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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判公(從遂)子孫表 | ||||||||
10세 | 11세 | 12세 | ||||||
克明 | 從 生 | |||||||
從遂 | 宗 仁 | 節 度 公 | ‣生卒=1458(世祖4)〜1533(中宗28) 76세 ‣관작(官爵)=武科 북병사겸오위도총부부총관병조참판(北兵使兼五衛都摠府副摠管兵曹參判) ‣묘소=나주시 다시면 신석리 분토동 亥坐 双塋 | |||||
宗 義 | 襄 翼 公 | ‣生卒=1462(世祖壬午)〜1520(中宗庚辰) 59세 ‣관작(官爵)=시호(諡號=양익공(襄翼公) 1506년 中宗反正에 공을세워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4등 공신병충(秉忠奮義決策 翊運靖國4等公臣秉忠) ‣묘소=나주시 다시면 신석리 분토동 東麓 癸坐 | ||||||
宗 禮 | 黃 州 公 | ‣生卒=보첩 기록이 없음 무후(無后) ‣관작(官爵)=武科 통정황주목사(通政黃州牧使) ‣묘소=다시면 신석리 분토동 西麓 書堂洞 合塋 ※配=瑞興金氏에서 딸 1분만 出産, 부설훤부제학 (夫偰諠副題學)출가(出嫁), 4兄弟중에서 黃州公 만 후사(後嗣)가 안계시니 심히 애석(哀惜)한 일이다. | ||||||
宗 智 | 萬 戶 公 | ‣生卒=1467(世祖丁亥)〜1518(中宗戊寅) 52세 ‣관(官)=평산포만호(平山浦萬戶) ※중종이 宗仁=兵曹參判 在職時, 3형제가 모두 조정(朝廷)에서 근무를 하면 老母奉養을 누가 하느냐 하문(下問)하시니 宗智 4째아우가 노모를 모시고 있다 답변 올리니 中宗은, 고로 충신(忠臣)은 반드시 孝子집안에서 배출(輩出)된다 칭찬(稱讚)하시고 종지(宗智)를 평산포 만호에 의망몽점(擬望蒙點=3人이 추천하여 王으로부터 주점(奏點=뽑힘을받음)을 받으섰으나 모친때문에 관직에 부임(赴任)할 수 없다 하여 사양하시다. ‣묘소(墓所)=나주시 문평면 계로리 불로치 壬坐 | ||||||
女 | 興德 | ▶ 장극평(張克平) 子=간(侃) 위(偉) 준(俊) 신(信) 현(俔) 女=李瀚 女金亨必 | ||||||
女 | ▶ 반순공(潘舜恭) 子= 협(俠) 희(僖) 女 李仁祚 | |||||||
❏ 克 明
初諱 俊年 고려말 창왕(1388년생)
官 선략장군호분위호군(宣略將軍虎賁衛護軍)
端宗3 甲戌 1454년 3월 9일 卒
증 순충적덕보작공신정헌대부병조판서 함평군
(贈 純忠積德補作功臣正憲大夫兵曹判書 咸平君)
墓 나주시 다시면 신석리 분토동 壬坐
1) 諱克明(世居地 및 자손내력)
(咸平君) 諱克明 祖께서는 고려 창왕3년 1388년에 출생하시고 단종2년 1454년 卒하셨다. 함평에서 출생하셨는데 10세기경 고려가 폐망하자 부친 諱 自寶公을 따라 나주 회진으로 移住하셨다. 회진에서 10여년 생활하신 중, 火災로 가옥이 소실되자 家族이 흩어지게 되셨는데, 백형(伯兄) 諱이(怡)公은 광산으로 移居하시고 둘째 諱극해(克諧)公은 증문으로, 諱 克明公은 나주 초동(莎洞)으로 世居地를 定하셨다. (※현주소=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815번지) 공의 官은 선략장군호분위호군(宣略將軍虎賁衛護軍) 배위는 나주정씨 통사랑 혼(羅州鄭氏通士郞 渾)의 女이시다.
公은 이남이녀(二男二女)를 두셨는데 장자 諱종생(從生)은 정충출기적개이등공신(精忠出氣敵愾二等功臣)한성부좌윤함성군(漢城府左尹咸城君) 贈兵曹判書 시(諡)장양공(莊襄公)이시고, 차남은 諱 종수(從遂)요 선략장군부호군(宣略將軍副護軍) 증 병조참판(贈 兵曹參判)이시며 장녀는 통찬장윤문(通贊張允文)에게 출가, 차녀는 부사 나성손(府使 羅誠孫)에게 출가하셨다.
公은 장자가 이시애란(李施愛亂)(1467년=세조13)을 토벌(討伐)한 공으로 贈병조판서 함평군(兵曹判書 咸平君)에 봉작(封爵)되시었다.
