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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는 예절(禮節)
차는 일상생활에서 손쉽게 마실 수 있는 음료이가도 하지만 한편 차는 훌륭한 벗과 같이 함부로 다룰 수 없는 품성을 지니고 있다. 예절이란 사람들 간에 공경을 나타내는 말이나 행동인데 예절의 근본은 변함이 없으나 행동 양식은 그 시대의 사상, 문화, 제도 등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왔다. 우리 선조들의 생활 예절을 되새겨 보면서 오늘날의 예절을 바르게 익힘은 내일을 위해 바람직 하다.
흔히 차를 마시는 '예절(禮節)' 혹은 '예도(禮度)'를 '다도(茶道- 차를 달이거나 마실 때의 방식 및 예의범절.)'라고 부르지만 그것보다는 다양한 '음다문화(飮茶文化) ' , 혹은 '차문화(茶文化)' 로 발전시키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다례(茶禮)'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전들에서는 '차례(茶禮)'와 같은 말이라며 '명절이나 조상의 생일, 또는 음력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 등의 낮에 간단하게 지내는 제사'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다례'는 '차(茶)' 다루는 법과 관계되는 제반 '다사법(茶事法)' 및 '이에 수반되는 예의범절과 마음가짐'까지를 포괄하는 말로 정의할 수 있다.>
수 천년의 역사를 이어 온 차는 동양의 생활 문화 속에서 단순한 마실거리가 아닌 특별한 정신문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우선 차는 약리적 기능으로 마음을 편히 가라앉히고, 정신을 맑게 하여 우리에게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한다. 이런 사색의 시간은 다인들에게 자연과 우주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명상과 자기 성찰을 통한 수양의 실마리를 주었고, 시인과 묵객들에게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한잔의 차를 마실 때에 바쁠 때가 있다. 이 때 급히 빨리 마실 때도 있지만 차분히 여유를 가지고, 대화와 마음과 정을 나누며 차회를 할 때가 있다. 아무래도 차회를 할 때는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예절을 지켜애 그 모임이 좋앙ㅆ다는 기분을 가지게 된다. 차를 마실 때에 형식적인 예절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세는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다도의 습관을 통해 내면의 세계를 다스림이 먼저 필요하다. 차는 일상생활에서 손쉽게 마실 수 있는 음료이가도 하지만 동시에 차는 훌륭한 벗과 같이 함부로 다룰 수 없는 품성을 지니고 있다.
차를 마시는 자세는 정좌하고(바른자세는 올바른 마음 가짐과 신체적 건강에도 유의하다.) 눈은 앞사람을 직시하지 말 것이며(상대방에게 부담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언행은 조용하게 남의 말이 끝나면 조금 후에 말을 이을 것이고(상대방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정신이다.), 손은 공손하게 발은 무겁게 할 것이며(행동을 과묵하게 하여 매사에 신중해 지는 훈련이 된다), 차를 마실 때에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음식을 먹을 때 소리를 내는 것은 경망스럽고, 탐식하는 인격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차를 마시는 자세와 함께 언어생활에서도 차를 나눌 때에는 반드시 덕담을 나누어 좋은 차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차를 마시는 예절이란? '사람들 사이에 공경을 나타내는 말이나 행동을 의미'한다. 『예기(禮記)』에, '행동을 바르게 하고 말을 도리에 맞게 하는 것이 예의 근본이다(行修言道 禮之質也)'라 하여,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그 말과 행동의 일치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지금은 '프로토콜(protocol)'이란 용어가 보편화했지만, '에티켓''이란 말은 프랑스의 루이 14세 때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에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말뚝을 박고, '꽃밭을 훼손하지 맙시다.'라는 팻말을 꽂았는데, 이 팻말을 '에티켓(tiquette)'이라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어로 '에티켓'이란 원래 '꼬리표'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남의 입장을 이해하고, 심지어 식물에까지도 어떤 상처도 입히지 않으려는 인간의 인격과 품위를 엿볼 수 있다.
고대 중국에 있어서 정치와 종교와 도덕 등이 분화되기 이전에는 이런 것들을 모두 '예'라고 불렀다. 『논어(論語)』에서도 '법으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은 법망을 빠져나가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지만,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린다면 수치를 알아 바르게 된다(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고 했다.
