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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 단편소설
두 생애
1.
내가 만들고 싶었던 프로그램은 한 생애가 아니었다. 두 생애였다. 너무나 다른 두 생애를 하나의 공간 속에 융화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한 생애만이 만들어졌고, 나머지 한 생애는 지워졌다. 그것은 불가피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나는 두 생애의 융화를 꿈꾸었다. 그랬다. 단지 꿈을 꾸었을 뿐이었다.
브라운관에 나타난 그의 생애는 숭엄하고 장려했다. 그것은 선택된 인간의 생애였다. 생전의 그는 공식적으로 아홉 개의 직함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 성 베드로 후계자, 로마 주교, 세계교회의 폰티펙스(교황), 서유럽 총대주교, 이탈리아 수석대주교, 로마관구 수석대주교, 바티칸시국 국가원수, 하느님의 종들의 종. 이 직함들 외에도 위대한 휴머니스트, 평화의 사도, 20세기의 거인, 영원한 순례자 등의 존칭들이 그에게 부여되었다.
프로그램이 방영된 것은 2005년 4월 1일 저녁이었다. 제목은 <요한 바오르 2세, 그 위대한 순례>였다. 다음날 오전 3시 25분 교황이 숨을 거두었다. 방영 시간을 4월 첫 번째 일요일로 정한 것이었는데, 절묘한 우연이었다.
또 한 생애는 교황의 생애와는 너무 달랐다. 교황은 여든다섯에 죽었으나 그는 열다섯에 죽었다. 그의 짧은 생애는 고통으로 점철되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고통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열다섯 살 소년의 무릎은 강철이 아니었다.
프로그램 제작이 결정된 것은 2003년 10월이었다. 교황의 죽음을 대비한 프로그램이었다. 그해 5월 19일 83회 생일 다음날 교황은 신 앞으로 나아갈 때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10월 2일에는 오스트리아 대주교 쇤보른 추기경이 오스트리아 국영 라디오 방송에 출연, 교황의 죽음이 임박했다고 밝혀 세계 언론계를 긴장시켰다. 내가 몸담고 있는 방송국의 움직임도 빨랐다. 나는 미리 준비해둔 기획안을 제출했다. 국장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교황 서거를 대비한 특집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그전부터 나에게 자주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교황을 보고 싶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그의 육신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올해를 넘기면 그를 영영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슴 한 구석에 늘 자리하고 있었다.
소년을 만난 것은 교황 자료 속에 파묻혀 있었던 10월 중순이었다. 금요일 오후 두시 무렵이었을 것이다. 구성작가 R이 전화를 했다. 기막힌 이야기 거리를 찾았다는 그녀의 목소리에 지난번 술자리가 떠올랐다. 경제 양극화 그늘에서 고통 받는 아이들에 관한 프로그램을 논의한 자리였다. 나는 그녀에게 여러 아이들을 등장시키는 것보다 한 아이의 어두운 삶을 정밀히 들여다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교황 프로그램에 정신이 빼앗겨 그것을 잊고 있었다. 아니, 잊지는 않았다. 생각을 미루어두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사회복지사로부터 어렵게 얻은 약속이라고 하면서 지금 당장 나오라고 했다. 교황 프로그램을 거론하기에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진지했다. 약간의 흥분도 감지되었다. 냉정한 그녀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어쩌면 좋은 후속 프로그램이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나오라고 한 곳은 상계동의 한 야외공원이었다. 가을 햇살 속에서 검은 색의 헐렁한 재킷과 청바지를 입은 R이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 상대는 사회복지사였다. 아이는? R과 비슷한 연령의 사회복지사와 인사를 나눈 후 나는 눈으로 물었다. 저기. 그녀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 한 소년이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 소년은 고개를 약간 들고 무언가를 골똘히 보고 있었다. 하늘을 보는 것인지 하늘에 걸린 나뭇가지를 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상했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소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성장기 아이의 몸은 정신에 묶이지 않는다. 그들의 몸은 팔랑거리는 나비처럼 가볍고 투명하다. 앉아 있을 때도 손과 발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얼굴 표정은 또 얼마나 다양하게 변하는가. 그런데 소년의 몸에서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견고한 손이 소년의 몸을 꽉 붙들고 있는 듯했다. 소년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피부가 종잇장처럼 희었다. 아니, 희다기보다는 잿빛에 가까웠다. 잿빛 속에는 소년의 나이와 맞지 않는 어떤 흔적 같은 것이 있었다. 시간에 말라버린 생명의 흔적 같은 것. 물론 막연한 느낌이었다. 소년의 몸이 움직인 것은 사회복지사가 그를 불렀을 때였다.
그날 밤 상계동의 허름한 주막에서 R로부터 들은 소년의 삶은 드라마틱했다. 그것은 가혹한 드라마였다. 삶과 죽음이 혼란스럽게 뒤엉킨 그 가혹한 드라마 속에는 나에게 낯익은 무엇이 있었다. 비밀스러운 허기 같은 것, 날카로운 갈증 같은 것, 가차 없는 공포 같은 것이.
2.
