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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겁의 인연들(因緣)
우리는 임원항 회집(황지)으로 갔다.
여기 회집단지가 조성되기 전부터니까 30년 넘는 인연의 집이다.
모처럼, 어렵사리 세운 계획을 수포되게 한데다 독감 후유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인데 멀리까지 오게 해서 더욱 미안했다.
그래도, 귀로의 부담은 크지 않으리라(주거지가 접경인 북면 부구
리니까) 여겼는데 울진으로 이사했다니 더더욱 몸둘 바를 몰랐다.
만날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 만나게 된다는 그녀의
인연관을 반추하며 우리는 다시 울진으로 돌아갔다.
내가 삼척 찜질방으로 원행할 계획을 바꾸면 그녀가 울진읍까지
홀로 차를 몰고 가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녀는 내 수족 다 묶고 풀코스를 자기 뜻대로 했다.
그러고서도 융숭하게 모시지 못했다는 수선혜 보살님!
응봉산 정상의 해후가 이렇듯 인연이라는 예약의 일환일 줄이야.
울진 동명탕 3박을 끝내고 호산에 다시 선 시각은 12월16일08시.
울진이 경북으로 감으로서 강원도의 최남단 원덕읍 소재지다.
갈령과 20리길 옥원역창(沃原驛倉)은 현 옥원리다.
원덕읍 다운타운(호산리) 서북쪽으로 신7번국도가 통과한다.
구7번도로변에는 옥원소공원도 조성되었다.
오원(五原)이라고도 했다는데, 고종 31년(1894)에 관제 개혁으로
역과 객사였던 옥원관(沃原館)이 폐지되고 옥원리라 하였단다.
그러나, 왜구방어의 중요한 전략지로 인식되어 평릉(동해시)이하
9역을 관장하는 강원 영동남부의 중심역으로 격상되었고, 역승겸
수성천호(驛丞兼守城千戶)를 배치한 때도 있었다.
또한, 옥원역 인근에 토성(土城)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일대가 취락과 경작지로 변했으나 예전엔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대동지지도 성창(城倉)이 옥원성에 있다(在沃原古城)고 말한다.
지역민들은 옥원역이던 일대에 마구간 흔적이 오래 남아있었으며
용화~교가~대치~삼척으로 이어지는 옛대로 외에 옥원역발 산로
(山路)가 있었으나 험하여 폐지되었다고 증언한다.
만년원(萬年院)이었던 임원리(臨院)를 거쳐 신남 해신당(海神堂)
까지 걸음을 재촉했다.
삼척까지 하루거리로 하려면 그래야 했다.
실은, 이 일대는 달거리도 하지 않고 뻔질나게 드나들던 곳이다.
1970년대 중반의 한 인연으로 이 지역에 공을 들였다 할까.
내가 몸담았던 대학의 한 동아리와 자매결연을 맺게 한 후 그들을
통해서 지원했고 나는 어촌지역민의 애로를 푸는데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내 좁은 집을 무시로 활용했고, 내 아내가 혈연관계가 아닌
그들에게 헌신적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1980년대까지도 이즈음과 달리 현대문명의 소외지역이었으니까.
입소문으로 알려져 이웃 어촌들의 환대로 이어졌고, 친지들은 "그
지역 국회의원이 되려 그러느냐"고 색안경을 쓰고 볼 정도였다.
옷깃만 스쳐도 억겁의 인연이라느데 우리의 인연들은?
해신당 남근 이야기
신남리 해신당 앞까지 나아갔다.
일명, 해낭당(海娘堂)인 해성황당(海城隍堂:海神堂)은 향동해(向
東海)의 야산 언덕에 있다.
해신당에는 구전(口傳)돼온 한 전설이 있다.
<미역 따러 가는 한 처녀를 태운 젊은 사공은 미역이 많은 바위에
처녀를 내려 놓고 석양에 데리러 올 것을 약속했다.
열심히 미역을 딴 후 사공을 기다리던 처녀는 지쳐 쓰러졌고 결국
익사하고 말았다.
사공이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이 사고 이후에는 고기가 잡히지 않았다.
