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만일 일어난다면 그건 무기 없는 전쟁이 될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방비가 없으면 지고 말지요. 준비를 해야 합니다.”
“글쎄 그게…그들을 콱 누를 수 있는 학설을 발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그런 연구를 해 온 것도 아니고….”
“그게 무슨 문젭니까? 장정보 선생은 가셨지만, 장정보 주의는 우리가 배워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걸 쓰는 겁니다.”
“그게….”
“아닙니다. 그게 급하다, 그리고 확실하게 올 것이다, 라고 인정만 되시면 늦지 않게 바로 써야 합니다. 그들이 공격해오기 전에 말입니다. 만일 그런 공격이 있은 뒤에 조치를 취하게 되면… 사회에서 보기에도 추하게 된단 말입니다. 비판을 받았으니까 화가 나서 어떻게 했다, 하는 소리를 듣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그러기 전에 손을 쓰게 되면 아무도 알 수가 없고, 명분도 뚜렷해진단 말입니다. 회장님….”
그들은 같은 대학에서 장정보 선생의 제자로 자랐고 학위도 같이 장정보 선생에게서 받았으나 회장은 다른 대학으로 가 있었다. 그러나 같은 대학 출신 선배이기 때문에 그는 깎듯이 선생님이라고 존댓말을 썼다. 물론 쌍놈 사회라면 아무개 형 하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예의범절 좋기로 유명한 학회고 보니, 이삼 회 높은 선배를 보고도 선생님으로 존칭하는 것이고, 그렇게 처신하게 되면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비판을 받는 법이 없기 때문에 호신술로도 좋은 방법이었다.
그리고 김창우로서는 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장정보 선생이 있던 대학을 나온 데다가 그 대학원을 나왔고, 그 대학에 주저앉게 되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장정보 선생의 정통파라고 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면 좋은 것이고, 우연이라면 우연일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런 행운이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는 일부러 몸조심을 했다. 선배는 말할 것도 없고, 후배를 만난다고 하여도 선배처럼 고개를 숙여 절을 하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겉으로 보기에는 그에게 적이라고는 있을 수가 없었다. 간접적으로도 비판을 받는 일도 별로 없었다.
“그 양반 무난한 사람이지.”
상하의 사람들이 이렇게 그를 평가했다. 보다 중요시 되어야 하는 학문에 대해서는 본인이나 남이나가 알만한 것이 없었다. 특별한 것을 발표한 일도 없었고 그럴만한 건덕지를 찾아낼 수도 없었다.
“우리는 불행한 시대에 있어요. 학자로서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만주나 중국 대륙을 맘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면 우리 학문도 크게 발전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국제정세란 것이 고약하게도 모두 적대국이 돼 버렸으니… 우리가 하는 학문은 좁은 남한 땅에서만 연구해야 한단 말입니다. 등산가가 산에 오르지 못하고, 그 산의 발등에서 그 산의 전체를 밟은 것처럼 생각하는 거나 다름이 없어요. 그러니 어떤 사람들은 우리 쪽에 너무 발전이 없다, 새로운 학설이 없다, 장정보 선생의 리바이벌만 하고 있다, 이렇게들 말하지만, 그건 어쩔 도리가 없는 겁니다. 우리의 옛 문화가 몽고와 중국 쪽에서 흘러 왔는데, 그 쪽을 연구할 수가 없으니 그 문화를 어떻게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불가피하게 학자로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김창우는 후학들에게 이렇게 자주 말하고 있었다. 이건 실정이 그렇다는 것을 알리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크게 학문적으로 공적이 없는 자신을 변호하는 말이기도 했다.
방법이 전연 없는 것도 아니었다. 간접적인 방법을 쓰면 그쪽 문화의 연구는 보다 더 폭넓게 할 수 있었고, 또 중공이나 소련이 아니더라도 그 인접국가에 가서도 연구할 수 있었다. 다만 좀 어려웠을 뿐이다.
그러나 김창우는 그런 어려움이나, 모험을 한 번도 행동에 옮겨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다가는 실패할 수도 있고, 실패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대학의 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었다. 또 실제로 모두가 계획대로 다 된다고 하더라도 그 엄청난 작업에 인생을 몽땅 걸 수 있는 용기가 없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긴 대학생활을 주로 집과 교수실에서 보냈다. 고작해야 저널리즘적인 얄팍한 지식이나 받아들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남는 시간은 학회일이다, 은사일이다 하면서 주로 교제하기에 보냈고, 그들과 술 먹는 일에 써버렸다. 그러니 제대로 공부 한 번 못하고 학자의 황금기간을 허송해 버린 것이다. 업적으로 남은 게 있다면 간장에 약간의 이상이 생긴 것이다. 다행히 아직 간암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그렇게 보면 후학들에 대한 피압박감은 반드시 학회장에게만 한한 것은 아니었다. 별로 가진 업적이 없으니, 그들이 비판해 오면 내세울 방패가 전연 없는 것이었다.
“…김 박사에게 좋은 방법이?”
“…글쎄요…저는 우리에게 바짝 다가오는 후배들은… 그들은 사십대 후반부터 오십대 초반의 사람들입니다마는…그들은 염치가 없는 것 같애요. 우리 장정보 선생에게 바친 정성에다 비하면… 그러니까 우리는 그들을 제끼고… 삼십대 후반부터 사십대 초반에 이르는 다음 세대의 후배들을 등용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그들은 자존심 때문에 스스로 물러가게 되지요. 우리가 애써서 자를 필요도 없는 일이 아닙니까? 점잖지 못하게…만일 오십대 친구들만 없다면 우리는…앞으로도 십 년 내지 이십 년은 그대로 우리의 자리를 지켜가며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뜻있게 말했다. 그런 정도의 지혜도 회장에게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런 일도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지혜의 일부만을 그에게 늘어놓은 것이다.
“음…그게 좋은 방법이군요. 연구할만한….”
그는 주름살진 커다란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일호 버스는 고속도로를 열심히 달리고 있었고, 다음 세대의 이호 버스, 그리고 그 다음 세대의 삼호 버스도 처지지 않고 열심히 뒤를 따라 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여태 그들이 이야기하고 걱정하던 내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사실 같기도 했다.
장지에서 돌아왔을 적에는 이미 밤이 되어 있었다.
일호 차를 탄 원로들은 기진맥진해서, 버스가 시내로 들어오자 모두 뿔뿔이 헤어져서 집으로 가 버렸고, 이호 차에 탄 중견들 일부는 조용한 왜식집으로 더러 몰려갔지만 삼호 차에 탄 젊은이들은 부리나케 삼겹살집으로 달려가서 소주병을 땄다.
그들은 아직도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초반에 이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왕성한 식욕을 가지고 있었는데다가, 낮에도 먹은 게 없어서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장지에서 음식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른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맘 놓고 배불리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배를 쫄쫄 곯고 있었다. 후라이팬이 가스렌지 위에 놓이고 고기가 지글지글 굽히기 시작하자 그들은 배가 뒤틀리는 것 같은 공복감을 느꼈다.
그들은 바쁘게 술잔을 돌려서 소주 한 잔씩을 목구멍에다 털어 넣었다. 한참 그렇게 하다가 김기용이라는 역사철학 하는 친구가 잔을 들어 올렸다.
“축배를 하지 않았구만, 자, 장정보 선생의 명복을 위해서….”
그는 조그마한 소수 잔을 들어 올렸다. 그에 따라 다른 사람들도 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게걸스럽게 술을 털어넣고는 삼겹살을 씹었다.
김기용은 덩치가 크고 골격이 우람해서, 학자 지망생이라기보다는 운동선수 같은 느낌을 주게 하였다. 머리는 좋았지만, 성질이 거칠어서 붙임성이 좀 적다는 핀잔을 받을 때가 많은 사람이었다. 역시 그도 오재필과 마찬가지로 대학에 약간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고, 그와 같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었다. 오재필과 다른 것은, 오재필처럼 일정한 직장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대학에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옷가지나 구두 하나도 변변할 것을 걸치고 다닐 수가 없었다. 한 시간에 사오천 원하는 강사료를 받아서는 그야말로 입에 풀칠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대가가 죽어서 섭섭한가? 할아버지 같은 존재가 말이지….”
조그마한 몸집에, 아직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것 같은 간신 목소리를 하는 송행상이란 친구가 김기용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송행상은 소설을 쓰고 있지만, 역시 대학원에서 박사 코스를 마치고 이 대학 저 대학으로 다니며 보따리 장사처럼 시간을 맡아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소설 쓰는 것도 시원치 않고, 대학 선생하는 것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섭섭한 게 아니라… 뭐랄까, 이제부터는 뭔가를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뭘 생각한다는 거야? 생각하긴….”
김기용의 말을 백재만이라는 사람이 받았다. 고등학교 미술 선생을 하면서, 역시 대학에 한 두 시간 강사 자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었지만, 아직 상품으로 팔릴만한 그림 한 장을 그리지 못한 사람이었다. 못했다기보다도, 누구 한 사람, 그게 좋은 그림이라고 사주는 사람이 없어서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나오는 돈으로 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나머지 한 사람인 이찬호는 오재필이나 김기용과 마찬가지로 역사철학이 전공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고 대학도 같은 대학이어서, 자주 만나서 놀기도 하고 서로 경쟁하기도 하는 그런 친구들이었다.
오재필은 김창우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학회나 대학에 대해서 별로 불평이 없었지만, 김기용과 이찬호는 불평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찬호는 사람이 좀 내성적이어서, 불평을 밖으로 내미는 일이 별로 없었지만, 김기용은 노가다 같은 모습에 끊임없이 입에서 욕지거리를 뱉고 다녔다.
“환쟁이들이야 소주나 퍼마시며 그림이나 그리면 되지만…우리야 어디 대학을 떠나서야 할 게 있어야지. 누가 시켜주지도 않으니….”
“않으면 안하면 될 게 아니야?”
백재만이가 대어 들었다. 이십대에 이미 머리가 세기 시작해서는 사십대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백발이 되어 버린 친구였다. 한 때는 머리를 새까맣게 물을 들여 다니기도 했지만, 어쩐 일인지 최근에는 다시 허옇게 하고 다니고 있었다.
물을 들였을 적에 친구들이 한 마디씩 했다.
“그림쟁이가 제 머리 하나 색칠을 못하면야 어디 그림을 그린다고 할 수 있겠어?”
그렇게 대꾸했지만, 다시 깜해졌을 적에는 또 다른 대꾸를 할 수밖에 없었다.
“왜 또 백발이 되었어?”
송행상이가 물었다.
“머리라도 희어야 사람 구실을 하는 것 같으니까. 너무 젊다고 사람을 천대를 하니 어디 한 다리 낄 수가 있어야지. 맨 바보 같은 늙은 놈들이 해 먹으니… 나야 어디. 그러니까 머리라도 희지 않으면….”
“그래서 덕을 좀 봤어? 그나마 시간 강사 자리도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인가?”