‣ 장자 從生公은 이남일녀(二男一女)두시니 ▸장손은 휘량(良) 동지중추부사겸오위장 함천군전라좌도수군절도사(同知中樞府使兼五衛將咸川君全羅左道水軍節度使)역임하시고 ▸차손은 휘공(恭) 대흥현감(大興縣監)이요, 손녀는 현감 유선장(縣監柳善長)에게 출가하셨다.
‣ 차남 휘종수(從遂)는 사남이녀(四男二女)를 두셨는데, ▸장손은 諱 宗仁公이요 칠도병수사(七道兵水使)역임하시고 내직으로 병조참판 관직을 俸하셨다.
▸차손은 휘종의(宗義)로 中宗反正에 참여하여 1506년에 정국4등공신(靖國四等功臣)함풍군(咸豊君)에 봉작(封爵)되셨으며 이도병마절도사(二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고 贈공조판서 양익(襄翼) 시(諡)를 받으셨다.
▸3손은 휘종예(宗禮)요 황주목사(黃州牧使)를 역임하시고 ▸4손은 휘종지(宗智)요 贈만호(萬戶)로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칭호를 받으시며 평생 부모님을 봉양하시면서 생활하셨다.
휘 극명조께서는 초동에 세거지를 정하신 후, 후손들이 번창하여 조선조에서 현창(舷窓)하여 경락(京洛)의 화족(華族)으로 번성하였다. 공이 卒하시니 나주 분토동(羅州粉土洞)에 安葬하였는데 物形으로 분토옥녀형(粉土玉女形)이라 하고 묘소 앞2개의 산봉오리를 똥매산이라 칭하였으며 그 형상을 분통으로 보았다.
그리고 묘소 앞 방죽을 거울(鏡)로 본것이다.
✤분토동은 나주 팔명당에 해당된다고 한다.
초동 함풍고가는 오백년의 역사를 간직했으나 지금은 개인 사유지가 되어 현대식 건축물로 유구한 역사의 흔적은 찾을 수 없으니 우리 함평군 문중에서는 애석(哀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본내용은 참판공 차종손 재홍씨가 광주종친회 카페에 올린 글을 인용했습니다.
2) 粉土洞 墓所 風水學的 考察
본토동 묘소 간평은 심리적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면!
윗대 조상님들께서 공들여 모신 묘장지인 만큼 풍수학적으로 접근하면 좋은 평가도 있을 수 있고 또 풍수 공부한 입장에서 관조(觀照)할 때, 부족한 부분을 평가할 때 여가 없이 평가할 대목도 있어서 부담스럽기 그지없음을 서두에 천명(闡明)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은 언제나 바른 평가만이 정의롭다는 명제(命題)는 시공을 넘어 과거와 현재 또 조상님께서 하신 일과 後孫이 공부하여 본 결과에 괴리(乖離)가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알리고 또 고칠 수 있는 부분은 고치는 것이 발전의 디딤돌이라는 신념으로 분토동 묘소 간평을 하고자한 취지입니다.
① 다시면의 산세(지형)는 신걸산맥과 백룡산맥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두 산맥이 東西로 구분된 것은 백룡저수지에서 흐르는 물이 한 계수(限界水)로 다시면사무소를 지나 다시시장을 경유하여 곡창지 평야를 지나 영산강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신걸산맥 줄기에 해당되는 마을은 가운리 월명 대룡 흑암 강암 낭동 회진으로 뻗여있으며, 백동 호두 월촌 월곡 초동 정가 신석리 죽지의 지형은 백룡산맥의 연장선의 지형으로 보아야 합니다.
② 粉土洞 토질은 아주 미세한 가루로 보이는 마사토질이며 物形은 粉土玉女形이라 하였는데 사실 물형을 현재 풍수에서는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면 물형이란 산의 모양세를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를 수 있고 또 동물로 보일 때는 동물에 해당되는 형세라 하고 사람으로 보일 때는 인간을 묘사 하고 꽃으로 묘사될 때는 꽃과 연관지어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로 동물은 숙호혈 와우혈 새종류 비봉포란형 비봉귀소형 비학하전형 사람은 장군대좌형 군신봉조형 꽃종류는 목단반개형 연화반개형 등 수도 없이 많습니다.
현재의 풍수학에서는 산의 형상은 木星体 金星体 火星体 土星体(一字文星) 水星体 즉五星体로 분류합니다.
③ 분토동의 우백호는 잘 감아 주고 있으며, 특히 묘소의 案山에 해당되는 금성체는 근거리에 위치하면서도 고압하지 않고 묘소와 유정합니다.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유정하면 속발지지로 평가합니다.
그런데 분토동 지형의 결정적 결함은 방죽을 축조하기 전에는 재물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형국을 보고서 함평군 외손이신 전라감사 권혁공이 방죽을 파도로 한 것은 물 빠짐이 급하게 된 지형을 보고 비보풍수를 적용한 것입니다.
