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하이
갑판원 몇몇이 상하이 시내 조선족 술집에 드나들며 노래하고 마시며 며칠을 즐겁게 지냈다. 누가 그러는데, 우리 동료 아무개와 술집 여자들 사이에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뭐 굳이 참견할 일도 아니고 해서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흘려 듣고 말았다. 그러다 출항 날이 됐다. 출항하려고 마악 계선색을 풀어낼 즈음, 갑자기 조선족 여자들 몇몇이 우리 배를 향해 뭐라 고함을 지르며 돌진해 오고 있었다. 이게 웬일? 이윽고 부두에 도착한 여자들은 우리 배를 마주 보더니, 한 목소리로 합창을 시작했다. "술값 주고 가라, 이놈들아!"
상해의 조선족 술집인 '영빈관' 여자들이라고 했다. 창피해라, 이게 무슨 망신인고. 실습생들은 얼씨구나 이게 웬 구경거리지? 하며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들이고 조선족 여인들은 기세가 등등하니 당장이라도 배로 뛰어들 기상이다. 선장 체면에 나는 모른 채 하고, 대신 일등항해사가 나섰다. "도대체 어떤 새끼야 술값 떼어먹고 달아나려는 게" 울그락불그락 화가난 일등항해사가 조선족 여자들 못지 않게 길길이 뛰었다. 범인은 갑판원 김 씨였다. 전국노래자랑 예선전까지 참가했던 우리의 김씨. 그에게 지금 망신살이 뻗힌 거다.
KBS 전국노래자랑 군산 예선전이 벌어지던 날. 나를 포함한 몇몇 선박 동료들은 우정 응원까지 갔었다. 한데, 그만 예선전에 떨어지고 말았다. 거 참 이상했다. 상당한 노래 솜씨였는데, 특히 그 날 부른 <돈타령>은 누가 봐도 기막힌 노래였다. 그런데 떨어진 거다. 왜 떨어졌지?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여하튼 김 씨는 동료들한테 급하게 돈을 빌려 외상 술값을 겨우 치르긴 했지만, 결국 망신은 망신대로 당하고 그 일로 두고두고 놀림감이 되고 말았다.
천진
천진항에 입항하자 조선족 여자들이 운영하는 술집 대구집과 청하집에 쌩 난리가 벌어졌다. 비가 거의 오지 않은 이곳은 대부분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다. 그러잖아도 무더운 7월 염천에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이란 말인가. 불과 한 집 건너 나란히 붙어있는 두 집은 숙명의 라이벌 관계다. 작년까지만 해도 대구집이 일방적으로 앞서나갔다. 안주 공세를 취한 게 제대로 주효했는데, 올해는 사정이 달랐다. 절. 치. 부. 심. 장고 끝에 청하집에서 비장의 카드를 빼어들었다. 세월이 가도 영원히 변치 않는 전통의 무기, 청하집만의 히든카드를 준비했으니, 다름 아닌 미인계였다. 일단 미인계로 한발 먼저 치고 나왔다. 대구집 여자들의 평균 나이는 30대 후반으로 이 동네에서는 이미 한물갔다고 치부되는 퇴물급 수준인데 반해, 청하집은 20대 쌩쌩한 조선족 미녀들로 중무장했다. 게다가 연변에서 이제 막 건너온 뉴페이스까지 새로 가세했다고 한다.
적당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는데, 50년대 식 M1 소총과 고성능 M16으로 겨루는 식이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보았지 않은가. 축구 선수 나이 30대 후반이면 아무래도 체력이 달리기 마련이다. 하물며 얼굴로 먹고사는 이 동네에서랴! 가명이지만 이름도 예쁘다. 은실이, 순지, 혜순이. 생각다 못한 대구집에서는 아예 부두 입구에 미니 봉고차 - 여기서는 빵차로 통용된다 - 를 대기시키는 등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여념이 없다. 부두에서 시내까지 택시비가 인민폐 50위안으로,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도 무료로 태워다 주겠단다. 시내 볼 일 마친 고객들을 사그리 자기 집으로 유인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나저나 작년보다 200달러 상승한 해외 상륙비로 더 정신이 없게 생겼다. 그동안 100달러 남짓했던 상륙비가 올해부터는 대거 300달러로 두 배 많아졌다. 여행까지 공짜인데, 상륙비까지 늘어난 것이다. 여하튼 이래저래 반가운 일이었다. 기관원들은 - 주로 30대다 - 대거 청하집으로 옮겼지만, 50대 노털이 주류인 갑판부는 마르고 닳도록 대구집만을 고수하고 있다. - 갑판원 홍 씨만 특이하게도 중국인 술집을 출입한다고 한다 - 뭐니뭐니 해도 말상대로는 산전수전 다 겪은, 그저 한 살이라도 나이든 축이 나은 법이라며 한 우물만 파는 거였다. 하지만 정작 사정은 다른데 있었다. 머리가 히끗히끗한 주제에 청하집 은실이 혜순이를 감히 넘어다 봐? 해서 어쩔 수 없이 대구집에 눌러 앉게 된 거였다. 밥만 먹었다 하면 달아나니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 듯 대구집 청하집 오가느라 정신들이 없다. 당직만 끝났다하면 잽싸게 달아나 버리니 이를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들리는 말인즉, 청하집 은실이가 물건은 물건인가 보았다. 어째 될듯될듯 하면서도 결정적인 대목에 이르면 여지없이 뒤로 퉁겨 버리니, 여자에 관한 한 자타가 인정하는 기관원 박 씨까지도 진즉 두 손 들었다고 한다. 얼굴만 빼어난 게 아니라 노래도 수준급이라 한다. 그러니까 재색을 고루 겸비했다는 말이겠는데, 북한 아이들이 즐겨 부른다는 "엄마 아빠 뽀뽀뽀" 어쩌고 하는 동요는 물론이고, 김수희의 <립스틱 짓게 바르고>, 한동안 북조선에서 유행하던 <휘파람> 까지 구성지게 불러 대니, 제 아무리 목석인들 안 넘어가고 배겨?
