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지리반 전라북도 답사기 겨울방학.
우리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지리답사를 다녀왔다.
우리가 갈 주요목적지는 김제 벽골제, 채석강 그리고 고창읍성이다.
아침 8시까지 우린 광주역으로 모이게 되었다.
괜히 설레이는 마음때문인지 어젯밤에 잠을못이룬 나는 늦
잠을 자서
광주역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선생님께서 "혜진이 너는 선생님 1m 안을 벗어나지 마라." 라고 하셨다. -_-;
어찌나 당황했던지...하여튼 이날은 선생님 1m안을 꼭 지키면서 답사를
시작했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김제를 향했다.
기차를 처음 타보는거라서(엄마말씀으론 어렸 을 때 많이 탔다고는
하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_-a)
평소에 기차안에서 해보고싶었던걸 다 시도해봤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기차안에서 꼭 찐계란을 먹는 장면이 있어서 별로
먹고싶진 않았지만 그냥 찐계란도 사서 먹어봤다.
그런데 기차안의 자리 배치가 버스처럼 나란하게 되어있어서 조금
서운했는데 알고보니 좌석을 돌릴수있도록 되어있었다.
그래서 바로 돌려서 앉았다.
그때서야 기차를 타는 기분을 느낄수 있었다.(조금 엽기적인가..?? -_-;)
터널을 지날 때 친구가 숨을 참으면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터무니 없는 소리에 밑져야 본전이라고 한번 시도해봤다.
그런데, 하필이면 왕 긴 터널이여서..숨막혀 죽는지 알았다. -_-;
물론 소원비는건 실패했다.
친구들이랑 3학년 선배들이랑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수다를 떨다보니
어느세 우린 김제에 다다르고 있었다.
첫 번째 목적지는 [김제벽골제]였다.
김제역에서 우린 내리게 되었다.
시골이라서(김제시던데..시골이라고 해도 맞는지...)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었다.
조용한 마을..그 자체 였다.
좀더 나가니 버스 정류장이 보였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참 많이 계셨다.
무리를 해서 오는 우리를 보고 "오메~ 아가씨들이 여길 왜 왔수?" 하시는
거였다.
우린 향토 답사니 어쩌니 하고 이유를 말해주었다.
시골이라서 그런지 인심도 좋고 정감있었다.
김제 시내버스를 타고 우린 벽골제로 향했다.
버스비는 650원정도 였다.
버스를 타고가면서 우린 김제에서만이 볼 수 있는 지평선을 보았다.
유일하게 지평선에서 해가 뜨는 고을...
그 널디 너른들의 고마움에 고산자 김정호선생이 엎드려 절했던 곳....
역시 김제는 벼고을이라고 불리울만했다.
한 30분가량 가니 벽골제가 보였다.
벽골제는 김제시 부량면 용성리에 위치하고 있었고 벼와 골(마을)
그리고 제(둑,제방)이란 이란 의미로 벽골제는 이름이 붙여졌다가 차츰
부르기 쉽게 벽골제라고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벽골제는 이름 그대로 농사를 짓기위해서 옛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제방이었다. 크기는 전성기 길이가 3.3km정도 이고 수문이 총
5개정도였다고 한다. 제방은 적송을 뼈대로 둘레에 자갈과 진흙으로
만들어져있었다. 수문기둥은 어른 두명의 키를 합친것보다 더 높았다.
높이가 높은 만큼 그 둘레 역시 굉장했다.
수문바닥은 돌을 깔고 돌사이에 쉿물을 메웠다고 한다.
삼국시대에 최고(最古)의 수리시설이었던 벽골제는 조선시대에 와서
폐기되었다가 다시 일제시대에는 문화말살정책의 하나였던 동진농지
계랑조합에서 농지관개용의 간선수로를 이용하기 위한 공사를 한다는
명분아래 폭이 종단(縱斷)되어 두 개로 갈라졌으며, 양분(兩分)된 제방의
중앙을 수로로 만들어 원형이 몹시 손상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문의 복원공사를 위한 부분적은 발굴 조사를 하고 1998년에는 벽골제
수리 민속 유물 전시관을 건립해서 개관하고 있다.
