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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해, 황산, 주장 여행 기행문
전남대학교평생교육원
1.일 정 표
▶주 최 :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전담강사협의회
▶주 관 :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주관사 : 남해관광여행사
▶일 시 : 2006년 7월 5일(수) ∼ 8일(토) - 3박 4일
▶ 집합 장소 및 시간 : 광주국제공항 로비 2006년 7월 5일(수) 오전 07시 30분 정각
▶ 개인 준비물 : 여권, 기호식품, 평상 시 먹던 약, 우산, 모자, 카메라, 여벌 옷, 썬크림, 샌들, 등산복, 등산화
날자 |
장 소 |
교통편 |
시 간 |
일 정 |
비 고 |
제1일 7/5 (수) |
광 주
상 해
황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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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 873
자기열차
전용버스
FM 9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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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0 08:45 09:20 09:40 10:00 10:10 10:30 10:50 11:50 12:10 13:10 13:30 14:30 14:40 15:00 15:20 15:40 16:30 17:10 18:00 18:10 18:40 19:00 19:35 20:40 20:50 21:10 |
광주 공항 1층 관광안내소 앞 집결 광주 공항 출발 푸동 공항 도착 가이드 이천석 상면 자기부상열차 탑승 자기부상열차 하차 롱양루역 출발 상해 임시정부청사 도착 상해 임시정부청사 출발 점심식사 동지걸대주가 식당 출발 황포강변 도착 황포강 유람선 관광 황포강변 출발 중경로 도착 중경로 출발 홍구공원 도착 홍구공원 출발 식당도착 후 저녁식사 식당 출발 식당 주변 시장 도착 시장 출발 푸동공항 도착 푸동공항 출발 황산공항 도착 황상 가이드 김석철 상면 황산국제호텔 도착 |
중식 현지식
석식 현지식 |
제2일 7/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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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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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버스
케이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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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07:30 08:30 08:50 09:00 10:00 10:20 11:10 11:30 11:55 12:50
17:30 18:25 18:40 19:20 20:30 21:00 |
호텔 조식 숙소 출발 휴게소 도착 휴게소 출발 비취계곡 도착 비취계곡 출발 식당도착 후 점심식사 식당 출발 운곡사역 도착 케이블카 탑승 백아령역 도착 케이블카 하차 서해대협곡 등산(배운정,보선교,천해,광명정) 광명정 도착 사림호텔 도착 저녁식사 강사 세미나 세미나 종료 2차 좌담회 시작 |
조식 호텔식
중식 현지식
석식 호텔식 |
제3일 7/7 (금) |
황 산
상해 |
케이블카
전용버스
FM 9266
전용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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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 00:40 05:20 06:30 07:30 08:50 09:10 10:00 11:00 11:30 11:40 12:00 12:20 13:40 13:50 14:30 15:30 16:30 16:50 17:30 18:50 20:10 20:20 20:40 21:00 21:30 22:40 23:00 23:45 24:00 |
2차 좌담회 종료 취 침 기 상 아침식사 사림호텔 출발 광명정 도착 해심정 도착 오어봉 도착 옥병봉 도착 옥병역 도착 옥병역 케이블카 탑승 자광각역 케이블카 하차 황산 박물관 도착, 출발 식당 도착, 점심식사 차공장 도착 차공장 출발 화산미굴 도착 화산미굴 출발 보석공장 도착 보석공장 출발 발마사지업소 도착 발마사지업소 출발 식당 도착 저녁식사 식당 출발 황산 공항 도착 황산공항 출발 푸동공항 도착 푸동공항 출발 서울리아호텔 도착 취 침 |
조식 호텔식
중식 현지식
석식 현지식 |
제4일 7/8 (토) |
상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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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 06:30 07:30 08:40 11:30 12:10 13:00 13:20 14:10 14:50 15:15 15:40 16:10 18:45 18:55 |
기 상 아침식사 서울리아호텔 출발 주장 도착 주장 출발 식당 도착 점심식사 식당 출발 천우실크 도착 천우실크 출발 잡화상 도착 잡화상 출발 푸동공항 도착 푸동공항 출발 광주공항 도착 해 산 |
조식 호텔식
중식 현지식 |
2. 참가자 명부
번호 |
성 명 |
과정명 또는 직책 |
전 화 |
핸 드 폰 |
비 고 |
1 |
이계윤 |
원 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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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양채열 |
부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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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김갑수 |
행정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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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김병복 |
행정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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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기현진 |
행정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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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임인경 |
행정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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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정금숙 |
행정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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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강형배 |
노래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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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구홍덕 |
사주팔자, 장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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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김경자 |
어린이국악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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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김상섭 |
사상체질과식이요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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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김재일 |
유아레크리에이션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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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김 혁 |
요가중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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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김혜령 |
압화공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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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김회원 |
요가초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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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남영숙 |
그린인테리어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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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박남준 |
서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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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박종송 |
주산을활용한암산수학교육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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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박형우 |
웃음치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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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배예진 |
pop(예쁜글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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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선미라 |
세계문화예술탐방과 여행담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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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송채은 |
플라워디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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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양경원 |
유아동미술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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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양명숙 |
칼라믹스일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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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양소영 |
동화구연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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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양정자 |
숯공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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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오숙희 |
병원서비스코디네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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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윤갑원 |
풍수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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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이명숙 |
즐거운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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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이상미 |
오카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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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이 영 |
공인2급 레크레이션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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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조경숙 |
연필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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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조금희 |
심천사혈요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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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조기선 |
범죄예방지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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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한임자 |
전통음식과폐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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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한 호 |
사진촬영의이론과 실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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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허경자 |
이혈요법상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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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준비과정
지난 5월 중순에 학교 행정실에서 전담강사 해외 세미나에 대한 구체적인 발표가 있었다.
장소는 중국 상해, 황산, 소주를 다녀오는 3박 4일 코스로 총 경비 69만원 중 학교에서 40만원을 제공하고 나머지 29만원만 개인 부담하는 것으로 결정을 하고 참가자 신청에 들어갔다.
전에는 해외 세미나에 보통 1인당 20여 만원 정도를 보조해 주던 것과는 달리 파격적인 보조였으며, 2학기 이상 개설했던 강사만을 참가대상으로 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 1학기에 개설했던 강사도 참가 대상에 포함시킨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6월 22일부터 25일까지 3박 4일간 나의 지인들, 그리고 수강생들과 함께 하는 해외문화탐방이 계획되었던 터라 연거푸 중국에 다녀오게 된다는 부담감이 있었으나 일단 신청을 하고 보았다.
먼저 개인 부담금을 송금시킨 후 여권은 앞에 다녀온 뒤에 갖다 주겠다면서 복사본만을 가져다 주고 바삐바삐 여섯 과정을 종강해 나갔다.
총 참가자는 39명으로 이계윤 원장님을 포함한 직원 7명에 강사 32명으로 인원을 확정하고 6월 21일에 참가자 간담회를 갖고 주관사인 남해관광 조영인 부장으로부터 이번 여행지에 관한 상세한 브리핑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듣기를 황산이 험하다고 들은 터라 자못 걱정스러운 투로 질문을 하였으나, 조영인 부장은 너무나 간단하게 60대 노인이 서서히 걷는 것으로 잡아놓은 시간이므로 걱정하지 말라는 대답이었다.
나는 작년에 제주도에서 있었던 강사 세미나 때 한라산을 넘다가 혼이 난 경험 때문에 그때 느낀바가 있어 그때부터 1년 동안 걸어서 출퇴근을 한 것을 가지고 과감히 험한 쪽으로 등산을 한다는 A조로 신청을 하고 다음날부터 상해, 항주, 소주를 3박 4일 일정으로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받아 놓은 날짜라고 세월이 가니 출발일자가 돌아오므로 아내에게 그곳에서 등산을 할 때 입을 수 있도록 반바지 하나 사다 놓으라고 하고, 단화를 사다 놓는 등 여러 가지를 준비를 하고 여장을 꾸려놓았다.
4. 출발 당일
출발 당일인 7월 5일 수요일의 날은 밝았다.
전날 같은 동네에 사시는 배예진 선생님으로부터 남편이 태워다 준다고 하였는데, 다른 분 두 분이 함께 가시자고 한다면서 나를 함께 태우고 가기가 좁다고 하기에 염려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는 집합시간인 7시 40분을 맞추기 위하여 6시 30분에 집을 나서 160번 버스를 타고 들뜬 마음으로 광주공항으로 나갔다.
그런데 일정표에 7시 30분 집합이라고 적혀있다면서 왠일이냐고 선생님들께서 물어보시기에 브리핑할 때 분명히 조영인 부장이 7시 40분까지 오라고 하여서 그 시간을 맞춘 것뿐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원래 참가 신청을 하신 분들 중 두 분이 불참 통보를 하고 나머지 37명의 모든 참가자들이 나보다 더 먼저 집합 장소에 도착하였다.
남해관광 조영인 부장으로부터 이번 여행에서 주의할 점과 필요한 사항을 들은 후 우리는 가방 등 짐을 부치는 출국수속을 밟고 광주공항 2층으로 올라가 대기하였다.
5. 상하이와 푸동공항
우리는 오전 8시 45분에 출발하는 대한항공 KE873호 비행기에 탑승하여 1시간 35분만인 오전 9시 20분에 상해 푸동공항에 도착하였다.
우리나라와 중국과는 1시간의 시차가 있으므로 오전 9시 20분이라면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10시 20분이 되는 것이므로 중국에서의 시간은 중국의 현지시간으로 기록하기로 한다.
이 푸동공항은 지난 6월까지 합하여 네 번째 와본 곳이라 그리 낯선 것은 덜 하였다.
푸동공항은 1999년 10월에 개항한 신공항으로, 상하이 도심에서 남동쪽으로 약 30㎞ 떨어져 있고, 훙차오[虹橋]국제공항으로부터 약 40㎞ 거리에 있으며, 아시아 최고의 허브(Hub) 공항을 목표로 현재도 공사가 진행 중이다.
제1기 건설은 1997년 10월 전면적으로 착공하여, 1999년 9월 항공기 운항이 가능하도록 하였는데, 길이 4000m 폭 60m 크기의 활주로 1개소와 항공기 76대가 동시에 머무를 수 있는 80만㎡의 계류장을 갖추고 있다.
화물 운송창고의 면적은 5만㎡에 달하며, 장비로는 지면감시 레이더, 정밀계기 진입시스템, 항공관제 및 통신시스템, 무선전자 항공 유도시스템, 기상 및 후방근무 보장시스템이 있어, 하루 24시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여객 터미널의 면적은 28만㎡에 달하며, 메인 건물과 탑승대기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3층 구조로 되어 있으며 2개의 통로로 연결되고 있다. 또한, 공항으로 통하는 화물 트랙은 13개가 있으며, 6만㎡의 탑승대기 건물에는 상점·식당·휴게시설 및 기타 편의 시설이 있다.
제1기 건설로 연간 여객량은 2000만 명에 이를 것이며, 화물 운송 75만 톤, 연간 항공기 발착 12만 6천 회, 1일 최대 6만 7천 명의 여객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최종 완공 시에는 활주로 4개소와 80만㎡의 탑승대기 건물, 연간 여객 처리량 7000만∼8000만 명, 화물 운송량 500만 톤, 연간 항공기 발착건수가 32만 회에 이를 계획이다.
1999년 10월 정식 개항한 이후 공항 이용량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데, 2000년에는 554만여 명의 여객, 26만여 톤의 화물, 항공기 발착 5만 7천여 회를 나타내고 있다.
항공 노선은 32개의 세계 도시와 52개의 국내 도시로 연결되며, 항공사로는 중국국제항공·중국남방항공·중국북방항공·중국동방항공 등 중국 항공사와, 대한항공(주)·아시아나항공(주), 일본항공·전일본항공, 유나이티드항공(UAL), 노스웨스트항공, 스위스항공, KLM네덜란드항공 등 외국 항공사가 취항하고 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이 상해인데, 정식 명칭은 상하이직할시[上海直轄市]이다.
중국 제1의 대도시이며 행정적으로는 성(省)과 동격인 중앙정부 직할시(直轄市)이다.
시역은 시가지부의 10구(區), 교외부의 10현(縣)으로 나뉜다.
시가지는 양쯔강 어귀의 남안(南岸), 황푸강[黃浦江]이 양쯔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있고, 시가지 주변의 넓은 땅과 양쯔강 어귀의 하중도(河中島)인 충밍섬[崇明島]을 시역에 포함시키고 있다.
시가지를 흐르는 또 하나의 주요 하천인 우쑹강[吳淞江:蘇州河]이 황푸강에 합류하는 지점을 옛날에 후독[嫉瀆]이라 불렀다.
상하이의 다른 이름 '후[嫉]'는 옛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다.
부근은 장난[江南] 삼각주 지대로 토지가 비옥하고, 위의 하천 외에 크고 작은 여러 수로가 시역에 종횡으로 뻗어 있다.
기후는 온난하여 연평균기온 15∼16℃를 보이고, 연평균강수량은 1,100∼1,200mm이다.
상하이는 송말(宋末)의 1267년에 이미 무역항이 되어, 무역감독관청으로서의 시박사(市舶司)의 분소(分所)가 설치되었다.