교황의 존재가 나의 삶 속으로 파고든 것은 1981년 5월 13일 오후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일어난 저격 사건 때문이었다. 교황을 태운 무개지프가 순례자들 사이로 천천히 지나가고 있을 때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났다. 광장의 비둘기들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고, 교황의 몸이 비틀거렸다. 벨기에 제 갈색 브라우닝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은 복부와 오른쪽 팔꿈치, 왼손 검지를 관통했다. 12분후 교황은 병원에 도착했으나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복부를 절개했을 때는 뱃속이 피로 가득 차 있었다. 혈압은 70으로 떨어져 있었고, 심장 박동이 점점 약해져갔다.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현장에서 체포된 암살범은 23세의 터키 청년 마흐메트 알리 아그차였다. 세계의 시선은 아그차의 정체와 암살 동기에 집중되었다. 터키 극우조직의 행동대원, 교황을 십자군 사령관으로 간주하는 광신적 이슬람교도, 공산 정부에 대한 폴란드의 저항 운동을 무력화하려는 소비에트의 하수인이라는 주장들이 제기되는가 하면, 미국 CIA가 폴란드인의 저항을 촉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그차를 고용해 소비에트의 하수인처럼 보이도록 했다는 주장도 흘러나왔다. 문제는 아그차의 진술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 자주 말을 바꾸었다. 심지어 “나는 예수 그리스도다. 전능한 신의 이름으로 세계의 종말을 선언한다. 어떤 사람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묵시적 발언까지 했다. 그는 어느덧 폭력과 환상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그의 묵시에 매혹된 나는 스스로 아그차가 되어 환상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1980년대 초반의 한국 사회는 암흑이었다. 학살의 핏물은 지워지지 않았고, 진실은 은폐되었다. 나의 환상은 은폐된 진실 앞에서 홀로 행하는 일종의 그림자 놀이였다.
나는 교황이라는 존재를 수상쩍게 보고 있었다. 예수는 평생 남루한 옷을 입고 다녔다. 하지만 교황은 화려한 금실로 수놓인 옷을 입는다. 예수의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이 씌어졌다. 하지만 교황의 머리에 씌어지는 것은 금관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예루살렘 권력의 심장부인 성전을 무너뜨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성전의 우두머리인 대사제는 신의 대리자로서 공동체를 속죄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닌다. 그런 그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다는 데 앞장섰다. 나는 바티칸 궁이 예루살렘 성전의 재현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 의심이 환상 속으로 흘러들어오면서 아그차의 저격 행위를 미묘하게 변형시켰다. 신의 대리자를 살해한다는 것. 그 살해의 내면에서 두 개의 풍경이 흘러나왔다. 첫 번째 풍경은 거짓 대리자로서의 교황 모습이었다. 거기에서의 교황은 예루살렘의 대사제처럼 신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존재였다. 두 번째 풍경은 고통에 가득 찬 세계를 외면하는 신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림자놀이의 뿌리는 절망이었다.
그러나 교황은 죽지 않았다. 복부로 파고든 총알이 소장과 대장을 훑으면서 천골정맥을 뚫고 나갔는데도 생명의 조건에 필수적인 중앙대동맥과 장골 동맥, 수뇨관과 신경 중추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또 있었다. 처음에 아그차는 교황의 머리를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 순간 교황이 머리를 숙인 것은 한 소녀가 축복을 받기 위해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 사진을 교황에게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은 우연이었다. 또한 필연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우연이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필연이었다. 그것이 필연임을 누구보다도 깊이 믿은 이가 교황이었다.
나흘이 지나서야 간신히 앉을 수 있게 된 교황은 의사로부터 총알이 기적적으로 급소들을 피해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비서를 불러 파티마에 관한 자료를 갖다달라고 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917년 5월 13일 포르투갈 시골 마을 파티마에서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인류의 운명과 직결된 세 가지 계시를 내렸다. 그 후에도 성모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자주 나타났는데, 1930년 포르투갈 주교들이 성모 발현을 공식 인정함으로써 파티마는 가톨릭의 성소가 되었다. 그날 교황은 다음과 같은 공식 메시지를 발표했다.
-저는 저에게 상처를 입힌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 형제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4개월 후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의 순례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암살 기도가 하느님의 시험이었기에 저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지난 몇 달 동안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제 생명에 대한 위험을 체험하도록 허락해주셨습니다. 그것이 특별한 은총 가운데 하나임을 그분께서는 저에게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1983년 5월 12일 파티마 성지를 방문한 교황은 “총을 맞고 쓰러지던 그 순간 죽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한 손은 총을 쏘았지만, 또 다른 거룩한 한 손이 총알을 다른 곳으로 인도해주셨다”라고 고백했다. 그 거룩한 손이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임을 교황은 굳게 믿었다. 그는 신에게 선택된 인간이었다. 아그차는 선택된 인간에게 신의 계시를 전달하는 도구였다. 교황이 아그차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가 아그차의 배후세력을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다.
교황의 일련의 고백은 나로 하여금 그를 더욱 수상쩍은 시선으로 보게 했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의 고통이 은총의 결과라면 선택받지 못한 대다수 사람들의 고통은 무엇의 결과인지.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고통은 악의 실체다. 악을 통해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악을 느낀다. 고통을 통해 신을 느끼는 자는 선택된 인간뿐이다. 선택받지 못한 인간은 오히려 신을 잃어버린다. 나의 그림자놀이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 1984년 5월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가 학살의 현장인 광주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에 새겨진 깊은 상처는 극복되기 어려운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화해의 은혜가 내려진 것”이라고 말했을 때 눈앞에 떠오른 것은 아그차의 갈색 총구였다. 아그차의 총구는 학살을 섭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신의 대리자를 향하고 있었다.
