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편지3097]
2022년 6월 23일 목요일
■저는 ‘그들이 어떤 아버지일까?’ 궁금해졌습니다.
■샬롬! 오늘 하루도 내내 건강하고 평안하시길 빕니다.
■ 초등학생 꼬마 ‘요요’는 아빠랑 단둘이 네덜란드의 한 시골에 살았습니다. 아빠는 항상 불만에 차서 아들에게 미소를 짓거나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습니다. 요요는 이런 아빠의 관심을 받고자 애썼습니다. 설거지와 빨래도 도맡아 하고, 다른 아이들처럼 아빠에게 수다도 떨지만, 아빠는 시끄럽다면서 화를 냈습니다. 요요는 ‘아빠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게 자기 탓’이라고 여겨서 항상 아빠의 눈치만 봅니다. 어느 날, 요요는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 갈까마귀를 발견하고 아빠 몰래 자기 방에서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외로운, 너무나 외로운 요요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가수였던 엄마가 ‘지금도 미국 순회공연 중’이라고 믿으며, 아빠와 나누지 못한 대화를 빈 전화기에 대고 조잘댔습니다. 그러던 요요가 부모에게서 받지 못한 애정을 어린 갈까마귀에게 쏟으며 비로소 사랑을 배웠습니다. 주기만 해도 기쁜데, 갈까마귀 덕분에 ‘사랑받는 기쁨’까지 알게 된 것입니다. 아빠가 분노를 폭력으로 표출하는 걸 보고 자랐지만, 요요는 아빠로 인하여 쌓인 자신의 분노를, 폭력으로 푸는 대신, 갈까마귀에 대한 사랑으로 대체했습니다. 요요의 마음 깊은 곳에서 들끓던 분노는 어느새 다정한 돌봄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영화 ‘갈까마귀 소년’의 줄거리입니다.
얼마 전, 아침에 부산행 KTX를 탔습니다. 아침기차는 노트북작업을 하거나 모자란 잠을 청하는 승객들이 대부분이라 고요한데, 이날은 달랐습니다. 마주 보는 좌석 여덟 개를 점한 아저씨들이 출발 전부터 흥겨운 먹자판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마스크도 벗은 채 쩌렁쩌렁하게 웃고 떠들었습니다. 역무원들이 거듭 주의를 주고, 승객들이 호소해도, 소용없었습니다. 전 열차가 만석이라 자리를 옮길 수도 없었던 승객들은, 그들이 동대구역에서 내릴 때까지, 두 시간 동안 꼬박 견뎌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이 내렸습니다. 저는 ‘그들이 어떤 아버지일까?’ 궁금해졌습니다.
‘자식들도 똑같이 보고 배울까, 아님 저런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며 반면교사로 삼을까?’ 같은 칸에 탄 승객 중에는 아주 힘든 하루를 시작해야 할 사람도, 설렘을 안고 기억에 남을 하루를 남기고픈 사람도 있을 텐데, 그들 때문에 더 힘든 하루가 되었고, 불쾌한 기억을 갖게 되었습니다.
‘공감능력이 없는 부모’는 자신의 감정만 중요하기에 자식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자식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모릅니다. 자식은, 이런 부모 때문에 누적된 분노를 무고한 타인에게 풀거나, 자신의 자식에게 대물림할 수 있습니다. 남들의 고통에 둔감한 그 여덟 명의 이기적인 행동은 이 사회에서 빈번하게 목격되는 ‘몰상식’들 가운데 하나겠지만, 이런 행동들이 대물림되지는 말아야 합니다.(D닷컴, 이정향 /영화감독)
저는 이 글을 준비하면서, 어느 권사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의 딸은 아빠인 권사님을 무척 잘 따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시로 ‘난 아빠가 좋아!’라는 문자를 보내오곤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권사님은 그 딸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실 그 딸이 ‘마음속으로는 아빠를 미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에 아빠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직도 그 딸의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있었던 겁니다. 그 권사님은 저에게 “내가 그동안 좋은 아빠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참으로 허전하고 쓸쓸합니다.”라고 털어놨습니다.(물맷돌)
■[나도 이제는 내 분노를 쏟아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조금도 가엾게 여기지도 않겠다. 그들이 큰소리로 나에게 부르짖어도, 내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않겠다.(겔8:18,표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