1842년에 아편전쟁(阿片戰爭)의 결과 맺어진 난징조약[南京條約]에 의해 구미제국과의 무역을 위한 개항장(開港場)이 되자, 상공업도시로서 급속히 발전하여 중국 제1의 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상하이의 실권은 외국인의 해관세무사(海關稅務士)가 장악하고, 치외법권(治外法權)이 인정되는 외국인의 조계(租界)가 설치되는 등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 침략의 근거지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의 민족해방운동이나 노동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하여 1949년까지 혁명과 반혁명 세력의 격렬한 대결이 되풀이되기도 하였다.
한편 상하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이곳에서 1919년 4월 13일에 조직되어 1932년 5월에 일본의 탄압을 피해 항저우[杭州]로 옮기기까지 활약했던 곳이다.
또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이곳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등을 폭사·부상케 한 곳으로, 윤봉길 의사 의거 유적지와 임시정부 청사가 보존되어 있다.
상하이는 중국 굴지의 공업도시로, 방직·기계·조선·전기기기·화학·비료·인쇄 등의 공업이 다양하게 영위되고, 또 기술적으로도 전국을 리드하고 있다.
본래 경공업, 특히 방직공업의 비중이 대단히 높았으나, 근래 중화학공업이 크게 신장하고 있다.
시가지 교외의 각 현(縣)에서는 쌀 외에 채소·목화·과일 재배 및 양돈·양금(養禽)·담수어양식 등이 활발하다.
1968년 10월 난징[南京]의 창장대교[長江大橋] 완성에 의해 베이징[北京]에 직결되는 징후[京후] 철도가 열리고, 또 후항철도[후杭鐵道:상하이∼항저우] 외에 많은 도로가 집중되어 있다.
상하이 국제공항은 국내 각지와 국내선을 통하는 외에 국제항로가 열려 있고, 황푸강의 상하이항은 근래 내외 선박의 출입이 급증하여 수만 톤 급 외항선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중국 최대의 무역항이자 세계적인 무역항이다.
상하이는 중국의 주요 학술·문화 중심지의 하나이기도 하여 푸단[復旦]대학·통지[同濟]대학·화둥[華東]사범대학 등 여러 대학과 다수의 연구기관 및 50만 권의 장서가 있는 상하이도서관과 상하이박물관 등이 있다.
인민공원·중산[中山]공원·훙커우공원·푸싱[復興] 공원 등이 있고, 명소·고적으로는 징안사[靜安寺]·룽화사[龍華寺] 및 루쉰[魯迅]의 묘(墓:훙커우공원), 서광계(徐光啓)의 묘 등이 있다.
6. 자기부상열차
우리 일행은 조영인 부장의 안내로 무사히 중국으로의 입국 수속을 마치고 각자의 짐을 찾은 후 공항 로비로 나가 상해의 가이드 이천석 씨를 만나 상해 일정을 시작하였다.
맨 처음 관광을 시작한 것은 지난 6월에 왔을 때 타보았던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다는 자기부상열차로 자기부상열차는 2003년 현재 독일과 일본을 중심으로 개발되고 있는데, 일본은 미야자키[宮崎]시험 선로에서, 독일은 임슬랜드 시험선로에서 시험주행 중이다.
한국에서도 개발되어 1993년 대전 엑스포에서 시험 운행한 바 있다.
중국 상해에는 포동공항과 도심간 자기부상열차가 상용화되어 운영되고 있는데, 고체선로와의 접촉이 없으므로 소음 진동이 매우 적고, 고속도를 유지할 수 있어 미래의 초고속 열차방식으로서 개발되고 있다.
열차의 부상 방법은 같은 극의 자석간에 작용하는 반발력을 이용한 반발식과 자석간의 인력을 이용, 지지레일과 자석간의 인력으로 부상시키는 흡인식으로 나눌 수 있다.
반발식은 같은 극의 영구자석 간에 작용하는 반발력을 이용한 영구자석 반발식과 차량에 부착된 자석의 운동으로 지사의 코일의 유도전류에 의한 자장의 반발력으로 부상시키는 유도 반발식이 있다.
일반적으로 흡인식보다는 반발식이 제어가 쉽고, 흡인식은 정지 시와 저속에서도 부상이 가능하다.
특히, 유도 반발식은 하중의 변화에 민감하지 않으며 초고속에 더 적합하며 화물수송에 적합한 시스템인데, 차량의 자석은 초전도 자석을 사용하며, 초전도를 위하여 극저온이 요구되므로 여러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다.
특히, 이 경우에는 부상에 필요한 충분한 유도전류를 얻기 위한 속도(약 100km/시)를 얻을 때까지는 바퀴에 의하여 진행하여야 한다.
추진 방식으로는 선형유도전동기를 이용한 선형유도추진방식과 선형동기전동기를 이용한 선형동기 추진방식이 있다.
선형동기추진방식이 효율이 높은 이점이 있는 반면, 제어가 까다로운 단점이 있다.
우리들은 단 7분 10초만 운행되는 자기부상열차를 타고 단 3분 여 동안에 걸쳐 최고속도 431km의 빠른 기차의 맛을 보고 종착지인 롱양루역에 내려 다음 장소인 상해 임시정부를 향해 달렸다.
7. 상해임시정부청사
상해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일본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하여 설립하였으며,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였고, 4월 13일 한성임시정부와 통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였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李東寧), 국무총리 이승만(李承晩),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 외무총장 김규식(金奎植), 법무총장 이시영(李始榮),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 군무총장 이동휘(李東輝),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 등이 임명되었다. 6월 11일 임시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는 한편 내각을 개편하였다.
9월 6일에는 노령정부와 통합하고 제1차 개헌을 거쳐 대통령중심제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1926년 9월 임시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원제를 채택하였으며, 이후 의원내각제가 정부형태의 주류를 이루었다.
1945년 8·15광복까지 상하이(1919)·항저우[杭州, 1932]·전장[鎭江, 1935]·창사[長沙, 1937]·광둥[廣東, 1938]·류저우[柳州, 1938]·치장[1939]·충칭[重慶, 1940] 등지로 청사를 옮기며 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외동포를 모두 관할하기 위한 기구로 연락기관인 교통국을 두고 지방행정제도인 연통제를 실시하였으며 국외에 거류민단을 설치하였으며, 교통부 내에는 지부를 설치하고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면에 교통소(交通所)를 신설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국내 정보수집, 정부문서 국내 전달, 인물발굴 및 무기수송 등의 활동을 하였다.
연통제에 따라 서울에 총판을 두고 각 도·군·면에 독판·군감·면감을 두었는데, 국내에는 9개도 1부 45개 군에 조직을 두고 만주에는 3개 총판부가 있었으며, 연통제의 업무는 법령 및 공문의 전포, 군인 모집, 시위운동 계획, 애국성 금 갹출운동 등 다양하였고, 또 연통제와 교통국은 주로 국내 북서지방에 집중되었으며 강원도와 충청도 일부에서는 대한독립애국단, 중부 이남에는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이 임무를 대행하였다.
재정기반을 위해 구급의연금과 인두세를 걷고 국내외 공채를 발행하였으나 이 중 공채는 아일랜드에서 발행한 500만 달러의 공채만 성공하였으며, 초기 재정의 대부분은 재미교포의 성금으로 유지되었고, 뒤에는 장제스[蔣介石]의 원조금으로 충당되었다.
또한 일본의 침략사실과 한국역사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1921년 7월 사료편찬부를 설치하고 9월말 전4권의 《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를 완성하는 한편 박은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하였다. 기관지로 《독립신문》·《신대한보(新大韓報)》·《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공보(公報)》등을 간행하여 독립정신을 홍보하고 소식을 국내외 각지에 알렸으며, 해외의 구미위원부에서는《Korea Review》, 파리통신부에서는 《La Coree Libre》를 발행하였다.
초기의 외교 활동은 대미외교에 중점을 두었고, 종전기에는 대중외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1919년 4월 18일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고, 7월에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에 조소앙(趙素昻)을 파견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28년까지 유럽과 미주의 외교업무를 맡은 구미위원부는 미국 국회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키고 1921년 워싱턴에서 개막된 태평양회의에서 한국국민의 상황을 세계여론에 알렸다.
1920년 10월에는 신규식(申圭植)을 광둥[廣東]의 쑨원[孫文]이 세운 호법정부(護法政府)에 파견하였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자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 정부는 주중대사관을 통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통고하였고 1945년 포츠담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은 다시 확인되었다.
항일독립전쟁은 의열투쟁과 독립군단체지원·광복군창설 등의 군사활동으로 이루어졌다.
의열투쟁의 대표적인 본보기는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의 의거이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도쿄의거[東京義擧]는 실패하였으나, 4월 29일 윤봉길의 상하이의거는 일본군 사령관 등 20여 명을 살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 결과 한국독립에 대한 여론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렸으며, 아울러 임시정부는 일제의 보복을 피해 여러 곳으로 이동해야만 하였다.
군사활동으로는 1920년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비행사양성소·간호학교 등을 세워 군사를 양성하는 한편 중국 군관학교에 군인을 파견하여 교육시키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하였다.
충칭시기(1940∼1945)에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사이판·필리핀 등지에 파견하였다.
1944년에는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권을 얻었다.
1945년에는 국내진입작전의 일환으로 국내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광복을 맞이하자 11월 29일 주요 간부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고, 국내의 혼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각과 정책이 계승되지 못하였으나,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인 자유주의 이념과 삼균주의(三均主義) 이념은 1948년 대한민국헌법에 반영되어 광복 한국의 기초이념이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라고 하여 임시정부가 한국 독립의 모태가 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 되었음을 명시하였다.
우리 일행은 상해임시정부청사에 도착하여 1층에 마련되어 있는 비디오 상영실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비디오로 보고, 임시정부청사를 안내로를 따라 둘러보았다.
1층에 마련된 기념품점에서 기념품을 구입한 후 모두 모여 기념촬영을 하였다.
이 상해임시정부청사는 그곳 현지의 재개발 계획에 따라 헐리게 되어 함평 이석형 군수께서 그 청사 건물을 헐어 그대로 들여와 함평에 재현해 놓을 계획이라고 이계윤 원장님께서 설명을 덧붙이셨다.
8. 동지걸대주가에서의 점심식사
상해임시정부청사를 둘러본 후 기념촬영을 마친 우리 일행은 차량이 도착하지 않은 잠깐의 짬을 내서 바로 옆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어가 몇 가지 물건을 구입한 후 차량이 도착하자 부랴부랴 차에 올랐다.
다음으로 우리가 간 곳은 우리가 전에 해외 세미나 때 가보았던 동지걸대주가로 그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으로 가기 위하여 차량을 주차하고 내려 걸어가는 사이 한 남자가 다리가 멀쩡하게 생긴 것 같은데 아이 하나를 데리고 바퀴 달린 판자에 앉아 빠른 손놀림으로 옮겨가며 '아저씨 천 원! 아저씨 천 원!'을 외쳐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동지걸대주가에서 나온 음식은 중국식이어서 몇 분의 선생님들 중에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면서 전혀 손도 대지 않는 분들이 있었으나 나는 일단 해외에 나왔으면 그곳 현지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관광이라는 생각에 이것저것 맛을 보느라 바삐 배를 채웠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와 거리를 배경으로 사진 몇 커트를 하고 차에 오르기 위하여 이동을 하니 다른 어린아이들 몇 사람이 붙어 다니면서 구걸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일행은 점심도 먹었겠다 배가 부르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겠다고 하면서 다음 장소인 황포강을 향해 차를 달렸다.
황포강을 기준으로 포동지역과 포서지역으로 나눈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우리는 황포강변 와이탄 쪽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9. 와이탄(外灘)과 황포강 유람, 그리고 난징루(南京路)
와이탄은 상해의 상징이자 상해 현대 역사의 축도이다.
북쪽의 와이바이뚜치아오(外白渡橋)부터 남쪽의 진링동루(金陵東路)까지 전체 길이가 약1.5Km로, 동쪽은 황푸(黃浦)강이 서쪽은 52개의 각기 다른 양식의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이 건물들은 서방열강 시대에 상하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고, 와이탄은 상하이 역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와이탄은 상해를 동서로 가르는 황푸강(黃浦江)을 따라 서편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 길이는 약 1.7㎞에 이른다.
다양한 국가의 100여 년 전 건축 양식이 모여 있어서 '세계 건축 박물관'이라고 불리며, 이들 건축물은 당시 서양의 복고주의 건축양식을 따른 것으로 그 숫자, 집중도, 다양성면에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것이다.
넓은 제방을 따라 많은 관광객들이 황포강의 경관을 즐기기 위해 항상 붐비는 곳이다.
현재 와이탄에서 유럽스타일의 풍경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곳은 황포강변 북쪽의 외백도교에서 남쪽의 금릉동로(金陵東路)까지 약 1.5㎞ 정도 이어진 제방길이다.
차량의 행렬이 이어지는 중산로(中山路)에서 제방길로 올라서면 탁 트인 황포강의 거대한 물줄기와 바삐 오고가는 화물선박, 눈부시게 하얀 호화 유람선, 그리고 와이탄의 건축물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밤이 되면 와이탄은 더욱 아름다워지는데, 거리를 밝히는 노란 나트륨 등과 야간조명으로 더욱 웅장하게 보이는 석조 건물들, 그 옥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웅변하는 세계적인 브랜드의 광고판이 상해의 밤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강 건너 동방명주타워가 신비스럽게 빛나고, 검은 강물 위로 크고 작은 유람선과 바지선이 조명빛을 길게 늘이며 지나가노라면 사람들은 낮보다 더 상기된 얼굴로 밤의 습한 강바람을 맞는다.