3.
소년이 처음으로 집을 나간 것은 아홉 살 때였다. 아버지는 떠돌이 노동자였고, 심장이 약한 어머니는 핏기 없는 얼굴로 어두침침한 방안에서 인형 꿰매기, 조화 만들기 등의 잡일을 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오면 지팡이로 소년을 때렸다. 소년의 할아버지가 생전에 썼던 지팡이였다. 때리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냥 때렸다. 어머니는 보고만 있었다. 말릴 힘도 없거니와 말리면 오히려 폭력의 강도가 높아졌다.
아버지가 폭음을 시작한 것은 소년의 여동생이 죽고부터였다. 여동생이 살아 있었을 때 아버지는 트럭을 몰았다. 그때는 아버지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 상계동의 지하 단간 방에 살지도 않았다. 면목동의 연립주택에 살았다. 소년이 일곱 살 되던 해 여름, 아버지는 연립주택 앞 골목에 세워둔 트럭을 후진시켰다. 딸의 짧은 비명소리를 들은 것은 몇 초 후였다. 트럭 뒤에서 놀고 있던 세 살 박이 딸이 즉사했고, 골목 화단가에 앉아 동생을 내려다보고 있던 소년의 눈에 그 장면이 고스란히 각인되었다. 아버지가 소년에게 왜 보고만 있었느냐고 울부짖었을 때 소년은 두 손을 허우적거리기만 했을 뿐 한 마디 말도 못했다.
소년은 아버지의 매를 견뎠다. 울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아팠다. 너무 아파 무릎 꿇고 빌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자신의 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부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전체가 보였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이 몸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현상이 자주 되풀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몸 안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움직임이 너무 작아 그전에는 몰랐던 것 같았다. 몸에서 무언가가 떠나고 있었다. 그것이 작은 움직임으로 느껴진 것이었다. 소년은 눈이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게 아니라는 자각이 왔다. 눈으로 생각하기에는 형태에 대한 감각이 너무 미묘했다. 그것이 또 다른 ‘나’임을 알았을 때 소년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나’의 눈에 비친 소년의 몸은 비루했다. 더러운 천으로 뭉쳐진 인형 같았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지팡이로 때리는 것은 더러운 인형이었다. 지팡이가 살 속으로 파고들 때 제어하기 힘든 분노가 솟구쳐 오르곤 했는데,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분노의 대상은 더러운 인형이었다.
한파가 몰아치던 초겨울 어느 날 술에 절어 들어온 아버지가 지팡이로 소년을 때리기 시작했다. 등을 웅크리고 매를 맞던 소년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더러운 인형이 매를 맞는 것이 아니었다. 여동생이 매를 맞고 있었다. 여동생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울고 있었다. 소년은 여동생을 안고 황급히 집을 뛰쳐나갔다. 그날 밤 소년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들어오지 않았다. 소년이 대구에 사는 이모 집에 나타난 것은 열흘 후였다. 거지와 다름없는 몰골이었다. 소년의 몸을 씻기려 옷을 벗긴 이모는 깜짝 놀랐다. 온 몸이 불에 탄 나무토막처럼 꺼멓게 멍들어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발가락은 동상에 걸려 썩고 있었다. 소년을 데리고 서울로 온 이모는 경찰서에 아버지를 고발했다. 그날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엿새 후 아버지의 시체가 서울 근교 야산에서 발견되었다. 나무에 목을 매고 죽어 있는 것을 등산객이 보았다.
소년이 어머니와 함께 산 기간은 3년이었다. 아버지의 자살 이후 어머니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집안에서 하는 잡일마저 끊겼다.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되어 매달 받는 10만 2000원이 생활비의 전부였다. 끼니를 거르는 날이 예사였고, 겨울에는 불기 없는 방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지냈다. 어머니가 심하게 아파도 병원 가는 일은 꿈도 못 꾸었다. 학교에서 소년은 이상한 아이로 소문나 있었다. 말을 할 때 간혹 여자 아이 목소리가 튀어나오는가 하면, 남자 화장실에서 여자 아이 우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면 소년이었다. 소년은 따돌림을 받았다. 따돌림이 심해지자 결석이 잦았다. 어느 날 소년은 담임선생에게 어머니가 아파서 당분간 학교를 못나올 것 같다고 말했다. 많이 아프시냐는 선생의 물음에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이 없었다. 그날 이후 소년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한달이 넘자 담임선생은 소년의 집을 찾아 나섰다. 주소가 잘못 적혔는지 산동네를 헤매기만 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대구에 사는 이모가 서울에 볼 일이 있어 올라왔다가 소년의 집을 들렀다. 기척이 없어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불을 켜니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소년이었다. 처음에는 소년이 아닌 줄 알았다. 오랫동안 이발을 하지 않았는지 머리가 긴 데다 해골처럼 말라 있었다. 소년은 이모를 멀거니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년 옆에는 어머니가 누워 있었다. 산 사람이 아니었다. 경찰의 설명에 따르면 소년의 어머니가 죽은 것은 4개월 전이었고, 소년은 발견 당시 아사 직전의 상태에 있었다.
4.