김기용이가 우락부락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물론 농담이겠지. 허지만 미술계라는 것도 보통 재주 가지고서는….”
이찬호가 되받았다.
“그 엉터리 그림 가지고서는 힘들 거다. 한국 사람들이라는 게, 자기 스스로 무엇을 연구하기보다는 남들이 뭐라고 하는 것을 더 중요시하니까. 그들에게는 어느 대가다, 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지. 다른 사람들의 그림은 사려고 하지 않는단 말이다. 안 그래? 그러니까 유명한 사람은 살아가기가 아주 쉽지만, 유명해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그림을 그려도 해나가기가 힘들 거다. 비록 대가들보다 훨씬 나아도 말이지….”
김기용이가 백재만의 약을 올리듯이 말햇다.
“그놈들 그리는 게 그게 그림이야? 발로 찍찍 그려놓고선….”
“백재만이가 반기를 들었다.
“그것 보라구, 보다 좋은 그림을 그려서 대가가 될려고는 하지 않고 대가들을 비방만 하고 있거든. 그래서야 되겠어?”
“내가 그림을 못 그린다고? 네놈 같이 무식한 놈이 내 그림을 어떻게 안단 말이야?”
백재만은 고기를 먹다가 말고 김기용에게 대어들었다.
“보라구, 오늘 날의 젊은이들은 이래서 탈이란 말이야.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으로 선배들을 밀어낼 생각을 안 하고, 그저 선배들을 비방만 한다니까. 안 되겠어, 안 되구 말구.”
김기용은 장정보 선생의 어조를 흉내내서 말했다. 그러니까 나머지 사람들이 소리를 내어 실소를 했다.
“자넨 국전에 입선 두어 번 하다가 말았지?”
김기용이가 다시 백재만의 약을 올렸다.
“국전 그게 뭔데? 나는 그런 비순수한 것은 단연 거부한다.”
“그러면 이놈아, 처음부터 그렇게 해야지, 잘 안 될 성싶으니까 그만두고 욕을 하는 것은 안 되니까 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처음에야 나도 멋 모르고, 그렇게 하는 것인 줄 알았지. 참여하고 보니까 이건 영감들이 모여 앉아서 자파 후배들 기르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거야. 나 같이 유파도, 선배도 없는 사람은 도저히 국전에서 특별상을 탄다는 것은 불가능 하겠더란 말이야. 물론 해마다 입선 정도는 하겠지만, 그러다가 아까운 세월 다 보내고 나면 나는 뭐야? 아무 재주도 없는 형편없는 환쟁이에 지나지 않게 되지.”
“유파야 별개 문제지만 선배 찾는 거야 간단하지 뭘, 국전 심사위원 하는 영감을 찾아가서 큰 절을 한 번 하면 되잖아? 때때로 세배나 가고 말이지….”
“그런 짓을 어떻게 하고 있어? 그런 것 하기 싫은 성격이라 그림쟁이가 됐는데. 내가 그것을 하기 좋아 했으면 정치과나 행정과 같은 것을 택하지 뭐 미술대학엘 갔겠어?”
“하지만 미술을 한다고 해도 일단 선배들의 심사를 거치는 일을 한다면 어떻게 선배를 안 찾아 볼 수 있어?”
“그러니까 나는 그런 것을 거부했단 말이야.”
“거부한 건 용감하고 좋은데… 평생을 따분하게 지내게 되지. 혼자서 알아주는 사람도 없이… 쎄고 쎈 환쟁이들인데, 누가 자네 것을 일부러 찾아와서, 이거야 말로 천재적인 그림이요, 하고 돈을 주고 사가지고 가겠나 말이야.”
“난 그렇게는 안 해.”
백재만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듯이 말했다.
“안 하면? 아까 내가 말했잖아? 평생을 혼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속에서, 뒷전에 홀로 앉아 가난과 고독을 되씹으며 살아가야 해. 한국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독에는 못 견디는 사람들이야. 혼자서 무엇을 하겠다, 이런 정신이 없어. 누구와 함께 어울려야 그게 비록 망하는 일이라도 안심하고 하지. 혼자서 그렇게 한단 말이지? 새까맣던 친구들은 선배 찾아서 정치 잘해서 추천작간가, 초대작간가 되어 매스컴도 타고, 그림 값도 마구 올라가서, 호화찬란한 저택에서 사는데, 자네는 고등학교 선생질, 간신히 대학에 한 시간을 얻어서 가고 있지만, 전임이 되려면 앞으로 십 년이 걸릴지 이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짓을 하겠어? 가난에 찌들어서 예펜네는 아우성이고, 아이들은 가출을 하고 지랄발광인데 자네는 혼자서 돈도 안 되는 그림만 그리고 앉았단 말이지?”
“그게 그림이야.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미술과를 택했지, 성공해서 그림 팔아먹기 위해서 화가가 된 건 아니야. 과거에 많은 작가들이 그런 행동을 했지만 그림도 지뿔도 그리지 못하면서… 그것도 무식한 부자들이 큰 집을 지어놓고, 무식한 것 면하기 위해서, 돈 많은 것 자랑하기 위해서 덮어놓고 잘 알려진 대가들 그림만 사다가 거는 썩은 풍조 때문에 돈을 벌게 된 거지, 실제로 그림 잘 그리는 그런 대가라는 게 몇 사람이나 있겠어, 나는 그런 사람들 인정하지 않아.”
그는 제법 열을 올리고 있었다.
“못 따먹는 포도는 시다, 이거지?”
“불쌍하다.”
김기용의 말에 송행상이가 덧붙였다.
“실력 없는 사람이 실력으로 해서는 안 되니까, 단체에 들어가서, 감투 써서, 그리고 심사위원 같은 것 하면서… 자기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유파나 제자들에게만 커질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 나머지에게는 아는 척도 하지 않는 거야. 그러니 촌놈인 네놈들이 보기에 유명하게 됐다는 사람들이 반드시 훌륭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보면 곤란하단 말이야. 무식한 대중도 아니면서….”
“그놈, 불평하는 말에도 제법 조리가 있구만, 말하자면 설득력 있는 불평을 하기 위해서 방구석에 들어앉아서 열심히 연구한 모양이지? 핫핫하.”
“그건 아니구….”
“현실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겠지. 그런데 화가들이 작가작가 하는 것은 왜 그래? 그것도 일종의 허영이 아니야? 화가면 어디까지나 화가지, 작가라고 해야 기분 좋은 이유는 또 뭐란 말이야? 그리고 초청작가, 추천작가 하는데, 도대체 그건 뭐야?”
송행상이가 끼어들었다.
“초청작가가 아니라 초대작가지.”
이찬호가 송행상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어쨌든 마찬가지가 아니야? 작가란 원래가 소설쟁이들에게 붙는 말인데 요즘은 벼라별 뚱딴지같은 것들이 다 작가라고 하니, 작가가 작가라고 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야.”
“이 자식아, 네놈이 소설을 몇 편이나 썼다고 작가냐? 세발, 네발 가지고… 대학선생질이나 똑똑히 해. 이놈들이 말이야. 고약한 게… 대학에 가서는 대학교수요, 문단에 가서는 작가요, 하고 박쥐처럼 행세를 한단 말이야. 남은 하나도 못해서 쩔쩔 매는 데, 이놈들은 두 개 세 개 차지하고 있으니, 이게 어디 공평한 일이야? 왜 이런 사람들에게 세금공세를 콱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 두 가지, 세 가지 직업을 가지고, 남보다도 두 배 세 배 수입을 올리는 사람들을….”
“나야 뭐- 두 가지 다가 신통찮으니….”
“허지만 잘 되면 두 가지 다 해보겠다는 생각 아니야?”
“그거야 백재만이도 마찬가지가 아니야? 그림 그려서 팔아먹고, 학교에서 월급 받아서 돈 벌고….”
“그러니까 네놈들의 사고방식이 틀렸단 말이다. 돈에 환장을 하고 있으니 무슨 예술이 제대로 되겠어? 택일 하란 말이야.”
“글쎄, 그거야 세금이나 잘 내면 되는 거지 뭘.”
이찬호가 온건하게 말했다.
“아니야. 이런 허세꾼들 때문에 우리처럼 본격적으로 대학 하나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대학에 발을 붙일 수가 없어. 그림을 그리면서, 글을 쓰면서, 대학 교수다, 하면 그 글이나 그림을 엉터리라도 더 품위가 높아 보일 것이다. 또 일반 사람들이 그렇게 보려는 사고방식도 허영이고, 위선이고, 가식이란 말이다. 한국 사람들은 허세와 허영을 제 애비보다 더 좋아해서 - 속은 하나도 없으면서 겉만 번지르르 하단 말이야. 이래 가지고서는 학문이고, 예술이고 발전하지 않지. 아마 이게 장정보 선생이 뿌린 씨일 거야.”
“장정보 선생뿐이야? 해방 덕에 오늘날까지 출세하여 대가의 위치를 삼십 년이나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런 바람을 불어넣어 주었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자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제 하나님은 가벼렸어. 그래서 그들의 몰락은 바야흐로 시작되었어.”
“어림도 없는 소리. 장정보 선생은 죽었지만 아직도 우리 상전들은 시퍼렇게 살아 있어.”
“허지만 분위기하는 것이 있잖나. 괴수가 죽고 나면 자연히 기분이 달라지는 거니까.”
“만일 달라지지 않으면?”
“달라지게 해야지.”
“네 말대로 그들은 몰락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을 몰락시켜야 한다, 그런 말이야?”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야. 그들의 몰락은 시작되고 있어. 아직은 그럴 만한 아무 징조도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그런 부위기가 성숙할 거야. 이건 내 예측이지. 왜냐면,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를 적에는 선배들이 하는 것을 무조건 옳다고 생각했고, 따랐지만, 사십여 년 살아오는 동안에, 해방 삼십 오 년을 말하는 거야… 우리는 우리 민족이 어떻게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문이나 예술이 어떤 줄기를 가지고 있어야 하겠다, 하는 것을 깨달았단 말이야. 과거에 왜놈들이 조선을 먹어치우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줄기, 그리고 그것을 무비판하게 따르며 공부하던 대가들의 사상이 우리의 장래를 위해서 반드시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하는 자각이 이젠 있단 말이야. 그러니 안 바뀌고 견디는 재간이 있겠어? 나는 그걸 낙관하고 있어.”
“그럼 왜 여태까지는 조용했지?”
“그거야 반드시 장정보 선생 때문만은 아니고…그분에 대한 학계의 가부장적인 체면도 있고 해서…조금만 기다리자, 서두를 필요가 없는 것이니까, 이렇게 생각한 거지. 허지만 지금에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거든, 큰 충격을 주게 될지는 모르지만 잘못된 철학은 바로 잡아야지. 그런 게 너무 많단 말이야. 우리 학계뿐이 아니고… 다른 분야에도 마찬가지지만. 아마 문학도, 미술도, 비슷할 거야. 과거에 친일파 하던 징그럽게 질긴 사람들이 여태 살아남아서 대가가 되어 가지고, 단체고, 신문잡지고, 학교를 손아귀에 넣어가지고 좌지우지하는 것이… 그러니 실력만 가지고 되는 게 있겠어? 저놈은 좀 예외겠지만, 너도 마찬가지다.”