그러므로 올바른 차마시는 생활은 올바른 생활예절과 연계된다. 그러므로 범사에 '생활예절이 바르게 되어야 차회에 함께 한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주변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즐거움과 흐뭇함을 줄 수 있는 인격과 타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훌륭한 덕성의 사람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해준다'.
차마시는 예절의 근본은 변함이 없으나 행동양식은 그 시대의 사상, 문화, 제도 등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 선조들의 생활예절을 되새겨 보면서 오늘날의 생활예절을 바르게 익힘은 내일을 위해 바람직 하다. 차문화의 기본은 예(禮)와 경애사상(敬愛思想)으로, 규방다례 등은 '예절로부터 시작하여 예절로 끝난다.'고 할 정도로 예와 경애를 존중한다.
'현대 예절과 관혼상제'는 「주자대전(朱子大全)」의 『가례(家禮)편』에 의하여 행하고 있다. 그러나 선조들의 생활 예절에서 18세기에 발간된 「사소절(士小節二董規)」 의 『예의편』을 보면
“군자는 말을 적게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 꿇어 앉아서 손가락으로 버티지 말고 발등을 겹치지 말며...
식사를 막 끝마치고 아직 밥상을 물리지 않았을때 일어서는 것은 점잖은 행동이 아니다. 식사를 마치면 반드시 수저를 가지런하게 놓아야 한다.”고 했고
「증보산림경제 가정편」 『수신(修身)』에 보면
“앉을 때는 반드시 무릎을 꿇고 앉아야 한다.
밥상이 들어오면 반드시 일어섰다가 앉아서 의관을 바로하고...
어른을 모시고 밥을 먹을 때는 어른이 제반(祭飯)을 하면
먼저 수저를 들지만 끝나기는 뒤에 해야 하고,
차를 마시고 소반을 물릴 때도 감히 먼저 해서는 안 되며
또 젓자락 놓는 소리를 내어서도 안 된다.”고 했으며,
조선 유희(柳僖)는 「물명고(物名攷)」에서는
“손님이 내방하면 서로 절하고 인사를 한 후 서로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신다.”라고 하였다.
오늘날 '찻 자리'에서는 '반절'이나 '목례'를 하고, '차를 마시는 예절을 생활화 하여야 한다'.(남자의 절은 주월영의 「예법사전」, 여자의 절은 김장생의 「가례집람의 숙배」에 관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음으로 참고 하시기 바란다.)
찻상을 들 때는 팔굽치의 각도가 60 - 90도 정도 되게 들며, 엄지손가락 끝이 상 위로 올라오지 않고 엄지의 마디가 상의전과 나란하게 잡는 것이 좋다. 가슴에 상이 닿지 않게 하며, 상을 내릴 때에는 손님과 상을 띄워 조용히 몸과 상을 같이 내려가 앉으면서 살짝 놓는다.
찻잔을 놓을 때에도 소리를 내지 않도록 놓을 것이며, 나이가 많거나 계급이 높은 순으로 놓는다. 빈 그릇을 다룰 때도 조용하게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여 다룬다.”라고 하였다.
‘차를 내는 일’은 동양정신이 담긴 '정중동(靜中動)의 미', 즉 "고요함과 인체의 동선이 함께 어우러진 선(線)의 미학"이다. 따라서 찻 잔을 받았을 때 부터 다음의 방법을 익혀 생활화하도록 차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권유한다.
그릇과 도구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두손으로 잡는 것이 원칙이다.(* 찻잔도 마찬가지로 두손으로 잡으면, 안정감이 있고 경건한 자세가 되며, 상대와 화합하는 자세가 된다.)
찻잔을 두손으로 잡을 때에는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고 손등은 땅을 등지게 해야 한다. 만물은 음(陰)을 등지고, 양(陽)을 향하는 성품을 지녔다. 음양 법칙에 따르면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다. 음을 등지고 양을 향한다는 동양 사상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차를 마실 때에는 색, 향, 미(色, 香, 味)를 즐겨야 한다. 그러므로 차를 마심에 있어서 찻잔을 두손으로 들고 입으로 옮기는 도중에 먼저 차잔을 쥐고 가슴의 높이로 들거나, 배 앞부분에서 잠시 머추어 고개를 약간 숙이고, 차의 빛깔을 감상한다. 이때 찻잔의 위치는 몸에서 주먹 한개가 들어갈만한 정도의 거리에 둔다.