아그차의 저격 사건에서 시작된 나의 그림자놀이가 언제 멈추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아니다. 멈추었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림자놀이의 형태가 사라져갔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내가 아그차가 된다는 것, 그리하여 신의 대리자를 살해한다는 것.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유희였다. 정신적 자위행위라고나 할까. 그때 나는 나와 세계와의 간극, 괴물의 아가리처럼 기괴하게 벌어져 있는 그 까마득한 심연을 견디기 힘들었다. 심연을 견디기 위해서는 변신이 필요했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 눈앞에 또렷이 보이는 세계의 악을 바라보기만 하는 무력한 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희의 세계 속에서 아그차는 끊임없이 방아쇠를 당겼고, 신의 대리자는 끊임없이 쓰러졌다. 끊임없이 쓰러진 신의 대리자는 동시에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가 죽어버리면 아그차의 존재는 의미가 없다. 나의 유희가 개미 쳇바퀴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아그차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면서 우아하고 아름다웠던 그의 움직임이 로봇처럼 딱딱해져갔다. 신의 대리자도 마찬가지였다. 충격과 고통에 가득 찼던 그의 얼굴이 자동인형 같은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의 유희적 세계가 그렇게 시들어가고 있을 때 현실의 세계는 오히려 역동적인 생명력을 내뿜고 있었다.
내 유희적 세계의 바깥에서는 절망 속에서, 절망에 사로잡히거나 짓눌리지 않고, 절망을 껴안고, 절망을 정화하면서 동시에 절망을 넘어서서 세계의 악과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학살의 핏물을 딛고 일어선 그들은 로봇처럼 되어가는 아그차가 아니었다. 피가 흐르고, 살이 찢기고, 넋이 물결치는 구체적인 생명체들이었다. 그 구체적 생명체들이 한국 사회의 암흑을 벗겨내고 있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아그차가 로마의 형무소에 유폐되어 겨우 숨을 쉬고 있을 때 신의 대리자는 동유럽 역사의 격랑 속을 바람처럼 가로지르고 있었다.
1978년 10월 16일 오후 6시 44분 어둠이 깔린 성 베드로 광장에는 20만 명의 시선이 대성당 중앙 발코니에 집중되어 있었다. 발코니에 선 펠리치 추기경은 낭랑한 라틴어로 외쳤다. 여러분에게 우리가 새로운 교황 성하를 모시게 되었음을 기쁜 마음으로 알려드립니다. 거룩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 카롤 보이티와 요한 바오르 2세입니다. 성 베드로 광장은 정적에 잠겼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났다. 보이티와가 누구지? 아프리카 출신인가? 아니에요, 그분은 폴란드인이에요. 그분의 고향은 폴란드 바도비체예요. 바도비체? 아우슈비츠와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이죠.
요한 바오르 2세의 등장은 극적이었다. 전임 교황이 선출된 지 33일 만에 사망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추기경들이 456년 만에 처음으로 이탈리아인이 아닌 사람을 교황으로 선출하리라는 것 역시 아무도 몰랐다. 그것은 폴란드의 홀연한 부활이었다.
1천여 년 전 민족국가로서 폴란드가 역사에 등장한 이래 가톨릭교회는 신비적이고 메시아적 정신을 보존해왔다. 음영시가들은 폴란드를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고통을 짊어진 모든 민족의 그리스도임을 노래했다. 그들에게 폴란드의 독립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10억 가톨릭 신자의 수장이자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폴란드인 카롤 보이티와가 선택된 것이다.
폴란드에 대한 교황의 애정은 집요했다. 취임 다음날 ‘나의 사랑하는 동포들에게’라는 제목의 메시지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것에 반대할 것을 폴란드 국민에게 호소했다. 폴란드 공산정권을 향한 교황의 첫 포문은 그렇게 열렸다. 바웬사가 이끄는 반체제 자유노조가 그토록 끈질기게 싸울 수 있었던 데에는 교황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1979년 6월 2일 오전 10시 7분 교황이 바르샤바의 땅을 밟은 그 순간부터 9일 동안 폴란드 전국이 열기에 휩싸였다. 바르샤바 승리의 광장에서 열린 미사에서 그는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 빗장을 지르는 행위다. 공산주의가 인류의 역사에 지른 빗장은 영원할 수가 없다”고 선언했다. 1980년 8월 14일 그다니스크의 레닌조선소 종업원 1만 7천명이 바웬사의 지휘로 스트라이크를 일으켰고, 삽시간에 8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유노조에 가입했다. 동독의 서기장 호네커는 소비에트 제국의 통치자 브레즈네프에게 사회주의 국가 폴란드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의 편지를 보냈다. 11월 말 소련군 기갑사단이 폴란드 국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미국의 위성사진에 포착되었다. 나토는 최고비상사태 경계령을 내렸고, 미국과 서유럽 정부는 소련 정부에게 우려와 경고를 전했다. 교황은 브레즈네프에게 소비에트 군대를 폴란드를 침공한 나치 독일군으로 비유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결국 폴란드 침공 계획은 백지화되었다. 그렇다고 위기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듬해 5월 교황 저격 사건이 일어났고, 그해 12월 13일 폴란드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5천 명 이상의 저항세력 지도자와 지식인들을 체포했다. 교황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는 “폴란드와 연대하는 것은 인류가 지켜야 할 가치와 원칙들을 확고히 하는 길”이라고 세계를 향해 호소했다. 그러면서도 폴란드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에는 반대했다. 경제제재가 폴란드 국민에게 고통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1982년 11월 10일 브레즈네프가 사망했다. 바웬사가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고, 12월 31일에는 폴란드 정부가 계엄령을 해제했다. 브레즈네프의 자리를 이어받은 안드로포프가 재임 18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 뒤를 이은 체르넨코는 1984년 12월 13일 폴란드의 권력자 야루젤스키에게 “폴란드 교회는 사회주의 국가에 직접 도전하고 있다. 교회는 반혁명 군대를 준비하고 있다. 교회는 사회 전복을 위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한 긴장 속에서 세계사는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1985년 2월 체르넨크가 돌연 사망했다. 한 달 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후임자로 고르바초프를 선출했다. 페레스트로이카로 불리는 그의 새로운 정책은 동유럽의 정치 상황을 돌변시켰다. 1987년 프라하를 방문한 그는 “사회주의 국가들 간의 정치관계는 철저한 자주성에 바탕을 두어야한다”고 선언했다. 동유럽의 정세가 급변했다. 1989년 8월 폴란드의 공산당 독재 체제가 종식되었다. 두 달 후 헝가리가 역시 공산당 지배의 종식을 선언했다. 11월에는 냉전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그 붕괴에 신의 대리자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 격변의 80년대는 그렇게 저물어갔다. 그 사이 아그차의 총구는 녹슬어 있었다. 총알은 더 이상 발사되지 않았고, 신의 대리자는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5.
