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4세(1643-1715) 의 초상화

'짐은 곧 국가다' 라는 말로 유명한 프랑스 절대군주 '루이' 14세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유럽 대국을 차례로 정복했고, 파리의
남서쪽에 웅장한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하며 부와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시대가 결코 화려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린나이(5세)에 즉위한 '루이'14세의 태평성대에는 절대왕정에 귀족들이 대항했던 '후론드의 난'을 비롯해 내란이 자주 일어
났다. 이후 '루이' 14세는 반항하는 귀족을 통치하에 두기위해 그들을 궁정으로 불러들여 술, 여자, 막대한 재물로 회유하곤 했다.
역시 '태양왕'다운 발상이었다. 그러나 전쟁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 농민의 부담이 커지자 대규모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또한,'루이' 14세는 프랑스 신교도 '유그노'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낭트 칙령'를 폐지하고, 이단자에 대한 대탄압을
시작했다.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단 한 명의 왕, 단 하나의 법, 단 하나의 종교'를 천명한 '루이' 14세에게 신교도는
인정할 수 없는 존재였다. '루이' 14세의 종교탄압은 프랑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40만명이나 되는 신교도의
망명으로 프랑스 자본이 회외로 대거 유출 되었기 때문이다. 1690년의 전염병,흉작,수많은 세금 등은 국민들을 굶주림
으로 몰아 넣었고 그 결과 서서히 시민운동이 일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루이' 14세는 이 밖에도 극단적이고 잔혹한 면을 많이 보였다. 1674년 왕은 여자를 밝히는 자신의 행동은 아랑곳 않고,
'몸을 파는 창녀들의 코와 귀를 하나도 남김없이 도려내라' 며 병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는 '루이' 14세가 궁정의 고해
신부로 부터 '여자를 농락한 죄를 속죄하라' 며 여러번 독촉을 당하자, 딜래마에 빠진 끝에 벌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의 호색적인 성격은 고쳐지질 않았고 평생을 그렇게 살았 다고 한다.
첫댓글 루이14세 라면 얼른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고급 브랜디가 생각난다. 이술은 부드러우며 다른 제품에서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맛과 향을 가진 고급 술로 알고 있는데 정작 루이 14세는 그 술과는 맛이 다른 사람이내요.
한장군님 ! 지난 여름휴가를 기하여 경남 삼천포항에서 거한 술판이 벌어져 그 귀한 '루이' 14세가 즐겨 먹었다는, 아니믄 그의 이름을 도용한 술이름도 고약한 '루이' 14세 의 찐한 향을 맡을수 있었다고 댓글에 올린적이 있지요 ? 그때 한 장군께서는 중국돈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계산 해낸 기억이 있읍니다. 그것 별것 아니듯이 실은 '루이' 14세 왕도 내란 때문에 스트래스 많이 받아 여자를 밝힌지도 모를 일이지요 .동서 고금을 통하여 제왕이 여자를 밝힌건 당연 지사로 받아 들였지요. 우리나라도 임금은 여자 앞에서는 수취심을 모른다고 했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