황포강 위를 운행하는 여객선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도 기념이 될 것이다.
밤이 되면 화려한 조명이 전체 제방을 비추어 유럽 도시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갖게 하고, 근처에 위치한 동방명주타워의 불빛이 와이탄을 더욱 밝게 한다.
상해의 많은 연인들은 이곳에서 야간 데이트를 즐긴다.
와이탄 중간부분에는 큰 동상이 하나 서 있는데, 중국 공산혁명의 원로인 천이(陳毅진의)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인민영웅기념탑은 아편전쟁, 5·4운동, 공산혁명 전쟁까지 상해에서 희생당한 인민영웅을 기념하기 위해 1994년에 세워졌다.
이 와이탄은 예전에 1910년대에도 광고판이 깜박였다는 곳이다.
예전에 김정일이 상해를 방문하고선 '천지 개벽할 일'이라고 했다고 하니 그 광경이 가히 짐작이 갈만 한 곳이리라...
우리 일행은 유람선에 올라 황포강변에 펼쳐진 왼편의 와이탄 거리와 오른편의 포동지역의 동방명주타워, 88층 짜리 빌딩을 감상하면서 기념촬영을 하기에 바빴다.
내가 상해에 와서는 밤에만 유람선을 타 보았는데, 낮에 타보는 유람선도 그런 대로 운치가 있었다.
약 40여분간 유람선을 타고 관광을 한 후 다음 장소인 남경로를 향해 달렸다.
여러분이 '중국은 지저분하고 촌스럽다'라는 편견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면 우선 상해를 여행하길 권하고 싶다.
특히 상해의 최대 번화가라 할 수 있는 남경로를 거쳐 외탄과 황포강 너머의 푸동지역을 보게 되면 '중국은 최고로 멋지고 화려한 나라다'라는 또 다른 편견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 중 남경로는 상해 제일, 아니 중국 최대의 번화 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으로 총 길이만 5km가 넘고 각양각색의 상점과 레스토랑, 백화점, 호텔 등이 위치하여 주말이면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붐비는 곳이다.
남경로는 인민공원을 기준으로 동과 서로 나뉘는데, 남경동로에는 제일백화점이라는 중국 최대 규모의 백화점을 비롯한 여러 백화점들과 패션 상점들이 있고 남경서로에는 중국 전통 공예품과 차를 파는 상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한국의 명동에 비교될 수 있는 이곳은 거리 폭이 명동의 두 배 정도는 되어서 걸어 다니기가 훨씬 편하고 또한 차가 다닐 수 없는 대신 그 사이로 미니열차가 수시로 관광객과 쇼핑객들을 태우고 다닌다.
또한 거리 중간 중간마다 쉴 수 있는 넓은 의자들이 있어 지친 다리를 쉴 수 있게 해준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사람이 많이 다님에도 불구하고 거리가 무척 깨끗하다는 사실인데 그곳은 자동차와 함께 노점상이 엄격하게 금지되어있고 수시로 자동 청소차가 다니며 남경로 여기저기를 쓸고 닦으며 다니기에 가능한 것 같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그 길고 넓은 거리도 사람으로 가득 차니 가능하면 평일에 여유롭게 쇼핑을 즐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바쁜 일정 관계로 남경로는 속속들이 구경해 보지 못하고 20분이라는 짧은 시간으로 기념촬영만을 한 후 다음 장소인 홍구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0. 홍커우공원(虹口公園)과 윤봉길 의사
우리가 도달한 곳은 지금은 노신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홍커우공원으로, 이곳 홍커우공원은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폭탄 투척 사건으로 유명한 곳이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上海(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홍구공원)]에서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가 일본군을 폭살(爆殺)한 의거는 당시 일본은 상하이를 점령한 뒤 전승기념 및 일왕생일 기념식을 훙커우공원에서 거행하였는데, 이때 김구(金九)의 명을 받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단원 윤봉길이, 식이 거의 끝날 무렵 사열대 위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河端貞次(하단정차)]가 즉사하고 최고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백천의칙)]는 두 눈이 튀어나오는 중상을 입은 뒤 한달 여를 투병하다 죽었다.
그밖에 해군중장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야촌길삼랑)], 육군중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식전겸길)], 주중공사 시게마쓰 마모루 등은 중상을 입었다.
의거에 성공한 윤봉길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오오사카[大阪(대판)]로 이송, 12월 18일 사형되었다.
이 사건은 국내 외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한국독립운동계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인들에게 한국 독립운동을 새롭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어 국민당정부로 하여금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게 하였다.
윤봉길은 25세의 젊은 나이에도 장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날 오늘날의 강국인 제국주의열강도 피폐하게 되고 한국은 물론이요 약소민족들이 반드시 독립하게 될 것이라고 이미 1932년에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한국독립과 약소민족 독립을 통찰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한 세계사의 대세 속에서 현재의 제국주의 열강 중 일본도 필연적으로 조락(凋落)의 시기가 올 것을 윤봉길은 통찰하고 있었다.
그러한 속에서 독립운동자들이 하는 역할은 세계사의 진행을 앞당기고 독립의 도래를 앞당기는 역할이라고 윤봉길은 겸손하게 설명한 것이었다.
현재 한국민족은 실력이 없어 당장의 독립쟁취도 불가능하고 자기의 의거로 당장 독립이 용이하게 실행되는 것은 아님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한국인의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여 독립운동을 고취시키고 '한국'을 잊어버린 전 세계에 '한국'이라는 이름과 생각을 뇌리에 깊이 새겨 넣도록 함은 장차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에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임을 확신하여 의거를 일으켰다고 윤봉길은 겸손하게 설명한 것이었다.
물론 윤봉길의 상해 특공작전 의거는 그 자신이 겸손하게 설명한 바와 같은 작은 역할의 독립운동이 아니었다.
윤봉길의 상해의거는 본문에서 다섯 가지의 측면을 들어 밝힌 바와 같이 한국민족 독립운동사에서 참으로 획기적인 역사적 의의를 가진 매우 성과가 큰 독립운동이었으며, 한국민족 독립운동사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독립운동이었다.
우리는 윤봉길의 상해 특공작전 의거를「테러 행위」로 격하시키려는 온갖 괴변들을 물리치고 극복해야 하며, 어떠한 단위부대도 해내지 못하고 중국군 30만 명의 혈전도 해내지 못한 과업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무대, 특공대인 한인애국단의 윤봉길의 특공작전이 수행해 내어 독립운동사에 영원불멸의 업적을 낸 참으로 위대한 업적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기록해야 할 것이다.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의 대 성과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무대, 특공대인 백범 김 구 지휘하의 한인애국단의 특공작전의 대 성과였다.
윤봉길 의사는 의거를 하기 위하여 두 번에 홍구공원을 답사하여 거사의 만전을 기하였다.
상해 병공창의 주임이었던 김홍일장군의 주선으로 폭탄이 마련되었고 거사 장소는 눈이 시리도록 익혀두었다.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백범 선생과 마지막 조반을 들고서도 시계를 바꾸어 갖는 여유를 잃지 않았으며, 거사 후 자결하기 위해 자결용 폭탄까지 마련하였다.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윤봉길 의사는 새 양복에 새 구두로 정장을 하고 그 의거 현장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미리 배포한 참석권이 없으므로 참석권이 있는 일본인 여자에게 접근하여 그의 아이를 귀엽게 생겼다고 칭찬을 하여 그 여자의 호감을 산 후 그의 아이를 안고 부부인 것 같이 위장하고는 유유히 입장하였다.
도시락을 들고 물통을 메었으며 오른손에는 일장기를 하나 들고 있었다.
그 아이를 안고 일본인 여자와 함께 입장하고 있어서 인지 누구 한 사람 감히 검문하는 자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가 메고 있는 물통과 도시락이 그가 고향을 떠날 때 가지고 온 '항쟁의 폭탄' 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윤봉길 의사는 태연하게 군중 사이를 헤치고 식장 뒤편 중앙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단상 위에는 배건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야촌중장, 식전중장, 주중공사 중광, 일본거류민단장 하단, 주중총영사 촌정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마침내 그는 미리 작정해 두었던 지점에 이르렀다.
폭탄을 던지기에 가장 알맞은 자리로, 벌써 수 차례나 현장 답사를 마쳐놓은 자리였다.
오전 11시 40분 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조국이여, 영원하여라' 윤봉길 의사는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뺀 후 앞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온 힘을 모아 단상위로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은 그대로 야촌과 중광의 면전에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백천과 하단은 사망하고 야촌 중장은 실명, 육군중장 식전은 다리를 절단하였으며 중광은 절름발이가 되고 촌정과 우야도 중상을 입었다.
귀를 찢는 듯한 폭음에 한동안 정신이 멍해 있던 윤봉길 의사는 이내 자신의 성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감격이 솟구쳐 올라왔다.
윤봉길 의사는 얼른 정신을 차려 다른 도시락 폭탄을 꺼내 들었다. 자폭용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터뜨려 스스로의 목숨을 끊을 기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의 안전핀을 뽑으려는 순간, 성난 일본군들이 달려들어 그를 쓰러뜨렸다.
그들은 폭탄을 빼앗고 윤봉길 의사를 마구 짓밟았다.
흙과 피로 온통 범벅이 되도록 윤봉길 의사는 전혀 아픈 줄 몰랐다.
그 후 일본으로 압송되어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일본 이시카와현 미고우시 육군공병작업장에서 눈을 가리우고 총살을 당하였다.
중국인들이 현재 기념비를 세우게 한 호수 옆의 의거 현장은 원래의 그곳이 아니라 지금 현재 중국의 대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노신 선생의 묘가 있는 자리가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홍구공원을 둘러보고 윤봉길 의사의 아호인 매헌에서 매자를 따다 지은 기념관인 매정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노신 선생 묘를 둘러 본 후, 지난 6월에도 그랬듯이 홍구공원 입구에서 부채를 '한 개 천 원'을 외치는 상인에게 다섯 개 천 원씩 흥정하여 사주고는 황산으로 넘어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서둘러 홍구공원을 떠났다.
11. 저녁식사 후 둘러본 재래시장
황산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푸동공항을 향해 달리다가 비교적 비행기 시간이 많이 남았다면서 이른 저녁식사를 하게 하면서 느긋하게 많이 먹으라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는 저녁식사를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늦게 먹으려 해도 식사들은 일찍 끝나버려 웅성웅성 대고 있기에 나는 가이드에게 방금 전에 식당으로 들어오기 위하여 유턴을 하면서 보니 이 주위에 시장이 있는 것 같더라면서 그 시장을 구경하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한참 난감해 하다가 그러면 날치기 당할 수 있으니 소지품을 꼭 잘 챙기라고 하고는 동의하였다.
우리들은 시장으로 옮겨가 한참을 둘러보고 과일도 사고, 소품도 사는 등 쇼핑을 즐기다가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차로 돌아왔다.
자로 돌아와서 보니 하얀 열매 하나씩을 나누어주기에 이게 무엇이냐며 물어보니 '인삼과'라고 쓰여있어 처음 보는 과일이 비닐에 포장되어 있기에 귀한 것이 아닌가 하고 하나씩 나누어주려고 윤갑원 선생님께서 사셨다고 하였다.
우리들 역시 처음 본 과일이라 어찌 먹는 것인 줄을 몰라 가이드와 운전 기사에게 물어보니 두 사람 다 처음 보는 과일이라는 것으로 먹어보지 못하고 호주머니에 담아 두었는데, 나중에 먹어본 사람 중 한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오니 맛이 나는 과일이라는 것이었다.
12. 푸동공항과 황산공항, 그리고 황산
우리는 오후 7시경에 푸동공항에 도착하여 수속을 밟고 황산 행 상해항공 비행기에 올랐다.
오후 7시 35분 푸동공항을 출발하여 1시간 여만에 황산공항에 무사히 안착하여 수속을 밟고 짐을 찾아 로비로 나가니 황산 현지 가이드인 김석철 씨가 나와 우리를 반겼다.
그가 안내하는 대로 황산공항 밖으로 나가 미리 마련해 놓은 버스에 올라 첫날밤 우리가 묵을 호텔인 황산국제호텔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한 황산시가 있는 안후이성(安徽省)은 중국 중앙부 양자강(揚子江) 하류에 있는 성으로 북동으로는 강소성과 남동으로는 절강성과 접해 있다.
성도(省都)는 허페이(合肥)이며, 전체면적이 13만9900 평방킬로미터, 인구가 약 5761만 명으로서 중국의 23개성 가운데 면적이 적은 편에 속한다.
성안에는 양자강과 회하, 두 개의 하천이 흐르고 이 두개의 하천으로 인해 중앙부에는 광대한 전원지대를 이루며, 이 두 하천의 연안지대에는 소택지가 널리 분포한다.
기후는 온난 습윤하여 4계절의 구별이 뚜렷하고, 평균기온은 1월 2.7℃, 7월 27.9℃정도다.