소년을 두 번째 만났을 때는 R과 함께 하지 않았다. 소년이 살고 있는 성당 복지관을 혼자서 찾았다. 날씨가 흐린 11월 초 오후 네 시 무렵이었다. 소년은 복지관에 없었다. 부엌에서 나온 아주머니가 성당에 있을 거라고 말했다. 성당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완만한 비탈길이었다. 십자가가 흐린 하늘 아래 고요히 서 있었다. 성모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성모상 주위에 피어 있는 꽃들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성모는 홀로 있었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아들이 없었다. 성모의 고통도 아들의 고통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고통이 더 무서울지 모른다.
성당 문의 쇠 손잡이가 차가왔다. 문을 열자 신음 같은 소리가 났다. 성당 안은 어둡고 싸늘했다. 구석자리에 앉아 있는 소년의 뒷모습이 어슴푸레 보였다. 회색빛 햇살이 들창으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이가 떠올랐다. 눈부신 흰 옷을 입은 아이였다. 눈부신 흰 옷을 입은 아이를 한 여인이 보고 있었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복사(服事)가 된 아들을 사랑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가 사라졌다. 어머니도 사라졌다. 허공뿐이었다. 견딜 수 없는 허공이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주먹을 그러쥐었다. 소년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형체였다. 죽은 어머니와 한 방에서 4개월이나 같이 지낸 소년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엄마를 지켜주려고 했다. 엄마의 추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엄마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소년이 경찰에게 한 말은 가슴 아픈 내용이었다. 사회복지사와 정신과의사에게도 똑같은 말이 반복되었다. 사회복지사는 그렇다 쳐도 정신과의사만은 소년에게서 더 많은 말들을 이끌어냈어야 했다. 차갑고 단단한 껍질로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것 같다는 게 정신과의사의 진단이었다. 그것은 자폐증에서 흔히 나타나는 모습이다. 하지만 자폐증 환자로 간주할 만큼 지각 능력에 큰 결함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과 사물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없지는 않으나 심하지 않고, 자신의 신체가 만드는 감각에 과도하게 집중하여 외부의 감각에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증상도 미미하다고 했다. 소년은 정신과의사에게도 알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나는 알고 싶었다. 소년의 고통을. 상처투성이 소년이 홀로 행하고 있을 그림자놀이를.
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기도하고 있었다. 어머니를 살려달라는 아이의 기도는 간절했다.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이는 그 분뿐이었다. 아이가 복사가 된 첫날, 어머니는 성당 앞에서 아들과 사진을 찍었다. 가을 햇살에 비친 어머니의 미소는 눈부셨다. 아이는 어머니의 기쁨을 가슴으로 느꼈다. 기쁨 속에서 택시를 탔다. 얼마나 갔을까. 차가 기우뚱하면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어머니는 아이를 안았다. 아이의 기억에 어머니가 그토록 깊숙이 자신을 안았던 적이 없었다. 어머니 몸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어머니의 몸 안은 깊었다. 깊은 몸 안에서 아이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상처는 크지 않았다. 어깨뼈가 약간 상했고, 옆구리와 다리에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머리와 얼굴은 멀쩡했다. 어머니는 달랐다. 머리를 크게 다친 어머니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아이는 기도했다. 진심으로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신부님의 말씀을 아이는 의심하지 않았다. 싸늘한 마루바닥에서,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되뇌며,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소년의 어두운 형체를 향해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소년이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다. 어디선가 가냘픈 새 소리가 들려왔다.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아이의 작은 목소리가 새소리와 함께 어둑한 허공을 맴돌았다. 눈을 감았다. 어머니의 차가운 얼굴이 보였다. 입술을 깨물었다. 소년은 기도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안녕.”
나는 소년 앞에 서서 밝게 웃었다. 소년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날 몰라? 전에······”
마르고 창백하고 윤기 없는 소년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마치 내가 안 보이는 듯했다.
6.