이 전시관에는 옛 우리조상들이 사용했던 농기구나 그때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나 마네킹이 있어서 더 자세히 벽골제에 대해서 알수있었다.
벽골제에 관련된 유뮬유적 전설이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신털미산
이라는 산이다.
이산은 보수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이 짚신에 묻은 흙을 털거나 짚신을
버린곳으로 산이 되었다고 한다. (조금 과장된거같기도 하다 ^^:)
그리고 되배미산은 인부들을 세기위해서 정해진 논에 지게를 진채로
인부를 채워넣어서 논둑을 제외하면 500평정도 되고 지게진사람이
1평정도 차지한다는 계산하에 채워지면 500명으로 셌다고 한다.
그리고 벽골제 근처에 선한 백룡과 악한 청룡의 다툼이 있었고 이를
백성과 백룡으로 물리쳤다는 내용의 쌍용놀이고 있다고 한다.
어느 신문에서 <김제도 한때 골드러쉬가 있었다>라는 기사를 보게되었다.
그 내용은 김제가 벽골에서 김제로 지명이 바뀐 것은 신라
경덕왕(757)때였다고한다.
(벼+골)에서 한자지명화 하면서 지금의 김제(金:금)(堤:제방,뚝)으로
바뀐 것이다. 금과 관련된 지명도 여러 군데인데 금구,금평, 금산사 등이
바로 그것이다. 김제에서는 실제로 사금이 많이 생산되었으며 얼마나 많이
나왔냐면 사금의 뚝이라는 말이 되었을정도라고 한다. 전쟁이 끝난
평화로운 신라시데엔, 벼 즉 쌀보다 금이 더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되는
가치 변화 때문이리라..이미 그당시부터 사금을 생산하 였으리라고
추측할수있다는 내용이었다.
일제시대에도 지련시설이 필요치 않은 사금개발에 집착한 일본은 근대적인
장비를 이용하여 사금을 착취해 갔다고 한다.(굴을 'ㄴ' 자 형태로
파는 식으로 이때에 많은 인명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금의
기원은 어디었을까? 일반적으로 금산사의 뒷산으로부터 원평천을 따라
흘러내렸다고 한다. 금산사라는 이름도 금산(금이 나는 산)에 있는
절이랑 의미로 이미 백제시대부터 있었고 실제로 일본인 들에 의해서
금산사 부근에서 금광을 채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지금은 저수지가
물길을 막아서 더 이상의 자연스런 사금채취는 거의 할수없게 되었다.
또한 원평지역의 쌀이 찰지고 좋은 것은 금의 기운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벽골제를 둘어보니 물을 퍼 올리는 물레방아랑 비슷한
도르래같은 것이 있었다. 궁금해서 선생님께 물어보았더니 손수 발로 그
수리시설을 움직여서 보여주셨다. 그런데 올라가는것만도 벅차보였는데
결국은 서너번 돌리시더니 결국은 떨어지시고 말았다. -_-; 괜히
물어봐서 죄송하게 됐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그 수리시설의
사용법은 전시관에 마네킹으로 모습을 묘사해놓고 설명이 있어서 그걸로
만족해야했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없이 한산했다. 우린 한번 쭉~
돌아본다음에 들어오면서 보았던 벼로 만들 미술품들을 감상하기 위해서
입구쪽으로 갔다. 벼로 만든 작품들이 굉장히 많았다. 벽골제의 마스코트같은
쌀모양 일명 쌀돌이와 수레를 끌고가는 소, 그리고 집과 집둘레의 희안하게
생긴 나무와 거대한 바가지 모양 그릇...특이한게 많이 있었다.