온돌 등 맨 방바닥에 앉았을 때는 배꼽 위 가슴 가까이에 둔다. 두팔은 겨드랑이에 달걀 한개씩을 끼운 것처럼 자연스럽게 벌린다.
오른 손은 잔의 몸허리를 지극하게 감싸쥐고, 왼손은 잔의 밑바닥을 받쳐든다. 이때 손가락을 벌리거나 꾸부려서는 안되며. 죽순처럼 바르게 모아야 한다.
가볍게 빛깔을 감상한 후 찻잔을 천천히 입가로 들어올려 잠깐 향을 음미한 후 맛을 느낀다.
차 생활은 일상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 예술이고, 차와 관련된 주변 문화를 동시에 체험하는 '종합적 실천미학'이다. 또 차 생활을 통해 '공예문화' 즉 도자기나 목기, 다실의 분위 기를 돕기 위한 민예품 등에 대한 이해와 안목을 높일 수 있다. 차는 시(詩), 서(書), 화(畵)의 세계까지 정신적 눈의 영역을 확장시켜준다.
음다문화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고, 또 각기 부분적으로는 타당성이 있다. 그 러나 크게 두가지로 나눠 보면 '형식중시론'과 '형식무용론'으로 구분이 된다.
1) '형식중시론'은 차를 동양의 정신음료로 이해하며, 차의 정신을 담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격식은 필요하다는 견해다. 이런 견해는 차생활을 각각 <무위의 멋으로 즐기는 '풍류문화(선도문화)', 자기성찰의 시공간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수양을 위한 '선비문화(유교문화)', 다선일여와 같이 본질에 접근하려는 '명상 문화'(종교문화)> 등으로 이루어 온 역사성 속에서 차문화를 파악하려는 속성으로 접근한다.
2)'형식무용론'의 견해는 차가 가지는 <기호음료와 건강음료의 기능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차와 관 련된 문화로의 관심을 넓히는 것은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복잡한 것을 지양하고, 단순명료와 스피드를 요구하는 현대 사회에 적응하는 차생활의 모습을 중시한다.
음다문화를 보는 두가지 시각에 따라 차를 담는 그릇 또한 달라진다. 차를 정신음료로 까지 연계하여 보는 찻그릇은 그 중심 사상과 철학을 반영한 모습을 보여준다.
1) '풍류문화'의 다기는 멋과 놀이 문화에 충실한 미학적 그릇으로 '기능성 다기'가 등장한다.
2) 한편 '선비문화'의 다기는 군더더기가 없는 결곡하고 품격이 있는 그릇으로, '명상문화의 찻그릇'은 꾸밈이 없는 소박한 모습으로 각각 나타난다.
그러므로 차는 건강에 유익하고, 예절훈련에 유익하며, 인간관계에 소중하다는 인식은 있으나 가까이 접하고 자주 찾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차를 어렵게 생각하고 선뜻 접하지 못하고 있다.
무슨 고상한 취미인 것인양 행동하는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특정 사람들만의 문화'라는 잘못된 인식과 꽤나 '절차가 까다롭고 번거롭다는 선입견을 갖고 배제하려는 수용성이 부족한 마음가짐'이 더욱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생활 속의 일부로서의 다도에 대한 접근을 쉽게 해야만 한다.
차문화와 관련된 독특한 문화 중 '규방다례'가 있는데 '부녀자들이 방에서 행하는 차를 다루는 법과 제반 다반사'를 의미한다. 규방문화에 대한 논의는 조선시대에만 국한해 설명하기 쉬우나, 남자와 여자의 할 일이 엄격하게 나눠져 있던 삼국시대 이전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집안살림을 도맡아 했던 아낙네들이 주로 바깥일을 하던 남편들을 내조하면서 집안의 경조사를 주관했는데, 아낙네들의 바깥 출입이 상대적으로 제한되었던 시기에 자연스럽게 생성되어 꽃피운 우리나라의 고유문화가 바로 규방문화인 것이다.