어머니의 죽음은 나를 고통 속으로 빠트렸다. 나의 흰 옷은 신을 위한 옷이었다. 어머니는 흰 옷을 어루만지며 기뻐했다. 그 흰 옷을 어머니의 피로 물들게 한 신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이 신의 섭리였다면, 나의 고통 역시 신의 섭리였을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이 죄에 대한 벌이었다면 나의 고통 역시 죄에 대한 벌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이 신에게 뜻밖이었다면 나의 고통 역시 신에게 뜻밖이었을 것이다. 누가 나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신의 섭리라고 말했다면, 누가 나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죄에 대한 벌이었다고 말했다면 나는 그를 저주하고 그의 신을 저주했을 것이다. 누가 나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면 나는 그런 무력한 신을 조소했을 것이다. 나의 고통에는 의미가 없었다. 철저하게 무의미했다. 철저하게 무의미한 고통은 무서운 악이었다. 너무나 무서워 눈을 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암흑 속에서 나는 나를 끊임없이 죽였다. 내 안에 있는 신을 죽이기 위함이었다. 나의 첫 그림자놀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그차의 총구는 두 번째 그림자 놀이였다. 두 번째 그림자놀이는 아그차의 총구가 녹이 슬면서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황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교황은 잊혀질 수 없는 존재였다. 신의 선택을 받은 유일한 인간을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1999년 11월 5일 교황의 89번째 해외순방이 시작되었다. 인류가 직면한 삶과 직접 부딪치는 것이 성직자의 진정한 의무임을 믿는 그는 자신의 여행을 ‘순례’라고 불렀다. 그의 순례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교황 전용기가 착륙한 곳은 인도 뉴델리 공항이었다. 그곳에서 열리는 아시아대륙 주교대의원회의에 교황의 참석이 예정되어 있었다. 뉴델리에 머무는 동안 교황은 더위를 무척 힘들어했다. 시차의 차이도 교황을 많이 지치게 했다. 이틀 후 뉴델리 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11월 8일 오후 2시 15분 그루지야의 티플리스 공항에 착륙했다. 방문 목적은 정교회와의 화해였다. 1995년 5월 2일 교황은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를 공포하여 분열된 그리스도교회가 화해를 통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소망을 나타냈다. 가톨릭교회를 통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오랜 믿음을 뒤집는 행위였다.
비행기에서 내린 교황은 유난히 피로해 보였다. 근래에 와서 그런 모습이 자주 나타났지만 티플리스에서는 뭔가 달랐다. 교황의 차는 티플리스의 궁전을 들른 후 북서쪽으로 26킬로미터 떨어진 그루지야의 옛 수도 츠헤타의 대성당으로 향했다. 당시의 교황 모습을 독일의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날씨가 너무 추웠다. 특히 인도에서 방금 도착한 사람에게는 참기 힘든 추위였다. 대성당 안에서 나는 덜덜 떨었다. 얼마 후 교회 안으로 교황이 들어왔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늙고 혹사당한 자신의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몸을 떠는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 많은 성직자 가운데 누구 하나 달려가 그를 의사에게 데려가지 않는 게 참으로 이상했다. 당장 죽을 것처럼 보이는데. 옆에 서 있는 동료가 나직이 말했다. 우리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교황은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돌처럼 굳은 수족이 제각각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헐떡이는 숨소리는 듣기가 괴로울 지경이었다. 예수의 투니카가 보존되어 있는 숭엄한 교회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육신의 감옥에 갇혀 바들바들 떨고 있는 늙은 노인에 불과했다. 그는 목에 걸린 십자가를 움켜쥐려고 애썼다. 십자가를 움켜쥐면 새로운 힘이 생길 것이라고 믿는 듯했다. 우리들은 그의 고통을, 교황이라는 신분에 묶여 의자에 꼼짝 없이 앉아 있어야만 하는 그의 혹독한 고통을, 무서운 연극을 감상하듯 입을 벌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교황의 고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손을 뻗으면 만져질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그것은 이상한 경험이었다. 교황의 고통이 내 눈에 보일 수 있으리라고는, 내 손에 만져질 수 있으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선택된 인간의 고통이 선택받지 못한 인간의 눈에 보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과 분리된 존재가 어떻게 신적 존재의 내면을 볼 수가 있는가. 나는 그렇게 믿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고 있는 아이도 그렇게 믿었다. 그 믿음에 미묘한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1992년 7월 교황은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수술을 받았다. 결장에 생긴 종양이 악성으로 변하고 있었다. 1993년 11월에는 계단에서 넘어져 오른쪽 어깨가 골절되었고, 이듬해 4월에는 욕조에서 미끄러져 고관절에 보철을 이식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해 가을이 지나면서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공식석상에 나타났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통스러워했다. 파킨슨씨병도 그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그럼에도 그는 쉬려고 하지 않았다. 병든 육신을 질질 끌면서 세계를 돌아다녔다. 바티칸의 해외여행조직위원들은 교황을 조금이라도 덜 걷게 하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런 그들이 경악한 것은 1999년 1월 교황의 미국 방문 때였다.
