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경주시민의 날 기념 청소년 백일장>
고등부 산문부문
<최우수상>
벚꽃 지던 날
최형욱 (문화고 1-2)
올해도 결국 불합격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홀로 터벅터벅 포장마차로 향했다.
고시합격이라는 네 글자를 바라고 재수를 한 지도 벌써 2년째, 간발의 차이로 불합격을 당한 억울함에, 결국 집에도 술떡이 되어 돌아갔다.
집에서 날 반기는 사람은 어머니였고, 같이 사는 삼촌은 한심하다는 듯이 눈총을 쏘았다.
"결과는 어떻게 됐니?"
어머니가 물어보시자 삼촌이 대신 툭 잘라먹었다.
"형수님, 애 꼴을 보세요. 술떡이 되어갖고 온 꼴을 보면 모르겠어요?"
나는 고개를 휙 떨구고 말았다.
삼촌이 더 독설을 내뱉으려고 숨을 들이쉬자 어머니가 막으셨고, 난 내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1년형을 더 선고받은 착잡한 기분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창문 밖에는 앙상한 가지의 벚꽃나무와 그것을 축축하게 적셔가는 한바탕 비 뿐이다.
다음날부터 맘을 다잡고 다시 책을 펴 공부를 시작했다.
작년과 다름없는 책을 보는 일은 고역이었다.
시시각각 닥쳐오는 답답함들 때문에 밤에 몰래 울음을 삼키거나, 술로 밤을 지새우는 날도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그 때 즈음이었을까?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괴로움을 뿜어내는 일마저 벌어지고 말았다.
어릴때 암을 앓았던 삼촌의 폐에 암이 재발한 것이다.
하지만 병원에 가진 않았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 고시가 코 앞이었다.
그냥 어머니를 통해 안부를 묻고 고시에 임했다.
다시 들어선 고시장은 마치 전쟁터처럼 단호했고, 또 조용했다.
고시가 끝나자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험 잘 봤니?"
"아니요...."
"그래, 그건 됐다. 얘야. 너 고시보고 있을까 봐 말 못했는데, 어서 병원에 오너라. 니 삼촌이 위급하시단다. 유언을 남기시겠대. 널 아직 기다리고 계신다."
나를 기다리신다는 말은 조금 이상했지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병원에 뛰어 들어갔다.
그곳엔 삼촌이 흐릿한 눈으로 담배를 피우시며 누워계셨다.
"폐암이시잖아요."
"얘야, 고시 잘 봤냐?"
"네?.....아니요....."
"됐다. 이제껏 나한테 제대로 웃어주지도 못했구나."
삼촌은 콜록거리시며 마지막 유언을 토해냈다.
"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사실은 진심으로 니가 그러길 여지껏 바라왔단다."
삼촌의 눈은 죽음과 싸우시고 있었다.
"난 널 믿는단다. 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하거라."
삼촌의 눈이 감김과 동시에 팔과 담배가 떨어졌다.
창 밖에는 벚꽃이 지고 있었다.
나와 삼촌 역시 지어갔다.
며칠 뒤 고시 불합격 소식을 받게 되었지만, 맘은 오히려 편안했다.
벚꽃이 지고, 삼촌의 생명마저 지던 날, 내 맘의 벚꽃은 오히려 피어나기 시작했다.
손에 쥐어진 꿈이라는 희망과 함께.
<우수상>
벚꽃 지던 날
손희애 (경주여고 3-1)
"이야 - ! 눈이다. 눈! 따뜻한 눈이다!"
벚꽃이 유난히도 많이 흩날리던 어린 날의 4월.
벚꽃이라는 것을 난생 처음 본 나의 눈에 그것은 꽃이라기 보다는 따스한 함박눈 같아 보였다.
그런 나를 보고 아빠는
"저건 눈이 아니라 벚꽃이라는 꽃이야. 예쁘지?"
그렇게 새하얗고 소복소복 쌓이는 것이 꽃이라는 말에 나는 눈이 동그래져서는 "우와- 저게 꽃이야? 그럼 나는 눈같이 생겼으니까 눈꽃이라고 할래!"
아빠 엄마가 아무리 꽃이름을 가르쳐 주려고 해도 그 날 이후로 난 언제나 벚꽃을 눈꽃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아빠 엄마의 손을 꼭 잡고 그 따뜻한 눈이 흩날리는 거리를 걷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했다.
