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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제 1 회) 98년 10월 17일(토)방송[영상복원 - 무용총 고구려가 살아난다]
* 1회를 보고 나름대로 정리한 글입니다.
압록강의 줄기를 따라 광활하게 펼쳐졌던 고구려의 옛 영토 거기에는 아직도 그 시대가 얼마나 영화로웠는지를 알리는 흔적들이 산재하다. 고구려의 도읍지가 있던 집안지역 일대에는 약 1만2천여기에 달하는 무덤들이 거대한 고분군을 형성하고 있다.
그 고분들 속에 쌍둥이 무덤이라고 알려진 각저총과 무용총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무용총은 1935년 일본인에 의해 처음 발굴 조사된 후 지금까지 공식적으로는 다섯번, 외부에 공개됐다. 그러나 공개후에 보존 조치가 뒤따르지 않아 훼손된 벽화 훼손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최근 화면에 담긴 벽화 모습은 이 바랜데다, 그 나마 군데군데 벽면이 떨어져 나가 그 원형을 알아보기 조차 힘들다. 특히 중국측이 벽화를 보존한다며, 화학안료막을 입혀 벽화는 지금 내부에서부터 부식돼 가는 중이라고 한다.
제작팀은 무용총 복원에 들어갔다. 아마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완성된 춤그림, 무용도다. 기록에 따르면 완함 연주자 옆에 있는 사람은 영무로 전체를 지휘하는 사람이고, 아래 일곱명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가운데 다섯사람은 영무에 지휘에 따라 춤을 추는 춤꾼들이다. 힘차면서도 담백하고, 끊어질 듯 하면서 이어지는 고구려의 춤, 춤처럼, 고구려인들이 이룬 문화도 강하면서 섬세한 면을 고루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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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총이 만들어진 5세기초는 광개토왕에서 장수왕으로 이어지던 고구려의 전성기때다.
북으로는 거란과 동부여를 정벌해 고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남으로는 백제와 신라, 가야에 까지도 그 세력을 뻗쳐가던 그 무렵이다. 무용총은 바로 이 고구려의 중심지에, 국내성 부근 통구지방에 위치해 있다. 그렇다면 중심지에 이렇게 화려한 벽화를 남긴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주인공의 모습을 담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벽화가 바로 이 접객도다.
무용총 안을 들어가면 무덤 주인의 신분을 알 수 있을 만한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손님을 접대하는 그림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 접객도에는 무용총의 주인으로 보여지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바로 이 사람이다. 무덤을 벽화로 치장한 것으로 봐서 주인공의 장례식도 대단히 호화로웠을 것이다.
영상으로 복원된 접객도다. 접객도는 음식이 올려있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손님과 주인공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여진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주인공의 신분을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음식을 올리는 시종위에 주인공은 당시 귀족들의 머리장식으로 알려진 백라관을 쓰고 앉아 있다. 주인공 뒤에도 두명의 시종이 서있고, 그림 맨 아래에는 여덟명의 시녀들이 늘어서 있어 그림만 봐도 주인공의 신분이 꽤 높으리라고 추측된다.
하지만 더 이상의 추정은 불가능하다.
다른 고분과 비교해봤다.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군총은 무용총과 같은 5세기초에 축조된 고분이다. 천여개의 장대석들로 지어진 장군총은 규모도 거대해, 널방의 너비가 32미터, 높이도 지금의 7층 아파트 높이에 해당된다. 무용총보다 1세기 후에 만들어진 강서대묘도 고구려 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널방의 높이만 8미터로 규모도 거대할 뿐더러 천장에는 왕을 상징하는 황룡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네 벽에는 고구려 벽화의 걸작으로 알려진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무용총은 이런 왕들의 고분 규모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당시 왕 바로 아래급에 해당되는 아주 높은 신분의 귀족이었을까? 황해도에 있는 안악3호분은 무용총과 같은 5세기초 무덤이다 무덤의 주인은 고구려에 귀화한 '동수'라는 중국인 무장이다. 그는 고구려에서 높은 신분의 귀족생활을 했던 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런 지위가 벽화에서 드러난다.
'동수'라는 무덤의 주인이 밖으로 행차할 때면 풍악대와 장송대가 도열하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종들이 그의 뒤를 따르는 것으로 표현돼 있다.