김기용은 백재만과 송행상을 번갈아보았다.
“우리는… 그 동안 공부보다도 다른 것에 너무 신경을 써온 것이 사실이야. 자기 직업보다는 다른 것에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는 게, 그러니 그게 물이 들어서 말이지… 공부보다는 쉽게 교제를 해서 돈을 벌려고 해왔어. 그러니 해방 삼십 년에 학문적으로, 혹은 예술적으로 제대로 해놓은 게 없지. 일반적으로 우리 국민은 직업의식이 너무 박약했다고 할까…그런 것도 있는 게 아닌가 하는데….”
이찬호가 온건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야. 우리의 선배들이 후배들을 잘못 가르친 거야. 좋은 학문을 한다는 것은 반드시 민족적인 정의감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건데… 왜놈한테 붙어먹고 살던 놈이라,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민족의식이나 지조, 정의감 같은 것을 쏙 빼버리고 기술적인, 혹은 지엽적인 것만 가르친 거야.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올바른 철학을 세우기보다는 그저 기술을 부려서 잘 먹고 사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암시를 한 거지. 옳은 게 없는 데야 그른 것도 있을 수 있나. 뒤죽박죽이 된 속에서 처세에 만능한 교육을 받아 왔어. 이래가지고서는 제대로 학문도 발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질적인 소국주의를 벗어날 수가 없어. 아마 이제부터는 그런 패배주의가 슬슬 물러나게 될 거야.”
“어려울 걸. 왜냐면 그런 사람들 밑에서 그렇게 교육받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 위에 도사리고 앉아 있어. 그들이 우리의 뜻을 받아들여 자기네들이 스스로 물러나주겠어? 모르기는 하지만 앞으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그들의 가방을 들고 다녀야 할 걸….”
송행상이가 삼겹살을 사추에다 싸가면서 말했다.
“어찌됐건 육이오가 난 지도 한 세대가 넘었으니, 학문적으로도 이렇다 할 발전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학자들은 그 동안 무엇을 했는지 별로 해놓은 게 없어 독창적인 새로운 연구 하나 없으니… 간단한 농업분야만 해도 왜놈들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벼라별 꽃을 다 가져다가 그걸 개량하여 아름다운 새 품종을 만들어서 도로 세계 각국에다 팔아먹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꽃 한 가지를 새로 품종을 만들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그게 어디 농업원예 분야뿐이겠어? 다 마찬가지야. 그들이 발명하여 다 쓰고 난 것을 우리가 가져다가 간신히 흉내나 내고 있을 뿐이지. 신친일주의란 게 바로 그거야. 이래가지고 어떻게 발전한단 말이야? 과학적인 것은 얼른 어떻게 안 된다고 하더라도 인문 사회학, 더구나 국민의식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철학마저도 왜놈들이 만들어 놓은 식민지주의에서 탈피하는 일마저도 못하고 있으니 이거 어이없는 일이 아니냐? 하루 속히 빠져 나가야 하는데 장정보 선생의 주구들이 그걸 허용하지 않고 있었단 말이야. 우리는 위대한 국민일 수가 있어. 그리고 과거에도 위대했어.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는 위대하게 되도록 역사관을 새로 정립해야 해. 그러나 왜놈들이 만들어 놓은 - 한국 사람들은 열등민족이다, 맨 날 당쟁만 하면서 세월을 보낸 엉터리없는 민족이다, 하는 것을 충실하게 답습해왔어. 그래서 심지어는 해방 이후에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까지도 자기 민족에 대해서 무한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어. 세상에 이런 교육이 어디 있느냐 말이야. 어째서 사회 통념이 이런 것을 하용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어도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는지 알 수가 없어. 나는 바보다, 하는 말을 들어도 그게 당연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정신병자적이란 말이야. 그래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해왔단 말이야. 무엇이 그렇게 우리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렸을까? 어째서 그렇게 됐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이상하지 않아? 전 국토가 모래뿐인 나라도, 혹은 산뿐인 나라도 자기네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자기네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나라가 가득 있으며 그게 또 정상이란 말이야. 그렇게 되어야 하겠지. 그런데도 우리는 그 반대의 길을 걸어 왔고, 조금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왔어. 도대체 누구의 장난으로 이렇게 됐어? 우리의 대가들, 우리의 원로들, 우리의 선배들, 장정보 선생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 말이야… 그들이 무언가 시작을 잘못했고, 그 밑에서 덕을 보는 많은 후배들이 또 그걸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겠어? 우리는 이제 그런 패배주의자들을 몰락시켜야 해.”
김기용이가 입안에 든 음식을 입술 밖으로 토해내면서 열심히 지껄이고 있었다. 이제는 술이 거나하게 되어서 그런지, 그의 말은 조리가 없어지고, 점점 감정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가 열심히 지껄이고 있는 동안, 오재필은 졸리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빨리 술판을 피하고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 따분하고, 골치를 쓰게 하는 이야기는 딱 질색이었다.
여태까지 그는 그런 골치 아픈 것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선생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되었고, 적당히 돈을 만들어서 인생을 즐기면 그만이었다. 민족이 어떻고, 정의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 따위는 딱지가 덜 떨어진 자식들이나 하는 소리고,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어설픈 사람들이나 하는 수작이다.
오재필은 인생이 즐거웠다. 주변을 돌아보면, 쉽게 돈을 뜯는 방법도 있고, 또 향락을 할 수 있는 방법도 많이 널려 있는 것이다. 그걸, 주워서 가지면 그만이다. 골치 아프게 선배들이 가르쳐 준 것을 비판하고, 그것을 뒤엎는 방법을 연구한다면 거창하기만 하지 고단한 일이다. 그리고 이 사회는 새로운 것, 도전적인 것, 비판적인 것을 잘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것을 하려고 하면 영광보다도 상당한 모험과 상처를 각오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밥줄도 끊어질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도대체 그럴 필요가 어디 있는가? 이런들 어떠며, 저런들 어떠리. 짧은 한 평생을 고생스럽지 않게 보내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지… 오재필은 기꺼이 그런 길을 택하고 있었다. 그러니 김기용이가 침을 튀기며 늘어놓고 있는 잔소리는 듣기 싫을 뿐이었다. 그는 얼른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나오지도 않는 하품을 커다랗게 늘어놓았다. 아파트에 돌아가면 계집애들이 와 있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은밀하게 하나쯤 와서 조용히 자고 갈려고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럴 때 자기가 없으면 그것은 아가씨에게 비극이다. 그런 비극을 남자로서 어떻게 만들어 줄 수 있겠는가. 빨리 아파트로 돌아가자… 그는 다시 하품을 커다랗게 했다.
김창우의 머리속은 약간 복잡해졌다.
장정보 선생이 살아 있을 적에는 학회를 유지하고 자기의 직위를 유지하는 데 호주적인 머리나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모든 문제를 장정보 선생이 잘 해결해 주었고, 그야말로 그가 호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주었었다. 죽은 제갈공명이 살아 있는 사마중달을 꼼짝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처럼, 죽은 것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장정보 선생이지만,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학계는 질서정연하게 잘 이끌어져 왔다. 그의 늙은, 힘없는 콧김 하나만으로도 만사가 다 제대로 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죽었고 그의 콧김도 무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분명히 학계에는 이상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 분명했다. 아직은 어떤 징조가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보여서는 안 된다. 보인 뒤에 손을 썼다가는 이쪽이 지고 만다. 만일 지고나면 - 장정보 선생이 여지없이 칼질을 당할 것이고, 그를 추종해 오던 몇 사람들의 대가들이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뻔한 일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우선 장정보 선생의 민족주의엔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미스가 있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학자라고 해서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고 할 수가 없으니까. 그러나 그 근본정신에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한국학, 한국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학문이.
거기에다 김창우라는 자신에게도 문제는 많이 있다. 연구란 게 없다. 그저 교수로서 학교를 부지런히 지켜왔을 뿐이지, 학문적인 업적이라고는 신통찮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왜정 말기에 대학을 다니다가 해방을 맞았고, 그 다음에 곧 육이오를 맞았다.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거의 가지지 못했다. 그런데다 어학 지식이라고는 왜말이 고작이었다.
그 왜말도 이승만 박사의 배일사상 때문에 십여 년이나 별로 써먹을 데가 없었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영어라도 잘 할 수 있다면 미국이나 영국에서 동양학의 새로운 지식을 흡수할 수도 있었지만, 그게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한문지식이 능통해서 대만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입장도 아니었다. 그러니 천상 장정보 선생이 남겨놓은 것을 새로 풀고 가로 푸는 방법밖에는 학문하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전후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과, 재일 한국학자들의 노력으로, 일본 민족의 뿌리가 한(韓)민족에서 왔다는 것이 점점 밝혀져 가고 있다. 그 때문에 한국의 상고사, 중세사가 굉장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고려사만을 가지고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보다 커다란 민족적인 발자취가 있음을 그들도 은근히 깨닫게 되었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어 가고 있다.
한국민족은 절대로 약소한 민족이 아니다. 지금은 한반도에 웅크리고 있는, 그리고 남한 쪽에 조그마해진 그런 작은 형태로 남아 있지만, 그게 한민족의 전부는 아니다. 과연 한민족은 어디에서 왔는가? 삼국사기처럼 신라에서만 비롯되었는가? 그렇잖다. 중앙아시아에서 시작하여, 서역과 중동과 터키를 만들어낸 거대한 민족이 한민족을 바가지 모양으로 위쪽에서 둘러싸면서 마침내는 중국본토의 서북부와 만주, 그리고 한반도, 다음에는 일본열도에까지 세력을 뻗치게 된 것이다. 다른 어떤 문화적인 유산보다도 언어구조 자체가 그걸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민족이 한민족의 지류가 아닌,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이 생각하고 있던 사고방식은 부자연스런 군국주의 사상에 지나지 않는다… 좀 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하자… 이렇게 하여 그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도 더 확실하고 거대한 것을 차츰 밝혀내어 가고 있다… 그야말로 신채호 선생이 소박하게 주장하던 생각이 과학적으로 맞아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보다도 일본에서 먼저 알게 되어 가는 판국이다.
그래서 그것을 젊은 우리나라 학자들도 차츰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터키와 중동지역, 그리고 인도와 파키스탄 등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로 인해서 그들의 문화와 우리의 문화에 굉장한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한 몇 가지 사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째는 역시 일본 식민지주의 영향이고, 이게 가장 큰 나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다음은 한(漢)족을 기간으로 하여 일어난 명나라의 나쁜 영향이다.
