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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 신도비와 묘소 청천, 삶의 이야기 2009/05/16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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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성리학의 대가로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의 신도비와 묘소이다. 원래 묘소는 수원 무봉산에 있었으나 1697년(숙종23년)에 지금의 장소로 이장하였다. 신도비는 1779년(정조3년) 묘소 아래에 세운 것으로 높이 2.5m이며 신도비각 내에 있으며 비문은 정조의 어필로 알려져 있다.
송시열은 1663년(인조11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었고 효종때 이조판서가 되어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며 그후 우의정,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1689년(숙종5년) 왕세자 책봉 문제로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첫댓글 [고향 자료를 찾으면서 송시열 공부를 조금 했지요^^ 좀 풀자면]
쿠테타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인조반정'이라는 말은 5.16'쿠테타'를 '혁명'이라 하는 것처럼 잘못된 말임)에게는 장남인 소현세자와 둘째인 봉림대군이 있었죠. 인조는 청의 신문물을 접하고 돌아온 똑똑한 소현세자가 자기 왕위를 뺏을까 두려워 독살해버리고 둘째인 봉림대군을 왕으로 세웠으니 그가 바로 송시열과 관련된 '효종'이죠.
송시열이 북벌을 추진했다는 것은 역사의 허구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송시열은 자신을 포함함 양반들의 기득권을 위해 말로만 북벌을 부르짖었을 뿐이라는 것이죠. 정작 북벌론자는 송시열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몰린 '윤휴'라는 인물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린 왕은 숙종이죠. 그는 서인/노론(송시열 파)과 남인(허목/윤선도 파)의 당쟁을 이용해 그 세력들을 번갈이 등용하면서 그 반대파를 일거에 숙청하는 방식으로 왕권을 유지했지요. 그가 남인 세력을 등용하면서 마침 남인 계열인 장희빈의 아기(후에 경종)를 세자로 책봉하자, 제주에 귀양을 가있던 70세 노구 송시열이 자기 당파가 몰락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어 죽음을 각오하고 반대상소를 올리지요. 사약을 든 금부도사와 서울로 압송되던 송시열이 만난 곳이 바로 정읍
저 비문 속의 有明이란 글자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데^^... 왜 '유명하다'의 有名이 아니라 밝을 명자 有明일까... 그건 나중에 기회되면^^
남미사님 수고가 많습니다 청천의 옛 역사와 인물에대한 지대함에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2009년 발행한 청천면지 가 있는데 남미사님도 소장 하고 있는지요?
아, 그 책이요^^ 제가 김사진 전 의원님과 쪼금 아는 사이라서 그분께 선물로 받아서 가지고 있습니다. 두꺼운 본책은 제 고향 부분만 조금 보고 덮어두었고, 부록인 사진 별책은 간간히 넘겨보구 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다행입니다 안가지고 계시면 한권 드리려고 했더니
아! 세심한 배려 감사드립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그 책을 지기님께도 선물받은 것으로 여기겠습니다^^
송시열씨 묘에서 많아놀았네요.....어린그시절 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