처녀의 원혼을 달래는 갖은 치성에도 불구하고 흉어는 계속되고
출어에 나선 장정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화가 난 한 청년이 술기운에 성황당 제단을 부수고 방뇨를 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 후 풍어가 계속되고 사고도 일어나지 않은 것.
이 처녀의 원귀가 남자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라 믿은 어민들은
남근을 깎아 걸어 놓고 치성을 드리기 시작했다>
'애바위'는 처녀가 미역 따다 익사한 바위로 파도에 휩쓸리면서도
살기 위해 애쓴 바위라는 뜻이며 1km쯤 떨어진 해중에 있다나.
해마다 정월 보름(陰)과 10월 축일에 어민들이 목남근(木男根)을
깎아 금줄에 걸어놓고 풍어와 무사고(해난)를 빈단다.
이상은 신남리가 남근숭배무속마을이 된 내력이다.
남근숭배무속(男根崇拜巫俗)의 한 유형이 요란한 공원으로 발전
했으나 신국도로 인해 차량통행이 뜸해 봐주는 이도 드물겠다.
산에서도 천연 또는 조형남근석과 음문(陰門)을 종종 대면하지만
내 관심을 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고백컨대 혐오스런 조형물이다.
갈남을 지나 근덕면 장호리에 들어섰다.
용화까지 원덕읍에 속했다가 장호까지 근덕면으로 바뀐 곳이다.
용화역(龍化驛)이 있던 용화리로 나아갔다.
중마 1필(中馬)과 하마 7필(下馬)을 보유했던 역참인데 1887년의
산화때 불에 타 없어졌다나.
용화리는 북쪽 해안에 용굴(龍窟)이 있어서 용해(龍海)라 했는데
와전으로 용화리(龍化)가 된 것이라고.
신설된 고갯길 관광포트에서 잠시 용화해수욕장을 응시했다.
음주단속이 없던 1970년대에 저 곳에 갖은 에피소드를 뿌려놓고,
나만 두고 먼저 가버린 벗들이 야속하기만 했다.
이 야속한 벗들은 해신당을 지날 때마다 자기네의 정력 무용담도
늘어놓곤 했는데 저승에서 나누는 화제는 무엇일까.
해신당 여귀(女鬼)처럼 홀로 남겨둔 내게 뭘 바라지는 않겠지?
용화 고갯길가의 관광포트(정자)
평해대로 스케치3(마라톤과 일제)
불현듯 치미는 허전이 주체스러워 부리나케 걸음을 재촉했다.
구7번국도를 버리고 초곡리 황영조공원까지 단숨이다싶이 갔다.
1992년 8월 9일 바르셀로나 몬주익(Spain Barcelona,Montjuic)
경기장에 애국가가 울려퍼지게 한 황영조를 기념하는 공원이다.
마라톤 우승자인 그가 1970년 3월 22일 이 마을에서 태어났단다.
송림 울창한 해안뚝을 따르면 문암해수욕장, 미륵사, 문암교회를
지나 삼거리 초곡해변편의점 앞에 당도한다.
문암마을(초곡)~궁촌에 해양레일바이크(rail bike)가 생긴단다.
일제때 동해안 철도부설을 위해 닦다 만 노반(路盤)을 보수 보완
하면 될 것이다.
용화에도 교각들만 달랑 서있고 황영조공원 밑엔 터널이 뚫렸고
해안으로는 울창한 송림 사이로 잡초 무성한 노반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가 얼마간 더 연장됐더라면 기적소리가 요란했을까.
이로 인해 우리 인력이 혹독하게 착취당했을 것임은 물론이지만.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는 우리나라 손기정이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월계관을 씀으로서 통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 신문의 소위 일장기 제거사건이 있었다.
그로부터 56년 후에 태극기를 달고 월계관을 쓴 우리 선수의 기념
공원이 일제가 수탈수단으로 부설하려던 철도노반 위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노반은 레일바이크에 활용된다.
마라톤과 일제의 관계,
흥미로운 역사의 진행이다.