우린 기념으로 거기서 단체로 관광아줌마들 포즈(일렬로 나란히 -_-;)로
사진을 한판 찍었다. "차칵~" 우리가 찍고도 포즈가 너무 웃겨서 막
웃었다..^^; 우린 다음 목적지인 채석강을 가기 위해서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고 다시 버스를 타고 김제 역으로 되돌아왔다. 자가용이 아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이동하려니까 재미있기도 했지만 조금 불편했다.
일제시대 이전(인위적인 경지정리사업)까지만 하 더라도 전국 쌀
생산령의 약 60%이상을 차지 했다는...물론 지금은 20만이 되지 않은
자그마한 소도시이지만 그때 그시절에는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김제라는
곳을 주시했다는 것이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면서..또한 그 어느곳도
지평선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김제라는 작은 도시에서 지평선이 있다는
것을 머릿속에 심어두고 우린 다시 부안으로 향했다. 버스비는
약 1400원 정도였고 우리는 피곤해서 인지 가는 동안 내내 졸다가 부안에
도착해서야 잠에서 깼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부장언니가 사탕을 나눠줘서
좋아라하고 받았다.(먹을것에 약한 자이기에..)우리는 부안에서 짜장면으로
중식을 해결하고나서 바로 터미널로 가서 채석강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위해 기다렸다. 생각보다 버스는 빨리왔다.
채석강을 가는길은 조금 긴 듯싶었다. 조금 가니 물이 다 빠진 갯벌이
훤이 다 들여다 보이는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린거기가 채석강인지
알고 조금 실망의 기색을 보였지만 우선 바다라는 생각에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거기는 채서강이 아니었다. 민망..어느새 저기 언덕너머로 휫집이
주르륵 늘어서져 있는 곳이 보였다. 오기전에 실내조사를 하면서 채석강
근처에 횟집이 많다고 들었는데 거기가 저긴가 생각했다.
우린 버스에서 내려서 채석강으로 향했다. 어른600원짜리 입장권을
끊어서(학생이여도 600원인가보다..억울..)채석강 안으로 들어갔다.
채석강은 너무 맑고 깨끗했다. 겨울바다여서 그런지 너무 시원해 보였다.
(보기엔 시원해보였지만 실제론 조금 추웠다) 날씨도 맑아서 그런지
사진찍기에도 딱 좋았다. 우린 답사를 목적으로 온건 다 까먹고
사진찍기에 바뻤다. 한참 찍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채석강을 둘러보았다.
지방기념물 제28호인 채석강은 변산 해수욕장에서 서쪽 끝으로 7.9km
떨어진 격포에 위치하고 있다. 오랫동안 파도와 흐르는 물이 씻겨 마치
수만권의 책이 쌓은것처럼 절벽, 암벽과 바다의 기묘한 조화를 이룬
수성암 단층이 겹겹이 넓직하게 쌓인 해식단애가 신비로웠다.
조선시대에는 수군의 요지인 격포진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의 시성 이태백이
뱃놀이를 하며 강물에 비친 달 그림자를 잡으려다 물에 빠져 숨졌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흡사하다하여 채석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채석강 바로 옆에 있는 적벽강 역시 지방기념물 제29호로 약 2km 펼쳐진
절벽과 암반의 해안선 역시 채석강 못지 않은 신비로움을 준다.