북부지역에서는 강수가 여름철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종종 범람하고, 봄에는 가물었으나 지금은 대규모의 회하강 치수공사로 피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안후이성(安徽省)은 화중(華中)의 중요한 농업지대로서 인구의 90 %가 농업에 종사하며, 남부의 양자강 차오후호(巢湖)의 평야에서는 쌀·보리 2모작이, 또 북부의 회하강 유역에서는 밀·참깨·수수·옥수수 등 밭 작물이 성하며, 그밖에 강 남쪽에서는 차가 많이 산출된다.
광산자원으로는 회남(淮南)의 석탄, 구리 등이 산출되며 공업으로는 경공업을 주로 하여 종이·먹 등의 전통공업도 이루어진다.
교통은 양자강·회하강 등의 수운 외에 천진, 회남, 남경에서 출발하는 철도와, 7,000여 km에 이르는 자동차도로가 있다.
안후이성(安徽省)을 대표하는 것은 당연 황산(黃山)과 구화산(九華山)이다.
"천하의 명경(明景)은 황산에 모인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황산은 그 아름다움이 유명하며 구화산은 오대산, 보타산, 아미산과 더불어 4대 불산 중의 하나로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안후이성(安徽省)이 차의 명산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산지와 구릉에서는 산꼭대기까지 계단을 형성하며 올라가는 차밭을 많이 볼 수 있다.
황산시는 옛부터 다무도회(茶務都會)라 불릴 만큼 차 거래가 왕성했던 둔계시와 서셴, 슈닝셴, 이셴, 황산풍경구 등과 함께 황산시로 편입이 되었다.
따라서 둔계역은 황산역으로, 둔계공항은 황산공항(황산둔계공항)으로 그 명칭이 모두 바뀌었다.
황산시는 황산을 가기 위해 방문한 관광객들이 머무는 숙소와, 음식점, 상점이 위치한 곳으로 북경, 남경, 상해, 항주 등의 도시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비행기나 열차, 장거리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황산으로 가기 위한 관문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일행은 새벽부터 서두른 탓에 피곤한 기색들이 역력하여 황산국제호텔에 도착, 방을 배정 받은 후 숙소에 들었다.
13. 비취계곡
우리 일행은 6시 30분에 호텔 식으로 아침식사를 마친 후 7시 30분에 비교적 가벼운 코스로 등산을 할 B조와 힘든 코스로의 등산을 할 A조로 나누어 두 대의 차에 분승하여 호텔을 출발하였다.
먼저 답사할 곳은 비취계곡으로 가는 도중에 잠시 휴게소에 들러 비옷과 오이 등 필요한 것을 사고, 나도 비가 오면 신발이 젖지 않게 신발 위에 시는 장화 같은 것이 있기에 천 원을 주고 한 켤레 샀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장화 같은 것을 샀으나, 나중에 상에 오를 때 신는 분들을 보니 신다가 찢어지는 것, 몇 발자국 못 가서 찢어지는 것 등 완전히 비실용적이어서 잘 못 샀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중국 황산에서도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비취계곡으로, 주윤발 주연의 <와호장룡>영화의 배경으로 더욱 유명해 진 곳이다.
계곡의 물은 청녹색의 신비한 빛깔을 지니고 있는데, 따라 오르다 보면 한 켠의 큰 바위에 붉은 글씨로 사랑 '愛' 字가 쓰인 바위가 보인다.
중국의 서예대가 99인이 제각기 다른 필체를 가지고 愛자를 새겨 넣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비취계곡을 <사랑의 계곡>이라고도 하며, 다시 오르다 보면 정인교(情人橋)라는 다리도 보인다..
비취계곡은 상류로 오를수록 물빛이 아름답다.
'와호장룡'의 옥빛 연못과 부드럽게 흔들리던 대나무와 비취계곡은 황산의 동쪽에 위치하는 풍경구로 '정인곡(情人谷)'이라 불리기도 한다.
연단봉(煉丹峰)과 시신봉(始信峰)이 계곡의 발원지이며 계곡의 길이는 6000미터 정도이며, 계곡에는 크고 작은 채지(彩池:색채가 아름다운 연못)가 수 백 개 있는데 그중 40여 개는 면적이 100평방미터를 초과하고, 가장 큰 채지의 면적은 1000평방미터에 달한다.
비취계곡 채지군은 크기도 모두 다르지만 모양 역시 매우 다양하며, 이 아름다운 채지들의 맑고 투명함, 옥빛과 같은 우아한 푸르름 그리고 연못아래에 깔려있는 암석들의 오색 빛깔이 화려하게 빛나면서 연못의 깊고 얕음의 차이에 따라 색채 역시 변화하는 모습은 매우 환상적인 광경이다.
유명한 채지로는 용봉지(龍鳳池)와 화경지(花鏡池), 녹주지(綠珠池), 옥환지(玉環池), 천지(天池)등이 있으며, 그 중 화경지(花鏡池)는 영화 '와호장룡'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울울창창한 수풀림과 부드럽게 흔들리는 대나무 가지는 청량한 기분을 저절로 느끼게 한다.
6Km에 이르는 이 계곡은 연인끼리 부부끼리 손을 잡고 오르면 더욱 좋은 그런 곳이다.
우리는 순로를 따라 비취계곡을 둘러 본 후 산에 오르기 위하여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하여 북한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향했다.
14. 북한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의 점심식사
우리들은 북한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 도착하였다.
한복을 곱게 입은 아가시 한 사람이 반갑게 우리를 맞아 주어 정겨움을 느꼈다.
미리 준비된 식사를 하고 나니 한복 입은 아가씨에게 노래를 한 곡 불러 달라고 청하였다.
그 한복 입은 아가씨는 '반갑습니다라'는 북한 노래를 간드러지게 생긋생긋 웃어가며 불러 주어 우리의 애간장을 녹아 내리게 하였다.
반갑습니다.
1절>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얼싸안고 좋아 웃음이요
절싸안고 좋아 눈물일세
어허허 어허허허허 닐리리야-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2절>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정다운 그 손목 잡아봅시다
조국 위한 마음 뜨거우니
통일잔치날도 멀지 않네
어허허 어허허허허 닐리리야-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3절>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애국의 더운 피 합쳐 갑시다
해와 별이 좋아 행복이요
내 조국이 좋아 기쁨일세
어허허 어허허허허 닐리리야-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앵콜을 외쳐대니 다시 그 아가씨는 '휘파람'이라는 북한 노래를 한 곡 더 멋지게 뽑아주어 일행들은 흥에 겨워 춤도 추고, 함께 기념촬영도 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휘파람
1절>어제밤에도 불었네 휘파람 휘파람
벌써몇달째불었네 휘파람휘파람
복순이네 집앞을 지날때 이가슴설래어
나도모르게 안타까이 휘파람불었네
휘휘휘호호 휘휘호호호 휘휘휘호호호 휘휘호호호
한번보면은 어쩐지 다신못볼듯 보고또봐도 그모습 또보고 싶네
어제꿈에 내게로 다가와 생긋이 웃을때
이가슴에 불이 인다오 이일을 어찌하랴
휘휘휘호호호 휘휘호호호 휘휘휘호호호 휘휘호호호
휘휘호호
휘휘호호
2절>어제밤에도 불었네
휘파람휘파람
벌써몇달째 불었네 휘파람휘파람
아름다운꽃다발 안고서 휘파람 불면은
복순이도 내마음 알리라 알아주리라
휘휘휘호호 휘휘호호호 휘휘휘호호호 휘휘호호호
아아아 휘파람 아아 휘파람아아아 휘파람
휘휘호호 휘파람
휘휘호호
휘휘호호
휘휘호호 휘파람
우리 일행들은 반가움에, 고마움에 못 이겨 그 아가씨에게 팁을 주어 답례를 하였다.
잠시 여행의 피로를 잊게 해준 노래를 듣고 진짜 황산을 등산하기 위하여 식당을 출발하였다.
15. 중국의 금강산...황산(黃山)
우리들은 황산에 오르기 위하여 먼저 운곡사역에 도착하여 40여명 이상이 탈 수 있다는 케이블카를 타기 위하여 입장권을 끊어 들어갔다.
중국인들이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어하는 산이라는 말처럼 산 입구는 중국인들로 북적거렸다.
이곳 황산은 절묘하기 이를 데 없는 기암절벽에 어느 별천지 선경에나 있을 법한 기묘하기 이를 데 없는 소나무들이 서 있는 사이로 상서로운 구름의 무리들이 시시각각 움직이며 가지가지 오묘한 형상을 구현해낸다.
이를 보고 중국에서 나온 한 여행 안내 책자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松(송), 岩(암), 雲(운) 셋이 힘을 모아 靑空(청공)와 大地(대지)를 영상화하여 수없이 많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장면 장면을 우리들의 눈앞에 전개된다.
운곡사역의 케이블카는 한번에 40명이 탈 수 있고, 시간은 8분 여가 소요되며, 자광각역 케이블카는 전자동 케이블카로 6인 승 관광용이며, 약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상행 루트와 하행 루트의 가격이 다르다.
황산은 세계문화와 자연유산목록에 올라 있는 산으로서 "天下第一奇山(천하제일기산)"이라 칭해지고 있다.
우리들은 장엄한 황산의 모습을 보기 위하여 잔뜩 기대가 부풀었었는데 케이블카에 오르자 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안개가 자욱하여 밖을 내다 볼 수가 없어 아쉬움만이 더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백아령역으로 다행히 비는 그쳤으나 안개가 자욱하여 10m 앞을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황산은 원래 검은 돌이 많아 '이산(移山)'으로 불리다가 양귀비의 남편으로 더 유명한 당나라 현종이 산에 반해 '황산(皇山)'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황제황(皇)자는 황제 외에는 쓸 수 없다 하여 누르황자 황산(黃山)으로 고쳤다고 하며, 주봉은 연화봉(蓮華峰)으로, 천도봉(天都峰)이라고 한다.
고생대(古生代)의 편마암·사암·점판암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암괴석이 많이 솟아 있는 데다 소나무가 울창하여 경승지로 이름 높다.
남쪽 기슭의 등산기지 초입에 있는 탕커우(湯口)에는 온천이 용출하며, 절·묘(廟) 등도 많아 관광·휴양지가 되어 있다.
황산은 안휘성(安徽性) 남부에 있는 1천8백60m의 연화봉(蓮花峰)을 위시로 한 72봉(峰)이 연이어 있는 산괴(山塊)를 말하는 것으로 이 황산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수많은 시인들이 찬미하였다.
옛부터 황산(黃山)의 아름다움은 대 시인인 이백 등에 의해 칭송되었으며 명(明)나라 때의 지리학자이며 여행가였던 서하객(徐霞客)은 30년에 걸쳐서 중국의 산하를 두루 여행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악귀래불간산(五岳歸來不看山), 황산귀래불간오(黃山歸來不看五)", 즉 오악(五岳)-태산(泰山), 화산(華山), 형산(衡山), 항산(恒山), 숭산(嵩山)-을 보고 온 사람은 평범한 산은 눈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황산(黃山)을 보고 돌아온 사람은 그 오악(五岳)도 눈에 차지 않는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황산의 기후는 연간 평균기온은 7.8℃로 거의 겨울이 없는 곳인데, 한여름에도 기슭의 기온이 25∼28℃. 해발 1,630m의 북해빈관은 그것보다 약 10℃ 정도 낮고, 봄과 가을에는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황산은 구름과 안개와 바람의 산이기도 한데, 연간 강수량은 평균 2,500mm, 6월 중순부터 약 1개월 동안은 장마철, 황산의 경관인 운해를 볼 수 있는 계절은 7월 중순부터 9월 말까지로 이때와 꽃이 아름다운 5월부터 6월 초순이 등산의 적기이라고 한다.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만, 대설이 드물며 설경은 절경을 이룬다고 한다.
사람이 적으며 설경이 아름다운 1월이 더 인상적이라고도 한다.
단, 구정은 많은 사람이 찾으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황산의 풍경은 매 계절마다, 하루의 매 시간마다 변화하고 있다고 하는데, 황산의 가장 큰 매력은 변화에 있는 곳으로, 언제나 변화하기 때문에 싫증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황산의 봄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 중 하나로 산에 쫙 덮인 두견화, 울창한 산림, 시원한 폭포는 유람객들의 발길을 잡는다고 한다.
황산에는 15곳에 온천이 분포되어 있는데, 황산 '4절(四絶)'로 불리는 온천은 일명 탕지(湯池), 영천(靈泉), 주사천(朱砂泉)으로 불린다.
명 대 학자 번지항의 <황해>에는 '향천계(현재 소요계)중 탕천이 있었는데 분출구가 사발크기만 하며, 바위틈에서 분출되는 온천수 온도는 비등점에 달한다.'고 기재하였다.
온천은 황산 해발 850m 높이의 자운봉 아래 측에 있는데, 수질은 중탄산염 등 다 종의 광물질이 함유되어 있으며, 유해한 물질이 없어 온천수로 차를 타 마실 수 있고, 술을 빚을 수 있어 당대로부터 개발되었으며 천여 년 간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전하는데 의하면 건원제가 여기에서 일찍 목욕을 한적 있었는데 수염과 머리카락이 검었으며 반로환동(返老還童:젊어졌다는 뜻)하였다고 한다.
과학적인 측정에 의하면 온천수의 온도는 사시장철 42℃ 좌우에 달하며 매시간 유량이 약 45t 에 달하여 보기 드문 가뭄에도 고갈되지 않는다고 한다.