규방다례란 결국 규방가사 등 이러한 규방문화, 그 중에서 조선조 양반가 여인들의 음다풍속(飮茶風俗)을 계승한 것으로, 그 뿌리는 결국 삼남지방의 전통 문화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규방다례'는 우리나라 주요 차의 재배지이자 소비지인 '영남지방'에서 발생하여 '전라'와 '충청지역', 즉 '삼남지방'에 정착된 '우리 고유의 차예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그 문헌적 자료가 규방가사에서나 흔적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적지만, 이것은 당시의 사회적 구조를 볼 때 충분히 납득 가능한 것이다.
'조선조 문화의 주류'는 어디까지나 '남성문화· 선비문화'였던 것이고, 이러한 선비문화와 대비되는 지점에 규방문화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선비문화에 비해 규범화가 덜 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규방문화'를 대표하는 다른 것으로는 '규중칠우(閨中七友)'가 있다. 선비들에게 좋은 벗이 된다는 종이·붓·먹·벼루 등 '문방사우(文房사友)'가 있다면, 규중칠우는 바느질을 하는 데 필요한 침선(針線)의 일곱 가지 물건인 바늘·실·골무·가위·자·인두·다리미를 통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도 생활은 남성, 여성의 시대적 격차를 뛰어넘어 존재해 왔다. 따라서 어떤 특별한 격식에 의존하기 보다는 생활속에서 쉽게 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에 편하고 자연스럽게 마시면 된다. 의식이나 절차가 꼭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차를 대할 때의 마음 가짐이 중요한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다기 문화'나 '음다문화'도 그렇다. 시대에 따라 요구하는 바도 각각 다르듯이 다도문화 역시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풍류문화'에 근거한 다인으로 행동하면서 마실 수 있는 찻그릇이 필요한가 하면, '선미문화'에 근거한 다인으로 사용한 다기마져 정을 쏟고 길을 들이며, 자신과 함께 늙어가는 친구로서의 다구(찻그릇)를 원하는 <음다문화를 추구>할 수도 있다.
어느 것도 다도예절이 틀린 것이 아니다. 다만 추구하는 바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문화는 획일적인 것이 아니고, 다양한 것이며, 시대의 요구에 따라 끝없이 변하는 것이 문화의 속성일 뿐이다.
유교적 가부장제의 핵심적 이데올로기는 '여성에게는 세 가지 좇아야 할 도리가 있으니 집에서는 아버지를 좇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좇고, 남편이 죽거든 아들을 좇아 잠깐도 감히 스스로 이룰 수 없다'라고 하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이다. 여성이 남성과 관계를 맺지 못하면 사회적 존재가 될 수 없는 게 명백하다. 내훈(內訓)에서 역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도리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길만이 여자의 도리로 제시되었다. 또한 자신의 모든 욕망을 억제하고 시집살이를 견디어 나갈 것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했던 당시의 사회조건은, 칠거지악의 처벌조항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한편 조선조 사회가 도덕적 인간상을 표방한 만큼 여성은 '열녀'로서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죽어서는 남녀가 동등하게 조상으로서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또한 상류층의 경우, 혈통을 중시한 까닭에 어머니로서의 혈통 역시 여성의 지위를 받쳐 주는 주요 요건으로 작용했다.
이에 따라 경직된 가족생활 규범에서 제외된 여성의 삶, 예를 들면 아들을 못 낳은 여자, 남편을 잃은 여자, 그리고 이혼이 없는 세상에서 소박맞은 여자, 이들이 설 자리는 없었다.
태종 4년 6월에는 '여자들이 평교자(平轎子)가 아닌 지붕이 있는 옥교자(玉轎子)를 타도록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뚜껑이 없는 가마를 타게 되면, 가마꾼들과 옷깃이 닿고 어깨를 부딪치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여자들이 출입시 얼굴을 가리고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게 하는 장치가, 여기에서부터 비롯되기 시작하여 후대로 갈수록 강화된 것이다. 남자들이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가서 ??이리 오너라?? 하는 것도 다 내외법이 강화된 결과인 셈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선비 가문의 부녀로서 산간이나 물가에서 놀이나 잔치를 하고 야제나 산천 성황의 사묘제(祠廟祭)를 직접 지낸 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 명시되어, 그 규제를 어긴 자에게는 곤장 일백 대의 형벌이 가해졌다.
