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삼일절 주일입니다. 1910년 8월 29일(국치일)에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여 나라의 국권을 빼앗기고,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억압 속에서 자유를 외첬습니다.
비폭력적인 만세 운동을 통해 온 나라가 하나되어 독립을 외쳤으며, 많은 선조들이 감옥에서, 혹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땅의 자유뿐만 아니라 영원한 자유,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주 안에서 자유를 얻었음을 선포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자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인류는 원죄로 인해 사탄의 종이 되었고, 율법의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해방시키셨습이다. 이 자유는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은혜의 선물입니다.
예를 들어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희생했듯이 우리의 영적 자유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죽으셨습니다.
첫째, 삼일절 주일을 맞아 3.1절 만세운동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3.1운동의 대표적 인물로서, 손병희 선생, 최남선 선생, 이승훈 목사, 한용운 시인등 많은 인물이 있지만, 오늘은 유관순 열사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유관순 열사(1902~1920)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면(현재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에서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유관순 열사를 이화학당에 추천한 선교사는 앨리스 샤프(Alice Hammond Sharp, 한국명 사애리시)입니다. 그녀는 공주 영명여학교를 설립하여 유관순 열사가 이 학교에 입학하도록 도왔으며, 이후 이화학당으로 전학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앨리스 샤프 선교사는 충청 지역 선교의 개척자로서, 공주를 중심으로 여러 학교와 유치원을 설립하며 여성 교육과 계몽에 헌신했습니다. 그녀의 노력 덕분에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에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고, 이는 그녀의 독립운동 참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공주 영명학교 재학 시절 민족의식을 크게 일깨우는 계기를 맞았으며, 이후 이화학당으로 전학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앨리스 샤프 선교사는 유관순 열사의 교육과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면서 개화교육을 받으며 민족의식을 키웠으며,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열린 3.1운동에 참여하다가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고향 천안으로 내려가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습니다. 이 당시 1919년 4월1일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펼칠 때에 독립선언서를 복사해준 교회는 매봉교회와 공주제일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약 3,000명이 모인 대규모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일본 경찰이 이를 진압하면서 유관순의 부모가 현장에서 총살당하고 유관순도 체포되어 공주 감옥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이후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어 2급 정치범으로 분류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옥중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의 잔혹한 고문으로 인해 1920년 9월 28일 향년 18세로 감옥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일본 경찰은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고 비밀리에 매장하였습니다.
윤관순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입니다. 그녀의 희생정신은 오늘날에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깊은 감동과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3.1절 당시의 피해 상황
약 7.000명 이상이 희생되었고, 16,0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46,000명 이상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은 천인공노할 사건이었습니다.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은 1919년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잔혹한 학살 사건입니다.
*사건 개요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화성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일본군은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주민들에게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제암리 교회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보복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학살 과정
일본군은 제암리 주민들에게 “집회가 있다”며 제암리 예배당(교회)로 모일 것을 강요했습니다.
주민들이 교회에 모이자 출입문을 봉쇄하고 바깥에서 불을 질렀습니다.
불길을 피해 나오려는 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하거나 칼로 찔러 살해했습니다.
교회 밖에서도 탈출하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학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암리 교인들과 주민 약 29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사건의 영향
일본군의 잔혹한 탄압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비난이 거세졌습니다.
미국, 영국 등 해외 언론과 선교사들이 이 사건을 보도하며 일본의 만행을 규탄했습니다.
이후 한국 기독교계와 독립운동 진영은 더욱 결속하여 항일운동을 지속했습니다.
*기념과 교훈
현재 제암리에는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과 제암리교회 순교자 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일본군의 만행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은 3·1운동 이후 일본군이 무력으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꺾으려 했던 대표적인 사례이며, 오늘날에도 중요한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단순한 정치적 독립이 아니라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인류는 원죄로 인해 사탄의 종이 되었고, 율법의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이 자유는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은혜의 선물입니다,
예를 들어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희생되었듯이 우리의 영적 자유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습니다.
자유를 쟁취하는 것은 피흘림을 통하여 가능합니다. 자유는 피를 흘리면서도 쟁취해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당하면서도 그의 백성들을 죄와 저주에서 영원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셋째, 자유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본문에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피흘려 쟁취한 소중한 자유를 반드시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죄를 멀리하고, 탐욕과 미움, 우상 숭배등 생활속에 건전한 사고와 절제된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되찾았지만, 이후에 그 후손들은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국력을 향상시키며, 질서의식을 높여서 원칙과 상식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또한 자유를 회복한 성도들은 영적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 영적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면서,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3.1절 주일을 맞이하여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와 자랑스러운 조국의 참자유를 굳게지켜가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사랑선교회 임 웅 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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