온천수는 깨끗하고 달콤하며 인체에 유익한 음리자와 인체에 소요되는 Mo, Mg, K, Na, Ca 등 여러 가지 미량원소가 있어 마셔도 되고, 목욕을 해도 되고, 병 치료에도 효과적인데 특히 소화계통, 신경계통, 심혈관, 풍습 등 질병의 치료와 등산피로를 풀어주는데 특효가 있다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황산온천의 질병치료 및 보건효과를 아래와 같이 개괄했다. '포식한자 갑자기 배고픔 느끼고, 취한 자 갑자기 취기 가시고, 우울한 자 갑자기 홀가분해지고, 흐리터분한 날 갑자기 명랑해지고, 피로한자 갑자기 편안해진다'
옛 문인들은 '오악(五岳)을 황산과 비기면 영사1도천(靈砂一道泉: 온천)이 부족하다'는 글귀 남겼으며, 1979년 등소평은 황산 방문 시 온천에 들려 '천하명천(天河名泉)'이란 친필을 남겼다고 한다.
현재 황산온천은 온천 욕지와 온천수영장으로 되어 있는데, 온천요금은 12$(온천욕지-35원, 온천수영장-60원)라고 한다.
현지에서 하는 말이 온천에 시설이 부실하여 외국인에게는 온천욕 추천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시설이 뒤떨어진 점은 사전 설명함이 필요할 것 같고, 온천수영장 수영복, 수영모자가 있어야-사스 후 수영장들에서 모자를 써야 입장시킴-입장이 되리라 생각된다.
우리 일행들도 황산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가이드를 통해 전혀 들어보지 못하였다.
산에 오르기 전에 황산에 오르기 위하여 여행준비물은 발이 편한 등산화와 방풍 재킷, 긴 팔 티셔츠, 여름에는 반바지와 함께 비옷이나 우산을 준비하면 좋다.
또 물병과 카메라, 도시락 등을 넣을 수 있는 배낭이 필요하며, 햇빛을 차단할 수 있는 모자가 있어야 한다.
황산은 계단이 많아 관절이 약한 사람은 무릎 보호대와 스틱을 준비하면 좋고, 음식이 맞지 않을 우려가 있으므로 고추장과 밑반찬을 조금 가져가면 유익하다.
상비약으로 소화제와 감기약, 물 파스 등도 준비하면 황산을 오르기 위한 채비로는 완벽하게 만반의 준비가 다 끝나는 것이다.
나도 황산에 가기 위하여 새로이 단화 한 켤레와 반바지 두벌을 구입하여 가지고 가서 착용을 하니 참 좋았다.
그리고, 자외선이 직접 닿는 곳이므로 피부가 햇볕에 거스른 사람도 썬크림을 가지고 가서 바르고 오르는 것이 나중을 위하여 좋을 것이다.
황산으로 가는 길은 서울이나 광주에서 황산까지 직항로는 아직 없고, 상하이를 거쳐야 한다.
상하이에서 황산까지 중국동방항공이나 상해항공에서 운항한다.
소요시간은 1시간 정도 소요되나, 그밖에 버스나 기차를 이용할 수 있는데 상하이∼항저우∼황산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버스로 7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하며, 황산에서 상하이간 기차가 운행되는데 9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황산에 오르고 나니 천하에 산이 없더라(登頂黃山 天下無山)' 기암괴석과 노송 사이로 운해가 얕은 바람에 춤추는 천혜 비경, 황산에 대해 중국인들은 명나라 때 지리학자 서하객의 입을 빌려 이렇게 극찬한 곳이라는 것은 위에서도 말하였다.
허풍이 다소 심한 중국인들이기는 하지만 누구도 황산이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199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명산이다.
국내에서는 '산이란 올라갈 땐 남이지만 내려올 땐 친구가 되는 곳'이라는 항공사 광고에 등장하면서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내에 알려진 것은 빙산의 일각, 오랜 공사 끝에 지난 2001년에야 겨우 등산로가 완공돼 중국인들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서해대협곡은 황산의 최고 절경 중의 절경이다.
태고의 비경을 간직한 깊은 협곡은 황산 안내지도에조차 등산로가 표시돼 있지 않은 처녀지다.
이 때문에 황산을 보고 왔어도 서해대협곡을 돌아보지 않고는 황산을 다녀왔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모든 등산로는 '남녀노소 모두 황산을 보고 즐기게 하라.'는 덩샤오핑(등소평)의 지시에 따라 기암괴석을 깎아 계단을 만들거나 길이 없는 곳은 산허리 수천 길 낭떠러지에 계단을 박아 등산로를 12년에 걸쳐 만들었는데 계단은 모두 14만 여 개라고 하니 중국인들의 무서운 저력을 엿보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 일행은 백아령역에 내려 안개가 자욱한 틈으로 북적대는 인파를 헤치고 다니며 가이드가 안내하는 곳으로 길을 따라 이동하면서 안개 속에 간간이 드러내주는 황산의 속살을 조심스럽게 하나한 드려다 보면서 우리들은 가이드의 안내에 이끌려 빨려 들어가듯 서해대협곡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중국인들도 황산에 오면 연화봉까지만 다녀가고, 한국 관광객들도 서해대협곡을 가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하는데, 서해대협곡 루트는 지난 1979년 이 곳을 보고 감탄한 덩샤오핑의 지시에 따라 12년 간의 설계와 9년 간에 걸친 공사를 통해 지난 2001년 완성되었다고 가이드는 설명하였다.
우리들은 안개 속에 끝없이 뻗어있는 계단 길을 오르내리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배운정호텔인데, 배운정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후두둑 떨어지다 그쳐, 화장실에서 용변을 본 후 배운정을 향해 걸어갔다.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니 완전히 안개에 가려 저 아래 끝이 어디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우리들은 다시 보선교를 향해 다시 서해대협곡의 계단을 끝도 없이 오르내렸다.
100계단에 한 차례 쉬어보지만 끝이 없는 계단을 수직으로 300∼400m 계단아래 내려와 위를 올려다보니 배운정까지의 등산로는 험난하기 그지없어 어떻게 저 곳을 내려왔을까 하고 생각하니 아찔하였다.
그 후 60∼70도에 이르는 경사도의 봉우리를 3개나 넘어야 했지만, 서해대협곡 봉우리들은 이름이 없다.
지금까지 봉우리들은 모양이나 전설에서 따온 이름이 붙어있지만 길이 난지 4년이 채 안 된 이 곳의 봉우리들은 아직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다.
봉우리 아래에서 정상까지 오르내리기를 여러 차례, 몸은 어느덧 계단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겁도 사라졌다. 얼마를 지났을까? 마지막 봉우리 오르막길을 남기고 힘이 부쳐온다.
서해대협곡을 이어주는 것은 모두 이 같은 계단 길로, 배운정에서 보선교까지 이르는 3㎞가 모두 계단으로 돼 있다. 길이 없는 곳에 등산로를 만들다 보니 산을 뚫거나 허공다리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이다.
'어떻게 만들었을까? 혹시 무너지지 않을까?’하는 기우가 머리를 스쳤다.
용기를 내보았지만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계단 폭은 1m, 난간이라고 해야 높이 50㎝의 허약한 철제봉이 연결돼 있을 뿐, 계단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다.
담이 약한 사람은 봉우리에 등을 기대고 겨우겨우 건넌다고 한다.
특히 발을 뗄 때마다 다리가 미세하게 '쿵, 쿵' 하고 울리는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
깎아지른 듯 뾰족하게 서 있는 기암괴석 봉우리에 가져다가 붙였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정도로 바위 주변을 삥 둘러 뻗은 계단 등산로를 내려가고 올라가기를 수 차례, 어느 한 곳에는 시멘트로 만든 계단에 원숭이들을 조각해 놓아 잠시 피로를 잊게 해주는 배려를 해 놓았다.
드디어 보선교에 다다랐다.
천 길 낭떠러지 사이의 봉우리를 연결한 다리, 다리에서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다.
난간 바로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심장이 약한 사람은 다리가 후들거려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떨려온다.
보선교는 말 그대로 신선이 거닐었다는 다리로 10m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깔려있는 안개 속에 드러난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몇 커트 찍은 후 다시 우리일행은 천해를 향해 끝없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어느 곳에서는 너무 계단이 가파라서 거의 기다시피 오른 곳도 있으며, 내려갈 때는 계단 폭이 너무 좁아 게 걸음으로 걸어 내려가니 여느 등산보다 몇 배나 힘든 산행이었다.
우리는 서해대협곡의 끝을 알리는 천해에 도착하여 이계윤 원장님께서 가져오신 복분자 술을 한잔씩 나누며 피로를 풀기도 하였다.
천해에서 모두 함께 기념촬영을 한 후 마지막 코스인 광명정을 향해 다시 계단을 오르내리다 광명정 바로 아래쪽에 있는 하얀 색의 어느 한 호텔이 나오자 우리들은 그곳이 우리가 묵을 호텔인줄 알고 다 왔구나 하고 안심을 하였는데, 가이드는 '이제 광명정까지는 10분만 가면 됩니다'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자 한임자 선생님의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이 보였다.
누가 데려다 주는 것도 아닌 것을...할 수 없이 우리들은 가이드의 10분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 놔서 응 이제 40분은 더 가야겠구나...라고 생각하며 다시 힘든 계단을 올랐다.
드디어 광명정에 올랐다.
모두들 힘이 들어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그곳에 벌러덩 누워 '나 못 가 나 죽여라'라고 소리소리 질러 대 일행들의 웃음을 자아내 주었다.
그 틈에도 얼른 광명정(光明頂) 정상에 올라 기념사진 한 장 찍어두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시 8분만 더 내려가자고 가이드는 재촉하였다.
우리가 하룻밤을 묵어야 할 곳은 광명정 정상에 있는 호텔이 아닌 아래쪽에 있는 사림호텔이라는 것이다.
'오메...또'라는 소리들이 이곳 저 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할 수없이 다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8분만 내려가면 나온다던 사림호텔은 자그마치 50여분을 걸어 내려가니 도착하였다.
우리가 어떻게 8시간 여를 계단으로만 된 등산로를 걸어왔을까? 라고 생각하니 정말 머리가 아찔하여 현기증이 돌 정도였다.
그러나 황산에 오는 사람들의 20%밖에 가보지 못한다는 서해대협곡을 다녀왔다는 뿌듯한 자부심이 생겼다.
발의 종아리는 아려오고 힘들었지만, '언제 또 이런 황산을 와보겠는가?' 정말 황산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늦게 도착하여 식사시간이 되었다고 하여 귀찮기도 하고 해서 그냥 식사를 하고 올라가기로 룸메이트인 김상섭 선생님과 합의를 보고 곧바로 식당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16. 사림호텔 식당에서의 간담회
저녁식사를 다 마치려고 하는데 김갑수 계장님이 식사가 끝나고 그곳 식당에서 간담회가 있다고 하여 숙소로 가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가 자리가 정돈된 후 이계윤 원장님 주재로 간담회가 시작되었다.
원래는 강사세미나이므로 강사회 측에서 먼저 준비를 해놓고 원장님을 청해야 옳은 방법인데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아 먼저 자리를 만들었다는 말씀과 함께 인사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건배, 다음 박남준 강사협의회장님의 인사와 또 건배, 이번 참석자 중의 최고령자이신 조기선 선생님의 건배제의와 함께 또 건배...
식당의 사정에 의하여 저녁 8시 30분까지로 정해진 간담회는 끝없는 건배에 의하여 그 많은 맥주와 배갈들이 비워져 나갔다.
8시 30분에 식당에서의 간담회가 끝나고 각자의 정해진 방으로 나뉘어 들어가 나는 룸메이트인 김상섭 선생님과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막 쉬려고 하고 있는데, 김재일 선생님께 전화가 오기를 모두 모였는데 안 오려느냐는 것이어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오라는 방으로 갔더니 그곳에는 원장님과 부원장님, 그리고 대부분의 선생님들께서 와 계셔서 서로 술을 돌리고 있었다.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나에게 원장님께서 종이 한 장을 주시더니 그곳에 술을 따르시기에 받았더니 마시라는 것으로 술을 먹지 못하니 어찌하느냐고 하였더니 알아서 하라고 하여 그냥 그것을 머리에 써버렸다.
그랬더니 머리에서 나는 술 냄새 때문에 저녁 내내 머리가 지끈거리면 아팠다.
안주도 그리하라고 하여 역시 그리하고 함께 어울려 놀다가 헤어져서 김재일 선생님과 남아 한참을 이야기하다 내 방으로 가는데 바로 그 옆방에서 또 술판이 벌어져 들어오라고 하여 들어갔다가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에 헤어져 돌아와 단잠을 이루었다.
17. 옥병케이블카역까지의 하산
다음 날 아침 우리 일행은 원래 일출을 보기로 하였으나 나는 모닝콜 시간에 일어났음에도 전날 밤 원장님께서 절대 일출은 보러 가지 말라고 하셔서 나가지 않았는데 몇몇 분들은 일출을 보러 나가 정말 좋았노라며 자랑을 하셔서 함께 갔다 올 것을...하고 후회를 하였다.
우리는 오전 7시 30분에 다시 A조와 B조로 나누어 다시 산행이 시작하였는데, 이계윤 원장님과 양채열 부원장님, 그리고 김갑수 계장님, 김병복 씨, 강형배 선생님, 한 호 선생님, 김 혁 선생님 등 일곱 분을 제외한 모든 인원들은 어제의 여독으로 인하여 B조로 합류하여 산행을 시작하였다.