바티칸 측이 미리 배포한 교황의 연설문은 미국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교황은 미국이 내세운 국가 정책의 원칙 자체를 비판했다. 미국은 ‘돈이라는 이름의 신’에 사로잡혀 자신의 부를 나눌 생각이 전혀 없는 나라라고 했다. 교황 방문 5주전 미국 전투기들이 이라크의 군사기지를 폭격,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라크 비행기가 비행금지구역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폭격의 이유였다. 교황은 미국을 ‘죽음의 문화'에 휩쓸린 나라로 규정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이후 교황의 관심은 자본주의의 병폐에 집중되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가 ‘죽음의 문화’에 침식되고 있음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경고했다. 죽음의 문화는 합법적인 사회제도적 형태를 갖추고 전 세계 도처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불의, 차별, 착취, 허위와 폭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미국이 있다고 했다. 그가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을 마지막까지, 가장 집요하게 반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세인트루이스 공항에는 환영 나온 사람이 없었다. 착륙장 바닥에 폭이 좁은 붉은 카펫만이 깔려 있을 뿐이었다. 교황은 구부정한 자세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안간힘을 쓰며 미국 대통령의 임시 막사까지 걸어갔다. 교황이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다가오는데도 미국 대통령은 연단 뒤편에서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교황은 대통령 옆으로 겨우 걸어가 섰다. 초강대국 대통령이 늙고 병든 노인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은 가톨릭교회가 미국의 정책에 어떤 영향력도 갖고 있지 않다는 메시지였다.
방송 카메라는 늘 교황을 따라다녔다. 바티칸은 교황의 쇠약한 모습을 의식해 텔레비전 촬영 횟수를 축소하려고 했다. 하지만 교황이 제지했다. 그는 고통에 시달리는 자신의 육신을 결코 숨기려 하지 않았다. 일부 추기경들은 육체적 쇠약이 교황의 위엄을 훼손시킨다면서 우려를 나타냈다. 그런 그들에게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고문당하고, 사람들의 침으로 더럽혀지고, 피까지 철철 흘리며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과연 위엄 있게 보였을까요?
나는 교황의 내면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울고 있는 아이였다. 그가 어머니를 잃은 것은 아홉 살 때였다. 내가 어머니를 잃었을 때보다 두 살 어렸다. 아홉 살 아이가 어머니 대신에 찾은 존재가 성모 마리아였다. 그가 교황 문장(紋章)에 새긴 것은 마리아의 첫 글자 'M'이었다. 그의 좌우명 ‘온전히 당신의 것’ 역시 성모 마리아를 향한 것이었다. 아그차의 총에 맞았을 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성모님, 저의 어머님······”이었다. 내 가슴 속 아이는 그런 그를 경멸했다. 질투하고, 증오했다. 경멸과 질투와 증오의 원천은 고통의 차이였다. 그의 고통은 은총의 한 형태였다. 하지만 나의 고통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두 세계는 어떤 연관도 없었다. 내가 그의 내면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을 잇는 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7.
교황 프로그램 현지 취재는 2003년 12월 14일에 시작되어 이듬해 1월 4일까지 계속되었다. 12월 14일부터 23일까지는 교황의 고향 바도비체, 그가 청년 시절부터 살았던 크라쿠프, 대학 강의를 했던 루블린, 자유노조의 진원지 그다니스크, 교황으로서 처음 방문한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을 취재했고, 12월 24일부터 1월 4일까지는 바티칸 궁을 중심으로 로마 일대를 취재했다. 카메라 기사와 음향 기사가 출장에 동행했고, 크라쿠프와 로마의 현지 유학생들이 우리들을 도왔다.
폴란드에서는 끊임없이 눈이 내렸다. 눈 내리는 바도비체는 쓸쓸하면서도 아늑했다. 쓸쓸한 아늑함 속에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가 살았던 집과 그가 기도했던 성당과 그가 걸었던 길들을 찾았다.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집과 성당과 거리에서, 낡은 사진 속에서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눈물에 젖은 한 아이였다.
바도비체에서 승용차로 30여분 거리에 있는 아우슈비츠는 눈보라에 휩싸여 있었다. 교황이 아우슈비츠를 찾은 것은 1979년 6월 7일이었다. 그는 아우슈비츠 앞에 선 최초의 교황이었다.
-이곳은 대단히 특별한 성소입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제가 아우슈비츠에 오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눈보라에 휩싸인 아우슈비츠를 보았을 때 한 아이가 떠올랐다. 열두 살이라고 했다. 아이는 맨발로 몇 시간 동안 눈 위에 차렷 자세로 서 있거나 옥외 노동을 했다. 수용소에는 아이의 발에 맞는 신발이 없었다. 아이는 동상에 걸렸고, 수용소의 의사는 시커멓게 썩은 발가락들을 족집게로 하나하나 뽑아냈다.
가야할 길이 막혀 있으면 걸음을 멈춘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핀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다. 아우슈비츠는 인류의 길을 막아선 낯선 벽이었다. 그 낯선 벽 앞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8.