우리는 한(漢)민족이 아니다. 한(漢)민족을 반달형으로 위에서부터 둘러싸고 있는 북방민족의 그 오른쪽 끝을 형성하고 있는 민족이다. 이 거대한 민족이 명나라의 형성과 함께 그의 세력권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유교가 이들에게서 전달되어,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섬기게 된다. 우리 북방민족의 전통이 중국민족에 의해서 단절되고, 재편성된다. 삼국사기가 만들어지고, 고려사가 다시 편찬된다. 그래서는 아시아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민족은 우리의 조상들이 아니라 중국의 한(漢)민족이라는 엉뚱한 논리가 형성된다. 그래서 우리는 점차 작고 보잘 것 없는 민족으로 변해가고, 또 시대적인 학자들로 인해서 그게 만족스런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고구려의 위대함보다도, 신라의 소국주의를 찬양하게 되고, 고려의 프라이드도 여지없이 깎여, 황제칭호가 단순한 왕의 칭호로 전락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올바른 뿌리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요소를 깨끗하게 배제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첫 작업으로, 일제와 그에 추종학자들이 왜곡되게 만들어놓은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하고, 다음으로 고려 말 이조 초의 사대주의 학파들이 만들어놓은 왜곡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런데도 이 두 가지 작업은 하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첫째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장정보 학파들이 그 동안 너무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신이었다는 것을 김창우는 잘 알고 있다.
일본인의 나라가 아니고, 자기네 나라가 세워졌으니까 마땅히 자기의 것을 바로잡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강대한, 그리고 절대적인 장정보의 세력은 다른 사람들의 비판이나 저항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해방이 된 지 한 세대가 지났어도, 학문에나, 사상에 일본의 영향을 벗을 수가 없었다. 벗어난다기보다도 더욱 가중해지기만 했다. 일본의 경제적인 팽창주의가 군국시대의 패권주의에로의 복귀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장정보 세력은 자기 세력의 강화를 위해, 그런 군국주의의 낡은 여령하고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일본 내의 양심적인 학자들이 하나씩 증명하기 시작했고, 국내의 젊은 사람들 일부도 그런 새로운 사조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보다 폭 넓은 연구가 검토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길은 탄탄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그런 학설을 가지고 나와서 행세할 수 있는 길이 막연했다. 음으로 양으로 기존 사조의 지배자들은 모두 장정보 선생의 영향 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가만히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때가 올 것이라고. 옳은 일을 하겠다는데 기회가 오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기회가 이제 오기 시작한 것이다. 장정보 선생은 가고, 그를 잇는 학계의 우두머리들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아직은 흔들리지 않고 있지만, 이제부터 흔들릴 것이다. 어떤 형태로 흔들릴 것인가가 큰 관심거리다.
틀림없이 그들은 그 첫 작업으로, 왜정시대의 일본의 영향을 문제 삼을 것이고, 다음으로는 명나라의 영향 하에 있던 고려 말과 이조초기의 문제를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어지간히 이 민족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다시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정보 학파들이 해놓은 것은 일본식 이조사의 창조 외에는 없다. 패배로 연속되는 이조사의 난도질뿐이다. 김창우는 학자로써 일말의 가책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게 되어 있었다.
“역사라는 것은…상상력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야. 반드시 근거가 있어야 하거든. 근거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상상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소설을 쓰는 일이야.”
그는 젊은 후배들에게, 장정보 선생이 자기에게 자주 하던 말을 다시 써먹기는 했지만, 과연 자기는 그 근거를 찾아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 왔던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기록 외에는 더 찾아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것도 한국에만 있는 기록 밖에는. 그러나 중국에는 엄청난 기록들이 있고, 또 그 주변 국가들에게도 얼마든지 기록은 있는 것이다. 기록뿐만 아니라, 다른 역사적인 자료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당연히 찾아보았어야 하지만 그는 찾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하려면 십 년, 이십 년으로는 부족하며, 엄청난 돈과 다양한 지식도 아울러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김창우의 힘으로써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택한 가장 큰 잘못은, 자기가 몽땅 그런 일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시작의 일부조차도 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내놓고, 다른 후배들에게 그 거창한 작읍을 하도록 유도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도 그런 작업을 시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후배들에게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지 않았고, 암시조차도 해주지 않았다. 아니, 은근히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막기도 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바로 그게 고구려 민족이고, 고려민족, 그리고 한(韓)민족입니다. 그들이 청나라를 세우고 난 다음에 중국의 한(漢)민족에게 동화되어 중국인들이 되어 버렸지만, 지배자들은 우리의 조상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민족으로서 말이지요.”
언젠가 김기용이라는 사람이 김창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창우는 기가 막혔다. 그런 신채호의 사고방식이 막연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늘 말해 왔었는데도, 끈질기게 그런 사상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에 김창우는 절망감을 느꼈던 것이다.
“자네는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나?”
“그거야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마는… 그들이 썼던 언어는 중국어가 아닌 퉁구스어였단 말입니다. 한국어, 일본어하고 똑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언어란 말입니다. 이 퉁구스어를 쓰고 있는 민족은 역시 극동뿐이 아니고, 서역지방과 중동,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이란, 파키스탄, 인도 쪽에도 있거든요. 그것보다도 충남의 부여가 실은 지금의 중국대륙의 북동쪽 길림성에 부여라는 곳이 있어요. 그렇다면 그 부여족이나 이 부여족이 같은 종족이 아닙니까? 적어도 백제를 세운 사람들은 중국의 북동쪽을 지배하던 왕족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이야깁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만주족,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이 우리 민족이 아니랄 수가 있습니까? 그들은 당시 육십 만의 병력을 가지고 산해관을 깨뜨리고 중국본토로 들어가 청나라를 세운 겁니다. 그들이 청나라를 세운 다음에는 중국화해서 언어마저도 중국어를 쓰게 되었고, 초창기에 관용어로 쓰던 퉁구스 말은 그 후손들이 전연 이해하지 못하게 됐습니다마는, 그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쓰던 말과는 아주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천안문 안의 자금성에 들어가면 어느 벽의 액자에도 한문과 함께 만주문자로 글이 쓰여져 있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우리말의 언어 배열과 꼭 같다는 겁니다. 저는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마는…그뿐이 아니고….”
김기용이가 열심히 떠들고 있을 적에 김창우는 가만히 눈을 감고 듣고만 있었다. 김창우는 김기용의 말을 음미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가만히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학문적인 저항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저항일 것이다… 위로는 장정보 선생에 대해서, 아래로는 바로 자기에 대한 저항… 김창우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김창우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김기용이를 경원해 왔다. 그의 동기생인 오재필이나 이찬호보다는 그가 대학 때부터 낫다는 것을 김창우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우수함이 김창우에게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그가 학회에서 불교남반전래설을 주장했을 적에는 졸도할 것 같이 화가 났다. 김창우는, 좀 인색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반도는 아시아 대륙에 지리적으로 붙어 있기 때문에 온갖 문화와 민족이 대륙에서부터 왔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김기용이란 놈은 대담하게도 - 그건 대담한 게 아니라 미치광이 짓이지만 - 남방전래설을 주장했던 것이다.
물론 김기용이도 대부분의 종족이나 문화가 북으로부터 대륙을 따라 내려왔다는 것을 믿고 있었지만, 반드시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남방에서도 왔다, 인도네시아 쪽의 남만족이 표류해서 필리핀, 대만, 오끼나와, 일본 등지로 상륙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남방의 도서지방에 상륙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힌두족의 종교 전래도 보이는데, 처음에는 물론 힌두교이고, 나중에는 불교전래이다… 그 증거로는 인도네시아나 말레이반도, 인도지나 반도, 그리고 대만과 오끼나와에도 그와 비슷한 흔적이 보인다….
그 과학적인 근거로 김기용은 김수로 왕의 아내가 된 허황옥(許黃玉)이라는 여자가 힌두족이며, 이미 그 여자가 올 적에 불교를 가지고 왔다… 그 여자는 아들 열을 두었는데, 네 번째부터 막내까지의 일곱 아들은 모두 출가하여 부처가 되었다. 그들이 출가한 해가 서기 구십 칠 년, 그들이 지리산의 칠불사에다가 절을 지은 해가 서기 백 일 년, 성불한 해가 백 삼 년이었다. 그러니 고구려 소수림왕 이년에 불교가 들어왔다는 기록보다는 이백 칠십 일 년이나 앞에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된다. 이 절은 아직도 현지에 있으며, 이들 칠불의 어머니 즉 허황옥의 사당이 있던 불묘산은 지금 창령과 김해 사이에 그대로 산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것뿐만 아니라, 남만족의 많은 유입이 있었다는 증거로는 남해각자를 들 수 있다. 남해각자를 맨 처음으로 해독한 정인보 선생은 진시황 때의 서씨라는 사람이 이곳으로 불사조를 캐러 왔다가 파놓은 것이라고 낭만적인 해독을 하고 있지만, 서씨가 조각했다면 그는 분명히 한문글씨로 조각을 했지 이렇게 알쏭달쏭한 글씨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 주인공은 누구일까? 한문의 영향을 받지 않은 남만족의 상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이곳뿐만 아니고 남해도에는 이와 유사한 글씨가 많이 있고, 일본 구주에도 비슷한 글씨가 있다고 한다.… 그런 점을 볼 때 남만족의 유입도 결코 경시되어야 할 것은 아니다… 적어도 삼한시대나 그 이전에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그리고 대마도와 구주, 그리고 제주도를 연결하는 남만족의 한 원시국가가 있었다는 것도 상상할 수 있고, 그 지배자는 지금의 김해 부근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반도 남단에 상륙한 남만족은 북방에서 내려온 기마민족의 문화를 받아 강성해졌고, 그것을 가지고 일본의 대마도와 구주지방을 강력하게 다스린 것으로 상상된다.…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설은 그 정반대의 해석이 진실에 가깝다. 일본에 상륙한 남만족은 남만족으로만 존재하지만, 한반도에 상륙한 남만족은 북방계의 문화를 받아 훨씬 문화화하여 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김기용의 주장은 이런 것이었다. 반드시 상상력만을 동원한 소설 같은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이 소리를 듣고 장정보 선생은 몹시 화를 냈다. 자기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이고, 한 번도 입 밖에 내어 보지도 않았던 이론이었다. 김기용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김기용이를 매장시키는 작업을 했다. 김기용이가 주장하는 임나설은 - 일본의 제국주의적 사관에 의한 것이다, 임나국이라는 것이 한반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만일 존재했다면 고대사에서 일본이 한반도의 일부를 식민지화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이는 민족정기의 입장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아무 근거 없는 학설이다. 그러니 이런 학설을 주장하는 자는… 뇌병원에 가서 정신감정을 받아봐야 한다… 이런 식이었다. 말하자면 적반하장인 격이었다.