시간이 흐르고 내 마음 속의 눈꽃이 무릎 정도까지 차올랐을 때 쯤이었을까.
마음 속에는 따뜻한 눈꽃이 아닌 차가운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아빠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다니던 여자아이는 어느새 말끔한 교복을 입은 여고생이 되었고, 내 머리를 빗겨주던 교운 엄마의 손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추운 겨울 바람에도 따스히 감싸주던 아빠는 흩날리는 눈꽃을 따라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차가운 눈송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 처럼....
고등학생이 된 나는 벚꽃을 더 이상 눈꽃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리고 벚꽃은 문학 교과서에나 가끔 나오는 꽃 중의 하나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거기다가 쌓여가는 책의 높이가 높아질수록 내 목을 죄이는 줄의 길이는 하루 하루 짧아져만 갔고, 수험생이라는 압박감은 나를 세상과 단절시키려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적어도 고3 4월이 되기 전까지는 나는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다.
고3이 되어 정신없는 한 달을 보내고 4월이 되었다.
휴일도 없는 고3에겐 몇월 몇일은 무의미한 것이었지만 소설 '봄봄'의 주인공들처럼 나는 알게 모르게 춘심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수능의 압박감을 그런 미세한 춘심 따위가 이겨낼 수는 없었다.
여느 때와 다를 바없이 공부에 열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날 문학수업은 나를 깨우는 도화선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낙화'라는 시를 배웠다.
꽃이 흩날리는 모습을 담은 시였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시를 감상하기 보다는 시험에 나올 법한 부분을 필기하기 바빴다.
교실에는 친구들의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헛기침소리로 곧 그 적막함은 깨졌다.
"너희 벚꽃이 지는 날 그 밑을 거닐어 본 적이 있니? 소복히 쌓인 꽃잎을 밟아 본 적은?"
예상치 못한 선생님의 물음에 친구들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나도 필기를 하다말고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뭔가 흐릿하게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정확히 뭔지를 알 수 없었다.
그저 하얀 것이 눈 앞에 계속 아른거리는 듯 보였다.
아마 하루종일 눈 앞에서 하얀 것이 꿈틀대는 것 같다.
학교가 파하고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그저 말없이 한참을 걷기만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낯익은 풍경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처음 배우던 작은 공터, 아빠가 초콜릿을 사주던 작은 슈퍼, 그리고 내가 좋아하던 그 꽃이 날리던 길. 모두 그대로였다.
나는 곧장 아빠 엄마와 함꼐 거닐던 그 길에 섰다.
그리고 만발한 꽃들을 한참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선명하게 보이던 꽃들이 갑자기 흐려졌다.
누가 볼새라 재빨리 눈물을 훔쳤다.
지난 날의 힘든 일들이 모두 주마등 스치듯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꽃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꽃잎들이 떨어졌다.
아니, 눈송이들이 흩날렸다.
나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행복하기만 했던 나의 어린 날을, 아빠 엄마와 나. 우리 세 사람이 함께 했던 날들을 더듬어 보았다.
그동안 쌓여있던 차가운 눈들이 스르르 녹아내리고, 눈꽃물이 스며 들었다.
<우수상>
벚꽃 지던 날
황효정 (선덕여고 2-6)
짙고 굵은 뿌리 위로 가녀린 가지끝에 두부처럼 연하고, 눈처럼 하얀 벚꽃.
마치 한 여인이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살랑이는 바람결에 강물따라 흐르는 꽃잎처럼 떨어지는 벚꽃을 보고 있노라면 눈이 황홀해진다.
황홀함과 행복함에 젖은채, 벚꽃이 활짝 핀아름다운 그 순간을 잡아두고 싶어진다.
그러지 못함에 미련이 찰칵 사진기의 셔터를 누른다.
시간을 따라 아름다움이 져 갈때면 왠지 모를 아쉬움이 가슴에 피어난다.
내게 벚꽃처럼 간직하고 싶은 꽃이 하나 있었다.
내게 어머니였으며, 벚꽃과도 같은 아름다운 꽃, 외할머니.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굽은 허리로 나를 업으시고 하얀 머리카락이 머리에 가득해질 때까지 키우셨다.
시간이 흘러 나는 곧게 자라며 싹을 틔웠다.
그 사이 할머니의 굽은 허리는 더 굽어지고, 팔 다리는 점점 더 앙상해졌다.
무섭도록 빨리 흘러가는 시간 속에 언제 져버릴지도 모르는 외할머니를 보며 걱정과 불안함에 떨었다.