지금 기관원 몇몇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은실이를 요절낼꼬 궁리들이다. 저녁을 마치면 으레 품평회가 벌어지는데, 대충 짐작하기로 이번엔 청하집으로 판정승이 날 것 같다. 자, 오늘 저녁은 어떤 역사가 이뤄질지 두고 볼 일이다. 참고로, 대구집과 청하집은 각각 15명 정도의 조선족 여자들이 있다. 그녀들과 즐기기 위해서는 우선 술부터 팔아 줘야 한다. 한 테이블 기본은 맥주 다섯 병에 안주 한 접시로 100위안(한화 15,000원)이다. 만약 여자를 데리고 나가려면 팁으로 300위안을 지불해야 하는데, 이 돈엔 화대비가 포함되어 있고 하루종일 파트너 노릇까지 해 준다. 그렇다고 모두 따라나서는 게 아니다.
드물긴 하지만 청하집 은실이처럼 고집불통도 간혹 있다. - 누구 말로는 지금 은실이가 고도의 전략을 구사 중 이라는데, 누가 그 속을 알랴! - 여하튼 팁은 전부 여자 몫이고 술집은 술만 마시면 된다. 그러니까 최소한 400위안을 써야 한다는 결론이고, 거기다 식사비까지 포함하면 대충 500위안에서 600위안이 소요되니까 10만원 정도는 가져야 하루를 느긋이 즐길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부두 노동자 한 달 수입이 500위안이니 실로 엄청난 돈이 아닐 수 없고, 우리 돈으로 따져도 결코 만만한 경비가 아니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라 매춘을 공식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한국 선원들은 우선 말이 잘 통하고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조선족 여자들을 찾기 마련이다.
대구집이나 청하집은 선원들이 찾기 쉬운 부두 근처에 있는데 순전히 한국인만 상대한다. 오후 2시 반에 나가서 5시에 귀선 한 주방장이 불과 3시간 여만에 500위안이나 날렸다고 투덜거린다. 맥주 몇 병 마시고, 조선족 아가씨에게 250위안을 팁으로 주다 보니 순식간에 500위안을 쓰게 되더란다.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데이트는 내일로 미루고 우선 팁부터 주고 왔단다. 말하자면 미리 선불을 준 셈인데,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주방장에게 들으니, 지금 청하집에 우리 배 선원들 7, 8명이 진을 치고 있다고 한다.
해도 아직 안 졌는데 뭣이 그리도 급하단 말인가. 그나저나 선내 기강이 완전히 흐트러지고 말았다. <초한지>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천하장사 항우의 군사와 오래도록 대치했던 유방은 항우의 기세가 워낙 완강하자 계책을 쓰기로 했다. 이윽고 밤이 되자 몇몇 군사들을 시켜 풀피리를 불게 했다. 달빛은 교교하고 인적마저 끊긴 산속. 어데선가 애간장을 녹이는 듯한 풀피리 소리가 들리자 몇 년씩 전쟁터에서 보낸 항우의 병사들은 그만 향수에 젖어 흐믈흐믈해지고 말았다. 그 틈에 유방의 군사들이 벼락같이 달려들어 항우의 군사를 대파시켰다고 한다.