김기용은 악을 썼다. 자기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문화란 강한 데서 약한 데로 흐르기 마련이다. 고대의 문화는 대륙이 그 핵심이고, 그것이 반도를 거쳐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어째서 문화도, 힘도 없는 남만족으로 모인 일본이 대륙 쪽에다 세력을 형성할 수 있느냐, 이건 상식에도 안 맞는 이야기다, 임나국이 있었다는 근거가 희박하기는 하지만, 만일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일본에서 주장하는 그런 임나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보는 과학적인 임나국을 상상할 수 있으며, 그 임나국의 지배자는 지금의 김해근방에다 본거지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김기용은 이렇게 반박을 하였으나, 임나국이라는 말을 입 밖에 냈다는 그 이유 하나만을 가지고 김기용은 자기가 내세운 정반대의 이야기로 오인되어 꼼짝 못하게 되었다.
“매국노, 친일파와 같은 위험한 학설….”
그들은 이렇게 김기용을 매도했다.
“헛 참,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보고 어쩐다더니… 친일파들이 위대한 애국자를 보고 한다는 소리가….”
김기용은 맥이 빠져 버리고 말았다. 앞으로는 학계 진출도 어지간히 저항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히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동기생들 중에서는 가장 머리도 좋고, 연구심도 강한 사람이었지만, 여러 가지로 푸대접을 받았다. 십 년씩 시간강사를 해도 전임은 떨어지지 않았고, 학회에 나가서 발표를 하거나,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도 박탈되었다. 생활도 말이 아니었다. 간신히 외국서적을 번역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끝이 전연 보이지 않는 길다란 터널 속의 생활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장정보 대감이 죽었고, 학회는 서서히 재편성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김창우는 우선 자기의 자리를 확립하기 위해서 조교수, 부교수급을 억누르고, 강사들과 손을 잡아야 할 필요성을 학회장과의 이야기에서 긴급히 재확인하게 되었다. 자기와 세력을 견줄 수 있을 만한 가까운 후배는 가까이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빨리 성장하면 그만큼 빨리 자기가 물러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같은 또래의 시간 강사인 오재필과, 이찬호 그리고 김기용을 생각해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을 강력하게 기용하여 중간에 든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심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창우는 여러 가지로 깊게 생각을 했다. 김기용이와 오재필, 그리고 이찬호 중에서 누구를 픽업할 것인가.
그들 중에서 머리 좋은 것과 공부를 많이 한 것으로 말하면 김기용이가 단연 으뜸이고, 다음이 이찬호, 그 다음이 오재필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김기용이를 선택해야 할 것이지만, 김창우에게는 그가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미련하게 커다란 덩치하며, 지나친 개성, 그리고 스승을 존경하지 않는 마음가짐 등이, 그리고 너무 자유분망하게 공부를 하고 있는 태도 등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예 그는 이번 선택에서 우선적으로 제외될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명분은 있어야 했다. 남대문 시장의 보세가게에서 옷가지를 선택하듯이 사람을 선택할 수는 없다. 그보다도 더 단순한 동기를 가지고 선택한다손 치더라도 겉으로는 근사한 명분이 따르지 않으면 주변을 납득시키기가 곤란하다. 주변에는 다른 교수들도 있고, 학회 측도 있으며, 학생들도 있다. 학생들에게 너무 실망을 준다는 것도 문제가 전연 없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는 두툼하고 화려한 원색으로 된 한복을 입고 회전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한국적인, 지극히 한국적인 학문을 하면서, 집에서 주로 한복을 입고 있는 것은 좋았지만, 그의 책상이 서양식 책상이고, 의자 역시 서양식인 것은 좀 보기에 어색했다.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몰라도, 일단 신경을 써서 주로 한복을 자연스럽게 항상 입고 다니는 마당에서는 공부하는 방법도 한국식으로 하는 것이 서양식으로 하는 것보다는 한복에 잘 어울린다.
그러나 그는 방바닥에 앉아서 일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것도 소박한 썬퍼니처 정도의 책상이 아니라, 마치 미국에서 주문해다 놓은 것 같은 크고 호화스러운 책상을 썼다. 어느 부자 회사의 회장이나 쓰고 있는 그런 큰 것이었다. 의자 역시 그것에 맞는 것이고 보면, 조그마한 한국식 가옥에서는 거추장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지만, 그는 글을 쓸 때나 책을 읽을 때도 반드시 그 의자 위에 앉아서 했다. 이왕 그런 책상이나 의자를 밖에서 써보지 못할 바에야 스스로 그런 것을 사다가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것처럼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그의 허세와 허영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의자의 바로 곁에는 느티나무로 만든 큼직한 티 테이블이 있었다. 아내가 차를 가지고 오면 거기다가 놓았고, 그 저쪽 끝에 양털이 깔린 의자가 또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내와 함께 차를 마시거나, 손님이 찾아오면 앉도록 돼 있는 자리였다. 느티나무 책상에는 완당선생의 글씨가 조각되어 있었다.
책장에는 이중 삼중으로 책이 쌓여 있었다. 보지도 않는 세계 고전의 전집류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는 사이에, 허름한 한문 고서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문지식이 짧아서 그는 원분보다는 요새 번역해놓은 것들을 주로 읽는 편이었고, 일본서 나온 한국 관계 서적들을 비교적 많이 보는 편이었다.
그러나 대학교수라는 점을 고려해서, 서양 서적도 적잖이 많이 모아져 있었지만, 역시 그것도 한문서적이나 마찬가지로 별로 손을 대는 일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의 독서범위는 한국어와 일본어에 한정되기 때문에, 그가 읽어야 할 책의 양도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 두 가지 언어만을 가지고 전공분야를 파고들기에는 관련 서적이 너무 적다는 것을 조금 공부해 본 사람이면 능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깊은 전문분야보다는 자연히 저널리즘적인 지식을 얻는 독서를 많이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전공분야보다는 현실적인 여러 가지 사건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즉 학문하는 것보다는 사교하는 데 정신을 쏟게 된 것이다.
그는 일본 잡지를 보다가 재미나는 기사 한 토막을 얻게 되었다. 사다트가 죽고 난 다음에 그 잡지사 기자가 국제전화로 사우디의 리야드 대학에 있는 압둘라 역사학 교수를 불러 내었다. 그래서 사다트가 죽은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사다트라고요? 천 사백 년 전에 그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지요.”
“그게 아니구요. 이집트 대통령을 하던 사다트 말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천 사백 년 전의 기록 외에는 읽는 것이 없으니까요.”
“아니,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으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요새 기록은 안 읽는다니까요. 나는 천 사백 년 전의 기록만 읽고 있으니까 요새 기록은 전연 흥미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아요. 내게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천 사백 년 전의 기록에 관한 것을 물어보시죠.”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기사였다. 두 사람의 표정이나 어조에 대한 것이 전연 묘사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지만…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를 눈앞에 보는 듯 선명하게 알 수 있는 것 같았다.
“바보 같은 놈, 아무리 신문도 안 보는 대학교수라니….”
그는 이렇게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들 생각이 나는 것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대학교수라는 게 신문은 읽어서 어쩌겠다는 건가? 자기 전공이 아닌 것을 소상히 알아서 어쩌겠다는 건가? 시사나 지식이라는 것이, 하나의 상식으로 필요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 아닌가. 자기 전공을 충분히 한 다음에 여가가 있으면 하는 정도의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는 정공보다도 오히려 상식적인 것, 시사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리야드 대학의 존경할 만한 학자처럼, 자기도 천 사백 년 전의 문서만 읽는데다가 한평생을 보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대학교수가 자기 전공도 아닌 분야의 것을 이것저것 안다는 것 자체가 건전하지 못한 행위가 아닌가?
그는 한국학, 역사철학을 하면서도, 서양사를 비롯해서 동양사, 언어학, 민족학, 전통문화, 동양철학, 동양종교, 세계금석학 등을 모조리 아는 척을 해왔고, 심지어는 최근의 교육제도, 사회학까지 아는 척을 해오고 있었다. 누가 들어도 박식하게 보이고, 열심히 모든 분야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전공 분야에 와서는 깊이 알 수가 없었다. 자료가 너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반대로 너무 자료가 많아서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어서, 그저 대강대강 해오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니 양심적으로 자문해본다면, 공부한 것에 비해서 너무나 지나친 대접을 받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적지만 나보다 나은 학자들이 몇이나 되겠어… 피장파장이지 뭐. 이 나이에 든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제대로 공부했다고는 볼 수가 없으니까…꼭 나만 안 한 것이 아니고….”
그렇게 대강 대강하고서도 학자가 되었고, 안팎으로 대접을 받고 있는 걸 보면, 세상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어수룩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반드시 가장 공부 많이 한 사람이 가장 많이 출세한다는 법은 없는 거지. 가장 착한 사람이 가장 잘 산다는 법도 없는 것이구.”
그는 자신을 씁쓸하게 위로해보았다.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자라에 와 버린 것이다. 새로이 공부를 시작할 수도 없는 나이고, 또 지나치게 겸손을 부린다고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입장도 못되었다. 잘 되었거나 잘 못되었거나 간에 여태 살아온 그 방식대로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지금 양심에 가책이 된다고 하여 직장을 떠나서 집안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문제다. 정년이야 얼마 가지 않아서 자연히 올 것이고… 잘못된 궤도 위에 이왕 올려졌으니 기차가 멎을 때까지 그냥 계속 달릴 수밖에 아무 도리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그 기간이 연장되도록, 조금이라도 상처를 덜 입도록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나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젊을 적에는 공부는 나이가 들어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육체노동과 같은 중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나이가 들면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다. 가만히 앉아서 읽고 쓰기만 하면 되는 공부도 나이가 들어가니까 점점 힘들어졌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다리와 궁둥이에 피가 잘 통하지 않아서 쥐가 내리거나 재려오기가 일쑤고, 조금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목 뒤의 척추가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프다. 눈은 침침해서 돋보기를 써야 하고, 그 두께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기억력도 없어지고, 읽는 속도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조직력이나 창조력도 없어져서, 새로운 학문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공부가 안 되는 것은 고사하고, 하고 싶은 의욕마저도 줄어들었다. 공부야 말로 오히려 젊을 적에, 건강한 체력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그런 것을 다 잃어버린 뒤에야 깨닫게 되었다. 연방 눈물과 콧물만 풍성하게 쏟아져 나왔다.
“옘병, 늙으면 물이 나와야 할 데는 안 나오고 안 나와야 할 데만 나온다더니….”
그는 자기의 감퇴되어 가는 체력 때문에 모험적인 연구는 도저히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정보 선생과 자기는 근본적으로 육체적인 조건이 다른 것 같았다. 장정보 선생은 거의 죽을 무렵까지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하던데… 그는 그렇게 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장정보 선생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 그는 여러 가지로 학문 아닌 것까지 많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생들에게 실력 없는 선생이라는 말도 듣지 않아야 하고, 후배 교수들에게도 꼼짝 못하는 위엄을 가지고 군림해야 한다. 그러려면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기기보다는 자기의 힘으로 다시 바둑을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견제할 것은 견제하고, 자기편을 만들 것은 만들어야 했다. 그는 노심초사 - 머리가 복잡했다.
