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탐진(耽津)은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에 속해 있던 옛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동음현(冬音縣)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탐진으로 고쳐서 양무군(陽武郡)에 예속시켰으며, 고려시대에는 영암(靈巖)에 속하게 하였다가 뒤에 장흥(長興)으로 이속시켰다. 1417년(태종 17)에 병마도절제사영을 도강현(道康縣) 소재지에 옮기고 두 현을 합하여 강진으로 개칭하였고 치소는 탐진으로 하였다. 1429년(세종 11)에 도강의 송계(松溪)로 옮겼는데 1475년(성종 6)에 탐진으로 돌아갔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탐진군으로 승격되어 나주부(羅州府)의 관할이 되었고,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백도면(白道面) 일부를 해남군에 이속하였고, 가우도(加牛島)를 합쳤고, 1936년 강진면이 강진읍으로 승격되었다.
성씨의 역사
탐진최씨(耽津崔氏)의 원조는 고려 때 상약원직장(尙藥院直長)을 역임한 최철(崔哲)이며, 시조는 고려 때 장작감(將作監)을 역임한 최정(崔靖)의 아들 최사전(崔思全)이다. 그러나 최사전의 아들 최변(崔弁)과 최열(崔烈) 이후의 기록이 전란에 실전되어 각 파 중시조들의 세거지를 따서 그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인 최사전은 의술로 조정에 진출하였으나 고려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한 공을 인정받아 공신에 책록되었고,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수태위(守太尉),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다.
분적종 및 분파
화성파(華城派)의 중조는 최응규(崔應奎), 강진금천파(康津錦川派)의 중조는 최준량(崔浚良), 보성조내파(寶城兆內派)의 중조는 최표(崔彪), 광주성서파(光州城西派)의 중조는 최윤덕(崔允德), 금남파(錦南派)의 중조는 최정원(崔井元), 만경율리파(萬頃栗里派)의 중조는 최해(崔海)이다.
주요 세거지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석천리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도림리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송덕리
전라남도 광산군 비아면 산월리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 남산리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호리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술산리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노천리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 농소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탐진최씨는 21,191가구 총 68,127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