지금 우리 배가 그런 식이다. 바다에서야 기개 충천한 뱃사람들이지만 허리 잘록한 조선족 미녀들을 만나자 아얏 소리 한번 못해보고 그만 납죽 쓰러지고 만 거다. 여자 데리고 시장 구경하랴 식사하랴 실컷 돌아다니다 다시 술집으로 간다. 그러다 몇 병 마시고 다시 시내 구경. 그런 식으로 하루 내내 술집에서 죽치고들 있단다. 기관부는 청하집 갑판부는 대구집. 그러니 배는 선장과 일등항해사, 나머지 최소 인원이 지키고 있는 셈이다. 세상에, 이런 한심할 데가 있나! 샌님 같은 이등항해사까지 청하집 아가씨 치맛자락에 휘감겨 있다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해가 졌는데도 도무지 배에 들어올 기색이 없다. 이젠 완전히 맛이 갔나 보다. 아, 슬프다. 우리의 기개 높던 병사들이 어찌하여 한낱 풀피리 소리에 저리도 연약해졌단 말인가. 오후녘에 글 쓰다 말고 잠깐 바람쐬러 선수갑판에 나왔더니 검정 티셔츠 차림의 청년이 나에게 손짓한다. 뭐 여수집에서 왔다나? 잘 해줄 테니 가자는 거였다. 아, 이젠 병사들이 쓰러지자 최후의 보루인 나에게까지 유혹의 손길을 벌리는구나. - 고백하자면, 나 역시 당장 따라 나서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선장 체면에....생각해 보라, 선장 선원이 한데 뒤섞여 얼씨구 절씨구? 아이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 여하튼 큰일은 큰일이었다.
바야흐로 우리 배는 산으로 올라가기 직전이다. 노를 저어야 할 사공들이 모두 술집으로 달아났으니 대체 누가 노를 젓는단 말인가. 삼등항해사가 지금 얼이 빠졌다. 작년에 입항했을 때 대구집의 미스 최와 한동안 염문을 뿌리더니, 금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미스 최는 우리가 돌아간 후 술집을 그만두고 직장에 다녔다고 하는데, 엊그제 우리 배가 입항했다는 소식에 직장 끝나자마자 늑달같이 달려 온 거다. 그 바람에 삼등항해사가 그만 뿅 가고 말았다. 지금 그에겐 누구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한 마디로 눈에 뵈는 게 없는 거다. 원래는 삼등항해사 당직 차례인데, 나이든 갑판원 윤씨에게 후사를 부탁하고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고 한다.
이거 도무지 뭐가 뭔지. 직책, 나이를 막론하고 온 병사들이 저 지경이니, 이러다 체력이라도 달리면 어떻게 전쟁을 치러야 한단 말인가. - 아직 실습이 끝나려면 열흘도 더 남았다. -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항구를 뜨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여자에 관한 한 선장이 아니라 그 누가 와도 별 수 없고, 백약이 무효인 거다. 나 역시 이미 두루 경험한 일이라 그 속을 잘 파악하고 있다. 이번 천진항 체항은 현지 부두 사정으로 하루 단축되었다. 그 바람에 초조해진 선원들이 더욱 뻔질나게 술집 출입을 한다는 거다.
일등항해사 말에 의하면, 여유가 있으면 느긋이 만날 텐데, 워낙 빠듯하다 보니 숫제 발악을 한다는 거였다. 아침 식사 때 청하집 이야기가 나왔다. 이 말 저 말 오가더니 이등기관사가 그런다. "청하집에서 그러는데요, 해림호 식구들 얼굴 다 봤는데, 어째 선장님 기관장님 두 분만 안 오시느냐고 그러더라구요" 기관장이야 관광 다니느라 못 갈 형편이라, 결국 나만 빠진 셈이다. "야 이놈아, 난들 가기 싫어서 안 갔겠냐?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체면에 차마 못 가는 거지" 저녁이 되자 청하집 아가씨 한 명이 아예 배 앞에서 진치고 있다. 세상에! 이러다 배 안에까지 들어오게 생겼다. 잠시 후면 관광 갔던 실습생들이 돌아올 텐데, 얼른 쫓아 보내야겠다. 순진한 실습생들까지 물들게 생겼으니.
대련
입항하자 조선족 술집에서 왔다며 왠 청년이 명함을 한 장 주고 간다. '은하수' 마담 조상화라고 쓰여 있다. 근간에 한 번 꼭 들러주시란다. 이등기관사가 그 청년에게 아는 체 한다. 이등기관사 역시 작년에 한 번 간 적이 있는데, 우리 선원들도 대부분 들렀을 거라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기관원 한 명이 아직 귀선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리 소문없이 외박하려다 결국 들키고 만 거다. 누군가 했더니, 여자에 관한 한 자타가 인정하는 프레이보이 박 씨였다. 청하집 은실이한테 내내 헛물켰던 바로 그 사람. (2002년 7월 9일 대련항에서)
첫댓글 갑자기 배가 타고 싶어지는데요. 새우잡이 배 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