아내가 유자차를 해가지고 들어 왔다. 의례히 차를 가지고 오면 둘이서 차를 마시면서 잠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다. 신통하게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닌데도 아내는 내조를 잘 해서 남편이 열심히 연구하도록 최선의 서비스를 했다. 아내는 마치 이조시대의 아낙네들처럼 예의범절을 지켰고, 그것으로 품위 있는 보람까지 느끼기도 했다.
“거 말이오…이번의 전임문제 말인데…걱정이란 말이오.”
그는 차를 마시면서 아내를 건너다보았다. 아내는 무슨 말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항상 남편의 일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세 사람의 강사 가운데서 한 사람을 전임으로 해야 하는데… 김기용이와 이찬호, 오재필 말이오….”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지요.”
아내는 그제사 남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글쎄, 서로 비슷비슷해서…몽땅 다 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학교 사정이…한 사람을 뽑아야 한단 말이오. 당신이 나라면?”
“글쎄요…실력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남편이 다른 사람의 의견보다는 자기 의견을 항상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내는 조심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력이야 김기용이가 단연 났지만… 당신이 아다시피 그 녀석은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그렇지요. 선배 교수를 하극상한다면… 학문보다야 그게 더 중요한 일이겠지요. 자기도 다스리지 못해서야 어찌 학문의 길로 갈 수가 있겠어요?”
아내에게도 김기용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은 고사하고, 어떤 때는 마치 주정뱅이처럼 굴기도 하고, 같이 장난하자고 덤벼들기도 해서 아내는 여러 번 질겁을 한 일도 있었기 때문에 그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찬호가 낫지 않을까요?”
아내는 역시 조용히 말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녀석은 너무 정치꾼 같아서…누구에게나 그렇게 잘 하고 있으니…어디 그 진실을 알 수가 있어야지. 예의범절이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충성심이랄까, 의리랄까 하는 것도 문제란 말이오.”
김창우는 그게 마땅치 않았다. 지금은 자기에게 예의 바르게 하지만, 필요한 대상을 만나게 되면 그런 범절이 반드시 그쪽으로 가고 말 것이다. 사교에 능하고 아첨에도 능할 뿐 아니라 정치적인 쎈스도 있어서, 자기에게 유리한 기회나 사람을 한 사람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자기에게 의리를 지켜줄 것인가?
“그런 점도 있겠군요.”
“결국 그렇게 보면 오재필 밖에 없는데… 이 녀석은 약간 세속화한 느낌이 들어서…그게 허긴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뭐랄까…민주주의 교육의 탓이랄까, 좋게 말하면 서민화 했다고 할까…그런 것이기는 하지만…허긴 학자라고 해서 너무 도도하면 오늘날의 학생들은 괜히 경원하기만 하고 오히려 좋지 않겠지. 오군과 같은 사람이 미국식의 학자타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기엔 어떻소?”
“글쎄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어련히나 하겠어요? 당신은 항상 깊이 생각하고 결정하시니까.”
“음, 내 결정은 비교적 옳았다고 할 수 있지? 지난 경험에서 말이오?”
김창우의 입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요.”
입에 바른 소린지, 아니면 정말 옳다고 느껴져서 그런지 알 수가 없었지만, 아무튼 별로 깊이가 없는 대답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오군에게 전화해줘요. 잠시 들리라구.”
그는 찻 쟁반을 들고 나가는 아내의 등을 향해서 말했다. 전화통은 이쪽 방에도 있었지만, 그는 가급적이면 받는 전화 외에는 모두 아내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그래야 서로가 위신이 더 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재필은 한 시간이 되기 전에 헐레벌떡 달려 왔다. 그는 언제 보아도 지극히 현세주의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 김창우는 거의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항상 그렇게 느껴지고 있었다. 철저한 현세주의자적인 태도였다. 무엇이라고 딱 꼬집어서 말할 수 없는 막연한 것이기는 하지만, 현대의 물질생활에 그는 흥건히 담가져서 그것을 매우 재미나게 여기고 있는 사람 같았다. 김창우에게는 맘에 들지 않는 점이지만, 요새 젊은이들은 다 그런 것이려니 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모님께서 부르셔서….”
김창우는 “선생님께서 부르셔서”보다는 “사모님께서….”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오재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말을 끄집어내면, “이 사람아, 내가 언제 불렀나?”하는 따위의 거북한 대답은 듣지 않게 되었다. 일부러 불러 놓고는 마음이 달라지면 용건을 말하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음, 아직 확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부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만, 우리 집 사람이 서둘러서…. 이왕 자네가 왔으니 함께 의논 좀 하세…. 여보, 여기 차 가져와요.”
김창우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마루 쪽에서 아내가 대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차가 들어오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실은 말이야 사정이 좀 있어서… 자네들 중에서 전임으로 한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그는 지극히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소리는 오재필의 귀에 찡하게 올려 왔다. 다이나마이트가 터지는 소리 같았다.
“김기용군과 이찬호군이 모두 동기생이지?”
“그렇습니다마는….”
“자네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어떤가? 아무래도 자네가 잘 알 테지. 친구들이니까. 내가 보는 눈은 따로 있지만….”
“글쎄요, 제가 보는 눈이라고는 신통치 않아서… 선생님께서 보시는 것이 정확하시지요.”
그는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그들은 한 마디로 매도를 해서 그들에 대한 매력을 송두리째 떨어지게 했으면 하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너무 직접적으로 한다는 것은 나중에 감당하지 못할 사건을 일으킬 염려도 있고 해서 그는 입을 아주 조심스럽게 놀렸다. 또 선생의 마음을 정곡으로 꿰뚫어 볼 수 없기도 하고….
김기용이와 이찬호는 오재필의 생활을 다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재필의 지나치게 돈과 여자를 좋아하는 생활을 가끔 비판하기도 해서 그는 그들을 은근히 경원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러니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들을 되려 실컷 비판해주고 싶었다. 비록 자기의 생활이 부도덕한지는 모르겠다. 허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도 아니고 땅에서 불시에 솟아난 사람도 아니다. 이 세상에 나서 이 세상에서 자라났다. 그라나 자기가 부도덕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그렇게 자기를 교육시켰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자기에게만 그 책임이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겉으로 부도덕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그런 여건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런 여건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처럼 했다면 분명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부도덕하다는 것은 어느 개인에게만 한하는 것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인간은 똑 같은 것이다…라고.
그러나 말재주가 없는 오재필로서는 공격적인 그들과 그런 논쟁을 한 번도 전개할 수가 없었다. 해봤자 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오재필은 그들과 만나게 되면 항상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말대꾸를 않는 것이다. 그저 씩 웃을 뿐….
그는 몹시 입이 근지러웠다. 그러나 꾹 참았다. 남을 비판하는 욕설은 효과가 날 때는 무섭게 나지만, 역효과가 날 때도 가끔 있는 것이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김창우의 눈치를 살폈다.
“김기용이나 이찬호도 대단히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민족학 쪽에는 훌륭한 새 일꾼들이라고 할 수 있지. 허지만 김기용은 엉뚱하게도 임나설의 일부를 승인하는 것 같은 발표를 한 사람이라…말하기가 좀 어렵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이찬호는…사람이 사교성이 …많은 선배들이 이끌어주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기 때문에 구태여 이번 기회가 아니더라도… 물론 이건 내 생각이기 때문에 조직사회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혼자서 어떤 결정을 할 수는 없단 말이야. 다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나로서는 세 사람 다가 함께 채택이 됐으면 좋겠다, 하는 거지만, 그게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단 말일세. 자네보다도 그들의 하나가 선택될 수 있는 그런 확률도 대단히 많단 말일세. 그러니 이런 말을 자네에게 한다는 것은 시기상조의 것이지만…이왕 말이 나왔으니, 그저 의논하는 정도의 것으로 넘겨 두기로 하세.”
“네,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아직은 직장도 있으니까 생활 걱정 같은 것은 안 해도 되니까요. 선생님이 좋으시다면 저는 어떤 결정이라도 따르겠습니다.”
“그래. 알겠어. 그 친구들 만나더라도 이런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해두게. 차나 들자구.”
그들은 이야기를 중단하고 손을 찻잔으로 가져갔다.
오재필은 김창우가 하는 말의 본의를 얼른 납득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째도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김창우 선생이 자기에게 은덕을 베풀어주면 고맙게 받을 뿐이다. 다만 자기가 그 일을 눈에 나지 않게 잘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그는 공부라고는 거의 하지 않고 있으니까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형식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기술은 조금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학계에 뭐, 달라진 건 없던가? 장정보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그거야 선생님께서 더 잘 아시죠. 뭐.”
“친구들의 근황 같은 거라도….”
그는 한가하게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김기용이가 요즘 새로운 논문을 하나 쓰느라고 열심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김기용 군이? 설마 접대 같은 그런 것은 아니겠지?”
“전연 내용은 모르겠습니다.”
“어디다가 발표한대? 학회라고 하던가?”
“글쎄요.”
그거라면 원가가 접수되기만 하면 학회장에게 그 내용을 물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잡지나 신문이라면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다. 장정보 선생이 돌아가신 오늘날, 그들의 힘은 지극히 줄어버리고 만 것이다.
“소설을 쓰듯이 하면 안 되는데…학자란 항상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에다 두고 해야 하거든. 아무리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방향이라도 근거가 그쪽으로 나 있다면 도리가 없는 거야. 연구를 하지 않으면 몰라도, 김군은 그런 데가 있어서 탈이야.”
“그렇게야 하겠습니까? 지난 번 경험도 있고 해서, 그렇게 엉뚱한 소리는 안 할 겁니다.”
“…나도 김군이 주장하는 정신이나 철학이 못마땅한 것이 아니야. 당연히 민족주의가 그런 진취적이고 거시적인 철학을 가져야 하겠지. 할 수 있으면 그의 말처럼 소국주의를 탈피해서 전 세계에 우리의 의지가 뻗어나갈 수 있도록 돼야지. 그러나 과거를 가지고 연구하는 데는 그런 선입관만 가지고서는 곤란하단 말이야. 우리의 역사적인 기록이 그렇지가 않는 것을 어떻게 하나? 누가 자기 나라의 과거가 신통치 않았다고 인정하기를 좋아하겠나? 허지만 우리는 당나라의 영향, 명나라, 그리고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 사실을 은폐할 수는 없단 말일세. 기분만 가지고서, 김군의 기분은 알지만…그렇게 쉽지 않단 말일세.”
“그도 철이 들 나이가 됐으니까요. 엉뚱한 발언은 하지 않을 겁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도 자연스럽게 기회가 닿으면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마는….”
김창우는 확실히 약간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하면 그가 김기용에게 대한 생각이 어떻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좀 있어서요…. 갑자기 사모님이 오라시기에 와 있는 사람을 그냥 집에다 두고 왔으니까요. 연구실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김창우의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꾸벅 그에게 절을 했다.