교황의 죽음을 안 것은 2005년 4월 2일 아침 아홉시 반경이었다. 전날 저녁에 방영된 교황 프로그램을 본 후 과음했다. 집에는 새벽 3시쯤 들어왔다. 눈을 뜨니 아홉시가 넘어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찬물을 들이키고 거실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켰다. 꿈에서 본 소년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나는 어디에서 소년을 보고 있었을까? 내 몸은 보이지 않고 소년의 몸만 보였다. 소년의 몸은 새처럼 가벼웠다. 보고만 있는데도 그렇게 느껴졌다. 소년이 15층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진 것은 2003년 12월 20일이었다. 내가 바도비체에서 눈물에 젖은 한 아이를 찾고 있을 때였다. 나흘 후 바르샤바 공항에서 소년의 죽음을 알았다. 로마행 비행기를 타기 전 R에게 전화를 했는데, R이 그 소식을 전했다. 그날 밤 성 베드로 성당에서 성탄 자정 미사를 집전하는 교황을 직접 보았다. 그는 겨우 숨을 쉬었다. 겨우 움직였고, 겨우 말했다. 그의 육신은 무거웠다. 그는 무거운 육신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의 고통이 느껴졌다. 소년은 뛰어내렸으나 그는 뛰어내릴 수 없었다. 그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행위는 기다리는 것이었다. 신이 그를 부를 때까지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생각했다. 의미가 없는 고통과 의미로 충만한 고통에 대해. 소년의 고통은 소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의미 없는 고통은 악이며, 악은 소년을 마침내 죽음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소년의 고통이 의미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년의 고통은 나에게 의미가 있었다. 내가 소년을 느낀 것은 소년의 고통을 통해서였다. 소년의 몸에서 흘러나온 고통이 내 몸 속으로 흘러들어옴으로써 분리된 두 존재가 연결되었다. 소년의 죽음을 알았을 때 나는 고통스러웠다. 나의 일부가 상실된 듯한 고통이었다. 나는 당황했다. 나는 내가 소년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까마득히 몰랐다. 그것은 돌연한 사랑이었다. 전혀 예기치 않은, 도적처럼 찾아온 사랑이었다. 사랑을 불러일으킨 것은 고통이었다. 소년의 고통 속에서 나의 고통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사랑의 감정이 생길 수 있었을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오직 악이었을 뿐인 나의 고통이 소년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었다. 눈을 감았다. 어머니가 보였다. 피투성이가 된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죽음의 그림자에 싸여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봄 햇살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소가 너무 눈부셔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감은 채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 가슴 속 아이의 고통은 누구에게 흘러갔을까, 누구의 가슴 속으로 흘러들어가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사랑을 불러일으켰을까, 하고.
신의 실체가 사랑이라면, 그리고 사랑의 근원이 고통이라면, 인간의 모든 고통은 신에게로 흘러들어갈 것이다. 교황은 신의 대리자다. 신의 대리자는 신의 고통을 가장 예민하게 느낀다. 나의 고통이 신에게로 흘러갔다면, 교황의 고통 속에 나의 고통이 고여 있을 것이다. 그가 진정한 신의 대리자라면.
무언가가 소파에 누운 나를 벌떡 일어나게 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벌떡 일어났다. 내가 몸을 일으킨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떤 손이 내 몸을 일으킨 것 같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이었다. 흐릿한 사각의 화면에서 교황의 죽음을 알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를 씻기소서. 나 곧 눈보다 희게 되리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머리 속에서 나는 것인지 텔레비전에서 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참으로 오래 살았다. 겨우 숨을 쉬고, 겨우 움직이고, 겨우 말을 하는 그를 보며 이제 그만 짐을 내려놓으시라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생명은 참으로 질겼다. 금방 죽을 것 같았던 그가 2004년 성탄미사와 이듬해 신년미사를 집전했다. 교황 프로그램 방영 시기에 대해 여러 차례 회의를 했다. ‘서거 특집’이라는 말을 붙이려면 그가 죽어야 한다. ‘서거’라는 말을 빼고 방영하자는 의견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세해져갔다.
그가 공식석상에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2005년 3월 27일 부활절 정오였다. 그날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자들에게 힘든 모습으로 침묵의 축복을 보냈다. 목소리를 낼 수가 없어 국무장관인 소다노 추기경이 교황의 부활 메시지를 낭독했다.
-주님께 간청 드립니다. 부디 저희들과 함께 하셔서 저희들에게 평화의 언행을 가르쳐주시옵소서. 당신이 피 흘려 성별(聖別)한 지상에 평화를 주시옵소서. 골육상잔의 전쟁 위험이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인류에게 평화를 주시옵소서. 밥상에 함께 앉은 사람들의 조각조각 찢긴 빵이여! 오늘도 비참함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저 수많은 사람들과 나눔을 간직할 힘을 저희들에게 주시옵소서.
그가 인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간절했다. 그의 간절함을, 나는 믿었다. 간절함은 고통 속에서 나온다. 그에 관한 기록을 뒤지고, 그가 태어나고 자란 땅과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그가 기도한 곳을 서성거리면서 내가 늘 생각한 것은 그의 고통이었다. 사도의 성당에서 마침내 늙고 쇠약한 그의 육신을 보았을 때 내 눈이 젖어든 것은, 그의 고통 속에서 나의 고통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의 고통 속에서 나의 고통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때 내 몸에 닿은 시선에 대해. 그것은 아이의 시선이었다. 따뜻한 빛에 싸인 아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한 얼굴이 아니었다. 내 가슴 속 아이의 얼굴이기도 했고, 바도비체의 골목길을 걷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기도 했다. 허공을 새의 형상으로 걷고 있는 소년의 얼굴이기도 했고, 아우슈비츠의 눈보라에 휩싸여 떨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기도 했다.
그가 숨을 거두면서 응시한 곳은 창문이었다. 나는 궁금했다. 창문 너머에 무엇이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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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소설을 올려주신 태양님께 감사드립니다.
정찬님의 소설은 다소 어렵고 잘 읽히지는 않지만 다 읽고나면 숙연함을 선물합니다. 한번 읽어 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