광명정으로의 계단을 오르다가 도중에 먼발치로 보이는 비래봉을 보았다.
비래석은 말 그대로 어디에서 날아온 돌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손오공이 하늘을 날아가다 복숭아를 한 입 먹고 나서 황산을 걷는 사람들이 목마를 때 갈증을 해소하라고 던졌는데 그것이 바위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전날보다는 훨씬 힘이 덜든 산행이라 마치 훨훨 나를 듯이 광명정에 올라 한참을 기다렸더니 뒤에 쳐진 선생님들 중 이모 선생님께서 부정맥으로 인하여 산행을 전혀 하시지 못하여 가마를 13만원에 계약하여 광명정까지 타고 오셨다.
그곳에서 광명정까지는 단 30분도 걸리지 않는 곳이라 비싸다는 생각은 하였으나 그마저도 다행이라 생각했어야 옳을 것 같았다.
광명정에서 백아령역까 지는 걸어 내려왔으나 다시 백아령으로부터 우리가 케이블카를 타야할 옥병역까지 다시 가마꾼에게 흥정하여 12만원에 계약하여 다시 가마를 타고 내려갔다.
우리들은 해심정에 도착하여 기념촬영을 한 후 다시 오르막길을 올라 오어봉까지는 비교적 순탄한 길을 올랐다.
오어봉부터는 내리막길이 이어졌으나 너무나 가파른 길에 맑은 날씨인지라 시야가 훤하게 트여있어 아찔한 천 길 낭떠러지를 보노라니 정말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 대한항공 광고에서 중국인 노인에게 '니하오'라고 인사를 건네는 연화봉 허리에 도착하였다.
우리들은 A조와는 달리 최고봉인 연화봉과 천도봉을 오르지 않고 그 아랫길로 해서 계단을 밟고 내려가 옥병역 입구에 도착하니 A조로 함께 가셨던 강형배 선생님과 한 호 선생님, 김 혁 선생님이 미리 와있어 깜짝 놀라 물어보니 세 분은 힘이 들어 천도봉에 함께 가지 않고 곧바로 옥병역으로 와 계셨다고 한다.
가마를 타고 가셨던 이모 선생님도 역시 일찍 도착해 계셔서 기념사진들을 찍고 있으니 A조로 천도봉을 가셨던 분들이 도착하셔서 옥병역 앞에서 잠깐 노래 몇 곡을 부르고 케이블카에 올랐다.
케이블카 탑승료(편도) 65위안을 내고 쉴 새 없이 돌아가는 6인 승 케이블카를 타고 10여분쯤 내려가자 우리들은 자광각역에 도착하였다.
자광각역에서 위를 올려다본 황산은 너무나 웅장하였다.
우리 일행은 황산박물관을 지나 주차장으로 내려가 A조와 B조로 나누어 버스에 올라탔다.
여기에서 한번도 가보지 않으신 분들을 위하여 자료를 제공하기로 한다.
◈황산의 등반코스
▶온천에서 옥병루로 : 이쪽 방면에서 올라가는 코스는 꽤 힘들다. 등산 입구인 자광각(慈光閣)을 지나면 '입마공동해 등고망태평(入馬空東海 登高望太平)'이란 문자가 보이는 입마정(入馬亭)에 도착한다. 다시 한참 힘들게 오르다 보면 조금 쉴 수 있는 휴게소가 있는 반산사(半山寺)가 나타난다. 조금 더 가다 보면 황산의 고봉 중 하나인 천부봉(川部峰)이 나타난다. 천부봉을 오른 뒤 내려와 다시 옥병루로 향하면 일선천(一線天)이 나타나는데, 양쪽에 깎아지른 듯 서 있는 돌 때문에 길이 좁아져 하늘이 하나의 선처럼 가늘게 보인다. 이 계단을 다 올라가면 3개의 바위와 소나무로 이루어진 절경 봉래삼도(蓬萊三島)가 나타난다. 표고 1,668m의 지점에 이르면, 수령 1,000년을 넘겼다고 하는 소나무 영객송(迎客松)이 옥병루(玉屛樓) 앞에 당당히 서서 등산객을 맞이한다. 이 영객송 아래의 돌계단을 내려가 다시 봉래삼도를 지나 좁은 길로 하산하면 이제 천도봉으로 오르는 입구가 나온다. 옥병루는 문수원(文殊院)이라고 불렸던 산장이기도 하다.
▶옥병루에서 북해빈관으로 : 천도봉을 오른 뒤, 황산 최고봉인 연화봉(蓮花峰: 1,860m)을 오르고 나면 이제 능선을 타는 코스이다. 이 코스는 연화봉을 오른 뒤에 다시 옥병루에서 출발하기도 하는데, 이곳에서 하룻밤 지내고 아침에 출발한다. 연화봉을 오르는 도중 난 코스 중의 하나가 백보운제(百步雲梯)인데, 절벽을 뚫어 만든 돌계단이 100여 개 정도 이어진다. 이곳을 오르면 황산을 사방으로 둘러볼 수 있는 황산 최고봉인 연화봉에 이른다. 연화봉을 오른 뒤 다시 하산하여 능선을 타고 가면 황산에서 두 번 째로 높은 봉우리인 광명정(光明頂)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이곳에 오르면 연화봉을 비롯하여 천도봉까지 조망할 수 있고 운이 좋으면 멋있는 운해를 감상할 수 있다. 광명정은 기상대 시설이 있어서 그 구역은 들어갈 수 없다. 광명정에서 도보로 40분을 가면 북해빈관에 도착한다.
▶운곡사에서 북해빈관으로 가는 동쪽 코스 :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길을 도보로 가는 코스이다. 서쪽 코스에 비해 동쪽은 비교적 쉽고 짧다. 7.5㎞에 달하는 거리로 약 4시간 정도면 여유 있게 오를 수 있다. 단, 이 코스는 서쪽으로 오르는 코스보다는 볼거리가 적다. 힘들지만 추천하고 싶은 코스는 온천구에서 올라 북해빈관으로 향하는 서쪽 코스로 오른 뒤에 이 코스를 통해서 하산하는 것이 황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주요 풍경구
▶온천 풍경구 : 운봉과 도화봉 사이에 위치. 도화계가 이곳까지 흘러 지나는데 산그림자가 물어 비껴들고 수목이 울창하다. 주요 경물로는 백장천, 인자 폭포, 황제가 단약을 빚었다는 단정약구(丹井藥臼), 태자선백천, 시검석과 취석(醉石)등이 있다.
▶운곡사 풍경구 : 황산의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한 운곡사에는 여러 산봉과 1천년 묵은 기이한 소나무, 아홉 굽이 물이 흘러 내려 생긴 구룡담, 그리고 매화 가지에 남은 까치, 쥐를 잡는 쌍둥이 고양이, 약초 캐는 노인 등 기암 괴석이 있다. 운곡사에서부터 백아령에 이르는 케이블카가 있는데 총 길이 804m이다.
▶북해 풍경구 : 해발 고동 1,600m 이상이며 경물이 집중되어 있다. 사자봉 허리에 있는 청경대는 운해와 일출 관상에 가장 적절한 곳이다. 시신봉은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관광객들이 이곳에 오면 반드시 경치가 기이하게 된다고 한다. 이곳에는 기종괴석이 매우 많으며 흑호, 용조(龍爪), 연리, 봉황등 소나무와 몽필생화, 바다를 구경하는 경물 등이 있다.
. 서해 풍경구 : 서해는 산봉이 기이하고 물이 맑아 수많은 경물이 천태 만상을 이루었다. 쌍필, 첨도, 석상 등 봉우리와 장화를 말리는 신선, 수놓는 선녀, 호랑이 잡는 무송 등 기이한 경물이 있다. 조운정(조雲亭)은 운해, 저녁 노을, 기이한 산봉과 깊숙한 골짜기를 구경하기 좋은 곳이다.
▶옥병루 풍경구 : 옥병루는 해발 1,668m의 옥병봉에 위치, 예로부터 하늘의 궁궐이라고 불린다. 옥병루 전후에는 이름 난 영객송과 송객송이 있고 부근의 왕명정, 연화와 천도등 3대 주봉이 있는데 그중 천도봉이 가장 험준하다. 산중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마치 천당에라도 오른 듯 무한한 경치가 한 눈에 들어온다.
▶송곡암 풍경구 : 총 길이 약 10km 의 산간 계곡으로 동식물 자원과 물경치가 특별히 풍부하며 녹음 짙은 산길이 우아하고 고요하다. 부용(芙蓉), 침두(枕頭) 두 산봉우리 사이의 비치는 물빛이 비취같이 푸르고 구슬 같은 폭포수가 쏟아져 사람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황산의 볼거리
▶옥병루(玉屛樓) : 원래는 문수원의 유적으로 해발 1,680m에 있다. 옥병루의 좌측에는 사석, 영각송, 오른쪽에는 상석, 송각송, 뒤에는 금귀망월, 앞에는 진해운해가 있다. 여기에는 명승이 많기 때문에 예로부터『문수원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황산의 모습을 알 수 없다』라고 말해질 정도이다. 옥병루에서부터 천도봉과 연화봉에 오르는 코스는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운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지 않으며 사고를 당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올라가야 한다.
▶온천구(溫泉區) : 온천은 황산을 오르는 입구에 있는데, 호텔이나 매점, 온천, 풀장이 모여 있고, 주위에는 볼거리도 많다. 볼거리로는 온천구의 옛 유적인 익연정(翼然亭), 흐름의 갈래가 인(人)자의 모양을 한 폭포를 바라볼 수 있는 관폭루(館瀑樓), 관폭루에 걸려 있으며 용의 등 모양을 한 백용교(白龍橋), 백용교를 건너서 있는 취석(醉石)과 호두암(虎頭岩), 도화계(桃花溪) 부근, 황산을 올려다보는 장소인 도원정(桃源亭) 등이 있다.
▶온천(溫泉) : 전설에 중국의 軒轅황제가 이 온천에서 49일 동안 목욕하고 젊음을 되찾았다고 한다. 온천에서는 매일 약 400톤에 달하는 물이 일 년 내내 쉼 없이 흘러나오고 수온은 42도 정도를 유지한다. 황산의 온천은 소화, 신경, 심혈관, 신진대사, 운동 등 계통의 병, 특히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북해(北海) : 망망대해처럼 펼쳐지는 흰 구름바다가 펼쳐져 있는 곳. 황산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해라고 부른다 북해賓館(빈관)에서 아침 일찍 떠나 淸凉臺(청량대)에 오르면 수평선 위로 붉은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운곡사까지는 내리막길이다. 아래쪽으로 펼쳐지는 경치도 장관이다.
▶반산사(半山寺) : 해발 1340m의 봉우리로, 노인봉(老人峰)과 주사봉(朱砂峰) 사이에 위치해 있다. 절 앞에서 위를 쳐다보면 바위가 보이는데, 마치 황금 닭이 하늘을 향해 우는 것 같아 보인다.
▶연화봉(蓮花峰:리엔화펑) : 해발 1860m로, 황산의 최고봉이다. 주위에 여러 산들이 둘러싸여 있어서 마치 연꽃 같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연화령(蓮花嶺)과 연화봉(蓮花峰)에 이어진 길은 1.5㎞ 길이의 뱀처럼 구불구불하며, 정상에 이르기까지 네 개의 동굴을 지나게 된다. 연화봉에는 비룡 같은 소나무와 유명한 황산 두견화가 있다. 옥병루에서 보면 연꽃 같이 보인다고 해서 연화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일출이나 일몰을 보려면 청량대(淸凉臺)나 사자봉(獅子峰)으로 가는 것이 좋기 때문에 정상이라는 것 외에는 별 매력이 없다.
▶청량대(淸凉臺) : 일출과 운해를 보기에 가장 좋은 장소이다. 일출 전에 가기 위해서는 손전등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사자봉(獅子峰:1670m) 중턱의 표고 1,640m 지점이다. 이곳에서는 시신봉(始信峰)이나 십팔나한조남해(十八羅漢朝南海) 등을 조망할 수 있다.
▶사자봉(獅子峰) : 청량대에서 계속 위로 올라가면 사자봉이다. 이곳은 일몰을 보기에 좋은 장소이다(일출, 일몰시간은 호텔의 프런트에 문의한다). 이곳에는 마치 원숭이가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묘한 모양의 바위인 후자관해(狐子觀海)가 있다.
▶비래석(飛來石:페이라이스) : 배운정(排雲亭)에서 남쪽으로 혹은 광명정(光明頂)에서 서쪽으로 걸어서 30분쯤 가면 높이 12m의 기암을 만나게 되는데, 이 돌이 바로 비래석이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모양을 하고 있어 비래석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바위는 높이가 12m, 길이가 7.5m, 너비가 2m, 중량이 360톤이다. 또한 복숭아나무 같다 하여 선도봉(仙桃峰)이라 불리기도 하며, 우리나라 TV 광고에도 등장하던 곳이다
▶시신봉(始信峰:스씬펑) : 시신봉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서는 대산맥과 황산송이 보이는데 운해가 생기면 멋진 풍경을 이룬다. 또한 시신봉은 황산 4절 기송(奇松), 기암(奇巖), 운해(雲海),온천(溫泉) 가운데 기송(奇松)이 특히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배운정(排雲亭) : 비래석(飛來石)에서 북쪽으로 1km정도 걸어가면 배운정(排雲亭)이 보인다. 배운정(排雲亭)은 중화민국 24년, 서해(西海) 입구에 세워졌으며, 이곳에서는 시야가 확 트여 황산의 기암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명당이다. 구름과 안개가 서해의 골짜기들을 휘감아 솟아오르다 이곳에 이르면 저절로 거쳐져, 물리칠 배(排) 에 구름 운(雲)을 써서 배운정(排雲亭)이라 불리게 되었다.