김기용은 세수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옷을 주워 입고는 원고뭉치를 겨드랑이에 끼었다. 방구석에 아내가 식탁을 마련해 놓고 외출을 해버렸지만 그는 별로 밥 생각이 나지 않아서 숟갈을 들지 않았다.
그는 간밤에 지나치게 과음을 한 것 같았다. 여러 달 동안 준비를 해오던 논문 하나가 끝이 나서 어떻게나 홀가분하고 기분이 좋은지, 일부러 이쪽에서 친구들을 찾아다니면서 마구 퍼마셨던 것이다.
“이제 나의 논문이 계속적으로 발표될 거야. 이것이 다 발표되면 우리나라의 과거는 완전히 재평가를 받는 셈이지. 우리의 질긴 열등의식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될 거야. 학계에는 충격적인 영향을 받겠지.”
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일방적으로 떠들고 있었다.
이찬호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는 항상 몸가짐이 반듯하고 온건했기 때문에 김기용이가 미친놈처럼 기리기리 지랄발광을 해도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이조시대부터 고려시대, 그리고 삼국시대,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느냐, 아니면 상고시대부터 이조시대로 거슬러 내려오느냐 하는 문제만 남았는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그는 시뻘게진 눈을 마귀할멈처럼 이상하게 뜨면서 이찬호를 노려보았다.
“…글세, 어떤 연애편지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뭐라고? 연애편지라고? 오천 년 만에 하나나 둘쯤 날까말까 하는 천재적인 학자가 쓴 논문인데 그걸 연애편지라고? 네 이놈, 나를 뭘로 알고?”
그는 식탁 너머로 이찬호의 멱살을 긁어 잡았다.
“말로 해. 폭력은 사양하고. 자네 성격으로 봐서 어떤 논문인지 짐작은 가지만…네가 논문 내용을 자세하게 내게 이야기해준 일이 없었어. 실은 좀 궁금하기도 하구 말이야. 설마, 지난 번 임나설과 같은 엉뚱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겠지?”
“그때 그 일을 기억하지? 그리고 내 논문도 읽었지? 정말 솔직하게 어떻게 생각해? 너는?”
그는 이찬호의 멱살을 놓았다.
“좋은 착상이라고 생각해. 근거가 좀 미진하기는 하지만 - 상고사의 근거라는 것은 항상 미진한 법이지만 - 틀림없이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
“내 말은 그 뜻이 아니야. 그들이 임나국을 가지고 나를 어떻게 모함했던가를 아는가 말이야?”
“…나는 네 편에 든다기보다도 오히려 공정하게 말해서…그들이 자네를 모함한 것은 틀림없어. 언젠가 기회가 오면 내가 해명해 줄려고 해. 친구라기보다도 학자로서 말이지.”
“그래. 역시 너는 똑똑하다. 사실대로 그걸 판단할 수 있다니. 이제 그들의 몰락은 시작되고 우리의 시대가 오는 거야. 학문이 똑바로 우리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그런 시대가 오는 거야. 나는 그걸 확신해. 나는 제일 먼저, 이조시대의 부식되어야 할 패배주의에 대한 논문을 발표할 작정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나는 임진란의 기록을 보고 이상한 것을 발견했어. 어째서 전쟁을 치루는 마당에 지는 기록은 소상하게 나 있으면서 이기는 장면의 기록은 슬쩍 지나가버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러나 임진란이 승리한 건지, 패배한 건지 똑똑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게 승리냐, 패배냐? 이것도 저것도 아니냐? 나는 말이야 고대 희랍의 사라미스 전쟁의 기록을 보면서, 그게 우리의 임진란하고 대단히 흡사하고, 사라미스 해협의 싸움은 우리의 노량싸움하고 대단히 흡사하다는 것을 느꼈어. 그들은 그걸 민족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승리로 보고 있는데, 우리는 전연 그런 감정을 가지지 않고 보고 있단 말이야. 이상하지 않아? 그렇지? 나는 말이야. 임진록과 혹룡록(黑龍錄)을 보면서 깨달았어. 임진란의 기록 역시, 그리고 그 해석 역시 뭔가가 잘못돼 있다고. 그래서 나는 모든 자료를 가지고 다시 분석하고 해석을 하기 시작했어. 그런 가운데 느낀 것은… 우리의 패배주의가 역시 장정보 선생의 일단들에 의해서 고양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이전에 기록을 담당한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전연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열을 내어 말하고 있는 것을 이찬호는 담배를 피우면서 조용히 듣고 있었다.
“고려사에도 그런 문제가 많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삼국사기에도 역시 그런 왜곡된 생각 때문에 사실을 사실대로 쓰지 못한 부분이 많이 있다고 생각해. 고려말 이조 초에 이런 역사서들이 다 만들어지는데… 그때 자료를 정리하던 사람들은 이미 유교사상에 철두철미하게 물이 든 학자들이야. 그러니, 그들의 눈으로서는 중국을 가장 위대하게 보고 다른 변방의 민족은 중국 사람들이 보듯이 모두 오랑캐로 치부해버렸단 말이야. 우리 스스로를 오랑캐로 만들어버렸어. 안 그래? 적어도 고려 인종 때 김부식이가 역사를 뜯어고치기 전까지는 우리의 임금은 모두 황제로 기록되었으며, 상고사만 하더라도 백십 구 권이나 되는 것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단지 다섯 권만으로 축소해버렸지 않았나? 사대주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겠어? 후세 사람, 특히 장정보 선생 같은 이는, ‘김부식이가 아무 근거도 없는 황당무계한 자존주의 역사를 근거 있는 것만을 추려서 과학적으로 만든 것이다’라고 그를 변호했지만, 그야말로 김부식 자신이 사실을 왜곡하여 만든 삼국사기가 오히려 더 근거로서는 희박하다 하지 않을 수 없어. 안 그래? 근거를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만들었으니까 더 근거가 없는 거지. 너 단기고사(檀奇古史)라는 책을 읽었겠지? 그 책의 서문을 쓴 신채호 선생의 글도 읽었겠지? 그리고 그분의 상고사도 읽었겠지? 그게 바로 대야발(大野勃)의 단기고사를 근거로 만들어낸 논문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우리의 역사가 상고사부터 중세사, 근대사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엉터리 없는 것으로 날조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잖아? 우리는 위대한 민족이야. 또 앞으로 더욱 위대하게 되기 위해서 위대한 과거를 다시 조명하지 않으면 안 돼. 나는 바야흐로 그 작업을 하려고 해. 내 목숨이 남아 있을 때까지, 어떤 고난이 있어도. 대야발이 만든 역사와 신채호 선생이 만든 역사 정신을 받아들여, 우리의 역사를 이조시대부터 상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모조리 재편성을 하려고 해. 그 대체적인 줄거리가 되는 세 편의 논문이 이미 만들어졌어. 차례차례로 발표할 생각이야. 어때, 내 생각이? 우리는 길림성 부여에 자리 잡은 퉁구스 계열의 부여족이야. 신라족도 아니고, 백제족, 고구려족도 아닌, 보다 큰 부여족이야! 중국의 북동쪽까지 지배한 부여족, 그 부여족이 길림성의 부여 부근에서 한반도 중부의 부여에까지 미치고 있었어. 절대로 약소하지도 않았고, 패배주의자들도 아니었어. 다만 왜놈들이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야. 우리가 문화재가 뭔지도 모르는 구한말 가난할 때 왜놈들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좋은 것은 모조리 빼앗고 훔쳐간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신마저 훔쳐가 버렸어. 그리고는 나쁜 것만을 남겨놓고, ‘이게 바로 조선민족이다’하고 낙인을 찍고, 장정보 선생 일당을 앞잡이로 내세워 한민족의 열등의식 조장에 혈안이 되었던 거야. 뻔하지 않나? 너도 그렇게 생각했지? 오래 전부터?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러나 장정보 선생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고 십여 년을 기다리고 있었어. 이제 그 악마는 갔어.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다시 찾아야 해. 안 그래? 나는 그 작업을 한다구.”
“역시 멋진 연애편지야.”
“뭐라고? 이 자식이….”
김기용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연방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술이 취했는지, 자기 철학에 취했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밤이 깊도록 마시고 또 마셨다. 김기용이가 벼라별 발광을 해도 이찬호는 조용히 반응할 뿐, 함께 흥분하거나 반박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학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친구이기 때문에 끝까지 술자리를 같이 했었다.
그라나 김기용은 이찬호와 어떤 말을 간밤에 주고받았는지는 전연 기억할 수가 없었다. 다만 자기 생각을 강변하느라고 악을 썼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별로 미안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찬호를 욕하거나 못살게 군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차 삼차로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에는 오재필의 연구실이라는 아파트까지 갔다. 오재필은 제자였다는 젊은 아까씨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놈은 여학교 선생질을 한 경력이 있어서 아가씨들이 주변에 버글버글했다.
“개새끼! 장정보 나물의 손자! 손자 장정보 나물!”
그가 그렇게 악을 썼던 기억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장정보 선생이 뿌린 타락한 씨가 이제 여기서 싹트는 것을 볼 수 있도다! 열매 맺는 것을 볼 수 있도다!”
그렇게 그가 악을 쓰자 이찬호가 자기의 옆구리를 찌른 것이다. 그제사 그는 말을 좀 지나치게 했다는 것을 술기운에서도 약간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왕 내친걸음이라 그에게 퍼붓고 싶은 욕설을 맘껏 퍼 붓고 말았다. 오재필은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눈에서 무한한 분노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학회 사무실이 있는 관훈동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 장정보의 쓰레기….”
그는 가래침을 아스팔트 위에다가 큼직하게 뱉았다.
“분명히 그놈은 출세할 거다. 전임도 그가 먼저 될 것이고 학계에서도 그가 먼저 성공할 것이다. 장정보 삼 세니까. 그러나 나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 배를 갈라서라도 내 진실을 세상에다 보이고 말 테다!”
그는 누구와 싸움을 하듯이 이를 악다물고 있었다.
해동학회 사무실은 새로 지은 아담한 골동품 가게의 이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장정보 선생의 건물이다. 학회운영비도 대부분이 장정보 선생과 그의 지인들이 조달했었다. 사무국의 직원들도 장정보 선생이 월급을 지불했다. 이제는 누가 그것을 떠맡을지 알 수가 없었다.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니, 사무국장이 안경을 코 아래 내려뜨리며 김기용을 건너다보았다. 이미 육십에 가까워진 노인이었다. 장정보 선생의 집에서 집사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다.
“학회지에 발표할 논문을 가지고 왔는데요?”
그는 숨 가쁘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의외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다시 안경을 위로 끌어 올리며 책상 위에 놓인 고서를 훑어 내리고 있었다.
그는 원고를 끄집어냈다.
“…미안하지만, 그 논문을 받을 수가 없어요.”
사무국장은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네?”
“학회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는데요…김 선생의 그 원고는 받지 말라고 했어요. 자세한 것은 학회장님에게 여쭈어보시면… 나는 학회장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은 할 수가 없으니까….”