어릴적에는 몰랐던 점점 커가며 느끼는 할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때문에, 할머니의 야윈 모습을 보며 '제발 겨울까지만, 제발 1월달 까지만, 제발 벚꽃이 질때 까지만' 절박하게 빌었다.
할머니가 져버리시지 않도록, 그리고 벚꽃이 졌고 할머니는 지지 않았다.
"효정아 보고싶구나. 한 번 오너라." 통화까지 하셨다.
그 한 마디가 얼마나 기쁘고 또 슬퍼던지....
그리고 5월 모든 꽃과 나무가 피어나고 푸름으로 가득할 때, 그때 나의 벚꽃이 져버렸다.
간직하고 싶었지만 간직할 수 없어 슬픔이 컸지만 바람결에 땅속으로 그리고 마침내 벚꽃이 될 할머니를 떠올리니 슬픔은 작아졌다.
<우수상>
벚꽃 지던 날
김윤민 (경주여고 2-2)
올해의 벚꽃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가끔 교정의 꽃 없는 벚꽃나무를 보고 있으면 꽃이 좋을 때 떠나보낸 그 아이가 생각나 가슴 한 편이 아려온다.
그 아이를 처움 본 건 중3, 화랑교육원에서 였다.
경상북도의 각 학교 전교임원이 모인 수련회에서 우리를 이끌 화백으로 그 아이가 뽑혔다.
조그마한 체구와 귀여운 얼굴과는 달리 목소리 톤이 매우 낮았는데 고정관념일수도 있지만 남자를 연상케 하는 그 아이가 인상이 깊었다.
그게 그 아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같은 방이 아니어서 원화들이 움직일 때만 볼 수 있었는데 은은한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친구였다.
유난히도 긴 3박4일의 수련회가 끝나고 학교로 돌아온 나는 수련회에서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때 두번째 만남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었다.
몇달이 지나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만남에 처음엔 서로 얼떨떨 했지만 곧 친해질 수 있었다.
우리반의 실장과 친하던 그 아이는 기숙사생활을 하며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항상 밝고 열심인 그 아이를 모두 좋아했다.
유난히 단합이 잘 되던 우리반은 실장을 중심으로 많은 활동을 했고 그 아이와의 추억도 깊어졌다.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못하는 게 없는 그 친구는 매사에 적극적이어서 존경스럽다는 생각도 여러번 들게 했다.
항상 활발해서 건강이 좋지 못할 거란 생각은 눈꼽만큼도 못햇는데 그 아이가 갑작스레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심장이 안 좋았다는 것을 가족 모두 몰랐었다고 한다.
폰이 없어 연락이 안되던 내게 엄마를 통해 연락해 온 친구들은 목이 잠겨 말을 잇지 못했고,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울음소리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설마설마하며 장난이면 죽는다고 친구에게 말하면서도 나를 위한 몰래카메라였으면 하고 내심 바랐다.
저녁 늦게 동대병원에 도착했고, 91세 할아버지 밑 17세 그 아이의 이름이 뿌옇게 보였을 때 1층으로 어떻게 내려갔는지 모르겠다.
나를 본 친구들은 달려와 서로 부둥켜 안고 울기에 바빴다.
오열을 하는 실장을 보고 다들 한번 더 눈물을 훔쳤다.
장장 2시간을 눈앞이 뿌연채로 있다가 학년부장 선생님의 말씀에 하나 둘 식장을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슬픔에 잠겨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오히려 유가족들에겐 폐가 된다고.
다른 사람들도 놀란 그 아이의 조문객들 절반 이상은 학교 선배, 친구, 후배였다.
그 아이의 인맥과 인간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무존재에 대한 믿음이 강한 나는 17년된 꽃을 탐하신 신을 원망했다.
1년 6개월 남짓 경주여고란 경쟁장에서 피눈물 보며 경쟁하던 그 아이가 제대로 피지 못한 채 시들어야만 했던 것.
아직도 벚꽃이 졌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벚꽃이 진 자리에는 연두빛 나뭇잎들이 새로 피어났지만 벚꽃의 공허함을 메꿀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섭리일까.
그러면서도 그 공허함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더 슬픈 것 같다.
이제 다신 2009년의 벚꽃을 볼 순 없겠지만 못다 핀 꽃을 기억하는 한 내가 더 화려한 꽃이 되어 그 공허함, 아쉽게 져버린 그 꽃봉오리를 감싸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