이름 또한 중국의 소동파가 놀았다는 적벽강과 흡사하다 하여 그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좀더 들어가니 모래사장이 보였다.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새하얀 모래가 햇빛에 반짝거리는게..너무 이뻐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동상이 하나 있었는데, 인어공주 동상이었다. 인어라고 하기엔 포즈가
좀 어설픈 인어였다. ^^; 해안단층쪽에는 바위가 많았는데, 거기에서
아줌마들이 싱싱한 해산물을 즉석으로 팔고있었다. 싱싱한 조개와 회를
바다에서 바로 손질해서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맛...우린 느껴보지
못했지만 참 맛있을 것 같았다. 조금 아쉬움을 남기고 우린 다시 이동을
해야했다. 다음 목적지는 내소사였다. 그러나 일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우린 내소사 앞에 까지만 갔다가 다시 고창읍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_-;
여기까지 와서 못간다고 하니까 더 들어가고 싶었다. 선생님께서
지금이라도 입구까지나 한번 가보라고 하셔서 갈려고 했는데, 버스가
출발한다고 해서 내리려다가 다시 후딱 버스에 올랐다. 다시 계속 버스를
타고 우린 고창으로 향했다. 친구들이랑 같이 그동안 답사했던 데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차창밖의 이쁜 카페가 나타나면 이쁘다고
난리를 치면서 놀다보니 어느새 우린 고창에 다다르고 있었다. 고창읍성
터미널,,,우린 거기 서 조금 더 걸어서 고창읍성으로 갔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계단에 세겨진 발판이 하나있었는데 그 발판을 밟으면
건강해진다고 해서 일부로 계속 밟았다.-_-; 그리고 또 답성(성밟기)놀이라는
팻말이 있었다. 내용은 머리위에 돌을 이고 한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바퀴돌면 무병장수하며 세바퀴돌면 극락승천한다 라는 전설이
있다는거였다. 고창의 성벽 밟는 놀이는 아마 성가퀴 뒤의 성로(城路) 때문에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말그대로라면 세바퀴든 네바퀴든 돌고 싶었으나
시간이 별로 없어서 4/1정도 가다가 다시 내려왔다. 고창읍성의 내부에도
볼거리가 많아서 그것까지 볼려면 시간이 너무 촉박했기 때문이었다.
고창읍성은 전국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자연석 성곽으로 단종
1년(1453)에 세워졌다고 하며 여자들이 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도 있다.
사적 제145호로서 성의 높이는 어른 3명의 키를 훨씬 넘는 4~6m정도였고
둘레는 1,680m에 이른다고 한다. 동, 서, 북의 세문과 여섯군데의
치(적의 접근을 관측하고 성벽에 달라붙은 적을 물리칠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반달꼴로 밖으로 내쌓은 것), 두군데의 수구문이 있었다.
우리가 돌다가 중간에 내려가서 처음으로 보인 것은 대나무 숲이었다.
쭉쭉 뻗은 대나무의 절개가 눈에 보이는듯했다. 이 성은 왜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이 축성한 것으로 일명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나주 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초 기지로서
만들어진 읍성이다. 성내에는 동헌(東軒),객사(客舍)등 24동의 조선시대
관아(官衙)건물과 2지(池) 4천(泉)이 있었으나 병화 등으로 소진되고
성곽과 공북루(拱北樓)해자,길영천(吉靈泉)만 남아있던 것을 1976년부터
옛 모습으로 복원해 오고 있다. 성안 중앙부에 있는 풍화루(豊和樓)는 옆에
못까지 갖추고 있어 풍요로운 주악(酒樂)이 넘쳐보인다.우린 풍화루에서
조금 쉬면서 놀았다. 선생님과 선배들은 저기 위에까지 올라가셨다.
우리가 읍성을 둘러보는 사이에 고창의 하루는 저물어갔다. 우리는
서둘러 다시 읍성을 나와서 터미널쪽으로 걸어갔다. 가는길에 오뎅과
붕어빵을 파는 곳이 있었다. 하루종일 답사를 하느라고 허기지고 지친
우리를 위해서 선생님께서 맛있는 오뎅과 붕어빵을 사주셔서 우리는
따뜻한 오뎅국물로 손을 녹이면서 배를 채웠다. 너무 맛있었다.
우리는 고창 터미널에서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하루종일 여기저기를
답사를 하느라 열심히 돌아다닌 우리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나동그라졌다.
힘들었지만 전라도의 유적지와 명소를 돌아볼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다시한번 오고싶은 곳이었다.
8시가 다되어서 우린 광주에 도착하게 되었다. 선생님께서
"자~ 이제 다 끝난거 같다." 하시고는 웃으셨다. 난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에 그냥 말없이 같이 웃었다. 친구들이 어리둥절했다.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해산을 했다.
너무 즐거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