위로부터 1) 문암해수욕장 입구 미륵사와 송림길
2) 문암해수욕장 해변의 송림길
3) 일제때 철도부설을 위해 뚫은 터널
4) 송림길은 일제가 철도부설을 위해 닦아놓은 노반이다.
그 때 조성한 노반 양편으로 장송이 우거져 있어서 원평해수욕장,
추천 앞까지 참으로 감칠맛 나는 산책길이다.
여름 휴가철이면 설악산에 오른 후 포항 한하고 해안길을 달리며
호연지기(浩然之氣)의 벗들과 야영하던 지역이다.
밤을 쫓던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주선(酒仙)들은 왜 없는가.
나만 홀로 두고 가버린 몹쓸 사람들 생각에 또 걸음을 재촉했다.
군부대가 해안을 경비중이던 때엔 얼씬도 할 수 없었던 바닷가를
따라 갈내(秋川)를 건너 공양왕릉이 있는 궁촌1리로 갔다.
경비군인 전용 간이다리가 부대의 철수 후 방치되어 왠지 위태한
느낌이 들 만큼 삐걱거려 추락을 각오해야만 진입할 수 있겠다.
일제가 동해안 철도부설을 위해 갈내(秋川)세운 교각(그림 상)과
해안경비 군부대가 사용하던 간이 다리(그림 하)
이성계의 쿠데타로 곡두각시 왕이 된지 4년만에 폐위된 고려34대
최후 공양왕(恭讓)이 군(君)으로 강등, 원주(原州)에 추방되었다.
그 후, 간성(杆城)을 거쳐 이곳에 와서 세상을 떴다.
살해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 곳으로 궁궐을 옮겼다 하여 궁촌(宮村)이라 했다는
것은 억지다.
엄밀히 말하면 왕릉도 아니다.
동막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살해재, 그 아래를 살해골이라 한단다,
공양왕과 세자를 이 곳에서 살해했다 해서.
용화 관광포트에서 달걀 3개를 먹은 후라 걸을 만 했는데 동막3리
동막골촌두부집 앞의 즐비한 차량들이 늙은 길손을 끌어들였다.
북적대는 집에서는 대접받지 못함을 익히 알면서도 굳이 손님이
많은 집으로 가는 까닭은 바로 그 많은 손님들이다.
교가역이 머잖았으므로 촌두부를 여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맛도 괜찮은 것은 역시 많은 손님이 그 증거다.
지명 미스테리
동막교(東幕橋) 건너 마읍천(麻邑川)을 끼고 가다가 광태리(光泰)
송림 앞에서 한 촌로가 말을 걸어왔다.
괴이쩍은 행색의 늙은이에 대한 당연한 관심일 것이다.
자기 연배로 보았다는 60대 후반의 그는 깍듯이 예를 갖추었다.
나의 일정을 들은 그는 선대로부터 들었다는 교가역(交柯驛)터를
내게 가르쳐 주었다.
현 교가리가 아니고 광태리 근덕주유소 일대라는 것.
아마, 예전에는 광태리까지 교가리에 포함됐던 것 아닐까.
지금은 근덕면 소재지지만 예전 한 때 평릉도찰방(平陵道察訪)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대로의 이정표인 대동지지 정리고(程里考)에는 교가역이
교하역(交河)으로 되어 있어 혼란스럽다.
강원도 삼척편 <驛站>항에'南25里 交柯驛'과 다른 註書에 交柯로
기록되어 있어 다행이지만.
이같은 오자(誤字)는 도처에서 발견되어 확인에 애를 먹는다.
원본의 오류는 필사자를 통해 그대로 이어가고, 필사중에 생기는
오자들까지 가세하여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다.
(고산자와 필사자의 오류 관계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그 뿐인가.
역사적 사실 판단에 심각한 오류가 비일비재하는 것이 옛 문서(기
록)들을 절대무오의 경전처럼 받드는데서 비롯되는 것 아닌가.
근덕면의 중심가인 교가리, 면사무소 맞은편으로 좀 가면 최소한
1.000수(壽)는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느티나무(櫷木)가 있다.
고려31대 공민왕 4년(1355)과 이조26대 고종 22년(1885), 2회의
화재가 있었는데 첫 화재때인 1355년에도 이미 거목이었다니까.