전통 가옥 구조가 안채와 사랑채로 나뉘어 있으며 서로 바라볼 수 없게 격리되어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남자는 밖에 거하고 안에 들어와 이야기하지 않아야 하며, 여자는 안에 거하고 밖에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여자는 제 고장 장날을 몰라야 팔자가 좋다.'는 속담대로 안방에만 들어앉아 세상사와는 격리되는 것이 이상적인 여자인 줄 알고 있었다. 남편은 부인과 침실만을 같이하면서 식탁은 같이하지 않는다.
여자와 아이와 이야기하는 자체를 권위의 손상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그러므로 부인은 남편을'사랑양반'또는 '바깥주인'이라고 호칭하고, 남편은 부인을 '내자'또는 '안사람' '아낙네'라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남녀의 격리된 생활을 '내외한다'고 칭한다. 얼마 전까지도 시골에서는 여자아이를 도시에 보내면 남녀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그 여자아이는 '버리게 된다'고까지 여겼다.
그래서 조선조 여성들은, 특히 사대부층의 귀부인들은 얼굴을 외간 남자에게 보이지 않도록 너울이나 장옷을 썼다. 너울은 둥근 모자 모양에 긴 자루 모양의 천을 이어 붙여 머리에 쓰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얼굴에 걸치는 부분은 앞을 투시해 내다볼 수 있는 정도의 얇은 천을 대었다. 청색이나 흑색을 주로 썼다. 신분이 높을수록 너울을 길게 늘어뜨려 품위를 높였다.
이렇게 조선시대 사회 전반에 걸친 여성에 대한 편견과 구속은 당시 여성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켰다. '규중처녀(閨中處女)'라고 해서 규중에 있는 처녀를 이야기하면서 이를 빗대어 '집안에서만 생활해 세상물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치부되었으니,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세 큰 줄기와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를 묶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을 필두로 한 조선시대의 유교사상은, 오히려 규방문화가 나름대로의 영역을 구축하도록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이 됐다.
조선조 여인들의 규방문화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규방가사가 대표적인데, 이는 '내방가사(內房歌辭)'로도 불리며, 「계녀가(誡女歌)」를 비롯해 「규중행실가(閨中行實歌)」 「석별가(惜別歌)」 등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있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각종 사회 규범에 얽매여 있던 조선조 여인들이 나름대로의 문화생활을 영유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의 우리나라 여성들은 남성에 예속되어 시간적·경제적으로, 심지어는 정신적으로 여유를 갖지 못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규방문화'는 우리에게 문화적 다양성과 음다의 욕구가 역사성에서 확인되기에 커다란 도전을 가져다 준다.
'다인이 된다는 것'은 풍요롭고 축복된 인생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요구와 바램에 순응하는 것이다. 차회와 음다는 "인간 관계를 원만히 하는 어우러짐의 미학의 완성이며, 끊어진 대화의 문을 열어 풍요로운 정신적 영역을 확대하는 배움의 터전이며, 마음속에 자리잡은 고뇌와 소외감과 번민과 갈등을 풀어내는 진정한 전인적인 치유의 산실이며, 자신의 건강 증진을 위한 훈련의 도장이 될 뿐만아니라, 올바른 인격을 연마하는 수양과 타인을 존중하는 인격의 성숙함을 배양하는 자리"가 된다.
개인 중심으로 살기쉬운 현대인에게 남을 배려하고, 귀중히 여기며, 함께 어우러져 모두를 함께 생각하도록 하는 가장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게 해준다. 그러므로 차를 마시는 생활은 진정으로 연조가 오래될 수록 친한 벗처럼 더욱 귀함을 느끼게 된다.
식사 후 예절의 참고를 위해 소개한다면 음식과 함께 나오는 중국차를 마신 후 더 마시고 싶을 때에는 1인다기 개완의 경우를 내 놓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찻잔의 뚜껑을 반쯤 열어놓도록 해야 삭당에서나 초청 받은 팽주로 부터 계속 차를 공급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