▶황산송(黃山松) : 황산의 소나무는 황산의 독특한 지형과 기후로 인해 생긴 소나무의 변형이다. 사람들은 "황산에 돌이 없으면 소나무가 아니고, 소나무가 없으면 기이하지 않다(無石不松, 無松不奇)"라고 말한다. 황산의 소나무는 일반적으로 해발 800m 이상의 곳에서 자란다. 가장 유명한 황산의 소나무는 수령 800∼1,000년의 '영객송(迎客松)'과 '송객송(送客松)'으로 소나무가 선 모습이 팔을 벌려 손님을 영접하고 배웅하는 듯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양귀비와 현종이 변신했다는 두 그루의 '연리송(連理松)'도 황산에서만 볼 수 있는 명물로서 이 주위에 쳐놓은 쇠사슬에 빼곡이 채워진 자물쇠들이 기이하여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이곳에 자물쇠를 채워놓으면 사랑이 깨지지 않는다고 믿기에 연인들이 와서 자물쇠로 채워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결송(團結松)은 하나의 뿌리에서 두 개의 큰 줄기로 나뉜 소나무로 두 개의 큰 줄기가 56개로 뻗어 있어 중국 소수민족의 수와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또한 용조송(龍爪松)은 뿌리가 용의 발 모양을 닮았다는 나무로 나무의 뿌리 모양을 보고 이름을 지은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그 외에도 포단송(浦團松), 봉황송(鳳凰松) 등이 있는데, 이 소나무들은 황산의 십대 명송(名松)에 속한다. 황산의 소나무는 비록 자태가 강인하고 꿋꿋하지만, 생존을 위해 자연과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속에서 황산 소나무는 강인하게 암석 위에서 비바람을 견디며 자라고 있다. 황산 도처에서 화강암을 볼 수 있다. 소나무 씨는 바람에 실려 화강암 틈에 들어가 싹트고 뿌리를 내려 자라기 시작한다. 이런 끈질긴 생명력 또한 기이하다. 황산의 소나무들은 생장 환경이 힘들고 어려운 것만큼 성장 속도가 매우 느리다. 뿌리는 나무줄기보다 몇 배∼수십 배 더 길다. 3미터에도 이르지 못하는 소나무도 몇 백년, 심지어 수 백년 자란 것들이다. 그중 유명한 영객송(迎客松)은 연륜이 천년이나 된다.
▶운해(雲海 구름바다) : "황산은 자고로 구름이 바다를 이룬다"는 말이 있다. 구름바다는 "인간 선경"을 디자인하는 신기한 "디자이너"이다. 황산은 매년 평균 255.9일 안개에 덮여 있는데 매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는 황산의 雲海를 관상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다. 특히 비나 눈이 내린 뒤의 일출이나 일몰 때의 雲海는 제일 가관이라 할 수 있다.
▶괴석(怪石 괴상한 돌) : 황산 곳곳에는 괴상하게 생긴 돌들로 가득하다. 관세음을 배알하는 동자, 날아온 돌(飛來石), 바다를 바라보는 원숭이, 수박 먹는 저팔계 등등으로 이름이 지어진 돌만 1200여 개나 된다고 한다. 그 생김새로 인해 많은 이름들로 불려지고 있으며 황산의 대표적인 볼거리 중 하나이다.
▶운곡산(雲谷山) : 운곡산은 높이가 890m이며, 나한봉(羅漢峰)과 향호봉(香爐峰) 사이에 위치한다. 북해에서 온천로에 가는 중간 지점에 있으며, 케이블카를 타고 북해로 향하는 시작지점이기도 하다. 운곡산을 따라 왼쪽으로 돌아가면 죽림을 지나면 4㎞떨어진 곳에 위치한 구룡폭포가 보인다.
▶제운산(齊雲山) : 황산시 즉 둔계(屯溪)에서 3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기봉이 연이어진 도교(道敎)의 산, 강서성의 용호산(龍虎山) 호북성의 무부산(武富山), 사천성의 작오산(雀嗚山)과 더불어 중국 4대 도교 성산(聖山)으로 꼽힌다. 도교의 산답게 일천문(一天門), 이천문(二天門), 삼천문(三天門)을 지나 태서궁(太書宮) 유적지 앞 장생루(長生樓)가 있는 곳까지 오르면 향로봉(香爐峰) 너머로 절경이 전개된다.
▶구화산(九華山) : 구화산은 청양현(靑陽縣)경내에 위치하고 황산과 마주하고 있다. 구화산은 절강의 보타산, 산서의 오대산, 사천의 아미산과 함께 중국 불교의 사대명산으로 불린다. 사방 120여 킬로의 산간에는 맑은 샘이 쉼 없이 솟아나고 깊고 고요한 죽림이 94개의 절과 어우러져 있다. 음력 7월 15일과 7월 30일이면 구화묘회(九華廟會)가 어김없이 열린다. 각 절에는 많은 불교 문물들이 수장되어 있다. 산 내에는 74개의 불각이 있으며, 산 전체를 합하면 6,400체의 불상이 있다.
절의 건립은 당대에 시작해서 전성기에는 300채 남짓의 절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82개의 사찰, 6천여 개의 불상, 3백여 명의 비구와 비구니들이 있다.
◈기타 특이사항
▶황산차(黃山茶) : 안개가 짙은 황산에서는 잎이 두꺼운 모봉차(毛峰茶)가 생산되는데 이것을 운무엽(雲霧葉)이라고 한다. 차 농장은 운곡사와 양산사(羊山寺) 주변에 많이 있다. 들 꽃이 막 다투어 피기 시작할 무렵이 차 잎을 따는 최 적기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차 잎에 꽃향기가 배어 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지에서 황산의 향긋한 샘물에 끊인 차를 마셔보는 것도 좋다.
▶케이블카 : 미니버스가 황산 입구에서 케이블카 승차장으로 데려다 준다. 여기서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동로 케이블카는 황산의 운곡사(雲谷寺해발 890m)에서 북해 동단의 백아령(白鵝嶺) 사이를 운행하고, 그 운행길이는 2803m로 아시아에서 가장 길다.
18. 점심식사 후 모봉차(毛峰茶) 공장 견학
우리들은 오후 1시가 훨씬 넘어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하여 전날 비취계곡으로 가기 직전에 쉬어갔던 휴게소 옆 한국식당으로 가서 한식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 그 안에서 주인이 파는 대나무 이쑤시개를 한 봉지에 천 원씩 주고 사 가지고 나오는데 그 앞에서 노점상을 하는 아주머니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세 봉지에 이천 원을 외치고 있어 허탈해했다.
우리일행은 10여분을 달려 모봉차(毛峰茶)를 판매하는 공장에 내렸다.
중국 10대 명차 중의 하나인 황산모봉차(黃山毛峰茶 huang-shan-mao-feng) 는 외관은 작고 흰 은빛 털이 차 잎을 덮고 있으며 높은 향기와 부드러운 맛을 자랑한다.
모봉차가 생산되는 황산은 안휘성의 유명한 명승지로써 중국 5대 명산 중 하나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구름과 안개가 사시사철 끼어 있으며, 푸른 소나무가 무성하고, 그 사이 사이로 골짜기와 샘이 사방에 흩어져 있어서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 같다.
그 곳 해발 900∼1,000미터 사이에 황산 모봉차의 다원이 자리잡고 있는데, 차의 푸른빛이 더한층 황산의 자연 경관을 빼어나게 한다.
이 산악지대의 연 평균 온도는 14∼17℃이고 강우량은 2,000mm 이상이다.
토양은 검은 사력질의 토양으로 무기질이 많으면서 배수가 잘된다.
황산 모봉차는 향기가 높고, 맛이 신선하며, 부드럽고, 작고 어리며 많은 백호가 있다.
찻잎의 빛깔은 황록색이며 우려낸 잎도 선명한 황록색이고, 탕 색은 맑고 투명하며, 특급과 1급의 모봉차를 명차로 구분한다.
모봉차는 청명에서 입하시기에 잎을 따서 만들어지는데 입하이후에 따서 만든 것은 모봉차로 분류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특급은 차 싹 하나와 찻잎 하나인 일창일기로 만들고 1급은 싹 하나에 잎이 두 개인 일창이기를 원료로 하여 만들며, 2급은 일창이기와 일창삼기로 만들며, 3급은 활짝 다 펴진 일창이기나 삼기로 만들어진다.
제다방법은 찻잎을 살청하고 비벼서 건조시키는데 특급과 일급은 비비지 않는다.
차를 한잔씩 따라주며 차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있는데, 힘든 산행에 지친 데다 점심을 막 먹은 터에 식곤증이 몰려오는지 여러분의 선생님들께서 졸고 계시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우리 일행은 차를 구입한 후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하여 차 공장을 나섰다.
19. 화산미굴(花山謎窟)
우리들은 1시간 30분 여를 달려 황산 시내를 관통하여 다다른 곳은 화산미굴(花山謎窟)로 아홉 번째 불가사의인 인공 동굴인데 모두가 의문 투성이라고 한다.
황산시내를 거쳐 찾아간 화산미굴(花山謎窟)은 국가 풍경 명성구로서 황산시 둔계구 동쪽에 위치해있다.
화산미굴(花山謎窟)은 신안강을 중심으로 풍경구내 있는 화산미굴(花山謎窟)은 사람들이 인공적으로 파놓은 것으로 산 속의 돌을 파서 만든 것인데 크고 작은 동굴을 총 36개를 발견했다고 하는데 그중 2호 동굴과 35호 동굴만 확인하여 공개하고 있다고 한다.
이 화산미굴은 전부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데, 언제, 어떻게, 얼마나 큰지, 파낸 석재는 어디로 운반했는지, 특히 무엇 때문에 이 동굴을 만들었는지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있다고 하며, 굴속의 온도는 항상 15℃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아직까지 무슨 이유로 이 굴을 파 놓았는지 의문으로 남아 있는데, 다만 굴의 용도를 주거용, 또는 군사 주둔용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라고 하며, 굴의 최 하부는 강바닥 보다 9m 정도 더 낮다고 한다.
굴 입구에 들어서면은 공기 층이 형성되어 바깥의 찌는 듯한 더위인데도 그 바깥의 공기가 그 굴속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높은 온도를 공기 층을 통과함과 동시에 차갑게 느껴지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차에서 내리니 신안강을 건너는 출렁다리가 보였는데 이곳에도 어김없이 가마대신 자전거를 타라고 끝까지 '천 원! 천 원!'을 외치며 따라다녔고, 각가지 장사들 역시 물건을 팔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우리들이 도착한 시간에 이슬비가 살짝 내렸으나 우리들은 출렁다리를 통하여 신안강을 건너갔다.
화산미굴은 규모가 방대하고 기세가 장관이며 특색이 선명해 황산에서는 아주 드문 인공동굴로 알려져 있다.
화산미굴은 근년에 발견된 인공 석굴로서 가장 큰 석굴의 면적은 12,600㎡ 나 되며 최고 높은 곳은 30m나 되는데, 신기한 것은 천장의 바위 두께가 일정하게 5∼5.5m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36개의 동굴 중에서 한 곳을 구경을 했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그 옛날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이 많은 석재를 자르고 운반했을까? 하는 생각이 미치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화산 동굴은 2001년 강택민 주석이 동굴을 시찰하고 찬탄을 금치 못했다는데 35호 굴 입구에는 기념문이 적혀있었다.
이 동굴이 둔계구의 화산이라는 산에 위치하고 있어 강택민 주석이 이 동굴을 화산미굴(花山謎窟)이라고 직접 이름 지었다고 한다.
우리들은 그 동굴 앞에 있는 강택민의 기념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일정관계로 바삐 화산미굴을 떴다.
20. 보석공장
우리일행이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보석공장으로 입구에 들어서니 옥으로 만들었다는 큰배가 우리를 반겨주었고, 그 안쪽으로는 순로를 따라 각종 보석들이 길게 유리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매장이 나와 구경하기에 바빴다.
각종 보석류와 옥 종류가 진열되어 있었는데, 강진에서 왔다는 다른 일행들은 1만원씩 하는 베개 속에 넣는 옥 방석을 선물용으로 사서 꾸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1. 발 마사지
보석공장을 출발하여 10여분을 달리니 발 마사지 업소에 도착하여 한 방에 너 댓 명씩 나뉘어 들어가 발 마사지를 받기 시작하였다.
중국에 와서는 반드시 발 마사지를 받는 것이 정해진 순서 중의 하나라 그냥 아무 말 않고 처녀 종업원에게 발을 맡겼다.
원래 종업원들 팁까지 포함해서 여행비를 계산하였는데, 가이드는 은근히 잘 하면 팁을 따로 더 주라고 하여 우리 방에 있는 사람들은 1인당 천 원씩 팁으로 주었다.