마을 이름 교가리((交柯里)도 "나무가지가 상교(相交)한다" 해서
유래되었단다.
상교와 연리(連理)는 엄연히 다르렸다.
상교가 근친관계라면 연리는 남남간이니까.
옛 교가역 터(상)와 교가리의 1.000壽 느티나무 (하)
이즈음, 이 느티나무가 강원도기념물(제14호)에서 국가지정 천연
기념물로 격상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단다.
25m의 키에 가슴높이의 줄기둘레가 9m로 우리나라에서 최고령
느티나무 중 하나인데다 생물학적 가치는 물론 오랜 세월에 걸쳐
조상들이 보살펴 자랐으므로 민속적 자료 가치도 충분하다는 것.
근덕면의 수호신이라는 이 고목에 과연 밝은 빛이 비취게 될까.
15리길 대치(大峙) 밑에 도착했을 때 해가 뉘엿거렸다.
大峙는 한재다.
한데, 직경 50m 이내에 있는 여기 이정표들도 자유분방한가.
한재, 한치, 漢峙....
저마다 다른 명찰을 달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지명의 통일성과 일관성, 올바른 표기는 과연 요원
한 일이며 그리도 난제인가.
미스테리(mystery)다.
한재밑: 이름이 제각각이다(그림 상, 하)
죽서루 유감(有感)
땅거미지는 시각에 한재를 넘었다.
무리한 강행이었는지 높지 않은 고개인데도 속도가 나지 않았다.
오분동교차로에서 구7번국도는 신국도에 먹혀버렸다.
합류했다가 사직삼거리에서 이탈했다.
삼척에 도착했으므로 이후의 밤 시간은 자유다.
정라항(그림 상, 중)과 해안경비 군초소(그림 하):한재에서
오십천교를 건너 죽서루까지 갔다.
자전거 일주때 이후 처음이니까 13년 3개월 만이다.
그 때는, 환갑날이라 해서 아내와 누이가 서울에서 예까지 마중와
함께 했지만 지금은 홀로다.
그래서, 외로운 느낌이 드는가.
보물 제213호인 죽서루(竹西樓)는 관동8경중 하나다.
삼척은 삼척10경중 하나이며 관동제일루라고 강조한다.
부사 이성조가 죽서루를 두고 관동제일루라고 쓴 현액을 내세워?
관동제일루가 왜 이리 많을까.
평해 월송정은 팔경 포함 여부마저 논란인데도 제일루라 하고.
그런데, 왕(숙종)이 망양정의 경관에 감탄하여 '관동제일루' 라는
친필 현액까지 내렸는데도 다른 주장으로 대립각을 세운 그 신하
무사했을까.
하긴, 숙종 말년(41년)이니까 왕이 몰랐을 수도 있겠다.
누의 동쪽에 있는 죽림(竹林) 속에 죽장사(竹藏寺)가 있었다.
그래서 죽서루라 했다느니, 동편에 죽죽선녀의 유희소가 있었다
해서 라는 등 유래가 분분하다.
아무튼, 1266년(고려24대 원종7년) 이전에 건립되었을 것이라는
죽서루는 방문자도 많았다.
거쳐간 사람 너나 없이 남긴 흔적들중 게시된 현판만 26개란다.
관동팔경중 강(오십천)을 끼고있는 유일한 경관이라 하건만 덕지
덕지 걸린 현판들 때문에 늘 혼란스럽고 지저분한 느낌이다.
지명 '성내리'는 보통명사처럼 전국적이다.
대소 성들이 축성되었고 그 성 안이라 해서 성내리라 한 것이다.
여기 삼척 역시 그러하나 성은 없다.
최초의 축성 시기가 947년(고려3대 정종2년)이라고 전해오지만
기록에는1366년(고려32대 우왕12년)에 만호(萬戶) 남은(南誾)이
토성을 쌓은 것으로 되어 있단다.
이조 성종과 중종때 증축, 개축(석성으로)을 했다 하나 일부 초석
외에는 흔적도 없다는 것.
성내동의 옛 것으로는 죽서루와 허전한 동헌 옛터 뿐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