※ 조선시대의 왕들과 사대부 권신들은 풍수실력이 대단했습니다.
풍수에서는 墓所의 坐向과 得水 破口를 매우 중시합니다.
휘 극명 묘소 坐向=壬坐, 得水=坤申, 破口=乙辰으로 裁穴하였습니다.
물은 右旋水 우측에서 좌측으로 흐르는 지형입니다. 즉 자연의 本態性이라 하겠습니다.
당나라 국사인 양균송의 88향법으로 보면 壬坐는 右旋水에 사용할 수 없는 법식으로 현재 풍수지리공부하신 분들은 사용할 수 없는 향법이라고 평가하겠지만 우리나라의 역사적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초기에는 삼합풍수로 매김 질하여서 坤得水 壬坐 乙破는 三合法式으로 조장하였습니다. ※시조 묘소도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휘 宗仁 묘소는 휘극명공 上에 안장되어 있는데 亥坐로 裁穴했습니다.
이 묘소는 조선 중기부터 양균송 88향법을 적용하여서 우선수에 亥坐로 향법을 적용하였는데 상하의 당판에서 전여 다른 좌향을 취하였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방죽을 축조하여 물이 빠지는 무넘기는 인위적으로 乙辰=吉破가 되도록 전혀 다른 반대방향에 만들어 놓았음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인간의 지혜는 잘못된 것을 고쳐 쓰도록 神께서 영특함을 주셨다는 생각입니다.
④ 左靑龍은 중간에서 끊어진 것이 결정적 결함(缺陷)입니다.
특히 끊어진 부분으로 길을 만든 것도 매우 잘못입니다 권혁공이 左靑龍의 形勢를 보고 끊어진 부분을 다른 흙으로 보토(補土)하여 산맥(山脈)을 연결하도록 왜 안했을까 의문입니다. 산맥을 연결하고 난후 도로는 산 너머로 만들었으면 비보가 되는데 이 부분은 특히 종손 자손들에게 나쁜 결과가 미치는 형세입니다.
⑤ 분토동의 묘소 배치를 보면 제일 상단에 興德 張克平 묘소가 함평이씨 조상님들을 내려다보는 묘소 배치가 되었습니다.
분토동 묘소 간평론의 가장 껄꺼로운 대목입니다. 시대 상항을 살펴보면 흥덕장씨 家로 시집가진 할머니의 지략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함평군 후손으로서는 매우 못마땅한 대목입니다. 즉 할머니로 인하여 묘소의 위계(位階)가 망가졌습니다.
휘극명공 묘소 상에 종인 손자가 올라 있고 정작 참판공 당신의 묘소는 기맥이 약한 한적한 곳에 영면(永眠)하고 있습니다. 부녀지간의 거래가 매우 잘못된 결과 입니다.
풍수지리 공부한 후손의 입장에서 보면 張克平公의 묘소로 인하여 분토동 조상님 묘소 배열이 비정상적으로 되었다는 점은 설명이 불가한 피해로 보아야 합니다.
묘소를 조성할 때. 한 벌안에 여러 조상님을 모시는 경우는 위계를 감안하여 역장(逆葬)(※윗대 위로 자손의 묘소를 조성한 것)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君臣之間의 자리가 분명한 것은 물론이요, 가족지간도 부자의 자리가 다르고 직장도 上下位置가 엄격하듯 음택(陰宅)도 위계질서(位階秩序)는 신중히 해야 합니다.
장씨댁 할머니가 천광(穿壙=관 구덩이)에 물을 안 부었다면 제일 상단에 휘극명공께서 位하시고 그 下로 자손들이 安葬하였다면 묘소 發福은 말할것도 없고 참판공이 무기력한 장소에 계실 이유가 없습니다.
분토동 묘장지를 보면 첫 단추를 잘못낀 인과라 할것입니다.
흔히 역사가 잘못되면 잘못된 역사를 질타합니다.
작금의 분토동 묘소 배치는 잘못된 역사여서 어려운 글을 올립니다.
참판공 만호후손 계연
▶池湖水가 없으면 財物이 가파르게 빠져나가므로 권혁공이 築造하도록한 裨補風水
다.
▶ 무넘기를 인위적으로 乙辰方向으로 흐르도록한 破口處다.
▶ 萬年 향화지기의 분토동 묘소 전경
※(2014년 묘소 사초작업을 하여 현재의 모습과 좀 다를수있으나 묘소 배치
및 석물은 변함이 없다))
▶ 金星體의 案山이 안정감이있어보이며 유정하다.
▶ 참판공 諱종수公 묘소
▶靑龍脈이 끊어진 부분
▶ 紛土洞 墓域 동영상