무용도에도 비슷한 행차모습이 담겨있는데, 가수들과 춤꾼들이 주인공을 위해 공연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긴하지만, 말탄 주인공을 따르는 시종은 한 명뿐이다. 아주 높은 신분의 귀족이 아닌데도, 이 정도로 자기 무덤을 치장했다면, 당시 고구려가 얼마나 화려하고 번성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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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벽화를 그릴때 가장 중요한 색은 적갈색인데, 대부분의 벽화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색이다. 이 적갈색을 당시 고구려인들은 자연에서 얻었다고 한다. 검은색은 먹으로, 적갈색은 황토로 그 외에 청색, 녹색등의 안료들도 자연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재질을 산화시켜 만들었다.
벽화에 쓰인 안료는 이렇게 물에 녹지않는 천연광물성 재료들이다.
그렇다면 이런 광물성 안료를 어떻게 돌로 만들어진 벽에 부착시킬 수 있었을까?
고구려 벽화는 안료로 그림을 그리기전에 먼저 벽면에 두껍게 석회를 입혔다. 석회도 한번 바른 것이 아니라 세번에 걸쳐서 바르고, 특히 마지막에는 아주 고운 입자의 돌가루와 석회를 섞어 벽화의 바탕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위에 그림을 그릴때, 프레스코 기법이 사용되는데, 젖은 석회에다 광물성 안료로 채색을 해서 석회안으로 스며들게 한다는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돌을 쌓고 그 위 굵은 돌가루와 석회를 섞어 1차 벽을 바르고, 그 다음에는 중간 굵기의 돌가루와 석회, 마지막에는 고운 돌가루와 석회를 섞어 세번 가량 회벽을 발랐다 화가는 그 위에 석회가 마르기전, 젖은 상태일 때 그림을 그렸다.
그래야만 안료과 석회와 함께 굳어 오래 남는다는 것이다.
프레스코 기법은 젖은 상태에서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무용총 벽화의 경우, 그 많은 그림을 회벽이 마르기 전에 전부 그리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두번째, 프레스코가 아닌 방법이 쓰여진 것 같다. 프레스코와 다른 기법은, 석회가 마른 후에 안료에 아교를 섞어 그림을 그린 것이다.
결국 무용총 벽화는 젖은 상태의 회벽에다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 기법과 부분적으로 다 마른 상태에서 아교를 섞어 그림을 그리는 두가지 방법이 병행된 것으로 보인다. 바로 기법에 보존의 비밀도 담겨있다. 프레스코 기법의 경우, 젖은 상태에서 안료와 석회가 함께 굳기 때문에, 마치 종유석처럼 단단해져 안료가 떨어져나가는 박락현상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오랜시간이 흐리면서 습기나 빗물이 무덤안으로 스며들어와 석회수가 되면서 벽화에 일종의 코팅이 이뤄지는 것이다.
고구려 벽화가 천오백년 가까이 그 모습을 간직한 보존의 비밀이 바로 이 프레스코기법에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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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총에는 천장에도 벽화가 그려져 있다. 천장 벽화는 네 벽에 그려진 그림과 확연히 다르면서 그야말로 찬란하고 다양한 하늘세계의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다. 이 무덤안의 천장은 계단식으로 위로 올라갈 수록 좁아지는 둥근 돔 양식으로 돼있다. 사학자들은 벽면의 벽화가 살아 생전의 모습을 담은 것이라면 위 천정 부분은 극락왕생을 비는 영혼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고구려인들은 천장을 쌓을때 세 계단까지는 네 벽과 평행하는 사각형을 쌓았고, 그 위의 다섯 계단은 네개의 삼각고임을 써서 8면으로 쌓아 나갔다.
각 계단은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게 쌓아 벽화를 그릴 자리를 남겼고, 마지막에 큰 돌로 천장 입구를 막았다.
회벽을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사실적인 그림들로 채워진 네 벽과는 달리 천장은 상징적인 그림으로 고구려인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살아 생전의 모습을 담은 벽면 그림 위에는 빙둘러서 16개의 세모꼴 염화문이 그려져 있다.
이 염화문은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경계선이라고 한다.
두번째 단에는 연꽃이 많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죽어서 연꽃으로 환생한다는 불교적 의미가 강하다.
세번째 단에는 주인공을 신선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상서로운 동물, 백호와 청룡 그리고 주작이 사면에 그려져있다.
즉 신선들은 주인공이 죽어 나쁜 곳으로 가지말고 신선의 세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부정을 막는 수호신인 셈이다.