1시간 여에 걸쳐 발 마사지를 받은 우리는 시간에 쫓겨 서둘러 발 마사지 업소를 빠져 나와 차를 타고 식당으로 옮겨가는 도중 인원이 덜 탔다는 이야기가 있어 확인해 보니 두 사람이 발 마사지 업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확인되어 일단 차는 식당으로 가고 두 사람은 택시로 식당으로 올 수 있게 조치를 취해 놓았다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안심하고 식당으로 가니 우리와 거의 동시에 나머지 두 사람이 식당에 도착하여 합류하였는데,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시간이 없으니 하지 말라던 전신 마사지를 받느라 시간을 더 지체하였다는 것이었다.
상해 행 비행기를 타야 될 시간이 임박해 우리 일행은 급하게 저녁식사를 먹고 비행장으로 가기 위하여 서둘러 나오는데, 어디서 많이 본 사람과 김상섭 선생님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자세히 보니 전에 우리 강사들이 상해, 무석, 주장으로 세미나를 왔을 때 우리를 안내해 주던 이호진 씨였는데, 그는 지금 우리가 저녁식사를 했던 바로 1층에서 진주가게를 운영하고 있다고 하는 말을 들으니 돈을 많이 벌어 사업을 시작하고 얼른 보니 그의 어머니인 듯한 분이 있는 것은 연변에서 부모님을 모셔다 살고 있는 것으로 보여 기뻤다.
22. 황산공항...그리고 푸동공항
우리는 서둘러 황산공항에서 짐을 다시 꾸리고 짐을 부친 후 수속을 밟고 있는데, 나의 배낭에 있던 맥가이버 칼이 엑스레이에 걸려 아차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어 아까웠으나 압수 당하고 상해행 상해항공에 올랐다.
1시간 여를 어둠 속을 달려 푸동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여 다시 수속을 밟은 후 짐을 찾아 로비로 나가니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가이드가 반갑게 우리 맞아주어 안내를 받아 버스에 몸을 싣고 우리가 하룻밤을 묵을 서울리아호텔로 옮겨 간 시간은 밤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모두들 지친 듯 방을 배정 받을 때까지 힘이 하나도 없이 털썩 맨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도 보였다.
방을 배정 받고 우리들은 각자 흩어져 숙소로 들어갔다.
너무나 피곤하여 샤워만 한 후 곧바로 단잠에 빠져들었다.
23. 중국의 대표적인 수향(水鄕) 주장
이번 일정의 마지막 날인 7월 8일의 아침은 밝았다.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모든 짐을 다 꾸려 7시 30분에 주장을 향해 버스에 몸을 맡기고 달렸다.
1시간 30분 여를 달려 다다른 곳은 주장으로, '黃山集中國山川之美(황산집중국산천지미),周庄集中國水鄕之美(주장집중국수향지미)'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중국 산천의 아름다움은 황산에 모여 있고, 수향(水鄕)의 아름다움은 주장에 모여있다'라는 뜻이다.
중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수향(水鄕) 도시를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주장이 꼽힐 만큼 이 아름다운 도시는 운하의 도시로 유명하다.
작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운하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운치와 전통적인 건물들로 2001년 APEC회의에서 상해와 함께 개최지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주장은 소주(蘇州)에서 동남쪽으로 38km가량 떨어진 곤산시(昆山市) 경내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도시로 주위에 있는 청포, 오강, 오현, 곤산 4개 시현의 경계에 있고, 9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옛날부터 수향으로 유명했다.
도시의 물가에 지어진 고 건축물들은 예스럽고 소박하면서 운치가 있어 강남 지역의 '작은다리(小橋), 유수(流水), 인가(人家)'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중국의 강남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주장에는 심청, 장청, 미루, 징허도원, 전복사 등 역사 깊은 명승고적이 많아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운하와 거리가 있는 곳엔 반드시 다리가 있어 이 작은 도시에서는 오래된 다리를 무척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쌍교(雙橋)와 부안교(富安橋) 등이 유명하다.
이곳 주장은 2003년에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에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역사문화 명도시'라는 칭호도 얻게 되었다.
주장의 명물 중의 하나인 쌍교(雙橋)는 주장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다리로 아치형 돌다리인 세덕교(世德橋)와 돌로 만든 형교인 영안교(永安橋)로 이루어져 있다.
명(明) 만력(萬歷)년간인 1573년∼1619년 사이에 처음 만들어져 청대를 거쳐 1957년까지 두, 세 차례 수리를 거쳤으며, 형태가 옛날 열쇠모양과 흡사하다 하여 약시교(약匙橋/열쇠다리)라고도 불린다.
세덕교(世德橋)는 길이 16m에 너비가 3m이고, 영안교(永安橋)는 길이 13.3m에 너비가 3.5m이다.
쌍교 중 세덕교는 남북으로 흐르는 운하에 가로 걸쳐 있으며, 다리의 동쪽에 진입교 부분이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다리와 거리를 이어주고 있다.
이곳은 교각사이의 공간이 좁아 작은 배만 지나다닐 수 있지만 오히려 오래된 돌다리 사이를 지나는 작은 나룻배의 모습이 더욱 운치 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쌍교가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상해출신으로서 미국에 머물고 있던 중국 반체제 화가 진일비(陳逸飛)가 1984년 쌍교를 유화(油畵)로 그려 '고향의 추억'이란 이름으로 뉴욕 Armond Hammer 화랑에 출품하면서부터 이다.
이 그림에 반한 Hammer씨는 이를 비싸게 사들였고, 그가 미국 서부석유회사 사장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중·미 양국우호협력의 상징으로 이 그림을 등소평에게 선물하였다.
이듬해 1985년 UN개막을 기념하는 우표도안으로 이 그림이 채택되어, 주장의 쌍교는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다.
지금까지도 다리 주변엔 1년 4계절 내내 각지에서 온 화가지망생들이 사생하는 모습과 사진 애호가들의 촬영모습을 볼 수 있다.
주장은 춘추전국시대 오왕의 작은 왕자 요와 한의 월요군의 봉지이었기 때문에 요성이라고 불렸다가 북송 시대(1086년)에 불교를 신봉하던 주유공랑이 庄田(농지) 13ha를 전복사에 기부하였는데, 후대 사람들이 정풍리라는 이름을 고쳐 주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주장의 환경은 그윽하고 우아하며, 건축은 옛스럽고 소박하다.
비록 역사가 900년이 넘었으나 수향집진(물을 바탕으로 밀집하여 생겨난 마을)의 원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전체 마을의 가옥 중에서 60%가 명·청 시대에 지어진 것인데, 0.4㎢에 지나지 않은 작은 마을에 100채나 넘는 고전택원과 60개가 넘는 문루가 남아 있다.
이렇게 잘 보존된 원인 중의 하나는 이 마을이 주변 행정구역의 경계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주변 발전의 영향을 별로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도시 형태는 사면이 모두 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한 떨기 수련처럼 보이고 있고, 4개의 소하천(北市河, 後巷河, 油車河, 中市河)이 井자꼴을 이루고 있다.
하천을 골격으로 하여 마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집들은 물가에 붙어 있다.
이 주장은 하천이 도시를 가로, 세로 지나가고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많은 교량이 필요하다.
주장은 양자강(장강)의 남쪽에 위치한 유서 깊은 소도시로, 송대에 도시로 자리잡아 발전하여 왔으며, 현재는 강소성(江蘇省) 곤산현(昆山縣)에 속한다.
면적 40ha, 인구 2,000 명의 작은 도시인 주장은 운하로 짜여진 도시이다.
운하에는 14개의 석교가 놓여있어서 주장의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주장에 있는 건물의 60% 이상이 명, 청 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주장에는 명, 청 시대에 지어진 오래된 대 저택들이 많이 있는데, 특히 장청(張廳), 심청(沈廳) 등은 대규모의 저택으로 매우 아름답다.
명대에 지어진 장청은 횡으로 5칸, 종으로 5진(進; 주택단위)의 규모이다.
중앙 운하의 푸안교 부근에 있는 심청은 주장에서 가장 큰 규모의 주택으로 1742년에 건립되었다.
심청은 깊이 방향으로 배열된 5개의 천정(중정)을 둘러싸는 많은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심청은 횡으로 5칸, 깊이방향으로 7진으로 길이가 약 90m에 달한다.
심청은 장이모우 감독, 공리 주연의 '상하이 트라이어드(Shanghai Triad; 원제 搖阿搖, 搖到外婆橋; 1995)'를 촬영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장청과 심청은 주장에 거주하였던 거부들의 삶과 문화를 잘 보여준다.
주장의 건물들은 항(巷)이라 불리는 좁은 골목과 운하로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도시를 이룬다.
우리가 몇 년 전에 주장에 왔을 때는 그렇게 화려한 곳은 아니었는데, 입구에서부터 마을로 들어가는 입장료를 받고 있었으며, 동네를 구석구석 구경을 한 후, 우리 일행이 배를 타고 가면서 노 젓는 여인의 노래 한 곡을 듣고 내리니 그곳에서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민속놀이를 하고 있었으며, 또 밖으로 나오는 동네 초입에서도 민속춤을 추고 있는 것을 보면 관광객을 겨냥하여 새로 만든 냄새가 잔뜩 풍겼다.
그곳 주장에서는 음식이 별로 위생이 좋지 못하다며 서둘러 상해를 향해 출발하였다.
24. 천후실크 견학과 잡화상
우리 일행은 다시 상해로 나와 점심을 먹은 후 3년 전에 가보았던 곧바로 천후실크로 자리를 옮겨 패션쇼를 보고 매장으로 들어가 명주이불 솜과 옷, 스카프 등을 구입한 후 출국을 하기 위하여 푸동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잡화상에 들러 검은 깨 등 몇 가지 등을 구입하게 한 후 푸동공항으로 향하였다.
25. 중국에서의 출국과 광주로의 귀환
우리들은 예정대로 오후 4시 1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출국수속을 밟고 있는데 우리를 광주에서부터 인솔하여 갔던 남해관광 조영인 부장은 황산에서 여권을 잃어버려 우리와 함께 광주로 오지 못하고 그곳 상해에 남고 우리들만 출국 수속을 밟고 광주행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한국 시간으로 오후 6시 45분에 무사히 광주에 도착하였다.
26. 느낀 점과 부언하는 글
이번 여행은 한 마디 말로 표현한다면 정말 좋았다.
황산에서의 이틀에 걸친 산행은 영원히 나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작년 7월에 있었던 제주도에서 가졌던 세미나 때 한라산을 넘으면서 나의 운동 부족으로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1년 동안 걸어서 출퇴근을 한 덕분에 이번에 이틀 동안 산행을 했음에도 거뜬할 수 있어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운동은 계속 할 것이라 다짐하면서 이제는 몸무게를 줄이는데 중점을 두고 운동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 행사를 위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신 이계윤 원장님과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신 양채열 부원장님 이하 정기안 행정실장님을 비롯한 행정실 요원들께 이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전담강사협의회 박남준 회장님과 이하 모든 임원들께도 감사 드린다.
끝으로 부언하고 싶은 말은 중궁을 여행할 때 주의할 점 몇 가지를 적으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
(1) 중국인은 자존심이 강하므로 무시한다거나 손가락질하는 행위 등은 삼가야 한다.
(2) 중국교포 중에는 북한출신이 많으므로 동포로서의 정을 나누는 것은 좋지만, 그 외의 서신 및 기타 행동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3) 중국은 포교활동이 금지되어 있다. 특히 모르는 사람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는 행위는 자칫 타인의 오해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단, 사찰·교회 등에서의 종교 활동은 보장되어 있다.
(4) 만주지역 여행 시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는 과거 고대한국의 지배지역에 관한 토론 및 주장을 자제해야 한다. 특히 공안 당국에서는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5) 공안천국(公案天國)이어서 여자 혼자 여행해도 안전하다는 중국의 치안은 이젠 옛말이다. 우리나라의 치안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지만 우선 중국에서 택시를 타 보면 중국 치안을 실감할 수 있다. 택시강도로부터 운전기사를 보호하기 위해 운전석과 승객석 사이에 유리 벽과 간이 창살이 설치되어 있을 정도이다.
(6) 관광명소나 시내버스 안, 쇼핑센터 등의 복잡한 곳에서는 소매치기를 경계해야 한다. 특히 여권 보관에 신경을 써야 한다. 여권을 잃어버리면 일단 며칠이던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며, 단체 여행이라면 한 사람이 여권을 잃어버리게 되면 모두 다 발이 묶여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7) 우리나라와의 물가가치는 우리나라의 5분의 1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물건 값을 부르는 대로 싸다고 덥석 구입하지말고 물가가치를 감안하여 에누리를 해서 구입해야 한다. 물건 값이 분명 가격이 붙어 있음에도 사는 사람이 외국인 것을 알면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면서 그 금액을 달라고 떼를 쓰기 때문에 흥정을 잘해서 구입해야 할 것이다.
인생클리닉 구 박 사 닷 컴 한국정통역학연구원 * 한국정통작명연구원
춘 강 구 홍 덕 원 장 광주광역시 동구 산수1동 555-7 (산수오거리 부근) 핸드폰 (017) 628 - 7440 홈페이지 : http://www.goobagsa.com E- mail : goobagsa@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