그는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이야기했다.
“허지만 전에는 그렇게 해주기로 약속이 된 것 같은데요?”
“글쎄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나 봅니다. 회장님에게 말씀해보세요.”
“내 원고가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실텐데… 회장님께서는?”
“저도 모릅니다. 내용이 어떻든 간에 받지 말라는 것은 받지 않을 수밖에요.”
“알겠습니다.”
김기용은 논문뭉치를 다시 봉투에다 쓸어 넣었다. 사무국장이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장은 분명히 임나설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혹시 그런 일이 재발된다면 또 한바탕 학계에 파문을 던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때는 회장의 자리마저도 위태롭게 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걸 겁을 내는 것이겠지. 설령 내용이 다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쓴 것이라면 그런 혁명적인 요소가 다분히 들어있을 거라고 짐작한 것이겠지. 사실은 그러니까. 그렇다면 학회지에 발표해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회장의 입장에서는 당연하지, 아주 옹졸한 회장의 입장에서는. 학회는 순수한 학문을 위해서 모인 조직이지만 일반 상식을 넘는 그런 연구는 근본적으로 환영을 받지 않는다는 강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학문의 일방통행 - 자유분방한 그런 학문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미 권위자들로 해서 만들어진 방향으로 답습만 해야지. 그 상식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연구가 발표될 수는 없었다. 이건 학문의 폭력이다. 장정보 선생이 마련한 학문의 폭력이지만, 그가 사라진 지금에도 그런 상식은 그의 후계자들로 인해서 그대로 계승되어 오고 있단 말인가? 그렇게 일방통행이어서, 학문이 어떻게 발전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학문은 상식을 따를 수도 있고 그걸 뒤엎을 수도 있다. 어떻게 됐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진리냐, 아니냐는 것만이 문제가 돼야 하는데, …진리는커녕 무조건 선배의 이론을 따른다는 식의 학문만을 받아들이고 있으니….
김기용은 주먹을 불끈 한 번 쥐었다가는 스르르 놓아버렸다. 송장이 다 되어가는 영감, 그것도 장정보 선생의 주구로, 아무 가치도 없이, 개성도 없이 살아온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귀한 주먹으로 한 대 후려갈긴다는 것은, 그야말로 주먹에 때묻을까봐 겁나는 일이었다.
“그래요? 잡지야 학회지뿐만이 아니고 얼마든지 있으니까…알겠어요.”
김기용은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리고서는 사무실을 나왔다.
그는 심한 저항감을 느꼈다. 누가 어떤 경로로 어떻게 말해서 회장의 부정적인 태도가 취해졌는지, 그걸 캐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캐봐야 무얼 할 것인가. 똥갈보 같은 놈들이 모여서 쑥덕거려서 한 일이니 대장부가 그걸 가지고 따진다는 것은 천한 일이다.
그러나 삼백 매가 넘은 이놈의 원고를 어디다 팔아먹는단 말인가? 팔아먹는 것이 아니라 원고료는 한 푼도 못 받는다고 하더라도 발표만 할 수 있어도 좋은데…. 우리나라에는 해동학회지와 유사한 잡지가 하나도 없다. 그러니 학회지에 발표하지 못하게 되면 어디에 가서 활자화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자비로 출판을 해서 돌린다면 몰라도….
그는 한참만에야 신문사의 월간부에 있는 친구 생각이 났다. 혹시 그 곳이라면 학계의 기존적인 분위기와는 관계없이 원고를 실어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한달음으로 그리로 달려갔다. 승강기도 타지 않고 계단을 뛰어올라, 들숨 날숨의 구별도 없는 가쁜 숨을 쉬면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마침 재식이라는 대학의 동창생은 교정쇄를 보느라고 장신이 없었다.
“있었군.”
그는 조심스럽게 숨을 죽이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니가 어쩐 일이야.”
높은 코를 추켜올리며 말했다.
“응, 지나다가 들렸어.”
“저기 가 앉자.”
그는 볼펜을 놓고, 담배갑을 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의 한쪽 구석에는 응접세트가 있었다. 그들은 그쪽으로 갔다.
“재미 있나?”
김기용은 몸집이 작은 재식의 어깨에다 팔을 얹어놓으며 말했다.
“그저 그렇지 뭐.”
그는 자기 상사가 앉아 있는 쪽으로 약간 시선을 돌려 보이며 조용히 대꾸했다. 상사의 잔소리 때문에 별로 행복하지는 못하다는 시늉이었다.
“아직 전임이 안 되었든가?”
“그래, 십 년 시간강사지. 죽을 지경이야.”
“학자 지망생도 너무 많아서. 학자뿐이 아니고… 어디에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아우성이지 뭐. 자리는 없고, 하겠다는 사람은 많고… 그러니 아사리 판이라….”
“그래.”
재식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동판매기로 가서 커피 두 잔을 뽑아가지고 왔다.
“낮 시간에 이렇게 찾아온 것은…뭐, 할 말이라도?”
“그냥 지나다가 들렸다니까. 헌데 말이야…잡지에서 원고를 싣는 것은 어떤 형식으로 하나? 가령 자격 같은 것도 있는 건가?”
김기용은 재식에게서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뭐 이렇다 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고… 흥미 있는 원고라면… 왜?”
“아니, 내가 원고를 좀 쓴 게 있는데 말이야… 발표할 수 없을까 해서….”
술만 들어가면 기고만장해지는 기용이지만, 맨 정신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음.”
“네가 좀 처리해 줄 수 없니? 너희 잡지에 말이야….”
그러면서 재식의 눈치를 살폈다.
“특별한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학자라면 적어도 부교수나 조교수급은 돼야 부장에게 설명하기가 좋단 말이야. 그렇잖으면 위험부담이 많아지고….”
재식은 더욱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부장에게 들려서는 안 된다는 식이었다.
“…그렇겠군.”
기용은 원고를 끌어내다 말았다.
“하도 원고를 실어달라고 가져오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산떼미처럼 쌓여 있거든. 그러니 여간 곤란하지 않단 말이야. 그리고 본인들이 스스로 써 가지고 온 원고는 우리가 편집계획상, 실리기가 곤란한 것들이 많지. 이쪽에서 그런 계획을 짜 가지고 부탁을 해서 쓰는 원고는 좋든 나쁘든 실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곤란이 많다구.”
재식이는 조용하나마 설득력 있게 기용의 부탁을 거절하고 있었다. 기용은 그 말이 대단히 설득력이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자기 청을 거절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만일 자네가 편집부장이 되었다면?”
그는 말을 약간 비약시켜 보았다.
“그렇다면…약간의 재량권은 있겠지.”
“지금은 너무 졸병이라서 그런가? 그래도 차장쯤은 되지 않았나? 벌써 십 년 가량은 됐을 텐데….”
“아직. 이 회사는 승진이 늦어서. 위엣 사람들이 통 나가지 않으니까.”
“자네가 부장이 될 때까지 논문을 발표하지 말고 기다린단 말이지? 그 안엔 내가 훌쩍 날라서 조교수쯤 되면 몰라도.”
“그런 여러 가지 악조건이 있다고 하더라도 논문의 내용이 기가 막히다면 실어줄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어? 한 번 읽어봐 주기나 해도 되지 않아? 마땅찮으면 실어주지 않아도 되니까.”
그는 다시 봉투를 뒤적였다.
“아냐. 남의 귀한 원고를 무작정 가지고 있으면 되니? 내가 부장하고 일단 상의해봐서, 너에게 연락해줄게.”
“음….”
김기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의향이 뚜렷한데 자꾸만 해달라고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사람의 가치만 자꾸 떨어질 뿐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들은 더러 만나나?”
재식이도 미안해서 따라 일어났다.
“응, 가끔 재필이나 찬호 정도지만.”
“재필이는 부자가 됐다며? 연구실로 큼직한 아파트를 한 채 구했다더구만. 굉장한 연구를 하고 있는 모양이지? 새 학기부터 전임이 된다는 말이 있더구만. 사실인가?”
“그래? 나는 금시 초문이야.”
“한 학교에 있으면서도 모르나?”
“글쎄, 가끔 만나기는 하지만, 내막으로 돌아가는 내용은 서로가 알지 못하는 게 많지.”
김기용은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대꾸했으나, 오재필이 자기를 물리치고 전임이 된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헛소리겠지. 헛소리겠지… 그놈의 김창우 교수에게 열심히 따리를 붙이고 있지만, 김창우 교수가 나를 제끼고 그를 먼저 선택할 리가 있나. 실력이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나무나 잘 알고 있을 텐데… 내가 에티켓이 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다른 뜻이 있다기보다도, 하도 답답하니까 부려보는 단순한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아무튼 그는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에레버터 앞에 오더니 그는 김기용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 됐어.”
“아니, 미안해.”
에레베터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 원고가 전부 얼마나 된다고?”
“이건 삼백여 매 되지만, 다 합치면 천오백 매 가량은 될 거야.”
“그럼 책으로 한 번 내보는 게 어떨까? 출판사에다 이야기를 해서 말이지….”
“알겠어. 또 오지.”
에베베타 문이 활짝 열렸다. 그는 그 궤짝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아, 더러운 기분이구나!…… 허지만 결코 실망은 안 해. 절대로 지지는 않을 테니….”
그는 궤짝 안을 휘둘러보며 커다랗게 중얼거렸다. 만일 재식이의 말대로 오재필이가 쏜살같이 전임이 되고, 자기는 그냥 쳐져서 시간 강사 노릇이나 하고 있다면… 챙피해서 학교에 붙어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면 나는 무얼 한다? 원고가 팔리는 것도 아니고… 야, 참 막막하구나… 집에 앉아서 아이들이나 봐? 이 커다란 덩치에…부엌띠기 노릇이나 해서야… 아내를 볼 면목이 없다… 커다란 짐승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덩치가 크니 고독감도 더 큰 것 같았다.
에레베타 문이 열리더니 몸이 저절로 밖으로 밀려나는 것 같았다. 그는 반질반질한 복도를 지나 아스팔트 거리 위로 나갔다. 사람들이 벌떼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진 것 같았다. 한참 동안 그는, 거리에서 팔고 있는 주간지 표지의 여자 얼굴을 무심코 들여다보고 서 있었다. 예쁘고 선정적인 모습이었다.
“그래. 오재필에게로 가자. 그의 연구실로. 거기로 가면 양주도 있고, 어쩌면 여자들도 있을지 몰라. 마시고 실컷 떠들어 보자. 그러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눈치 챌 수도 있을 모른다. 나는 세상이라는 것을 전연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그런 면에서는 재필이가 단연 나보다 났다. 김창우 교수가 그를 택한 이유도 짐작이 간다. 그에게 가면 분명히 할 말이 많아질 거다… 이럴 때는 심심치 않게 싸울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는 것도 여간 좋은 일이 아니니까.”
그는 그제사 정신을 차리고, 장난기 어린 기분이 되어 오재필의 연구소로 가는 버스 정류소를 찾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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