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안씨(耽津安氏) 구보(舊譜)서문
이목은(李牧隱)이 근재(謹齋)의 세 아들이 과거에 오름을 축하하는 시서(詩序)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근재선생의 아드님으로 지금 밀직(密直)으로 있는 분은 나와 동년진사(同年進士)
이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나의 선군(先君;先親)께서는 3형제가 과거로 출세하여
재상(宰相)의 지위를 이루었으며, 내 아들도 세 사람이 모두 요행히 과거에 급제하
였고, 문성공(文成公)의 손자인 정당공(政堂公)도 세 아들을 두었는데, 또한 모두 과
거에 올랐다.’ 하였다.”
위의 정당공은 바로 겸재공(謙齋公)이니, 겸재공이 세 아들을 두심은 위와 같이 명
백한데도 다만 순성군(順城君) 한 분만이 족보에 보이고 있는 것은 자손들이 흩어져
있어서 보첩을 만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선군자(先君子;先親)께서는 일찍이 회헌선조(晦軒先祖)의 연보(年譜)한 편과 시문
(詩文)및 제현(諸賢)들이 기술한 것을 뽑아서 합하여 {실기(實記)} 한권을 만드셨
는데, 주자(朱子)의 연보에 세계(世系)를 겸하여 붙인 예를 따라 세계를 기록하였다.
이때 보성(寶城)의 종인(宗人)인 모모(某某)씨가 죽성(竹城)의 세보(世譜) 한 책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었는데, 그 책에는 ‘별장공(別將公)을 시조(始祖)로 하였고, 겸재
공의 아드님인 순성군을 장자로 하였으며, 죽성군을 차자(次子)로 하였다. 죽성군은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시호(諡號)가 문혜공(文惠公)이었는데, 국가에 공로
가 있어 죽성군으로 옮겨 봉하였다. 그리하여 그 자손들이 죽성군을 처음 봉함을 받
아 옮긴 시조로 삼고 족보를 따로했다. 하였다 그렇다면 순흥안씨의 족보에 함께 기
록하지 않음은 진실로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제 초계(草溪)의 종인(宗人)인 석기(碩璣)와 사흡(思翕)씨가 또 그 집안의 세계 한
책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었는데, 그 책에는 ‘순성군(順城君) 죽성군(竹城君),탐진군
(眈津君)을 같은 형제로 하고, 탐진군은 공로로써 탐진군으로 옮겨 봉해졌으므로, 그
자손들이 옛 족보에 기재되지 않았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목은(牧隱)의 시서(詩序)
에 말씀한 ‘정당공의 세 아들이 과거에 올랐다.’는 말씀은 여합부절(如合符節)한 것이
다. 애석하게도 세대가 점점 멀어짐에 보첩을 구비하지 못하여 자손들이 각기 관향을
달리하여 순흥안씨와 함께 족보를 하지 못함이 애석하다.
석기, 사흡 두 종인은 탐진군 이상은 관향이 순흥임을 자세히 기록하여 선계(先系)가
나온 바를 분명히 하고는 나에게 한 말을 써서 책머리에 기록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나는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이에 선군자(先君子)께서 일찍이 죽성군 자
손의 파보에 서문을 쓰신 예를 따라 대략 그 전말을 써서 후일 고증하고 신빙하는 자
료로 삼게 하는 바이다.
순성군의 후손 진사(進士) 명옥(命玉)은 삼가 서(序)하다. [원문] 謹按李牧隱賀謹齋三子登科詩序有曰謹齋先生之嗣今密直公穡同年進士也嘗曰吾先君三昆李季由科第顯致位宰相吾子三人皆僥倖末第族祖文成公之孫政堂公有三子皆亦登第云政堂公卽謙齋公也謙齋公之有三子若是其明曰昭然而只有順城君一人見於譜者由子孫散在譜牒未裒世系之例載錄世系之時寶城宗人某某甫來示竹城世譜一冊其書以別將公爲初祖而謙齋公子行順城君爲長竹城君爲次官門下待中諡文惠有功移封竹城君其子孫因以竹城爲始封移籍之祖而別其譜則順興之譜未之同錄者固無足怪也今者草溪宗人碩璣思翕甫又來示其家世系一本其本以順城竹城耽津爲兄弟而以功移封耽津君故其子孫不載於舊譜云則牧隱詩序所云政堂公三子登科若合契惜乎世代逾遠譜牒未備其子孫各爲異貫不與同譜於順興也碩璣思翕兩宗人備書耽津君以上貫順興以明先系之所自出要不忙一言以弁其卷首辭不獲謹依先君子序竹城君子孫波譜例略書其顚未以爲後日考信之資云耳
順城君後孫 進士 命玉 謹序
[출처 : 순흥안씨 선계 변정록(順興安氏先系辨正錄)]
안명옥(安命玉)은 위 서문에서 진사(進士)라고 했는데, 한중연의 생원시 방목에 나온다. 부친이 회헌실기 [ 晦軒實記 ]를 간행했다고 했는데, 부친 안재묵(安在默)이 바로 회헌실기를 2차 간행한 사람이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70호 합천 두방리 탐진세고 책판 (陜川 頭方里 耽津世稿 冊版) 설명문에 보면 위 안명옥의 족보 서문은 탐진세고 말에 실려 있는 것이라 한다. 실제 족보는 간행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탐진세고 (耽津世稿)의 미간행 필사본에는 1849년 김기찬의 서문이 있다고 한다. 위 안명옥의 족보 서문은 간행된 탐진 세고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미간행 필사본에 있는지 모르겠다. 안명옥이 족보 서문을 지은 연대는 1849년 이전으로, 탐진세고 서문(1849년)과 비슷한 때인 것같다. 안석기(安碩璣)·안사흡(安思翕)은 탐진세고를 편집한 사람들이기도 하므로 이들이 안명옥에게 보여준 탐진안씨 세계도는 탐진세고 (耽津世稿)의 세계도(世系圖)와 같은 것으로 판단된다.
첫댓글 순성군(順城君 諱 元崇) 후손 안명옥의 탐진안씨구보서문(耽津安氏舊譜序文)이 중요한 것은 죽성군(竹城君 諱 元衡)
파와 탐진군(耽津君 諱 元璘)파의 선계(先系)를 순흥안씨와 연결한 연유를 설명하는데 중요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판서공 휘 종약 선조님의 후손중 JT씨가 1546년 병인보라고 확인된 족보의 복사분을 확인해 보니 기해보 원본의 복사본이었습니다.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소득이 있었는데, 목은선생의 하죽계안씨 삼자등과시서 내용 기록이 있었을뿐 아니라 순성군 할아버지의 아들(휘 원, 조동, 수)들의 기록이 있었으므로 글자 한자가 빠졌다는 이론은 잘못입니다. 기해보의 원본이 조금 귀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낭설이라 생각 합니다. 분명히 원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