이처럼 고구려인들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현세에 누렸던 삶이 내세에도 그대로 이어진다는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고구려인들은 죽음은 단지 육신의 소멸일뿐 영혼은 계속해서 살아 움직인다고 여겼다.
그래서 무덤은 산자와 죽은자가 헤어지는 곳이면서 동시에 죽은 자가 신선으로 다시 환생하도록 이어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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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아있는 고구려 고분중에서 무덤안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고분은 모두 95기라고 한다.
그 가운데 스물두개의 고분에는 천장에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무용총 천장벽화에도, 자세히 보면 사후세계를 상징하는 그림들 속에 별자리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자체 천문대가 있어 일본에 전해 줄 만큼 천문지식이 뛰어났고, 그 천문체계도 서역이나 중국과는 다른 독창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바로 그런데, 그 독창성의 싹이 바로 이 무용총 별자리에서 부터 나타난다고 한다.
언뜻봐서는 어느 것이 별자리인지 찾아내기가 힘들다.
꼬리로 이어지는 둥근원들이 사실은 별자리다.
동서남북을 나타내는 별자리는 대개 백호나 청룡과 같은 사신와 함께 그려져 있다.
붉은 빛 해 속에 검은빛의 가마귀는 해신을 뜻한다.
흰빛 달 속에 엎드려 있는 두꺼비는 달신이라고 한다 무용총에는 북두칠성, 남두육성과 같은 별자리와/ 청룡, 백호등의 사신과/ 해, 달이 늘 함께 나타나는데 이것이 고구려 천문도의 특징이다.
그러나 그 이후 고구려의 천문체계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는, 별자리가 남아있지 않아, 알 길이 없다.
고구려 천문도의 흔적이 다시 발견된 것은 그로 부터 천년 후. 조선초 태종 4년에 만들어진 이 천상열차분야지도가 바로 그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적도, 황도, 븍극원과 경도선, 그리고 은하수까지 그려졌고, 세계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석각 천문도다 이 지도가 고구려의 것을 본뜻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유는 석각에 기록된 제작자 권근의 기록때문이다.
권근은 고구려의 평양성이 함락될때 강물에 빠진 천문도의 탁본을 토대로 일부 달라진 별자리만 보완해서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이 완성시킨 천문도의 모습은 어디에 남아있을까? 얼마전 일본에서, 7세기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기토라 고분의 벽화가 공개됐다.
그 기토라 고분안에는 천장에 천상분야열차지도와 아주 닮은 천문도가 그려져 있었다.
동쌈성과 서쌈성의 별자리도 천상분야열차지도와 위치가 똑같다.
기토라의 천문도는 당시 일본의 천문지식으로 봐서 독자적으로 그렸다기 보기는 힘들다.
중국의 순우 천문도나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원본이랄 수 있는 고구려 천문도를 본따 그렸을 확률이 높다
박창범교수는 기토라 고분의 별자리를 가지고 관측지점을 알아냈다.
북위 39도의 유력한 관측지점은 한반도의 평양이다.
평양은 당시 고구려 수도다. 그리고 중국은 당나라 수도 였던 장안과는 거리가 먼 만리장성이 있는 유타이산이라는 곳으로 나타났다.
수도 아닌 그것도 변방지역에서 별자리를 관측했다고 보긴 힘들다.
기토라 고분이 고구려 벽화의 영향을 받아 축조됐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는 또 있다.
네 벽에 고구려 벽화의 특징이랄 수 있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기토라 천문도 이와같은 이유로, 천상열차지도에 원본이 됐던 사라진 고구려 천문도 그 모습일 가능성이 크다고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당시 무용총 별자리가 독창적으로 그려졌다는 것은 고구려가 중국을 개의치 않고 대등한 위치에 서려 했다는 뜻이다.
광개토왕비문 무용총이 축조된 그 시기, 광개토왕이 영토를 넓혀가던 그때 고구려는 자기 중심의 천하관을 갖춰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광개토왕비에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 추모왕을 하늘이 낸 자손이라고 본 것이나, 모두루 묘지에서 고구려의 연원을 하늘과 일월이라고 표현한 등이 바로 중국과는 별개로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으로 봤다는 증거다.
고구려는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그들은 자부심이 강했고, 그럴 수 있는 대국도 건설했다.
바로 이런 모두 이야기들이 이 벽화에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